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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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양도 아득한 옛날 삼황 오제와 요 임금, 순 임금의 치세를 그리워하는 관습, 최소한 도학적, 문학적 관습이 남아 있습니다. 서양 역시 그렇게나 오래 전에 자신들의 먼 조상(꼭 혈연으로 닿지는 않는다 해도)들이, 타인의 전횡적 지배를 거부하고, 중의(衆義)를 모아 공무의 방향을 결정하며, 나아가 자유와 권리를 얻기 위해 목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 결연한 싸움을 벌였던 전통을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런가 하면 현대인들이 구사하는 우아한 언어보다 훨씬 깊이 있고, 격조 있는 표현을 써 가며 타인의 감정과 논리를 자신의 것에 끌어오려는 문치(文治)의 우위를 비중 있게 믿었음 역시 경이로워 하죠.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 일컬음은 이처럼 "말로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고상한 전통이 사라지고 창과 기마술로 정의와 불의를 판가름하려는 풍조가 만연했음을 개탄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로마, 특히 공화정 로마 시대는 이처럼 정치한 논리와 고아한 수사로 상대를 설득하고 보다 정의로운 총의를 모으려는 의사의 전통이 모두를 고개 숙이게 하던 시절입니다. 아직은 말입니다. 이러던 것이, 마리우스와 술라라는, 어찌 보면 모두를 승복하게 하고 진두에서 이끌어갈 덕목을 고루 갖췄다고 볼 수 없는, 하자 있는 지도자들이 오랜 전통을 정면에서 깨뜨린 이래, 타르퀴니우스 이래 존재하지 않던 폭군의 악폐를 악몽처럼 다시 공동체에 들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과거의 절도 있고 우아하며 고풍의 품위 있는 지배를 받던 체제가 아닙니다. 폭풍 한가운데로 휩쓸려 들었으며, 이렇게 된 이유는 과거처럼 드세고 무지몽매한 야만인들이나(1부), 차별 받던 변두리의 서자들이 오랜 세월 품어오던 불만 따위(2부)가 아닌, 바로 로마 스스로가 품은 내부의 모순 때문입니다. 이 3부는 자신과 싸우는 로마의 분투기입니다. 소설 중에도 직설적인 서술이 있듯, 오랜 전통을 지키려는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술라와, 기사와 상인 계급의 관심을 더 돌보려는 카르보 등의 두 패로, 귀족에서 하층민까지 철저히 갈려서 국가 존망의 위기를 부를만큼 치열하게 싸우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까마득한 예전 남의 조상들 사연이 아닌, 오늘날의 대한민국과도 전혀 거리가 멀다고는 못 할 사정이기도 하죠.

대체로 저는 1부를 마리우스의 스토리로, 2부를 각각 다른 방향에서 로마를 격변의 소용돌이로 몬 술라와 드루수스의 사연으로 파악했습니다. 1부가 그야말로 로마의 이상적인 공화정 그 전형을 그대로 보여 주듯, 때때로 부패한(그리고 끔찍하게 어리석거나 무능한) 장군과 관료들이 등장하긴 했어도, 말과 설득력, 교양의 높이로 반대 진영을 포용하는, 그야말로 "동양적 군자(혹은 그를 가장한 위선자)"들의 우아미 경연의 장이었다면, 2부는 장년기의 그 원숙한 인격을 완전히 상실하고 광인이 되어 버린 마리우스, 그리고 더이상 근시안적 계급 이익 말고는 아무것도 살필 수 없게 된 귀족 계급 때문에 벌어진 난장판이었죠. 그렇다면 이 3부는, 마치 일본 전국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처럼, 혹은 칼 슈미트적(아니면 마키아벨리적?) 결단의 미덕으로 모든 혼란을 한 큐에 쓸어버릴 난세의 영웅이 등장할 때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3부는, 마치 알렉산드로스 3세처럼 신비한 미모와 고귀한 혈통(일까요?), 신묘한 전법과 불굴의 용맹을 지닌 청년 장군 폼페이우스의 라이징을 그 핵심에 둔 기나긴 사연이 아닐까 싶더군요.

