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신,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 신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가 악하는게 만드는가
아라 노렌자얀 지음, 홍지수 옮김, 오강남 해제 / 김영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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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만 얼핏 보면 "신의 존재 여부"를 과감히 논하거나, 21세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는 "유신론 vs 무신론"의 현황을 소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 보면, 그런 추상적이고 어차피 똑떨어진 답이 나오기도 힘든 물음에 시지프스의 도로(徒勞)처럼 무익한 수고를 벌이는 게 아니더군요. 오히려, 아주 실증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로, 때로는 특징적 혹은 무작위로 뽑힌 집단을 두고 벌인 실험을 통해, 중립적이고 과학적 접근으로 "왜 신은 우리 인간의 관념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나"를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않고는 차라리 부차적인 이슈입니다.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면(아주 어리석다든지 하는 이유로), 그 신은 속타서 죽을(?) 지경이겠지만 여튼 인간의 시선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인간은 이런 번거롭고도 부자연스러운 개념을 만들어 내어 자신도 괴롭히고 안 믿겠다는 다른 동족까지 괴롭혔는지, 그 해답이 그런 이유에서라도 필요는 합니다.

일일이 인간사에 끼어들어 악당을 처단하고 불쌍한 이들을 구제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적극성을 보이지도 않는, 냉정하고 초연하며 공감도 안 하면서 전지전능하기만 한 신, 따라서 그 가시적 흔적을 확인도 할 수 없는 저런 신을 왜 인간은 숭배하는지, 지극히 이기적이고 생존 본능에 충실하게 진화해 온 인간치고는 썩이나 안 어울리는 이런 선택("관념론적 신앙")을 왜 거창하게 해 온 건지, 이 책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하나하나 짚어 나갑니다. 그렇다고 이 책은, 그저 과정의 기술에 그친다거나, 최종적인 해답은 독자가 스스로 내 보라며 무책임하게 발을 빼지도 않습니다. 그 나름 대담한 결론까지 낸다는 점에서 독자는 더욱 혹해서 읽어 갑니다. 그리고 제법 알찬 생각거리까지 건지거나, 더 나아가 저자들의 결론에 동조할 수도 있습니다. 논쟁적인 주제를 담았으면서도 흥미롭고, 논의의 과정이 공정하면서도 개성이 뚜렷하기란 그리 쉬운 과제가 아닙니다.

첫째 명제는 유신론/무신론 여부에 관계 없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종교, 특히 신의 존재를 가정하고 윤리적 의무를 부과하는 믿음 체계는, 일일이 마을의 원로나 실력자가 개개인의 뒤를 쫓아 다니며 도덕을 준수할 수고를 덜어 줍니다. 사회가 청동기 시대를 거치며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1차 집단의 윤리가 다양한 개성과 선택을 규율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지만, 일탈 분자의 질서 파괴 행위를 작건 크건 용인하면 공동체 전체의 존속이 어려워지는 건 당연합니다. 종교, 특히 신의 존재를 가정(이 아니라 확신)시키고, 설령 현장에 감시하는 (사람의)눈길이 없다 해도 저 위에서 전지전능한 이가 지켜 보고 있다고 환기시키면, 그저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보다야 훨씬 효과가 강력하다는 겁니다. 요즘 같이 개명한 세상에서는 우스운 아이디어처럼 보여도, 역사 시대 초기 전체가 공존할 지혜가 필요한 단계에선 이게 꽤나 효율적인 발상이었고, 실제로 효과를 크게 보았을 터입니다. 우리 종이 지금 이 정도로나 생존을 이어 왔고 현재와 같은 번영을 누리는 것도 저런 어설픈 믿음 덕분인지도 모릅니다. 소수의 범죄자(어리석기까지 한)가 공동체 전체를 망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 아닐까요?

종교의 효과가 개인보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건 쉽게 말해 이런 뜻입니다. 독실한 신앙을 가진 개인이 종교적(이라기보다 사회적) 의무를 잘 지킨다기보다, 그저그런 껄렁한 신자가 어떤 특별한 분위기가조성되었을 때 이런 의무를 더 확실히 지킨다는 겁니다. 즉 종교는 개인의 생각이나 마음을 일일이 고쳐 먹게 한다기보다, 불특정 다수가 평균적으로 나쁜 마음을 덜 먹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거죠. 이때 저자가 강조하는 건, 이런 기능은 종교적인 기능이라기보다 차라리 친사회적인 기능이라는 겁니다. 종교는 이 경우 다분히 실용적인 효용을 창출하며, 여기서 강조하는 도덕은, 결국은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게 돕는 공리적 메커니즘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가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시스템 한 구석에 고장이 났을 때 보수 없이도 자발적 봉사에 나서는 건 그게 동기가 종교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으며, 결국은 개인의 행동으로 사회가 건전한 질서로 복귀한다는 그 실용적 결과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구성원들의 바른 행동으로 사회의 질서가 잡히는 그 결과에 주목하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가 내내 구사하는 "친사회적"이란 용어는 이런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천하고 가난하며 사악한 종자들에게 죽어서 지옥 간다는 협박도 못 하면 어떻게 교회가 유지되겠소?"라는 어느 성직자(...)의 말이 나옵니다. 여튼 이런 사후 세계에의 엄혹한, 혹은 한없이 희망적인 기제가 개념상으로 구축되면, 사람들의 행동은 아무 현세적 보상이 기대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친사회적(결과적으로는)"으로 재편됩니다. 처벌은 꼭 현세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며, 존재의 필멸성, 유한성이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머리 속에 인식된 이들에게 "지옥의 위력"은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혹은, 현세의 처지에 큰 만족을 못 느끼는 젊은이들에게 "신(사실은 이를 빙자한 권력자의 야욕)의 미션을 수행하면 지복(至福)의 쾌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미끼로 테러리스트의 길을 부추기는 집단(IS 등)도 있습니다. 샤리프와 렘툴라의 실험 보고서가 이를 직접 표명하지는 않아도, 어쩌면 이 역시 "친사회성 증대"의 범주로 판단하면 (테러리스트= 반인륜 이란 이유에서) 다시 타당성이 확인되는 셈입니다.

