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소설가의 글쓰기 - 위대한 대문호의 마음속으로 떠나는 여행
리차드 코헨 지음, 최주언 옮김 / 처음북스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아무리 소설을 즐겨읽는다 해도 그런 우리들 독자 모두가 소설가가 되거나 소설가처럼 글을 쓸 필요는 당연히 없겠지만, 멋진 소설 영감어린 작품이 어떤 이유로 그처럼 우리를 신나게 혹은 감동에 빠져 들게 하는지 그 비결을 수다떨듯 되새겨 보는 건 여튼 소설읽기 못지 않게 재미나기도 합니다. 리차드 코헨(이하 이 책의 표기법을 따릅니다)은 셀 수 없이 많은 기념비적 명작에서 숱한 사례와 인용구를 따 온 후, 무엇이 그토록 (때로는)수백 년 넘게 우리를 감동시키고 눈물 핑 돌게 만들었는지 그 비결을 분석합니다.. 보다는, 재미있게 수다를 떨어줍니다.

알파고가 아무리 기존의 놀라운 기보를 학습(논란의 여지가 있지만)하여 프로 기사들을 상대로 백전백승을 이어가도 "그"는 오로지 승부의 법칙에 따라 냉연히 행보를 이어갈 뿐 어떤 질(質)이나 미학이나 철학을 바둑판의 전투에서 발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습작 소설을 써 예심을 통과했다고도 하지만, 그게 그럴싸한 문장을 랜덤으로 늘어놓은, 행위자 자신도 무슨 의미인지 모를 장난에다 대고, 어리석은 인간만이 의미 과대평가를 하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아무리 높은 수준까지 발전해도, 명 에디터(겸 사장님) 리차드 코헨처럼 불후의 명작들을 추려 놓은 후 잘 뽑힌 구석, 신들린(혹은 속어로 "약빨고 쓴 듯한") 구절, 후손 만대에 이르기까지 삶과 영혼과 사랑과 미움의 본질이 뭔지 두고두고 곱씹게 만드는 주제와 표현을 "질적 기준"에 의해 궁시렁궁시렁 주절대지는 못할 것입니다. "신산(神算)"에 의해 불리한 판세를 한번에 뒤집는 천재적 수리 능력보다, "캬 이거 죽이지 않냐, 응?"하며 눈금의 미세단위가 측정 못하는 감정의 자그마한 요동에 깔깔대고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의 실없는 장난질(문학은 본질적으로 유희의 산물입니다)이 훨씬 위대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소설에서 서두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강조가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만, 이 책은 톨스토이의 그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 외에 다른 무수한, "불후의 서두"들을 첫 장에서 제시합니다. 사실 "가장 유명한 서두"는 제가 제 블로그에서 자주 꺼내는 화제지만(가장 유명한 마무리는 하디의 <테스>라는 것까지), 이 역시 지난 시절 일본인 호사가 그룹 일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당시 기준 자기네들끼리는 매우 운치 있었을) 천박한 순위매김 놀음에 지나지 않습니다(두 작품의 해당 구절들이 그런 불후의 가치를 실제 지닌다는 건 별론으로 하고라도). 이 책은 그런 화제 말곤 "서두"에 대해 할 이야기가 없는 이들에게 그 지적 빈곤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우쳐 주기라도 하듯, 방대한 작품들로부터 코믹, 휴머니티, 에로, 동심, 냉소, 달관 등 실로 다양한 예를 꺼냅니다. 구구단만 아는 사람한테 미적분과 해석학, 프랙털과 위상기하학 문제를 풀어 주는 식이라고나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건 이 책의 원제부터가 "톨스토이처럼 글쓰기"이며, 바로 이 1장에도 (딴작품도 아닌)<안나 카레니나>의 상당부분이 인용되지만, "그 서두" 이야기는 없다는 점입니다. 남들 다 하는 이야기는 (맞는 이야기라도)안 하겠다는 코헨의 "취향, 태도"를 엿볼 수 있죠.

가장 재미있게 읽은 파트는 2장입니다(제게 9장의 "섹스"는 매우 유익했지만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수준이 낮건 높건 작가의 세계로 초대된 독자가 일단 눈을 줄 곳은 당연히 등장인물, 캐릭터들입니다. 캐릭터가 1)최초로, 2)재미있게 3)강렬하게 (이상은 서평자의 정리입니다) 제시된 작품은 구조상 문제가 있거나 주제의식이 시대에 뒤떨어져도, 심지어 장르문학이라 해도 오래 살아남습니다. 셜록 홈즈가 이처럼이나 세계적으로, 또 끊임없이 리뉴얼되는 양상으로 사랑받는, 또 뤼팽이 현대에 들어 외면되는(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어렸을 때 만난 최초 각인이 그처럼 중요하겠고, 또 저는 캐릭터를 넘어 르블랑의 스타일까지 좋아하죠) 이유도 아마 여기 있을 겁니다. 이 2장에서 비로소 <리옹 도르의 여인>(국내에도 번역되어 있죠)의 작가 세바스천 폭스(출판사에 따라 표기가 다릅니다)의 대화가 인용되어, "톨스토이처럼 쓰란 소린가?"라는 그 알려진 한 마디가 나옵니다(이 책의 영어 원제가 바로 여기에 근거를 뒀죠). 키플링의 그 작품(<배서스트 부인>)에 나오는 비커리 씨의 별명을 이 책은 "딱딱 비커리"로 옮기는데, 요즘 젊은 층에서 유행하는, 허풍을 즐기는 돼지 같은 늙은이들을 비꼴 때 "틀딱(틀니 딱딱의 준말로 치아, 눈 등 신체 기관이 부실해진 상태를 조롱)"이란 말과 통해서 재미있습니다. 책에 안 나와 있으나 원어는 "Click"입니다.

