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유언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재형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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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만큼 같은 종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개성을 지니고 태어나며 성장하다 사멸하는 동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애써 발전시킨 나만의 특성과 물질적인 풍요와 정성들여 가꾼 관계를 뒤로 하고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점도 슬프지만, 생의 근원적 아픔은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 혹 내가 누구인지 어렵사리 알아낸 후에도 이를 주위의 요구와 상황에 힘들게 맞추거나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그의 정체성 자체가 그를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들은, 교활한 의도와 서투른 표현으로 자신의 출신과 현재의 신분을 어리석게 거짓으로 꾸며 대기도 하지만, 세상이 그런 수작에 넘어갈 만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죠. 물론, 아주 드물게는, 시대가 빚은 비극 속에 자신의 여러 정신적 코드가 절묘히 조율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아픔과 역사의 상처를 함께 추스르고 살아가야 합니다. 과연 연약한(대체로는) 일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과제일까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아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마지막 수업을 이끌면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모어를 잊지 않는다면 감옥에 갇혀서도 그 감옥의 열쇠를 갖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남깁니다. 언어는 그저 일상의 욕구나 파편적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그 개인의 지난 삶, 추억, 존엄한 개성, 소중한 깨달음, 심지어 그의 조상과 겨레가 속한 집단 무의식과 문화 유산까지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거대한 도서관과도 같습니다. 러시아 남성과 결혼하여 먼 이국까지 옮겨와 살아가다 뜻밖에 역사의 격류에 휘말려 온갖 몹쓸 일을 다 당한 샤를롯이란 프랑스 여인에게, "프랑스어"는 그저 처음으로 배운 언어라는 의의 외에 엄청난 무게와 집착과 존재의 근원으로 작용했습니다.

한 여성이 어떤 남성에게 끌려 백년해로의 연을 맺음은 그저 생물학적 충동이 빚은 우연의 산물로 치부할 수 없습니다. 가시버시로 공동의 삶을 일구고 살아가다 후손을 같이 만들고, 그들에게 소중한 추억과 애정을 공유하거나 물려주며 온전한 개체를 성숙시켜 가는 과정은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구태여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의 작업만큼이나 숭고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낳은 아이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배워 입과 몸에 익은 모국어(러시아어) 말고도, 자신의 정체성과 교양과 아련한 기억을 형성하는 질료인 프랑스어를 가르쳤습니다. 프랑스어로 된 옛날 이야기, 프랑스어 가사가 붙은 노래, 프랑스어로 쓰여진 절정기, 원숙기의 문화 정수가 고스란히 담긴 문학,... 어머니에게 이국의 문화, 그 중에서도 세계인의 동경 대상이 될 만한 선진 문화의 핵심을 배울 수 있는 아이들이란 얼마나 행복한 존재들이겠습니까.

볼셰비키 혁명은 분명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상당수의 노동자들에게 해방이라는 환희를 안겨다 준 세계사적 사건이었겠습니다. 스탈린의 리더십 역시 저개발의 수렁에 허덕이던 상당수 러시아인들에게 산업화의 혜택을 가져다 주었으며, 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야수적이고 능률적인 이민족의 침공이었던 나치의 미친 시도를 퇴치한 공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역시 많은 수의 인민들, 특히 이 책의 저자이자 사실상 이 소설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안드레이 마킨의 가족들에게는, 공산당의 붉은 혁명이 소중한 인생과 영혼의 연속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긴 끔찍한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은 파리에 방문했던 니콜라이 2세에 대한 기억을 급우들 앞에서 자세히, 진실되게 말해 주다 공산당 당국의 지목을 받아 가족 전체가 큰 고초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잖아도 부르주아 출신에다 배우자가 외국인(자본주의 국가인 프랑스인)이란 사실 때문에 새로운 국가 체제에서 안정적 삶을 누릴 수 없던 처지였으니, 이들에게 닥친 끔찍한 운명은 책의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도 상상이 되고 남습니다.

망명자 신분으로 프랑스에 체제하는 시간 역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도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나 조선족, 혹은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이 느낄 만한, 그리고 겪을 만한 소외감이나 직접적인 고통, 불편과 비슷하겠죠. 아이는 그의 신분, 출신이 학교 급우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내내 국외자로 겉도는 신세입니다. 그는 분명 프랑스 문화에 익숙하고, 대화에 끼기 위해 열심히 화제를 익히며, 서툴지만 열심히 프랑스어를 말하고 씁니다. 외할머니가 가르쳐 준 지식, 그녀와 함께한 추억 위에 기반한 소중한 발성, 문법, 기능이지만 텃세 강한 원어민들이 보기엔 여전히 낯선 이방인의 발버둥에 지나지 않습니다. 러시아에서는 혈통 속의 프랑스성이 문제가 되어 축출된 아픈 과거가, 이제 외할머니의 모국인 프랑스에서는 자신과 부모, 가족들의 러시아 연고가 차별의 표징으로 작용합니다. 마치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는 자이니치로 지문 등록 대상이 되며 경원시되고, 한국에 건너와서는 반쪽발이라며 멸시받던 슬픈 운명과 비슷하다고나 하겠습니다. 중간에 낀 자의 영원한 주변인 지위가 부르는 비극은 세계 어디서나 공통입니다.

