136명의 집: Beams At Home 2 - 훔치고 싶은 감각, 엿보고 싶은 스타일
빔스 지음, 김현영 옮김 / 라의눈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행복한 삶이란 남들이 정해 둔 기준, 혹은 시장이 기획한 트렌드에 얽매이지 않고, 참된 자아가 원하는 바가 뭔지를 정확히 짚어낸 후, 자기 스타일,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두스 비벤디를 열심히 표현하고 살아 나가는 그 과정에 있지 않을까요? 이런 책을 보고 드는 느낌은 확실히 이런 쪽입니다.

이 책은 무슨 마사 스튜어트라든가 이효재 씨 같은 일류 살림꾼들이나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들, 혹은 트렌드 세터들, 유명인들의 작품(=사는 모습, 혹은 연출된 리빙스타일)을 각 잡고 촬영한 화보집은 아닙니다. 사실 처음엔 그런 책인 줄 알고 폈습니다만, 그런 쪽이라기보단 오히려 우리들 평범한 일상인들이 집에서 자기 흔적 자기 개성 찾아가며 그 나름의 스타일을 필사적으로 만드는 모습과도 그리 멀지 않았다고나 하겠습니다.



학교 다닐 때 보면 꼭 무난하고 흔한 소재로 두드러진 멋을 내는, 특별한 센스쟁이들이 꼭 있어서 "어떻게 하면 적게 돈 들이고 저런 효과를 낼까" 하는 주변의 부러움을 자아내곤 했죠.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도 말하자면 그런 분들입니다. 136명의 모범이 책 한 권에 다각도로 "찍혀" 있으니, 눈 크게 뜨고 열심히 훑으면 내가 따라할 만한 롤 모델이 적어도 한두 분은 발견될 겁니다. 사실 "한두 명" 정도가 아니라, 심각하게 연구해 보거나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응용 가능성을 키우고 싶은 예가 스무 명은 훨씬 넘은 것 같습니다.



136명은 어떻게 뽑힌 이들인가. 한국에는 아직 이런 형태의 소매점, 스토어가 대중적이지는 않고, 부유층이 밀집 거주하는 일부 구역(아니면 홍대 같은 특수 상권)에서만 간간히 보일 뿐인 소위 "셀렉샵"(혹시 청담동 같은 데 있는 분더샵이나 디스클로즈 이용해 보신 분들이 있을까요?)이, 일본에서는 이미 30여년전부터 널리 프랜차이즈화하며 대중과 호흡을 맞춰나가기 시작했죠. 이 책의 앙케이트 대상이 되어 자신만의 리빙 스타일을 당당하게 공개한 분들은 일본 빔스의 직원들입니다. 점주도 있고 스탭도 있고 디자이너도 연구직도 있으며, 나이 기준으로도 초로에 접어든 분, 갓 입사하여 사회 생활의 첫걸음을 뗀 분, 학부형 연배로 이제 이 기업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 분 등 다양합니다. 근무지도 (당연히) 일본 번화가나 지방의 지점인 분들이 다수지만, 대만이나 태국에서 샵을 운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빔스의 직원분들은 직장이 아닌 "집"에서 어떻게 하고들 사는가(직장에서의 모습이야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만). 가장 자연스럽고 인위적 긴장이 다 빠져나갔을 때야말로 그 사람의 가치관, 개성, 취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겠으며, 이들이 혹 가성비 높게 자신만의 멋을 가꾸고 드러낼 줄 아는 센스쟁이들이라면 바로 이처럼 "집에서 퍼져 있을 그때"를 엿봐야 그 비결을 훔쳐낼 수 있지 않을까, 책의 기획 의도는 여기 있는 듯합니다.



아울러, 직장에서 직원들이 마음껏 즐기면서 밥벌이를 하게 해 주는, 직원들의 일과 삶이 하나되는 직장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해 주는, 빔스 특유의 기업 문화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홍보하려는 목적도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고객에게 도시 생활의 멋과 지향 그 최신 트렌드를 신뢰 가는 감각으로 "편집"해서 제안(여러 기업과 디자이너의 브랜드를 에디팅하여, 분명한 컨셉을 잡고 한정된 공간의 샵 안에서 판매)하는 직종이야말로, 직원 개개인의 기를 살리고 흥을 키워 주지 않으면, 그저 오너나 임원진의 밀어붙이기 식 경영으로는 도저히 유지가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매장마다 입지 조건, 주된 고객층의 니즈에 맞춰 제각각의 개성을 키워 나가야만 영업의 지속성, 혹은 유행을 선도할 수 있는 기업 이미지가 유지되겠죠.



도심에서 조금은 떨어진, 간단히 채소나 화훼를 가꾸고 재배할 수 있는 한적한 공간에 (임대든 자가소유든) 자신만의 터전을 가꾸고 사는 분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이런 분들은 무엇보다 "내 공간 안에선 내 마음대로 인테리어를 꾸려 나갈 수 있고, 가끔은 친구들을 불러 수다도 떨 만큼 모이기 편한 곳"이 주거의 첫째 기준이더군요(이런 걸 보면 빔스 직원들에 대해 갖는 일반의 이미지와는...). 물론 이런 대답을 하는 쪽은 미혼이거나 아직 젊은 직원들입니다만, 나이 든 이들도 대개 영혼이 자유로운(설문에 대한 다른 답을 보니 그런 인상이 들었습니다) 분들이 이런 패턴을 추구하는 것 같았습니다.



빔스가 의외로 오래된 기업임을 실감할 수 있는 게, 특히 젊은 직원들을 보면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일하고 싶었다"거나, "빔스에서 알바생으로 일하다 정직원으로 뽑혔을 때 너무 기뻤다" 같은 소박한 대답을 읽을 때였습니다(이런 대답은 대개 빔스 자체 생산 브랜드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더군요). 아마도 이 책을 비교적 어린 나이에 읽고, 오빠 언니들의 자기 개성 물씬 묻어나는 당당한 모습을 보고 동경을 가진 독자라면 아마도 취업 적령기에 기업 빔스 입사를 설레는 마음으로 시도할 것입니다.

우타가와 마이코 씨(34)는 비슷한 취향을 지닌 또래 남성과 결혼,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는 빔스 가와사키 지점의 프레스입니다. 집에서 지인, 자매, 친척들을 자주 불러 넉넉히 식사대접을 하는 게 즐거움이라는 그녀가 손님 대접하는 모습을 보면, 사람은 확실히 비슷한 취향과 개성을 지닌 이들끼리 모이는 법이란 점 실감하게 됩니다. "멋진 사람들을 자주 만나 발전의 계기, 자극을 받는 게 빔스에서 일하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주저없이 대답하는 그녀는 준비된 빔스우먼이자 빔스가 잘 키워낸 성공적인 인재임에 틀림 없습니다.



시부야 지점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는 나쿠모 코지로 씨는 올해 쉰을 넘긴 최고참 중 한 분입니다. 다른 직원들도 그렇지만 이분 역시 집안 인테리어를 가꿔 놓은 감각이 예사롭지 않은데, 그 소품 중에는 평소부터 관심 가진 분야를 집중 분석한 원서(그 자체가 멋진 가구이기도 한)들부터 한국식 보자기, 조각가 하시모토 마사야의 작품, 젊은 시절부터 소중한 참고서 구실을 했을 플레이보이 잡지 등 다양한 아이템이 포함되어 있네요. 빔스에 입사한 계기를 묻는 질문에는 "너무 오래되어 잊었다"는 쿨한 대답으로 공란을 채웁니다. 나이 든 직원들은 "이 나이를 먹도록 다닐 수 있는 직장에 무슨 불만이 있겠냐"며 소략한 답을 내놓는 게 보통이던데요. 이런 답은 그 행간을 따로 짐작하게 만드는 고맥락 소통의 기법이기도 합니다.

