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없이 회의하라 - 가족, 직장, 친구, 나 자신과의 소통을 방해하는 5가지 T.A.B.L.E
김동완 지음 / 레드베어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소통의 중요함이 부쩍 강조되는 요즘입니다. 특히 회사와 같은 2차 집단, 이익 사회 안에서는 설령 개개인의 역량이 강하더라도, 혹은 보유한 자원의 질이 우수하더라도, 이를 운용하거나 이에 참여하는 직원들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면, 1+1=2의 효과조차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逆) 시너지 효과라고나 할까요. 논자에 따라선 아예 "회의를 없애버려야 한다"고 극단적인 주장도 나오지만, 그런 경우라 해도 이를 대체할 의사 소통 수단, 아래에서 위로 안건을 상신할 루트는 마련이 되어야 합니다.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생산성 없이 진행되는 회의는 안 하느니만도 못하는 뜻 정도로 받아들여야겠죠.

이 책은 "소통의 기술 전문가"이자, 특히 현장에서는 "회사에서의 회의 혁신, 개선에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달인"으로 소문이 자자한 김동완 선생의, 강연자, 모티베이터, 컨설턴트로서 그간 왕성한 활동의 결산이 담겼다 할 내용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분의 강연을 들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짧지도 길지도 않은 한 권의 분량 안에 과연 달인의 명성에 걸맞은 소중한 지혜가 담겼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조직 생활을 안 해 본 독자라면 "그저 좋은 말씀이군." 정도로 감흥이 없을 수 있지만, 같은 주장이라도 어떤 어휘를 쓰는지, 한 챕터 안에서 어떤 주장과 충고들이 한데 엮여 들어가는지에 따라 독자가 받는 느낌과 감화의 정도가 다르죠. 통하는 사람들끼리는 한 마디의 짧은 코드도 만 가지 의미로 와 닿는 거니까요.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여기서 주인이 그간 장사를 벌이는 방식을 보고 제2의 창의적인 개척로를 깨달은 하인이, 그간 모아 둔 밑천으로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인데, 제 생각에는 주인은 그 역시 윗대에서 보고 배운 방식만 고스란히 되풀이한 경영자 타입 같습니다. 일단 한 번 시련이 있었으니 그 상처로 재기가 어려웠겠고, 다음으로 사업의 기반이 허물어지니 다시 일으켜세울 지혜는 부족했던 거죠. 반면 하인은 하나를 보면 둘까지 헤아리는 "지혜"가 뛰어났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거대담론 하나로 디테일을 무시하는 나쁜 버릇을 들이면서 "지식이 아닌 지혜"라며 터무니없는 합리화를 일삼는 경우를 보는데, 그건 지식도 지혜도 아닌 가장 저차원의 고집, 착각에 불과하죠. 부족한 사람일수록 어디서도 안 통하는 자기만의 "소신"에 미련스레 매달릴 뿐입니다. 록펠러의 말로 인용된 건, "상황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적응이 가능한 유연성"을 강조한 의도라고 생각합니다.

김동완 선생님이 제주도 분이라 들려줄 수 있는(혹은 원용할 수 있는) 이야기가 책에는 많은데요. 그중 본인의 경험담으로 "수업 시간에만큼은 사투리를 쓰지 말고 표준어 사용"을 강조하신 어느 선생님을 회고하시는데, 이런 순간이 자신에게는 뭔가 새로운 시작점으로까지 여겨진다시는군요. 아마도 저런 선생님들의 노력이 모이고 모여, 제주도에는 오늘날처럼 확고한 "이중언어 구사 현상"이 자리잡은 것 같습니다. "이중언어"는 중동이라든지, 북유럽이라든지, 두루 통할 수 있는 "링구아 프랑카"와 "다이얼렉트"를 동시에 언중이 구사하는 걸 가리킵니다. 사소해 보이는 게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 조직도 사소한 부정적 분위기와 비능률적 요소, 오해와 곡해, 적의의 분위기가 모여 삽시간에 기둥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소해 보였던 우의와 이해가 모이고 모여, 전체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그 회사만의 강점을 키우는 계기로 발전하기도 하죠.

우리가 오랜 동안 타성에 젖어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쓰는 말도 많습니다. 습관적으로 "재청 있습니까?"라고 사회자가 묻곤 하는데, 이 말은 본디 이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적 발언인데도 그저 좌중의 동의를 구하는 여음구처럼 오해되죠. 문제는, "재청 있냐"고 물으면 정말 재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두 군데에서는 나와 줘야 그게 건강하고 정상적인 조직이라는 거죠. 예의상, 분위기상, 어떤 대세가 형성되면 그저 묻어가려고만 들게 아니라, 때로는 튀더라도 건전한 상식에 부합하는 지적이 나오고, 그를 용인하는 합리적 조직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회의 전문가의 책 답게 과연 이런 명언도 실려 있는데요. "인생은, 삶은, 매 순간이 회의와 같다." 조직에서 회의를 잘하고, 자신의 업무를 잘 처리하며, 타 직원들과 원활한 소통을 이루는 이는, 먼저 혼자 있는 시간에 "자기 자신과의 회의"를 능숙하게 해낸다는 지적입니다. 이때 유념해야 할 점은, 절대 감정과 충동에 따르지 말고, 잘 판단이 안 서거든 혹시 지금이 비이성적 흐름에 맡겨져 있는 상태나 아닐지 스스로를 항상 점검해야 핝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회사의 미팅에서도 분위기를 잘 조절하고,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전체의 흐름을 건설적으로 리딩하는 건 당연하죠.