무신론자는 어떤 경우에도(흑인이나 [미국에서는 소수파인] 가톨릭이나, 여성이나, 심지어는 모르몬, 동성애자보다 더) 나쁜 취급, 불신을 받는 게 흥미롭다고 저자들은 지적합니다. 어떤 기독교도는 "설사 내가 다니는 교회도 아니고, 다른 교파로 적대한다 해도, 그가 아무 것도 안 믿는 사람보다야 더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같은 말을 합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고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이는 종교 관념이 희박한 동양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주장 같습니다. 한국이라면 오히려 무교라고 밝히는 이들이 더 합리적이라는 인상도 주고, 기독교라 해도 자파에서 이단이라 점찍은 이들에게는 무교인(잠재적 고객)보다 더 가혹한 대접을 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 책에서 드는 예 중 가장 재미있는 게 "코코넛을 운반하는 운전수들"입니다. 힌두의 신전까지 코코넛을 그 원산지로부터 옮겨 가야 하는데, 중간에 가로채거나 의무를 태만히하는 이도 없이, 일단 앞 "주자"로부터 바톤을 넘겨 받은 모든 운전수들이 착실히 이를 (아무 대가 없이) 운반핝다는 겁니다. 인도 사회가 정직하고 이들이 교육을 충분히 받아 명예를 지키는 까닭일까요? 전혀 아니겠죠. 그 비결은 오로지 "마 타리니 신이 무슨 응보를 내릴지 몰라서" 같은 아주 원초적인 두려움입니다. 이처럼 종교적 신념은 경제 질서를 원활히 작동시키는 핵심 팩터이기도 합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예전에 사회를 선진 질서와 그렇지 못한 혼란으로 양분하는 원인으로 "트러스트"를 꼽은 적이 있죠. 이런 "신뢰"가 종교적(거의 미신적)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도, 이성적인 형량 과정을 거쳐 자발적으로 이뤄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사회 질서의 고도화 단게에 차별이 생기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주 열등한 개인들의 예를 들며 "이런 문제도 하나 해결 못하는데 A의 효용이 대체 무엇이냐?"며 유치하고 미숙한 불평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심지어 자신의 예를 들며, 나 자신이 효과를 못 봤으니 아무 필요 없는 것이라며 일반화의 폭주 그 끝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책에 실린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하여, "종교가 있어도 이 모양인데 종교가 없으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관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은 "신이 창조하여 완전무결한 인간이 오늘날 이지경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하기보단,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이 정도까지 발전한 게 어디냐며 대견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훨씬 건전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이 있고 없고, 어느 종교가 그르고 옳고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든 뭐든 어떤 제도와 신념의 도움을 빌려 인간이 얼마나 나은 삶(물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을 살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그 공리적 결과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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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빈 동지 - 세상이 변화하기를 바라는 열망, 그 중심에 서다
로자 프린스 지음, 홍지수 옮김 / 책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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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트럼프 같은 국외자가 주류, 그것도 보수 정당 후보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지만, 고령의 좌파 아웃사이더가 경선 과정에서 끝까지 유력 지지세를 유지하며 존재감을 확인시켰다는 점이 아마도 긴 시간이 지난 후엔 더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질 것 같습니다.

버니 샌더스 노인은 정치에 입문한 지 삼십 년이 되어가며, 거물급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지는 겨우 십여 년 정도지만, 그와 나이 차가 8년 정도 나는 어느 영국의 외골수 진보 성향 정치인은 그의 나이 삼십 대 중반부터 내내 의원 경력을 쌓으며 지금껏 근 사십 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궁을 지켜 왔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낙선 한 번 없이 의원직을 유지한 점도 대단하지만, 도대체 타협을 모르며 입문 당시의 노선과 신조를 거의 원색 그대로 지켜 왔다는 사실이 더 놀랍습니다. 이분은 이처럼 한사코 순수한 소신을 내세우며, "국회의원의 존재 이유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뽑아 준 지역구민을 정직히 대변하는 데에 있다"라는 원칙만을 최우선으로 강조했고, 지금도 그런 태도에 변함이 없습니다. 진보정당이라고 해서 이런 원칙파를 언제나 우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고집이 너무도 강했던 터라, 지난 수십 년 동안 노동당의 주류, 수뇌부는 이분에게 그 연륜에 맞는 당직이나 정부 요직(2차 대전 이후 노동당도 오랜 기간 동안 정권을 잡았습니다)을 맡긴 적이 없습니다.

"저 동지가 당수 자리를 언젠가 맡을 날이 있을까요?"
"예끼, 농담도 분수가 있어야지."

"왜 그렇게 일반 유권자들과 오래 시간을 끌고 대화를 해? 지금 '제레미 짓' 하고 있냐(donig a Jeremy)?"

이처럼, 소신의 순수성을 지나치게 고집해도, 같은 진영에 자리한 동지들로부터조차 소외되기가 쉬운 게 세상사의 공통된 이치입니다. 그런데 그가 정치를 시작하고 근 사십 년이 가까워오는 지금, 헤럴드 윌슨, 제임스 캘러헌, 닐 키녹, 존 스미스, 그리고 고든 브라운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거물들이 이 거대 진보 정당을 주름잡았지만, 이분은 한직이든 문제아 역할이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의석 한 곳을 지키며 동시에 노동당의 오랜 가치와 이념을 수호해 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작년(2015) 9월, 이분은 노동당 안에서 최고급 의복을 빼 입고 출신 학교의 세련된 어투를 자랑하고, 평민들은 알아 들을 수 없는 미사여구를 입에 올리며, 신사의 우아함으로 좌파의 가치를 수호한다던 위선적 거물들 사이에서 그저 농담거리로만 여겨졌던 일을 드디어 현실로 만들었습니다. 전당대회에서 최다 득표를 얻으며 자신이 40년 동안 몸 담았던 당의 대표가 된 것인데요. 그는 지난 달 열렸던 재신임격 투표에서 또다시 재취임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분의 이름은 제레미 코빈. 현재 영국의 근로 대중과 양심적 지식인들 상당수의 희망으로 떠오르는 정치인이죠.