빔스 직원들은 고객과 밀착된, 1차 집단식 소통에 능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알바로 매장에서 일할 때부터 특정 고객과 스타일에 대한 진지한 상담과 자문을 맡고 아이템을 제안했는데, 정직원으로 채용되었을 때 축하를 보내 온 이후 계속 연락하고 지낸다는 경우도 있고, 매장에서뿐 아니라 온라인상에서도 친분을 이어가며 자신(빔스 직원으로서)이 연출한 스타일 전체를 (마치 연예인의 그것처럼 높이 평가하며) 모두 채용했을 때 매우 감동 먹었다는 고백도 적혀 있습니다. 여튼 이런 분들이 집에서 해놓고 사는 스타일을 보면 그 편안하고 느슨한 분위기에 일단 의외다 싶다가도, 사진을 차분히 뜯어 보면 이건 확실히 자기만의 결이 있는 패턴이란 각성이 확 다가옵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이게 그리 만만히 볼 책이나 구성이 아니다 싶어 긴장이 느껴지기도 한 그런 독서였습니다.

사람은 결국 같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고 공동체에 일정 기여도 하면서, 동시에 동료들부터 받은 평가와 평판, 소통을 통해 그 존재가치가 결정되는 존재입니다. 더군다나 도시에서 수많은 개성과 지향 사이의 줄타기를 해야 하는 이들에게, 자기 스타일의 표현이란 가장 내밀한 공간에서조차 뭔가 자기 확신, 자기 확인을 위한 유의미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직장에서의 모습이 남을 위한(그게 직무의 일부가 될 수도 있으니요) 표현이라면, 집에서의 모습은 내 스타일과 내 개성의 밀도가 어느 단계까지 이르렀는지, 나의 행복과 자존이 지금 어느 지점에 머무르는지를 정직히 드러내는 유일한 척도입니다. 직장에서의 성취가 집에서의 행복과 일체를 이루는 136인의 "비무스 피플"들의 모습은 이런 이유에서 독자들(특히 한국인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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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스타트업 바이블 - 세계 최고의 투자자가 전하는 성공하는 창업가의 조건
리샤오라이 지음, 나진희 옮김 / 살림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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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start-up)이란 말도 요즘은 너무 흔히 쓰여 모호어법으로도 충분히 대상 특정이 가능함을 보여 준 좋은 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1998년 외환위기 후 "창업"이 일상용어화한 것과도 비슷합니다. 그전까지 "창업"이라 함은 <삼국연의>에서 손씨 가문의 동오 건립 정도 되는 활동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소 한 마리 끌고 상경한 어느 유명한 국졸 청년의 개업 정도를 화제에 올릴 때나 쓰인 말이었죠. 하긴 자신의 미미한 시작이 반드시 창대{昌大)한 창업(創業)이 되리라는 기대를 잔뜩 투영한 어법으로 보면 또 충분한데, 기대가 기대로만 그치지 않으려면 튼실한 준비가 또 필요합니다.

스타트업 그 시작은 미미하여도 끝이 "창대", 다른 말로 위대하려면 일단 창업자의 아이디어부터가 위대해야 한다고 저자는 아주 단적으로 짚으며 시작합니다. 다른 말로 풀면, "안 위대한 아이디어로는 창업을 아예 시도하지 말라"게 저자의 지적에 가깝습니다. 물론 어느 법칙에나 예외는 있어서 다른 장점(하다못해 창업자의 출중하고 투철한 의지, 집념)이 정말 특별하다면 성공할 수 있겠지만, 매사가 의욕만으로 쉽게 개척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외(위대한 아이디어 외)에도 저자는, 1) 일단 스타트업에 적합한 이들은 청년이어야 하고 2) 그 주위에 인재가 충분히 뒤를 받쳐 줘야 한다고 합니다.



1)의 이유는, 스타트업은 본디 실패와 좌절이 밥먹듯 벌어지는 분야라서, 창업자의 나이가 젊지 않으면 그런 실패로부터 다시 재기할 의욕이 안 생기고, 또 패배를 깨끗이 인정할 수도 없다는 겁니다. 청년들은 "내가 부족해서 망한 거다"라며 현실을 지저분한 미련 없이 받아들일(swallow) 줄 안다는 거죠(다른 말로 하면, 감정적 앙금이 계속 남아 있으면 나이가 젊어도 청년이 아닌, 최소한 스타트업에 적성이 맞는 청년은 못 된단 소리겠습니다). 어느 가수(원 공연자, 저작권가 전인권이 아닌, 원로 가수 쟈니 리라고 하는군요)가 부른 노래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라는 가사 한 소절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2)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혼자 힘으로는 창업을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근간 스타트업 전문서나 성공 사례를 담은 책을 읽어 보면 반드시 기량이 출중한 인걸들이 창업자의 곁을 밀착 보좌합니다. 당신은 이런 여건을 갖춘 창업자입니까?

재미있는 지적 또 하나는, 소위 "똑똑함"이란 적성, 재능은 스타트업 성공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저자의 지적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높은 IQ 같은 것은, 나쁜 상황에 닥쳐 축복보다는 재앙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군요. 저자의 근거는 첫째 이런 사람들은 성장을 거부하는 유형일 수 있다(이미 완성된 인재라고 스스로를 여김) 둘째 시련과 실패가 주는 교훈을 감정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질 못하고 현실을 부인하려 애쓴다 등입니다. 제 주변의 경험에 비춰 봐도 백 번 맞는 소리입니다. 요즘 같이 변화무쌍한 세상에선 실패 없이 한달음에 성장하는 타고난 스타트업 천재를 찾아 볼 수 없죠. 다만, 머리가 좋은 이들이 EQ까지 연동되는 경우도 꽤 볼 수 있으므로, 회복 탄력성으로까지 재능계발이 잘 이뤄졌다면(다시 강조하지만 이런 분들이 꽤 많습니다) 당연히 높은 IQ가 강점이 됩니다. 가장 비참한 건 머리도 나쁘고 멘탈도 유리멘탈인 경우입니다.

인재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필요한 자원입니다. 본인이 인재이건, 아니면 인재를 부려 쓰는 입장이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고 저자는 다시 강조합니다. 저는 책이 <...바이블>로 제목이 붙어서 좀 뻔하고 당연한 사항을 잘 정리한 책인가보다 여겼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정리도 잘 되어 있지만 저자가 여담처럼 꺼내드는 이야기에 오히려 체감상 많은 영감이 온다 할까 주변에서 겪고도 예사로 지나쳤던, 그러면서도 의미심장했던 가르침, 토픽이 많아서 그 재미가 오히려 쏠쏠했습니다. 이를테면 헤드헌터가 주로 누굴 노리는가 하는 화제입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삼류들은 아예 건드리질 않고, 이류, 경력 가꾸기에 따라 일류로 충분히 부상할 수 있는, 다만 현재는 만만하고 평범한 이류를 주 타깃으로 삼는다는 거죠. 그 다음 말이 걸작인데 "이렇게 지목받았다는 사실에 우쭐거리고 만족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좀 모자란 이들이다"입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성장이 끝났다(나는 완성된 인재)"고 여기는 마인드셋이야말로 실패에의 직행 통로라는 점입니다. 벌써 이런 지적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사람은 요즘 같은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는 수준으로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당신에겐 이런이런 기능이 필요합니다." "아 그런가요? 지적해 주셔서 감사하며, 목표를 만들어 주셔서 더 감사합니다!" 냉큼 책상으로 달려가(혹은 필드로 나가) 배우고 채워 넣어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당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판에 "이렇게 하면 길이 생깁니다"같은 가이드라도 받는 게 어디겠습니까?

책에는 한국계록스타인 최건의 히트곡 가사도 나옵니다. 우리도 잘 아는 "날카롭게 벼린 칼날" 운운하는 대목인데, 저자는 문제의 핵심을 한눈에 파악하는 능력의 절실함, 귀함 등을 떠올릴 때 이 가사가 함께 연상되는가 봅니다. 성공하는 설문 조사는 질문을 날카롭게 만들어야 합니다(이 점에서, 제가 며칠 전 읽은 "혁신가의 질문" 즉, 질문 설정이 문제 해결의 반이다 같은 주장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시장에서 과연 대중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이는 정말 놀라운 직관으로 한눈에 캐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날때부터 타고난 재능에 지나지 않을까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정주영 창업자 같은 이인데, 이분이 학식이 뛰어나다거나 심지어 기술적 IQ가 그리 높은 타입도 아니었습니다(그 동생분들이 그런 유형이었죠). 그의 비결은 "자나깨나 그 문제만 생각한다"였습니다. 이게 성심성의라고 봐도 좋고 근면성실로 이해해도 됩니다. 이 책도 "고객의 니즈에 그 누구보다 집중하고 진심으로 접근하라"고 합니다. 결코 평범한 주문이 아니라는 건 무엇인가를 놓고 자나깨나 그것만 생각해 본 사람은 다 압니다.

