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관한 거의 모든 것 - 빅뱅부터 암흑 에너지까지, 우주를 이해하다
로베르토 트로타 지음, 이지연 옮김, 이충환 감수 / 교보문고(단행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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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광막한 공간입니다. 우리 태양계 주변의 우주가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그간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로 상당한 부분이 규명되었습니다만, 아직도 너무나 많은 비밀이 여전히 베일에 싸인 채 남아 있습니다. 이를 밝혀 내기 위해 전세계에서 최고의 두뇌들이 성실하고 치밀한 자세와 열의로 연구를 거듭하고 있으나, 그들이 애써 알아낸 성과들조차 너무도 난해하고 복잡한 내용이라서, 이를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고 공감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자신만의 언어로 가르쳐 주고 퍼뜨리기란 매우 힘든 형편이죠. 과학이 인간의 삶을 조건을 이만큼이나 바꿔 놓고, 보편 초중등 교육이 대중에게 무상으로 이뤄지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말입니다.

저자는 우주를 연구하고 그 비의를 파헤치는 이름 높은 과학자이지만, 언제나 어린 학생들, 그리고 열성적인 대중과 격의 없이, 인터넷이나 기타 여러 매체를 통한 즐거운 대화를 시도하는 멋진 지성인입니다. 이 책은 서문부터 어려운 말 전혀 없이, 친근하게, 특히 과학에 대해 깊은 지식이 없거나 아직 낯설어하는 독자를 즐겁게 초대하는 듯 따뜻한 환영의 인사로 채워집니다. 어른들이 읽어도 물론 유익하지만, 막막하고 광활하며 끝도 없이 펼쳐진 우주에 대하여 막연한 동경을 품은 어린이들이, 아무 부담 없이 동화책처럼 읽어 나가면 딱이겠다 싶은 그런 책이에요.

우리 인간은 우주의 중심에 서서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할 자격이 있을까요? 아직 지식도 부족하고, 심지어 발을 디디고 사는 지구의 환경에조차 잘 적응 못하던 시절에도, 인간은 엄연히 우주의 한복판에 놓여, 태양과 달과 금성(베누스)과 화성(마르스)이 우리 주위를 돌며, 우리 인간의 장래 운명, 지난 과거 행적에 대한 평가와 예언, 심판을 한다고 믿었습니다. 신의 섭리에 복종하고 인간의 무력함을 인식하기는 하나, 모든 공간의 한복판에 자리하여 현상과 사건, 체험의 의미를 판단할 자격은 오롯이 인간에게 있다는 게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인간들은 이런 생각에 바탕하여, 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을 (마음대로 상상대로) 이어붙여, 별자리를 설정하기도 하고 그 배경 설화, 전설을 창작하여 후대에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그저 무의미한 거대한 공간으로 인간의 의지를 짓누를 수도 있는 캄캄한 우주에 대해 자기 나름의 "질서와 희망"을 부여한 셈인데요. 과학자들은 전설이나 신화에 대해 전혀 관심 없을 것만 같아도, 고도로 발달한 천체 망원경으로 매일같이 우주를 들여다 보며 하는 일 역시 결국은 저런 고대인들의 작업, 노력과 크게 다를 바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가까운 미래에 우주로부터 어떤 재앙이 닥치리라는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기에, 현실의 당면 과제인 지구에 터잡고 사는 문제에만 집중해도 무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우리가 우주 중심에 자리하건 아니면 그저 머나먼 변방의 미미하게 떠도는 작은 행성에 붙어사는 초라한 처지건 간에(사실 우주에 중심이란 없습니다), 저 광활하고 캄캄하여 슬프기까지 한 공간을 향해 열심히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며 진리의 일단을 파헤치려 듭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이처럼, 일시적인 개체의 생물학적 번식과 존속에 얽매이지 않고 무한히 큰 존재를 향해 시선을 주고 정력을 기울일 수 있어서 존엄한 존재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처음 "암흑 물질"의 존재에 대해 설명을 내어놓았을 때, 사람들은 이미 상대성이론으로 확고한 명성과 업적을 쌓은 그를 향해 비웃었습니다. 자신의 이론(중 방정식)으로 설명 안 되는 부분을 모두 "암흑 물질"이라는 모호한 변수로 뭉뚱그렸다면서, 학자로서 무책임한 처사라고까지 비판한 이들도 있었지요. 이 책에도 나오지만, 최근 관측 결과 중 하나가 다시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시사점을 제시하면서, 반 세기를 훌쩍 넘기는 통찰력을 보인 그의 혜안에 다시 감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초대칭 입자의 모임"으로 암흑 물질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군의 과학자들 입장을 소개하며, 어린 독자들에게 초대칭 개념에 대한 설명을 쉽게 풀어줍니다. 암흑 물질과 초대칭 입자라는 두 가지 까다로운 개념을 독자는 직관적으로, 또 통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죠. 마치 원시, 고대 신화를 읽는 듯한 느낌이라서, 지금 과학책을 읽는지 설화집을 읽는지 모를 만큼 집중하고, 또 마음에 오래 남길 수 있는 서술입니다.