사실 술라나 마리우스(특히 후자는 이 매컬로 여사의 작품에서 너무 미화된 느낌이 있습니다만) 들은 우리가 여러 고전, 혹은 대중서에서 충분히 조명되어 대강의 캐릭터가 어렴풋이 그려지기까지 하는 익숙한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들보다 더 중요한 비중임에도,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 앞에서 훼방을 놓고 말도 잘 못 하고 우악스럽게 판을 휘젓다 비명에 간 폭한 정도로 오해되는 경향이 다분합니다. 실제로 그는 마치 초한 쟁패기의 항우처럼, 혈통도 좋고(일단은 그렇다고 하죠) 군략과 용맹도 뛰어났으나 정치적 수완이 부족했던 면이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바에 따르면, 사실 개인적 기량으로 비교할 때 마리우스가 과연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보다 못한 인물이었는지는 의심이 많이 듭니다. 더군다나 부계 기준으로 따지면 가문 역시 그리 모두 앞에 내세울 만큼 평판 있는 혈통으로 보기 어려운 게 폼페이우스입니다(마리우스는 정말로 양계 모두 한미한 출신). 그런 그가 왜 이렇게 모두의 환영을 받고(피케눔 출신 "가노"들은 뭐 그렇다 쳐도) 전면에 등장하게 된 걸까요? 외모가 빼어나서? 나이가 젊어서? 마리우스에게인들 그런 시절이 한때나마 없었겠습니까?(게다가 폼페이우스는 못 배운 걸로 치면 마리우스를 몇백 배로 압살하죠ㅋ)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정세의 판국이 과거의 가늘가늘 아름다운 전통만 내세워서야 도통 솔루션이 안 보이는 난국으로 접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차라리 폼페이우스의 (귀족 답지 않은) 무식한 과단성에 열광했던 것 아닐지요. 여튼 술라와 젊은(어린) 폼페이우스가 만나 서로의 속을 읽어가며 대화하는 장면은, 마치 어제 방영되었던 <38사기동대> 5화에서 마진석(배우 오대환씨가 연기)이 양정도(배우 서인국)에게 "우리 김계장님 내 과네 완전? 응? 보면 볼수록 내 스타일이야!"라고 하던 그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폼페이우스는 그러나 항우처럼 우직한 무인 기질만으로 상황을 돌파한 건 아니었습니다. 소설 중에 적절한 묘사가 있듯, 폼페이우스는 냉혹한 현실 감각과 끝없는 비전, 꿈을 동시에 갖춘 정신 세계의 소유자였습니다. 전자만 갖춘 사람은 비천한 정상배가 됩니다. 후자만 갖춘 사람은 백주 대로에서 맞아죽기에나 딱 좋습니다(안됐지만 드루수스 같은 인물). 술라는 이 중 어떤 유형이었을까요? 제 생각에는 자기 절제력을 갖추었고, 두뇌가 우수하며, 도광양회하다(ㅋㅋ) 한순간에 결단력을 선보이며 판을 엎어 버리는 실행력이 있는 데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읽고 자유자재로 동화, 소통하는 정서적 안정까지 갖춘 유형이란 점에서, 아니아니, 게다가 외모까지 완벽한! 무슨 기준으로도(심지어 혈통까지! 코르넬리우스는 로마에서 가장 오랜 가문의 표상! 코그노멘인 술라가 후져서 그렇지) 애송이 폼페이우스보다 우월한 남자였음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난 겁니다. 하필 마리우스 같은 평민 영웅과 역할이 겹쳐 초장에 괜히 진을 빼게 되었고, 슬슬 기를 펴 보려 하니 이번에는 나이가 발목을 잡는군요(피부가 너무 연약하고 아름다웠다는 것도 그의 장점이자 치명적 단점.. 이건 농담입니다).