개인의 저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꼭 성공하라는 법은 없는데, 사업가들의 성공 사례를 보면 꼭 종잣돈 이야기를 합니다. 이 종잣돈이 어리면 어릴 때 모이고 수중에 쥐어질수록 유리합니다. 이게 안 되는 사람은 (이 책뿐 아니라 어느 스타트업 책에서도 강조하는) 앤젤투자자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그런 투자자의 눈에 잘 드는 것도 재능이라면 분명한 재능입니다. 그 재능 요소 중 하나로 "절묘하고 적확한 비유 능력"을 저자는 드는군요. 아이템도 컨텐츠도 없으면서 말빨만 키우라는 소리가 아니라, 속에서 차고넘치도록 키운 아이디어를, 남과의 소통 과정에서도 (적어도 있는 제 가치나마 그대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단 뜻입니다. 저자는 또 재미있는 지적을 하는데, "평균적인 투자자는 똑똑하다고 봐야한다"입니다. 가망 없는 투자처에는 결코 돈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며, 그런 똑똑한 투자자는 당신을 가망없는 스타트업으로 여겼을 수 있다며 자신을 언제나 객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어설픈 투자자 흉내만 내고 현자 코스프레, 소설 속 주인공 행세에 재미 붙인,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얼빠진 인간도 있으니 이는 창업자 본인이 현명히 필터링할 과제입니다.

엔젤투자가가 마음에 두는 걸, 왜 창업자까지 염두에 둬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야 그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책 7장은 그런 사항까지(즉 투자자가 이 책을 읽을 때 충고해 줘야 할 사항까지) 차근차근히 알려 줍니다. 첫째 리드투자나 팔로투자나 투자하려는 사업의 구조에 따른 리스크는 동일하며, 투자처가 실패할 시 돈을 날린다는 점은 같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리드투자는 어지간히 판 전체를 보는 안목이 있은 후에야 감행하는 거지, 어설픈 직관력이나 만용으로 함부로 달려 들 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리드투자라고 해서 원금 보전이 잘 되는 것도 아닌데(당연한 소리죠), 뭐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미개척지에 뛰어들겠냐는 겁니다.



둘째(책에서의 순서는 이보다 앞이지만), 투자가와 투자를 받으려는 사업 주체는 지향하는 가치관이 동일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심지어 "비슷해서도 안 되고 완전히 같아야 한다"고까지 합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게 어차피 불확실성은 누구의 진로 앞에나 전개되는데, 투자자에게 납득이 가는 판단과 전략으로 (설령 돈을 날려도 날려야) 타격이 적겠기 때문이죠. 아무리 실패로부터 회복탄력성이 뛰어나야 한다고 해도, 거금을 날리고 멘털이 온전하기란, 누구한테나 가슴을 저며파는 시련에서 쉽사리 재기하기란, 결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건 나라고 해도 별 수 없었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야 상대와 나를 동시에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꿈을 실현하게 돕는 게 투자자"라는 말은 많은 경우 공염불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창업자의 실패는 많은 이들로부터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상대적이긴 합니다). 반면 투자자의 실패에는 다들 무관심할 뿐 아니라, "때에 따라 경멸의 대상까지 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지적인데 참으로 날카롭다 하겠습니다. 이래서 투자자의 선택은 몇 배는 더 신중해야 하고, 스타트업 경영 주체가 "이 정도 사업 이점이 있으니 이 비즈니스 모델로 밀어붙여 보자!" 같은 과단성을 미덕으로 유지해야 하는 것과도 차별됩니다. 이런 투자자의 입장을 창업 주체로서는 언제나 이해해야 하며, 자신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음을 반드시 투자자에게 납득시켜야 합니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은 많은 경우 수적 우세가 곧 진리인 줄 아는 완고한 믿음과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저자는 강의를 하면서 참으로 황당한 체험을 하는 게, 분명히 틀린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그 틀린 생각이 머리 속에 자리를 잡으면, 아무리 더 유력한 논거가 나와도 자신의 신조가 맞는 줄로 우긴다는 겁니다. 이들은 많은 경우 우쭐함이나 지적 우월감까지 보이며 일단 우기고 보는데, 빼도박도 못한 근거를 들어 보여 주면 승복이나 하는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머리 속에 논리나 건전한 판단 기제가 갖춰져 있지 못하고, 어떤 권위자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베껴서 기준으로 삼는 이들이죠. 그런데 그런 "권위"조차, 객관적으로 사회가 인정하는 권위이면 그나마 나은데, 그게 아니라 알고 보면 자기가 주관적으로, 막 느낌으로 부여하는 그런 권위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남을 인정하고 치하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높이는 일종의 "환각, 놀이"에 빠진 거죠. 이런 사람들한테 사업상의 중요결정권을 주면 나도 망하고 남도 망하는 겁니다.

책의 문장은 마치 서양인 석학이 쓴 것처럼 우아하고 논리를 갖춘 스타일이라서, 근 십 년 동안 쏟아져 나오는 흔한 중국 대중서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자 자신의 실제 경험을 많이 소개한, 피부로 느껴 온 스타트업 애로를 차분히 들려 주기 때문에 지루하질 않습니다. 이 책을 읽고 확실히 느낀 게, 중국이나 우리나 착각, 오류에 빠져 있으면서도 무조건 완성된 자신의 판단이라며 우기는, 자신도 망하고 남도 해롭게 하는 어리석은 유형이 꼭 있다는 겁니다. 성공하려면 이런 자들의 어리석음도 극복해 나가야 하고, 혹 나 자신 속에도 저런 "바보"가 도사리지는 않는지 철저히 점검한 후 즉시 축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자기 반성, 새롭고 절실한 지식은 무엇이든 소화하여 내것으로 만들려는 집념, 상승 의지 등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저자분이 비트코인 신봉자라는데(단, 이 책 본문에는 언급이 적습니다) 그간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고 저도 좀 다시 이 분야를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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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 평전 - 격동기의 경세가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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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우리가 막연히만 알고 있던, 저자 김삼웅 선생의 규정에 따르면 "격동기의 경세가" 중 한 분인, 의암 손병희 선생의 평전입니다. 의암에 대해서라면 천도교계의 지도자라든가, 개화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분 정도로 아는 게 고작이었습니다만, 이 책을 통해 의암의 생애에 대해서는 물론, 강점기 초기 핍박받던 겨레의 현실에 대해서, 또한 나라가 쇠망해가던 시절 민족의 지도자들이 어떤 정신적 열의와 구체적 수완으로 민족의 명운을 구하려 드셨는지 그 행적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 중 하나가, 의암께서는 중인 가문 출신이며, 그것도 적자가 아닌 서자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김삼웅 선생도 본문 중에서 각별히 언급하는 바가 있습니다만, 정확히는 첩의 자식이 아니라 본처 사망 후 다시 맞이한 재가녀와의 결합에서 태어난 경우인데, 여튼 크게 보아(물론 왜곡된 유교 도그마의 파생적 폐습입니다만) 서얼의 범주에 드는 출생이므로 그를 보는 눈이 고울 리 없었습니다. 이 책 중에도 나옵니다만 가문의 제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그에게 문중의 어른들이 방해의 언동을 보이자 위력과 당당한 언사로 맞받아치는 그의 모습이 나옵니다. 서얼 출신이라는 점이 여전히 사회적 활동에 장애가 되었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통념상으로는 신덕왕후 강씨의 자녀들을 "서자"로 몰아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방원이 이 원칙을 세웠다는 통념과 달리, 김삼웅 선생은 명백히 전거를 들어 가며 "서얼, 천출이었던 정도전이 난을 일으켜 질서를 어지럽혔으므로 향후 이들의 출사를 금고한다"는 정확한 유래를 밝히고 있다는 점입니다. 뭐 정도전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어떤지는 구태여 재론이 필요 없겠고, 김 선생의 저서는 이처럼 주제에 대한 명철하고 폭 넓은 분석뿐 아니라 역사 주변 지식에 대한 정확한 상기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여튼 요점은 이게 아니라, 한 개인의 자아실현을 옭아매는 요인으로 시대적 상황(국운이 멸망의 시점에 몰림), 개인적 한계(서얼 출신) 둘을 동시에 짚어 가며 개인사와 역사의 입체적 분석을 도모하는 저자의 바람직한 서술 방침입니다.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의 문하에서 의암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책은 꼼꼼한 서술을 이어갑니다. 재미있는 건 우리가 잘 알듯 백범 김구도 청년 김창암(창수) 시절 동학 조직에 몸 담아 번잡한 실무를 맡으며 평판을 쌓았는데, 갓 입문한 시절 손병희를 먼발치에서 보고 이후 <백범일지>에 당시를 회고한 대목이 있다는 거죠. 책은 <백범일지>에서 해당 대목을 발췌, 인용하는데 독자로서는 정작 <백범일지>를 읽는 동안에는 무심히 넘긴 부분에서, 이처럼 의암의 생애를 조명하는 맥락으로 새로운 의의를 찾아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인용문에서 백범이 의암을 "최시형의 사위"라고 말한 건 백범 자신의 착오이며, "청년"이라고 표현하지만 백범보다는 의암이 15년이나 연상인데다 사회 생활을 백범 못지 않게 일찍 시작한 그이기에 이무렵이면 까마득한 선배이자 스승에 가까운 위상이었겠습니다. 김연국에 비해 젊어 보였다는 뜻이겠고, 김연국은 사실 의암보다 겨우 4년 연상에 지나지 않으니 초췌한 그의 풍모까지 짐작되는 바 있습니다. 부처님도 아끼는 제자에게 화장실 청소부터 시켰다는 일화가 있듯, 해월 최시형도 일부러 시험하려고 의암에게 온갖 까탈을 부렸는데도 묵묵히 지시를 따르는 그의 인품에 감탄했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그 앞에도 나오지만 의암은 청년 시절부터 혈기가 엄청난 성격이었다는 점, 우리 독자는 상기할 필요가 있죠(이런 분들이 대개 나이보다 좀 젊어 보이기도 합니다).