이 책은 제레미 코빈의 일대기와 그에 대해 바르게, 혹은 그릇되이 알려진 사실들에 대한 차분하고 공정한 검증을 담습니다만, 반드시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일단 특정 이슈가 거론되면, 어린 시절의 제레미와 현재의 코빈, 혹은 청년 시절의 그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교차해서 조명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제레미 코빈 노동당 당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독자들뿐 아니라, 시민의 참여를 지향하는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그 구체적 이슈에 대해 저 서유럽 선진국의 좌파 정당, 그 정치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싶을 이들에게 아주 유용하겠습니다. 이 책은 그래서, 인물에 대한 책이자 이슈에 대한 책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노동당의 골수 좌파(좌파 중의 좌파) 한 인물을 통해 특히 1980년대(대처 수상 집권기) 노동당 전체의 역사를 둘러보고, 당연하게도 영국 최근세사를 동시에 분석하는 의의도 갖습니다. 책 맨앞에는 역자님이 간단하게 영국 정치 제도에 대한 개념잡기식 설명을 붙인 글이 나오는데, 정치제도나 헌법 사항에 대해 밝은 독자라 해도 최근의 개혁 과정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특히 2010년 이뤄진 법 개정은 영국의 내각제가 독일식의 "건설적 내각불신임제"에 꽤 많이 다가간 흔적이 역력하기에, 어떤 과정으로 이런 혁신이 이뤄졌는지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물론 이런 개혁은 상당 부분이, 코빈 같은 소신파 정치인들의 분투와 노력에 빚진 바 큼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제레미 코빈은 보통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뜻밖에도 현실 정치에 몸 담은 이들 중 가장 좌파적인 스탠스를 고집하는 인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코빈 가가 어떻게 중산층 가문으로 성장하였으며, 조부모와 부모 대에 윤택한 환경을 형성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밝힙니다. 노동당 유력 인사 중에는 이튼 스쿨, 옥스브리지 출신도 많고, 그 중에는 가문 대대로 세습 귀족을 지닌 이들조차 상당수입니다. 그러나 제레미 코빈처럼 도대체가 타협을 모르는 원칙을 고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데요. 그의 먼 조상 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짐작대로 어려운 여건에서 고된 노동, 혹은 기술 발휘로 착실하게 돈을 모은 이들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풍이나 집안 내력이란 한 사람을 판단할 때 결코 무시할 수 없으며, 저런 환경에서 성장한 이였기에 체제와 시스템을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란 태생적으로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레미 코빈의 부모는 흥미롭게도 집안, 특히 어머니 쪽 가문의 만만찮은 반대를 무릅쓰고 맺어진 연이더군요. 이 부분 관련 저자의 집요한 취재와 조사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이 부부는 특히 금슬이 좋았는지, 제레미의 손윗 형제 이름을 일일이 익혀 두느라 잠시 독서 속도가 느려질 정도였습니다. 피는 못 속인다고 이분의 형들 역시 정말 성격이 만만찮은 분들이고, 한번 누구한테 원한을 품었다거나 반대로 호의를 가졌다 하면 그 감정을 끝까지 가져가는 타입들이더군요. 전형적인 영국 중산층의 넉넉한 지원 덕에 그는 좋은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그의 타고난 기질은 주위와 융화하는 과제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머리가 좋지는 않았으나 대신 매사에 열심이고 진지했다." 이런 평가가 말해 주듯 그는 가슴 속에 담아 둔 소신이 새로 습득하는 지식을 무척 까다롭게 필터링하는 내면의 구조를 가진 인물이었고, 이런 까닭에 공부를 잘하지 못했으며, 결국 졸업도 못 하고 사회로 나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신의 행로와 선택에 아무 미련도 갖지 않는 그였으며, 우리들도 당연 그라면 그러려니 하고 넉넉한 이해에 도달합니다.

제레미 코빈 같은 타입이 이성을 사귈 때는 어땠을까요? 유복한 집안에서 마련해 준 사회 진입의 발판을 잘 활용하지도 못한 채 불쑥 성년을 맞은 청년을, 그 어떤 여성이 호의적으로 봤을 리 만무할 것 같지만, 그의 첫째 부인 제인 채프먼은 "성실하고 신념에 불타는 남자였으며, 당시에는 외모도 준수하게 보였다." 라고 회고합니다. "첫째 부인"이라는 타이틀에 너무 구애받을 건 없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원래 이혼과 결별도 쿨하게 이루는 게 오랜 전통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고 예전에 이희호 여사가 "제가 보기엔 매력적이었어요." 라며 KBS 아침마당 프로그램에 나와 술회하고, 방청객들이 큰 웃음을 터뜨리던 장면이 기억났습니다. 제가 보기에 책 표지에 나온 사진, 그리고 유튜브 등에 올라온 영상에서 그의 모습은, 노인치고도 준수하며 위엄이랄까 인생을 알차게 살아온 이들 특유의 건강함이 물씬 풍기는 듯합니다. 뭐 어때서 그러시는지 ㅎㅎ

제레미 코빈 하면 그 과격한 소신에 걸맞게 행동거지나 정치 스타일도 꽤나 단선적이고 다변일 것 같은 느낌이지만, 이런 선입견은 그를 직접 만나본 이들에 의해 여지없이 부정됩니다. 그는 심지어 첫째 부인과 헤어질 때에도, 직선적이고 격정 넘치는 상대의 의견 개진에 일절 응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반대"의 뜻만 표시하고 보내 줬다고 하는군요. 의원이 되고 나서 그의 입장에 반대하는 정치인이 "당신 내가 전직 프로 권투 선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라며 위협적으로 나오자 "나는 프로 달리기 선수라고 하죠."라며 그 자리를 그냥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토니 벤 같은 좌파 거물을 우상으로 삼았지만, 자신은 말도 서투르고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도 부족한, "전형적인 지방 의회 의원이나 하면 딱 맞을 타입"이었다고 합니다.

