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
도재기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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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는 겨레가 지난 역사 동안 일궈낸 소중한 문화적 성취를 집약하여 담아낸, 선조와 후손이 물건으로 만나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존재(그것이 미물이든 고등 생명체이든)라 해도 근원, 뿌리가 없이 무(無)에서 솟아난 실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가깝게는 몇 대의 직계 존속, 멀리는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이웃을 한 씨앗과 밭에서 틔워 낸 아득한 조상님들까지, 나보다 시간적으로 앞서는 어떤 고마운 분들의 앞선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들이 힘찬 활력으로 현재를 채우며 사는 것이지요. 그런 고마우신 조상님들의 은공을 매 순간 되새기며 개체의 책임을 느끼고 성실한 발돋움을 이어가려면, 영광 혹은 간난에 가득찬 지난 역사를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보는 것보다 더 좋은 자극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반만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배달 겨레라고는 하지만, 그 장구하고 내실 있는 내력에 걸맞을 만큼 많은 유물, 문화재가 현재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내려온 것들만으로도 이미 세계 어디에 내놓기 충분하게 자랑스럽지만, 외침과 환란이 많았던 시련의 시기가 짧지 않았던 탓에 멸실, 훼손된 예가 많아서입니다. 이런 아픔 많은 시련을 딛고 현재까지 전해진 소중한 국보들에 대해서마저, 후손된 우리들이 과연 합당한 경건함과 자발적 관심으로 유형, 무형의 대접을 베푸는지는 의문입니다. 문화재청에 의해 "국보"로 지정된 품목들 중, 과연 몇에 대해서나 정확한 이름과 내역, 소재지 등을 댈 수 있을까요? 이는 주입식 암기형 지식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애정과 경외감, 적절한 존경심을 품고 있을 때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기본 소양입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조상님들의 은덕과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국보들의 실제 모습, 소략하나마 그 내역에 대한 이해가 절로 마음 깊은 곳에 이뤄져 있을 법합니다.

국보는 그 정확한 명칭, 소재지, 연혁에 대한 파악이 이뤄진 후에야 합당한 경외감이 품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건전하고 보편 타당히 받아들여지는 역사관, 오류 없는 역사 지식, 종으로 횡으로 면밀히 구축된 입체적 이해 등이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 저자 도재기 선생님이 방대한 자료 수집과 현지 답사 끝에 오로지 "국보" 하나에 초점을 주고 저술하신 이 책은, 정말 잘 쓰여진 책 한 권으로 문화재에 대한 입체적 이해의 기초를 놓는 게 가능하다는 벅찬 느낌을 독자에게 안기는 명저입니다. 역사를 알면 국보를 모를 수 없고, 또한 국보를 정확히 이해하면 바른 역사의 주축을 파악할 수 있다는 선명한 교훈을 다시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혹 지나치게 유물 중심, 문화재 소개 중심으로 이뤄진 편제라면 "자료집" 이상이 못될 수도 있겠는데, 이 책은 진취적이면서도 실증적인 사관으로 조망한 한국사의 본줄기까지 심도 있게 다루어서 넉넉히 "역사책"을 읽는, 그것도 묵직한 전문서를 읽는 만족감까지 진지한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과연 미술사학자, 고고학자와 도굴꾼의 유의미한 차이점이 무엇인가?" 같은 대사를 듣곤 합니다. 어떻게 순수한 열정, 학문적 관심사를 갖고 민족이나 인류의 공영을 위해 일하는 이와 범죄자를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있을까 하고 당연히 반발감이 들 수 있습니다. 헌데 다른 분야도 아니고 문화재 도굴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은, 순수 학자나 전문가들 못지 않게 대단한 지식과 정보를 갖춘 경우가 많습니다. 책 처음이 "끈질기고도 아픈 도굴의 역사"에 약간의 비중을 두고 시작되는 이유도, 언제나 문화재 당국이나 뜻있는 학자들보다 한 발 없어 보물들에 손을 쓰는 이들의 집요한 술수와 책략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저자께서 이 화제를 구태여 꺼내신 뜻은, 그만큼이나 국보를 체계적으로 관리, 보존하려는 우리 후손들의 노력에 아쉬운 점이 많고, 지금 이순간에도 어느 떳떳지 못한 검은 손에 의해 소중한 문화재가 훼손될 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함이겠습니다. 알아서 잘 되고 있겠거니, 나와 상관 없는 일이거니 모두가 안이한 마음을 품는 풍토 속에서 의롭지 않은 일부의 잇속만 채워질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네요.