달인은 사소한 순간에서도 배움과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창립 기념식에서 여흥을 돋우고자 윷놀이 대회가 열렸는데, 어떤 분은 "저는 지금까지 이런 데서 이겨 본 적이 없어요."라며 겸연쩍어하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소장님은 "바로 그런, 아주 사소해 보이는 마인드셋이, 확률상으로도 벌어지기 힘든 연패를 가져왔다"며 부정적 태도의 해악을 지적하시네요. 게임은 아무리 플레이어의 수완이 좋거나 나빠도, 어느 정도는 운에 좌우되는데 한 사람이 그렇게나 매번 질 수는 없죠. 내가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전망과 실적은 큰 폭으로 변화하고 비우호적인 국면도 유리하게 전환될 수 있겠습니다.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도 조직에 그 효과가 전달되지 않는 건 사내 정치가 지나치게 과열되어 도통 화합과 팀웍이 안 이루어질 때입니다. 서양은 어차피 개인주의 패턴이라 조직 안에서 이합집산이 활성화되지 않는데(없다고는 말 못해도), 한국은 한번 회사 내 팩션(派黨)들이 형성되면 그 악폐와 부작용이 회사 전체를 병들게까지 합니다. 오너들이 때로 너무 제왕적으로 군림하는 것도, 어차피 민주적 리더십이 안 통하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래서 김 소장님은 "건전하게 경쟁하라"는 주문을 합니다. 이는 주로 관리자들이 판국을 위에서 잘 내다보고 뭔가 과열이다 싶을 때 알아서 커팅하는 센스가 중요합니다. 개개인 차원에선 부처님 급이 아닌 이상 절제가 힘들고요.

"너무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몰려들지 않는다." 김영란법 시행 관련해서 앞으로 우리 사회에 이 원칙이 어떻게 수정, 변형되어 통할지도 귀추가 주목됩니다. 소장님은 이 말씀을, 1) 너무 완벽주의로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고, 2) 조직 안에선 강점과 실적에 대한 자부심을 적정 수준에서만 드러내라 처럼 해석하시네요. 1)은 요즘 이런 타입들이 너무 늘어나서 기업 차원에서도 인적 자원의 손실 요소로 우려될 정도고, 2)는 한국 조직 문화의 특성상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어느 정도는 운명적인 처세 원칙의 일환으로 여겨집니다. 1)과 2)는 따지고 보면 개인 퍼스낼리티에서 둘이 아닌 하나로 연결되는데, 결국 1)이 잘 해결된 사람은 대외적으로 2)가 자연스럽게 표출되기도 하더군요. 내면에 여유를 마련한 사람이 처신도 능숙한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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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블 인 헤븐
가와이 간지 지음, 이규원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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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떤 책을 읽을 때 보통 그 붙은 제목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습니다. 어떤 주제가 책 한 권으로 낱낱이 해명되기를 바라는 건, 단돈 3만원으로 세상의 지혜를 수 분 안에 패스트푸드처럼 손에 넣기를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무모하고 탐욕스럽습니다. 아니면 동전 몇 푼을 집어넣고 레버 한 번 당긴 후 수백만 달러가 나오길 진지하게 갈망하는 도박꾼만큼 어리석다고나 할까요. 헌데 이 책은 정말, "제목값을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트럼프 카드 한 장 뒤에 그려진 "죽음의 천사"가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닌다고는, 장르물 폭식이란 나쁜 습관을 들인 독자로서 순진하게 믿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모티프로 미스테리를 끌어 나갈 계획일까?(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반 쯤에 크리스채니티 관련 각종 상징과 암유가 등장할 때도 "작가가 연구 많이 했군. 하지만 장식이겠지" 정도로 넘겼는데요. 소설 끝까지 읽고 이 작가님이 "앞에서 벌인 모든 떡밥을 성실히 회수하고, 깐깐하게 해명하며, 심오한 주제까지 장엄히 펼치기까지 하고" 마무리하는 데 감탄했습니다. 결말이 멋지기도 했지만, 이런 묵묵한 작가적 화룡점정에 더 박수를 보내느라 그 멋진 맛을 음미할 차례를 잠시 잊었네요.

일본의 사회파 작가들은 보통 화려한 도시 그 이면의 추악하고 찜찜한 사정을 철저히 연구한 후 작품을 펴냅니다. 너무 준비가 철저해서 업계로부터 항의까지 받는다는 뒷말이 있을 정도죠. 이 작품은 2023년이라는 근미래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습니다만, 마치 현재 진행형의 비위를 고발이라도 하듯 실감이 나며, 그 상상은 바로 지금의 모순과 직접 꼬리를 닿아 있기에 독자로서 경각심까지 생깁니다. 2023년이란 연도는 1) 작가의 창작 시점으로부터 10년 뒤, 2) 두번째로 도쿄에서 열리는 올림픽 그 후의 시점 이란 의미를 가지겠는데, 그나마 저 중요한 건 2)의 뜻입니다. 인구 구조는 점점 노령화하고, 성장의 한계에는 진즉에 부딪혔는데,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노인들을 국가로서 어떻게 대하고 다뤄야 할까. 여기에 대한 답은 여럿이 가능하겠으나, 이 소설에선 가장 무서운 것을 내놓고, 냉혹하게 집행하는 시나리오입니다. 극중 캐릭터인 보험 조사원 하마나의 말을 잠시 빌리죠. "당신은 국가가 정말, 시민의 생명을 중히 여긴다고 믿습니까?"