과시형 인물은 다변에다 방대한 지식을 과시하며 상대를 압도하려 애쓰는 게 보통인데, 이 제레미 코빈은 정확히 그 대척점에 위치한 사람이라 볼 수 있죠. 이 제레미 코빈이 정치를 갓 시작한 하원의원 시절, 대처 수상이 출석한 자리에서 직접 그녀에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취임하기 전 2700명도 채 안 되던 노숙자가 지금은 27,000명을 헤아리는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에 대한 그녀의 답은 "이즐링턴 같은 곳의 지방의회가 빈집을 활용하는 데 서툴러서 아닐까요?"였는데(이때 노동당 의석에서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고까지 책에 다 나옵니다), 이 말은 중앙정부 측의 반대당 집권 지역 실정에 대한 독설일 뿐 아니라, "지방의원 깜냥밖에 안 되는 자가 의회의 존엄도 모르는 무슨 턱도 없는 원색적 발언이냐"는 대처 수상의 불편한 심사가 드러난 발언이기도 하죠.

제레미 코빈은 이 책에도 나오는 것처럼, 노동당 내 주류 인사들에 의해 "출당"이라는 큰 위협적 조치를 당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대의정치는 본디 "무기속위임"이기 때문에, 지역구민의 개별 의사 변경(그런 게 측정 가능하다면)에 일일이 구애받을 필요는 원칙적으로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코빈은 그런 태도야말로 정치인의 무책임과 위선을 폭로하는 악폐라고 여겼기에, 언제나 지역구민의 의사를 현지에서 청취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고 실천에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런 게 당시 노동당 수뇌부의 눈에 아주 거슬렸던 겁니다. 여튼 자신이 몸 담고 자신의 자아를 확장하여 종신토록 헌신하고자 하는 당(黨)이 그 충의를 고깝게 본다면 이런 것만큼 당사자에게 서러운 일이 또 없을 겁니다. 앞서 말했듯 그런 전횡을 휘두르려 한 "높으신 분들"은 지금 간데없고, 백오십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노동당의 지휘와 기치는 지금 그의 몫입니다.

제레미 코빈은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인물로 유명합니다. 소위 패션 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인사들의 특징을 보면, 귀족이나 중산층 출신이면서 의식적으로 노동자 말투를 꾸며내어 대화하고 연설하는 타입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레미 코빈은 자신이 중산층 출신인 사실을 타인이 보기엔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그를 애써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는 게 특이합니다. 참고로 코빈 전 전 대에 노동당 당수를 지낸 고든 브라운 같은 경우 너무 티가 날 만큼 옥스브리지 출신이라 이것 때문에 표가 깎일 것을 우려한 이들이 있었을 정도였죠.

제레미 코빈의 한계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게, 그가 좌익에 입문할 때 지배적인 분위기가 그랬던 것처럼, EU(당시에는 EEC)에 대해 지나치게 적대적인 태도라는 점입니다. 이번에는 그는 브렉시트에 찬성했는데, 이는 주류 진보 진영의 스탠스와 동떨어진 태도일 뿐 아니라,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혐오스러운 구태"로 지적되기까지 합니다. 사실 이 점은 그의 나이(그가 속한 세대)를 감안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닌데, 어지간히도 한번 옳다고 마음 먹은 소신을 안 바꾸는 그의 퍼스낼리티를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긴 합니다. 그가 청년기를 보낼 무렵이면, 성장의 한계에 직면(특히 광대한 시장과 자원을 보유한 미국과 대조할 때)한 자본가들이 정치인들과 손잡고 저개발국의 잉여 저가 노동력을 흡수하려 고안한 장치로 시작한 프로젝트이긴 합니다. 그러나 지금 EU를 이렇게 인식하는 측은 거의 아무도 없고, 오히려 진보, 리버럴들이 차별 없고 국경 없는 세상을 이루려 활용(역이용?)하는 마당이 된 게 대세입니다.

한 인간에 대해 그 진실성과 깊이를 가늠하려면, 말로 내뱉은 바를 그의 일상과 삶 속에서 얼마나 실천을 해 내는지를 보고 판단하는 게 (가혹할 수는 있어도) 가장 확실한 기준입니다. 이런 기준에서라면 우리의 "코빈 동지"는 정치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중 가장 완성된 인격자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동료, 혹은 적대 진영의 인사들이 그를 놓고 평가하는 말 중 일관된 게 있습니다. "그가 이상으로 삼고 내세운 주장들은, 당시에는 아무도 동조자가 없었으나, 지금 돌이켜 보면 어느새 보편적 공감의 가치들이 되었다." 바로 이런 게 진보(progrssive)의 본래적 정의이며, 도덕적 기반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토니 블레어가 제3의 길을 내세우며 모두의 기대를 모았을 때, 자신의 자녀를 고급 사립 학교(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에 보낸 게 들통나자 많은 이들이 지지를 거두었습니다. 코빈은 반면 정색을 하고 공교육을 옹호하며 자녀에 대해서도 이 원칙을 그대로 적용했는데, 심지어 그는 (자녀가 아니라 아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예외가 없었으니(ㅎㅎ) 말 다했죠. 과연 우리 같으면 이런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산다며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없기에 국내, 심지어 국외에서조차 이런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에게 무한한 갈채를 보내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책 표지만큼이나 발갛게 상기된 가슴으로 책을 덮을 수 있는, 독자를 부끄럽게, 동시에 뿌듯하게 만들어 주는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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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이동 -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성공의 방식
데이비드 버커스 지음, 장진원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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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나 4차 산업 혁명이 초미의 화두입니다. 여러 사람이 다양한 트렌드를 내세우며 이게 미래의 대세라고들 합니다. 예언되는 모든 진보와 발전상이 실현되면 소비자로서 우리의 삶은 훨씬 풍족하고 만족스러운 미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산자로서 기업의 위치는 파리목숨처럼 위태로워지며, 현명한 전략이 세워지지 않으면 언제 도태될 지 모른다는 경각심을 경영자는 한시라도 놓칠 수 없습니다.

경영에 혁신이 필요하다는 건 곧 기존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즉 그간 잘해오던 노하우나 지혜마저 무분별하게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경영자는 대체 어떤 원칙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마인드와 조직의 체질을 점검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학자들, 혹은 실무가들의 생각은 갈립니다. 저자의 그것은, 우리 독자들도 한때 일각에서 강조되었던 참신한 아이디어라서 기억하고 있는, "리버스 혁신"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주장입니다. 즉, 복잡한 것, 번거로운 것을 일일이 유지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과감하게 제거하고 떨어 내어서, 필요한 핵심만 갖춘 채 앞으로 진격하라는 게 그 요지입니다.