3장은 뜻밖에도 "표절"이 주제입니다. 코헨은 독자인 제 기대보다는 다소 느슨하게, 이 부도덕한 실정법 위반 행위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동정심까지 표시하면서 문학사상 무수히 빚어진 표절의 사례들을 거론합니다. 영미권에서는 국어(영어) 교과서에, 작문 파트에다가 특별히 plagiarism을 주제로 거론하고서는, 어떤 경우에도 이런 수치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된다며 (국어 교과서에다가) 윤리적 훈령을 이례적으로 내리는 게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바른 가치관을 함양해야 한다는 의도죠. 알만큼 뭘 아는 성인 대상의 이런 책에도, 너무 표절 이슈를 너그럽게 다뤄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혹 재미로 다양한 사례를 거론할 수는 있지만, 장 말미에는 쓰디쓴 한 마디 독설로 파렴치한 돌머리들을 조롱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시점(퍼스펙티브) 이야기를 끄집어 내면서 이만큼이나 해명되는 주제가 많습니다. 인물, 화자가 광인일 때, 모험가일 때, 성인(聖人)일 때, 철없는 유아일 때, 여성일 때에 따라 다 각기, 같은 1인칭 3인칭이라고 해도 이후 작품이 취하는 구조나 노선부터가 달라집니다. <뻐꾸기 둥지..>(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유명하지만, 책에 나오듯이 소설 발표 연대는 몇 십 년이나 앞이죠)의 예에서 잘 드러나듯, 사건에 참여하지 않는 관찰자 시점이라 해도 그 화자는 전개되는 이후 사건(이전이라 해도)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 이런 의미에서 "화자에의 거리"와 시점이 얼마나 불가분의, 결정적인 관계를 가지는지 시원한 해명이 돋보였습니다. 표현은 평소에 못했지만 생각해 보니 과연 그렇겠다 싶은 독자의 공감을 이처럼 전폭적으로, 그러면서도 자분자분 끌어내는 저자 코헨의 말솜씨가 탁월한 게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대화"는 가장 사실적인 묘사 같으면서도 전혀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실제의 대화를 충실히 재현한 기록이 사람이 읽기 가장 어려운 류라고 지적해 왔죠(신문 기사에 난 "녹취록" 같은 걸 떠올려 보십시오. 이런 걸 짧은 시간에 정확히 해독하려면 민완 검사쯤이나 되어야 합니다). 책에 나오지는 않지만 (바로 앞 장에서 거론된) 의식의 흐름(내면의 "대화'라는 점에서)이라든가, 혹은 휴버트 셀비 주니어의 <브루클린으로..>만 봐도 이 타당성이 확인됩니다. 저는 이 장에서 <캐치22>의 그 미친 듯한 문장이 인용될 걸 기대했는데 안 나왔고, 대신 앞 앞 장 "캐릭터"에서 저 작품이 이런저런 토픽의 근거로 쓰입니다.

"아이러니"는 천재적 단편 작가로 손꼽히는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왜 명작으로 남게 했는지 그 비결을 가르쳐 주는 단서입니다. 챕터의 제목이 따로 "비밀문"으로 붙은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다. 문학이란 현실의 모사(模寫)가 아니라 재현(리프레젠테이션)인데, 우리가 특이하다 싶은 풍경, 구조, 형상을 구경하는 것도 단지 그 외형을 시각적으로 익히기 위해(범죄 수사관이나 스포츠 경기 판독관이 아니므로 이런 훈련은 필요 없죠) 시간을 쏟는 건 아닐 겁니다. 그런 시각적 이미지들이 부르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과 영감을 통해, 고정된 현존의 제약이 아닌 다른 가능성(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 만약 이게 없다고 판단한다면 그 문학이 비관주의 염세주의 허무주의가 되는 거고)을 모색해 보는 겁니다. 화제 미드 <웨스트월드>에서도, "황홀경(trance)"에 빠져드는 호스트들을 두고 버그라고 진단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처럼 다른 가능성을 꿈꾸는 건 역시 인간만의 특권이죠. 왜 아이러니가 트랩도어(이 책에서 "비밀문"으로 번역)냐면, 전혀 맞닿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두 지점이 문 하나로 연결되어 "결국은 같은 것이었군!"의 경악, 허탈, 구원을 안기는 기능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해, 소설을 읽는 우리 모두는 이런 아이러니의 미친 불의타를 맞아 보기 위해 빠져든다고 해도 됩니다. ("황홀경" 토픽도 저 2장, "캐릭터" 편에 다른 맥락에서 잠시 언급되더군요)

"픽션" 챕터에서는 사실상 플롯을 다루고 있는데, 소설에서 플롯이 차지하는 의의를 감안하면 분량이 좀 짧습니다. 하긴 플롯 이야기를 앞 장들에서 수다 떨다가 다 해버렸으니 할 말이 안 남기도 했겠죠. "산문의 리듬(왜 산문이냐면 제목부터가 "소설쓰기"이고, 저자분의 주전공이랄까 관심사도 한계가 있어서지 싶습니다)"은 사실 이런 번역책에서는 전달에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원문을 찾아서, 소리 내어 읽어 보는 게 좋겠네요. 사실 아무리 산문이라도 최소한 내적인 리듬이 있는 터라, 낭독이 결여된 책읽기는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한국 문학에서는 (당연히 한국인 독자를 상대로 하면서도) 이런 문학의 기본기를 염두에 두는 예가 많지가 않다는 것도 참 신기합니다.