이 책의 뛰어난 점은 단연 1) 망라적인 사항 소개(누락된 항목이 하나도 없습니다) 2) 단편적인 정보 정리가 아닌 체계적인 역사 맥락 속에서의 서술 3) 금전가치로의 환산이나 속물적 왜곡이 아닌, 올바른 민족 정기가 함양된 관점으로서의 고미술사 이해 4) 최고급 인쇄에 바탕을 둔 유효적절한 도판 첨부 등이겠습니다. 관리의 편의를 위한 번호순에 따른 설명이 아님은 물론이며, 통설적 견해에 따라 이뤄진 시대 구분에 근거하여 통시적 맥락 속에서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학문적 편집이 돋보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인들이 그토록 왜곡, 은폐하려 애썼던 청동기 시대(그 이전도 마찬가지입니다만)의 유물 중 대표적인 "정문경"에 대해서, 이것이 실제 소지자의 얼굴을 살피는 용도로 쓰였을까 하는 매우 소박한(그러나 상식적인) 의문을 독자의 눈높이에서 일일이 떠올려 주며, 그에 대해 통설적 입장에서 유익하고 권위 있는 답을 내려 주는 식입니다. 문장이 쉬우면서도 장별 체계와 구조에 부합하는 해설이라서, 해당 장을 읽고 나면 아 정문경이 우리가 아는 무슨 시대 무슨 범주에 속하는 국보다, 소재지는 숭실대 박물관이다 같은 사항이 독서 후 자연스럽게 기억에 남습니다. 학창 시절 문화재 소재와 대략의 생긴 모양을 익혀 두고 이를 지도 등과 연결시키는 국사 문제 출제 경향에 골치깨나 썩인 이들이라면, 이 책 한 권으로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겠네요.

임신서기석은 유명하긴 해도 국보가 아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국보/보물 등이 어떤 기준에 의해 구분 지정되는지는 이 책 처음에 저자께서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임신서기석이 어떤 연혁을 갖는지 정확히 알려면 법흥왕~진흥왕 연간에 한창 제도가 정비되던 화랑제도에 대해 살피지 않을 수 없고, 문화재(선명한 사진과 함께 설명되는)가 역사 속에서 갖는 살아 숨쉬는 맥락을 독자는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죠. 저자가 아쉬움을 표시하는 건, 삼국 간의 항쟁에서 최후의 승자로 남았던 신라의 유물만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전한다는 현실입니다. 미륵사지 석탑 같은 건 극히 드물게 현전하는 백제의 유물이며, 이의 해체 보수 과정에서 놀라운 유물들이 추가로 발견된 건 학계뿐 아니라 민족 전체의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또한 풍납토성 유적지 발굴 관련, 주민들과 정부 당국, 학계의 입장이 일일이 대립하며 큰 갈등을 빚는 데 대해 우려를 표명합니다. 우리 독자들이 이 점에 주목해야 할 이유라면, 결국 민족 공동의 유산인 문화재 관리와 보존 정책에 대해 최상의 중지(衆智)를 모을 필요가 절실하다는 점이겠습니다.

연가칠년명 금동 여래 입상은 역시 학창 시절 그 긴 이름을 외우는 수고가 컸기에 많은 이들이 귀에 익을 만한 문화재겠는데요. 저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만 "연가(7년)"라는 연호가 현전 사서 어디에도 교차검증이 안 되는 사항이라는군요. 역시 문서상으로 전하는 1차 사료가 대단히 희귀한 한국사의 안타까운 현실을 잘 드러내 보이는 대목이겠습니다. 저자가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역사 연구와 문화재 관리야말로 남북 당국이 반드시 지혜와 물적 자원을 한데 모아야 할 공동 과제라는 것입니다. 광개토대왕비문 화제를 두고서는, 강점기에만 해도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연구 대상에 접근 자체가 어려웠던 참혹한 현실을 상기하며, 현재에도 중국측으로부터의 동북 공정 시도 등 잠재적 위험 요인을 감안하면 하루라도 빨리 남북간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두가 공감, 동의하면서도 실천에 옮기기가 어려운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청자, 백자 등 자기의 생산은 대륙과 대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세계에까지 "고려"의 이름을 알린 중요한 문화사적, 경제적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역시 의무교육 과정에서 지루한 암기 사항으로만 다뤄질 뿐, 우리의 정서와 공통된 상식, 민족 감정에 공명을 줄 만한 지식으로 다가오질 못했지요. 국보, 보물 중 상당수가 이 도자기 유물이며, 세계 어디서도 그 독창적인 개성과 매력을 흉내내기 어려웠던 우리만의 제조 비법이 무엇이었는지, 저자는 일반 독서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쉽게 풀어 줍니다. 혹 재테크(..) 수단으로 도자기류의 유통과 투자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책을 읽고 그 기초 소양을 쌓을 수도 있겠습니다.

