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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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슬라보예 지젝의 발랄하면서도 날카로운 논지 전개(그의 예리한 논리 동원 실력을 보면 의외로 이분 정통파구나 하는 평가가 나오죠)에만 익숙했던 나머지, 그가 우리 시대의 직면 과제에 대해 열심히 분석하고 던져 주는 실천적 해답에 정작 주의를 놓치는 수가 있습니다. 허나 따지고 보면 그는 순수 이론가로서의 면모 외에, 이처럼 저널리즘적 스탠스를 진지하게 유지하는 논객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인문과학" 저술로보다는, "정책 제안" 기조로 간주하고 읽었습니다.

"죽은 경제학자"에게서 "살아있는 아이디어"를 끄집어 낼 수 있음은 "그 고인"들이 진정 석학이요 현인이었던 까닭이지 우리 독자들이 딱히 현명하고 눈밝아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헌데 현재를 버젓이 사는 그 고명한 이론가, 교수님, 이데올로그들이 정작 구름 잡는 소리만 늘어 놓는다면 그건 소명을 포기한 소이일 뿐 아니라, 망자, 고인에 부끄러운 처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진보된, 혹은 그저 최신이기만 해도 그 자체가 축복인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 시대의 질문에 답을 못 한다면 지식인이 못 됨 이전에 인간으로서 제 구실을 못함이나 같습니다. 지젝의 글은 그래서 읽기에 재밌을 뿐 아니라, 질문인지도 몰랐던 물음을 먼저 떠올려 주고 그에 대한 답(물론 모든 독자로부터 동의를 받을 내용은 아닙니다- 달리 "논쟁적인 지젝"이겠습니까?)까지, 창의적으로, 신랄하게, 그리고 명징한 틀에 담아 제시받는 그런 쾌감이 있습니다.


타자로서의 이슬람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유럽은 현재 오랜 타자, 숙적, 이웃, 그리고 자아를 비춰 볼 거울인 이슬람과 전면적 접촉을 겪고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 오스만 제국의 침공, 서구 제국주의의 동점 등이 교차한 시기에도, 이 "타자"와의 접촉은 부분적이었을망정 전면적이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들과의 만남은, "대체, 오랜동안 반은 적대감으로 반은 낯섦으로 대해 온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근본적 자문을 제기하는 국면입니다. 아래로부터는 난민을 만납니다. 권력의 심각한 진공기를 겪고 있는 그들의 영토로부터, 임시로 상층부를 지배하는 팩션으로부터는 "테러"를 선사받습니다. 한편으로 유럽인들의 공동체 내부에서는, 새롭게 "자신과 타자"에 대한 각성의 눈을 뜨게 된 "셈 혈통의 시민권자, 혹은 불법 이민자"들과 다른 성격의 소통을 요구 받습니다. 위에서, 아래에서, 안에서, 밖에서, 사방에서 밀려오는 이슬람의 물결에 유럽은 지금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지젝은 두 방면의 대처에 공히 눈을 돌립니다.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열혈 좌파인 그가 대뜸 내는 일성은 "배타적 우월주의"에 대한 맹렬한 경계입니다. 그가 예시하는 여러 지난 역사의 사건들은, 그의 애독자라면 다소 지루하게 반복되는 느낌마저 없지 않게 부르지만, 역시 날카로운 그의 개성이 스민 논리 속에 여전한 "뜨끔함"을 낳습니다. 다음으로 관점(과 상상력)의 한계가 역력하나 인문학자의 성실함과 공평성을 견지해야 할 그는, "규제적 이념"의 장벽을 넘지 못할망정 열심히 무슬림의 내밀한 정신 영역을 누비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 일 것이다. 그들이라면 아마...라고 생각/선택할 것이다."