일단 밤하늘(물론 공해로 인한 방해가 없어야 하겠지만)을 바라볼 때 인간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건, "아름답다!"라는 탄성입니다. 정말 우주에 별들이 아름답게 수놓아져 아름다운 것인지, 그 광대한 무작위에 인간이 애써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건지는 아직은 모릅니다. 각각 억만 년의 광년 거리에서 제각기 서로 모른 채로 뿜어내는 에너지의 기다란 자취가 이제서야 인간 눈에 도달한 게, 우연히 단일 평면에서 빛나는 듯 착시를 보일 뿐이라는 설명(맞긴 하죠)으로는 인간의 이 날개 돋친 인문적 상상력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그런 건조한 설명과는 별개로, 인간은 우주를 관찰하고 수식을 풀며, 신이 숨긴(혹은 방치한) 섭리에 한 걸음 한 걸음 더디나마 접근해 나갑니다.

추운 밤 따스한 음료 한 잔을 마시며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의 그윽한 눈길이 아니라도, 별들은 알 수 없는 이유와 과정을 통해 다른 별을 잡아먹기도 하고, 덩치를 키워나가기도 하고, 태어날 때의 맹렬한 기세를 뒤로 한 채 초라히 사멸하기도 합니다. 한 여인(누구라도 무관합니다)이 커피를 음미하며 억지로 심어 넣고 꾸며 낸 사연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견해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천체 과학에 무지하건 그렇지 않건 인간이 꾸는 꿈과 내린 결론은 누구에게나 결국 같은 셈입니다. 별의 탄생과 성장, 소멸에 대해 대단히 간명하면서도, 저자는 이처럼 시적인 문장과 발상으로 우리 독자에게, "겁 먹지 마, 네 생각이 어쨌든 맞았단 뜻이야!"를 속삭입니다.

방에 무작위로 뿌려진 수십, 아니 수백개의 동전이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어김없이 앞면을 향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 누구라도 이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겁니다. 학교에서 확률론을 깊이 있게 배웠건 아니건 말입니다. 오래 전 인간은 우리가 터잡아 사는 지구라는 행성 외에 다른 터전이 없고, 다른 고등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신의 유일한 피조물로서 자부심을 가졌고, 경우에 따라 광신으로까지 옮아가기도 했죠. 많은 과학자들은, 앞에서 든 동전들의 비유처럼, 확률적으로 그 무슨 존재이든 외계의 저편에서 우리와의 소통을 고대하리라고 전망합니다. 하지만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이 민감하고도 여전히 난해한 문제에 대해, 반쯤은 과학자의 냉철한 시선으로, 반쯤은 꿈꾸는 소설가, 이야기꾼의 마음가짐으로, 독자들에게 "당신의 생각은 어떤지?"를 되묻습니다. 분명 정확하고 권위 있는 과학자의 상념인데, 따뜻한 동화 같은 거죽에 싸여 평범한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하듯 전달되는 게 놀랍습니다. 과학이 여전히 부담스러운 독자들이라면, 이 동화책 같은 과학책을 예쁜 일러스트와 함께 읽으며, "우주 물리학은 곧 인간이 꾸어온 꿈"에 다를 바 없었음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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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릴리언트! - 나카무라 슈지, LED로 세상을 밝히다
밥 존스턴 지음, 민청기 옮김 / 양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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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혹은 그 무엇이든, 그것이 위대한 가치를 지녔다면 그 이유는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닙니다. 인류 중 많은 이들, 인간들에게 폭 넓은 혜택을 빚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칭송 받아야 하며, 반대로 숱한 생명들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그에 공연히 찬사를 바칠 일이 아니기도 합니다. 과학이 진정 위대한 이유는, 그것의 성과가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거나, 현존 혹은 잠재의 위험을 눈에 띄게 감소, 제거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헌을 하는 데에 반드시 명문대 졸업이나 번듯한 학위가 필요한 건 아니겠습니다. 또 그러한 업적을 기리는 상(償)이, 버젓한 학위 보유자에게만 한정하여 주어져야 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나카무라 슈우지(中村 修二)씨는 일본의 지방 국립대를 졸업했으며, 명문대 병설 대학원에 불합격했을 뿐 아니라, 마쓰시다 입사시에도 여러 결격 사유가 눈에 띄어 입사하지 못한, 대체로는 평범하다 할 수준의 엔지니어였습니다. 최근 몇 년 간 그의 생애를 다룬 책, 혹은 그가 직접 자기 주장을 담아 쓴 책이 여러 권 나오는 이나모리 가즈오 씨가 마침 이분의 가능성과 역량을 눈여겨 봐 그의 회사 교세라에 입사할 기회를 얻었고, 이후 이름도 없는 중소기업에 몸 담게 되었을 뿐, 인재의 제 가치를 알아 주지 않는 풍토 때문에 자칫하면 이름 없이 한 생을 마칠 뻔한, 남 보기에 그저 조금 두드러진 열정을 지닌 정도의 엔지니어였습니다. 비록 나이 40이 넘어 박사학위를 취득했다고는 하나, 일본이나 우리 나라나 이런 성격의 학위 수여가 사회에서 어떤 평판을 받고 마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뢴트겐, 막스 플랑크, 퀴리 부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채드윅 같은 쟁쟁한 석학, 영재 출신들, 위인전에나 실려 마땅한 인생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경력을 꾸려 온 이분은,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노벨상 위원회는 그와 다른 두 분의 (공동)업적이 이 유서 깊은 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했고, 설명을 들은 학계와 세계 언론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브릴리언트! 이 단어는 물론 (사람의 품성이나 두뇌가) 영리하다는 뜻도 지니지만, 일차적 의미는 "환하게 빛나는"이란 형용사죠. 토머스 알바 에디슨이, 아이들 전기에도 나오고 우리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천 번이 넘는 실패 끝에 일궈낸 전구 발명"을 이룩한 이래, 인류는 백 년 넘게 별 큰 개량이 이뤄지지 않은 백열 전구만 써 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들어 발광 다이오드라는 새로운 구조가 개발되었고, 2007년에 고휘도 청색 LED가 이 세 분, 이름도 없는 중소기업 연구원들에 의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일개 전구 따위의 개량이 무슨 큰 업적이냐고 되물을 수 있어도, LED처럼 다양한 분야, 시설, 장소, 상황에 적용되는 보편적 부품도 드물거니와, 성능이나 수명 면의 현격한 희생 없이 더 저렴한 비용으로 다량 생산이 가능하게끔(그것도 여러 단계를 뛰어넘어) 설계 구조를 혁신하는 건, 결코 만만한 수준의 창의적 쾌거가 아닙니다. 뻔해 보이는, 더 이상 살펴 보지 않은 구석이 과연 남아 있을지 의문인 분야에서 보란 듯이 이뤄내는 업적이 더 어려운 법이며, 동종업계에 종사하던 많은 이들이 "아, 왜 그걸 놓치고 못 봤을까?"라며 탄식하게 만들기란 흔히 보는 현상이 아니죠. 그런 순간은 역사책을 통틀어 몇 번 등장하는 게 고작입니다. 그런 극적인 사건을 우리는 우리와 동시대에 목격한 것입니다. "전기 회로의 개량"이 "힉스 입자", "인공지능", "블랙홀 이론" 등에 비해 초라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당장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에 잔잔한, 그러나 필수적인 편의를 제공하는 폭과 깊이로는 이만한 업적이 또 없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LED 발명 자체가 나카무라 슈지 씨 등의 최초 업적은 물론 아닙니다. 이미 40여년 전부터 실용화, 대량 생산의 가능성이 넉넉히 점쳐졌고, 다만 이 기술 분야가 어느 정도 성숙기에 접어든 후로는 그 구조의 복잡성 때문에 어지간한 전문가라도 그 속성을 "한눈에 파악"하는 게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소소한 개선이 아니라 총체적, 비약적 혁신이 이뤄지려면 전체 구조가 한눈에 들어와야만 그 방법이나 방향성, 미진한 부분, 취약점 등이 모색될 텐데, 어지간히도 꾸준히, 그리고 굵직굵직한 발전이 그간 축적되었다 보니 엔지니어들조차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하는 형편이었던 겁니다. 사실 이런 구조가 P와 N형 반도체의 단일, 혹은 다중 접합을 통해 이뤄진다는 정도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물리 시간에 가르쳤던 내용입니다. 더 환하게, 더 오래 지속되게 회로를 만들려면, 이들 소자가 최적화된 모습, 패턴으로 배열되어야 하는데, 이게 초기 단계에서는 몰라도 현대 LED 회로처럼 고도로 집적된 부품을 놓고는, 연구의 양적 축적에 따른 자동적(?) 개선을 제외하고는 근본적인 환골탈태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걸 이분들이 거의 뿌리채 바꿔 놓았다고 할 놀라운 업적을 이룬 거죠. 다른 연구진들의 과거 수십 년 간 쌓아올린 업적이 만만치 않았기에, 이들의 혁신이 더 놀라운 겁니다. 마치 삼십대에 접어든 이가 갑자기 키를 15cm 더 키운 게 안 믿어지는 것과 비슷하죠.