미술품 역시 국내 애호가들 사이에서 형성된 시장의 볼륨만으로도 이미 상당한 수준이며, 도대체 현대 화법과는 기본 전제부터가 다른 과거의 작품들이 어떤 이유에서 고평가, 혹은 도외시되는지 납득하려면 일단 그 창작 배경이 된 역사를 천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국보뿐 아니라 보물로 지정된 각종 중요 초상화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는데요. 강민첨 장군(귀주 대첩의 또다른 주인공), 회헌 안향 등의 초상을 담은 숱한 묵화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그 뒤에 숨은 내력을 소상히 들려 줍니다. 역사를 알고 읽으면 더욱 재미 있으며, 이 책을 읽고 처음 배우는 역사 사항이 아마도 다른 책들로 더 깊이 있는 연구를 이어갈 때 든든한 발판이 되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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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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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맨부커상을 받는 쾌거를 통해, 한국인이면서 좀 게으르거나 불성실한 독자들에게(물론, 전세계의 뜻있는 독자들에게도) 확실히 자신의 이름과 작품 세계를 각인시킨 한강 작가님(아는 분들은 이미 십여년 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다 알았지만), 그리고 이 두꺼운, 연작의 두번째 마디로 우리 한국 독자들과도 치열하고 행복한 소통을 이룬 엘레나 페란테, 이 두 분은 제 생각에 참 닮은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대하소설에 가까운 "나폴리 4부작" 중 두번째 권입니다. 첫째 권도 워낙 좋다고 권하는 지인(주로 여성들이었지만)들이 많아서, 이제 이런 쪽에선 나올 이야기가 다 나오지 않았냐며(사실 가당치도 않은 소리죠) 시들했던 저 같은 독자도 (또, 출판사의 휘광도 있고 해서) 이미 몇 달 전에 찾아서 읽어 봤습니다. 질곡 많고 민중의 상당수에게 큰 아픔을 안긴 현대사의 가까운 지점들을, 소설 형식을 통해 가상의 주인공(그러나 꼭 가상만은 아닐)들을 등장시켜 쓰라리고 고통스럽고 죄책감과 절망의 수렁에 빠져들고 마침내 건강한 각성과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시도는 여러 역량 있는 작가들에 의해 이뤄져 왔습니다. 과거에는 윤정모 작가님 같은, 거의 자전적인(그래서 더욱 독자가 고통스러운) 소설 등이 대표적이었겠고, 이런 여성 작가들은 대개 시대의 모순을 이중삼중으로 자신의 내면에 아프게 새기게 될 여성 주인공들을 앞에 내세워 세계의 거울과 평행우주를 구축합니다.

1권도 그랬지만 이 2권에서도 반드시 무슨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배경을 이루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선량한 개인들, 이웃과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고 아름다운 인간 본성을 끝까지 지키며 생을 일궈 가려 드는 개인들에게 반드시 대적(大敵)으로 등장하는 게 "폭력"입니다. 이 폭력은 이 소설 속에서처럼 "마피아(시칠리아에만 마피아가 있는 게 당연히 아니죠)"라는, 그 존재 이유와 격렬한 양상을 반드시 "폭력"으로 표현하는 익숙한 실존의 집단으로만 등장하는 게 아닙니다(깡패가 폭력을 휘두르는 건 끔찍할망정 놀랍지는 않죠).

사회의 기저에서 폭력의 행사, 공포의 유발을 통해 정의롭지 못한 권력과 경제적 이익를 챙기려 드는 이들은, 반드시 폭력의 확대 재생산을 통해 개인의 일상과 가장 사적인 평온이 지배해야 할 공간인 가정까지 침투하려 듭니다. 폭력은 정당한 이익의 대가의 귀속을 방해하려 체계 속속들이 꽂힌 빨대와도 같으며, 이 기제에 세뇌된 어리석은 남성들은 가부장의 허울 아래 가장 약한 구성원들에게 체제의 폭력을 대리 행사하는 부품으로 악용됩니다.

여성의 저항은 물리적 조건으로는 이들 수컷의 강력한 폭력에 맞대응하기 어렵기에, 릴라나 레누, 우리의 주인공들은 인간의 내면과 정직한 본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의 습득에 매달립니다. 책을 읽고, 정직한 느낌을 교환하고, 나만의 감상과 상념을 글로 써 보고, 남이 아닌 나 자신의 발전과 각성과 절절한 느낌을 명징한 언어로 표현함으로써(물론 이런 활동 중에는 학교 공부도 포함됩니다. 세계의 문명화한 부분과 미미한 개인들의 존재가 합일을 이루려면 그 길은 공부가 가장 유력하다는 게 이런 [좀 아픈]성장 소설에 등장하는 깨인 여성들의 공통된 선택이죠), 그들은 야만적 폭력과 동전의 양면 같은 구조를 이루는 "무지 몽매"에 정면으로 반기를 듭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쪽이나 당하는 쪽이나, 자신이 지금 어떤 거대한 기제 속에서 무슨 노릇을 하는지를 모르기에 자신과 타인(조금도 적이 아닌)을 동시에 파괴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거죠. 이탈리아를 수백 년 전 다녀간 괴테의 말처럼, 폭력에 짓밟히거나 스스로를 폭력 행사 속에 모독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더 많은 빛이 그 어두운 내면에 비추이는 것"입니다. 이들은 누가 더 주먹을 잘 쓰고, 누가 더 야만 속으로 타락할 수 있느냐로 경쟁하지 않고, 누가 더 지혜롭고 온유하며 타인을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느냐로 우열을 다툽니다. 두 소녀가 영혼의 동반자이며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한 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아내를 죽어라 하고 두들겨 팬 후에야 그 남자가 비로소 남자로 주위로부터 대접받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쪽은 그 남자를 키운 늙은 여인(더 이상 여자라고 볼 수도 없는 음울하고 찌든 폭력배 같은 눈빛을 한)의 입에서, 그녀 역시 과거 한때 가장 적나라한 폭력의 희생자였을, 이제는 왜곡되고 타락한 채 폭력 행사의 말단 대리인 노릇을 하며 자신의 현재와 과거로부터 스스로 유리된, 축출된 영혼이, 대를 물려 제단에 서서 소중한 자아를 더럽히고 강간당하는 희생자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뱉는 저주의 전승입니다. "경계의 허물어짐"은 사실 그리 낯선 동기는 아니겠지만, 멀쑥하고 다정해 보이는 얼굴선이 느닷 무너지고 야수 같은 그 부친의 모습과 표정이 느닷 튀어나오는 스테파노(아들/아버지의 경계 부정)의 행동 묘사 같은 건, 페란테 여사만이 이 연작에서 섬뜩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때의 경계 부정은 변증법적 지양이 아님은 물론이고, 진화와 문명의 성과를 무위로 돌리는 무한 회귀적 퇴행에 지나지 않죠.