쉽게 요약해서 그가 내놓은 해법은 소박한 연대의 대안입니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소속된 지근 거리의 집단, 혹은 초고위급 준거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언제나처럼 지젝 특유의 편한 해법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타인과의 연대를 거부하는 그 모든 전통, 개성, 장벽 따위는 (내면과의 정직한 대화만을 통해서도) 무의미해지는 그 놀라운 인식을 겪어 볼 것을 조언하는 식으로, 논의의 소결을 내립니다. 이 역시 서양 철학의 오랜 동안 생사를 걸고 논쟁해 온,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 구체와 추상의 모순, 종개념과 유개념의 존재론적 길항 등이 그대로 환기됩니다. "당신은 인간으로서의 본분이 먼저인가, 아니면 지금 팔레스타인인들을 축출해야 하는 이스라엘 군인으로서의 의무가 먼저인가?" 지젝 역시 겸손하게 자신의 논변 한계를 털어 놓습니다. "어디까지가 일반화의 한계일지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결론을 두부 자르듯 내 놓아서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머리 속에 활화산 같은 논쟁점을 즐거이 독자가 어질러 놓게 부추기는, 모범생 집에 놀러와 청솟거리만 잔뜩 만들어 놓고 가는 말썽쟁이 친구를 전송하는 느낌으로 책을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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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지엔은 남자를 위해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는다 - 프랑스 여자들의 사랑, 패션, 그리고 나쁜 습관까지
캐롤린 드 메그레 외 지음, 허봉금 옮김 / 민음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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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시크는 자신을 당당하게 여기는 애티튜드에서 시작된다." ㅎㅎ 벌써 이 문장부터가 보그체의 위화감을 풍기고 시작합니다만, 해당 문체의 효용이 여러 차원에서 대체 불가능함을 우리가 잘 알듯, 이 문장으로 상징되는 책의 스타일, 이미지 환기, 상념의 구체화 효과 등도 사실 다른 수단으로 달성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어떤 분위기는, 어떤 만족과 쾌감은, 특정 매개를 통해 맛 보는 게 유일한 옵션입니다.

타자나 오브제 아닌 주체로서의 여성이 어떤 선택을 통해 자아를 표현하거나("표현"이라는 단어 속에 벌써 타자화에의 웅크림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요) 자각하려 할 때, 그 주요 미디엄이 패션이라고 단언함은 성차별적 뉘앙스를 품음인가. 혹은 이 역시 의식의 과잉과 담론의 폭주인가. 이 심각한 질문에 대해 이 책은 가장 소박하고, 알기 쉽고,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해답을 내 놓고 있습니다. 이 책을 패션 레퍼런스로 받아들일 건지, 인문 에세이로 읽을 건지, (정말 드물겠지만) 철학의 미세한 귀퉁이 한 자락을 포착한 게시록으로 읽을 건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입니다. 두 가지 이상의 스탠스를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독자는 축복을 받은 거고요.

우선 어떤 패션의 코드를 잡기 위해, 일일이 귀납적으로 구체의 끝을 잡는 체험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저자들의 기본 전제입니다. 그녀들의 마인드가 어떤 꼴로 세팅되었는지만 감을 잡았다면, 나머지는 본인의 창의에 의해 펼쳐 나갈 수 있고, 알고 보면 이런 자세야말로 파리지엔의 패션 본체의 연기, 아니 발현이라고 평가해야 마땅하죠. 모방하는 파리지엔이란 형용의 모순입니다. 파리는 남자를 위해 미니스커트(혹은 무엇이라도)를 입는 계집애보다, "짭"을 더 경멸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페미니즘"이란 말도 이미 낡았습니다. 물은 도도히 초 단위의 분할적 관측을 허용하지 않고 흐를 뿐인데, 어느 낡은 개념이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영혼의 날갯짓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게 자기 검열입니다. 내가 이런 옷을 입고 다니면 싸게 보이지 않을까? 이런 옷 속에서 나의 끈끈한 욕구가 엿보이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입고 다닌다고 해서 누가 나의 해방된 영혼을 인식해 줄까?(=차라리 관습에 편안히 굴복) 이 모두가 피곤하고 소모적이기 짝이 없는 굴레입니다. "파리지엔의 패션"은 이 모두에 내리는 고르디우스의 칼날입니다. "이 옷을 입고 니가 온전히 만족할 때 비로소 정직한, 자연스럽게 뻐길 수 있는 파리지엔이 된다." 전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철학적으로건 역사적으로건 현실에서의 선택 기준 마련이건 왜 끝까지 "프랑스적인 것"이 확고한 참고로 기능하는지 비로소 실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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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1~2 세트 - 전2권 -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김종필 지음, 중앙일보 김종필증언록팀 엮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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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탁월한 족적을 남기고 특출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도 사람 자체를 놓고 "역사"라 일컫기란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현재 생존해 있는 인물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 인물에 대해 찬반과 호오가 치열하게 엇갈리는 실정이라면 어떤 중립적인 규정을 시도한다는 것부터가 지난한 작업입니다. 이런 사정들을 모르지 않지만, 왠지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 그리고 근엄한 평자까지 겸하는 중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에 대해서는 "그가 곧 역사였다"라는 비유적 평언을, 좀 다른 의미에서 허용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한국 역사(일단 자유당 집권기를 제외하면)의 결정적 전환점에는 그가 항상 자리해 있었습니다. 5.16 군사정변의 한 주역(이때 그는 실제로 예비역이었으므로 병력 동원의 중심에 서 있지는 않았죠)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3선개헌(처음에 그는 반대 입장이었고, 여당 내에서 집중적으로 반대했던 인물들은 바로 그를 옹립하려는 의도였죠), 유신, 신군부의 등장, 여소야대 정국의 캐스팅 보트, 3당 합당, 그리고 마지막 DJP 연합까지, 한 개인이 이처럼이나 정계에 오래 머물고 그 머문 기간 동안 현대사의 전환점적 사건들에 모조리 개입할 수도 있는 건지, 이 두꺼운 책 페이지를 넘기고 쓰다듬을수록 참으로 경이롭다는 생각, 그리고 한편으로 개탄스럽다는 감회, 이 양가의 상념이 동시에 머리 속을 교차합니다.