소설은 불법 영업 카지노에서 바카라 게임에 몰두하는 어느 조폭 두목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일진이 좋지 않았던 그는, 불가능한 확률 상황에서 계속 따기만 하는 푸른 눈의 젊은이에게 대신 화풀이를 하려 드는군요. 이 장면에서 젊은이의 용모에 대한 묘사가 자세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게 일종의 복선이더군요. 젊은이는 무슨 비결이 있는지 결국 "밑장빼기"까지 시도한 딜러와 웨이터, 조폭 두목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더 쎈 수"로 승부를 걸어 완승을 거둡니다. 하지만 이런 재주로 판을 쓸어 담는 돌출분자에게 세상이 공평할 리 없고 하물며 거기가 도박판이라면 말할 것도 없죠. 독자들의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이 젊은이 - 마슈라는 이름 -은 생사의 기로에 놓입니다.

저런 마슈와는 처지가 사뭇 다를 법한, 어느 축복받은 인생이 따로 있습니다. 유복한 부모님 슬하에서 나고 자라 미국에 머무는 이 젊은이는, 느닷 양친의 사망이란 비보를 접하고 귀국을 서두릅니다. 프롤로그는 여기서 호흡을 끊는데, 이 인물은 2부부터 다시 같은 신원이라며 등장해서, 세월이 십여 년 지난 현재 사법시험 합격, 변호사 개업, 중의원 당선 이란 출세 코스를 다 밟아 촉망받는 정치인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살짝 서술 트릭이 개입했는데, 하우스의 직원이 "원체 총명한 두뇌를 타고 나셨으니,..." 운운하는 대목이 그것이죠. 이게 false compliment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전부터, 왜 일본에서는 소비자 금융(좋게 말해서)이 저렇게나 발달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일본은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전세계로부터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도 같았죠. 이러던 게 성장 동력을 잃고는 만만한 자국의 서민들한테 체계적으로 푼돈을 모아들이는 쪽으로 영 건전성이 떨어지고 만 게 그들의 거시 경제입니다. 이 소설은 이런 일본의 시스템적 문제에 대해, "국가가 아예 야쿠자로 변했다."며 지독한 비판을 날립니다. 이런 착취와 경제 질서 왜곡은 누구의 음모로 벌어지는 걸까요? 답은 소설 중반쯤에 이미 나옵니다. "부도덕한 체계 속에서는 집합자아(group ego)라는 게 절로 형성되어, 악마 같은 개인이 배후조종하지 않아도 특정 목적을 향해 일사불란 작동되게 마련이다." 이 결론은 물론 작품의 대단원에도 한 번 더 강조되며, 작가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곱씹게 합니다. 과연 범인은 OOO이었을까요? 물론 소설은 명시적으로 그를 지목하며 심판까지 받게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 모든 게 거대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OOO는 특히 후반부에서 내내 강조되듯,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그 많은 희생자를 낳은 건 사악한 체제 자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거죠.

소설은 이런 담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세상 곤란을 모두 잊고 라스베거스의 VIP 숙소에서 호사를 누리던 귀공자의 부모를 죽인 자는 누구였을까요? 누구도 못 말릴 정의감과 한 여인을 지키려는 의무감에 불타던 진자이 형사는 그 사건 이후 어떻게 된 걸까요?(약간 이 대목에서 납득이 안 되던 게, 무장한 폭력배들을 단신으로 모두 살해한 "cop hero"에게 책임을 오히려 물을 공권력이나 여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작가께서 설정상 좀 오버하신 듯) 참으로 고지식하게 형사로서 본분을 지키려는 스와 형사는, 이 불리한 형세를 어떻게 헤치고 거대한 악과 맞설까요? 플롯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성실히 답하며 짜릿한 반전까지 예비합니다. 만약 결말이 내내 마음에 안 차는 독자가 있다면, 이 글 바로 위 문단 마지막 문장처럼, 범인을 그저 "체제"라고 새기면 됩니다. 하마나, 기자키 계장이 갑자기 미스테리 해결 과정을 확 진척시키는 약간의 구성 불균형만 빼고는, 저 개인적으론 간만에 최고의 스릴러를 읽었다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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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용도 (양장)
니콜라 부비에 지음, 티에리 베르네 그림, 이재형 옮김 / 소동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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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가 속한 곳(where he/she belongs)에서만 최우선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그가 성장하며 사귄 친구, 그의 평판을 보증해 줄 지인들, 그가 이뤄 온 업적들(크든 작든),... 그의 존재는 그의 본향에서야 제 색깔을 지니고, 그의 말은 그의 동아리 안에서 제 의미를 드러내죠. 이런 익숙한 환경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을 보다 편안히, 그리고 유창하게(fluently) 규정하지만(define), 정작 당사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면에서 빠져 나오려 가끔 몸부림치는 다른 감정의 덩어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고, 때로는 불안 속에 스스로를 묻습니다. 이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게 바로 여행입니다.

여행 속에서 발견하는 게 참다운, 그간 억눌려 왔던 자아일 수도 있고, 과거 어느 순간 극복되었던 퇴행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수치로야 한 길도 안 되는 연약한 인간, 그 육신과 동반하는 마음의 복잡한 구조와 규모란 우주의 그것과도 맞먹고, 이 때문에 이를 다스리는(다스리려 하는) 주인의 심사란, 반란이 심한 속주를 다스리는 총독의 고뇌로 가득합니다. 정말 피치자를 제압하려 드는 관리이건, 부모의 마음으로 상처를 돌보려는 구호자이건, 제 목적을 달성하려면 현지를 방문 그 정확한 실상을 살펴야 합니다. 여행은 그런 의미에서, 타지에 임할 때 바로 드러나는 타자 같은 자아와의 맞대면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과감히 자신들에 부여한(니콜라 부비에 본인의 말. 책에서 인용합니다), 두 젊은이들의 여행록입니다. 지금은 벌써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 그들에게 독자로서, 소박하게, 하나 부러웠던 건, (이런 놀라운 책, 혹은 당대 평자들의 표현처럼 "경이의 책", "지혜의 책"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차치하고라도) 제네바에서 카불까지 피아트를 몰고 기나긴 횡단을, 비교적 자유롭게 이룰 수 있었다는 그 사실이었는데요. 냉전이 한창이었을 당시에 오히려 가능했던 여행 방식이고, 지금은 이 코스 곳곳에서 정정이 불안한 나라들의 불쾌하고 당혹스러운 말썽, 나아가 참극들이 거의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이런 장도(長途)의 여정이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할 형편이라서죠. 만약 이런 계획을 누가 세우고 실천했다간, 부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뜻에서 당사자의 "육신"이 파괴되기 십상입니다. 껍질을 깨고 더 성숙한 영혼으로 거듭남이야 바람직하겠지만...