이탈리아 남부는 경제적 빈곤, 부의 편재, 전근대적 인습의 횡행, 낙후한 정치 시스템 등 여러 근본 모순을 예나 지금이나 간직한 고장입니다. 그리 먼 과거도 아닌 시점에서 그저 평범하고 행복하게 자라야 할, 이후 숱한 남자, 여자 아기들을 생산하며 세상을 더욱 풍요로운 공간으로 채워야 할 모성(母性)에, 이만큼이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며 사회를 끌고 가는 체제란 정말 못나고 무력하며,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 환경, 어머니 대지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 흉물들이란 생각이 들었네요. 여사는 그러나 아픔과 좌절, 눈물과 비통함만으로 주인공의 앞길을 채우지 않습니다. 완성도 높은 성장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 연약한 주인공이 체제와 인습이라는 사납고 야수적인 발톱을 재치있고도 유쾌하게 피해가며 자기만의 발전을 일구고 승리하는 모습은 성별을 떠나 독자에게 성취감마저 안깁니다. 이 역시 어둠을 빛으로 극복하는, 위대한 인간 정신이 위기마다 보여 준 치열하고도 통쾌한 행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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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팝니다 -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 고백
미시마 유키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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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과 죽음 두 개의 강박에만 평생 시달리다 정직하거나 과시적이거나 둘 중 하나인 장엄한 자살로 한 생을 마무리한 그의 작품이 과연 맞나 싶을 만큼 코믹하고 재기 넘치는 소설입니다. 내용은 제목 그대로 목숨을 팔려고 내놓았으나 도무지 죽어지질 않는 불운한 남자가 결국 사무치게 생에의 열정을 회복한다는 줄거리더군요. 살려고 발버둥치는 추한 잉여 인생들의 수중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 돈이, 목숨을 매물로 제쳐 둔 27세의 니힐리스트에겐 손사래를 쳐도 자석처럼 빨려듭니다.

구매자(?)들도 돈을 건네면서 "곧 죽을 사람이 돈은 왜 챙기냐?"고 묻곤 하지만 그때마다 주인공 하니오는 매섭고 빈틈없는 답을 준비했다가 경멸처럼 내뱉곤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구매자들에게는 거꾸로 하니오가 정말로 궁금해져서 묻곤 하는데, 그럴 때는 이들이 "말이 되는" 대답을 이미 준비했더군요. 어처구니없는 부조리 속에서 치열하게 의미를 찾으려 드는 인물들의 발버둥이 해학적이면서 숙연한 느낌을 주는데, 간결하면서도 결국은 심각한 고뇌와 날선 회의를 숨긴 문장들이 과연 그의 솜씨구나 싶었습니다.

하니오는 히트작을 여러 건 만들어낸 젊고 유능한 카피라이터입니다. 더 이상 일을 안 배워도 독립이 가능할 프로급이지만 본인은 조직 안에 계속 머물고 싶어합니다. 일 잘 하는 사람은 자기 살림을 따로 꾸리고 싶고 천하에 돈안되는 군식구는 구차하게 자리를 보전하려 드는 게 광고회사뿐 아니라 모든 현대 조직의 역설(이른바 역선택)인데, 하니오는 그 나이에 맛볼 수 있는 성공의 절정에서 질병과도 같은 허무주의에 빠져 모든 의욕을 느닷 잃습니다. "모든 활자가 바퀴벌레처럼 바뀌어 보인다"가 그의 고백인데, 사실 이는 지극히 세속적으로 맞은 일종의 해탈과도 같습니다. 불운이라면 본인이 준비 안 된 상태에서 맞았기에 대체 뭔지를 모른다는 건데,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삶의 비의가 한눈에 엄습해 왔으므로 미약한 존재는 필연의 해답으로 죽음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의 자살이 실패로 끝났더라도 기회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하니오는 객관적으로 아까운 생(젊은 나이에 주위에서 인정 받은 광고인)의 마감에 보다 어울리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기를 결심합니다. 그게 바로 이 소설의 제목인 "제값 받고 목숨 팔기"인데요. 많은 이들은 이런 기괴한 광고를 두고 "청부살인의 청약" 정도로만 받아들이나 봅니다. 하니오는 그러나 보다 다양한 상황과 제의를 염두에 두고 펼친 계획이었고, 세상은 그의 이런 상상력에 충분히 부응하려는 듯 다양한 구매자를 그의 앞으로 보내 옵니다. 모두 다섯 건의 계약이 이뤄지는데, 미시마 유키오의 기발한 천재적 상상력을 우리 독자들이 충분히 즐기고 감탄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작품은 1968년, 그가 실제로 죽기 2년 전에 부분부분이 지어졌는데(플레이보이誌 일본판에 연재), 이로부터 한참 후 유행할 미국 고딕 호러, 코믹 판타지 장르 영화에서 애용하던 전개와 착상이 많이 보여 확실히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솜씨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목숨을 팔겠다며 광고를 낸 모습도 웃기지만, 그런 목숨을 사겠다고 찾아온 군상들의 사연이란 해학을 넘어 경악을 안기는 작태와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번째 고객인 가오루 군의 흡혈귀 모친 에피소드는 특히 아직 뱀파이어 장르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한참 전이라 더욱 눈길이 갔는데요. 이런 소재에 어디까지나 국외자일 뿐인 일본인 작가가 이만큼이나 잘 소화해서 멋진 마무리까지(사랑하는 하니오를 위해 결국 대신 죽음) 이루는 걸 보고 과연 천재작가가 틀림없다고 여겨졌습니다.