책은 이후 갑오농민혁명 양상을 잠시 언급합니다. 녹두장군 전봉준과 의암(역시 두 분이 나이 차가 크게 안 납니다) 사이의 간단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인연을 소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죠. 여기서도 저자는 1) 과연 전봉준은 동학 교도였음이 정확한가 2) 남접과 북접의 치열한 갈등은 과연 사실인가(혹시 일본 당국의 편견 섞인 자료에 지나치게 의존한 인상은 아닌지) 등에 대해 객관적인 의문의 시선을 던집니다. 이런 부분이 참 유익했고요, 앞으로 학계의 연구가 좀 더 필요한 이슈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배운 내용에 대해 너무 의심 않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죠. 물론 의심과 비판, 전복과 재정립도 기존의 성과를 바탕으로 해서 이뤄져야 "근본 있는" 태도입니다.

책에서도 그런 서술이 있지만 이 동학운동 진압 과정에서 일본 병력의 손에 의해 수십만 명이 학살되었고, 이 정도 시련을 거쳤으면 동학 조직이 거의 궤멸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주 최시형은 혹독한 문초 끝에 (책에 사진이 나오는 대로) 목숨을 잃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헌데 어떤 곡절인지, 동학 조직은 이후 재건에 성공하고, 손병희 선생이 망명(문제가 있는 표현입니다만- 적국에의 망명이 있을 수 없으니 - 저자의 견해대로 다른 마땅한 대체 용어가 없어 서평에도 그대로 씁니다)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도, 4만에 가까운 인파(모두 동학교도는 아니었겠으나)가 몰렸다는 점으로 보아 이 의암의 놀라운 수완으로 조직이 보기 좋게 부활한 듯합니다("듯하다"는 건 독자로서 제 개인의 시각입니다).

손 선생의 "망명"은 사실 조정(고종의 대한 제국)이 워낙 역적이라며 핍박을 가했기에, 반정부 인사로서의 망명이라면 그나마 맞는 구석도 있는 표현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책을 조심스럽게 읽을 필요가 있는데요. 일본 당국의 허술하고 부정확한(저자의 표현입니다) 보고서를 길게 인용하시는데, "...여러 여인을 거느리고 돈을 물 쓰는 듯하는 태도로 보아 한국 정부에서 원조를 받거나 따로 큰 자금줄이 있는... " 같은 부분을 우리 독자들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암은 1912년에도 메이지 일왕의 죽음을 애도했고, 이후에도 따로 일제 당국에 거금을 기부하여 조직의 안위를 꾀한 바 있습니다. 물론 워낙 배포가 크고 멀리 내다보는 시야를 지닌 인물이라 지엽말단의 행보를 두고 전체를 평할 수는 없습니다만(그래서 저자도 "경세가"란 표현을 쓴 겁니다), 객관적으로 확실한 건 그의 수중에 돈이 상당히 많았다는 겁니다. 일제에 돈을 내려 해도 지닌 돈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또 1900년대 초반의 망명기에도 여튼 그가 현지에서 돈을 넉넉히 쓴 건 사실처럼 보입니다. 이런 수완 좋은 인물의 빼어난 조직 경영 능력이 아니었으면 동학 조직이 그 결정적인 위기를 버텨 내지 못했으리라는 게 상식에 비추어서도 타당합니다.

저자도 아쉬움을 표하는 행적 중 하나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한반도 패권을 둘러싸고 본격 충돌의 조짐이 보이자, 의암은 "기왕 나라의 명운이 기로에 놓인 것, 승전국에 가담하여 향후 발언권을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단으로 당시 참모총장 다무라와 접촉, 러시아와의 결전에 병력과 자금 등을 지원할 계획이 실행 단계에까지 접어들었던 사실입니다. 사실 독자로서도 뒷맛이 개운치 않았습니다만, 이때만 해도 향후 역사의 전개가 어떤 국면까지 갈 지 알 수 없었으며, 의암으로서는 어디까지나 민족의 자존을 지키는 한 방편으로 택한 길이죠. 참고로 책 첫머리에는 재미있는 일화와 함께 소개된 곽씨 부인이 나오지만, 사실 생전에 의암은 부인을 여럿 둔 바 있습니다. 그 중 우리가 잘 아는 분은 동학의 지도자이자 독립 운동가를 겸했던 여걸 주씨 부인이죠.

한편 그와는 별개로 제가 흥미롭게 본 건,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일본의 승리를 점쳤다는 사실인데, 1) 원거리에서 물자와 병력을 나르는 러시아군에 승산이 없다 2) 일본은 문명이요 러시아는 야만이니 전자가 승리하는 게 필연이다 같은 그들 나름의 근거였습니다. 특히 2)에 대해서는 유럽과 전세계가 오히려 반대 시각으로 파악하는 게 대세였는데 우리 조상들의 날카로운 통찰을 입증하는 바인지는 좀 더 생각이 필요하겠습니다. 참고로 러일 전쟁 발발 직전에도 이 교활하고 음흉하기로는 첫째를 다툴 두 나라는 로젠- 니시 협정(양국 외무 당국자의 이름입니다)을 맺어 시간을 벌 속셈이었는데, 이 책에는 "서(西) 로즌 협정"으로 표기되었으니 행여 오해는 없어야겠네요.

의암의 친일(미미합니다만) 행적을 완전히 상쇄시켜 주는 일등 공신이 한 명 있는데, 우리가 (의암만큼이나 이름이 익은) 일진회 리더 이용구가 바로 그 장본인입니다. 이용구는 본래 의암이 매우 아끼던 후배 중 한 명이었는데, 어쩌다 가장 못된 길로 진로를 틀어 민족 자존의 훼손은 물론 동학 조직의 약화, 의암 개인의 속을 톡톡히 썩이는 행보로 악명이 자자했습니다. 이놈을 두고 악질 친일파로는 우리가 잘 알지만, 마치 석가모니의 가는 길마다 훼방을 놓았던 제바달다 캐릭터와도 같았던 면모는 이 책을 통해서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여튼 이런 놈 때문에 우리가 의암의 진면목도 오해 없이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의암은 중국에 체류할 당시 아직은 확고한 명성이 없던 손문(쑨원)이라든가 원세개(위안스카이) 등과도 만나 교류를 텄다는 기록이 이 책에 잘 나옵니다. 쑨원은 참고로 의암보다 네다섯 살 아래입니다. 일본에서 그는 이등박문을 만나 엄청난 주량으로 기를 죽였다거나(그러나 이토는 이때 이미 노인이고, 의암은 아직 장년의 나이였으니...), 고종의 사위 박영효를 만나 그 방종한 처신에 호통을 쳤다거나 하는 일화가 책에 실려 있습니다. 이 일화들은 의암선생사업기념회에서 출간한 다른 전기에서 저자가 재인용한 내용인데, 독자로서 믿고는 싶습니다만 그런 일화가 당시 크게 회자되었다는 정도로 좀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해당 종교 단체의 입장도 강하게 반영된 내용이기도 하겠으니 더욱 말입니다.