저렴한 가격에 더 나아진 성능으로 보다 많은 이들(주로 가난한 나라의 빈곤층)에 결과적으로 엄청난 편의를 제공하게 된 업적이기에, 마치 괴테가 죽을 때 남겼다는 말처럼 "더 많은, 더 많은 빛을!"이 연상되어 더욱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인간이 무지몽매한 의식으로 그저 먹고살기만을 위해 발버둥치던 아찔한 원시에서 이만큼이나 진화해 온 게,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정신, 혹은 밝음을 희구하며 발버둥치는 인류의 간절한 몸부림, 그 중요한 단계의 상징과도 같은 업적이 아닐지요.

순수 이론적 측면에서 고찰해도, 일단 그들의 성과와 연구는 반도체 공학의 핵심 기반을 이루는 양자 역학 정수의 상당 부분이 원용됩니다. 뿐 아니라 이 책 저자의 평가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로 평가받아야 할 나노 기술"이라 불릴 만큼, 최첨단 유기화학, 분자 생물학의 성과를 융합한 대단한 쾌거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매우 고무적인 건, 이들이 별볼일 없어 보였던 일개 중소기업의 연구원 출신으로 이처럼 놀라운 업적을 이룬 데서도 알 수 있듯, 자기 분야에 열의와 애정을 가지고 몰두하는 어떤 엔지니어도, 심지어 연구 전성기를 지났다고 할 연령대라 해도, 평지돌출 파천황의 놀라운 업적을 낼 수 있음을 다시 확인했다는 점입니다. 만약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이고 투명한 과정으로, 성실하고 열정 넘치는 엔지니어들을 주목하여 이들이 안정적으로 자기 일에 전념하게 지원해 준다면, 한국에서 제2 제3의 나카무라 씨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제 적성의 소중한 배양이 자신과 국가, 나아가 전 인류를 위한 소중한 발걸음일 수 있음을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게 필요합니다. 특히 소홀해지고 있는 작금의 과학 교육 실정을 보면 이 부분이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군요. 뿌리지 않은 곳에서 어떻게 무엇을 거둘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노벨 상 수상자가 배출될까 개탄만 할 게 아니라, 그 바른 길이 바로 지척에 있었음을 이 소탈하고 수수해 보이는 늙은 엔지니어의 지난 치열한 삶이 잘 보여 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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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시간을 걷다 - 한 권으로 떠나는 인문예술여행
최경철 지음 / 웨일북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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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처럼 우리와 정서, 문화, 취향, 살아온 지난 내력 등이 판이하게 다른 지역을 여행하려면, 물론 가벼운 마음으로 현지에 떨어진 후 자연스럽게 와 닿는 느낌대로만 즐기다 와도 본인만 뿌듯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래도 미리 공부랄까 마음 자세 같은 걸 다듬고 갔다 오면 아마 남는 게 더 많고 더 충실한 시간이 되는 게 보통입니다. 준비를 해야 주어진 시간도 더 알차지고, 행여 돌발 변수가 나타나도 유연히, 별 손해 없는 대응도 가능하기에, 요즘은 다들 각자 능력 범위에서 (따로 돈 들 것도 없는, 그저 공부니까) 뭔가 챙겨 보고 떠나는 게 보통이죠.