얼마 전 타계한 YS의 경우 심한 고초와 격렬한 투쟁의 시기를 겪었다고는 할 수 있어도 치욕, 몰락의 쓴맛을 인생에서 다신 적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JP는 "영욕의 인생"이라는 말이 잘 걸맞을 만큼, 영화로울 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가였고, YS나 DJ와 결별할 때는 노년에 참으로 수치스러운 곤경에 몰린다는 느낌을, 그에게 공감할 아무 이유가 없는 입장에서도 지울 수가 없었고요. 이 거대한 생은 언제나 공적 인생이었고, 그의 부상과 몰락 모두가 한국 현대사의 방향을 바꿔 놓았던 중대한 사건들과 긴밀히 엮여 있었습니다.

이 책은 케이스입으로 1권, 2권이 함께 묶여 있습니다. 회고록을 1,2권으로 나눠 내는 게 보통인데, YS나 이종찬씨, 박철언씨 같은 경우는 케이스입도 아니고 하드커버도 아니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등은 이 책처럼 하드커판 2권 묶음이었고요. 이 회고록들을 저는 일일이 구입해서 꼼꼼히 읽어 본 독자지만, 이 책은 그런 기록들과는 또다른 개성을 풍긴다는 느낌이 지금 정리됩니다. 솔직히 그게 정확히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렴풋이나마 한 문장으로 적어 보자면 "자신이 힘들었던 시기에 대해 보다 솔직한 태도로 털어 놓았다" 정도겠습니다.

얼마 전(이 책 출판 기념회 말고, 그의 구순 잔치 때), 그는 대단히 격노한 어조로 5.17 특별조치 당시 신군부의 재산 환수 처분에 대해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그는 당시의 그 참담한 처지에 대해, 독자가 처연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자세히 술회합니다. YS에 의해 문민정부에서 축출당했을 때, (이 증언록에는 안 나와 있으나) "이것보다 더 힘든 일도  다 겪어 봤다."고 결기를 다지기도 했죠. 이 증언록에서 그는 YS의 회고록 일부를 인용하며, "김종필을 붙들어 두지 못한 게 나의 가장 큰 실수였다."라고 한 말을 문언 그대로 믿고 싶다며 담담한 심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잘 읽어 보면 저자는 "믿고 싶다"고만 했지 그 말이 틀림없겠다거나 의당 그래야만 한다는 취지가 아닙니다.