만약 술라가 좀 뒤에 태어나서 시저와 자웅을 겨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너무도 용호상박인 두 인걸이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느라 로마는 모든 기력을 소진하고 바로 멸망했겠습니까? 아니면 역시 "주워먹는 타입의 정치적 천재"가 또 하나 나타나서(옥타비아누스처럼) 운명적인 제정으로의 발걸음을 틀었겠습니까? 확실한 건 이 폼페이우스 같은 천둥벌거숭이가 나타나 판을 흔들기는 힘들었겠다는 정도. 여튼 그는 자신의 이상과 꿈으로 세계의 현실을 삼켜 버릴(소설가 이병주 선생의 다른 표현에서 인용합니다) 엄청난 정신적 역량을 갖춘 인물이긴 했습니다. 이런 효과적인 안티테제가 나올 수 있었기에, 카이사르 같은 진테제가 결국 완성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3부는 특히 올드 브루투스(원서에는 꼬박꼬박 "올드"를 붙입니다)가 나와 장기 떡밥 큰 덩어리가 촘촘히 뿌려집니다. 결과를 알고 봐도 재미있고, 번역의 가독성이 좋은 "마스터즈 오브 로마". 다음 편이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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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동산의 미래
김장섭 지음 / 트러스트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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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라는 아주 예전 속담이 실감나는 요즘입니다. 실제로 육류의 분별 없는 섭취(가난이 빚은 피해의식 때문이라든가)가 대사 증후군 등 탈을 일으키기도 하는 게 사실이고, 본인의 각성이나 진지한 의식 전환 없이 "그저 멋 있어 보여서, 이게 대세라서" 뭘 따라하는 선택의 경우 반드시 좋지 않은 결말을 부르는 예들이 흔히 보이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불확실성이 크게 증가한 요즘, 어디에 투자하고 얼마만큼의 수익을 바라는 게 합리적인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해합니다. 하도 금리가 낮고 마땅한 수익원이 없다 보니 무리하게 빚을 내서 "남들 따라" 투자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로 집에만 쌓아 두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게 자연스러운 행태입니다. 한국이 한창 때처럼 고성장 트랙에 올라탄 상태도 아니고, 사람의 성향과 개성이 천차만별인 것처럼 투자 선택 방향도 제각각인 게 사실은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과거에는 이렇지 않았죠. 남들이 뛰면 다같이 껴서 뛰어야만 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선택이 단기, 혹은 장기적으로 볼 때 본인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약간의 손실을 봤지만 더 망할 수도 있었던 시황을 고려할 때 어차피 내가 머리를 굴리고 모든 정보를 취합한 후 결정하고 내가 본 손실이라며 안도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남들 따라 묻지마 투자를 한 후 제법 재미를 봤음에도 불구, 아주 희박하나마 더 큰 대박의 가능성을 놓쳤다는 사실에 가슴을 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고 대뜸 느껴진 점은, 책의 저자님이 단편적이고 그 효용 기간이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정보, 팁"을 가르쳐 준다기보다, 불확실성이 지배하고 더 이상의 고도 성장이 불가능한 요즘 경기에, 개인이 어떤 경제 마인드, 투자 마인드를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 "물고기 몇 마리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는 거시경제의 패턴과 전망을 볼 때 마인드 세팅을 어떻게 바꿔야만 하는지, 기본 태세라고 할까? 마음가짐 자체를 어떻게 먹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저자분의 혼이 실린 여러 코칭이 논의의 전제로 제시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왜 투자를 해야 하는지, 투자하는 시기가 따로 정해진 것(은퇴 후, 노년기 등)이 결코 아닌 이유가 무엇인지, 투자의 결과에서 무엇을 기대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자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설령 투자를 한다 해도 어느 선에서 만족해야 하는지, 성공의 기준을 무엇으로 잡아야 할지 개인마다 다 다를 겁니다. 성공한 사람, 실패한 사람 등의 운명이 엇갈리는 건 과거에도, 앞으로도 비슷합니다. 문제는 그 손실, 이익의 폭입니다. 1990년대 초에는 주식이 폭락하자 손실을 보전해 달라며 시위를 벌이는 일도 비일비재했죠. 바람직한 투자의 개념이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개인이 어느 선에서 만족을 얻고 결정에 책임져야 하는지 전혀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낙후한 시대의 단면입니다. 이런 시절에도 대박을 치는 사람들은 반드시 있었습니다. 대박이라고 해도 그 결과가 비이성적 과정에 의해 이뤄졌고, 건전한 사회적 후생의 증가 반영이 아님은 마찬가지지요. 반면, 시장에 참여하는 개인들이 이성적인 결정 과정을 거쳐 적정 수준의 투자(가처분 소득의 레벨, 객관적인 투자 조건 등)가 이뤄진다면, 결과에 대해 개인도 크게 낙담할 일도 줄어들 뿐 아니라(주관적, 객관적 모두), 사회 전체로 보아도 그 소득의 분배 결과 역시 불건전성이 감소한다는 사실입니다. 후자는 우리들 개개인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문제는 전자죠. 후회 없는 투자, 결과를 내 자신이 받아들이고 비이성적 폭주가 없는 투자 패턴을 생활화하는 게 이 책의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동산인가? 아직도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향수에 젖은 이들, 혹은 투자의 개념부터가 잘못 잡혀져 있는 이들은 이 부동산 투자는 자신과 무관한 것이라며 선을 긋기 일쑤입니다. 저자는 대단히, 논리적이고 명쾌하게 논의의 틀을 마련합니다. 1) 흔히 하는 말처럼 지금은 백세인생 시대다. 2) 이 긴 인생을 지탱할 소득의 원천이 있어야 한다. 3) 일정 연령 이후에는 근로 소득을 기대할 수 없고, 사업 소득이란 고전하는 자영업 현황을 볼 때 역시 전망이 좋지 못하다. 4) 이자소득... 말할 필요도 없다. 5) 그렇다면 남은 건 부동산 임대 소득밖에 없죠.

주식의 경우 투자의 달인이었던, 현재도 그러한 저자는 간단하게 짚고 넘어갑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한국으로, 그 다음엔 중국이 알짜를 모두 빼 먹는 추세. 당신이 여간 두뇌가 좋지 않은 다음에야 모든 변수를 고려하고 투자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다. 하고 싶으면 중국 시장에 투자하라." 안 해 본 게 없는 것 같은 저자는, 이제 경매로 돈 벌던 시대도 끝났다고 합니다. 당연한 게, 재미를 본 사람이 있으면 그 요령도 널리 퍼져 이제는 모든 참여자가 비슷한 역량으로 시장에 참여한다는 거죠. 헐값에 낙찰 받을 가능성이 클 리가 만무합니다.