A국(은혜를 갚는다 어쩐다로 봐서 틀림없는 미국이죠)와 B국의 첩보전에 휘말려 골치 아픈 분쟁을 손쉽게 해결하는 모습은, 다른 에피소드들에서 포레스트 검프나 바우돌리노처럼 운 좋게 해결의 대세에 올라탄 모습과는 달리 하니오 본인의 번득이는 재치에 전적으로 기인한 해결이라 더욱 놀랍습니다. "특별한 당근인 양 트릭을 썼지만 사실 평범한 당근으로도 왜 문제가 안 풀리겠는가?" 쉬운 문제를 골치아프게 생각하는 게 미국인들의 병통이라며 마치 백치의 우연한 지혜인 양 교훈화를 시도하지만 현자의 눈에만 진리의 지름길이 한 줄기 빛처럼 직통으로 들어오는 법입니다. 한 줄짜리 소화(笑話)에 모티브로 쓰이고 말기엔 너무 아까운, 창의적인 장치여서, 아마 모르긴 해도 이후 어느 탐정물 장르에건 뻔뻔스레 도용되지 않았을까 추측되더군요.

이처럼 명랑한(외견상) 피카레스크풍의 깔끔한 작품을 쓴 이가 이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은 자살을 선택한 게 전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죽으려 든 게 아니라, 세상의 괴기한 사건과 음모의 줄기를 맨몸으로 접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재치와 능력에만 의지해서) 큰 돈을 벌어 보려 거대한 쇼무대를 설치한 것 아닐까 생각도 해 보았지만, 사실상 자살을 주 소재로 삼은 소설의 작가가 실제로 요란한 퍼포먼스 속에 죽음을 택해 버렸으니 그런 해석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유능한 직원이 퇴직하면 거액의 전별금까지 챙겨 주고, 무능한 자가 버티려 들면 제발 좀 나가라고 책상을 뺏는 게 비정하지만 공정한 세상의 이치겠으며, 하니오 같은 재주꾼이 험한 세상과 정면대결하여 더 큰 실속을 챙기고, 무능한 현실도피자가 새해 벽두에도 분수에 넘는 요행을 품다 꿈이 망상으로만 끝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미래나 변함이 없는 희화적인 풍속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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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줄도 읽지 못하게 하라 - 누가 왜 우리의 읽고 쓸 권리를 빼앗아갔는가?
주쯔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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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에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었다는 사실은, 과거 한때는 출판의 자유가 누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협소한 개인의 행복과 자유의 범위를 넘어, 특정한 사상과 원리가 공동체, 나아가 전 인류의 복리 증진에까지 영향을 주려면, 그 정신적 가치나 기술적 세부 사항 등이 지면을 통해 확산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도 웹 페이지의 최종 발표를 위한 편집 기술을 "퍼블리싱"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있겠습니다. 인간은 이런 의미에서 "출판하는 동물"이라 불릴 만한데, 이런 근원적이고 양도 불가능한 자유를 제한당한다면 이는 표의자나 잠재적 독자층에게 크나큰 고통이자 불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은 주로 서양의 출판, 저작 역사에 초점을 두어, 어떤 빼어난 책들이 여태 금서로 지정되고, 그 지정된 금서가 인류 문화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재미있게 서술합니다. 못된 책, 혹은 요즘 널리 입에 오르내리는 말로 "불온 서적"은 그럴 이유가 있어(내용이 불건전하여) 양식 있는 이들에 의해 금지되었겠거니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서적에 끌리거나 호기심이 생기는 내 자신이 어딘가 불측하거나 올바르지 못한 심성이겠다며 괜한 자책감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에 의해 이른바 금서로 지정된 서적들 중, 이 책에서 소개한 것들의 경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불후의 명작, 고전 리스트"에 다름 아닙니다. 어떻게 "금서=명작"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을까요?