앞에 말했듯 의암은 망명 전엔 내내 대한제국 정부와 긴장 갈등 관계였습니다. 러일 전쟁 발발초기 그는 논설을 통해 "...상책은 폐혼입명이겠고 중책은 악정부를 멸하고 신정부를 앞세움이겠으나..." 같은 주장을 합니다. 이 "폐혼입명"에서 "혼"은 당시의 맥락으로는 별 의심의 여지 없이 "혼군, 암군"을 뜻합니다. 그러나 뒤의 "입명(명철한 군주를 세움)"에서 알 수 있듯, 아직은 그가 철두철미한 공화정 사상에까지 인식이 이르지는 않았다는 점도 눈치챌 수 있죠. 이처럼 여전히 전근대적 인식의 프레임에 한 발목이 잡혀 있는 듯한 한계는 김정인 박사의 학위논문(서울대학교) 인용 파트에서도 드러납니다. 참고로 책 중의 그 인용은 손병희 선생의 저술이 아니라 김 박사의 논문 일부이며, 말투가 옛것이라 혹시 착각하는 독자들이 없었으면 합니다(^^). 여튼 이러던 게 귀국 후에는 <만세보>를 창간하고, 이인직의 <귀의 성> 등 신소설을 연재케 하는 등 유연한 처신으로 고종에게 은사금까지 받았던 사실은 그의 정치적 수완이 매우 빼어났음을 잘 드러내 보입니다.



김삼웅 선생의 평전이 언제나 그렇듯 다양한 자료를 철저히 분석한 후 적시적소에 인용하는 학문적 태도가 돋보이는 책이기도 합니다(p35 중간쯤의 "들어낸→드러낸" 같은 오타는 아마도 이이화 선생 책 원문의 오류인 것 같네요). 이 책의 완독을 독자가 치를 떨며 이루는 게 되는 주된 이유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대로 3.1운동(이 명칭에 대해서도, 그저 고종의 인산 일자를 앞둔 단순 일자를 표시하는 게 아니라, 삼위 일체 등 신학문 신문물의 세례를 받은 그의 식견에 따른 보다 의미깊은 해석이 나옵니다) 이후 일제의 의해 주동자로 몰려 유죄 판결을 받은 후,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한 폐인이 되어 풀려난 후, 후유증으로 서거하시는 그 참혹한 과정에 있습니다. 후손으로서 이런 대목을 접할 때면 참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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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생애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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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사람도 아니고, 무슨 생각이나 의지나 생리 작용이나 번식 욕구 같은 게 있어서, 그 생멸 주기에 대고 "생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누가 이렇게 여긴다면 그거 (좋게 말해 줘서) 아주 소박한 생각일 뿐 아니라, 프랑스 등 서유럽에서 얼마나 많은 추상적 개념들이 "의인화"하여 치열한 인문 담론의 핵심을 이루는지 캄캄히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기까지 합니다. 작가나 저자들이 그런 표현을 쓰는 건 독자로서 익숙해져야 할 분위기일 뿐 아니라 자기(독자) 사유의 내실을 다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누구라도)아주 순진해진 채로 이렇게 되물어 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정말 유령처럼 허공을 떠돌다가, 뭔가 엮일 듯 말듯 관계의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 맴도는 두 남녀(혹은 셋 이상)의 마음과 몸 속으로 쏙 들어오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이 한번 끼어든 사람과 관계가 어쩜 그리도 전과 쌩판 다르게 바뀔 수 있을까?"



이승우 선생님의 문학적 개성을 두고 어떤 평론가는 "요설의 미학"으로 지적한 적 있습니다. 대개 요설이란 독설이나 궤변과도 통해서, 사람이 말을 갖고 부리는 게 아니라 말이 사람의 혀를 조종하는, 악의, 기만, 조롱, 정복 등 불순한 목적과 통하기도 합니다. 꼭 그 정도까진 아니라도,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사르트르 등 천재적 지능과 사유의 근성 때문에 실제 인생에서 고통 받은 이들의 상흔과도 연결되는 게 이 요설입니다. 헌데 이승우 선생의 요설은 이런 예들과는 대척점을 이룬다 할 만큼 반대의 빛깔입니다. 본래 한국 산문에서 이런 요설을 즐겨 구사하는 분이 잘 없기도 하거니와, 이승우식 요설은 오만한 셰프가 투박한 서민의 혀를 길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이데아의 미각"을 가혹하게 상기시키려는 과시적 조련의 수단이 아니고, 그와는 정반대로 "이 구수한 된장국도 알고 보면 분자 단위로 쪼개 볼 여지가 있다니께?" 같은 훈훈한 휴머니즘으로 인도하는 길잡이 구실을 합니다. 마치, 왕릉 근처에서 선희한테 "믿음이 안 가게 생겼어도 내 말을 진즉 들었어야제!"를 말하는듯한 노인(이 작품 속의 단역 캐릭터 중 한 명)의 미소처럼 말입니다. 요설 끝에 따뜻한 공감과 격려가 기다리고 있다니 그 자체가 역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 이승우 선생의 작품 속에서 만나는 건 또 언제나 그런 풍경들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추상명사와 모호한 개념을 앞세워 말을 위한 말을 그저 지적 우월함의 과시 방편으로 삼아 공해처럼 지어낼 때, 이승우 작가님은 정말로 궁금해서 독자의 손을 잡고 "저 멀리 뭐가 있는지 끝까지 가서 확인해 보자는 듯" 된장국 같은 요설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따라가는 독자도 (잠시 헤맬망정) 그의 권유와 지도가 어렵게 느껴지질 않습니다. 이런 분, 이래 왔던 분이 이번엔 "사랑"을 주어로, 주제로 삼아 장편을 내놓으셨으니 이거 안 펼쳐 볼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처럼 요설도 많고 철학도 끼어들지만, 또 언제나처럼 "캬 맞어."하는 공감과 뿌듯한 각성으로 끝납니다.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자면 결국 화해와 포용, 제 갈 길에로의 복귀가 이뤄지는 익숙하고 푸근한 결말입니다. 삼각관계라고 해도 칙칙하거나 저속한(다른 작품에서 이런 설정으로 시작하는 건 있습니다만) 느낌이 전혀 안 듭니다. 결국은 누구나 나름 뭔가를 얻고 무대에서 퇴장합니다(심지어 우리 독자들까지).