재테크 전문가들이 언제나 강조하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목돈은 빨리 만들어질수록 좋고, 투자는 다만 한 달이라도 빨리 이뤄지는 게 좋다." 그래서 저자는 외고/과학고, 명문대 졸업, 대기업 입사 등으로 이뤄지는 코스보다, 특성화 고교 졸업 후 대기업 생산직 취직이, 100세 시대에 노후를 편안히 꾸려갈 "더 나은 코스"라고 단언합니다. 명분보다 실리를 취하자 같은, 일시적으로 마음을 달래는 주문이 아니라, 평균적인 대한민국 경제 참여자의 생활 패턴을 고려하여 유일하게 합리적으로 도출되는 해(解)라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건, (사실 미국 경제학계에서는 1960년대부터 정식화한 명제입니다만) 합리적인 투자/소비 결정은 개인의 일생 전 구간을 고려하여 이뤄져야만 한다는 겁니다.

원론적인 강의라면 대단히 심심한 책이 아닐까, 당장 현장에 뛰어들어서 활용할 정보가 필요한데.. 라고 망설이는 분이라면 그것도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저 역시 최근에 고민한 바가 많아서, 많은 생각을 거치고 말 한 마디를 꺼내는 전문가의 말이 어떤 건지는 바로 감이 오더군요. 저자는 일단 금리의 전망에 대해 간단히 짚습니다. 저도 이 책 저자가 언급한 버냉키(직전 연준 의장)이 쓴 책(<행동하는 용기>)을 최근에 읽었는데, 버냉키의 의기양양한 자랑질에도 불구하고 한국 같은 주변국에서 그런 선택을 따라하는 데는 여러 모로 무리가 따르겠죠(몇 달 전 강봉균 전 장관의 견해 피력도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저자는 최근 한국 수도권 개발 계획의 현황과 추세를 지적하며, 역세권 관련 어떤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지 간단명료하게 정리합니다. 이 부분만 읽어도 솔직히 큰 도움이 된다 싶더군요(구체적인 결론은 별로 공유하고 싶지 않은).

역시 시야가 넓은 분 답게 거의 전방위적으로 중국 변수를 고려에 넣고 시나리오를 짭니다. 부동산을 다룬 책은 많지만, 현재 세계 각국에서 어떤 식으로 중국의 큰손들이 부동산 "투기"를 하는지에 대해선 별반 언급이 없습니다. 이 책은 현재의 패턴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이들이 어떤 전략으로 시장에 임하는지도 아주 냉정하게 보고 있습니다. 제주도에 이들 의 자금이 몰려들어 아주 뜨거운 시황이 전개되는 것도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인데, 활동 반경이 넓으신 저자다 보니 자신이 겪은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들려 주고 있네요.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 정리한 결론에도 주목해야 하지만, 그보다는 짧게 흘리는 듯 언급하는 여러 토막 정보에도 신경을 써서, 시장이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는지 전체의 감을 잡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대가에게서는 지나가는 농담으로부터도 많은 깨우침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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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은 죽었다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희재 옮김 / 검은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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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땅 미국은 그 출발은 미미하였으나 스스로의 손으로 일군 거대한 제국 위에 발을 딛고 세계를 향해 호령하는 비즈니스의 타이쿤들을 실제로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Kane Bendigo 역시, 실존의 여러 사업가들을 요것조것 믹스한 듯 매력적인 실감을 풍기는 캐릭터입니다. 돈, 혹은 여타의 재산이란 장삼이사의 이런저런 초라한 손들에 흩어져 있으면 별 힘을 못 쓰는 법인데, 한 사람의 손 안에 움켜쥐어져 있으니 이처럼이나 놀라운 일들을 해 내는 군요.

케인 벤디고는 섬 하나를 소유하여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고, 호위대와 소규모의 해군, 육군 등을 직접 거느리는 군주입니다. 나이도 아직 40을 넘기지 않아 보일 만큼 활력이 가득한 미남인데, 보통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이처럼 정신의 활력이 육체적 매력까지를 지탱해 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라고 일단은 해 두죠). 이 정도 부와 권력과 원대한 비전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군주라 불려 마땅하다... 가 아니라 소설 속에서는 진짜로 미합중국 대통령(이라고 명시되진 않았으나 독자는 당연히 눈치챌 수 있죠)을 비롯한 여러 강대국들에게 승인까지 받은, 진짜 국가 원수이자 주권자로 묘사됩니다. 물론 이런 일은 불가능하며, 분별 있는 독자에게는 소설의 매력을 다소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용하는 게 유감입니다. 모나코니 안도라니 하는 공국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아직까지 독립국가 신분을 유지하는 게 아니듯, 국제 관계란 힘만 있다고 바로 독립적 단위로 승인받을 수 없습니다.(하물며... 그러나 스포일러이니 언급 자제)

어쨌든 그렇다 치고, 퀸 부자는 이 나라에서 국내 살림을 도맡아하는 총리이자 케인 벤디고의 동생인 아벨 벤디고에게 특별히 초빙되어, 예의 섬나라로 향하게 됩니다. 형이자 국가 원수이며 벤디고 제국의 창립자이자 세계를 뒤흔들 만큼의 영향력(실제로 남미 여러 국가의 정권들이 이 사람의 입김으로 교체되었다는 설정입니다)을 발산하는 케인이, 누구에게로부터 지속적으로 암살 협박을 받고 있다는 사정 때문입니다. 퀸 부자는 이런 장난(워낙 엄중한 경호를 받는데다, 상상을 초월하는 만능 스포츠맨인 케인을 죽이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으므로)을 치는 자가 누구인지 밝혀 줄 것을 의뢰받습니다. 막상 대면해 본 "킹" 케인 벤디고는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 같았으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이는데...