모든 금서가 다 명작으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오늘날의 눈으로 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풍속물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흔히 음서, 도색물로 분류되는 것들은 교황청이라든가, 엄숙한 지역 교구라든가, 정부의 출판 규율 당국 등으로부터 "금서 목록"에 오르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흔히 "물건"으로 다뤄져 발각 즉시 소각되거나 압류되었을 뿐이었죠. 따라서 위험한(당시의 지배 계층이 보기에) 사상이나 주장을 담은 책들, 혹은 우아하고 잘 제련된 언어 속에 성(性)의 지향(행태가 아닌)을 담은 책들이 비로소 권력층에 의해 "금서"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이 적용되었기에, 당대인들이 이해 못 하거나 질서(낡은 적폐를 포함할 가능성이 높죠)를 위협할 만하겠다 싶던 책들이 제재를 받았겠고, 그런 책들 중에 명작, 고전이 많이 낀 것도 당연합니다.

아마도 금서라고 하면 <데카메론>이나 <우신 예찬> 등, 교회와 지배특권계층의 이해에 반했던 여러 선구자들의 문예 작품이나 논설을 대뜸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수록된 다양한 작품 목록들은, 오히려 근현대에 들어서까지 정부 당국에 의해 경원시된, 불멸의 명작들을 더 많이 포함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이 중에는 노동자층의 비참한 근로 여건을 고발하는 소설, 희곡도 있고, 인습과 제재를 넘어 남녀 간의 자유로운 사랑을 주장하는 문예물도 있습니다. 이 정도의 표현이 이처럼이나 가까운 시기에까지 금지되었다는 점도 의외이겠으며, 이런 책들을 개인 간에 우송, 교환하는 행위도 무려 "우편 당국"에 의해 검열, 규제되었다는 사실이 많은 독자들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를 넘어 "사적 비밀, 통신의 자유"까지 침해하는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실린 여러 금서들 중, 유독 제정 러시아의 폭압적 처사라든가, 이후 소비에트 시절까지 포함하여 많은 명작, 정의로운 외침을 담은 저술이 포함되었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제정 시대에는 다른 예속 민족의 자유를 외치는 행위가 금지되었고, 공산 정권 때에는 우리가 잘 알듯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라든가 솔제니친 등의 작품들이 엄혹한 조치에 족쇄가 묶였습니다. 더 재미있는 건, 제정러시아나 공산당 일당 독재나 결국 체제의 내부 적폐를 청산, 극복 못 해 무너지고 말았다는 사실이죠. 선각자,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 문학가들이 외치는 소리에 제때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시스템이 한결같이 맞아야만 했던 운명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반드시 체제에 반대하거나, 음란한 풍습을 다룬 책들만 금지되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야수적이고 잔인한 면을 그대로 묘사한, 졸라 풍의 자연주의 작품들도 결국 윤리와 미풍에 반한다는 이유로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죠. 어느 사회나 부모자식간의 바른 범절, 부부 윤리, 공동체 질서의 이상적 방향을 성원들에게 가르치고 사회화의 지침으로 삼기 마련인데, 이런 정책에 방해가 되는 내용을 담은 책 중 파급력이 있겠다 싶은 책은 흔히 금서로 지정되었습니다. 인간의 품성 중 어둡고 부조리한 면을 그대로 서술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이 금서로 묶여야 한다는 정책은, 오늘의 관점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조치이겠습니다. 사실 이런 결과는 오늘날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고, 다만 워낙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대 자유시장의 원리에 의해 개별 저작의 튀는 성향이 그저 대중의 눈에 쉽사리 안 뜨인 결과일 뿐입니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금서들의 경우, 문제작이다 음서다 불쾌하고 불온한 저서다 이런 막연한 선입견을 확실하게 배반하며, 오히려 "고전, 명작 엄선 리스트"라 불려 무방할 정도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게, 이 많은 명작들이 하나같이 금서로 묶인 적이 있다면, 금서가 대체 인류 문명의 진보를 선도했다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어째서 이런 모순된 명제가 성립할 수 있을까요? 당대의 정부 당국자들, 권력자들은 하나같이 눈멀고 아둔한 자들만이 그 자리에 앉혀졌다는 뜻일까요? 그 해답은, 어느 체제나 질서라도 그에 대해 정당한 의문이 제기되지 않거나, 비판과 개선 사항이 반영, 수용되지 않는 닫힌 사회라면 결국 그 존속이 어려워지고, 자체 붕괴나 발전적 해체로 치닫는 게 필연이라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몸담은 사회가 훌륭하지만, 이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어보자는 외침이 죄가 될 수는 없다." 오랜 시간 공산주의자로 몰려 고초를 겪은 작가 트럼보의 유명한 말이죠.

사실 이 책은 인류 문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의 엄선 소개로 파악해도 전혀 무방한데, 절묘하게도 "금지, 금압"의 코드로 이 많은 책들을 엮어 소개한 저자의 센스가 탁월합니다. "센스"라고만 표현하면 어딘가 감각적인 능력만 강조하는 것 같은데, 이 책의 필치는 찬란한 고전을 선별하고 소개함에 있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엄정하고도 세련된 필력을 자랑합니다. 특히 저자는 어느 작가를 소개하면서, "위대한 고전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변형, 재창조하려 든 계획"을 가졌다고 서술하는데, 이는 아마도 저자 본인이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섭렵하며 가졌을 꿈의 일부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갖게 합니다.