아마 당시 티토가 다스리고, 인종청소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지옥도를 지상에 펼쳐 보이기 훨씬 이전이었겠지만, 유고슬라비아(지금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등 여러 후신들로 쪼개진)를 통과하며 이처럼 낙천적이고 활발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그들. 물론 본인들의 표현대로, 이미 경화되고 박제화하여 마음이 그 안에서 질식할 듯한 껍질을 깨는 중이라 준(準)전시상황의 내면이긴 했겠지만 말이죠. "헝가리 국경에서 마케도니아까지" 모든(全) 전(前) 유고인들이 한데 모여 다시 "콜로"를 출 수 있고, "빵가루를 입힌 갈비, 백포도주, 고기 만두"를 먹을 그 날은 언제 다시 올까요. 헤세를 직접 접대하기도 했던 부비에 씨의 모친의 (그 악명 높은) 요리솜씨가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여튼 자리는 흥겹고 신나며, 뭔가 근원의 안식과 여흥이 자리할 듯합니다.

이 책에도 잘 나오듯 앙카라는 아나톨리아 한복판에 위치한, 신생 공화국(신생이라니! 그러나 이 말이 차라리 과분할 만큼 어려웠을 시절)의 수도로 새로 데뷔한, 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목가적이라는 말의 뜻이 뭔지 새로 가르쳐 줄 만한" 풍경을 그 옆에 낀, "아르카디아를 연상케도 하는" 고장이었습니다(지금이야 뭐..). 히타이트 유적이 지근거리에서 화제에 오를 만큼, 메소포타미아 제국(諸國)이나 비잔티움 황조가 오랜 동안 국고의 텃밭, 국세의 기반으로 삼은 땅임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하죠. 숭그를루를 지나치기 전 왜 바빌로니아(현 이라크 남부)가 화제에 오를까 궁금하다면, 본디 이 땅들(터키니 이라크니 하는)이 서로 그만큼이나 잇닿은 역사를 지녔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한 대접과 정직함, 친절함 등은 언제나 터키인들이 잃지 않는 좋은 매너라오." 흠, 그래서, 호의를 악의로 보답한, 이때로부터 이십 년 후의 앨런 파커 감독 같은 사람은 좀 크게 반성할 필요가 있겠네요.

"아제르바이잔 타브리즈"라는 표현을 들으니 위화감이 확 느껴집니다. 물론 이곳은 지금도 (높은 자치권이 보장되며, 소수 인종으로서 여전히 큰 발언권이 보장되는) 동 아제르바이잔 주에 속해 있지만, 지난 역사의 대부분은 페르시아 제국의 여러 수도 중 하나로 기능해 왔죠. 테헤란보다 더 유서깊을 이곳은 그만큼이나 "페르시아적 정체성"도 공유한 곳이니. 저자 두 분은 이곳, 아르메니스탄(이렇게 부르니 정말 낯서네요), 신생 쿠르디스탄(당시 기준. 책에도 나오지만 잠시 부각되었다가 팔레비 왕조에 의해 소멸)을 쌍둥이 같은 처지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둘은 처한 상황이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도 다릅니다. 책에도 나오듯 마치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니콜라 부비에는 이란(그때도 이름은 이란이었습니다)에서 돈이 떨어지자 베르네와 함께 "알바"를 시작하는데, 현지의 약사 세파보드히가 문법적으로 틀린 프랑스어를 말하자 고쳐 주는 대목이 재미있네요. "à dans le 라고 하지 마세요. 도시인 타브리즈 앞에는 그냥 à만 쓰는 거에요. 국가 앞에는 en를 쓰고 말이죠." 그나저나, 왜 그는 이곳에서 사는 게 힘들다고 했을까요? 프랑스도 당시라면 형편이 팍팍하긴 거의 마찬가지였을 텐데(미처 몰랐던 듯).

이들은 이곳 북서부 이란(현대 기준)에 꽤 오래 머무릅니다. 마하바드 교도소에 머문 건 무슨 터키의 빌리, 지미, 맥스처럼 누명을 쓰고 "수감"이 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잠재적 말썽거리를 통제하려 든 교도소장의 "사실상 연금" 시도지요. 교도소를 찾아와 "계약 이행의 문제(헉)"를 놓고 불평을 토로하는,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창녀에게서 이 청년들은 "생의 활기와 맹목적 도약"을 감지하고, 꼭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실행에 옮기지는 않음). 그녀를 다루는 소장의 태도를 보면 이 시절 이란의 행정이 더 문명화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 같으면 어딜 감히! 기둥에 묶여서 채찍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죠.