등장 인물은 몇 안 되고, 그의 전작들에서 주로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나이는 다들 먹은 축들이고, 어쩜 근간 중에는 좀 젊은 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장님" 영석 씨는 사십을 좀 넘긴 듯하고,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이 보이는 선희 씨는 그보다 십 년 가까이 연하이며, 항상 작가님의 작품에 한 자락 걸치는, 뭔가 페르소나 같은 주인공이 또 있어 줘야 하는데 이 장편에서는 그게 형배 씨입니다. 나이는 선희보다 두 살 위라고 하네요. 그리고 이들과는 좀 다른 세상에 사는 연애도사, 연애지상주의자 준호, 역시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또 특히나 다른 세상에 사는 민영 정도가 주요 캐릭터들이며, 그 외 완전 단역 같지만 의미심장한 기능을 맡은, 한복집 사장님인 형배의 모친, 그리고 형배의 생부 등이 전부겠습니다. (아니, 그 생부와 눈이 맞아 가정을 파탄 낸, 사진 속에서만 등장하는 묘령의 여인이 또 있네요)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는 게 과연 맞는 말인가? 사랑이 무슨 구덩이라도 되어서 거기 빠지기나 한단 소린가? 오히려, 사랑이 사람에 빠져들어온다고 해야 맞지 않은가? 저도 아주 예전 학교에서 fall in love (with)란 숙어를 배울 때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요. 묘하게도 이 표현은 뒤에 "함께"란 뜻의 전치사 with가 같이 딸려 옵니다. 이 책 중에 인용되는 유명한 카프카의 말처럼, "그녀와 함께도 살 수 없지만 그녀 없이도 살 수 없다" 같은 모순당착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사랑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이 작품의 핵심 토픽 중 하나는 "자가당착, 역설, 모순"이기도 한데요. 예를 들어 감옥에서 나가고 싶지만 동시에 감옥 안에 안착하고 싶은 게 죄수의 심리라는 말도 있고, 사랑을 갈구하지만 동시에 "사랑에 대한 배신(자신이 시원찮게 사랑을 하면 그건 사랑에 대한 모독이란 의미에서)"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멀리하게 된다는 갈등, 나아가 사랑하는 이(상대방)의 배신을 믿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그간 불안불안 여겨온 고뇌에 대한 보상, 과연 내 의심이 근거가 있었군 같은 분노에 대한 정당화 때문에 맹렬히 질투, 격분으로 자신을 빠져 들게 하는 결의, 이 모두가 모순이고 아이러니인데,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이런 양가적 감정의 함정 속에서 허덕입니다(일단은).

다만 저는 마지막 것, 즉 믿고 싶지 않은 배신을 보상심리 때문에 믿어버린다는 심리는, 특히 영석처럼 결핍의 생을 살아온 이들에게만 고유한 일종의 병리가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간 혼자 속 썩은 내 자신이 부끄러웠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게 됐네!"라며 분노를 과연 폭발시킬까요? 어설픈 한 마디 해명이라도 상대가 해 주면 그 실낱 같은 가능성을 믿어버리고 마는 게, 사랑에 빠진, 아니 사랑이 빠진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선택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이른바 언어의 태(態. voice. 수동태/능동태 하는 것), 상(相. aspect. 주체와 객체의 관계) 같은 그래머 이슈를 (어려운 말 쓰지 않고) 여러 번 다룹니다. 앞에서 "사랑에 빠지냐, 아니면 사람이 빠지냐?"도 그렇고, 꿈은 꾸는(능동) 게 아니라 꾸어진다는 말씀도 그렇고(예리하지 않습니까?), 이런 학설 대로라면 우리말 뿐 아니라 영어 문법도 그 기초부터 다시 재점검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한 마디 거들자면 결코 능동이 아닌 걸 능동처럼 표현하는 인간의 언어적 기만에는 그를 만회할 만한 강렬한 무의식이 근본 동인이었다고 둘러대는 게 또 가능하죠!

태와 상의 이슈를 끌어대며 화자가 들려 주는 사색, 요설 중 가장 근사한 건, "사랑은 강요지만 주체도 목적도 없고(원 나!) 객체만 존재하는 그런 강요이다."였습니다. 사실 주체가 있긴 한데 운명, 숙명(사랑이 세팅한)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속에 쏙 들어온 "사랑"이고, 이 역시 화자가 처음에 깔아 둔(가르쳐 준) 전제 중 하나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구걸은 목적이 있어 그 목적이 달성되면 끝나지만, 구걸 그 자체가 목적일 땐 중단될 수가 없다." 마치 갈릴레오의 사고 실험에서처럼, 방해물이나 다른 힘의 작용이 없다면 영구히 지속되는 관성의 마력을 보는 것 같군요.

끝없는 역설, 역설을 가능하게(비록 비가시적 세계 속이지만) 만드는 건, 역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그 반물질(antimatter)로서 악(惡)도 간혹 (먼 거리에서나마) 동반하는데, 이 악 역시 인간의 (어설픈) 의지의 수단으로 쓰는 게 아니라, 주객이 전도되어 오히려 인간의 의지를 수단으로 부립니다. 화자는 <오셀로>의 이아고를 들며, 상관 오셀로가 자신의 아내를 건드리지 않았음을 그 교활한 이아고가 모를 리 없었음에도, 의심을 억지로 지어내면서까지 그 장대한(...) 모함의 서사시를 꾸려 가는 과정을 두고, 모든 것을 수단으로 부리는 "악의 능동성"을 지적합니다.

안티테제로서 악이 이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그만큼 테제로서의 사랑이 온갖 기적(앞서 말한 모든 역설 역시 부분적으로는 다 기적입니다)을 낳을 만큼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게 마련이니요. 이런 사랑은 그럼 보편적 원형이 따로 존재하는 건가, 아니면 역시 개개인에 따라 다른 개성의 사랑, 사랑, 사랑이 자기만의 색깔을 뽐내며 인력과 척력의 장난 속에 연분을 맺기도 하고 흐트리기도 하는 건가. 형배 씨는 보편을 믿고, 도사님인 준호 씨는 자신의 실전 경험에 비춰 그런 게 있을 리 없다며, 어설픈 스토이즘으로 자신의 비겁을 위장하지 말라며, "주면 그저 먹으면 될 뿐"이라며 자신의 도를 설파합니다. 모든 여자는 그녀만의 장점이 다 있는 거라고, 내가 사랑과 연애의 달인인 건 그런 저마다의 매력을 기막히게 알아 봐 주는 그 각별한 미각 덕분이라고, 아주 흡인력 있게 형배(와 독자)를 향해 썰을 풀어댑니다. 이런 건 제가 아는 어느 바람둥이의 지론과도 통해서 동의를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좋아?" "모든 여자. 이 여자는 이래서 이쁘고 저 여자는 저래서 이뻐." 연애와 사랑에 서툰 자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뭐 하나 고정된 이상형을 머리와 가슴에 박아 둔다는 겁니다. "삶(생명, 곧 사랑)"이 가장 싫어하는 게, 죽은 듯 고정된 융통성 없음입니다.

준호 씨의 지론에 따르더라도, 사랑이 보편자인지 개별태인지에 대한 해답은 사실 안 나오는 셈입니다. 보편자가 개체에 침투하면, 그 개체의 개성에 맞게 다른 방식(매력)으로 작용하는지 또 알게 뭐겠습니까? 여튼 이런 준호 씨도, 민영을 만나고부턴 사람이 달라지고 확고한 신념, 라이프스타일부터가 변합니다. 진짜 사랑에 한 방 맞은 후로는, 인생의 무덤이라 여겨 온 "결혼"을 더 이상 마다하지 않습니다. 민영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녀와 키(라고 쓰지만 읽기는 섹)스를 하기 위해서, 이제 그는 지론과 자신까지를 배반하며 결혼을 서두릅니다. 쿠피도 신, 벗고 다니며 화살을 날려 대는 꼬마가 이처럼이나 짖궂습니다.