2) 반대로 현지에 다녀올 생각은 없지만 그냥 교양과 지식을 쌓고 싶어서 이런저런 책을 들춰 봐도, 해 본 사람은 알지만 책(혹은 인터넷이나 기타 시청각 매체)만으로 접하는 타지, 타향이란 정말 그 진정한 이해에 한계가 있습니다. 안 갔다와 보고 아무리 열심히 파 봐야, 나 자신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기로나 정말 어느 선을 못 넘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타자, 타지에의 이해는, 책도 읽고(폭 넓은 간접 체험), 현지 답사(집중도 있는 직접 체험)가 동시에 이뤄져야 가능합니다.

3) 아무리 역사책을 파고들어도 이해가 안 되던 내용이, 해당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소설책 한 권 읽고 말끔히 납득되던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합니다. 물론 역사(팩트 사항)와 문학(픽션 속에 스며든 일정한 주관적 지향성)은 구별해야 하지만, 어떤 관점을 내 비전의 메인으로 삼을지는 좋은 기회(적절한 문학 작품)를 만나 더 강렬히 내 것으로 새기고 성숙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직간접 체험으로도 충족 안 되는 어떤 목마른 부분은 상상과 영감의 결정체인 문학으로 해갈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위 1) 2) 3)이 모두 한 권에 담긴, 정말 보기 드문 정성과 내공이 담긴 멋진 책입니다. 저는 지금껏 이런 포맷으로 쓰여진 책을 한 번도 못 읽어 봤는데요. 우리 같은 일반 대중 독자가 읽기 좋게 쉽고 친근한 말투로 쓰여 있지만, 우리의 소양을 쌓아 줄 가르침은 적잖이 깊은 수준까지 파고 드는 서술입니다.

보통 텍스트로만 이어지는 서술이라면 그게 아무리 정확성을 기하더라도 전달에 한계가 있는데, 이 책에는 좀 이해가 어렵겠다 싶은 대목에서 반드시 맞춤형 도판이 등장합니다. 4) 만약 건축이면 말 본문 서술을 돕는 범위에서, 다른 사항이 생략된 평면도, 측면도 등이 딱 옆에 제시됩니다. 5) 주제가 되는 건축물의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양식을 저자나 다른 정평 있는 견해를 통해서만 묘사하면, 아무리 빼어난 문필가의 솜씨라도 역시 한계가 있겠는데, 이 책은 구도가 잘 맞는, 찍는 사람의 의도가 선명히 구현된 사진으로 본문을 뒷받침합니다.

4)와 5)는 다른 책에서도, 이 책에서만큼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전혀 못 보던 시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은, 건물과 유적과 미술품에 담긴 본원적 의미를 캐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 배경을 독자 앞에 제시하기 위해, 6) 맞춤형 지도를 수십 컷 본문에 삽입합니다. 제가 지도 마니아라서 지도책도 모으고 웹 여러 곳에 있는 멋진 그래픽도 혹 보일 때마다 PC에 저장해서 컬렉션을 나름 꾸미는데, 이 책에 나온 지도는 (모르긴 해도) 저자님의 직접 편집이라 제가 딴 데서 본 적도 없고, 텍스트와 긴밀히 연결된 정보를 담은 덕에 본문의 방주(傍註)처럼 기능합니다. 정보는 필요한 걸 적절히 집중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 단계에서 불필요한 사항을 과감히 생략하는 요령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이 책에 실린 지도들은 그런 점에서 너무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른 역사책을 읽으면서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백지도를 하나 펼쳐 놓고 책 텍스트의 설명에 맞추어 손으로 그려 (채워) 가면서 스스로의 이해를 돕기도 하는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에 머리 속에 그림이 잘 안 잡히던 사항까지 말끔히 이해시켜 주는 지도를 여러 컷 만나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좋은 책은 이처럼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잘 전달할 뿐 아니라, 독자가 평소에 품던 다른 의문까지 풀어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미덕이 7) 깨끗한 천연색 인쇄로 이뤄져 독자가 보기에 너무도 편합니다. 이런 책은 저자와 편집진의 노고를 감안해서라도 목욕 재계하고 최대한 맑은 정신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만큼요.