이처럼 이 책은, 저자 본인의 아전인수격 왜곡이나 미화, 윤색이 최대한 절제된 게 특징입니다. 이런 말까지 다 털어놓는다는 게 자존심이나 감정적 이유에서도 쉽지 않을 텐데 싶은 대목이 참 많았습니다. 워낙 굴곡이 많은 인생이었다 보니 회고록에 그런 말이 당연히 들어가지 않겠나 생각도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치부나 좌절을 회상하는 대목에서 저런 가감없는 태도를 취하기란, 유명인이 아닌 우리들 대중의 입장에서도 결코 쉬운 게 아니죠. 공산주의식 강제 자아비판이 아닌 이상, 당사자 본인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 중에는 가장 솔직한 한계까지 가지 않았나는 생각입니다.

역사의 결정적 순간 근접 거리에서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의 르포도 시중에는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제법 묵직한 평론과 일차사료에 가까운 중요성을 담은 것도 있고, 잡담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들도 있지만, 대체로는 이런 저널리즘의 충실한 "증언"들을 균형감각 있게 읽고 취사선택을 하며 한국 현대사에 대한 조감도를 머리 속에 그리는 게 보통이죠. 이런 기록들과, 정치인의 "회고록"은 대체로 내용이 크게 상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양식 있는 독자라면, 그래도 중립적인 위치겠다 싶은 저널 쪽을 더 크게 의존하는 게 보통이죠. 그러나 이 책은, 거물급, 아니 그 정도 말로는 올바른 형용이 어려운 초거물급 인사 본인의 입으로 털어 놓은 증언을 정리한 내용인데도, 시선이 담담하고 초연하며 공정합니다.

그는 김대중 정부, 박정희 정부에서 모두 국무총리를 역임한, 어떻게 보면 한 개인이 지니기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이력을 갖춘 진귀한 케이스입니다. 성향이 전혀 상반되고 화해가 불가능한 정적 둘과 차례로 손을 잡고, 두 권력자들로부터 모두 견제를 받았으며, 그러면서도 두 권력자 모두 그의 힘을 어느 순간에는 절실히 필요로 하며 자세를 낮추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실로 많은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이 긴 책을 읽으면서 끝까지 뇌리에 머문 느낌은, 이분이 박, 김 양 진영으로부터 비교적 비슷한 정서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읽어 보면 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그 업무 능력과 추진력 등에 대해서만 높은 평가를 하고 있을 뿐, 자신의 처삼촌이기도 한 그에 대해 가슴이 사무칠 만큼 감정적 접착을 보이지는 않습니다(기념관 건립 건은 그저 의리의 발로로 보이기도 하고요). "유신 정권 치하에서 겪은 일은 살아 있는 내가 대신 사죄의 말씀을 드리겠다."고 하는 대목에선, 정계를 누빈 그 수많은 실력자들 중에 진짜 인간의 가슴을 지니고 사내다운 낭만과 진심을 유지한 이가 이분뿐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책 제목도 "회고록"이 아닌 증언록입니다. 책을 JP가 직접 쓰지 않고 기자들한테 들려 준 이야기를 다른 필진이 정리한 까닭도 있지만, "회고록"에서 흔히 드러나는 아전인수식의 위증 없이, 역사의 법정 앞에 선 증인의 겸손된 자세로 담담히 들려 주는 "자신과 매듭매듭 결부된, 상처 많은 한국사"의 진술 자체라는 점에서, 이 제목은 각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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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 오더 메이즈 러너 시리즈
제임스 대시너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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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작 <스코치 트라이얼>이 곧 개봉 예정이라고 하는데,  이 프리퀄 <킬 오더>를 포함해서 모든 "메이즈 러너" 시리즈 영화에 대응하는 원작 소설들이 이미 출간 되어 있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책 사이에 낀 리플렛에 인쇄된 사진을 보니 구매 충동이 일더군요. 내용 전개도 상당히 스피디해서, 운 좋게도 데모 필름을 미리 보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 프리퀄에선 "지구가 왜 그꼴이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 설명이 나옵니다. 사실 프리퀄이란, 작품 내적으로야 기 출간작들보다 앞선 시간대의 사건을 다루지만, 최소한 대외적 발표는 이후에 이뤄집니다. 따라서 작가가 성실하고 꼼꼼하게 준비하지 않은 이상, 보통은 어딘가 억지스러운 구석이 나온다든가 설정 충돌을 빚기가 쉽습니다(상업적 성공을 노리고 무리하게 구상, 출간한다든지). 이 <킬 오더>는 그렇지 않아서, 등장 인물이나 배경의 차림에 있어, 전작(내용적으론 이후)과 아귀가 대체로 잘 맞는다는 게 특징입니다.