9장 제목 "조로"는 물론 早老가 아니라, 제가 두 주 전 책프에서 다루기도 했던 의적 캐릭터 Zorro를 뜻합니다. 정작 해당 챕터에는 조로 이야기가 없고, Som en Zorro에서 그대로 따온 것 같네요(이 코헨의 책은 따끈한, 무려 2016년작입니다). (글로 쓰는) 섹스를 조로 스타일로 하라는 말은 해당 쳅터를 다 읽고 나서도 감이 안 올 수 있지만, 그냥 영화 속 조로 이미지를 떠올리는 걸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10장과 11장의 "보고 또 보고"는 재미있는 번역인데(십 몇 년 전 드라마 제목도 연상되고), 퇴고를 가리키는 "리비전"을 어원으로 푼 것이겠습니다. 12장은 당연히 "전설적인 엔딩들"에 대한 수다이며, 당연히 일개 독자인 제가 이런 유명한 출판인과 기량을 겨룰 수는 없겠지만 닉 혼비의 위트 가득한 에세이집(그러니 얼마나 많은, 소설 외의 문학 작품들이 이 책에서 거론되는지 짐작될 겁니다)을 예로 드는 대목에서 참 어지간하시다 하고 감탄이 나왔습니다.

이런 책의 해악(?)이라면, 정말 수천 년의 문학사가 낳은 걸작들을 채 읽지도 않고, 이런 멋진 책의 감상이나 취향만 흉내내면서 다 읽은 양 허풍을 치는 엉터리들이 늘어날 수도 있다는 점이겠습니다. 문학사는 따분할 수 있지만, 이런 안목 높은 편집자가 늘어놓는 책수다는 본격 연구서보다 문학의 무궁무진한 성취에 대해 더 많은 걸 독자에게 가르쳐 줍니다. "지대넓얇"을 정말 "지대로" 함양시켜 주겠지만, 그 무엇도 원작이 주는 감동과 교화, 쾌락에는 비길 수 없고, 심지어 이런 책도 원작들을 읽은 독자에게나 제대로 그 가치를 전달해 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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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실전회계다 - 기초에서 고급까지 한 권으로 끝내는
김수헌.이재홍 지음 / 어바웃어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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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직장인들은 못하는 것 모르는 것이 없어야 살아남습니다. 아이들에게 코딩을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기사가 나자 IT쪽 사람이 대뜸 한다는 말이 "전문인력을 싸게 먹으려는 획책"이던데, 그 사람 입장에선 위기의식에 그런 말이 나왔을지 몰라도 변화하는 세상에 본인이 적응하는 것말고는 아무 대안 없습니다. 아이들은 물론 현재 회사에 몸 담은 이들도 배울 게 생기면 코딩 아니라 뭐라도 당연히 배워야 합니다. 하물며 문명 사회의 상업 발달사와 궤를 같이하는 회계에 대해서라면, 자신이 운영하거나 몸 담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나, 하다못해 주식 투자시 정확한 의사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도 이에 눈감을 수가 없습니다. 회계는 이미 교양이며, 그것도 필수 교양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회계지식에 밝아지면 안타깝게도 회계사들 일거리가 줄어들겠지만, 역시 해당 직종 종사자들이 걱정해야 할 문제일 뿐이며(현실이나 대세는 받아들이는 것 말고 답이 없죠), 일반인들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책 뒷면의 이한상 교수님 추천사를 보면 직장인들(혹은 누구라도)이 언제까지 "회알못" 신세에서 못 벗어나겠냐며 자극을 주시는 표현이 있으며, 본문에는 "얼마나 많은 회사가, 단지 회계에 무지하다는 이유로 손해를 보는지"를 개탄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알못"이 아니라 "잘알"이 되면 아직까지는 이익을 볼 수도 있는 국면이란 뜻도 됩니다. 이 국면이 지나면 애써 공부해 봐야 또 그저 현상유지, 남보다 뒤처지는 신세나 간신히 면할 뿐이니 때를 놓치지 말고 당장 지금 공부해야 같은 수고를 들이고도 보람이 크게 남을 것입니다.

시대의 이런 니즈를 다분히 고려해서인지 회계 대중서는 몇 년 전부터 여러 권이 나왔고, 그런 책들의 문제는 "알기 쉽고 타당한 내용들이지만 읽고 나면 남는 게 없고, 남는 게 있다고 해도 (수준이 낮아서)자신의 업무에 적용을 못한다"였습니다. 사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대중서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가질 수가 원래 없는 법이며, 어렵더라도 교과서를 사서 공부하거나 성인 대상 강좌를 듣거나 해서 정석대로 공부하는 길만이 답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일시적인 팁이 아닌 항구적으로 써 먹을 수 있는 지적 자산을 갖추려면, 대학생 때 전공자가 공부하듯 정성을 들여 정코스에 가까운 방식으로 공부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뜻에서입니다.

