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트웨이 미술사 - 미술의 요소와 원리.매체.역사.주제 - 미술로 들어가는 4개의 문
데브라 J. 드위트 외 지음, 조주연 외 옮김 / 이봄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 집에 비치되어 있던 아동백과사전 전집이라든가, 혹은 가정백과사전(요즘은 이런 게 잘 없던데)에 보면 꼭 "왜 미술은 어려운가(요)? 어떻게 하면 예술품을 잘 감상할 수 있을까(요)?" 같은 질문으로 해당 파트(즉 미술)가 시작되곤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는 오히려 이런 질문이 이상하게 보였는데요. 물리, 화학, 미적분학 등이라든가, 하다못해 서양 고전 음악이 어려웠으면 어려웠지, 손으로 선을 그리고 예쁘게 색칠하면 될 뿐인 미술이 왜 어려운가, 또 위대한 예술인들의 작품만 해도 그 멋진 색과 조형과 표현을 눈으로 잘 감상만 하면 그만이지 그게 어려울 게 뭐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수학이나 물리를 잘 이해하려면 정해진 규칙과 논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지능이 중요합니다. (창작을 일단 논외로 한다면) 미술도 그런 기술적 지능이 요구되는 분야일까요? 그냥 열린 마음과 풍부한 감수성만으로 (감상이) 충분하지는 않을까요? 요즘 핫이슈인 인공지능도 그 고도화한 단계에까지 개발이 이른다면, 학습과 (내재한) 규칙의 파악을 통해, 소양 있는 인간처럼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심미안)을 갖추게 될까요? 현재로서는 알 수 없고, 완성도 높은 AI가 실제로 나와 봐야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만족스런 답이 구해지지 싶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미술 작품의 감상에도 전문가들의 어떤 도움, 가이드를 받아, 종전보다는 더 확실하고 더 세부적인 부분까지 파고들어갈 수 있는, 그런 "감식안"을 갖출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저는 선천적인 감수성이나,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레 몸에 체득된 "센스"가 더 우선이라고 봅니다. 하나하나 교정을 받거나 인위적 학습을 통해 배운 느낌(이라기보다 이미 머리로 이해하는 과정)만으로는, 예컨대 스탕달이 구이도 레니의 거대한 프레스코화를 보고 실신할 뻔했다든가 하는, 총체적이고 강렬한 미적 감흥으로 이어지기는 힘들겠죠. 허나 전부가 안 된다고 또 모두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명작 명작 하는구나, 그 이유를 느껴가며 전시회도 찾고 화첩도 넘겨 가는, 일상의 작은 윤택이랄까 여유를 잠시라도 체감하는 삶과, 그저 루틴에만 찌든 인생이 서로 같은 선상에 놓일 수는 없습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림이 눈에 안 들어오던 "미학치"들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떼어가며 미술 보는 실력을 기를 수 있는 멋진 입문서, 말 그대로 "게이트웨이"가 되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미술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저자는 에도 시절 일본의 가츠시카 호쿠사이와 고대 이집트인들 두 예를 들며, 미술이 일상의 여유와 현실의 필요 두 양극단 스펙트럼 사이의 어느 지점에도 위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미술이란 특별한 이들에 의해 창작되어 눈 높은 소수에 의해 맛보아지는 별세계의 진미(珍味)일 뿐이지 않고, 인간이 생계를 위해 할당하는 시간 그 나머지 동안에, 짓고, 표현하며, "끄적이는" 모든 감성의 표현이 다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에 들인 수고와 재능과 영감을 타인이 얼마나 절절히 평가해 주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이런 의미에서 1) 공간을 점유하는 매체(media)에 의해, 2) 감상자의 "시각"에 호소하는 일체의 창작물, "포이에마"는 다 미술품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이 책은 큰 화제, 이슈의 설명(이 책의 저술 목적)을 위해 올메크 족의 거대 두상이라든가, 나스카의 지상화, 혹은 <실루에타> 같은 논란의 "작품들"까지 도판으로 싣고 그 "미술성"을 자세히 풀어 줍니다. 왜 이게 전혀 자격의 하자 없는 미술들이며, 또 우리는 어떻게 이 "작품들"을 게이트웨이 삼아 난코스를 돌파할 수 있는지, 쉬우면서도 정확한 언어적 레슨을 통해 차분히 가르쳐 줍니다. 미술을 그저 미술적 기호로만 설명한다든가, 오로지 실습을 통해서만 전달 가능하다(어느 정도는 사실이죠)며 완강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초심자들은 영원히 초심자에 머물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 책의 최고 장점은 미술을 미술 외적인(물론 그러면서도 내적인) 메타언어로 접근하게 독자를 돕는다는 데에 있음이 여기서도 확인되네요.

선(線)이란 무엇인가? 일단 구상(具像)을 구성(構成)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책에서는 명시적이거나 암시적인 경계를 뜻한다고 정의하는데, 이 규정은 풍부한 도판을 통해 독자들에게 충분히 쉽게 전달됩니다. p26을 보면 베네치아 두칼레 궁(宮)을 담은 사진과 카날레토의 18세기 회화가 나란히 놓였는데, 이때 하늘과 건축물을 가르는 경계으로서의 "선"은 위 작품(사진)에선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아래 그림에서는 화가의 붓질을 통해 드러나죠. 또, 회화는 명백히 2차원 평면에서 벌이는 사람 손길의 (無로부터의 창조)이기에 입체감을 드러내려면 다른 기법이 따로 동원되어야 하는데, 위 사진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반대방향의) 대각선(행사를 위해 길게 늘어뜨린 줄)을, 그림에서는 구조물의 표면을 가로지르게 배치함으로써 "표면"의 느낌을 부각합니다. 사실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 건 저자의 다음과 같은 부가 설명이었는데요. "(처음 볼 때) 이 선은 간과되기 쉽다." 사진에서는 애초에 광학상의 효과로 잘 보이지도 않게 찍혔지만, 그림에서는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배치한 것이 초심자에게는 스쳐 지나가고 만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초심자들이, 대체 왜 무엇을 못 보고 넘기기에 미술로부터 "소외"되고 마는지 정확히, 이런 식으로 짚어 줍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들)이 의도한 대로, 초심자 수준의 독자가, 예술가의 본심과 속셈, 내공과 깊이를, 있는 그대로 명작 미술품에서 소통, 이해하고 싶다면, 다음의 네 가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는군요. 1) 기초 2) 매체 3) 역사 4) 주제. 이 중 앞의 두 가지는 협의의 미술 분야에서만 다루는 이론이겠으며, 뒤의 둘은 널리 인문 영역의 소양이 두루 커버해 줘야 하는 부분이겠습니다. "기초"는 말 그대로 선, 면, 색, 대조 등 미술(품)이 어떤 언어로 표현되고 감상되는지 그 기본 요소에 대한 이해입니다. "선"의 예를 다시 들자면, 저자는 고야의 그 유명한 <1808년 5월 3일(의 학살)>을 소재로 삼고, 이 작품에서 얼마나 많은 "방향선(암묵적인 선이죠)"들이 구도를 형성하고, 감상자의 시선 처리를 도우며 창작자의 의도를 알아채게 하는 데 기여하는지, 독자의 궁금증을 속속 긁어 주는 설명을 풀어 놓습니다.