" 케인의 본명은 사실 카인이었답니다. 동생을 죽인 성경 속의 그 인물이죠." 표기상의 한계, 오해, 무신경 등이 결합하여 오히려 절묘한 분별 효과를 낸 셈인데, 영어 원문에는 케인=Kane, 카인=Cain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두 단어의 발음은 같습니다. 따라서, 발음이 아니라 철자를 봐야 비로소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되는 겁니다(한국어판에서는 이 사실을 알 수 없고, 뭐 알 필요도 없긴 합니다). 이 한국어판을 보면 퀸 부자가 케인의 의상실을 수색하며 "지팡이는 없냐?"고 드립을 치는 대목이 있는데 아마 cane(지팡이)를 염두에 둔 말장난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원서 대조는 안 해 봤으나 아마 맞을 듯). "세상 어떤 아버지가 자기 자식에게 카인이라는 이름을 붙여 줄까요?" 헌데, 찾아 보면 의외로 많다(성공한 인물들 다수 포함)는 게 함정이고, 그 박식한 작가님도 이야기를 꾸며 내기 위해 좀 오버한 면이 있네요. 어느 분에 대해 육체적 특징을 장황히 언급한 것도 그에게 시선이 대뜸 쏠리지 않게 하기 위한 속 보이는 장치였고(귀족 특유의 박탈감과 정의감의 발로였다는 심리적 장치도 곁들이시지 그랬나요), 어느 물리학 박사가 죽은 이유도 원자 폭탄 제조 회유를 거절해서라는 사연이 들어 있었어야 아귀가 맞는데 아마 떡밥 회수가 안 된 듯합니다.

멋진 마술이긴 한데 그 트릭을 알고 보면 애 입에서도 욕이 나오죠. 이 소설은 (퀸의 다른 작품처럼) 멋진 착시 효과를 통해 독자를 완전히 사로잡는 finesse를 자랑하지만, 사실 내실이 좀 부족합니다. 케인의 암살이 미수에 그쳤을 때, 퀸 부자가 계속 섬에 붙들려 있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건이 이미 표면적으로 종결되었는데 독자가 뭘 궁금해해야 할지 좀 더 넉넉한 발판을 깔아 놓지 못한 건 마음에 안 듭니다(이것부터가 범인의 정체를 다 폭로하는 거나 마찬가지). 살인 미수의 진상은 너무도 빤히 드러납니다. 아무리 미숙한 독자라 해도 유다의 쌩쇼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테고, 그 밀실 트릭의 경위 역시 조금만 머리를 쓰면 바로 눈치챌 수 있어서 별로 자랑할 마음도 안 생기네요. 밀실 트릭의 경위뿐 아니라, "왜 퀸 부자가 여기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바보 아닌 이상 다 감 잡을 수 있습니다. 하필 3형제가 라이츠빌 출신이었다는 배경 설명도 우습고, 엘러리라면 구태여 고향에 갔다 올 필요도 없이 진상을 모두 파악했을 겁니다.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긴 하더군요. 시리즈 다른 작품을 바로 손에 잡고 읽을 마음이 생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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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 혁명의 딜레마,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지음, 송인재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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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동과 서를 가르기 이전, 지식인이라면 문화권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한탄하기 전에 보편이라는 이름의 배로 무해통항을 향유할 방법은 없는지 먼저 고민할 만합니다. 인류의 공영과 해방, 자유, 평등, 깨끗한 환경의 혜택 등은 누구나 공감을 보낼 수 있는 가치입니다. 혹여 좌파 지식인으로서 젊은 시절 커리어 대부분을 보낸 분들이라면, "혁명", "자유", "민주주의" 등의 화두(말 그대로 화두더군요)로 보다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겠습니다.

레지 드브레는 벌써 인생의 황혼기를 한창 넘긴 분이고, 겸손되게 "고령으로 인한 무능"을 스스로 언급할 만큼 지긋한 나이지만, 편지들을 구성하는 문장에서 우러나는 지적 활력은 여느 젊은이 못지 않은 듯합니다. 자오팅양(한국식 독음이라면 조정양)은 중국 철학계를 대표할 만한 리쩌허우 박사의 수제자로서, 학자로서 원숙기에 접어들었다 할 세대입니다(그래서 나이로는 저 드브레의 아들뻘이죠) "트러블 메이커"라는 달갑지 않은 비판도 들어가면서 학계와 독자의 인식 지평을 여러 신선한 시도를 통해 넓힌 공헌이 있는 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분의 "천하 체계"를 다룬 개념서가 번역되어 나왔고, 이 책에 실린 편지들 중에서 그 개요가 여러 번 언급됩니다.