직원들에게 이메일 이용을 금지하라면 황당하게 느껴지는 게 보통의 반응이겠습니다. 이메일은 업무상 처리해야 할 많은 용건을 담은 채 수신되거나, 반대로 거래처, 혹은 회사 내부에서 나에게 부여된 사무를 처리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이메일의 과도한, 혹은 분별 없는 접근이 멀티태스킹을 방해하고, 그 자체로 (이메일만이 유발하는) 스트레스를 준다는 것입니다. 업무 시간에 이메일 사용을 극히 제한하는 정책을 이미 도입한 곳은 폴크스바겐과 벤츠 등 독일 업체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이미 "좋은 내용을 담은 이메일은 그 효과가 미미하거나 식상하고, 나쁜 내용은 하루 내내 컨디션에 악영향을 준다"고 결론이 났다는군요.

한때 고객이 왕이라는 말이 (실천 여부와 무관하게) 유행했죠. 그런데 저자는 "고객은 2순위며, 1순위는 당신이 고용한 직원"이라고 하네요. 이 함의는 간단한 게, 직원을 잘 대우하면 업무 성과의 질이 높아지고, 신이 나고 사기가 오른 직원들은 고객을 잘 대우하며, 조직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생기가 돌며 자연스럽게 창의가 샘솟는다는 논리입니다. 책에서는 스타벅스의 예를 드는데, 저는 한국에서도 이런 모범적인 사례를 이제는 많이 접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일본 여직원들 친절하다고 칭찬 많이 하는데, 그렇게 강요된 분위기에서 나오는 기계인형 같은 매너가 고객 만족, 서비스 품질을 높인다고 보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친절보다, 아 이거는 제가 책임 지고 해결해 드리겠다면서 자발적으로 발휘되는 성의가 더 중요합니다. 제가 최근에 SKT 고객센터, 삼성전자 AS 등을 겪으며 실제로 느낀 바입니다. 점장이나 윗선에서 직원들을 존중하니까 이런 분위기가 자연히 조성되는 것 아닐까요? 인적자원관리 면에서 한국이 어떤 면에선 일본을 앞지르는 면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제안도 많이 나오는데요, 예컨대 어차피 일도 못하고 조직에 적응하려 들지도 않고 분위기만 해치는 직원은, 과감하게 보너스를 줘서라도 내 보내라는 겁니다. 이는 법적으로 정리해고가 어려운 한국에는 잘 안 맞는 설명이긴 한데, 그래서 예전부터 명예퇴직 제도를 따로 두기도 한 거죠. 미국에선 비교적 자유로운 해고가 이뤄지는데도 저자는 이런 제안을 따로 내놓는군요. 첫째 직원 입장에선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는 게 정답이지만, 소위 "매몰비용(지금까지 적응하느라, 업무를 익히느라 정 붙이느라 애쓴 게 어딘데)"이 신경 쓰이는 직원들은 서로가 괴로운 동거를 이어나가려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직원들에게 명분도 주고, 회사는 비능률적 요소를 제거하고, 둘 다 윈윈하는 길이 "돈 줘서 내 보내라"는 겁니다. 이 예는 자포스와 아마존을 통해 들고 있네요.

휴가는 가고 싶을 때 마음놓고 선택해서 가게 하는 게 직원 만족도를 높이며, 어떤 지침을 만들어서 규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넷플릭스에선 이게 성공했고, 반대로 트리뷴 퍼블리싱(시카고 트리뷴의 자회사)에서는 회사가 몇 푼의 이익을 위해 직원들에게 치졸한 거래를 시도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큰 실패로 끝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회사는 어디까지나 직원들과 동료애, 신뢰라는 가치를 공유하며 "함께 나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거죠. 위의 "고객보다 직원이 우선"이라는 원칙과 일맥상통합니다.

경쟁금지란 그 회사를 퇴사한 직원이 향후 경쟁업체에서 동종 기술과 노하우를 활용할 때 소송에 걸릴 수 있다는 조항입니다(근로 계약의 일부). 그런데 IBM 등에서는 일찌감치 이 조항을 없애고 보다 편한 분위기에서 근무할 수 있게 했다는데요. 그 이유는 마치 대학교수처럼, 일류 직원들이 근무하는 IBM은 지식과 기술의 허브가 되어, 다른 기업들에게 존경받고 장래에 보다 넓은 pool로 타사의 인력까지 활용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이디어의 출처는 사내와 사외를 가려서는 안 된다는 건데, 제 생각을 좀 추가하자면, 이런 경쟁금지 조항을 폭 넓게 적용하면 (아주 파격적인 개별 성과급을 책정하지 않는 이상) 오히려 직원들의 사기 저하를 부를 수 있다는 이유도 고려되었다 봅니다(열심히 해 봐야 내 것이 내 것이 안 되고 회사로 귀속). 한국의 소위 공밀레 타령도 여기서 나오는 건데, 다만 기밀 유출까지 가는 지경이면 당연히 어디서건 민사뿐 아니라 형사 소추의 대상이겠죠.