아마 명품의 감식에 이미 익숙한 교양 있는 독자라면 "뭘 이렇게까지 번잡한 설명으로 명작의 고아한 터치를 스토킹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당사자가 해당 작품에 깊이 침잠해 들면 들수록,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도 늘어나겠으며, 이런 범위는 사실 확장에 한계가 필요 없습니다. 아는 건 많은데 표현을 못한다는 핑계가 가장 구차한 법이죠. 표현을 못 하는 건 잘 몰라서 못하는 거고, 그런 대가들이 초심자들도 자신과 공감하게 돕는다는데 그걸 탓할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다빈치가 조소와 회화에만 통달한 기능인이 아니라, 과학, 인문, 철학을 두루 마스터한 만능인이었음은, 현재 창의력을 중시하는 교육 트렌드의 상업적 구호 덕분에라도 우리가 잘 압니다. 책은 미술의 "매체(실제로 제작, 창조하는 방법론 연관)"를 논하며, 고대나 중세의 창작자들이 첨단(그 시대 기준) 도구의 사용에 얼마나 능숙했는지를 설명합니다. 미술과 과학은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인간 활동 분야의 좌뇌, 우뇌적 양극단으로 오해되지만(좌우뇌 구분 자체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입장도 유력합니다), 지난 시절 대가들에게 두 영역은 서로 완벽히 통하는 공존의 필드였음을 잘 보여 주는 챕터였습니다.


삽입된 여담 속에 "감상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려주는 의미심장한 정보도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작품을 어렵사리 절도해 낸 범죄자들이, 결국은 저자(중 한 분인 로버트 위트먼)와 접촉하여 시가의 1%도 안 되는 금액에 넘기고 만 실화는,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명작 도둑질에서는 훔치는 능력보다 팔아넘기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책에 그런 말은 없습니다만) 현대에는 워낙 정교하게 위조, 복제재현하는 능력이 뛰어난 기술자들이 많기에, 정확한 프로비넌스(이 책에서는 "출처"로 번역합니다)가 없으면 과연 진품인지 가품인지 알 방법이 없고, 출처도 모를 미술품을 거액을 주고 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책에서는 재판매 불가능성도 언급).

그럼 추리소설이나 케이퍼 무비에서는 왜 그처럼 범죄자들이 큰 돈을 버는 걸까요? 이는 위에 나온 대로, "그만큼 제 임자를 골라 접촉하여 제값에 떠넘기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설정으로 넘어가는 거죠. 만약에 재판매 가능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 만족을 위해" 소장하겠다는 부자라면 이게 가능합니다. 또, "이게 설령 가짜라도 무방하다. 이처럼 힘있는 진품의 터치가 재현 가능한 솜씨라면 그건 거액을 들여 구입, 나만의 공간에 모셔 두고 감상할 가치가 충분하다"라는 확신을 가져야 또 거래가 가능하겠죠.

요약하면 ㄱ. 그 정도 거금을 수중에 지닌 사람 자체가 드물고, ㄴ. 그런 부자가 진실로 소양까지를 갖춰 진품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지는 일이 또한 드문 법이니, 두 조건을 모두 구비한 구매자를 찾아낸 그 범죄자(그런 자가 있기나 하다면)의 능력이란 게 벌써 이만큼이나 희귀하다는 뜻입니다. 또, 아무리 기술적으로 정교하다 해도, 남(렘브란트 같은 거장)이 처음 시도한 걸 답습할 뿐인 장인의 솜씨는, 오리지널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라는 데에 미술전문가 모두의 의견이 일치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런 점을 잘 이해 못 해서, 예컨대 크리스티나 아길레나를 기막히게 모창하는 한국 가수가 왜 빌보드에서 뜨질 못하는지 갸웃해합니다. 카피캣은 결코 원판을 넘볼 수 없는 법입니다.


디자인은 곧 산업의 총아입니다. 왜 미술이 저급한(?) 실용과 이윤 창출 과정에까지 한 발을 깊숙이 담그는가. 이는 "상징을 사용해 정보와 생각을 소통(p32)"한다는 미술 본연의 기능과 사명이, 현대의 산업디자인과 홍보 섹터만큼 절실히 발휘되는 곳이 또 없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미술은 (의식이 깨인) 선구자들의 손과 머리를 빌려 (지난 수만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제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사정 모르는 문외한들이 괜한 시비를 걸어 온 셈이죠. 우리가 상표, 도안, CI, 포스터 따위를 통해 너무나도 친근히 이뤄 온 미술적 소통의 예를, 책은 격의 없이 다뤄 가며 당신이 숨쉬듯 겪어 온 흔한 지점에서 미학의 기초를 확인하기를 강력히 충고합니다. 편하게 장난하듯 다뤄 온 게 알고보니 공부였다니 게으른 학생들에게는 이처럼 반가운 뉴스가 없습니다.


주제와 역사 등 인문의 논의는 여태 많은 대중서에서도 시도해 온 채널이자 교양이기에 이 리뷰에서는 생략하겠습니다만, 저자들의 관점은 현대 시민 소양을 널리, 탄탄히 갖춘 독자들의 기준에 충분히 부합할 만큼 온건하고 건전합니다(안 그런 초보 독자들에게라면, 충분히 유익하고 안전합니다). 무엇보다 미술을 내적(위의 1, 2번), 외적(위의 3, 4번) 측면에서 동시에 공략해 들어가며, 종래의 미술 개론서에서 보지 못하던 치밀한 분석과 인문언어에의 호환이 넉넉히 이뤄진 책이라서, 익히 알던 포인트라도 명징한 설명으로 재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예전에 어느 원로 교수님께서 "너희 1학년들이 공부하는 교필 국어작문 교과서를 읽어 보니, 어쩌면 그렇게도 알차고 핵심을 찌르는 명문장들만 수록되었는지 감탄했다"고도 하시던데, 그분이 기초 교재에 서술된 사항을 몰라서 그런 평가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는 이들에게는 재확인, 시원한 복습의 쾌감을 선사하는 책이, 입문자들에게는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해결사 노릇도 겸한다는 점 다시 깨닫게 된 독서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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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
최인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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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때로는 무엇을 바라보느냐 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준거틀, 혹은 간단히 "frame(of reference)"의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상은 분명 본성과 외관이 변치 않은 채 그 자리에 머무릅니다만, 이를 바라보는 우리 눈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결과가 초래됩니다. 때로는 (고정된) 대상을 바라보는 이 시각 차 때문에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빚어집니다. 이렇게나 프레임이 차이 나는 사람들이 물체가 아니라 아예 서로를 바라볼 때 얼마나 극심한 싸움이 벌어질지도, 프레임의 중요성을 알게 된 뒤라면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최인철 교수님의 유명한 심리학 대중서를 십 년 만에 개정하여 다시 독자들 앞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프레임"이란 말 자체가 낯설었고, "프레임이란 프레임"을 써서 우리 자신의 행태라든가 주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을 고찰한다는 게 무척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제목이 그저 "프레임"으로 붙어, 아 무척 어려운 내용을 서울대 교수님이 설명하시겠구나 하고 지레 겁먹고 간신히 책을 열었다가, 의외로 쉬운 내용, 그러면서도 신변의 여러 골칫거리에 두루적용할 수 있는 가르침이 들어 있는 걸 알고 엄청 고마워하는 독자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10주년 개정판 프레임"의 발간 소식을 무척 반겨할 이들도 많을 줄 압니다.