역자 이재형 교수께서 적절히 지적한 바처럼, "의식과 시선, 자아의 이중 분열"이야말로 이 자전적 소설의 핵심을 관통하는 몸부림입니다. 마음의 평온을 얻은 이는 무엇을 보건 어떤 감정을 느끼건 그 일관성과 전일성(wholeness)을 유지합니다. 한 번은 이렇게 느껴지다, 다른 한 번은 전혀 이질적이고 생경한 감성에 압도당하곤 하는 혼란이 그를 비껴갑니다. 반면, 주인공처럼 색과 결이 판이하게 다른 동과 서의 두 문화적 유산이 핏줄 속에 뇌리에 자리잡은 자아는, 매 순간 두 번의 필터와 프레임과 수용체가 정신을 교차하는 기묘한 체험을 겪어야 합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무엇을 수용해야 참다운 자신을 안심할 수 있을까요.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몽상가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특질이 이중적으로 형성된 탓이 컸겠죠. 그는 제정 러시아가 멸망하기 20년 전 프랑스를 방문한 "로마노프 가의 마지막 황제 부처(夫妻)"의 장엄한 행렬, 가극 <르 시드>를 관람하는 장면(외할머니의 기억) 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20년 후 그들과 그의 일족이 혁명군에 의해 비참하게 처형당하는 장면(부모와 자신이 들은 간접 전언) 등을 교차시킵니다. 소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시제(tense)입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력처럼 행위자를 붙들어매고 자유를 빼앗는 접착물"이 바로 시간입니다. 이 품위 있고 고귀한 혈통을 지닌 황제는, 서로 적대적인 과거와 미래 속에 붙들려 사지가 찢길 게 아니라, 주인공의 몽상 속에서 화해하는 과거와 대과거 속에서 다시 예전의 평온과 위엄을 찾습니다. 물론 마땅히 있어야 할 조화와 온유함 속에서 가장 큰 안정을 찾는 건 주인공자신이겠습니다. 3대에 걸친 그의 가족들이, 비정상적인 역사의 격동 속에서 입은 상처가 너무도 컸고, 그런 모진 운명을 겪을 만한 죄야 저지른 적 없었으니 어떤 식으로건 사면과 치유가 필요했겠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19세기 마지막 대통령이었던 펠리스 포르, 예의 그 차르 니콜라이 2세(이 책에서는 프랑스식으로 "니콜라스"로 표기됩니다), 늘어지는 특유의 저음으로 전쟁 독려 방송을 했던 스탈린(사실 그도 프랑스어가 서투른 마킨만큼이나 러시아어가 서투른 그루지야인이었죠), 소름끼치는 독재자의 주구 베리아(그가 모스크바 전체를 자신의 하렘으로 삼고 차를 타고 다니며 여인들을 헌팅했다는 일화도 목격자의 생생함으로 낭독됩니다)까지, 역사의 부조리와 질곡 탓에 모진 운명을 겪었던 주인공의 육성에 담김직한 여러 실존 거물들이 거명됩니다. 역사란, 사회란, 평온하고 선량하게 자신의 공간에서 조용한 생을 마칠 수 있었던 개인들의 삶에까지 이처럼 짙은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것인지요. 혹은, 참된 소속감과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고뇌하고 방황하는 게 어디 망명자들만 겪는 아픔과 상실의 산물일지요. 이 소설은 특수 상황에 놓인 개인의 회고담을 가장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근원적 고뇌의 몸부림을 정직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목의 "프랑스 유언"은 프랑스식 유언이란 뜻도 되고, 물질 아닌 무형의 언어를 통해 묵직한 유산을 물려 주려 했던, 죽은 외할머니의 소중한 말들 정도로 새길 수 있습니다. 아틀란티스가 결국 존재하지 않은 이상향에 대한 고대인들의 간절한 희구가 빚은 상상이었듯, 주인공에게 프랑스 땅이 갖는 의미도 환멸과 원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잦아들지 않는 동경과 희망 등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겠습니다. "선(善)에도 끝이 없고, 악에도 한계가 없는(정말 절묘한 표현이죠. 도스토예프스키도 그 숱한 명작 중에서 자신의 조국에 대해 결국 저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요)" 말 그대로 애증이 교차하는 러시아 역시, 과거의 상처를 거대한 암흑과 죽음의 눈밭에 덮어둘 저주 받은 헛간이 결코 아님도 명백합니다. 하나도 버거운 조국을 둘씩이나 둔 저자의 육성을 많은 분들이 귀기울여 들어 보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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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치하야 아카네 지음, 박귀영 옮김 / 콤마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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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あとかた, 한자로는 跡形(적형)이라 쓰는데, 우리말로는 "흔적 "정도와 뜻이 통하겠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얕은 연계로나마 이어지고, 접근 방법이 다르긴 합니다만 여튼 여섯 개의 도막들이 같은 주제를 부각하고 있어서 전체를 하나의 장편으로 보는 데 무리는 없을 것 같고요. 불꽃-손자국-반지 까지는 앞 장의 의미 심장한 소재가 뒤의 장 제목으로 바톤을 릴레이하는 식입니다. 넷째 장 "화상" 부터는 이 공식(?)이 관철되지 않을 뿐 아니라, 투신 자살한 차장님이 어렴풋한 배경으로만 언급될 뿐 사실상 단절된 스토리라서 그 부분이 좀 아쉬웠습니다. 저처럼 이런 느낌이 드셨던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그저 옴니버스 연작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불꽃". 여직원인 나는 "지인"의 소개(좀 모호하죠)로 연상인 유부남을 만나게 됩니다. 좀 있으면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와 결혼까지 할 예정인데도 그렇습니다. 혼인이 정말, 흔한 말처럼 "인생의 무덤"이라도 되는 것처럼 겁이 났는지 아니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앞두고 모든 게 권태와 싫증의 더께가 씌어 보이기라도 하는지, 우리들 독자에게는 대단히 낯선 어조로 그녀는 이렇게 내뱉습니다. "결혼을 앞둔 때가 아니었으면 만나지 않을 남자였다." 제가 책에서 그대로 인용한 문장이며, 혹시 정반대로 말해야 할 걸 잘못 쓴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녀에게 이상한 동조를 보내게 됩니다. 버젓이 약혼자가 있는 그녀가 별 생각 없이 기어이 몸까지, 그것도 여러 번, 섞게 된 건 이 중년남성이 풍겨 대는 지독한 회의와 불안과 달관과 체념과 애처로운 몸부림 때문입니다.