두 분 다 자신의 속한 체제, 민족, 국가 안에서 이단아처럼 인식되는 면이 있는 지식인들입니다. 드브레는 대학생 시절 체 게바라 등의 혁명 활동에 직접 가담하다 징역형까지 선고받은 이력이 있습니다. 자오팅양은 좀 놀랍게도 "유물론적 변증법"에 과하게 집착할 필요 없으며, 관념론의 출발점에 서서 세계의 인식은 같은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폅니다. 이런 생각이 현 중국 공산당 수뇌부에 마냥 마뜩하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습니다. 정통파 사관에 의하면 어차피 중국사 3대 혁명 중 앞의 두 개는 최종의 단계에 의해 지양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유물입니다. 허나 자오 박사는 첫째 혁명의 산물인 주 무왕의 체제에서 큰 의의를 찾고, 이것이 현대 국제 정치 체제 확립에도 큰 시사를 준다는 쪽입니다.

한편 드브레 역시, 아들뻘 학자에게 보내는 서신치고는 정말 겸손하고 정중한 어조로(사실 좌파 지식인치고도 대단히 우아한 말투를 구사합니다) 대담하고 속 깊은 소통을 시도합니다. "진-한의 혁명은 그저 궁정 쿠데타에 가깝지 않은가? 그것이 왜 혁명인가?" 아마도 드브레는 자오 박사의 대표작을 진지하게 읽은 후 머리 속에 떠오른 의문을 이처럼 제기한 듯합니다. 하지만 이 질의는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기본 사실을 착오한 면이 없지 않은 것 같네요. 시황제의 진 건국이든, 한 고제의 군국제 확립이든, 혹은 무제의 본격 군현제 실시이든 간에, 이 "혁명"은 기존 봉건제의 근본적 한계를 뛰어넘은, 동아시아 세계 체제의 근본적 요소에 초석을 놓은 말 그대로 혁명적 시도였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위, 진, 수, 당, 송 등의 등장은 궁정 쿠데타로 볼 여지가 있지만 말이죠.

"혁명"이 아래로부터 민중의 참여를 그 필수 요소로 삼는지 여부를 놓고도 두 지식인은 적잖은 견해 차이를 보입니다. 드브레는 처음부터 68 혁명 세대의 일부이므로, 특히 그의 후견인 격이었던 사르트르가 고안한 "연대와 박애 정신에 기반한 폭력"에 대해 매우 우호적입니다. 한편 그는 우둔하고 투박한 하층민이 아무 개념 없이 미신적 국부 신앙 비슷하게 마오를 숭배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합니다. 교육과 인식이 미비한 하층민은, 스스로 좌파 정치 이념을 뿌듯한 각성의 지표인 양 과시적으로 언표하면서도, 그 아득한 조상뻘 원류가 될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에 대해 무지하다는 이유만으로" 적대시합니다.

이런 드브레에 대해, 자오 박사는 "지금은 cogito가 아닌 facio의 시대"라며 자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물론 "코기토"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논변에서 나온 용어지만, 사실 20세기 들어 바로 드브레의 스승이자 후견자인 사르트르 자신이 <존재와 무>에서 상당 분량을 할애하여 그 실존적 재해석을 시도한 바 있죠. 자오 박사가 이 점을 의식하고(따라서 다분히 도발적 의도에서) 이 토픽을 꺼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다 불꽃 튀는 논쟁의 향연을 벌이기보다는, 너무 정중하고 우아한 담론을 꾸려 가는 모습이라서요.