심리학뿐 아니라 모든 순수학문이, 어떤 실제상의 효용이 바로 생겨서, 대학에 학과가 설치된다거나 정부, 기업 측으로부터의 상당 규모 지원이 유치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길게 보아 응용학문이 산출할 수 있는 효과의 몇 배를 이들 섹터에서 기대할 수 있음을 알고 시설과 인력에 대한 투자가 감행되며, 넉넉히 지적으로 계몽된 사회 전반도 이미 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 학문 분야의 성과를, 다름 아닌 우리 일상의 복잡한 문제에 다소나마 응용, 해결할 수 있기까지 하다면, 학자의 그런 대중을 향한 수고에 이 또한 각별히 고마워해야 할 일 아닐까요. 심리학자가 쓴 이 책은 마치 본격 자계서마냥, 수양이 덜 된 탓인지 사회 구조가 모순에 가득찬 탓인지 우리의 속을 썩게 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제법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 많은 독자들이 호응을 보낸 대중서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 10주년 기념판은 변화한 그간의 사정을 반영하여, 구체적인 예시도 그 10년 사이에 벌어졌을 법한 사례들이 담겨, 책이 업데이트판임을 실감케 합니다. 서양의 석학들이 자기 책에서 즐겨 쓰는 "셀프디스성 위트"도 곁들여져 저자의 여유 있는 심성과 현황에 대한 짐작도 가능하고요.  캠퍼스의 주자난을 겪고 있는 저자의 재직 학교를 소재로 삼아, "그 나름 창의성(좀 과하지 않나 싶습니다만)을 발휘한 주차"가 "웬 몹쓸 무개념 얌체짓"으로 돌변한 예는, "맥락"을 제거하고(쉽게 말해, "앞뒤 자르고") 그것만 부각했을 때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를 두고 외과의사가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니 수술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친 에피소드는 예컨대 IQ 테스트(실전용 말고요)라든가 유머를 담은 책에 자주 등장하죠. 이 이야기는 성별(젠더)가 명확히 갈리는 언어 중 하나인 영어로 읽어야, 왜 독자(청자)들이 그리 쉽게 낚이는 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좀처럼 잘 안 속는 편인데, 어쨌든 이 소재는 10년 전(정확히는 9년 전) 초판에도 실려서, 한 단편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 맥락의 활용과 선 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프레임은 정의(definition)이고 질문이기도 하지만(그 외에도 프레임이 대체 어떤어떤 기능을 하는지 저자는 다양한 해답을 내놓습니다. 모두 각각에 어울리는 쉬운 예화가 곁들여진 설명이죠), 은유이자 순서이기도 하다시는군요. 무슨 뜻일까요. 일단 가족들과 저녁 식사 약속을 정하는 어느 군 출신 인사의 표현을 그 예로 듭니다. "집합!"을 태연히 문자 메시지 속 대화에 끼어넣는 그에게, 가장 단란하고 평화로워야 할 가족사마저도 신속, 정확이 미덕인 군대 업무 프로세스의 "비유"로 대응되어야 할 대상일지도 모릅니다. 저자와 같은 소속 학교의 김난도 교수는 인생을 시간대에 비유하며, 아직 청춘(오전 6시대)의 시기를 지나는 젊은이들이 왜 지레 절망하고 비관적으로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다고 저자는 간접 인용합니다. 어떤 회사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강조하는데, 이 역시 프레임의 마법으로 비합리적 관행과 원칙의 무시를 합리화하는 술책일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일상에서 잘못된 은유, 언어 관행을 걷어내는 노력은, 바로 "숨어들어 구조의 모순을 은폐하는 프레임의 제거 작업"이기도 함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자기 준거 프레임이란 말이 있죠. 사람은 현상이든 물건이든 공부해야 할 내용이든 자신과 연관 지을 때 더 오래 기억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책에는 polite라는 단어에 관한 설문 조사에서, "오바마"라든가 "그  반대말"이라든가 하는 질문을 받은 이들보다, "당신(자신)"과 엮인 질문을 받은 이가 더 오랜 기억을 가졌음을 거론합니다. 내 일이 아닌 남 일은 관여하고 싶은 욕구도 적고 우선순위도 떨어지기 마련이죠(저자는 이 책의 다른 대목에서 "프레임은 곧 순서"라고도 규정합니다). 책에 그런 말은 없지만 공부도 이와 비슷해서, 예컨대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다양한 사건을 암기할 때 일일이 자신의 과거사나 일상과 연계시켜 본다면 기억이 오래갈 것이 당연합니다.

심리학교과서뿐 아니라 법학 교과서에서도 소위 "의무의 충돌(Pflichtkonflikt)"과 관련하여 이 트롤리의 사례가 자주 끌어대어지죠. 두 갈래로 나뉜 궤도를 당신이 조종 가능할 때, 한 명이 일하는 궤도와 다섯 명이 일하는 곳 중 어디로 차량을 틀게 할 것(차량이 지나는 궤도상의 노동자들은 다 죽게 됩니다)이냐를 놓고, 많은 이들은 보다 적은 인명의 희생을 위해 마치 숭고한 결단("나라고 마음이 편하겠어?")이라도 행하는 양 전자를 선택합니다. 이번에는 차량이 지나는 철교 위에 당신 말고 건장한 남성(이게 중요하죠)를 확 밀어 떨어뜨릴 때, 다섯 명의 노동자를 구할 수 있다고 했을 경우, 당신은 이 남자를 희생시키겠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아무도 흔쾌히 "예"를 답하지 않겠죠. 사실 이는 전혀 다른 상황 둘을 그저 "5냐 1이냐"의 문제로 단순화시켜 동일한 문제로 치환한,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프레임의 마력 중 하나를 증명하는 예로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최인철 교수님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한다는 명분은 어느 경우에도 이처럼 무리가 따르는 것임"을 보이려는 의도입니다.