명작 리스트라고 하면 대개 건조한 필치에 내용 요약식 뻔한 체제로 진행되기 일쑤인데, 이 책은 내공 깊은 저자의 소양 있는 문체로 각각의 저작에 대해 멋진 입문적 소개, 현대적 의미 부여가 되어 있어 소재 못지 않게 저자의 입담, 고아한 인문적 취향에 함께 매료되는 면이 있습니다. 고전에 대한 소개가 낡은 문장, 이미 확립된 정평에 의존하는 수가 많은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신선한 시각으로 해당 고전에 눈길을 다시 주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아직도 출판, 표현의 자유가 널리 확립되지 않은 중국의 저자가 썼다는 점에서 묘한 여운도 남기는 게 사실입니다. 언제나 믿고 고를 수 있는 허유영 번역가의 유려한 문장도, 처음부터 한국어로 쓰인 저술인 양 즐거운 착각을 부르게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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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무너지다 - 한국 명예혁명을 이끈 기자와 시민들의 이야기
정철운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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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일어나 소리칠 것이다."

이 말은 기독교 신약성경 중 루가복음의 한 구절을 약간 변형한 것인데, 대략 유신시절 기자 대량 해직 사태때부터 널리 퍼졌습니다. 고 송건호 선생, 리영희 교수 등의 책이나 강연에서 자주 볼 수 있었죠.

작은 책이지만 현대사의 큰 줄기 하나를 언론인의 시각으로 담아낸 무게가 느껴집니다. 박근혜 정부의 사실상 몰락을 가져온 이번 사태는 촛불의 위력도 위력이었지만, 혁명의 "방아쇠(이 책 중의 표현입니다)"를 당긴 주체가 언론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민완 기자이신 저자(진보매체 <미디어오늘> 소속입니다)의 눈으로 볼 때, 강고한 정부 권력이 결국 무릎을 꿇어가는 그 과정은 지난 정치사에서 좀처럼 보지 못한 드문 사건이었습니다. 심지어 그간 적대 관계를 유지해 온 여러 언론사들이 동맹, 연합을 이루며 대형 비리를 세상에 고발한 국면이 두드러졌는데요. 펜이 칼보다 강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증명한 좋은 예로도 기억될 것 같습니다.

"언론과 다투는 정부 권력이란 참으로 못난 짓을 하는 꼴이다." 이런 말은 지난 정부에서도 여러 번 들어 온 격언(?), 혹은 따끔한 독설이었습니다. 저자는 책 처음에서 박근혜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언론사와 고소 고발 등 여러 분쟁을 벌였음을 지적합니다. 그리 단단한 집권 기반을 갖지 못했던 정부가, 심지어 보수 언론 매체들과도 간단 없는 다툼을 벌였던 게 스스로를 위해서도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겠는데요. 어쩌면 스스로 저지른 업보 말고도 정치적으로 서투른 실책의 남발, 무모한 각세우기 등이 총체적으로 빚은 비극인 듯도 합니다.

현정부 들어서고는 국제 언론 관련 단체 등에서 평가하는 언론 자유의 현실도 열악해졌습니다. 외신기자들의 객관적 기준으로 본 각종 지표도 내리막을 걸었으니 이게 대외신인도랄까 국격 같은 데에 좋은 영향을 끼칠 리 만무하죠. 정부는 심지어 일본 산케이신문 특파원의 추측성 전언 보도 한 구절을 문제삼아 큰 소송전(그것도 형사소송)을 벌였는데, 저자는 이 대목을 두고 "진영의 보-혁을 가리지 않는", 괘씸죄성 단정과 기분파 보복만이 횡행한, 예측 불허의 정책 기조가 낳은 난맥으로 진단합니다. 산케이신문이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극우성향 매체임을 염두에 둔 분석입니다. 이 사건은 더군다나 한국의 헌법재판소도 며칠 전 정식 쟁송 쟁점으로 채택한 "세월호 7시간" 관련 보도가 그 원인이었기에 지금 돌아보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책은 이어서 종편 출범이 이뤄진 5년 전, 지난 대선 전후의 여러 사건, 현정부 출범 후 종편이 걸어온 길이나 크고작은 사건을 짚습니다. 종편은 출범 당시에도 특혜 논란을 빚었는데요. 특히 대선 국면에선 보수 성향 유권자들을 응집시키는 역할을 크게 했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요즘은 방송에 잘 안 나오는 분 중 박은주 부장의 발언 "형광등 100개"가 불러온 파장과 지금의 희화적 반향도 다시 언급하는군요. 다만 이 책에도 나오는 것처럼, 박 기자는 당시 박 후보의 부정확한 어법(주술 호응이 안 이뤄짐) 같은 걸 지적하며 기사에는 그 나름 소신을 담아 보도했던 적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까지 두루 지적하는 대목에서 이 책의 공정성 기준 일부를 엿볼 수 있네요.