이스파한, 테헤란 등은 모두 지난 시절 제국의 수도들이었습니다(하계, 동계에 따라 수도 여럿을 둠). 이곳에서 여러 지인들(이미 그전부터 연락을 하던 이들인 것 같네요)과 교감한 후, 두 청년은 광야나 험준한 산지로 드디어 문명을 떠나 발길을 돌립니다. 이란 중동부에 보면 사람이 거의 안 사는, 산악과 사막이 죽 펼쳐진 광활한 지대가 있는데, 거기 한복판이 야즈드 사막입니다. 시라즈를 지나 이란 동단의 케르만 주에 도착하고, 이때에도 여전히 차도르를 쓴(세속주의 통치자였던 수상 모사데크 치하였지만) 여인들이 구수한 죽을 끓여 객들을 대접합니다. "묘석보다 더 큰(이런 표현들이 재미있어요)" 기록부에 서명하고 국경의 세관(복무하는 군인들은 차림이 단정치 못했다는데, 국가 기강의 해이를 반영하는 묘사일 수 있죠)을 통과한 후, 그들은 드디어 광활한 옛 제국의 영토를 벗어납니다.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가 시작된다는 반가운 표지판이 눈에 띄지만(그들은 계속 피아트를 타고 여행 중이죠), 이곳 아프가니스탄 역시 사정이 호의적일 리 없습니다(당시에도). 이란 남동부, 인도 북서부,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는 소수 인종으로 발루치 족이 사는데(아주 넓은 자치구를 이룸), 이 이름에는 "불운"이란 뜻이 있다는군요(저는 이 책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일부러 이름을 그렇게 붙여야 불운이 알아서 피해간다는 기대인데, 우리도 아이들 이름을 험하고 천하게 붙여 유년의 질병 등 우환을 쫓으려는 민간 풍습이 있었죠.

"한 청년이 강을 건너가네
얼굴은 한 송이 꽃 같고
엉덩이는 복숭아 같아
하지만 이럴수가, 난 수영을 못한다네."

울림이 알쏭달쏭한 이 지역 민요지만, 아마도 이 책 화자인 두 분과 테렌스는 심심상인으로 뜻이 통했나 보죠? 여기는 아프간이다 보니 본토인이라 할 그 유명한 유목 민족 파슈툰인이 다수입니다(책에서 "파탄 인"이라 표현하는). 지금하고는 상전벽해라 할 만큼 풍습과 풍광이 차이나는데, 한때 영국 세력권(제정 러시아와 다퉜죠)에 있었던 이곳이니만치 심지어 (갓 즉위했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초상화가 발견되는가 하면, "기니로 주시오, 기니로!" 란 말에서 드러나듯 여전히 화폐로서 영국 금화가 통용되네요. 그도 그럴 것이, 영국령 인도에서 철수한 옛 식민지 거주자들을 자히르 샤가 여러 면에서 편의를 봐 줬기 때문이죠. 이로부터 몇 년 후면 민중 혁명으로 축출되지만.

"신비주의자(아마도 수피를 가리키는 것 같네요)도 이 세계의 비밀을 여전히 모르는데
도대체 술집 주인이 어떻게 그걸 그렇게
잘 가르쳐 줄 수 있는지 궁금하네...."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하페즈가 남긴 한 구절인데, 이 사람은 부비에, 베르네 두 청년이 몇 달 전 지나쳐 온 시라즈 태생입니다.

바부르 황제가 언제 카불을 다스린 적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는 델리를 식민지로밖에 여기지 않았고, 그의 후손들은 그래서 끊임 없이 "본향에 돌아가 칸으로 군림하길" 바랐던 거죠. "사람이 사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매혹적이고 융성한(지금은 그러나?) 이곳 카불에서, 박트리아 왕국의 마지막 왕 헤르마이오스는 "앞면에 인도 글자, 뒷면에 중국 글자"가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게 했다고 부비에는 서술합니다. 엄연히 아프간인들 자신의 역사인데도 이를 까맣게 잊어버린 무슬림들이 안타깝다고 하는데, 사실 여기도 그간 인종적 부족적으로 많은 사건들이 교차한지라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죠.

힌두쿠시의 험준함, 반짝이는 잎새의 버드나무가 울창한 카이바르 고개의 녹음을 지나 그들은 인도의 문턱에 도착합니다. 모든 지점은 다른 두 영역의 접촉, 인연의 산물이며, "지속성, 세계의 투명한 명증성, 평온한 귀속"(p660)의 증명입니다. "탄젠트는 구상할 수도 없고 중명할 수도 없는 접촉이다"란 플로티노스의 말을 부비에는 인용하는데, 지구 반의 반 바퀴를 돈 기나긴 여정도, 혹은 보리수 아래에서 우주의 원리를 직관한 석가모니도, 인간 내면의 굴곡 많은 모습을 책 몇 십 권의 분량으로 다 표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의는 어느 정도 궁극의 미지로 남아야 생산적인 각성을 우리 아둔한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 방위와 지향 그리고 인문의 다른 얼굴로서 동(東)은 아마도 이들 프랑스 청년들에게 영원한 과제의 단서로 남아 있었을 것 같네요. 그게 곧 "어떤 가르침을 위한 세상의 쓰임새"이기도 하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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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미래의 대이동
최윤식.최현식 지음 / 김영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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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말이 필요 없는 한국 미래학의 최강자 최윤식 박사님의 대담한 예측을 담은 새 책입니다. 그의 책은 언제나 최신 정보와 상황변화가 업데이트된 채 산출되는 예측을 담습니다만, 지금까지 출간된 모든 저서들에 뚜렷한 일관성이 있다는 점도 놀랍습니다. 보통 미래를 내다보는 책들은 이 두 가지 미덕이 서로 trade-off 관계를 이루는 게 보통이어서 더욱 그렇죠.