저자께서 장난스럽게 "후견지명"으로 부르는, 이른바 benefit of hindsight란, 지난 시점에서 결과를 다 알고 사태를 판단하는 누구라도 현자가 될 수 있음을 비꼬는 표현입니다. 이 책 초판에도 나왔지만, 2002 피파월드컵 어느 경기에서 이을용이 실축하자, "이 긴박한 순간에 대담한 이천수를 넣었어야지!"라며 감독의 결단에 손쉬운 비난을 하는 관중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는 예화를 읽고 다시 한 번 웃음이 나더군요. 만약 성공했더라면 "노련한 왼발잡이를 넣어 상대의 의표를 찌른 감독"을 두고 감탄이 이어졌거나, 혹은 이천수를 넣어 실패했더라면 "왜 경험도 없는 선수를 그저 간만 크다고 기용했는지"를 놓고 질타를 일삼는 모습이 훤히 그려진다는 저자의 지적은 매우 타당합니다. 스포츠 팬이 가장 자괴하는 대목은 바로 이런 "결과론의 성찬"입니다.

undocumented worker란 직역하면 (법적)서류에 등록되지 않은 노동자라는 뜻이겠는데, 이는 쉽게 말해 불법 이주 노동자죠. 불법 체류자(불체자)라고 하면 당장 적발해서 제재를 가해야 할 대상 같고, "~노동자"라고 하면 정당한 노동과 기여를 사회에 베풂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모순으로 핍박받는 희생양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말을 쓴다는 자체가 정치적 프레임이란 뜻인데, 사실 이는 우리가 조선족 범죄자들을 다룬 뉴스에서도 흔히 접합니다. "조선족 아무개씨가..."라고 시작하는 뉴스는 시청자들에게, "아니 조선족이 또!"라며 분노와 짜증을 유발하지만, "중국 동포 아무개씨..."라고 시작하는 기사는 "어쩌다가 이 먼 곳까지 와서..." 같은 동정심을 부르기에 충분합니다. 현재는 이게 프레임인 줄 알고 많은 이들이 시정을 원하는 눈치더군요. 프레임이란 이처럼 일상 도처에서 우리를 "인식의 함정"에 빠뜨리는 녀석입니다.

저자의 결론은 온정적입니다. 어떤 사태를 바라볼 때 "사람 프레임"에 얽매이지 말고 "상황 프레임"으로 보면 그 일(대개 불미스러운)을 저지른 당사자에 대해 더 온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놈은 원래가 나쁜 녀석이야."에서 "상황이 그렇게 되면 나라고 별 수 있었겠어?"로 시점이 전환된다는 거죠. 반면 저자께서 지적하시는 대로 무책임한 상황 논리, 혹은 숙명론으로 쉽게 타락할 수도 있고, 이런 "상황 프레임"의 편한 장막에 숨는 이들이, 정작 자신 아닌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잣대를 교활하게(아니, 자신이 그러는 줄 모르니까 대단히 어리석게)들이댄다는 점도 우리 독자 입장에서 지적 가능합니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일상에서 누구나 쉽게 접할 예화를 통해, 왜 비생산적인 갈등이 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며, 개인들은 속을 끓이고 스트레스를 받는지를 간단히 풀어준다는 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어려운 심리학 용어(한번 공부해 보신 분들은 잘 알지만 예사 두뇌로는 본격 구조에 접근 못할 만큼 어려운 게 이 심리학입니다)를 전혀 쓰지 않는데다, 보통 독자들은 말은 못 외워도 이야기는 다들 기억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개념의 정수라든가, "당신이 당신 일상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가르치는 게 바로 이 책입니다. 읽고 나서 확실히, 어떤 레벨의 독자라도 뭔가 머리와 가슴에 남는 게 있습니다. 하드커버판이고 디자인이 세련되어 소장 욕구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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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여인실록 - 시대가 만들어낸 빛과 어둠의 여인들
배성수 외 지음 / 온어롤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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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과 편견이 끼어들지 않은 채, 우리 후손들이 마음껏 우리 시대의 시각으로 해석과 평가를 내릴 수 있는 1차 사료가 조금 더 풍성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누구나 가질 만합니다. 이런 아쉬움이 있기에, 역사에 대해 애정과 상상력을 듬뿍 지닌 재기 넘치는 저자들이, 오히려 자신만의 관점으로 풀어낸 역사의 자락을 놓고 우리 독자들과 즐거이 소통도 할 수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해석이나 추완의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는 치밀한 과거에의 기록이 어쩌면 후세 사람들을 더 숨막히게 할지도 모를 일이며, 현실이 이렇지 못하기에 우리는 조상들의 다소 희미한 흔적과 더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려 애쓰는지도 모르죠. 더군다나 그 대상이 현실의 엄청난 제약 속에 힘겹게 자아의 실현, 혹은 욕망이나 포부의 발휘를 꾀한 여성들이었다면 말입니다.

모두 여섯 분의 실존 인물, 그 중에서도 여성들만 짚고 있는, 저자들의 주관을 강력히 투사한 에세이 모음입입니다. 편마다 집필자가 다르므로 아주 세심히 읽은 독자라면 뭔가 관점이 일관되지는 않다는 느낌이 올 수도 있는데요. 어차피 네 분 저자들이 쓰신 내용이니만치 다른 저자들의 시선에 따라 재미있게 읽고 독자 나름으로 생각에 잠길 계기를 가지면 충분합니다. 성리학적 도그마에 (자신도 모르게) 갇힌 채 그간 독자 자신이 (특정 인물, 특히 여성들을) 너무 편향되게 바라보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은 보람은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보희씨 주연의 <어우동>이란 영화가 당시 서울에서 큰 흥행을 기록하면서, 범죄자, 음녀로 단죄받고 죽은 성종 연간의 한 여인이 대한민국 국민 상당수의 뇌리에 그 이름이 새겨질 만큼 인지도가 높아졌습니다(그 전에 故 신봉승 선생의 통속물도 있었지만). 이상한 건, 왜 버젓한 가문에서 출생하여 남부러울 것 없이 성장한 미모(...)의 여인이 그토록 무모한 애정 행각을 일삼았고(사회적 폐습의 제재를 받으리라는 결과가 뻔한 데도), 또 간통과 음행에 통상 의율되는 형벌을 훨씬 넘어선, 극형까지 선고, 집행받아야 했냐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태 많은 역사학자, 저술가 들이 그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며 숨은 진정한 곡절을 추측해 왔습니다. 저자 역시 다분히 어우동(이 책에서는 어을우동이라는 표기를 따릅니다)에 대해 우호적, 동정적인 논조로 그간의 시각을 요약하거나, 자신만의 견해를 풀어 놓습니다.