책에는 "과연 개방형 사무실이 (많은 혁신적인 젊은 기업가들이 주장하듯) 능률적일까?" 같은 소소한 질문부터 해서, 자신이 평소 경제와 사업, 인생, 미래상에 대해 가져 온 여러 다양한 견해를 솔직하고 알기 쉽게 털어 놓은 대목이 보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건 "자율성이 강조되고 책임도부여되는 조직, 아예 관리자가 없어도 돌아가는 조직"이 앞으로는 큰 성과를 내리라는 점입니다. 또한 회사 혹은 어느 조직이라도, 끈끈한 1차적 유대가 중시되는 소위 배태성(embeddedness)가 있어야 큰 성과를 낼 수 있다고도 합니다. 미국 기업 하면 대뜸 떠올려지는 여러 냉혹한 이미지가 불식되는 언급이기도 한데, 이런 걸 보면 우리도 고유의 장점은 잘 살려가면서 조직의 효율화를 기해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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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변화의 물결을 타라 - 3차 인터넷 혁명이 불러올 새로운 비즈니스
스티브 케이스 지음, 이은주 옮김 / 이레미디어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AOL하면 한때 메신저의 대명사로 통했습니다. 메신저의 대명사일 뿐 아니라, 그 상품 브랜드이자 동시에 개발사의 명칭이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장을 연 벤처 기업, 혁신의 대명사로 (야후 등과 함께) 널리 존중되었지요. 한동안은 미디어와 일반 대중의 관심에서 다소 벗어난 듯 보였지만, 일선의 전면에 나서기보다 의욕 있고 아이디어가 좋은 신진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동시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소명을 직접 실천하는 "조용한 활약"에 몰두했더군요. 이런 분이 작금의 4차 산업 혁명, 혹은 제3차 인터넷 혁명에 대해 어떤 비전을 품고 계시는지, 미래(라기보다 차라리 현재)의 도전을 예비하는 젊은 세대에게 어떤 충고를 들려 줄지가 궁금했습니다. 당장 현재 잘나가는 분들의 감각도 중요하지만, 초창기 모든 가능성이 오픈되었고 동시에 무자비한 정글을 방불케 한 양상에서 승자로 군림했던 분이, 현업 최전선에서 잠시 물러선 후 차분히 관조하는 비전이 오히려 듣고 싶어지는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첫번째 스타트업(스타트업이란 말조차 생소했던 때)의 회고담을 들으면 국외자조차 안타깝고 참담해지는 그 기분이 바로 느껴지는 것 같더군요. 그가 아직 서른도 맞이하기 전 꾸려 나갔던 "모뎀 제조"는, 제아무리 첨단 기술을 보유했다 한들 시장에서 뒤처진 기술로 곧 퇴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56,000Mbps 규격을 최고라며 전화선에다 꽂고 부러운 눈으로들 보던 시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러던 게 5년도 안 되어 노트북에 내장형으로 소켓만 보이는 식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아예 전화선 모뎀이 뭔지도 모릅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려 자사가 지닌 최고의 기술을 시전해 보이며 대기업과 선을 대려 하지만, 대부분은 "케이스 씨, 당신의 의욕과 재능은 인정합니다만..."으로 어려운 말을 꺼내며 등을 돌렸습니다. 어렵게 마련한 거래선도 하루아침에 "이젠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차가운 말 한 마디로 끊기기 일쑤였습니다. 갑을 관계가 한국에서만 치사하게 횡행하는 게 아니라, 미국 실리콘 밸리(젊은 기업인들이 대세인)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AOL을 창업해서 번듯한 트랙에 올려 놓은 후에도, 심지어 투자자들은 스티브 케이스가 너무 젊다며, CEO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그의 소회는 책 중에 대단히 정직하게 표현되어서 흥미롭습니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 구세대의 편견과 고집이 엉뚱하게 끼어들어 의욕을 꺾는 개탄스러운 현상은 미국에서도 흔하다는 점 다시 확인하게 되더군요. AOL이 하나의 신드롬을 일으키며 인터넷 문화의 중심으로 등장했을 때, 저자 스티브 케이스는 폭주하는 항의전화를 받으면서도 "우리(회사)가 이만큼이나 중요하게 되었나!" 같은 감격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가 회고하는 "제1차 인터넷 혁명"의 순간이며,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당시 우리는 유튜브였고 구글이었으며 동시에 페이스북"이었을 만큼 대단한 성황이었다는군요(인스타도 추가시켜야).

저자의 관점에서 "2차 인터넷 혁명"은 스마트폰이 주도한 모바일의 전면 부상입니다. 당시, 그리고 지금도, "인터넷"이란 공간이나 매체를 강조하기보다 "모바일 온리"로 완전히 개념을 바꾸는 추세가 업계나 미디어를 지배합니다만, 스티브 케이스는 과거 자신의 화려한 성공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는 모르나 여전히 "인터넷 중심"의 패러다임을 이 책에서 줄곧 유지합니다. 이런 관점이 저는 더 믿음직하다고 여기는데, 이런 시각이 모바일을 경시하지도 않으면서, 기기가 아닌 사이버 공간과 네트웍의 본연 기능에 더 주목하게 돕는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적하는 3차 인터넷 혁명은, 사물인터넷, 나아가 만물인터넷이 주도하는 산업간의 폭발적 융합상입니다. 그는 이 3차 인터넷 혁명을 통해 특히 의료, 교육, 식품 산업에서 엄청난 성장세가 움트며 미래 경제를 이끌 것으로 전망합니다.

하버드 경영대 교수 크리스텐슨이 지적했듯, 지금은 파괴적 혁신의 시대입니다. 벌써 페이스북이 흔들리는 기미를 보이고, 트위터는 한때 넷의 총아로 각광받았으나 벌써 몇 차례나 결정적인 매각 협상이 결렬되는 등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야후나 라이코스는 아예 잊혀진 기업에 지나지 않는 작금의 실태를 보면, 저자가 냉철하게 꼬집는 대로 현재에 안주하는 기업은 반드시 내일이라도 그 태만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만 같습니다.

다만 그는 이처럼 변화가 극심한 시절일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공감대에 주목하라고 충고합니다. 기업은 지역의 거주민들이나 소비자와 소통을 강화하는 게 생존을 위해서도 영리한 선택이며, 자신 역시 청년기의 대성공으로 거둔 과실을 "케이스 재단"의 복지, 기부 활동으로 이웃과 함께 나누는 데 앞장선다고 합니다.