1부에서는 "판의 이동"을 테마로 삼습니다. 최 박사님이 전혀 고려할 수 없는 사정이었겠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지진안전지대라 여겨졌던 한반도에 실제로 강진이 발생하여 많은 이들이 불안에 떠는 일이 불과 며칠 전에 있었기에, 이 "비유"가 매우 피부에 와 닿기까지 합니다. 고체 상태에서도 "대류"가 가능함이 20세기 전반에 밝혀졌고, 오랜 세월 동안 충격이 누적되어 임계선을 넘으면, "판"들은 마침내 가장 약한 부위에서 지진, 화산 폭발 등의 재앙을 유발합니다. 최 박사님은 저런 비유를 써 가며(이런 대목이 여기뿐 아니라 곳곳에서 좀 길다는 게 독자로선 조금 불만이긴 합니다만, 저자의 박식함과 인문- 자연 현상의 통섭적 파악을 도모하시는 그 방향성 쪽으로 좋게 이해하기로 하죠), 지구촌에서 그간 아슬아슬 균형을 유지했던 모든 정치, 경제, 문화, 산업적 요인들이 드디어 누적된 모순의 폭발을 맞이하리라 예측합니다. 세상이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할 때 흔히 "판이 바뀐다"는 말을 쓰곤 하는데, 저자는 판구조론의 지구과학적 설명과 21세기 초반 문명의 대격변을 교묘히 연결시켜 독자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셈이네요.



미- 중의 충돌을 설명하시면서 남중국해 논란은 큰 언급을 안 하시는데요, 여튼 최 박사님은 이걸 말단적 동요 정도로 봐 넘기신 것 같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가 미국 시스템의 실패를 만천하에 노정하면서 중-러가 대대적인 패권 도전에 나섰고, 저자께서는 전작들에서 이 점을 크게 짚은 바 있습니다. 미국 역시 그런 양국의 속셈을 잘 알기에, 특히 중국이 "더 크기" 전에 확실히 승부를 걸 마음임을 다시 지적하십니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 미래에 대해서도 그리 밝은 전망을 내세우지는 않으시는데, 특히 내부 모순 중 빈부 격차, 도농 간 간극의 확대 등을 거론합니다. 지니 계수가 태평 천국 운동 시절의 그것을 능가하며, 이른바 루이스 전환점의 이슈를 꺼내면서 낙후된 농촌이 마냥 현실을 감내하지 않을 것이라 예측합니다. 다만 중국이 아니라 아시아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엄청난 인구와 장차 서유럽- 북미를 압도할 경제력 성장 추세로 보아 더 이상 미국의 세계 패권이 이어지기도 어렵다는 쪽입니다. 하나 유념할 건 아시아를 어느 범위까지 단일 주체로 파악할 것인가인데, 책 조금 뒤에서도 언급되지만 인도와 중국 사이의 잠재된 분쟁 요소(수자원 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충돌 역시 08년 금융위기가 매우 뼈아프게 노출시킨, 쉽사리 부정하기 힘든 이 시대의 위기 국면입니다. 책에서도 언급되듯 예컨대 아일랜드 감자 기근 사태처럼 탐욕과 착취가 절제의 지혜를 압도해 버린 비극적 구간도 있었지만, 많은 시간 동안 자본주의는 자체 혁신의 미덕을 발휘할 줄도 알아서, 특히 냉전 기간 동안에는 두 이념의 사이 좋은 보조를 유지해 온 면도 있었죠. 그러나 푸틴의 냉소적인 평가처럼, "지난 수십 년 간 쌓아온 수익을 한순간에 모두 날린 월 가는 이제 더 이상 그 자부심을 유지할 수 없"으리라는 관점이 누구에게나 설득력을 얻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판이 근본적으로 바뀌어가는 중, 한국이 맞게 될 현실은 어떤 모습일까?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도 있지만, 최 박사님은 언제나 변화의 홍수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자는 낙관주의의 기조지요. 다만 한국에게는 여전히 희망적인 변수보다, 크나큰 시련을 부를 조짐이 더 크게 보인다는 쪽입니다. 특히 2부 첫 장의 제목을 "기회의 이동 중(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계속된다"고 잡으실 만큼이네요. 미국의 금리 인상을 촉발점으로 삼아, 이른바 "다섯 개의 폭탄"이 연이어 터질 가능성이 매우 크며, 이 경우 한국경제는 끝을 모를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사실 표현만 다를 뿐 가계 부채라는 시한 폭탄을 두고 조만간 정부(현 정부 말기 혹은 차기 정부 초기) 머리 위에 날벼락이 떨어질지는 전문가들마다 의견이 거의 일치해 왔습니다. 어떤 이는 부동산에 방점을 두고(이쪽이 수적으로 더 우세), 어떤 이는 주식 섹터를 더 강조하는 정도의 차이죠. 최 박사님의 진단은 그러나 "예측을 통해 리스크 요인을 줄이고, 결과적으로 대위기의 파장을 최소화하자"는 취지입니다. 합리적 기대이론의 한 결론 중에서도 충분히 증명되었듯, 치밀한 예측과 그에 따른 대응은 언제나 파국을 피해가는 집단지혜를 안출합니다. 최 박사님의 위기 진단은 이런 가계 섹터(다른 전문가들도 하는 이야기니까)보다 기업 쪽을 향해 한 말씀 하시는 게 큰 울림을 빚는데요. 이 2부보다는 뒤쪽으로 가야 좀 "쎈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이 책의 표지를 보시면 영어로 "Exodus of Opportunity"란 글자가 나옵니다. 기회의 엑소더스! 한때 한 자리에 머물러 있던 기회가, 이제 그곳으로부터 빠져 나와 다른 "준비된" 플레이어들에게로 방향을 틀었다는 거죠. 박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기회는 "산처럼" 많다는 겁니다. 하긴 불확실성의 증대가 기득권을 위협하고, 기민하게 사태를 관측한 이들에게 큰 이익을 안기는 패턴은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나 발생해 왔죠. 박사님은 앞서 "우리에게 특히 위태로운 변수, 상수"가 도사림을 지적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 역시 총체적으로 "기회의 산"을 구성한다고 말합니다. 최근 쏟아져나오는 "4차 산업혁명", "증강 현실" 등의 키워드를 단 여러 서적에서 거론하는 갖가지 첨단 산업의 부상을 최 박사님도 하나하나 짚으시는데, 그 중 저자께서 특히 주목하는 부문은 자율주행, 대체에너지 개발을 앞세운 자동차 산업인듯 보입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역시 최박사님 다운 대담함, 거침없음이 돋보인 대목이 "테슬라를 과연 현대차(아님 삼성이나 LG라도)가 샀어야 했는가?"에 대한 똑부러지는 해답이었습니다(많은 이들은 아마 이런 질문, 이슈, 아젠다가 있었는지를 모를 겁니다). 실제로 엘론 머스크가 아직 입지가 단단하지 않을 때 간을 보러 한국에도 왔었고, 최 박사님 생각은 "그때 그가 분명히 팔 생각이 있었으며"(이렇게 잘라 말하시는 그 확신이 진정 놀랍네요), 앞으로도 그는 점점 베팅액을 높일지언정 구매자를 물색하고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이는 "머스크는 그렇게 비전 좋은 회사를 왜 키우지 않고 팔려 드는가? 팔 의향이 없든가, 아니면 자신의 평소 주장과는 달리(책도 많이 썼죠) 미래자동차에 대한 구체적 전략이 부족한 것 아닌가?"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만, 어떤 영리하고 합리적인 행위자도, 항상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상황 봐 가며 가능성을 열어 두는 법이죠.