드브레는 설혹 자유롭고 깨인 지성을 가진 개인이라 해도, 그 소속 민족의 집단적 인식 한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가령 한(漢)족은 얼마나 좡 족(광서 장족)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지 같은 다소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까지도 포함합니다. 이에 대해 자오 박사는 "12세기에 동양으로 유입된 유대인들조차 아무 충돌 없이 동화시킨 게 중화의 체질"이라며, 고정된 틀이나 제약 없이 모든 문화 요소를 수용할 수 있었던 지난 역사를 환기시키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비교적 이론의 여지 없이 합의를 이루는 대목은 "탐욕스러운 자본에 공동 대응하는 지성인의 자세"입니다. 민중은 처음에 신민(臣民)의 지위에서 시민의 위상을, 혁명이라는 과정을 통해 쟁취 획득하였으나, 이제 자본에 의해 강제로 "고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는 데 두 분은 거의 충돌이 없습니다. 여기서 자오 박사는 모호하고 위험하며 내용이 거의 박탈되기까지 한 democracy 대신, 자신이 입안한 publicracy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드브레 역시, 중세에 가톨릭의 라틴어, 20세기에 마르크스주의의 혁명 신앙(이 말 안에 어느 정도 회의주의가 내포된 거죠. 저는 소위 레지스탕스 신화에 대해 "아름다운 거짓말"로 규정하는 드브레의 이 책에서의 태도를 보고 놀랐습니다)을 대신할 만한 그 어떤 "보편"에 대한 간절한 희구를 표현합니다. 서신 왕래를 통한 지식인들의 의견 교환 역시, 인류가 "더 많은 빛, 광채"를 갈구하는 오랜 전통 속에 유지해 온 아름다운 소통의 장입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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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상속.증여 만점세무
세무법인 택스홈앤아웃 지음 / 스타리치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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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들은 서문에서 "상속, 증여 관련 세무 처리는 더 이상 재벌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런 말이 좀 새삼스럽게 들릴 만큼, 현대 사회에서 재산의 유무상 이전을 둘러싸고 겪게 되는 갈등과 고민은, 웬만한 경제 활동 참여자라면 거의 보편적으로 체감하는 편입니다. 이 문제는 이제 사원끼리 점심 먹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수준이라 해도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가 여튼 양적으로는 예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풍요로워지다 보니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재산을 매개로 하여 대부분 맺어지는 게 원칙이 되었고, 재산이 움직이는 곳에 (달갑지는 않지만) 세금의 부과가 또 빠지지 않고 얼굴을 들이밀기 마련이라서죠.

특히 증여의 경우, 웬만큼 재산을 모아 둔 부모님의 입장에서 인생의 어떤 단계, 과정에서건 해결을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며, 유학이나 결혼 등 수시로 찾아오는 굵직굵직한 고비에서 피해갈 수 없는 난제이기도 합니다. 증여는 부모-자식 간 뿐 아니라, 절세 등의 목적을 위해 배우자 사이에서도 행해지며, 간혹 표면적으로 꺼내기 어려운 여러 다른 이유(?) 때문에 형제, 기타 특수 관계자(이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되죠) 사이에서도 이뤄집니다. 상속은 당사자(대개는 부모님)의 사망이라는, 일생에 기껏해야 한두 번인 계기로 겪게 되는 법률사건이지만, 증여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일 년 중에도 여러 번 골머리를 앓게 하는(수증 자체야 해피해도) 세무 문제를 반드시 유발합니다. 소홀히 다루다가는 금전적 손실도 크게 입을 뿐 아니라, 조세범으로 몰려 치명적 불이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상속, 증여 관련하여 평범한 시민들이 얼마든지 겪을 수 있는 여러 사례를 뽑아, 이에 가장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해법을 쉽게 가르쳐 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물론 상속-증여 관련 세제의 전모를 알려면 최소 학부 과정 한 학기 분량의 수업을 들어야 하겠지만, 중산층이 평생 살면서 마주치는 세무 문제란 어느 정도 유형이 정해져 있습니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모든 난관을 원칙부터 캐고 들어가는 식으로 대처하는 건 비능률적입니다. 물론 세무 전문가에게 구체적인 상담을 받는 편이 낫겠지만, 납세자 자신이 대강은 개념을 잡고 있어야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릴 때 최종 선택을 하기가 쉽습니다.

p138에 보면, 아버지의 정기예금을 담보로 하여 대출을 받고자 하는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금이 담보가 된다는 상황 자체가 잘 이해 안 되는 분들도 많을 텐데요. 우리가 흔히 접하는 보통 자유저축형(입출금이 자유로운 계좌)의 경우, 통장 앞부분에 장황히 나오는 약관대로 "양도, 담보 제공" 등 대부분이 허용 안 됩니다. 사례에서 "정기예금"이기 때문에 담보 제공이 가능한 겁니다.

여튼 이 아버지의 예금이, 아들에게 증여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아들이 돈 빌릴 때 담보로 제공된다는 것뿐인데, 왜 증여세가 부과되는지 의아한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법규 명문과 국세청의 태도는 "담보 제공을 일종의 용역(서비스)로 보아, 무상으로 제공되는 편익으로 간주하여" 이에 증여세를 부과한다는 취지입니다. 아마 이렇게 표현해야 일반 대중에게 납득이 된다고 판단했던 같은데, 사실 재산권 중 "물권"의 경우 소유권 유형이 있고, 용익형이 있고, 담보형이 있습니다. 빚을 질 때 제3자가 담보를 제공하는 것도 재산을 직접 증여하는 만큼이나 사회 생활에서 상당한 편익을 주는 결과이며, 물권법 질서의 기본형을 고려할 때 이게 오히려 형평에 맞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출금 상환을 못할 때 담보로 제공된 예금은 채권의 만족에 충당됩니다.