"손자국"은 바로 앞 사연 "불꽃"에서, 관계 중 뚜렷이 남은 손자국을 암시하기도 하고, 투신자살한 그 "풀네임이 누구에게도 기억 나지 않는 차장님"이 난간에 남긴 흔적이기도 합니다. 이 두 번째 꼭지에서 주인공은 예의 그 죽은 차장에 심각히 공감하는, 혹은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는, 바로 다음 사연에 잘 나오듯 일류대를 나오고 좋은 직장을 다니는 모범생의 전형인 인생입니다. 아내는 자신보다 학벌이나 조건이 좋은 편이 못 되지만, 모든 면에서 평균치는 해 주는 무난한 여성입니다. 자신 같은 남편을 만나 행복하다고도 한 것 같은데, 아이를 낳고 일상에 길들여져 갈수록 무엇엔가 단단히 화가 난 듯합니다. 어떤 때는 결혼 반지를 빼놓고도 다니는군요. 외도하는 여성이라면 본인이 거꾸로 화를 낼 일은 없을 텐데, 육아가 힘들어서일 수도 있고 이유 없는 권태와 우울이 찾아와서일 수도 있습니다. 정작 걱정되는 건 동안에 걸맞는 철없는 성품의 아내가 아니라 바로 자신입니다. 점점 가정과 일상이 지겨워지고, 남들 보기에 이유도 없이 목숨을 끊은 차장님이 불길하게도 성큼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반지"는 예의 그 반지, 아내가 정말 집에 빼놓고 다닌 그 반지이기도 하고, 사연의 끝에 갑자기 드러나듯 "다른 반지"이기도 합니다(스포일러일 수 있어 생략). 전혀 아닐 것 같았는데 아내도 어느 남자, 그것도 젊은 총각을 만나고, 달콤하면서도 슬프며 여전히 목마른 육체 관계에 무시로 빠져드는 사이입니다. 사실 반지는 빼놓고 다닐 필요가 없었던 게, 상대 남자는 그녀가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오히려 그 원숙함에 대한 기대가 관계의 진척에 불을 댕긴 셈이었으니 말입니다. 남편과는 모든 면에서 반대입니다. 탄탄하고 매끈한 몸에, 인생에 아무 전망도 없는 하루살이 니트족, 그러면서도 상대의 감정과 느낌의 동선을 두어 발 앞서 파악하는, 솔직하고 거리낄 게 없는 영혼이기 때문이죠. 어느 날 수유 증 젖꼭지를 세게 물어 놀라움과 아픔을 안긴 자신의 갓난아들이 타인처럼 느껴진 후, 그녀는 나의 왜곡된 의식, 나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관계와 시선, 생계와 장래를 위한 걱정 모두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집니다. 나를 절실하게 만들고 나의 모든 걸 점유할 자격이 있는 건 내 머리가 아니라 내 몸입니다. 사람은 몸이 시키는 길을 갈 때 전적인 몰입이 가능하고, 때로 진정한 행복을 찾습니다. 이 점을 거의 완전히 이해해 주는 상대를 지금 만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녀가 모르는 게 있다면, 남편 요헤이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라는 거죠.

"화상- 비늘- 음악"은 스무 살을 갓 넘긴 방황하는 청춘들이, 아직 관계의 강박과 공연한 가식에 찌들 염려가 없으면서도 그 나름의 상처와 아픔과 불안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는, 그러면서도 현재의 제약에 자발적으로 길들여져 가는 사연이 (앞 세 도막보다는) 긴밀히 이어진 구성입니다. 소녀는 얼굴 윤곽이 또렷한, 매우 아름다운 용모이지만 이 때문에 상처를 더 깊이 더 넓게 받으며 커 온 불행한 인생입니다. 혼혈이면서 사생아인 그녀는 이기적인 생부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넉넉히 받았지만 어느 집단이건 환경에건 넉넉히 소속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평판 좋은 사립학교에 유년 시절부터 다니긴 했으나 본인의 부적응으로 기회를 다 놓쳤고, 얼굴만 간신히 알고 지내던 존재감 0의 범생이와 예기치 않던 동거(아닌 동거)에 들어갑니다. 이 범생이가 살던 자취방이 저 위에 나온 다른 인물들과 같은 건물에 속했기에, 아주 약한 물적 연계로 이야기가 이어지는 거죠.

생계를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지만 여튼 관계에 주린 그녀는 불필요한 푼돈 알바도 하고, 몸을 파는 것도 아니면서(마음만 먹으면 인기가 좋을 텐데) 지카게 씨의 가게에도 들락거립니다. 지카게 씨는 아무 연고도 없는 세계의 재난지역, 빈곤지대를 찾아 자원 봉사도 나서고 의사 선생과 열애에도 빠지는 등 그 나름 멋지게 사는 인생이지만 역시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에 몸을 떠는 "in need"의 상태지요. 여자에게 아주 큰 매력도 안 느껴지는 외모인데 자신이 게이라는 고백을 듣고 난 후에야 그 소년이 요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어느 새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직한 느낌이며 어디서부터가 그간 자신을 거쳐 온(흔적을 남긴) 남자들의 시선인지도 모를 만큼, 편안하고 익숙한 혼란에 빠져 드는 그녀. 인생이란 참 묘한 게, 퍼즐의 절실하게 어긋난 부분을 맞추고 나면 다른 부분이 반드시 흐트러져 있습니다. 감정에 충실하면 현실이 위태로워지고, 현실에 어렵사리 적응하면 내 감정은 나를 타인처럼 멀리하며 보듬어달라고 아픈 흔적을 들이밉니다. 적당한 상대와의, 다른 것 안 보고 체온만 나누며 체액만 교환, 공유하는 섹스가 이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다면 인생의 비의는 이미 오래 전에 풀렸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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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의 소녀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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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브루클린의 소녀로 알고 있던 그녀는 사실 "브루클린의 소녀"가 아니었으며, 이 소녀는 십 년 후 또 한 번 끔찍한 일을 겪고 나서야 처음으로 브루클린의 소녀가 되었다! 기욤 뮈소의 이 신작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전작들과는 달리 스케일이 매우 커졌으며, 배경은 파리, 알사스-로렌, 낭시, 대서양 건너 뉴욕을 넘나듭니다. 미국에서 잠시 유럽을 들렀다가 아내(혹은 딸이라든가)를 잃고 사랑하는 이의 행방을 찾아내려 필사적으로 애쓰는 남편, 아버지 들의 모습은 우리가 여러 영화에서 봐 왔는데요. 이 작품은 정반대로, 프랑스에서 갑자기 연인을 잃게 된 주인공이, 그녀를 찾아내려면 그녀의 "숨겨진 과거"를 조사해야만 하겠다는 결의로 미국의 그녀 고향까지 찾아가서는, 세계가 놀랄 만한(말 그대로입니다) 비밀을 파헤친다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이미 한 번 이혼의 경험이 있는, 그에게는 몹시나 사랑스러운 어린 아들까지 딸려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매우 유능한 엔지니어인 나탈리란 여인과 맹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했었으며, 아직 말도 채 못 뗀 테오도 그녀가 낳아 준 아들입니다만, 저 나탈리는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몹시도 무책임한 여성이었습니다. 재능도 있고 야심도 충만한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이 두 식구가 걸림돌이 될 뿐이라고 아주 당당히 털어놓고서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둘을 떠나고 맙니다. 이 충격적인 체험 때문에 주인공은 여성 일반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시각까지 갖게 되지만, 병에 걸린 어린 아들 때문에 찾은 소아과에서 뜻밖에도, 아름답고 유능하고 마음까지 따스한 젊은 의사(곧 개업의가 될) 안나를 만나게 됩니다. 안나 역시 테오와 주인공에게 끌려, 얼마 있지 않아 결혼식을 올릴 작정입니다. 속 모르는 이들 보기에 참 운이 좋은 남자다 싶겠지만, 본래 사랑도 이를 받을 만한 자격 있는 이에게나 찾아오게 마련이죠.