"기울어진 운동장" 담론은 주로 진보성향의 논객, 전문가들이 자주 원용하는 프레임입니다. 저자께서도 지적하시는 것처럼, 운동장의 지평이 언제나 불공정하게 머무는 게 아니며, 야당이나 진보 진영에서 부지런히, 정확하게 아젠다를 추출, 선점하면 현명한 국민은 이에 바로 호응해 왔습니다. 저자는 오랜 세월 언론에 몸담아온 기자답게, 세칭 조중동에서도 얼마든지 현 정권이나 보수 진영에 비판적인 인사가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지난 선거에서 문재인을 찍었다"고 고백한 동아일보 기자부터, "우리는 지금 빚을 내어 거대한 경로잔치를 벌일 뿐"이라고 개탄한 "종편 방송사 소속인(이렇게만 표기됐네요)"까지, 사리에 어긋나는 대목에서 대의에 분연히 공감하는 양심은 어디에서나 발견되기 마련입니다.

저자께서는 조선일보, TV조선 기자진들만의 경쟁력, 역량에 대해서도 합당한 평가를 아끼지 않습니다. "일단 사건이 터지면, 이슈와 아젠다를 선명히 정리하여 밀고나가는 건 우리가 최고다." "우리는 정치 세력이 아니라 시장만 보고 나가는 편이다." TV조선 엄성섭 앵커의 말을 인용한 이런 대목들은 사실 지난 시절부터 반대진영 언론매체에서도 인정해 온 부분입니다. 지금은 종이신문의 위력이 엄청 줄었지만, 한겨레신문 등에선 조선일보의 광고편집 센스가 예술이라면서, "이러니 (저들이) 돈을 벌 수밖에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죠. 물론 여기서 언론기관의 소명이 상업적 기조에 있어선 안 된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 거겠고요.

안민석 의원의 활동 이전에도, 미르 재단의 의혹에 대해선 이미 조선일보가 선제적 보도로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사실 불과 몇 달 전이지만 그간 사태가 너무 급박하게 변해 왔기 때문에, 손석희 사장의 jTBC 특종 말고는 우리가 다 잊어버렸음이나 마찬가지인데요. 그 시점에 송희영 논설위원이 대우조선 관련 비위 혐의로 사직하고, 조선일보는 해명 보도를 내고 하던 것도 다 우리가 이례적인 사건이라며 설왕설래하곤 했죠.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눈에 보이는 현상이나굵직한 결과만 부각하는 게 아니라,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치닫기까지 어떤 과정이 선행되었는지 차분하게 짚어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SBS CNBC 소속 김형민 PD는, 많은 네티즌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최순실 사태가 세인의 주목을 받고 수면위로 이처럼 떠오르게 한 일등 공신에 가깝습니다. (전 SBS 앵커인 김형민 부장과는 다른 분입니다) 해시태그의 위력을 다시 한번 실감케 해 준 사건이기도 했죠. jTBC는 이 무렵 정유라의 특혜 의혹을 정규뉴스 시간에 집중 거론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숱한 소문이나 스캔들 중 하나 정도로만 봐 넘기곤 했습니다. 이 책의 백미는 제2部부터 시작되는, 10월 7일부터 10월 26일까지의 숨막히듯 이어지는 연대기식 사건 정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 국민은 무신경했지만, 날선 의식의 기자들과 정부 사이의 숨막히는 대결 양상은 치열하게 물밑에서 전개되었으며, 오직 진실을 향하려는 기자의 눈에 이 모든 "역사"가 소상히 캐치되었건 겁니다. 승부가 결정난 10월 26일에 과거 또 무슨 일이 있기도 했다는 건 국민 모두가 다 아는 바이겠습니다.

이 책에는 재미있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지난 세기 중반 히틀러가 사고를 치기 전에는, 전문가들 사이에 자본주의- 공산주의 간의 한판 대결이 발발하리라는 전망이 우세했습니다. 공산진영의 독재자 스탈린과 미-영 진영이 손잡고 "Allied Forces"를 이루리라고는 아무도 점치지 못했습니다. 요즘도 unlikely ally(있을 법하지 않은 동맹)라는 말은 흔히 쓰곤 하죠. 저자는 미-영-소(蘇)를 한겨레, jTBC, 조선 측에 비유하기도 합니다(각각 매칭이 아니라는 건 따로 설명이 붙었습니다). 후반부에는 중국의 지난 항일 투쟁사에 비겨 "국공합작"이란 말도 나오네요.

1997년 대선이 끝나고 한참 후 한겨레신문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았던 쾌거인 정권 교체" 당시를 회고하며, 등장인물(대부분 현역 정치인)들에 대한 경칭을 생략하고 한 편의 소설처럼 꾸민 형식으로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DJT연대를 촉진했던 배후의 일등 공신이었던 한광옥씨, 소장 국회의원 김민석 씨 등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여, 당시를 감격어리게 기억하는 독자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었죠. 이 책 역시 역사의 바른 맥이 자리잡은 후, 그런 추억으로 남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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