다만 그저 담보의 제공이, 완전한 소유권 이전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는 없으므로, 법은 담보 수증인(담보를 받은 사람- 위 사례에서 아들)이 실제로 이익을 본 금액이 일천만원을 넘길 경우에만 과세합니다. 사실 이것도 그저 형평성의 차원에서 해석상 과세되던 건데, "조세법정주의"에 어긋난다고 해서 법원에서 패소 판결하는 게 많았죠. 이제는 실정법으로 정해진 만큼 반드시 신경 써야 하는 문제가 되었고요. 이 점만 봐도 증여세제가 평범한 중산층의 삶과 얼마나 밀접한 지 잘 알 수 있습니다.

p133에 보면 대단히 재미있는 사례가 나옵니다. 형이 동생에게(동생이므로 그저 특수관계자일 뿐 배우자, 직계 존비속과 다른 취급입니다) 아파트를 증여할 경우, 5년 안에 (전혀 모르는 사람 C에게) 처분하면, 그 취득가액은 형이 동생에게 아파트를 줬을 당시가 아니라, 형 자신이 아파트를 취득할 당시의 가격으로 잡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양도 수익이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죠.

(책에 그런 설명은 없지만) 이런 게 왜 문제가 되냐 하면, 양도 소득이 얼마든 간에 단일 세율이 적용되는 게 아니라, 금액이 늘어나면 세율 자체가 높아지기 때문입니다(누진세). 제가 다른 예를 만들어서 좀 들어 보겠습니다. 1) 한 번으로 1억 6천만원을 남긴 거래와, 2) 두 번에 걸쳐 각각 8천만원을 남긴 거래가 있다면, 1)의 경우 6천 8십만 원을 납부해야 하지만, 2)의 경우 두 사람이 낸 세금을 합쳐도 3840만원에 그칩니다. 당사자가 남남이면 상관 없는데, 만약 2)의 경우 A→B→C에서 앞의 A와 B가 부부다, 뭐 이러면 이 집 사람들은 다른 납세자에 비해 3천만원 가까운 세금을 덜 내게 되는 겁니다. 이런 걸 막자는 게 제도의 취지입니다.

p102를 보시면 재미있는 사례가 또 나옵니다. "증여세 재원 마련"을 어떻게 하느냐는 건데, 일단 자녀가 그럴 만한 소득이 없어 보이는데도 갑자기 아파트나 고가의 재산을 취득했다, 이러면 세무 당국에서는 일단 주의를 기울인 후, 특별한 사정이 없어 보이면 "증여로 인해 이 재산을 얻었다"고 추정하여, 당사자가 증여 사실에 대해 신고를 하건 말건 바로 증여세를 부과합니다. "증여 받았다는 증거는 없잖아요?" 같은 항변은 안 통합니다. 반대로, 당사자가 "이 돈은 내가 노력하여 번 돈"이라는 증명을 해야 이 처분을 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금출처 소명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사업 소득, 근로 소득, 이자- 배당 소득 등 자신이 세금을 납부한 실적이 있으면, 그런 과거의 소득을 기초로 내가 지금 이 재산을 살 수 있었다는 소명이 되는 거죠. 그 소득은 이미 세금 부과가 한 차례 이뤄졌으므로, 다시 증여세(혹은 무슨 세금이든)를 물 필요가 없게 됩니다. p102밑에 "본인"이라고 된 건, 아버지 박종부씨가 아니라 그 대학생 딸을 가리키는 겁니다. 요즘 어떤 재산가들의 경우, 자녀에게 작은 사업체라도 차려 주고(혹은 대기업에 취직시키고) 어떤 경제활동의 외관을 갖추는 건 이런 이유도 있는 겁니다. "내가 증여한 게 아니라 지가 노력해서 번 돈이다." 이런 어떤.. 명분(?)을 만들어 주는 거죠. 사업소득과 증여 이익은 부과되는 세율 면에서 차이가 크니까요.

증여의 덩치가 클 경우 증여세도 당연히 액수가 큽니다. 이때 부모님 입장에서 쿨하게 증여세도 같이 내 주는 것도 흔히 봅니다. 문제는, 세무서에 신고할 경우 증여세 포함분도 같이 신고를 해야지(즉, 본래 주기로 했던 돈+ 세금으로 낼 돈), 원 증여액만 신고를 하면 결과적으로 세금 포탈이 된다는 겁니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는다고 이런 걸 이해 못하는 분들(주로 당대에 갑자기 돈 번 분들)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딨냐고, 왜 세금에 세금을 또 물리냐고 항의하는 모습도 봅니다. 이건 만들어진 지 한 세기도 넘은 관행이며, 또 세금은 문명국 어느 나라나 "세금에 세금이 또 붙는" 구조입니다. 이런 게 낯설다면 자신은 부자들과 달리 많은 세금 안 내고 편안히 살아왔구나 하며 좀 수긍도 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부자들이야 다 자기들 나름대로 서민이 안 겪는 고생을 따로 하고 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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