소설가인 주인공 "나(이름은 '라파엘 바르텔레미'라고 하네요)"의 시점에서 거의 모든 사연이 전달되기 때문에, 혹시 작가 기욤 뮈소 본인의 아이덴티티가 어느 정도나 묻어날까 궁금해하는 분들도 있겠습니다. 대중 소설 창작으로 유명세를 타고 물질적 풍요도 누리는 그이지만, 부도덕한 방법으로 취재(소설가도 현장을 돌아다니며 소재 연구를 해야만 하는 직업이죠)하는 일은 결코 없다며 자부심을 갖고, 전직 NYPD 요원(한국계인 "수연"으로 설정됩니다)에게 "당신 소설이 한국에서 꽤 인기 있다고 해서, 내 올케가 사인을 부탁하더라" 같은 말도 듣는 걸 보면 어느 정도는 연계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 좋은 그에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서는 절대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한국의 팬들을 의식, 혹은 배려한 흔적이라면 이 대목 말고도, 한국의 범죄 소재 장르 영화(과연 뭘까요?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를 즐겨 본다는 짤막한 언급에서도 드러납니다.

어린 테오에게나 이제 갓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자신에게나, 갑작스러운 축복처럼 찾아왔던 안나, 이런 그녀가 느닷, 여러 폭력의 흔적과 함께 실종되었으니 라파엘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신세. 하지만 그는 열정과 애정과 정의감 못지 않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세부 사항은 물론 눈을 큰 범위로 돌려 뜻밖의 돌파구를 찾는 지혜(소설가적 재능이겠습니다), 장애와 위험에 굴하지 않는 실행력 등을 두루 갖춘 사람입니다. 안나 역시 (잠시 트러블은 있었으나)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했던 총명한 여성인지라, CCTV에 촬영된 그 납치의 순간에도 예비 신랑 라파엘의 이름을 또렷이 부르며,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 구조, 구원의 순간을 열망합니다. 이런 아내가 자신을 믿고 그 정말적인 순간에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음을 확신하는 그이기에, 사무치는 애정이 적실한 지혜로까지 승화되어,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난제를 차근차근 해결하는 과정이 독자의 마음을 감동으로 채웁니다.

소설 도입부에는 여러 차례,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시대의 이정표와도 같았던 정치인(위대한 인물이었건 부정적 이미지로 남은 실패자건 간에)들의 이름이 자주 언급됩니다. 지스카르 데스탱, 자크 시라크, 니콜라 사르코지, 그리고 미국의 줄리아니 시장이나 클린턴 대통령까지. 한 시대를 상징하는 여러 정치, 문화적 환기물들은 이들 정치인 말고도 여러 연예인, 예술인들의 이름도 등장하기에, 처음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쳤으나 중반 이후 스케일이 엄청 커지면서 일종의 아득한 복선이었음을 깨닫게도 되었습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출세와 영향력 확대가,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에까지 엄청난 개별적 비극을 안길 수 있다는 해석도 그닥 비약은 아닐 것 같고 말이죠.

소설가 라파엘, 그리고 그의 오랜 친구(이 친구라는 게, 참 양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잽니다, 네) 형사 마르크(유독 어린 테오가 잘 따르죠)는 안나의 행방을 찾기 위해 말 그대로 전방위에 걸친 탐색 노력을 펼칩니다. 주변 인물들의 탐방은 물론 그녀가 졸업한 고교, 의대생 시절 묵었던 자취방까지 방문하는가 하면, 그녀와 실낱만큼이라도 연이 닿을 과거의 사건 기록까지 일일이 들춥니다. 이 과정에서 이 두 남자들이 알게 된 건, 안나가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신분이 바뀐, 세탁된,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여인이라는 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누구라도 주목하게 만든 아름다운 외모를 내내 유지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번이 처음이 아닌, 이미 십 대 시절 비극적인 납치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 이름이 안나가 아닌, 미국식 "클레어"였으며, 혼혈 외모와 뛰어난 프랑스어 발음(신분 세탁 후 이미 오래 이곳에 거주했으므로) 탓에 못 알아봤지만 미국 태생의 미국 국적자였다는 점까지. 본디 그녀는 이스트할렘(이곳은 맨해튼 區 소재입니다) 태생이지만, 언론에서 부르기 좋다고, 혹은 은근한 비하의 목적에서 "브루클린의 소녀"라는 별칭을 붙입니다. 그리고 "브루클린 소녀 실종 사건"은 영구 미제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안나가 십여 년 전의 바로 그 브루클린 걸이었다는 게 비로소 드러난 거죠. 한 사람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끔찍한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는 게 진정 확률적으로 있을 법하지 않은 비극인데, 작가 기욤 뮈소는 이 점을 소설의 전혀 다른 대목에서 슬쩍 지적함으로써 의미의 복합층을 형성합니다. 여튼 안나가 클레어임이 드러나면서, 이 스릴러는 본격적으로 독자를 롤러코스터의 스릴로 몰아 넣습니다. 진짜 모험은, 진정 충격적인 사건의 진상은 지금부터 펼쳐지거나, 벗겨지는 베일을 놓고 완강히 저항합니다.