 

바이러스가 묻은 화살을 쏘아, 그 맞은 이의 두뇌 부분에 이상을 일으키게 해서 인류의 절멸을 꾀한다는 설정은 독자의 공포를 절로 불러일으킵니다. 1) 본디 화살이란 무기는 서양인들이 능숙히 잘 다루는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 활과 화살을 잘 다루는 종족은 동아시아쪽 유목 부족이며,  그 중에서도 몽골인들이어서, 먼 곳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서도 목표를 백발백중하는 솜씨는 상대를 공포에 떨게 했죠. 이 소설에서도, "화살을 주무기로 쓰는 외계 종족(?)"에 대한 설정은, 대체로 이 화살이 타자화한(나아가 적대적인) 영역에 속한 걸로 여겨 왔던 저들 백인종의 원초적 공포감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몇 안 되는 예외 중 하나가 색슨 족의 로빈 훗 설화라든가, 상업 영화 <람보 2>에서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것입니다.

 

지구는 분명 인간에 친화적인 환경이기에 우리 종이 이처럼이나 우아하고 강력한 모습으로 진화하게 도와 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구라 해도 원 상태 자체가 낙원은 아닙니다. 한 예로 보다 자연에 밀착하여 살아가는 정글의 동물들도, 한시만 딴눈을 팔면 포식자에게 죽음을 맞이하거나, 피식자를 먹이로 확보하지 못하여 굶주리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인류는 자신의 생리에 조화롭게 구축된 문명권 안에 터잡고 사는 걸 최상의 이상으로 여겨 왔으며, 외부로부터의 침략으로 그 기반이 붕괴되는 게 가장 끔찍한 악몽 중 하나였습니다. H G 웰즈의 <우주 전쟁> 이래 모든 재난 SF,  판타지 장르가 비슷한 구조를 취하는 것도, 이런 독자의 오랜 감성 반응기제나 무의식에 의존하는 바 큽니다.

 

네 살 먹은 소녀 디디의 표현처럼, "화살을 맞고 머리를 감싸 쥐며 무섭게 죽어가는" 방식으로 최후를 겪는 인간들. 한때 자연의 정복자로 자칭했건만 지금은 개체의 생존조차 담보하지 못하고 비열하게도 멀쩡히 잘 사는 동족을 해적처럼 습격해야 하루의 연명이 가능한 모습. 사실 다른 어떤 재난상의 묘사보다, 인간끼리 동족 상잔을 벌이는 이 질서의 붕괴를 그린 대목이 독자에게 불쾌한 인상을 남깁니다. 최악의 막장이란 언제나 진영 내 자체 분열상이 아니겠습니까. 이 디디 같은 상징적 장치는, 영화 <에일리언 2>에서도 꼬마 뉴트 같은 배역(Carrie Henn 분)으로 나오곤 했습니다.

 

뭐 그렇다 해도 상관 없습니다. 강도(칼만 안 들었지 바로 강도죠) 셋 정도는 너끈히 맨손으로 처리하는, (자신이 누누이 강조하듯) 전직 군인 출신 알렉이 마크와 트리나 들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독자들은 예상하겠지만, 이들 주인공 crew는 원래 그들이 목적했던 곳에 무사히 모두 도달하지 못합니다. 동료들 중 일부, 상당수는 반드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있고, 프리퀄이니만치 진짜 그 핵심은 생존이 보장되어 있긴 합니다만(안 그러면 설정 충돌 발생- 프랜차이즈 단절), 여튼 우리는 이들이 처한 상황이 워낙 극한이다 보니 보는 내내 마음을 졸입니다.