그는 현재 미국 정부나 미국의 주도적인 기업인들이, 변화하는 추세, "신 경제 환경"에 과연 제대로 적응하는 중인지 자문해 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의 예를 들며 "두려움을 모르는 기업인들의 도전"이 이어진다고도 하고, 중국의 무서운 부상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도 하는군요. 미국이 으뜸가는 퍼스트 무버였던 "1차 인터넷 혁명" 시기와는 달리, 현재는 아프리카, 유럽, 터키, 일본 등 전방위에서 변화를 선도하는 무서운 물결이 몰려온다는 게 그의 진단입니다. 미국인인 그는 "앞으로 미국이 다른 나라를 모방하며 질질 끌려다니는 미래야말로 우리가 가장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가 아닌가!"라며 목소리를 높이는데, 여전히 혁신을 선도하는 입장인 미국 기업인이 이런 말을 할 정도면 우리야 더 분발해서 기량을 가다듬어야 하지 않을지요. 책 서문에 나온, 우리 시대 최고의 전기 작가로 이름 높은 월터 아이작슨의 코멘트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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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싸우지 않는가 - 저성장 시대를 돌파하는 강소기업의 3가지 전략
야마다 히데오 지음, 서라미 옮김 / 청림출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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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 싸우고" 돈을 버는 사업가는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를 받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자 사이의 무한 경쟁, 완전 경쟁(혹은, 그에 가까운 경쟁)이 빚은 효율로 인해 오늘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쟁을 피해가거나 독점을 통해 경쟁을 저해하는 모든 행위는,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의 기준, 잣대에 의해 "범죄"로 규정되며, 실제로도 사법, 공법이 아닌 제3의 영역인 "사회법(중 경제법)"에 의해 규율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사업가 입장에선, 가능하면 피 말리는 경쟁 없이 편하게 돈을 벌었으면 하는 마음이 당연히 듭니다. 앞으로 도래할 "제4차 산업혁명" 이후에는 어떻게 그 양상이 바뀔지 미지수이지만, 자본이란 본래 덩치를 키우면 키울수록 시장에서 이로운 위치를 점하며, 일제강점기에도 "물산 장려 운동"이 벌어진 배경이, 도대체 조선인 사업가들의 손에 종잣돈이 좀 모이게나 해 보자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덩치를 부풀린 자본은 개인의 사업 시작(소위 breakthrough) 단계에서만 요긴한 게 아니라, 이미 덩치를 키울 대로 키운 자본이 다른 경쟁자를 다 쫓아내고 독점 체제를 구축하는 데에 더 유용합니다. 가격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반대로 가격을 나에게 가장 유리한 지점에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다면, 사업자 입장에선 그보다 더 좋은 상황이 없습니다. 반대로 소비자의 후생은 축소되며,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자체 생존을 위해 이런 독점 현상을 규제하며, 나아가 생산자들 간의 담합을 통해 이뤄지는 과점까지 제재합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주제는 그러나 이런 탈법, 초법, 예외적 현상이 아닙니다. 경쟁이 없어지니 사업가의 마음이 편한 것까지는 같은데, 덩치를 키워 경쟁자를 쫓아내거나 (언제 배신할 지 모르는) 경쟁자들과 뒷거래를 하는(그래서 소비자를 등치는) 게 전혀 아니라,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나만의 사업 영역을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그 영역에서 나의 물건만 찾게 하자는 전략입니다. 다시 말해 "싸우고 싶어도 싸울 상대가 안 나타나, 오직 나 자신만이 경쟁 상대"인 블리스포인트를 가리킵니다. 이런 걸 가리켜 예전부터 블루 오션, 혹은 퍼플 오션 같은 말을 써 왔으나, 그런 용어들은 어찌보면 결과론으로서, 혹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그런 시장을 운 좋게 발견하는 사례에 가까웠습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그런 사례보다, 진취적이고 혁신 친화적인 기업가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안온한 자신만의 시장을 만들었는지, 그 비결에 대한 것입니다.

저자가 지향하는 미래 이상적인 기업의 목표상은, 바로 강소기업입니다. "소"는 사이즈가 작아야(이게 앞서 언급된, 규모를 키워 독점의 장벽을 높이는 지지난 세기의 악폐와 대조됩니다) 변화하는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함의이며, "강"은 경쟁력을 통해 다른 참여자의 위협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다는 뜻이겠습니다. "강소기업"의 육성은 예전부터 대만 같은 신흥국에서 강조해 온 정책 목표이자 미덕이었는데, 개발 독재기의 한국은 정반대로 재벌 중심의 중후장대형 산업 구축에 몰두했습니다. 저자의 견해로는, 이제 아이디어 중심, 톡톡 튀는 창의력 위주로 수시의 혁신이 필요하며, 이런 환경적 변화에 맞는 빠른 의사 결정이 가능하려면 강소기업 체제 외에 답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경영서를 쓰시는 저자들을 보면 1) 실무 최전선을 뛰다 나이 든 후 컨설팅 쪽으로 전환하신 분들 2) 처음부터 컨설팅 섹터가 주무대였던 분들 3) 학자 출신 세 부류로 대강 나눌 수 있는데, 이 저자님은 3)에 속합니다(컨설팅 쪽에서도 일정 경력 있음). 자신만의 파격적인 주장을 개진하신다기보다, 정평 있는 여러 다른 학자들의 견해를 촘촘히, 다양히 인용하시는 체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본디 경영자나 통치자의 유형도, 자신만의 개성과 일관성을 이어가는 타입(멋있긴 하죠)보다 주변의 말을 경청하고 센스있게 취사선택 잘 하는 타입이 끝에 가서 더 성공하는 것처럼, 이 책은 균형 감각과 조화 있는 분별의 미덕이 잘 발휘된, 실무자들을 위한 개념 찬 요약서 같았습니다. 만약 "틈새시장(niche)", "블루 오션", "비경쟁 전략" 같은 주제들에 대해 여러 책들을 참고하는 수고 없이 단 한 권만 독파하고 최대한 실리를 찾고 싶다면 이 책이 최고의 참고서이겠습니다.

일단 그는 잘나가는 선두기업의 기본 전략이 뭔지를 정리합니다. 선두기업이란 우리가 잘 아는 필립 코틀러의 정의에 기반한 개념인데, 리더/챌린저/니처/팔로워 중 "리더"를 의미합니다. 시마구치 미츠아키는 코틀러의 개념과 정의를 다소 수정하여 1) 주변 수요 확대(치약의 예를 드는 저자의 재치가 돋보이더군요) 2) 동질화 전략(챌린저의 혁신을 무용지물화) 3) 비가격 대응 4) 최적 점유율 유지 등입니다. 4)는 지나치게 시장 점유를 확대하려 들면 역효과(법적 제재도 포함)가 난다는 상황 인식에 기초합니다.