이 책은 펼치는 순간 "제목값을 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확 오더군요. 말 그대로, 단편적이고 사항 지적, 초보 개념 정리 수준에 머무른 지식이 다루지 못하는 과제(즉 현실에서 벌어지는 케이스 형태의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문제의 시작부터 끝까지 명쾌한 진단을 내려 주고, 그 풀이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제기되는 다른 회계 이슈까지 자상히 짚어 주는, 1) 실무에 도움이 되면서 2) 회계 스킬의 깊이 있는 응용이 가능하게 돕고 3)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경지가 어떠한지를 가르쳐 주는 내용입니다. 일반 회사원들도 도움이 되겠지만, 시험을 갓 통과한 초보 회계사들이 아직은 자격증만 갖췄을 뿐 자기 업무가 뭔지 조망할 만큼 감이 안 올 때 읽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현금흐름표가 뭔지 하는 구차한 설명은 다 생략하고, 첫부분부터 "이 회사가 장사를 잘하는지, 비전이 있는지 어떤지를 보려면 재무제표 어느 부분을 봐야 하는지"부터 시원시원하게 찌르고 들어갑니다. 나이 드신 분들 중 예전 기업회계기준으로 배우신 분들은 이후 IFRS, 또 그 후 K-IFRS가 도입된 후 어떤 부분이 바뀌었는지 잘 모르실 겁니다. "포괄손익"이라고 하면 감이 안 올 수 있지만, 이 개념의 대표적 항목이 "자산재평가 이익"이면 그제서야 뭔가 친숙해지겠죠. 이 자산재평가는 특히 외환위기 이후 종래 보수적인 기업 자산 평가 기법을 개선하여, 크게 변화된 경제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 실무진과 학계에서 중점논의된 바 있습니다. IFRS 도입 논의보다 한참 전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이 항목은 "당기손익"이 아닌, 대차대조표의 "자본" 항목으로 가서 해당 회사의 가치 평가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결론적" 단정을 책에서는 친절히, 그리고 날카롭게 정리해 줍니다. 모르시는 분들도 어차피 재무제표가 다루는 사항이 빤하니 이거 아니면 저거라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이처럼 이 책의 강점은, 맥아리 없는 팩트 나열만 하다 끝나는 게 아니라(대중서, 입문서 중에는 이런 게 너무 많습니다), 특정 원칙이나 개념의 획정이 당신의 실무에서 갖는 의의가 뭔지를 확실히 짚고, 독자로 하여금 "큰 그림을 보고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어쩼단 말이냐?" 같은 독자의 반문을 처음부터 해소시켜 주는 게 가장 돋보입니다.

회사원도 아니고 주식 투자에도 관심 없는 그저 일반 독자라 해도(즉 집에서 살림만 하는 분들이라도) 재미있게 읽을 만한 파트가 있습니다. 바로 백화점 매출 1~3위가 각각 어디인지, 또 꼴찌는 어디인지 같은 지극히 흔한, 그러나 다 알고 떠들어도 여전히 재미있는 화제로 시작하는 장입니다. 물론 "실전회계"를 가르쳐 준다는 책이 시시한 화제로 내용을 채우진 않습니다. 아주 일상적인 수닷거리로 말문을 연 후, 백화점이 각 개별 매장의 매출을 어떤 다른 방식으로 집계하고 자신의 장부에 반영하는지 같은, 매우 현실감 있는, 그러면서도 하드한 토픽으로 바로 넘어갑니다. 백화점의 이런 매출 처리 방식 하나를 두고서, 그만큼이나 많은 "회계 토픽"이 굴비 엮이듯 주루루 나온다는 게, 이 분야에 결코 낯설지 않은 독자 입장에서 읽어도 참신하고 뭔가 새로운 느낌이 오더군요. 진지하게 자신의 "회계 내공"을 쌓아가고 싶은 중급자 이상의 회사원은 물론, 회계사들도 읽어서 유익하겠다 싶은 대목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이한상 교수님의 추천사 일부를 다시 원용하자면, "탁월한 직관의 힘" 같은 게 바로 이런 데서 드러나는 거겠습니다. 달인은 본래 부분을 응시하면서도 전체를 꿰뚫어 보는 게 달인이니 말입니다.

창업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비록 엄두를 못 낸다고는 하나) 지하층 푸드코트부터 해서 그 많은 백화점 내 매장들이 본점과 어떤 식으로 손익을 배분하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거대 업체는 직매입이냐 특정매입이냐로 나뉘고(직매입은 백화점의 직접 매출로 계상[計上]됩니다), 그 외 영세한 매장은 대부분 공간임대 형식인데 이게 갑/을로 나뉩니다. 갑/을은 갑질한다 할때 그 갑이 아님은 물론이고, 직장인들 소득세 뗄 때 갑근세 어쩌구 하듯 편의상의 부호일 뿐입니다. 갑型은 임대료만 받고, 을型은 구체적 수익을 비율에 따라 나누는 식이죠. 예전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도조/타조 구분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게 회계지식의 본체에는 속하지 않지만, 회계라는 단일 영역에 시야가 국한된 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두루 밝은 저자가 특정 화제로부터 끊김 없이 연관 분야의 실태를 주룩 짚어 주는 점이, 이 책을 소설책처럼 읽히게 하는 큰 원동력 중 하나입니다.

추천사에서도 소개된 부분입니다만, 이 책의 강점은 최신, 정말 최신 시사나 화제 사건으로부터 논의의 실마리를 물고 오는 태도에도 있습니다. 교과서를 파고들 때 가장 지루한 건, 지금 공부하는 이 지식이 배워서 어디에 응용되는지 확신이 안 설 때이며, 이때 공부가 의미없는 부호 암기처럼 지겨워지고 고비를 맞습니다. 이 책은 그렇기는커녕 (좀 정치지향 아닌가 싶게) 거의 매 챕터가 처음부터 화제성 회계, 금융 스캔들부터 짚고 넘어가는 식입니다. 동료들끼리 모여서 얘기를 해도, 남들 따라 "뭐가 잘못됐네 도둑놈들이네 " 목소리만 높이는 건 그저 동네 아줌마들 수다 수준을 못 벗어납니다. 직장인(남녀 불문)들 대화가 그 선을 못 넘으면 어디가서 말도 못 꺼낼 만큼 창피하죠. 대우조선 분식회계가 범죄로 들통났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항목을 어떻게 건드렸는지, 원칙은 어떠해야 하는데 그런 장난질을 쳤다는 건지 핵심은 언급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핵심을 모르고 남들따라 목소리만 높이니 무식하단 소릴 듣는 거죠.