기욤 뮈소의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특히 나란히 거론되는 더글라스 케네디의 개성과 대조되는 점인데) 주변 인물들의 사연과 개성이 매우 다채롭게 설정되는 게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닙니다. 스토리 중 치명적인 비밀을 캐치하곤 연인이었던 언론인에게 전화를 건 후 목숨을 잃은 여기자 플로랑스의 경우, 자신과 어머니를 매정히 버리고 젊은 여인의 품에 안긴 아버지를 그리도 원망하며 성장했건만, 어느새 멀쩡한(아니, 멀쩡하다고는 못하겠네요) 가정을 파탄내며 이기적인 사랑을 키우고 있던 그녀이니 말입니다. 이 작품은 특이한 게, 이미 라파엘이란 주인공이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물들이 돌아가면서 한 번씩 자기 시선으로 사태를 설명하는 챕터들이 꾸려진다는 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플로랑스의 회고 파트는, 이미 죽은 자신이 살인 사건 직전의 상황을 (혼령의 관점에서) 술회한다는 점에서 유별난 형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나, 아니 클레어의 축복받은 자질(아름다운 외모와 총명한 두뇌)의 유래가 궁금했던 독자에게는, 소설 뒤로 가면서 과연 콩 심은 데 팥 나는 이치가 없음이 확인되곤 합니다(자세한 건 스포일러라 생략). 태드("테드"가 아닙니다) 코플랜드는 이 소설 속에서 2016년(소설이 창작, 발표된     바로 올해입니다) 미국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뽑힌 인물인데, 흥미롭게도 다른 인물들은 모두 실명이 거론되는데도(크리스 크리스티, 칼리 피오리나, 젭 부시 등) 마르코 루비오만 이름이 빠져 있어 혹시 그를 염두에 두었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갈수록 아니더군요. 오히려 당적만 반대일 뿐 여러 모로 빌 클린턴을 연상케 하는 개성들의 부여였습니다.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의 특징을 지닌 다른 여인이 후반부에 등장, 독자를 전율케 하는 여러 악행을 저지릅니다만 그 묘사가 판에 박힌 투도 아니면서 참신한 실감이 전달되게 몇 줄로 지난 행적을 요약하는 대목에서 과연 기욤 뮈소구나 싶었습니다. 반전이 없으면 섭섭한데 착실히 사건 진행을 따라온 독자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또하나의 진실이 숨어 있었으니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춰선 안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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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1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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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매컬로 여사의 대하 역사 소설 <마스터즈 오즈 로마>의 제5부 제목이 "카이사르"이고, 그에 앞선 이 제4부의 제목은 (오히려 부가어가 몇 더 붙은) "카이사르의 여자들"입니다. 우리 상식으론 "어떠어떠한"이라든가, "~의 무엇"이 붙은 제목이라면 그 후편에 배치되거나, 아니면 본편이 아닌 외전으로 구성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대뜸 생각될 텐데도 말이죠. 매컬로 여사가 이 넷째 사연(총 3권)을 구상하고 완성할 무렵이라면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진 시점도 아닌데 왜 이런 편제일까. 그런 의문은 역시 책을 직접 읽어 봐야 풀릴 수 있습니다. 풀려도 아주 시원하게 풀립니다.

역사 소설만이 이룰 수 있는 미학적 성취랄까 존재 이유라 하면, 현전 기록의 빈 부분을 메꾸고 그 타당한 (잃어버린) 고리들을 건전하고 학식 깊은 상상으로 복원하는 데에 있겠습니다. 바로 이 점에 매혹되어, 이미 정사서나 연구서들을 두루 읽고 제법 지식을 쌓은 독자들조차 (양질의) 역사 소설에 열광하며, 저자의 담론과 이야기 속으로 신나게 빠져 드는 것입니다. 한편, 잘 짜여진 역사 소설은 과거 행적의 그럴싸한 복원 외에도, 문학 본연의 기능인 "고아한 인간성의 강조, 감동과 보편적 주제의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에, 故 매컬로 여사처럼 탁월한 작가의 걸작을 읽는 체험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자 보람입니다.

"로마의 마스터(즈)"라 함은 누구입니까? 1부의 제목이기도 한 "로마의 일인자"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나 술라 중 한 사람이기만 해야 정해진 답일까요? 소설의 배경이 된 당대에는 "primus inter pares"라 불린 이 최고의 실력자는, 사실 시대의 과제와 소명을 영웅적으로 해결해 온 여러 걸출한 인물들에게 두루 붙었으며, 무려 반 밀레니엄을 공화정 체제로 이어온 그들에게, 제정 시기의 현란한 이름들이 아니라 해도 여럿이 존재했음이 명백합니다. 한편으로, primus inter pares는 그저 동료(par. 저 라틴어 pares의 주격 형태)들 중의 으뜸이라는 뜻이니, 스스로를 신 혹은 그의 아들로 지칭한 오리엔트(나중에는 로마 제국 역시)의 군주와는 다른, 보다 겸손하고 합리적인 자세와 세계관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제위에 오르지도, 천수를 다하지도 못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지만, "로마의 일인자"라는 어구가 첫번째로 연상시킬 빼어난 정치가, 군인, 지도자가 그라는 점에는 아마 거의 모든 이들이 동의할 것 같습니다.