책 표지에 나와 있듯 유럽 중에서도 서유럽, 그 중에서도 독, 불, 영, 서(스페인), 이탈리아의 문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대체로 a) 건축물과 미술품 b) 고대(초기 희랍 문명과 헬레니즘, 로마 제국까지 두루)에서 중세에 이르는 시기의 정치사, 문명사 c) 소설 형식으로 풀어주는 민중의 생활사 등 세 가지 줄기가 번갈아 서술됩니다. 한 가지 주제를 아무리 재밌게 풀어도 장시간 집중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데, 이 책은 a) b) c)를, 페이지 바탕색까지 달리 잡아가며 적정 분량씩 노출시키기에 독자의 시선을 내내 붙들어 둡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거나 다소 의문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책의 편집과 참신한 구성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무조건 저자의 치밀하고 꼼꼼한 설명에 동조하고까지 싶어졌습니다. 책 읽으면서 이런 느낌과 공감을 갖기도 드문 체험이었네요.

모두 여섯 개의 챕터인데, 첫 장은 로마네스크 양식입니다. 이처럼 일단 주된 모티프나 토픽은 건축물이나 미술품 등 현재 우리에게 남아 전해지는 유형적인(tangible) 대상입니다. 건축물과 유적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곁다리를 쳐나가듯 역사 이야기, 심지어 당대를 지배한 사조와 철학의 설명에까지 옮겨가는 식이죠. 앞서도 말했듯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가도 이해를 돕는 보조 자료가 없으면 서투른 독자는 보조를 못 맞춰 가는데,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독자를 배려하는 품이 압권입니다. 수사(구교의 수도사), 석공, 그리고 제법 긴 분량(함께 모은다면)의 소설에서 중요 인물 중 하나인 클라우스가 등장하여, 건조하고 박제된 꼴이 아닌 피와 살을 갖고 살아 숨쉬는 "인간들"이 받아들이고 꾸려나간 역사, 인문, 미술, 조형 등의 의미가 무엇인지, 시간의 고금을 초월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어조와 감정을 불어넣으며 그럴싸한 한 편의 소설이 이어지는데, 이런 다차원의 접근을 통해 독자는 저자의 의도대로,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역사와 문화, 사상,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서유럽인이라는 인간들"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갑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저 신학자에 그친 인물이 아니라, 당대 서유럽 문명권이 이해하던 모든 지식을 백과전서적으로 정리한, 중세 전반의 큐레이터적 지식인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를 다루며 종래 우리가 알던 평면적, 파편적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먼저 고딕 양식(성당 등)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화제를 꺼내고, 이에 반영된 "빛"의 원리를 중세인이 어디까지 이해했는지를 설명하며, 그 지식 체계의 챔피언이라 할 성 토마스의 견해와 철학까지 논급하고, 이어 중세라는 시대의 성격을 함축적이면서도 풍성하게 정의합니다. 그러니 줄글 한 편을 읽으며 건축, 미술, 종교, 역사 모두에 독자가 접근, 공감, 이해하는 셈입니다. 모든 지식이란 분야별로 따로 놀아서는 죽은 지식이며, 참된 지혜란 가능한 많은 사항이 이처럼 유효한 하이퍼링크로 연결연결되어야 생성 가능하죠. 뿐 아니라 이렇게 영양가와 밀도 있는 공부를 해야, 여행 갈 마음도 부쩍 내키지 않겠습니까? 한 번 갔다 온 곳이라도 말입니다.

르네상스라는 전혀 새로운 시대의 조류가 문화계, 지식인을 중심으로 도도히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기독교(구교)의 몰락이 반드시 그와 수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역사상의 모든 조류와 사상, 대세는 반드시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배타적으로 몰아내어야만 제 자리가 잡히는 건 아니죠. 그러나 가톨릭의 교세는 유럽 전체에서 전반적, 불가역적으로 퇴조하는 모양새였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이런 성격의 책에서 꼭 다룰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상세히 개인적 논증을 펴고 있습니다. 물론 특정 종파를 비하하자는 게 아니라, 앞선 두 챕터에서도 자상하게, 또 주제(건축과 미술)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설명이 나왔듯, 직전 시대의 성과와 미덕(아쉬운 대로라도)을 그대로 이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배려의 산물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이 책이 그저 건축 양식이나 명소, 미술품에 대한 단선적 설명이 아닌, 인문과 역사 전반을 조망하자는 보다 깊숙한 저술의도를 잘 실현하는 시도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며 처음 등장하는 내용이, 주인공들 중 하나인 프란치스코가 어느 과부의 화형식을 무기력하고 침통하게 지켜 보는 장면입니다. 언제나 시대의 전환이란 점이적(漸移的)이어서,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풍의 잔재와 인습이 미래의 앞길을 (미미하게, 혹은 지저분하게) 가로막기도 하는 법이죠. 책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처럼 연재 소설처럼 이어지는 내용이, 집중만 하면 꽤 재미가 나기 때문에 결코 놓치시기 말길 바랍니다. 이 소설이 또한 시대와 공간을 압축적인 이미지로 한번에 확 전달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바로크 시대 건축물 하면 알프스 이북만주로 떠올리기 쉬운 게 한국의 독자들인데, 이 책은 로마 인근을 두루 짚고 있어 선입견 때문에 소홀하기 쉬운 곳도 살피게 돕습니다. 그러니 아 다음엔 여길 한번 가 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정말 절로 듭니다.

서서히 대영제국의 시대가 열리며 등장인물도 워렌 같은, 그 시절의 전형을 일부나마 대변할 만한 캐릭터가 새로 등장합니다. 신고전주의가 등장하여 정연한 질서와 체제의 미덕을 변호하는 풍조가 생성되는가 하면 계급 혁명의 전조를 예고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들이 지성계와 예술계에서 이미 두드러진 사조로 부상합니다. 이처럼 모순되어 보이는 거대한 두 흐름이 맞부딪히며 서유럽은 오히려 전례 없는 발전과 혁신의 동력을 마련하며, 건축과 미술에도 이런 인간 정신의 방향과 역동성이 반영되는 흔적이 뚜렷해지고, 저자는 예리한 눈길로 독자에게 일일이 이를 포착하여 주체적인 시선으로 소화해 볼 것을 권유합니다.