저자가 염두에 두는 "이상적인 기업"이 이런 선두 주자를 의미하지는 않음은 명백하죠. 이 책은 코틀러의 범주 중 니처를 염두에 두고 논의를 이어나갑니다. 작은 기업이 그 유리한 틈새 시장 안의 강자 지위를 유지하려면 여러 (변칙적으로 보이는) 지혜가 필요한데, 저자가 앞서 "선두기업의 전략"을 정리하고 넘어간 건 이유가 있습니다. 전략이란 나 혼자 멋지게 잘 짠다고 상대가 그 의도에 고분고분 응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좋은 전략이나 자원을 가지면 상대도 당연 그 점을 고려에 넣고 반응합니다. 저자는 그래서 "선두 기업- 대체로 규모가 크고 가용 자원 pool도 방대한 곳"이 내 시장에 못 들어오게 하려면, 1) 너무 이익률을 높이지 말고, 2) 너무 시장을 단기간에 키우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이익률이 높거나 시장이 갑자기 커지면 대기업 역시 전망을 좋게 보므로 곧바로 진입합니다. 이후 이 니처는 바로 약자가 되어 시장에서 퇴출되는 수순인데 남 좋은 일만 시키고 희생자가 되는 셈입니다. 시장을 빨리 키우면 투자자금이 빨리 회수되는 장점이 있지만, 이걸 보고 대기업들도 눈독을 들이므로 "그 이후"가 보장이 안 됩니다. 책에는 노래방 기기 시장, 의료용 가운 시장에서 실제로 일어난 재미있는 사례가 많이 나오는데, 이런 구체적인 예증 소개가 이 책의 최고 장점입니다.

특히 니처들은 기술니치(가장 이상적이지만 유지하기 어렵죠), 채널 니치(아주 좁은 경로만을 확보해 막고 있으면 대기업이 접근하기 어렵거나귀찮아서 간과합니다), 시공간 니치, 특수 니즈(수요) 니치 등의 전략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원도 적고 규모도 왜소한데 덩치 큰 대기업과 정면 맞대결을 하다간 자멸의 결과뿐입니다. 전환 비용 니치라는 전략도 있는데, 이 책에서는 캡슐 제조와 약품(펠릿 꼴) 투입을 전담하는 쿠오리커후스(퀄리캡스)社를 전형적인 예로 소개합니다. 이 사업은 첫째 이익률이 적정 수준이고, 둘째 정부의 인허가를 받기가 번거로우며, 셋째 기존의 니처가 쌓아온 평판이 확고한 데다 신규 사업자에 대해 소비자들(제약회사들)이 일일이 눈길을 주지 않고, 행여 작은 사고 한 번의 실수라도 바로 매장되므로 시장 진입을 감행하지 않는다는 거죠. 익숙한 건 그대로 몇 십 년이라도 같은 브랜드를 쓰는 예도 "전환 비용이 높은 예" 중이 하나로 드는데, 일본에서는 종이수첩인 "능률수첩"이 그런 브랜드 파워와 충성도를 유지하는가 봅니다.

선두기업이 강소기업에 빼내 들기 좋은 가장 좋은 전략은 "동질화"인데, 이는 쉽게 말해 "너희들이 갖고 있는 좋은 점은 (좀 치사하긴 해도- 자본주의는 원래 치사한 거죠) 우리가 바로 따라해서 없애 버리겠다"입니다. 여기에 강소기업(니처)가 응수할 수 있는 전략은 딜레마 전략인데, 2006년에 등장한 온라인 전용 보험사인 라이프넷의 사례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1) 영업사원을 통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가입하게 한다 2) 특약을 폐지하고 약관을 간이하게 한다 3) 원가 구조를 모두 공개하여 소비자에게 유리한 계약임을 분명히 밝힌다. 인데, 이걸 대기업에서 따라하다간 바로 타격이 옵니다(이른바, 자산이 부채로 바뀌어 버리는 결과). 그런데 제 생각엔 이 예는 일본의 실정에 제한된 것 같고, 실제로 삼성생명이나 동부화재 같은 경우 다이렉트 사업 부문도 바로 만들어서 이런 틈새시장까지 차지하려 드는 걸 볼 수 있고, 이들은 시장 규모를 천천히 키우는 전략을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으므로 다이렉트 섹터가 더 이상 니치도 아님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경쟁과 협력을 합친 新전략을 "코퍼티션"이라 부르는데, 저자가 이 책 중 원용하는 네일버프와 브랜든버거는 이미 이십여 년 전부터 게임 이론 분야에서 큰 업적을 쌓은 학자들입니다(당시 한 번역서에서 "나레버프"라고 표기한 걸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네요). 이들의 연구를 재원용하자면 아메리칸 항공과 델타 항공이 경쟁 관계일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보완적 생산자 관계도 유지한다고 합니다. 이 역시 일반 대중들도, 삼성과 애플의 소송전이 격화되자 메모리 조달 계약을 해지하는 결과를 목격함으로써 역으로 이 둘이 그간 보완적 공생 관계도 이어왔음을 알 수 있었지요. 전적으로 특정 생태계에서 양자가 적대하기만도 오히려 어렵습니다.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 게 마켓 메이커 전략인데, 저자께서는 라쿠텐 버스 서비스를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우리 같으면 코버스 같은 버스 회사 연합(운송사업조합) 사이트에서 이를 전담하지만(만약 외주를 통하면 수익이 안 날 겁니다), 일본에서는 이 회사가 예매 업무를 대행하는데, 좌석의 쾌적도나 터미널 주변의 시설 정보도 제공하고, 혹 특정 노선이 수요가 초과되면 회사에 통보하여 증편할 수 있게 하는 등 부가 서비스를 통해 니처로서 입지를 굳힌 경우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부가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크지 않으므로 이렇게까지 온라인 예매 패턴이 진화하기란 좀 시일이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양한 사례 소개와 연구가 책 읽는 재미를 몇 배로 늘려 주는 유익한 경영서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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