2014년에 크게 화제가 되었던 모뉴엘 사기 사건을 소재로 삼아, 이 책은 해당 파트에서 "매출 채권의 회계 처리 방식이 어땠기에" 그토록 회사 가치가 널뛰기를 하고 난다긴다 하는 금융기관의 담당자들을 감쪽 같이 속여 사기 대출을 받아내었는지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이걸 읽고 그대로 따라들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기우인 게, 이미 수법이 널리 알려진 건 재탕이 당연히 어렵죠. 반면 누가 유망하다며 주식 투자를 하라고 꼬드기거나, 사장님한테 와서 지네 회사 괜찮다고 파트너십을 권유하거나 할 때 이게 빈껍데기 허당인지 뭔지 알려면 이런 "매출 채권" 처리 방식이 뭔지를 알아야 누구한테 당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도, 최소한 억울한 피해를 못된 놈들에게 입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식으로 무장하고 내공을 다지는 길밖에 없다는 점 다시 확인이 됩니다.

사실 "매출채권"뿐 아니라 모든 거래사건(이런 말을 씁니다)이, 자산, 부채, 자본, 수익, 등 8개 항목 어디에 배치를 하는지가 회계의 핵심 관건이며 회계사의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이걸 공정타당한 준칙에 의해 처리하면 윤리적 기업이고, 규정의 허점을 이용해서 남 못 보는 구석에서 장난을 치는 게 분식회계입니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뭐가 그 회사의 "재산(회계용어는 아닙니다)"인지 그저 "빚"인지 명쾌하게 구별이 잘 되질 않습니다. 회계용어 "자산"은 일상용어 "재산"과는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자산 대변"의 모호한 영역에는 정말 별의별 게 다 들어가고, 이걸 알아볼 능력 없는 이들이 사기꾼에게 당하는 거죠. 또, 별 확실성이나 근거가 없는 항목을, 그저 회계에 무지하다는 이유로 꾸역꾸역 자산으로 계상하는 기업들이, 이후 세무 당국에 의해 형편에 비해 크게 불리한 처분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알려면 그 중요한 관전포인트 중 하나가 금융사고, 회사 도산 따위가 어떤 경로로 벌어졌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지금은 정치나 군사 정변이 일반인들의 삶을 바꿔 놓는 주된 요소가 아니라, 경제 섹터 중요한 곳에서 무슨 변동이 일어나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세상입니다. 누가 떳떳지 못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면, 그 흔적은 범죄 현장의 DNA처럼 장부에 그대로 남습니다. 회계야말로 경제의 운용상과 실체, 미래의 전망까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청사진이나 타임라인과도 같습니다. "실무"와 "시사"와 "화젯거리"와 학문으로서의 회계를 이처럼 예술적으로 접합시킬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할 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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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의 긍정 경제학 -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한다
자크 아탈리 외 지음, 권지현 옮김 / 청림출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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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긍정 경제"가 대체 뭘까요? 자계서에서 흔히 주장들 하는 것처럼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라.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같은, 너무도 흔하고 뻔한 내용에 질린 독자들은 저 "긍정"이란 단어만 듣고도 지레 손사래를 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가 이 신저에서 대단히 체계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인 의도(무슨 뜻인지는 서평 후반에 설명하겠습니다)로 전개한 맥락에서의 "긍정" 혹은 '긍정 경제'는 그런 것들과는 사뭇 다른 빛깔을 띱니다. 첫째 담론의 초점이 개인을 넘어 최소 개별 국가(대개는 프랑스를 염두에 두었지만, 우리 한국에 직접 적용할 것들이 많습니다)를 염두에 두었으며, 둘째 진보적이고 포용적인 세계관에 바탕한 논의이며, 셋째 그러면서도 개인과 정부, 국제 단체가 곧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프로젝트와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대석학들의 책에서 간혹 당혹스럽거나 때때로 짜증스럽게 다가오는 대목은, 고아하고 심오하지만 추상적인 어휘로 일관하여 결국은 읽는 이가 무엇을 당장 가까운 현실 속에서 행동에 옮길 지 감을 못 잡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 책도 그런 단점이 전혀 없지는 않고, 특히 국제 정세의 향방이라든가 패권의 소재에 대해 막연하면서도 흔한 진술을 장식처럼 남기신 대목이 있긴 합니다. 추상적이라고 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소재와 대상, 글의 형식에 따라 낄 자리 안 낄 자리가 따로 있다는 이유에서지요. 이 책은 여전히 "긍정"의 개념이 이론적으로 명쾌히 제시되지는 못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지만, 대신 저자가 뭘 말하려 들었는지는 어떤 독자라도 납득했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긍정 경제"에 대해 정치한 개념 제시를 했더라도, 논의의 방점이 "실천"에 놓인 이상 또다른 형이상과 추상의 장에 큰 정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긍정 경제"는 현존 개념 중 가장 가까운 것을 끌어대자면 "사회적 책임(사회학을 넘어 경영학 개념이죠)", "연대", "환경적 가치", "지속가능한 발전" 등을 다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럼 새로운 게 없지 않은가. 제 생각으로는 1) 그 모든 기존의 지표를 더 큰 상위 개념에 묶은 것으로도 일단은 주목의 가치가 있고(앞으로 많은 학자들이나 운동가들의 지지를 얻을지는 두고 봐야 하겠습니다만) 2) 이른바 성장의 한계라든가, "제로 성장"을 전제로 한 모든 논의와 책 속에서 분명히 선을 긋는다는 게 분명한 특징입니다. 즉, 저자 자크 아탈리는 "앞으로도 성장은 계속되어야 하며, 실제로 성장의 동력은 발견 중에 있다"는 주장입니다.