책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지금까지 진지한 소통을 이뤄 온 상대였던 그들의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 안착했는지,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대화와 소통의 의의는 무엇인지, 현대 미술과 건축, 그리고 이 분야 거장들의 자취와 업적을 통해 다시 정리를 시도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특히 좋았는데요. 과거 역사, 인문, 문화에 대한 회고는 여태 많은 저자들이 시도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입체적으로 돌아본 서유럽의 역사와 종적이 당시에는 어떤 비중과 색채였는지를 파노라마(그것도 3D)로 보여줬을 뿐이라, 이런 의의를 현재에까지 유기적으로 접목시켜(4차원이라고 해야겠네요)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기까지한다는 거죠. 책을 읽고 나서, 교양이 늘고 보는 시야가 넓어졌을 뿐 아니라, 아 밖의 넓은 세상이 이처럼 친근하고 현재적 의미로 다가올 수 있구나 하는 각성 때문에 문득 영감과 의욕까지 솟게 하는 게... 별 열 개가 아깝지 않은 멋진 체험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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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1 - 따뜻함이 필요한 날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1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지음, 류시화 옮김 / 푸른숲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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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읽었던 게 벌써 20년이 지났던가 하는 생각이 새삼 들 만큼, 신선한 제목과 감동적인 내용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고전이죠. 고전이라는 게 별다른 책이 아니라, 독자가 그 책을 읽고 난 전후가 확 달라진, 그러면서도 그 느낌과 깨달음이 내면에서 옹골차게 익어갈 시간의 깊이가 제법 생긴 책이라면 다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로서는 조금 낯선, "닭고기"와 "수프"가 함께 어울린 말인 데다, 구체적인 메뉴와 "영혼"이 얼핏 우스운 듯 의미심장하게 배합된 어구가 의외로 감동적인 내용을 감싸는 제목이라 더 친근감을 주었던 것 같아요. 그때만 해도 일단 화제가 되는 도서는 주제 분야 불문하고 주변 모두가 읽어대던 분위기여서 제 친구나 지인 중 과연 이 책을 안 읽은 이가 있을까 싶은 추억의 아이템이기도 하고요.

아무리 첫 만남이 훈훈하고 다정한 책이었다 해도, 2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났다면 "깨끗한 좋은 인상이 계속 간직되라고 그저 책장 속에 묵혀 두는 게" 더 바람직한 선택일 수도 있었습니다. 초판, 원본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책을 내시는 분들도 이렇게 개정판까지 낼 때에는 독자의 그런 삼가는 마음, 주저하는 심정은 다 고려에 넣지 않았을까, 우리가 (새) 책을 펼쳐 읽을 때는 그 정도 믿음은 갖고 "서빙"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고, 이 작고 예쁜 책을 다 마친 후 그런 소박한 바람이 배신당하지는 않았다며 뭔가 꽉 차올라오는 듯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완 또 다른 벅찬 감정이 이렇게 생기기도 쉽지 않겠고요.

다들 기억하시는 것처럼 감동적이고 먹먹한 사연들을 잔뜩 만날 수 있는 그런 꾸림새를 가진 책이죠. 그때만 해도 이런 짤막하면서도 울림 깊은 사연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던 시절인데, 잡지도 "리더스 다이제스트"처럼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포맷이 인기가 좋았고요(지금으로 치면 <좋은 생각>정도의). 헤밍웨이는 단 아홉 단어(영단어 기준)로도 속 깊은 사연이 전달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 유명한 예가 "개인 광고: 아기 용품 팝니다. 한 번도 안 신어 본 새 신발이에요."죠. 처음 읽었을 때는 무심하다 잠시 후에야 이야기 뒤에 숨은 맥락을 깨닫고 마음이 짠해지는 그런 강력한 힘, 글쓴이의 진정성만이 담고 전달해낼 수 있는 감동이라고 여깁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책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에피소드가, 마치 우공이산이란 동양의 고사에서처럼, 개인적으로 무의미한 노동을 할 뿐이라 본 어떤 노인에게 핀잔을 주는 무심한 나그네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일견 냉정하면서도 합리적인 어투로 변하지 않는 현실을 노인에게 상기시키는 그의 말은, 알고 보면 실용주의와 세상의 철칙을 빙자하여 모든 일에 무감각해지고 타성에 젖게 하며 주어진 여건에 체념적으로 순응케 만드는, 알고 보면 우리 자신 속에 스며든 나쁜 타자적 기제를 상징합니다. 이런 목소리의 지시를 따르고 있으면, 오히려 일상 속에서 무의미하게 진행되는 루틴에 거역하는 모든 작은 발버둥이 다 해롭고 무가치한 것으로 잘못 단죄되기 일쑤이겠습니다. 만약 그런 지시에 따른 행동과 몸가짐만 세상에 만연했다면 도대체 사회의 발전이나 사람 사이의 따끈한 연대가 어찌 가능했을까 하는 반발이 정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뭉텅이로 던져지듯 주어진 존재 같은 건 없다. 그런 말을 하는 너 자신부터가 객관적 가치와 무관하게 너 자신을 감싸고 돌며 맹목적으로 생존에 집착하듯, 저 숱한 생명들도 너만큼이나 일일이 개별성과 자기애에 몸부림치는 존재들이다." 아무튼 이 에피소드는 언제 읽어도 마음 속에 뜨거운 울림을 남깁니다.