이 소설에서 정말 긴 생애를 마치는 모습이 드러나는 인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형배 씨의 생부입니다. 누구 눈에도 무책임하게 보이며 "언젠가는 너도 나를 이해하게 될.."같은 더 무책임하고 철없는 한 마디 때문에 더 큰 짜증을 유발하는, 인생 한번 거하게 헛산 표본으로 보이는 이분의 장례식에, 여태 다른 공간 먼 무대에서 각자의 사랑으로 앓아 대던 모든 이들이 마침내 모입니다. 끓어오르던 감정도 한때고 이제는 무덤덤하게, 우정 비슷한("증명이 필요 없다"는!) 느낌으로 그 눈을 바로 볼 수 있는, "형배면 다야? 선배면 다냐고!(전 이 대사가 참 우스웠던 게, "형배"란 존재가 선희에게 얼마나 큰 존경과 애정으로 자리했[그녀에게 '다'일 수도 있었다는 뜻]는지, 말장난 말고도 여실히 보여 주는 한 마디였기 때문이죠)"의 두 커플은 다시 담담히, 그러나 건전하게 조우합니다. 가장 격렬한 반대 증거(아무렇게나 하고 만남)를 보고도 배신의 확증이라며 익숙한 버림 받음의 슬픈 세레모니(이거 다 자기 말대로 구걸이고 고백입니다. 우리 독자들은 다 알아챘죠)를 (추접하게) 펼치던 징징이 영석도 다정하게 넥타이를 매어 주는 그녀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치 망자의 일생 동안 그 몸에 들려 사련(邪戀)을 부추기던 이 사랑이란 녀석이, 이제 다시 엉뚱하게도 준호로 숙주를 옮겨, 반짝이는 눈빛을 선희로 향하게 하는군요.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죠?" 낯섦과 설렘이야말로 사랑의 뚜렷한 징후라고 이미 화자는 복선을 저 앞에서 깔았습니다(아는 사람도 다시 낯설어져야 사랑이 싹튼다며). 생애를 마친 듯 다시 한 생애를 바로 시작하는, 이 녀석의 난잡한 수작이 또 시작되었군요. 위력이 상당히 강하니 모두 조심들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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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의 사람들
발레리아 루이셀리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사람은 누구나 중력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신이(神異)한 능력을 가진 이를 묘사할 때 상투적으로 "물 위를 걸었다"는 표현이 쓰이듯, 무거운 지구의 끌어당김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 사람은 이미 모든 속박과 굴레와 아픔과 고뇌로부터 초탈한 존재나 마찬가지겠습니다.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사는" 같은 말이, 높은 이상을 품고 살아도 현실의 제약을 무시할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비슷하죠. 현실의 한계를 유념해야 꿈도 이룰 수 있다는 게 물론 상식인데(마치 중력장의 위력이 우리 모두의 상식에 속하듯), 혹시 정반대로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요?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공중부양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미 허공을 떠 다니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혹은, "꿈은 (언젠가)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이미 꿈은 이뤄졌다든가 말이죠.

이제는 삼십대 중반을 넘긴, 북미 일대와 널리 스페인어권에서 단연 주목받는 멕시코 여성 작가인 발레리아 루이셀리가, 아직 서른이 되기 전 완성했던 장편이 반갑게도 한국말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불교 철학에서 "제법무아" "제행무상"을 말하는 것처럼,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걸 제 생존의 편의를 위해 색(色)을 가르고 경계를 지르는 망동을 사람은 일삼아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본문 중 쉴새없이 등장하는 문학가, 예술가들, 그들의 작품, 또 작품들 속에 쓰인 상징과 기호(대부분 서유럽과 미국, 간혹 남미 스페인어권 소속)의 방대한 인용을 잠시 잊는다면, 이런 동양적 세계관을 진하게 환기시켜 주는 주제를 담습니다. 주제만 그런 게 아니라 소설의 형식마저 그에 걸맞게도, "빠르게 교차하는 미니쿠엔토들이 태피스트리처럼 직조되며(역자 후기에서의 표현입니다)", 서로 멀찍이 떨어진 시공간을 넘나듭니다.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핵심 줄기는, 사이가 좋았다가 멀어질 뻔하다, 다시 가까워지는 듯하며 서로를 잃어버리고, 기묘한 계기를 밟아 다시 만나는(?) 어느 가족을 다룹니다. 이야기만으로만 좇으면 매우 단순하기 짝이 없죠.



"다시 만난다"라는 표현은 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자께서는 후기의 해설 속에서 이 작품의 구조를 크게 N, N1, N2의 세 갈래(의 층위적) 서사로 나눌 수 있다고 하십니다(이하, N 등은 소설 본문 속이 아닌 역자님의 표기, 규정입니다). N에서는 주인공이 여성인데, 그녀는 시나리오 작가인 남편과의 사이에 "중간아이"와 "아기" 두 자녀를 둔 엄마, 아직 유아인 둘째에게 (때로 아주 힘들어하며) 수유를 해야 하는 꼼짝없는 평범한 주부입니다. 다만 그녀는 허름한 출판사에서 엉터리 번역(본인 스스로 이 일을 한다고는 안 했지만, 사연의 진행을 보면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쁘다고나 해야) 등 출판 쪽 일도 하기 때문에 맞벌이 비슷한 사정이었으나, ..... (이후 어떻게 되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길요)

N1은 이 여성이 N 속에서 써내려가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중간아이(자기가 붙인 이름인데 이유는 스스로 그럴싸하게 대더군요)와 남편이 함께 읽기도 하는데(참여는 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과 등장인물들도 역시 같습니다. 즉 남편, 중간아이 등 가족이라든가, N 속에 나오는 주인공 여성의 친구(근데 이게 실존인지 환영인지가 모호하죠. 어차피 구분이 의미가 없다지만)들도 고스란히 등장합니다. 나중에 가면 어느 게 N이고 N1인지 더 뒤섞이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독자들은 머리를 써 가며 "가만, 이게 소설(속 소설)이 아니라 액자인가?"라며 헷갈려하지 않습니다(SF라면 그래야 하는데요). 오히려, "아 N과 N1을 나눌 필요가 없구나. 그냥 읽어내려가야 더 편한 하나의 이야기였구나."하고 깨닫게 되죠. 이 규칙을 알아야 이해가 빠르다는 게 아니라, 작가가 이를 자연스럽게 독자한테 납득시켜 준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소설(=소설 속 소설)이 현실(소설)이고, 현실이 소설이란 뜻입니다.

꿈은 이루어지나요?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돕...는 건 아니고ㅋ, 자기 실현적 예언이란 말이 있죠. 물론 물리계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지배하기에, 부정적인 기대는 현실화하기 쉬워도 그 반대는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이 비슷한 뜻으로 작품 중에 나오는 말 중에, "인생에서 배운 쓰디쓴 교훈은 다만 너무 늦게 깨닫게 되기에, 교훈으로서도 별 쓸모 없는 게 대분이다"라는 게 있기도 합니다. 여인은 처음에 꼭 갈 필요도 없는 필라델피아 출장을 우기는 남편("시나리오 작가가 왜 촬영 현장에 따라가야 하지?")을 의심합니다. 미래의, 혹은 가상의 배신에 복수하기 위해, 여인은 선제적으로 자신의 소설(N1) 속에서 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심지어 여자(사람)친구와도 친구 이상의 관계를 가집니다. 여전히 이 완성 중의 소설을 읽는 남편은 이제 불안해하고, 어디까지가 소설인지 계속 따져(그러나 소심하게) 묻습니다.

"그걸 왜 궁금해해?" 이 말은 아내가 저 소심한 남편에게 되묻는 질문이 아니라, N2 속의 힐베르토 오웬이 눈먼 늙은 괴짜에게 듣는 말입니다. 오웬은 맨해튼 체류 시절 호머 콜리어(앞의 장님)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먼저 듣습니다. "이봐, 아직도 자네의 미래가 기억 안 나나?" 미래가 어떻게 "기억"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오웬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지만 노인의 저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를 딱히 여기며 노인은 다시 한 마디를 던집니다. "자네가 쓴 글을 보란 말이야."

아내는 이제 남편과 아주 사이가 멀어지고, 급기야 남편은 짐을 싸서 그녀를 떠나기까지 합니다(여기까지는 N에서의 메타적 언급이 있으므로, N1만에서의 사정임이 확실하죠). 여인은 초대를 받고 방문한 장소에서, 일련의 미술품에 한참 시선을 빼앗깁니다. 웬 뚱뚱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작품의 창작자가 자신이라며 집에 초대를 하는군요. 나흘 정도를 머무는데 처음에는 이 뚱보가 발기가 잘 안 되어 애를 씁니다. 뚱보의 몸집에 걸맞은 거대한 욕조 안에서 혼자 놀기 심심해진 그녀는 친구 다코타를 불러 남자를 그녀에게 인계합니다.. 자, 이 모두는 아직도 그녀가 쓴 소설(N1) 속에 머무는 내용일까요, 아니면 소설 속으로 빠져 나와 자기 실현을 시작한, 상위 서사 N의 일부일까요? 여인은 소설을 통해, 그간 불길히 여기다 못해 기정사실화해 버린 미래의 한 줄기를 현실로 만들어버린 걸까요?