 

알렉은 자신의 표현대로 "정글의 냉혹한 야수가 씹다 버린 것 같은" 인간이지만, 인간으로서 끝까지 지켜야 할 존엄은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전 대원의 안위를 유지하려 합니다. 그와 같은 부대 소속인 라나 역시, 경력에 어울리는 냉철한 현실 판단으로(더 이상은 스포일러라 언급 자제) 아직은 미숙하고 어린 다른 대원(주인공들)을 이끌어 나갑니다. 이 시리즈의 두드러진 특징은, 극단적인 문명 절멸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주인공들이 사투를 벌이며 종의 재생을 모색하는 모습인데요. 아무래도 재번식의 주도는 어린 개체가 맡아야 그 건강성이 담보되겠지만, 문명의 재건은 경험 부족의 개체가 맡기엔 다소 버겁다는 점에서 다른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이 시리즈가 주로 어린 독자, 관객(영 애덜트)을 타깃으로 삼긴 했어도, 성인들에게까지 폭 넓은 공감을 안기는 건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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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 다이어 1
미셸 호드킨 지음, 이혜선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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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설의 흔한 패턴은 1) 완벽한 남자 주인공이 더 완벽한 집안 배경과 함께 느닷 나타나서 2) 당돌하고 유니크한 매력은 있지만 왠지 남주에겐 좀 부족한 듯한 여자 주인공에게 벼락처럼 사랑에 빠지며 3) 둘은 밀당을 벌이다(여자 쪽이 더 튕김) 결국 서로의 거짓 없는 마음을 이해하고 결합에 성공한다는 식입니다. 이 책 역시 중간까지만 읽으면 이런 영 애덜트 공식에서 별로 벗어나는 것 같지 않다고 독자는 착각할 수 있습니다. 설사 그렇게 착각한 후 딱 거기까지만 읽고 책을 덮는다 해도 별 실망은 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이야기가 워낙 재미있으니까 말입니다. 1) 일단 여고생 마라 다이어의 입담, 특유의 블랙 유머와 반어법이 듣기만 해도 유쾌합니다. 2) 그런데 이 여고생이 그냥 걱정 없이 사는 애가 아닙니다. 물론 집안이야 물질적으로 유복한 편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고, 끔찍한 사고를 겪은 후 일종의 PTSD를 앓고 있죠. 이런 애가 "곧이라도 미쳐 버릴 것 같지만 여튼 현재까진 난 아무렇지도 않아."라고나 하듯, 천연스레 농담 반 독설 반 현실과 악몽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1인칭 시점에서 풀고 있습니다. 가끔 "이상한 체험"에 대해 말하는데, 아직 어리고 여자애니까 신경과민이려니 하며 독자는 이해하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중반을 확실히 넘기고 나면, 그렇게 안이하게 판단했던 독자는, 슬슬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확실히 드러나는 진상을 목격해 가며, 자신이 확실하게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아이, 마라 다이어라는 아이는 뭔가 초자연적 현상의 한복판에 놓여 있어, 여태 벌어졌던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자신도 모르게 유발한 원인이었던 겁니다! 독자는 그제서야 "어, 어, 이거 봐라....?" 하며 긴장의 끈을 확 당기며, '로설이 다 그렇지 뭐' 하던 심드렁함에서 후다닥 각성하게 되는 거죠. 작가가 제법 큰 이야기 꾸러미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으며, 독자는 비로소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여고생이라 심사가 복잡하고 감성이 예민해서 저리 말이 많았나 보다 싶었어도, 이제부터는 '처음부터 특별한 아이라서 무심결에 흘리는 말 같았던 게 사실은 심각했었구나' 정도로 인식이 바뀌게 됩니다.

 