우리가 이 기이하고 애착 많은 생을 부여 받아, 잘 되든 못 되든 각양각생의 도전과 성취, 좌절과 행운 속에 부대껴가면서 분명 실감하는 건, 남에게 사랑을 받기보다 내가 불꽃 같은 열정으로 다른 무엇, 누구를 사랑할 때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거의 동의 안 할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누구에게 아낌 없이 사랑을 쏟아주는 데에 존재 이유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부여 받은 생명이 그래서 존귀하구나 하는 본원적 깨달음까지 안겨 줍니다. 또한, 세상에 태어나서 깨달음과 환희, 그리고 실천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선순환을 이루는 예가 이것 말고 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런 느낌은 못 배우든 많이 배웠든, 마음이 악하든 선하든, 어리석은 집착과 고집에 갇혀 사람이 제 한계를 벗어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차별 없이 온기를 안겨 줄 어떤 영감인 듯도 싶네요.

소년 토미의 이야기는 처음 읽을 당시에도 우리들에게 뭔가 대리만족이라도 주는 듯 대견한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열정과 매력으로 가득찬 소년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얘야, 난 많은 사업체를 갖고 있고, 나중에 널 고용할 수도 있어."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쯤이면 제가 자립해서는 아저씨를 고용할 건데요." 이런 짧은 대화에서도 우리는 미국 사회가 무엇에 의해 서열(그런 게 필요하다면)이 주어지며, 개인의 성취와 존경받는 정도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지를 눈치챌 수 있죠. 이때 이 미담의 배경으로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어쨌든 현재까지 생존해 있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어느 개인이 겪는 모든 소통과 인연의 흔적은 결코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고, 드물게 주어진 작은 기회 앞에 머뭇거리지 말고 자긍심으로 첫 발을 대담하게 내딛어야 행운까지 그를 도와 줄 수 있다는 진리도 재확인이 가능합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 무엇에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이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저도 랭스턴 휴즈의 단편들을 지금 읽는 중입니다만, 이 에피소드에 나오는 소년은 파도타기에 미친 아이입니다. 엄마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자신이 소중히 돌보는 "과업"에 헌신하길 바라는 이 소년은, 그대상이 무엇이든 내 모든 걸 헌신하고 오롯이 투입할 수 있어야 내 존재의 충만함, 실감을 확인할 수 있는 우리 모두들과 닮아 있습니다. 이 책이 빼어난 점은 그저 감동적인 미담으로만 채워진 게 아닌, 뭔가 잊고 있었던, 그러면서도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던 그 뭉클하고 뜨거운 박동과 피의 전파를, 내 살과 내 영혼 속에서 다시 느낄 수 있게 돕는 동기 부여적 사연을 잔뜩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올 때만 해도 치킨 메뉴가 지금처럼 온갖 레시피가 다 개발된 형편은 아니었는데요, 갖가지 변종과 얄팍한 유행이 본연의 내 취향까지 잊게 만드는 요즘, 이 단순하면서도 살가운 사연의 모음은 순정판 고유의 담백함과 높은 영양가(?)로, 원기와 진정성 담긴 응원을 가뜩 불어 넣어 주는 친구처럼 반갑고 은사처럼 감사하게 독자의 등을 토닥여 주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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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사 사고력 퍼즐 프리미어 IQ 148을 위한 멘사 퍼즐
필립 카터.켄 러셀.존 브렘너 지음, 멘사코리아 감수 / 보누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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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IQ 148을 위한 멘사 테스트 퍼즐" 프리미어 편이 새로 나왔네요. 대략 십 년 전쯤부터 이 시리즈 한국판이 출간되기 시작했고, 당시부터 꾸준히 인기를 모았기에 이처럼 새 책이 계속 우리 독자들 앞에 선보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읽었던 테드 창 작품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는 외계인을 처음 만나고서 패턴 분석을 통해 그들의 "언어"를 재구성하는 학자의 모습이 묘사되는데요. 이처럼 사람 지능의 수월성을 판단하려면, 어떤 일관된 기준이 무슨 패턴으로 현상 속에 나타나는지 그 규칙을 찾는 능력을 보는 게 우선입니다. 인간이 장구한 세월 동안 진화하면서 "아 이런 전조가 나타나면 어떤 재앙(혹은 그 반대로 행운)이 다가오더라"라든가, "자연을 인간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미약하나마) 길들이는 데 이런 방법을 쓰면 편리하더라" 같은, 법칙과 패턴을 발견하는 능력이 최우선으로 평가되었을 겁니다.

이 책에는 언어 표현이 일절 생략된 채, 그림과 기호, 그리고 숫자(아라비아 숫자 표기는 만국 공통이므로)의 제시만으로, 그 속에 어떤 규칙이 숨어 있을지 찾아내는 퍼즐이 내용의 90% 이상을 차지합니다. "난 머리는 좋은데, 언어 소통의 모호함에만 빠지만 두뇌 기능이 작동을 못 하더라고." 뭐 이런 불만과 좌절에 젖은 분들은 말장난이 끼어들지 않은 순수 퍼즐의 풀이를 통해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런 풀이에 빠져드는 게 다 이런 동기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시리즈가 이처럼 오랜 인기를 누리는 것도, 순수 패턴 분석에만 열의와 재능을 발휘하는 재능 보유자가 그만큼 많아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문과 재능과 센스가 지독히 떨어진다고 그 반대쪽 적성이 저절로 살아나거나 (무슨 신이 공평하기라도 해서) 보상이 주어지는 건 전혀 아니고요. 대체로는 하나가 안 되면 다른 하나도 덩달아 안 되는 케이스가 압도적으로 많은 게 참혹한 현실이죠.