다만, 확고한 유교적 도그마에 기반한, 제도 정비와 백성의 이념적 순치에 주력한 군주답게, 이 사건을 일벌백계로 다스려 어떤 본보기를 보이려 들었다는 해석에 대해서는 저자가 가볍게 "헛소리"라며 일소에 부치는군요. 그보다는 뭔가 절박한 현실정치상의 필요라든가 이 건과 연계된 다른 스캔들을 덮으려 든 게 직접 동기가 아닐까 하는 쪽으로 논의의 방향을 트는 저자입니다. 이능화의 저술 한 대목을 인용하며 "성종 본인이 행여 '기생으로 전업하다시피한' 어을우동과 모종의 관계를 맺지 않았을까" 하는 가설도 소개합니다. 이런 입장은 여태 많은 대중서에서 친숙히 접해 온, 또 그만큼 많은 공방과 검증을 거친 내용들이지만, 여튼 저자가 많은 문헌을 검토한 후 재치 있는 사견을 첨언했다는 점은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p42:5에 나온 "無乃選上新妓?'처럼 1차 사료에서 직접 뽑은 문장들도 신뢰를 더하는 저술 태도입니다. "無乃~?"는 "~가 아니겠는가?"하는 확인형 의문투입니다.

어을우동의 경우 아무리 전적으로 마음을 주고 진한 사랑을 나눈 상대(들)이라고 하지만, (그 과정이 간단치만은 않았을) 몸에 먹물을 새겨가면서까지 그 정인(情人)들의 이름, 추억을 간직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이분이 남자를 한번 상대하면, 어느 정도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그 나름으로는 순도 높은 사랑을 나눈, 말 그대로 순정의 여인이었음을 오히려 알 수 있는 대목일까요. 저자는 "요즘 젊은이들의 세태"를 유비하며, 연인의 이름을 타투로 새기는 풍조와 다를 바 없으니 현대형 사랑을 몸소 (수백 년 앞서) 실천한, 꽉 막히고 정직하지 못한 시대에 온몸으로 반항한 여권운동가로까지 평가할 수 있다는 입장 같습니다. 그렇게까지는 몰라도 좀 짠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지거비라는 천인에게 성폭행을 당한 내막에 대해서도 저자의 추론이 서술되었으니 읽어 볼 만합니다. 성종의 인품과 치적에 대해 일반의 인식이 과대평가된 면이 없지 않다는 저자의 지적은 날카롭습니다.

이 1장은 이렇게 마무리되는군요.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는가? 다만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게 너무 심할 뿐이다."

人頗疑於乙宇同之母鄭氏 亦有淫行 嘗曰

人誰無情欲 吳女之惑男 特已甚耳

앞부분은 "사람들이 자못 그 어미 되는 정씨도 음탕하지 않은가 의심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이란 뜻입니다. 마지막 구절 중 "오녀(吳女)"는 문맥상 "吾女"의 잘못 같습니다.

신사임당의 경우 제가 아주 어려서 읽은 아동물(故 조풍연 선생 저)에서도 이분의 정확한 함자에 대해 알 수 없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어서 좀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 이런 위인에 대해 기초적인 인적사항도 규명이 안 되었을까?" 이 책에도 대뜸 "인선이라고 전하지만 확실한 출처가 없다"는 서술로 글의 단초를 엽니다. 여성들이 아무리 재능이 빼어나고, 체제에 의해 칭송받는 위상까지 올라서도 여인에 대한 시각이 "누구의 아내, 여식, 어머니" 이상의 어떤 평가도 허락지 않는, 당대의 편협한 분위기를 짐작하고도 남죠. 대신 "임", "사"라는 당호를 구성하는 글자의 연원에 대해선 또 아주 흔히 설명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분의 생애가 다분히 체제의 이념을 위해 선전되고 미화된 느낌이 없지 않기에, 5만원권 지폐 도안 선정 당시 적지 않은 반대가 여성계로부터 일었지만, 뭐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필치와 화풍에 그 단아하고 안정된 품성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저자의 평가에 동의합니다(비단 사임당의 경우에 한하지 않고 말입니다).

허난설헌의 경우 속 좁고 못난 남편 때문에 불행한 생을 살고, 이후 복권되었다고는 하나 대역죄인으로 몰려 금기시된 허균의 누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평가를 받은 게 사실입니다. 아마도 당대 남성 문인들은, 일개 여인이 뛰어난 글재주로 중국 본토(...)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큰 인기를 끈 게 시샘이 나 표절이라느니 허균의 편집 가필의 흔적이라느니 하는 폄하를 일삼았을 것입니다. 허나 문인의 작품마다 드러나는 독특한 개성과 풍취란, 눈 높은 감별가에게만 캐치되는 고유의 시그니처와도 같아서 이런 걸 삼류 가필가가 사후 조작할 수는 없죠. 물론 반대로 재능이 전무한 엉터리가 그 지경에 머무는 걸 무슨 여성이라서 불리한 평가를 받았다느니 가당치도 않은 핑계를 들이대는 행태가 합리화될 수는 또 전혀 없습니다.

조선시대 풍운의 삶을 산 여인을 거론하며 또 김개시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이 역은 신봉승 선생 각본의 MBC 드라마에서 원미경씨가 맡아 열연하기도 했다는데, 여태 여러 차례에 걸쳐 극화된 인물이지만 대중에게 뭔가 선명한 이미지로는 다가오지 않습니다. 국정을 망친 요녀로 지탄받다가, 아니다, 재조명 재평가가 필요하다며 옹호론이 반대편에서 강력하게 결집하기도 하는 인물들(장녹수, 장옥정이라든가)도 많은데 말입니다. 저자는 소위 국정농단, 비선실세 파동과 관련하여 이 인물의 부정적 측면을 강하게 부각합니다.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여튼 국가의 정식 계선,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사적 채널을 의존해 국정을 운영함은 군주로서 큰 과오가 아닐 수 없죠. 중립노선이다 실용주의 외교다 하며 폭군으로서의 오명을 거두려는(서인 세력에 대한 비판까지 겹쳐) 움직인 속에서도 끝내 광해군의 발목을 잡는 게 바로 이 인물의 행적입니다. 웬만해선 무슨 실드를 치는 게 불가능해서죠.

풍류를 알고 빼어난 문재를 과시하면서도 체제를 정면으로 비웃은 포지티브 캐릭터 중에 (실존인물) 황진이가 있습니다. 정식 기록보다는 야사나 문학 속에서, 통쾌하게 위선자들을 비웃고 다닌 어떤 문예적 상징으로 더 부각된 느낌인데, 여튼 우리 전통 문화의 지난 내역에서 이 뚜렷한 개성의 일류 문인이 빠지면 얼마나 내용이 빈약해지겠습니까. 황진이가 양반가 출신이었으나 자신 때문에 상사병에 걸려 죽은 어느 남성의 사연을 듣고는 (또, 무슨 움직이지 않던 관이 뭘 덮어쓰고 나서야 상여가  지날 수 있었다는 둥) 기문에 입적했다는 설에 대해 저자는 아주 강경한 어조로 반박합니다. 이 설화 요소는 꽤나 인기 있어 이미 월탄 박종화 시절부터 소설 속에 편입되기도 했죠.