자크 아탈리의 새로운 관점에서 "긍정"은 "낙관"을 포함합니다. 이 책 서두에는 1972년 그 유명한 로마 클럽 보고서를 자주 거론하는데요. 이 책이 의도하지 않게 후세와 당대에 끼친 부정적(평범한 의도로 썼지만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좀 다르게 다가오네요) 영향이라면, 이제 인류의 번영과 성장은 그 한계에 다다랐으며, 그 미래는 암울하다는 쪽으로 잘못 선입견을 새겨 두었다는 겁니다(저자에 따르자면). 해당 보고서는 지금의 추세로 자원을 소비하면 가까운 미래에 남아날 것이 없다"는 경고였지, 인류가 이대로 아포칼립스를 맞으리라는 불길한 예언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또, 만약 해당 로마 클럽 보고서를 그렇게 새긴다면, 이 책 역시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부정 경제, 부정 미래"를 예고하는 이상이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물론 저자의 의도가 정반대편에 있음도 명백하고 말이죠.

"긍정"은 그런 의미에서 조건부 긍정이고 조건부 낙관입니다. 인류는 번영을 계속해야 하고, 성장 역시 (이 책 후반부에서 구체적으로 제안되는 것처럼) 지속될 수 있고 지속되어야만 한다는 쪽입니다. 다만 저자가 전제로 삼는 바는 "개인적, 소모적 탐욕, 제로섬 게임 전제의 모든 룰을 타파"하고 나서야 이 모든 긍정적 낙관적 전망이 가능하다는 거죠. 저자의 주장이 추상적이고 공허한 도덕 담론으로만 다가오지 않는 건, 이 책에서 인용하거나 근거를 둔 방대한 사례와 통계 자료 덕분입니다.

저자는 "예언, 예측"을 하는 게 아니라, (이게 중요한데요) 이미 세계 경제 각 섹터에서 현저히 그 조짐이 드러나는 중인 "긍정 경제의 씨앗"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합니다. 일방적인 기대가 아니라, 이미 "긍정 경제"는 생존의 바른 길을 찾으려는 종(種)의 필사적인 노력에 의해 실체가 드러나는 중이라는 뜻입니다. 종은 시행 착오를 통해 바른 길을 언제나 발견하며(못하면 멸종이죠), 8년 전 서브프라임 위기 당시 조급한 이익 회수 욕구, 원칙을 벗어난 투기 붐 과열로 뜨거운 맛을 본 인류는, 어느정도 정신을 차리고(최소한 그 일부는요) 이 방법이 안 통하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각성했다는 거죠. 이 역시 어떤 도덕적 각성, 윤리적 성숙이라기보다(물론 그런 면도 당연히 있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런 각성(각자도생보다는 협력이 살 길이다)을 일깨운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처음부터 협업과 팀웍을 통해 진화의 승리자가 된 종이기도 하겠고 말입니다.

저자는 그전부터 과도한 유동성의 폭주가 결국 경제의 탐욕과 불건강성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리버럴 스탠스의 케인지언들과도 일정 선을 그어 온 학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통화주의자들(이 책에도 밀턴 프리드먼의 재미있는 인용구가 나와 보면서 웃었습니다만)과의 세계관과는 (당연히)정면으로 대치한다는 건 또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백 년을 버틴 금융기관이 어떻게 단 몇 년 만에 무너지는가? 사실 책에는 안 나와도 이는 지난번 봇물이 터지기 전에도 이미 1995년 베어링스 도산 사태때 예고되었던 바입니다(그거 한 번 언급하셨으면 좋았을 건데). 규제를 푸니 당장 돈이 몰려들어 좋긴 한데, 분별없는 직원이나 클라이언트들이 재미를 들여 한 발 한 발 선을 넘다 대형사고를 친 거죠. 이제 배울 만큼 쓰디쓴 교훈을 충분히 배운 사람들이, 자신도 파괴하고 남도 못살게 만드는 미친 레이스를 중단하고, 합리적 협업과 연대의식으로 전략의 새판을 짤 때가 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역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처음에서 인용하는) 애덤 스미스의 그 유명한 비유와 도그마가 시공을 넘어 접합점을 다시 찾습니다. 저자의 의도는 "나 역시 스미스와 다른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쪽입니다.

저자의 의도에는 다분히, 종래의 살인적 경쟁이 "긍정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단정이 깔려 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라 돈 좀 벌겠다는데 나무 좀 자르면 어떻냐, 강물에 폐수를 풀면 어떻냐, 온실 효과 근거 없는 소리 아니냐, 애들이나 부녀자들 공장에서 착취한다 한들 시장 원리가 그런데 어쩌란 말이냐, 이런 마인드가 결국은 기업주 자신의 양심도 침해하며, 기업주 개인의 후손들이 여전히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할 지구를 망친다는 점에서 자해 행위라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자계서와는 달리) 그런 약탈적 자본주의가 긍정이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 책의 압권은 제6장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레닌의 유명한 논문 제목이 아니라도, 저자는 독자들의 갈증을 선제적으로 채워 주기 위해 무려 45가지의 제안을 합니다. 이 중 일부라도 각국 정부와 국제 단체가 실천에 옮겨 보라는 것이며, 자신 역시 선구자들의 실천에서 영감을 받아 정리한다고 합니다. 석학의 책에서는 다소 보기 드문 형식과 편제이며, 우리 독자도 개인 차원에서 중앙 정부나 지자체에 청원하거나, 일상에서 작은 실천에 옮길 만한 것들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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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 이상설 평전 - 독립운동의 선구자
김삼웅 지음 / 채륜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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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재 이상설 선생의 존함은 교과서나 성장기 필독서 위인전 등에 자주 나옵니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를 고종이 파견했을 때, 세 분의 특사 중 한 분이기 때문이죠. 현지에서 순국한 분은 이준 열사이지만, 보재는 회의장에 참석하여 불법적으로 국권을 강탈당하기 직전이던 우리 민족의 입장을 성명으로 표현하려 했던 역할이었습니다.