지난 3부에서 우리 독자들은 광기 어린 독재자, 어린 시절의 상처와 고생이 그 영혼에 깊은 흠결을 남긴 불행한 영웅 술라가, 어떤 모습으로 최후의 몸부림을 치고, 또 어떤 과정으로 정치적 몰락에 다다랐는지 실감 나게 살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새로운 시대가 희구할 만한, 전혀 새로운 타입의 파격적인 영웅이, 전혀 예상 못 한 지방 신흥 가문에서 어떻게 "라이징"하는지도 숨죽여가며 지켜 보았습니다. 저는 그 스트라보의 아들, 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자칭)의 행적을 볼 때면 역시 그만큼이나 거침 없는 개성에다가, 유서 깊지 못한 (그러나 당대의 활력이나 재력은 누구 못지 않은) 가문의 귀한 아들이, 이 혼란스럽고 무가치한 방황을 일삼는 시대를 일거에 쓸어버리겠다는 듯 난폭히, 그러나 화끈하게, 창과 칼을 휘두르는 장관 혹은 혼란상이, 꼭 일본 전국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지난 적폐를 청산하고 활짝 열리려면, 저처럼 머리에 든 것 없고 발상은 무모하며 도대체 당면한 위험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 그 치명적 크기를 계산할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런 무법자 타입이 아니면 구질구질한 폐습과 썩은 기득권을 일소하지 못합니다. 그쪽이든 여기든 언제나 사정이 그랬습니다.

이 4부에서, 2부 말미에 어린 소년으로 첫 모습을 보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제 어엿한 청년으로, 그것도 뭇 여인의 혼을 쏙 빼어놓을 만한 미남자로 자라나, 역사에 남을 그의 치적만큼이나 유명한 엽색 행각을 이어갈 서곡을 요란하게 연주합니다. "여인들"이란 어구가 4부 전체의 제목에 붙어도 이상할 바 조금도 없을 만큼, (원서를 이미 다 읽어 본 독자로서) 이 4부에 담긴 사연은 말 그대로 "여자들과 정신 없이 얽혀드는 카이사르의 호색한(好色漢) 행각"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 나이우스 폼페이우스도, 먼 옛적 알렉산더 대왕을 연상케 할 만큼 늠름한 미남자이며, 한창 때의 욕구를 어떤 식으로건 풀어야 할 만큼 정력적인 면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행위" 혹은 "연애"와는 다른 것이, 그의 스타일(이라 부를 만한 게 혹 있다면)은 그저 폭력적이고 투박하며 일방적입니다. 반면 카이사르는 섹스를 할 때도, 상대에게 긍지와 보람을 느끼게 할 만큼 예술적인 소통에 성공하는 능력자입니다. 여자는 그저 육체적 자극만으로, 남자가 베푸는 충격의 무식한 강도(强度)만으로 행복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한 남자가 상대 여성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사랑하는지는, 전희와 본 의식, 후희의 전과정에 걸쳐 남자가 들이는 성의와 기교의 수준을 느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카이사르는 어느 여성에게나 최고의 연인이었으며, 일시적이든 정식 혼인을 거친 관계이든 그의 곁에 머문 여인들에게 생애 처음으로 육신의 절절한 환희를 느끼게 해 준 은인과도 같은 남성이었습니다. 매컬로 여사의 작품 중에 형상화된 젊은 카이사르(아마 실제 역사에서도 이랬을 개연성이 크지만)는, 이처럼 도무지 실존했을 법하지 않은, '마스터 오브 러브"에 가까운, 에로스의 현인태(現人態)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카이사르는 어쩌면 이렇게 완벽한, 여성들의 위로자이자 극한의 연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이미 1부, 2부에 충분히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위대한 인물에게는 위대한 어머니가 항상 배후에 버티고 있었으며, (비슷하게도) 사랑스러운 남성 역시 애정을 듬뿍 담아 성장기 내내 양육한 살뜰한(그리고 아마, 본인 역시 한때 매력적인 여성이었을) 어머니가 길러내는 법입니다. 사랑을 넉넉히 받고 자란 남성이라야, 다른 여자를 바른 방법 효과적인 테크닉으로 사랑할 수 있고, 또 여성으로부터 아낌 없는 사랑을 받는 법입니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위대한 정치가이자 매혹적인 연인(현대 영어로 표현하면 smooth operator)을 한 남성의 육신 안에 동시에 빚어낸,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다 할 가장 성공적인 어머니였습니다. 이리 어머니 한 편에다 공을 다 돌려도 되는 것이, 그 부친 가이우스(아들과 이름이 같죠)처럼 유약하고 우유부단한(게다가 일찍 죽기까지 한) 위인에게 아들이 무슨 좋은 영향을 받았을 것 같지가 않아서죠.

이 4부 1권에는 좀 충격적인 성애 묘사(전편들에 비해)가 종종 눈에 뜨입니다. 카이사르, 뭇 여인에게 성애의 신으로 군림한 그가 본격 주인공으로 구성상 부각되는 단계니 어쩔 수 없습니다. 말과 지성과 배려와 책략과 다양한 육체적 기교와 타고난 미모("체모 하나 없는")로 여자를 녹이는 그이지만, 이런 그조차도 쓴맛을 다시게 한 여인이 두 명 나옵니다. 그 중 한 명은 지면으로 고작 그녀를 접할 뿐인 독자조차 충격에 빠뜨리고 공분을 자아내었던 만행으로 아직 기억에 생생할, 어느 누구의 생모인 포악하고 잔인하며 자기 중심적인 세르빌리아입니다. 역사상 "대체 왜 그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같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종적으로 남긴 인물은 여럿이 있는데요. 그 중의 하나가 경력상 절정기를 누리던 카이사르를 동료 여럿과 함께 암살한 브루투스입니다.

그의 먼 선조가 폭군을 축출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이였다는 점에서 누백 년 간 이어온 핏줄의 운명을 거론하는 이도 있지만, 매컬로 여사는 이처럼 그 인물의 성장 과정과 가문 간에 얽혀진 복잡하고 비극적이며 불쾌한 "사연"에서 그 단초를 찾으려 합니다(물론 이 부분은 작가의 상상이므로 그 이상의 의미 부여는 불필요합니다). 행위 중 상대의 엉덩이에 깊은 상처를 새기고서야 직성이 풀렸던 독부(毒婦), 그런 숨막힐 듯한 모친 밑에서 얼마나 큰 반항심과 좌절감, 열등 의식을 키웠어야 했을까 싶은 브루투스, 이 4부에도 잘 드러나듯 어머니의 간부(姦夫)이기까지 했던 시저를 내내 근거리에서 응시해야 했던 브루투스, 용모든 기질이든 매력이든 민활한 두뇌 작용이든 뭐 하나 카이사르보다 나을 게 없었기에 내면을 갉아먹는 고뇌에 시달려야 했던 불쌍한 브루투스가 그의 좌절된 자아를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는 거대한 복선이 벌써 여기서부터 깔리는 셈입니다.