마지막 김만덕의 일화야말로 현대 여성들의 귀감이 될 만한, 실천과 행동으로 여성 고유의 능력과 가치를 입증한 모범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디 기적에 이름이 올라 있었으나 본인의 강력한 항의로 명예를 되찾고, 해당 지역이 기근에 시달릴 때 통 크게 손을 씀으로써 많은 백성들을 도탄지경에서 구해 내는 등의 업적은, 그녀의 활동 시기가 정조 연간이라는, 아직 근세의 질곡이 시대를 공고히 감싸거나 개혁에의 열망이 전면적으로 부상하지 못하던 국면이라는 점에서 더 놀랍습니다. 이 책에는 제주 지역에서 일어난 소요 사태와 그의 진정 국면까지 부수적으로 짚고 있어서 독자에게 도움이 되더군요.

세상의 절반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인 여성이 무시, 천대받는 사회와 체제란 어떤 경우에도 합당한 발전과 번영을 이룰 수 없고, 그런 공동체가 요즘처럼 개명된 세상에서 올바른 대접을 국제사회로부터 받을 수도 없습니다. 여러 우호적인 여건이 형성된 후에야 자신의 자질을 발휘하는 것과, 이처럼 악조건과 억압 속에서도 타고난 재능과 이상을 떨쳐 보이는 경우는, 사실 평가가 같을 수는 없죠. 무릇 타인의 모범이 된 인생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그 모친의 다음과 같은 절규와 함께 그 전 생애와 행적이 이상한 페이소스를 부르며 오버랩되는 어을우동에 대해서도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는 그런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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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령군 - 조선을 홀린 무당
배상열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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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선을 통틀어 (대개 남성이었던) 요승(妖僧)이 국정에 참섭하며 국기를 문란케 한 적은 있어도 샤먼, 무당이 실권을 잡고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은 드문데요. 이 책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는 진령군(眞靈君)은, 이른바 칠천(七賤)의 신분 중 하나인 여성 무속인 출신으로 조선 고종 연간에 명성황후를 뒷배로 두고 온갖 전횡을 일삼은 실존 인물입니다. 역사에 기록이 남긴 했는데, 그 정확한 생몰 연도나 본명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매우 적습니다. 이 책 역시, 과거의 가슴아픈, 또 개탄할 만한 역사에 대해 우리 독자들에게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진령군의 생애에 대해선 상당부분을 작가님의 상상을 동원하여 채우는 편입니다.

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정치적 부상(浮上)부터, 경술국치로 나라가 완전히 망하기까지의 시대상을 다룹니다. 평면적으로 질곡과 시련의 역사를 짚기보다는, 지도자의 무능과 부패가 어떤 식으로 백성의 삶을 피폐케 하고, 나아가 공동체의 존속 기반을 무너뜨리는지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역사 에세이에 가까운 형식입니다. 그러면서도 등장인물에 대한 구체적 묘사, 사건에 대한 실감나는 재현이 결들여진 덕에, 독자들은 한 편의 소설을 읽는 양 속도감 있게 한 권의  독서를 마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구구한 묘사나 몰입감 떨어지는 대화 등의 삽입이 없는 이런 포맷이라야, 읽는 독자한테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전반부의 주인공은 이하응이고, 저자는 그의 정치적 식견과 안목, 수완, 실행력, 지능 등의 자질을 놓고 꽤 후한 평가를 내립니다. 이런 평가는 마치 역사 소설처럼 그의 굵직한 행적을 요령 있게 시간순으로 서술한 후 적절한 근거를 들며 내려지는 의견이라서 독자는 (기존에 가지던 입장이 무엇이든 무관하게) 대체로는 동의해 가며 책을 읽게 되더군요. 그에 대해 "쇄국 정책으로 근대화를 늦춘 장본인"이란 비판이 우세하지만, 집정 당시에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 프랑스 등 서구와 접촉을 시도한 일을 보면 식견이 모자라고 시야가 좁아서 대국을 그르친 협량의 소유자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자는 특히 철종 사후에 조대비(신정왕후. 효유대비)와 담판을 짓고 정치적 동맹군으로 끌어들인 후 차자 명복에게 대보를 넘겨 주게 한 그 긴박한 과정에 대해 적확히 서술하는데, 차 필력이 좋으시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들더군요. 사람(독자)마다 의견이 갈리게 마련이지만 저자의 필력이 좋으면 논제에 무관하게 일단 설득력이 생긴다고나 할까요.

호포 징수는 양반 세력의 약화와 조세 수입원의 확충 두 가지 목표를 노린 양수겸장격 조치였고, 이 과정에서 일반 서인들도 대거 양반신분으로 편입되어 결과적으로 신분제 해소까지 이르는 한 발을 내딛는 결과였음을 저자는 지적합니다. 뿐만 아니라 서원 철폐를 통해 백성의 부담을 경감한 후, 이 여력을 경복궁 중건 쪽으로 돌려 왕실의 위신을 세운 그의 노련한 정책 집행 스킬도 조명합니다. 다만 저자의 옹호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이르러 일본 측의 황후 시해 음모에 꼭두각시처럼 동원되어 위신에 큰 손상을 입고 끔찍한 수모를 당한 그의 행적에 대해서까지 후한 평가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집정 십 년을 넘길 무렵 최익현 등의 상소로, 하응의 차자 이형은 드디어 친정을 펼치기에 이르지만, 실권자가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의 처 민자영이었음은 무지몽매한 백성들도 다 아는 판이었습니다. 실각한 지 6년 만에 구식 군대(양영)의 반란에 힘 입어 재집권을 시도했던 흥선 대원군은 청의 즉각 개입으로 오히려 비참한 수인 신세가 되어 텐진에 억류됩니다. 이 책에서 중요한 건 이런 대원군의 부침이 아니라, 한때 신변의 큰 위험을 겪고 충청도로 도망한 민자영이,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 어려운 시절 어느 이름없는 촌구석의 무당을 만나 "반드시 지엄의 위에 다시 오르실 테니 결코 낙담하지 마옵소서!" 같은 격려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물론 저자의 실감 나는 픽션화이지만). 이 무당은 본인도 확신이 없었으나, 벽촌의 천한 무속인으로 일생을 썩기보다 한 번의 도박으로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자는 속셈이 작용하지 않았겠냐는 거죠.