"엄마, 아빠가 바퀴벌레처럼 작아져 보이질 않아, 찾아야 할까봐." 그런데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바퀴벌레는 마치 카프카의 <변신> 중 그리고리처럼 제법 클 수도 있고, 어쩌면 이 작품 후반부에서 공포를 독자에게 선사하는 꼬리 없는(잘린?) 고양이만한 덩치일 수도 있습니다. 느닷 작아져 아이 눈에 안 띄는 남편은, 정말 그녀가 예언처럼 작성한 소설 속의 서사처럼, 서로의 감정상 거리를 반영하듯 멀어졌는지(줄어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인은 전철을 타고 출퇴근합니다. 어두운 통로를 달리는 열차의 차창을 응시하면 일부는 바깥이 보이고, 일부는 유령처럼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이 보이는 게 당연하죠. 헌데 여인은 자신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실존 인물 오웬, 즉 힐베르토 오웬을 보게 됩니다. 이때부터 소설 속에는 N2가 다른 섹션으로 깔리고(사실 이는 독자의 오해인데, 그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오웬은 청년기, 부유한 가문의 여인과 잠시 가정을 이루다 이혼하고 "전 아내"를 "상처 입고 재능을 비로소 꽃피운 유명 인사"로 만들어 준 후 굴욕감에 떠는 중년기, 그리고 (호머 콜리어를 만난 후 그처럼 눈이 멀어 버린) 노년기, 이렇게 세 시기의 자아가 교차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따라서 이 소설은, 그 지분 1/3을 가진 주인공이 이 힐베르토 오웬인 셈입니다.

힐베르토 오웬은 물론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그 멕시코의 시인이 맞습니다(철자는 Gilberto인데, 스페인어라서 e, i 앞의 g는 ㅎ처럼 읽습니다. 장군을 "헤네랄"이라고 하는 것처럼). 멕시코인인데 성이 오웬인 이유는 부모가 아일랜드인 이민자 출신이라서입니다. 말하자면 콜롬비아 보고타(아내의 출신지)에서나, 맨해튼에서나, 자신의 무덤을 미리 본 필라델피아 어디서나 이방인으로 머물렀던 셈이죠. 이런 그가 "사진에 안 찍히고 맹인 눈에는 오히려 보이는" 유령인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하겠는데, 생전에나 사후에나 유령인 그가, 현대 미국에서 (역시 이방인으로 사는) 주인공 여인과 전철에서 기묘하게 조우한 것 역시 당연합니다. 참고로 하필 전철(의 창)이 첫 만남을 위한 장소로 등장한 건, 이 작품 중에도 인용되듯 오웬이 뉴욕의 전철에서 느낀 강렬한 위화감(아니, 친밀감)과 관계 있습니다. (물론 에즈라 파운드의 그 작품 역시 교묘한 맥락으로 환기됩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젊은 시절 동거했다거나, 필라델피아에서 노년을 보냈다거나 멕시코 부영사로 근무했더거나  하는 부분은 실제 오웬의 삶과 일치합니다(물론 세부적인 장면은 다 작가의 상상이겠지만). 헌데, 젊어서 날씬하고 매력적이었지만 다 늙어서 눈도 멀고 볼품없이 살도 찐 이 노인은, 의욕의 한계를 느끼며 애써 이룬 가정도 다 해체되어가던 그 순간 여인의 집 한 구석에서 "중간아이"에 의해 "발견"됩니다. 우리는 이미 여인이 오웬과 동일인물이란 사실을 눈치챘는데요. 둘은 성별도, 속한 시대도 사는 공간(일부가 겹치긴 하나)도, 심지어 생사 여부도 다르지만, 인격의 동일성을 유지, 아니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에서, 오웬은 알고 보니 바로 자기 남편(이거 스포일러일까요...)임이 "발견"되니, 세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진정한 경계 해체, 그리고 피안과 차안, 나와 너, 이승과 저승, 죽음과 삶이 화해하는 순간입니다.

"죽음과 삶은 관점을 달리했을 뿐 결국 같다." 저는 그런데 이런 논리가, 작품 중에도 나오듯 sorites의 역설로도 해결 가능하다고 봅니다. 머리가 십만 가닥 있는 사람은 대머리인가? 아니다. 그럼 그 사람보다 한 가닥 적은 사람은? 역시 아니다. 이런 식으로 수를 하나하나 줄여나가면, 결국 머리가 하나도 없는 자 역시 대머리가 아니라는 결론이죠. 우리는 누구나 매 순간 조금씩 늙어갑니다. 늙어간다는 건 생명의 원기가 몸 속에서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처음 만난 유부녀를 끌어안으려다 마구 구타당하던 시점의 오웬은 이미 죽은 목숨인가요? 창 밖을 내다보며 수음하던 시절의 날씬한 청년(오웬 자신)보다는 죽음에 가까워졌지만, 그렇다고 죽은 건 아닙니다. 이미 살아도 산 게 아닌(눈도 안 보이고 가족들로부터도 배제된) 오웬이 아직 죽은 게 아니라면, 유령으로서 여인과 소통하는 오웬도 죽은 게 아니라는 게 작품의 논리입니다.

trustafarian은 스페인어는 아니고 영어 어휘입니다. 부유하면서도 지레 겸손한 척 격식없는 척 가난한 예술가연하는 젊은이를 뜻하는데, 별로 젊지는 않지만 N1에 잠시 등장한 저 뚱보(여자를 자기 집 욕조로 초대했던)도 그런 타입이고, N2의 젊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도 여튼 젊은 시절에는 그런 삶을 보낸 게 맞습니다(이 사람은 진짜 재능있는 예술가였지만). N1과 N2에 이처럼 겹치는 요소가 많으니, 이 두 하위계열 서사는 이미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N과 N1은 처음부터 경계가 모호했으니, 이 세 서사는 결말에서 역시 하나로 통합됩니다. 호머 콜리어의 말처럼 과거와 미래 역시 구분의 필요가 없는 하나였으니 더 거리낄 게 없겠고요.

역자 후기가 끝난 후에는 작가 루이셀리가 2014년 한 잡지에 작품 해제 삼아 직접 쓴 글이 하나 더 실려 있는데, 여기서 작가는 막 취학할 무렵의 자신이 (아직 냉전의 긴장이 가시지 않은) 서울에 체류하며 외국인 학교(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의 기억을 털어 놓습니다. 한국어판만을 위한 기고는 아니지만 여튼 이 때문에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죠. 여기서 그녀는 외교관 자녀로서 겪은 여러 추억을 털어 놓는데, 힐베르토 오웬도 말년에 원치 않게 부영사직을 지냈으므로 두 인물(오웬과 작가 루이셀리) 사이에 교차점이 또 하나 마련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권말의 이 짧은 글이 "N 0(제로)" 정도로 다가오던데, 어차피 우리가 중력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서사의 층위, 국적, 성별 따위는 다 무시할 권리가 있기도 하니 이게 독단적, 자의적 규정이라고는 생각 안 되기도 하고, 이 멋진 작품을 끝까지 즐긴 독자의 특권이기도 하겠습니다.

삶의 해체를 글쓰기로 이겨낸다는 게 대강의 요약이겠지만, 사실 해체와 복원(혹은 재생)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할 것 같네요. 작가(주인공)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그 유명한 서두를 언급하는데, 거기서도 crack-up과 break-down은 의미가 상반되는 두 부사(파티클)로 같은 외연-내포를 이룹니다. 이처럼 상충되어 보이는 게 알고보니 하나라는 깨달음은 이 소설에서 여러 모로 중대한 암시를 던집니다.



소설 속에서는 "엉터리 번역" 이야기가 나오지만(이는 미국 안에서 영원한 타자로 살아야 하는 라티노들의 비관적 인식과 각성을 상징합니다. 미국인들은 영원히, "가까운 이웃"을 오해하며 살고 그 오해의 틀과 경계에서 결코 안 빠져 나오려 드는 거죠), 이 한국어판은 너무도 풍성한 후주(라기보다 아예 작품 해설)가 달려 있어 독자의 이해를 친절히 돕습니다. 오웬의 작품에 대한 주코프스키(객관주의 유파 시인. 오웬과 거의 동년배였습니다)의 번역이 새로 발견되었다며 가짜를 지어낸 그녀의 대담한 행동을 보면, 마치 고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가 생각나기도 하며, 또 그만큼이나 방대한 문학적 상징이 작품 곳곳에 녹아든 모습입니다(이래서 역주가 중요해지고요). <푸코의 진자>에서 장난스러운 주인공들은 위조 문서 때문에 목숨을 잃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쩜 근원의 각성과 화해, 평화, 해탈을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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