신녀를 유혹하고 그 신세를 망치게 함으로써 비열한 자존을 채우려는 어느 한심한 귀족 자제의 에피소드도 들어 있고, 1~3부를 관통하던, 현대 워싱턴 캐피틀 힐(물론 이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따온 이름이죠)에서 벌어지는 정상배들의 모략은 저리가랄 만큼 간교한 정치가들의 책략 다툼도 여전합니다. 여사의 작품은 이처럼 시대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되, 그 속에는 살아 있는 개성과 실감 나는 의지의 충돌이 멋지게 구현되었다는 점은 이미 1부~ 3부를 읽고 등록한 제 지난 리뷰에서도 밝힌 바 있습니다. 번역도 정말 꼼꼼하게 이뤄졌는데요, 예를 들어 "티베리스" 강은 종래 다른 영문 소설의 영향 때문에 "티베르" 강으로들 알고 있지만(심지어 학교 세계사 교과서도 그렇게 나옵니다), 이는 영어식 표기일 뿐이고(그나마 "타이버"로 읽습니다), 이 책에서 올바로 표기하는 것처럼 주격이든 소유격이든 모두 "Tiberis"일 뿐입니다. 로마 시대의 지명이니 당연히 고전 라틴어로 표기해야겠고, 비슷한 예로 우리가 흔히 "도리아"로 잘못 알던 지명 역시 "도리스"로 바로잡혀져 있습니다. 이런 몇 가지 예만 보아도 얼마나 정성 들인 번역과 기획이 이뤄졌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고, 이런 걸작이라면 이 정도의 성의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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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읽는 남자
안토니오 가리도 지음, 송병선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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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8월, 9월 세 번에 걸쳐, 한국에 번역 소개된 유일한 "동아시아(중국) 배경 법의학 소재 추리소설"인 "디 공(적인걸. 狄仁杰)" 시리즈 중 세 편을 읽고 리뷰를 올린 적 있습니다. 동양인의 생활 방식과 사고의 특성, 독특한 문화 풍습과 세계관이 저들 서양인에게는 매우 흥미롭게 와 닿았나 봅니다. 순전히 픽션으로만 꾸려진 것도 아니어서, 로베르토 반 훌릭의 경우 물론 그의 기발한 상상력과 전달 능력, 치밀한 미스테리 플롯 구성력도 돋보이지만, 상당 부분은 중국의 사서(史書), 기록물에 근거를 두거나 그로부터 영감을 받아 창작된 것들입니다. 이는 같은 동아시아인으로서, 꼼꼼하고도 방대하게 이뤄진 기록물의 깊이와 질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주는 방증이며, 완성도 높은 서브컬처나 대중문학의 훌륭한 소스를 제공해 주는 문화 유산에 스스로 자부심을 느껴 마땅한 일이겠습니다.

이 소설은 그 반 훌릭의 "디 공 시리즈"와 궤를 같이하는, 그러면서도 현대에 고도로 발전한 법의학의 최신 성과도 충분히 반영한, 게다가 역사성까지 면밀히 구현한 팩션입니다. 작가 Antonio Garrido Molina는 스페인 태생의 소설가인데, 학문적 배경은 인문이나 문예 창작 쪽이 아니라 산업공학입니다. 산업공학이라는 게 사실 공대에 마련된 분과 중에는 가장 문과 색채가 농후하고, 특정 분야를 깊이 파기보다는 두루 너른 분야에의 비전, 이해가 중시되는 쪽이라서, 아마도 인기 대중 작가로 이만큼성공하는 데 바람직한 지적 밑거름을 제공해 준 듯합니다.

주인공은 우리말로 송자, 한자로는 宋慈라고 쓰며, 작가의 모국어이자 이 작품의 원본을 이루는 말인 스페인어로는 "송씨(Ci Song)" 정도로 읽히겠습니다. 작가께서, 역사상 실존 인물인 이 송자(宋慈)에 대해 참으로 깊은 연구와 애정을 기울인 듯, 그의 생애 초반부터 명판관으로 출세의 첫발을 내디디기까지, 상당히 세부적인 대목에까지 묘사가 이뤄지고 있어서 일단 역사에 관심이 있든 없든 책을 펼쳐 든 독자에게 큰 호기심을 심어 가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편입니다. 중국사에 관심 있는, 특히 송나라 때의 원숙하면서도 사대부나 서민에까지 제도의 활력이 고루 미친 시대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이 책은 필독서처럼 다가올 것 같습니다. 중국사에 대해 거의 이해가 없는 독자라 해도, 마치 요즘 미드 CSI 구경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는, 본격 포렌직 스릴러라서 기본의 법의학물에 좀 질린 분들이라면 바로 매혹시킬 수 있겠네요.

자(慈)는 송씨 집안의 둘째 아들입니다. 보통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조명하는 설정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흔히 그렇듯, 주변의 편견과 시대의 질곡 속에 혼자 "고귀한 인간성, 가치"를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고, 숙연한 마음을 자아내기도 하는 뭐 그런 경로를 그대로 따릅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발리앙이 그러했듯, 혹은 올리퍼 푀치의 최근작 스릴러 <사형집행인의 딸>의 주인공 야콥 퀴슬이 그러했듯, 아니면 톰 롭 스미스의 걸작 <차일드 44>에서 소비에트 압제 하에 분투하는 주인공 레오 데미도프가 그러했던 것처럼, 무지몽매한 민중과 탐욕스럽고 사악한 지배계층이 쉴 새 없이 몰아넣는 곤경 속에서도, 정의롭고 선한 마음의 프로타고니스트는 자신의 의지를 도덕적인 방법으로 관철해 나갑니다.