역시 픽션의 일환으로, 이 무당이 자신의 입장에서는 진객인 민자영을 방문하기 앞서, 어떤 수완으로 향리의 "고객들"을 구워삶았는지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아이를 못 낳는 며느리에 대해선 그저 복채 지불하는 사람 마음 편하라고 후처를 저주하라든가 하는 얕고 흔한 처방을 제시하지 않고(들킬 경우 자신 역시 관헌에 의해 중벌을 받으므로), 무난한 방법으로 "이혼"을 거친 후 적당한 홀아비를 찾아 재취하라는 식으로 충고합니다. 보통 천인들은 한번 살판을 찾았다 하면 앞뒤를 돌보지 않고 폭주하다가 소탐대실하는 모습이 흔한데, 이 무당은 대단히 신중하고 앞을 잘 재는 타입이었음이 드러나죠. 그런가 하면 아들의 관운을 물으러 온 여인에게는, "내년에는 운수가 좋으니 기다리라"는 괘 풀이를 해 줍니다. "다른 무당은 북으로 가서 귀인을 찾으라던데요?"라는 여인의 대꾸에 그녀는 고개를 젓는데, 설령 여흥 민씨(다른 무당이 말한 "북쪽의 귀인")가 급작스레 세도가 지위에 올라섰다 한들 같은 종문이라는 이유만으로 과연 앞길을 챙겨 주겠으며, 섣불리 찾아갔다 박대를 당하느니 1년 정도 재물을 모은 후 본격 청탁을 하는 편이 낫다는 자신의 깊은 뜻을 그리도 모르겠냐며 혀를 찹니다. 물론 이는 허구의 산물이지만, 저자의 인물 형상화 내공에 독자로서 경의를 표하게 되는 대목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비록 신통력도 없고(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출신도 비천했다고는 하나, 세상 물정을 영악하게 살핀 후 모시는 분에게 유효적절한 충고는 할 줄 알았던 게 이 무당의 자질이라면 자질이었습니다. 게다가 모시는 분이 가장 힘들 시기에 그 앞에 생각지도 않게 척 나타나서 생을 거의 포기할 단계에 전폭적인 힘을 불어넣어 주었으니, 마치 로렌츠 박사를 엄마인 줄 알고 따르는 오리떼들마냥 민자영이 그녀에 정신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겠습니다 (점점 누가 생각나죠?). 이 무당에게는 지극히 이례적으로 군호까지 내려졌으니, 진실로[眞] 영험하다[靈]는 이유에서 "진령군"입니다. 이 책에도 상세히 나온 대로, 군호는 공신이나 종실 인사들에게만 선별적으로 붙은 명예인지라, 이 조치가 얼마나 파격인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겠습니다.

임오군란이 터진 지 14년 후, 거침 없이 권세를 휘두르던 민씨 일문은 자영의 죽음과 더불어 권세를 잃고 위기에 몰렸습니다. 저자는 날카롭게도 "권세가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원군은 바로 상인들"임을 지적하는데, 상인도 상인 나름인지라 권귀들의 측근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큰 그릇은 신의를 철석같이 지킴을 특히 강조합니다. 무당 진령군에 큰 신세를 입었을 만한 어느 상인은, 을미사변 후 처절한 몰락이 임박한 그녀에게 지난 은혜를 톡톡히 갚습니다. "재산을 일단 다른 이 명의로 돌리시고 은닉한 후, 움막에 숨어 살다 세인의 눈총이 다른 곳을 향할 즈음 죽음을 가장하고 다른 신분을 얻어 사십시오. 그 동안 재물은 제가 굴리고 불려 드리겠습니다." 민자영과 그의 일족은 몰락했지만 천한 무당 진령군은 이후에도 몸을 숨기고 살며, 빼돌린 재산으로 여유로운 여생을 보냅니다. "나라가 망하는 데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나라를 망친 원흉도 처신만 잘 하면 일신의 평안과 부귀는 여튼 보장되었다는 게 독자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대목입니다.

을미사변 이후의 역사도 저자는 (진령군을 퇴장시킨 채) 자신의 평론을 곁들여 가며 박력 있게 서술합니다. 청일전쟁, 아관파천, 러일전쟁, 열강의 이권 침탈, 한일의정서, 을사조약 등이 차례로 다뤄지는데, 앞서 말한 대로 필력이 좋으셔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 소위 고종 독살 미수 사건은 꽤 유명해서 몇 년 전 이를 소재로 한 영화도 만들어졌습니다만, 저자는 김홍륙에게 억울한 누명이 씌워졌다고 파악하여 새로운 가설을 내어 놓습니다(이 대목에서는 운만 띄우고, 진상은 맨 뒤로 가서야 밝혀지네요. 물론 작가의 상상이지만). 마지막 장에선 매천야록의 저자로 우리가 잘 아는 애국열사 황현이 주인공 시점을 자주 차지하는데, 국권 상실이 가까워질 무렵 그를 웬 노부인, 매우 윤택한 삶을 누린 듯하면서도 영민하고 날카로운 용모를 한 이[아, 여기선 좀 많이 아니군요]가 찾아옵니다. "책 쓰시는 데 자금이나 자료가 부족하진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다만.... 그때 커피(가비)에 독을 탄 자가 과연 누구였는지요?" 노부인은 화들짝 놀랍니다.

종두법을 보급한 공로자로 유명한 지석영이, 한창 권세를 휘두를 무렵의 진령군과 알력 관계였다는 사실은 사료에도 나옵니다. 역관 출신 김홍륙이 왕의 주변에서 권세를 농단한 건 그보다는 한참 후의 일인데, 여튼 저자께선 이 대목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독자에게 여운이 깊은 암시를 남깁니다. 책에는 고종이 따로 총애한 무속인 성강호도 잠시 언급되며,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라스푸틴의 말을 좇아 니콜라이 2세가 무고한 민중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풍문도 나옵니다. 우리가 광해군 연간 샤르후 전투에서 요령껏 중립을 지킨 강홍립의 군호는 晉寧君으로 쓰며, 이 천한 무당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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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 그림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 1
우지더 외 지음, 자오시웨이 외 그림, 한국학술정보 출판번역팀 옮김 / 이담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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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2015) 중국에서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국가원수들을 초청하여 전승절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이 중에는 이른바 "열병식"도 포함되었는데, 사실 이보다 세인의 눈길을 더 끈 건 시 주석 부부가 정원 가운데에 서서 각국 수반을 맞으며 기념촬영을 하는 행사였습니다. 시 주석 내외와 사진을 찍기 위해 긴 lane을 걸어(올라)간 후 합류하여 사진을 찍고, 펑 여사의 정중한 손짓 안내를 받아 퇴장하는 방식이었는데, 글쎄 여러 복잡한 느낌이 들게 하더군요. 무튼 2차 대전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르고 추축국을 격퇴한 쪽은 소련, 그리고 중국입니다. 이들 두 나라가 입은 인명 피해, 물적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독일과 일본의 악독한 초기 침략 공세(어느 누구라도 바로 항복할 수밖에 없을 만큼 기습적이고 파괴적이었던)를 강인한 항전 의지로 막아낸 공이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2차대전사를 소련 측 시각, 중국 측 시각으로 고찰하는 작업은, 비록 이들 국가의 학계(관변)가 적잖은 왜곡, 과장, 선전을 끼워넣는 습성이 있다 해도, 일단은 존중하고 의미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큰 몫을 해낸 건 바로 그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은 2015년 중국에서 출간된, <제2차 세계대전 연환화고(連環畵庫)> 시리즈의 첫째 권 한국어 번역판입니다. "연환화"의 기원은 남북조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데, 표의문자를 쓰는 중국독서문화의 특성상 대중들에게 널리 지식과 컨텐츠를 보급하기 위해, 신해 혁명 이후 특히 발전을 본 포맷입니다. 한자를 많이 써야 하는 일본 출판 풍토에서 "망가"가 널리 보급된 사실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페이지마다 큰 규격의 삽화가 두 컷 배치되고, 삽화마다 작은 폰트로 사항 설명(역사 서술)이 세 줄 정도 병기된 형식입니다. 모두 140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다 그림이 대부분이니 금방 읽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은 별개로 하더라도 이게 겉보기와 달리 빨리, 간단히 소화되는 내용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1/5쯤 읽고선 바로 다가왔습니다. 도판이 많다고, 쪽수가 적다고 가벼이 볼 게 아니라는 점 처음 실감케 하는 독서였다고나 할까요.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첫째 2차대전을 그동안 서유럽 승전국 위주의 관점으로 공부한 독자의 한계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주제에 대해 쌓아 두었던 기존의 지식, 그리고 이처럼 새로이 접한 시야를 서로 조화, 통합시키는 작업을 다소 방해한 듯했습니다. 두번째로, 같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큰 시련을 겪은 중국측 지난 사정을 개관하는 마음이 결코 편할 수가 없는, 한국인으로서의 공통된 심회가 또 작용했겠지요.