뿌리 깊은 양반 집안의 후손인 그는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일찌감치 벼슬길에 접어들었습니다만, 하필 시국이 망국으로 치닫던 판이니 젊은 엘리트가 편안히 청운의 꿈을 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방관으로 임용되는 경로보다는 주로 학예의 부문에서 자신의 기량을 펼쳤던 그는 공맹의 법도도 법도지만 거대한 서세동점을 이끄는 제국주의 세력의 배후 실력을 이루는 문명의 힘이 무엇인지에도 관심을 끈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자질이 총명했던 그는 낯선 서양 문물을 소개한 책들을 어렵사리 구해 읽고 무엇이 요체인지 곧 깨달아 이를 후학들에 교습 전파하는 데 역량을 쏟았습니다. 아무래도 그의 적성은 행정이나 실무 보다는 순수 학문의 연구 쪽이었기 때문이겠습니다.

보재의 선구자적인 면, 혹은 지행합일의 인격자적 측면은 여기서 잘 드러나는데요. 시국이 극도의 난맥상에 빠지고 일제의 한반도 우세가 시시각각 현실로 굳어지는 판에, 명분도 실리도 없는 관직을 더 이상 쥐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민족과 대의명분에 헌신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영의정직까지 올랐던 그이지만, 망국의 설움이 현실이 되어가는 정국을 보고 따뜻한 아랫목만 보전할 생각이 그에게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기 전, 이미 그는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한 후, 이의 공개 파기를 황제에게 권했습니다. 성격이 곧고 단호한 그의 일면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부분인데요. 이런 행동은 일제의 눈에 크게 거슬러 일신상의 위험도 당할 수 있는 행동이고, 무엇보다 고종에게 부담을 안기는(그러나 타당한) 신하로서의 충언 충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소신으로 확정된 바를 거리낌없이 행동으로 옮기고 일단 과단성 있는 행동이 이뤄진 후에는 추호의 후회도 품지 않는 그의 면모는, 우리가 동양 고전에서 익히 읽어 오던 지사, 열사, 충신, 의사 들의 행적과 조금의 차이도 없습니다. 그는 공맹 이래 유가의 지식인이 걷곤 했던 노선에서 조금도 이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배우고 익힌 바가 인격의 화체, 실제의 행동으로 이처럼 그대로 옮겨지는 그의 풍모는, 국권 상실 후 자연스럽게 뜻있는 이들이 그의 휘하에 모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선생은 이후 주로 노령에서 그의 주된 기반을 잡고 애국 활동을 전개했는데요. 아무래도 그의 배경이 배경이니만치 "애국 계몽 운동"적 노선이 주된 모습이지만, 임시 정부에 가까운 공권적 단체를 결성하여 "멀지 않는 장래에 국내 진공"을 목표로 삼은 그의 모습에선 종합적 우국 지사의 다양한 면모가 고루 드러납니다.

저자는 그런 평가를 내립니다. "해방공간에서 보재 같은 이가 정치활동의 중심에 섰다면 우리의 정치사는 사뭇 다른 방향을 틀었을 것이다." 이는 연륜으로 보나 거친 관직의 높이로 보나 보재 정도의 배경을 가진 지도자(사실 이승만보다 6,7년 연상이므로 물리적 생존이나 정력적인 활동이 가능했을지는 의문이지만)라면 민족 정기를 보다 중시하는 진영이 큰 동력과 구심점을 가졌으리라는 기대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3. 1운동에 2년 앞서 서거했는데요. 그 최후의 모습도 면암 최익현이나 기타 충의지사가 자발적으로 맞이하던 양상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빼어난 자질과 단심을 지닌 지도자들이 항일 국면에서 이처럼 빨리 사라진 것도 우리 민족과 국운을 위해서 안타까운 요소였다고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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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를 대비하라 - EU 집행이사회 조명진 박사
조명진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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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죠. 사실 돈은 거짓말도 안 할 뿐 아니라 오판도 하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의 돈은 잦은 실수를 범하지만, 간절히 이익을 바라는 마음과 마음들이 합쳐진 대세는 대개 미래를 정확히 맞힐 뿐 아니라, 심지어 미래를 형성하기까지 합니다. 브렉시트가 언론과 학계의 (희망섞인) 바람을 정면으로 배반하고 국민투표에서 가결되었을 때 시장은 처음엔 혼란상을 보였지만, 이후 차차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이는 시장(곧 "돈")이 바라본 미래가 그리 불안정하거나 비관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후 브렉시트 변수는 그보다 큰 폭으로 장을 흔든 다른 사건들과 뒤섞여 무엇이 그 순수한 효과인지 알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는데, 여기서부터는 전문가의 진단이 필요하죠. 그것도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실 다른 배경색 때문에 혼란이 유발되는 불리한 점 없이 "그것만의 순작용"을 캐치하려면 초기에 정밀한 관측을 반드시 해 내야만 합니다. 조명진 박사님의 이 책은 그런 관측자들, 혹은 이후에라도 대세를 정확히 추적하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좋은 지침을 마련해 줍니다.