여고생 마라 다이어가 새로 전학 온 학교에서 겪게 되는 소동도, 뻔한 듯하면서도 사실 심각한 사건들로 빽빽이 채워져 있습니다. 마라를 찍은 학교 최고의 킹카이자 명문가 출신의 황태자인 노아 쇼 때문에, 그녀는 교내 모든 여학생의 질시를 한몸에 받게 되고, 사실상 일진이나 마찬가지인 안나 패거리의 집요한 공작으로 여러 번 곤경에 몰립니다. 스페인어 교사 모랄레스는 개인적 감정으로 그녀에게 심히 불공정한 처분을 일삼는데(후반에 가서 결국 큰 사건이 터집니다), 부호의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 고등학교(짬짬이 언급되는 내용을 보니 교과 과정이 매우 수준 높더군요)에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교사로 재직할 수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이름과 인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라는 수학이 타 과목에 비해 약한 편인데, 제이미라는 흑인 동급생(나이는 어리지만 두뇌가 우수하여 월반)이 여러 모로 도와 줘서 그럭저럭 성적을 올립니다. 이 제이미가, 예의 킹카인 노아에 대해 나쁜 선입견을 심어 주는 바람에 마라가 괜한 갈등을 겪지만, 결국은 셋 사이의 오해만큼은 이 1부의 끝에서 다 해결됩니다. 제이미가 마라와 노아에게 필요 이상으로 동조해 주다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결과가 생기긴 하지만 말입니다(사실 노아 쇼도 이 여친 마라 때문에, 귀한 몸에 위협이나 상처가 남을 뻔한 게 여러 번이더군요. 하지만 사랑이란 본디...).

 

이 책은 전체 3부작 중 첫째 권입니다. 아직 엄청난 이야기가 갓 시작되려 자세만 잡았을 뿐이고, 마지막 장면 충격적인 총격 사건의 발생 때문에 독자는 깜짝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다음 권에 이어질 사연을 기다리게 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건, 순결한 도덕성을 간직한 여고생 주인공 마라 다이어가, 자신이 책임지거나 통제할 수 없는(없었던) 일련의 비극에 대해 지나치게 자책하다가, 정말 다른 사람(인격체)이 되어 버리거나 미치는 것 아닌지 하는 거에요(바꿔 말하면, 아직까지는 그 부모와 오빠의 우려완 달리 정신이 말짱하다는 거죠). 그리고 이제 그녀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노아 쇼라는 남고생(우수한 두뇌, 우월한 혈통, 강인한 체력, 퍼펙트 외모를 모두 갖춘)의 장래와 영혼마저도 이 마라의 그것과 연동하여 움직이는 형편이라, 이 기괴한 사연이 어떤 방향으로 튈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내가 정말 데쓰노트 같은 수단을 가지고 있어서, 물리적 개입, 실행 없이도 타인의 생명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다면, 나의 귀책은 어디까지 인정될 수 있을까요? 법학에서 밝혀낸 바로는, 어떤 행위는 결과에 대해 그 원인으로서의 자격이 부인되거나, 대단히 약한 정도로만 인과에 기여한 걸로 판정됩니다. 마라는 이 복잡미묘한 연쇄 작용에 대해, 지나칠 만큼 자기 부죄(負罪)를 시도하고 있어서, 이를 지켜 보는 우리 독자들을 안타깝게 합니다. 법률 전문가인 부친 다이어 씨에게 자문하면 명쾌한 답이 나올 테지만, 이런 이야기를 대체 누구더러 믿으라고, 그 이치와 논리의 세계에 사는 분에게 꺼낼 수나 있겠습니까.

 

"마라, 그들은 그런 꼴이 되게 자초한 거라구."

 

우리도 이 노아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아무튼 여고생 마라는 죄의식과는 별개로, 자신이 과연 무슨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 심각한 공포에 빠지는데, 이를 도와 줄 수 있는 이도 "운명의 남친" 노아 쇼밖에 없습니다. 사랑에 빠져 눈이 먼 남자 외에, 누가 이런 미친 사연을 곧이 들어 주겠습니까.

노아 쇼의 의붓어머니(그리고 죽은 친어머니)가 가담한 "동물 해방 전선"은, 공교롭게도 바로 며칠 전 밍크를 대량 방사했다고 해서 뉴스를 탄 바로 그 단체입니다. 소설에서의 설명대로, 이 단체의 이런 행동은 이제 일종의 테러로서, 실정법상 엄한 처벌을 받습니다. p288:14의 문장 주어 "제이미가"는 "노아가"로 바뀌어야 문맥이 통합니다. 한스미디어의 책들이 언제나 그렇지만, 번역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외국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을 전혀 못 받았습니다. 뮤지컬 <애니>와 영화 <스타워즈>에서 사용된 맥락 원용에 대해 친절한 역주가 적절히 삽입된 점도 독자로서 고마운 부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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