책은 "관점" 위주로 서술되어 있지는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상세한 팩트를 중심으로 중일전쟁 초기를 조망합니다. 1권 후반부가 중일전쟁 포커스고, 전반부는 유럽에서 히틀러가 주데텐이나 체코 본토를 건드려 가며 망동을 부릴 시절을 짚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황의 디테일을 육하원칙에 맞춰 서술하기 때문에, 도판 비율이 높긴 해도 역사책 읽는 기분이 분명히 납니다(그러니 다시 강조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넘기지 마시길요). 일러스트는 작가의 상상, 창작도 있고, 유명한 기록 사진 푸티지를 그대로 모사한 것도 있습니다(특히 히틀러나 마오를 담을 때). 어느 컷이건 앞의 것과 긴밀한, 혹은 함축적인 내용 연계를 맺기 때문에, 그림의 완성도와는 또 별개로 묵직한 품격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팩트의 서술, 벌써 취사선택부터가 "관점"의 개입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죠. 대부분의 서술, 요약은 누구나 동의할 만한 무난한 관점을 띱니다만, 예컨대 영국이 일본과 협정을 맺어 양쯔강을 경계로 세력권 인정을 해 줬다는가 하는 사실을 두고, "유화정책의 확장"으로 단정한 부분은 확실히 중국측만의 해석을 내세웠구나 싶었습니다("유화정책의 확장"이란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유화정책은 힘이 없어서 더 강한 상대를 달래는 건데, 상황에 떠밀려 가는 걸 어떻게 "확장"이라고 표현하겠습니까. 지들[영국]은 그걸 하고 싶어서 했겠냐는 거죠). 또, 미국이 노구교(루거우차오) 사건 전후로도 계속 일본에 광물, 자원을 수출하여 중국측의 피해를 가중시켰다는 점도 강조하는데, 이들 양국은 여튼 정식 외교를 맺은 사이라, 특별한 법적 조치 없이 대뜸 금수 조치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구 열강의 소위 ABCD 포위망 형성이, 일제가 무모한 태평양 전쟁 감행의 직접 동기가 되었음은 엄연한 팩트입니다. 중국측의 피해의식이 과장되이 드러난 대목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여튼 우리 독자들은, 우리 경제와 정치, 군사 현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국 측이 역사를 이런 관점으로 본다는 점만은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겠네요.


장개석 측의 남경 국민정부가 가장 아파해야 할 대목은, 일제가 1931년 만주(둥베이)를 병탄하고도 모자라 이처럼 중국 본토를 넘볼 단계에서도 소위 "공농홍군"의 토벌에만 주력하여 정권의 안위에만 신경을 기울였다는 사실이죠. 이 점은 같은 중국인 누구에게도 어떤 항변을 할 근거가 없습니다. 책은, 파죽지세로 밀고내려와 화북 거점의 상당수(누구나 강조하듯, 중국처럼 광대한 영토를 선이 아닌 면으로 장악하는 건 지극히 어렵죠)를 점령하고는, 상하이에서 중국측과 일전을 벌입니다. 책의 3장은 상하이 전투를 바로 다루는데, 독자들은 책에서 상세히 기술한 내용을 주의깊게 공부할 필요가 있겠네요. 확실히 이런 내용이 텍스트 위주라면 지루할 수 있는데 그림이 함께하니까 잘 읽히긴 합니다. 그림 위주라고 가벼이 보고 덤빈 사람이라면 부담스러울 수 있어도, 반대로 빼곡한 글자 위주의 전쟁사만 보던 독자라면 엄청 고마워질 겁니다.


80년대 학번 어르신들에게 아주 친숙할, 이른바 (협의의) 사회과학서적(두레, 일월서각 등등)에서 자주 봤던 이름 장즈중(장자충), 펑위샹(풍옥상) 장군 등의 활약이 이 상하이 전투에서 아주 두드러집니다. 흔히 "파시스트 강도"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 무렵의 일본 만군 측은 정말 뻔뻔스러울 만큼 억지를 지어내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중국 측의 정당한 이해를 침해했죠. 우리는 중국측이 당시 변변한 항전도 한번 못해보고 일패도지한 줄 알지만, 특히 이 책은 9집단군, 21집단군, 항공 제4대대 등의 영웅적인 항전과 전과를 집중 소개합니다. 일본 측은 엄청 고전하다가 증원병력이 본격 파견된 후에야 승세를 굳히는데요. 이 과정에서 특유의 교활한 술수를 부려 화전 양면 전술을 구사하고 쿵샹시 등을 만나 위장평화공세를 펴기도 합니다. 참으로 가증스럽고 간악한 행태지요. 마오는 이 국면에서 따로 세운 공은 없으나 휘하의 세력에게 이러이러하게 대응하라며 먼 데서 지침을 내려준다고 하네요.

책은 연환화라는 그래픽의 역할에 크게 의존할 뿐 아니라, 책 앞에 인물들의 간략한 소개, 전황의 연대기식 정리 등을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지도가 좀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 1권에는 권두에 실린 소략한 세 컷뿐이라 그게 아쉬웠습니다. 중일 전쟁, 나아가 2차 대전 전사에 대해 그간 보이던 면만 주목한 우리 독자들에게 균형 잡힌 시야를 갖게 도와 주는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연환화 중 삽입된 텍스트는 당연히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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