독자로서 최박사님의 진단과 예측에 다 동의하는 건 아니며, 예컨대 "가상국가vs 현실국가" 같은 프레이밍은 그 설명력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 장벽이 2030년까지 해소되며, 그 즈음에 뇌 구조가 다 해독되리라는 전망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는 기술적 난관이 한둘이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제퍼디 쇼"에서 인공지능이 인간 챔피언을 이긴 사건도 벌써 5년이나 지난 토픽이며, 그이후로 의미있는 진전이라면 몇 달 전 알파고의 대국이겠는데 이 역시 그 효과를 더 신중히 지켜 볼 필요가 있죠. 하지만 최 박사님의 책에서 가장 생산적으로 취할 수 있는 교훈 중 하나는, 이런 격변하는 추세 속에서 개인들이 어떤 전략으로 미래를 맞을지에 대한 자상하고 성의 있는 충고입니다. 학자들의 모든 예측이 다 실현되는 건 아니며, 일부는 정반대의 결과에 직면하기도 하죠. 그러나 미래의 유력한 예측들과 전망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 방향으로 대비를 한 사람과, 마냥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선택 사이에는 큰 격차가 존재합니다.  판이 송두리째 바뀌고 기존의 가치가 무너져 내리는 지금, 역으로 엄청난 기회의 산이 우릴 향해 달려 오는 중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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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열풍의 진앙지 일본 가와치 河內 일본에 남은 문화강국 백제의 발자취 1
양기석.노중국 외 지음 / 주류성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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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관계 고대사 그 바른 내역에 대해서는 워낙 기록이 불충분하게 남겨진 까닭에 누구라도 논쟁의 고비에 확언 정설을 내놓기 어렵습니다. 다만 역사학자 모두가 열린 마음 공정한 자세로 겸손되이 진리를 탐구해 나가야 할 텐데요. 이런 학자적 양심을 기대하기에는, 근래 일본이 너무 막나가는 태도를 취하기에 뜻있는 이들의 우려가 매우 큽니다. 우리 겨레가 각별한 마음가짐으로 선조들의 노고와 유산을 재조명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그 빛나는 자취란 그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한류 열풍의 진앙지"라는 어구를 제목 일부에 쓰는데요. 완독한 후 이 표현이 책 내용을 정확히도 짚어내었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 말에서 "소녀시대나 카라의 활동상"이 혹시 오사카 일대에서 재조명되는 내용인가 잘못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고대사, 특히 일본이 아직 야만과 무지몽매의 늪에서 채 못 벗어날 시절 우리 조상들에게 문화적으로 진 빚의 깊이와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이었습니다. 한국의 연예인들이 열도에서 맹활약하는 모습도 물론 자랑스럽지만, 이 책을 통해 공부할 수 있는 고대사의 생생한 한 단면은 우리가 과연 이렇게 태만히, 덜 각성된 후손으로서 몰역사적 의식을 이어가도 되는 건지, 심각한 자기 반성을 촉구하더군요. 그저 "자랑스럽다"는 말로는 불충분한, 근본에서부터의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 여겨집니다.

일본 고대사는 구석기- 죠몬- 야요이 - 고훈 시대로 대개 구분됩니다. 이 책에서 특히 중요한 시대가 저 중 마지막 단계인 고훈[古墳]기(期)이겠는데요. 거대한 무덤의 출현은 곧 계급 사회의 도래를 선포하는 상징이나 다름 없기에, 이 시대를 향한 분석은 일본 열도의 사회 구조가 어떤 심대한 변화를 맞이했는지 중요한 암시를 어떤 방면에서도 던져 줍니다. 이렇게 일본에서 지배 - 피지배층이 본격 분화할 때, 문화적, 제도적, 의식적 면에서 적지 않은 공헌, 최소한 영향을 미친 이들이 바로 "도래인"들이었습니다.