작금의 세계적 대세는 globalization이 아닌, (책의 표현대로) 국수주의 유사의 어떤 것입니다. 딱히 국수주의라고 규정하기도 어려운 게, 일단 흐름을 이끄는 지도자가 분명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무엇을 주장하기보단 현재의 대세에 저항하는 "소극적"인 흐름이며, 결정적으로 이런 움직임이 그리 장기적인 추동력을 가질 것 같지 않다는 이유에서입니다(물론 어디까지나 희망섞인 추측이지만). globalization이 불과 20년전만 해도 세계의 미래를 완전히 결정지을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여겨졌는데 이처럼 가까운 시점에서 커다란 장애물을 맞을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을 겁니다. 아직도 학부 교과서(분야 불문)는 globalization을 대전제로 삼고 각론을 전개해 나갑니다. 이제 어린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까지 수정이 이뤄져야 할 국면일까요? "브렉시트"는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사건이라기보다, 향후 이를 계기로 전체의 국면이 완전히 바꿔질지 그 상징성을 놓고 붙는 타이틀에 불과합니다. 이 책도 그런 분석과 예측이 내용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럽의 통합은 원래 보수당(영국의 그 정당뿐 아니라 각국의 우파를 대변하는)에서 주도하던 것입니다. 미국이 단일 시장, 거대 영토, 축적된 자본으로 세계의 패권을 쥐어 가자, 자신들도 종래의 각개 약진상을 유지해서는 가까운 미래에 도태되리라는 절박감이, 특정 산업의 효율화(석탄, 철강 기반)라든가 "단일 시장의 형성"을 일단 목표로 만들기 시작했었죠. 노동과 자본을 싼 값에 이용하려면 이런 자본가측의 단일 대오 형성이 시급한 과제였고, 분명한 전망을 할 수 없었던 노동자측은 이에 저항하는 게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현 영국 노동당 당수 코빈 같은 사람). 그러던 게 주로 수정주의자, 혹은 지식인 좌파를 중심으로 "차별 없고 국경 없는 연대와 평화"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었고, 일정한 정책적 양보 끝에 우파가 노선 일부를 수정함으로써 양측이 합의에 도달, 항구적인 동력을 얻기에 이르렀죠.

좌우 양쪽이 공감하는 정책이 왜 이런 저항을 맞고 있는가? 저자는 명쾌하게 두 가지 논점을 듭니다. 하나는 이민자 감소, 다른 하나는 알지도 못하는 먼 곳에 사무실을 두고 결정을 내리는 관료제에 대한 반발입니다. "이민자 감소"같은 이슈가 이 소동의 중심에 선 걸로 보아 현재의 움직임이 어떤 이념적 기반까지를 지닌 건 아닌 게 확실하며, 이 때문에 "포퓰리즘" 같은 일시적 변덕이나 집단 감정 표출 정도로 격하하는 쪽도 있는 것입니다. EU 출범의 목표 중 하나가 단일 노동 시장 형성을 통해 인건비를 절감하자는 쪽에 분명히 있었던 만큼, 이제 국경 철폐가 명백한 현실로 다가온 지금 특히 노동자층이 가부간에 분명히 무슨 의사표시를 할지가 표면화되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노"를 투표로 표명했고, 아직까지는 개별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해야 할 체제의 룰에 비추어 이는 존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 명백한 "임기응변"식 대응을 현재까지는 보이는 트럼프도, 자신을 찍은 자국의 개별 노동자들의 "긴급하고 당면한" 요구에 부응하는 모습이 분명해 보입니다. 미국 역시 이주 노동자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골치를 앓는데, 이는 멕시코와의 엄존하는 국경이 아직 철폐되지 않았는데도(nafta는 장기적으로 이를 추구합니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라틴인들 때문에 촉발되었고, 하루이틀 지속된 문제가 아닌 만큼 단칼에 해결되기는 매우 어려우며 무엇보다 미국의 자본가들이 이를 암암리에 반기고 있습니다. 빌 클린턴 행정부 당시 재닛 리노가 불법이민자 여성을 베이비시터로 고용한 데서 크게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듯, 이미 뚜렷한 현실을 형성한 "불법"을 마냥 방치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거 추방이나 방벽 건설(그것도 상대국 부담)으로 밀어붙이기도 매우 어려운 현실입니다. "브렉시트"와 직접 관계가 없는 미국의 사정도 현재 이런 판입니다.

미국은 불법이민자를 국외로 추방하고, 영국은 "국민의 뜻에 따른 이혼"을 감행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요? "브렉시트"로 촉발된 국수주의가 지속성을 못 가지는 이유는, 이런 일시적 과거회귀 움직임이 더 많은 사회 문제, 경제난을 낳을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영국은 거대 시장에서 고립된 후 과연 누구와 경제 파트너십을 새로 쌓아야 할까요? 해가 지지 않던 식민 영토도 다 잃은 판에 말입니다. 영국산 물품에만 관세가 높이 붙으면 어느 나라에서 이들 상품을 사 주겠으며, 보복으로 관세 장벽을 높인들 고충을 겪는 건 자국 노동자층입니다. 결정적으로 심각한 건 기업들이 아예 EU로 본거지를 옮기려 드는 경우입니다. 트럼프처럼 일일이 정치인들이 나서서 딴지를 걸거나 협박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저자께서는 달러의 장래가 불투명하므로, 향후 강세를 보일 전망이 있는 타국의 통화로 품목을 분산한 투자 전략을 짜는 게 중요하다고 합니다.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때 금값이 등귀하고 시장이 혼란스런 움직임을 보였을 때 전문가들이 내놓은 조언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게다가 저자는 EU의 약화가 곧 NATO의 약화로 이어져,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 전체에서 중국의 패권국 역할이 커질 것으로 전망합니다. 이렇다면 외환 품목 다변화의 요구가 무엇을 암시하는지는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죠. 중요한 건 한 가지 노선에 고지식하게 얽매일 게 아니라, 수시로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잘 살펴 현명하고도 정확히, 빠르게 대응하는 융통성이라는 게 저자의 충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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