송자의 집안은 그 가부장의 벼슬길(이래봐야 잡직의 하급 관리지만)을 위해 솔가하여 린안(책에 설명은 없지만 아마 남송 시대의 수도 임안[臨安. 현재의 항저우]인 듯합니다)으로 떠납니다. 아직 소년이었던 송자(이 책에서는 "자"라는 외자 이름으로만 표기됩니다)는 이곳 린안에서 평생의 은사이자 롤 모델인 펭 판관을 만납니다. 마스터는 자신처럼 대성할 기미가 보이는 어린 싹을 특유의 밝은 눈으로 발견하게 마련인데, 송자가 펭 판관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 못지 않게, 펭 판관 역시 이 소년의 총명한 자질과 성실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불의에 굴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착한 성품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 린안에 머물 시절만 해도 그는 아직 여리여리한 소년으로서, 다만 눈에 총기를 빛내며 접하고 마주친 모든 지식을 빨아들이겠다는 듯 의욕과 꿈에 가득차 있을 뿐입니다.

어느 정도는 역사적 기록에 근거를 둔 재구성이겠지만, 송자의 집안 식구, 그 중에서도 손윗어른들은 꽉 막히고 자기 중심적이며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한, 전근대적 인간형들입니다. 그 아버지 되는 분도 지혜롭지 못하고 비틀어진 인간성을 지녔지만, 이 작품에서 어린 송자의 앞길을 가로막는 가장 못된 안타고니스트는 바로 그의 친형 "루"입니다. 의붓형도 아니고 친형이 자기 피붙이들에게 이럴 수까지 있을까 싶을 만큼인데, 심지어 그는 자신의 친아버지에게조차 (한때 자신의 의사를 거스르고 대처로 나가 살았다며) 냉대를 퍼붓고, 이미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부친에게 이제는 자신이 가장이라며 폭언이나 학대도 서슴지 않습니다. 유교의 효순(孝順) 도그마에는 정면으로 어긋나는 모습인데, 실제로 중근세 중국에 이 정도 막나가는 인물이 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참된 인간적 각성이 부족한 채 그저 인습이나 제도적 강압에 의해 유지되는 인륜의 한계를 정확히 내다본, 그래서 재구성에 성공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의 아버지와 끊임없는 투쟁을 벌인 끝에 오늘날의 내 기질이 형성되었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회고하는, 우리 눈에는 어이없이 보이는 마오의 영혼 한 구석이 투영되어 보이기도 하더군요. 중근세가 암울한 건 단지 물질적으로 궁핍해서만은 아닙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가족과 같은 일차 집단 안에서는 무엇보다 거짓 없고 진실된 인간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축복이라면, 이처럼 가족 사이에 건전하고 따스한 연대, 사랑의 감정이 구축되었다는 걸 가장 첫손에 꼽아야 하겠습니다.

여튼 갑자기 송자의 할아버지가 죽는 바람에, 송씨 일가는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야만 하게 되었네요. 이 대목에서 작가(혹은 번역자)는 "장례 의식"을 치르러 낙향했다고만 하지만, 서양 독자는 물론 우리들도 "왜 부모님이 돌아가셨는게 공직에서 물러날 사유가 되는지" 어리둥절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인데, 이 표현을 그저 "삼년상"이라고만 옮겼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알다시피 삼년상에 들어가면 공직 생활이건 개인적 학습이건 올스톱입니다. 모든 걸 멈추고 시묘살이를 해야 공동체와 동료들로부터 도리를 다한 사람으로 인정 받는데, 이 풍습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좀처럼 이해 안 되는, 그 비슷한 예가 전혀 없는 경우라서, 심지어 이 작가도 충분히 소화 못 한 채 작품화했을 수 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와 가부장이자 맏형의 독재에 시달려야 하는 송자는 그런 와중에서도, 병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여동생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한창 나이때라 또래 소녀에게 눈길이 갈 만도 하건만, 엄마가 없는 이 집안에서 동생 병간호하느라 무지막지한 형이 부과하는 노동을 수행하느라 기운이 남아나질 않습니다. 이처럼 이 장편 소설에서 "사람처럼 보이는 유일한 캐릭터"는 주인공 송자뿐입니다. 그 아버지 되는 위인도 어쩌면 자식에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한심하고, 한편으로 그 장남이 휘두르는 폭거에 비굴하게 굴복하는 모습이 처량하기도 합니다.

이런 환경이 주인공 소년 송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우선은 그의 연약한 여동생을 버젓한 성인으로 키워내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굴의 정의감까지 이어지는 동력인 듯 보입니다. 펭 판관이 아니었다면 바른 길을 찾지도 못했겠지만, 일단은 착한 주인공이 범죄를 적발하고 정의를 세우는 판관으로 성장하기까지는 그의 내적인 자질이 더 강력한 동력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농장에선 물소가 쟁기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거 한국을 소개할 때 외국의 교과서에서 이처럼 물소가 농사에 쓰이는 그림이 나오곤 했다는 사실도 떠올랐습니다. 남중국은 제주도보다 다소 저위도인데, 과거 중화 문명의 영향을 깊이 받은(그 중에서도 남중국의 망명 정권과 교류가 잦았던) 우리를 그런 식으로 오해한 것도아주 무리는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수한 두뇌와 불타는 사명감 중, 어느 것이 명판관(현대의 명탐정)을 키워내는 데 더 우선적 요소일까요? 물론 둘 다 필수불가결의 자질이나, 이 작품은 송 자 소년의 정의감과 바른 인성이 그를 (앞으로) 위대하게 만들 불씨였다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이끌고 나갑니다(앞으로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 것도 같습니다). 물소가 쟁기를 끌고 나가는 질퍽한 논에서, 잘린 머리 하나가 발견되고, 이 머리는 소년이 몰래 사모하던 소녀의 아버지임도 드러납니다. 형과 지방관은 무슨 꿍꿍이인지 이 끔찍하고 억울한 죽음을 은폐하려 듭니다. 개인 차원의 불의와 부조리가 결국은 비틀리고 왜곡된 시대상 전체를 상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흥미진진한 장편은 앞으로 이어질 장대한 시대물, 스릴러의 시작을 알리는 흥겨운 나팔소리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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