언어 표현 퀴즈도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서양 퍼즐 분야에서 아주 고전이라 할 만한 것 중 하나가, "아버지에 의해 급히 응급실로 실려온 환자에게 의사가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니 수술을 할 수 없어!라고 외치.."는 문제인데, 제가 개인적으로 주위에 물어 보면 이 문제를 틀린 이는 거의 없습니다. 듣고 바로 딱 맞힙니다. 이게 우리말에는 없는, 인도 유럽 어족만의 성(gender) 구분 현상 때문인데, 반대로 이 때문에 저들에게 공평한 문제가 우리들에게는 대체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왜 그게 답이어야 하는지 도통 모를 난제로 바뀌기도 합니다. 과거 보누스 멘사 시리즈 중에는 아예 문장으로만 이뤄진 퍼즐로 책을 다 채운 권도 있었습니다. 이 새 권에는 이런 유형의 문제가 딱 하나만 나오므로, 종래 그런 문제에 경기를 일으키신 분들은 안심해도 되겠습니다. 그래서 공정한 IQ 테스트는 문화적 배경 인자가 끼어들지 않게 배려해서 출제한다고도 하죠.

사실 이 책에 실린 많은 문제들은 답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출제자들은 5개 정도의 제한된 선택지를 내놓고, "이 중에서" 고르게 하는 형식인데, 소위 "객관식" 출제의 암묵적인 규칙은 "그 중에서 가장 답에 가까운,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문제를 풀라는 거죠. 난감하게도, 다른 대안을 선택해도 합당한 설명이 가능한 게 이 책에도 여러 퍼즐들이 보입니다. "내가 파악한 규칙대로라면 이것도 답이 돼!" 그런데 책에는 그 그림(혹은 숫자)이 없으니 이것만 답이라는 식으로 논쟁을 피해가야 하는데요. 이러면 고마운데 어떤 문제는 독자의 논리에 따른 정답(책에서는 오답)이 보기 중에 나와있기까지 하니... 하지만 그게 또 친구들끼리 함께 문제를 푸는 재미이기도 합니다.

요즘 tVN의 <문제적 남자> 때문에 이런 순수 패턴 분석 문제를 푸는 층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퍼즐의 매혹은, 특별한 훈련 없이도 (머리만 좋다면) 문제를 보고 바로 답을 구할 수 있게 하는 "개방성"에 있습니다. 육체적 스포츠인 복싱만 해도, 3, 4 개월 정도 몸만들기를 통해 시합에 대비를 하지 않고는, 천하에 없는 장사나 파이터도 상대에게 KO패를 하기 일쑤입니다. 실제로 매니 파키아오와 메이웨더 사이의 세기의 대결도, 어느 한쪽이 몸이 안 만들어졌다고, 이겨 봐야 의미가 없다고 대결이 연기되거나 무산된 게 여러 차례입니다. 상대가 준비 안 되었으니 이때를 기회 삼아 이겨 보겠다고 덤비는 게 아니라는 점이 재미있죠.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공부 안 한 채 수능이나 토익을 칠 수는 없습니다. 반면 이런 책은 어떤 훈련이나 예습이 필요 없죠. 딱 보고 풀리면 풀리는 거고, 안 풀리면 머리가 나쁜가 보다 하고 포기할 수 있지만, 그래도 구태여 도전해 보고 싶다면 연습을 하면 됩니다. 누구에게나 문제 풀이가 오픈되어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최고 매력이죠.

편집상 아쉬운 점은, 일단 정답만 확인할 수 있게 답만 실린 페이지를 따로 가르고, 그 페이지 뒤에 본격 해설을 실었으면 좋았겠다는 겁니다. 답만 확인하고 싶은데 뒤로 찾아가면서 다음 문제의 해설까지 다 읽어 버리는 게 문제입니다. 이걸 피하려면 종이에 문제번호와 답을 따로 적어 두든지 해야 하는데, 풀고 나서 바로 답을 확인하려는 독자는 어떻게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편집상 그리 어려운 점이 아니라고 생각되므로 출판사 쪽에서 고려해 주시면 좋겠네요.

내 아이가 영재가 아닐까 혹 궁금한 부모님들에겐, 요즘은 이런 책이 아니라도 지역 교육 당국이나 지자체에 영재 테스트를 실시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별 걱정이 없긴 하죠. 이 책 끝에는 "영재, 수재 등의 차이점"에 대해 간단히 설명되어 있는데, 일단 영재들은 따로 교육시키지 않으면 그 영재나 주변 친구들에게나 대단히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영재는 학습 속도가 빠르므로, 나는 이미 이걸 이해하는데 쟤네들은 왜 저렇게 뒤쳐지지? 라며 지루해하고, 이 과정에서 본인의 성격 형성이나 주변과의 관계에서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한편,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영재나 수재가 별 차이 없어 보여도, 수재가 보통 아이들을 답답해하는 것만큼이나 영재는 수재를 답답해하며, 천재가 영재를 한심해하는 건 그보다 정도의 차가 더 크다는 점을 지적하는군요! ㅎㅎ 세상이 본래 그렇지요. 참고로 148이면 그저 보통 말하는 수재 수준입니다.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명문대에 합격하려면 상위 2% 정도로는 턱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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