"도래인"들이라는 용어에 대해, 최근에는 이 말이 "일본 중심"의 시각을 전제로 한다는 지적이 있어 "도왜인"으로 바꿔 쓴다는 설명이 책에도 나옵니다. "왜"는 특정 시기, 그저 지역과 민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을 뿐이니 어떤 비하의 의도는 없는 셈이죠. 이 책은 그래서 "텐노[天皇]"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고, 당시 이르던 대로 "왜왕"으로 일관합니다. 이것이 올바르며, 당해 호칭이 쓰이지 않았을 때에까지 모두 소급 적용하는 저쪽의 태도가 오히려 문제지요. 참고로 이 책은 "고훈[古墳]"에서처럼, 일본어 어휘의 보충 설명에서는 꺾은괄호를, 한국어 한자음 뒤의 병기에서는 일반 괄호를 씁니다. 행여 일본식 독음을 한국어의 그것과 같은 위상으로 둘 위험을 배제하려는 사려 깊은 표기법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은 이처럼 시대로는 고훈 기, 지역적으로는 오사카 일대, 그 중에서도 가와치를 중심으로, 우리 조상들의 활발했던 외교, 정치, 군사, 문화 업적상을 주목합니다. 지금까지 막연히 "조상"으로 칭해 왔습니다만, 구체적으로는 당연 삼국 중에서도 "백제인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교근공의 논리에 따라 백제는 고구려, 또 그의 속국 비슷한 위상의 신라(일단 4세기 기준)를 견제하기 위해 바다 건너 왜의 군사력을 특히 탐냈는데요. 왜 역시 고구려의 강력한 위협, 인접 신라와의 잦은 분쟁 때문에 일단 군사역학 상으로도 협력이 시급했습니다.



먼저 접촉과 교린을 시도한 건 백제였는데, 이 때문에 지금도 일본인들은 얼토당토않게도 이를 "문화 노예" 정도로 왜곡, 비하하며, 상국의 위치에서 공물을 거두었다는 등의 낭설, 억측을 일삼죠. 하지만 백제는 영리하게도 인구가 많고 물산이 비교적 풍족했던 왜의 1차 자원을 이용하려 들었던 것뿐이며, 왜의 무력이 보잘것없음이 드러난다거나, 고구려, 신라 등과 파트너 체인징을 시도할 국면에는 지체 없이 교류를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사정이 급한 건 대개는 왜 측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고훈 시대"로 접어들면서는 계급의 분화가 가속되었는데, 지배층으로서 하층민들을 향해 위신을 세우려면 세련된 문화의 향유를 과시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6세기부터는 열도에서도 불교 문화의 본격 도입이 이뤄졌는데, 왕실이 항구적으로 신민의 복속과 유연화를 이루려면 이런 고등 종교의 가르침을 통해 그 심리의 기층 저변을 통제할 필요가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백제 문화는 열도의 그것보다 외관, 성능, 미학적 가치, 심미적 만족 등 모든 면에서 우월했기에, 심지어는 숙어적 표현으로 "쿠다라나이" 같은 것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백제의 산물이 아니면 질이 낮아 시시하다"는 뜻이 담긴 이 표현은, 열도의 지배층이 백제로부터의 문화적 세례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왜왕은 살아서 백제 문화의 숭배자를 자처했고, 죽어서도 묘지를 그런 뜻에 맞게 조성한 후 묻히기를 바랄 정도였죠. 백제의 문화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그 사람은 남 위에 설 자격이 더 갖추어졌다고 통념이 생겼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또한 불교는 이 책에도 잘 나와 있듯, 그저 추상적인 신앙으로서 퍼진 게 아니라, 의식과 예배와 교리와 성직자가 혼연일체를 이루는 패턴이었죠. 이른바 삼보(三寶)는 불- 법 - 승을 가리키는데, 초기 백제는 이 불교 문화를 전해줄 때 승려의 파견은 누락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두고 이 책에서는 "이미 널리 불교를 수용하려 든 현지(왜)의 실정을 감안"했다고도 하시지만, 전체적으로는 백제의 전략적 고려도 작용한 바 있겠음을 우리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죠. 아무튼 지금도 일본 국민의 40% 가량이 불교 신도임을 감안할 때, 고대 백제가 일본에 다져 준 문화의 기틀이 얼마나 아득한 역사를 갖는지에 대해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 특히 백제인들이 왜에 끼친 영향은 이런 문화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인적인 교류가 직접 이뤄진 부분도 큽니다. 오사카, 특히 가와치 일대에 사는 현대의 일본인 상당수는, 그 조상을 실제로 한국계에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여러 이유, 정치적,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집단 이주를 일본에 도모했으며, 현재까지도 그 지명이 河內라 쓰고 가와치라 읽는 건 그 깊은 사연이 따로 있다는 거죠. 책은 특히 "고훈 시대", 말 그대로 거대한 무덤들(지배층의 위신을 드러내기 위한)이 하나같이 백제 양식을 모방하여 조성된 그 추세에 주목하면서, 이런 물적, 인적인 "한류 열풍"이 얼마나 뿌리 깊고 항구적으로 일본 문화(그렇게 부를 만한 게 있기나 했다면)에 영향을 주었는지 다각도로 분석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유적과 문화재, 언어적 흔적들이 한 방향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일본이 그 실상을 왜곡하며 막무가내로 우겨대던 건 심지어 고대사의 한 국면에서도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중국의 남북조 시대 송 황실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들 왜국의 수장을 백제, 모한(=마한), 신라 등의 지배자로까지 책봉해 달라며 억지를 썼다는 거죠. 이런 주장은 당대인들, 혹은 국제적으로 인정 받는 정치 단위 중 왜국인들 말고는 아무도 수긍하지 않는 망상이었습니다. 다만 한반도가 그들의 이런 방자한 태도에 적극 대응하지 않았던 건 그저 무시해 버릴 만한 망동이어서이기도 하겠으나,근본적으로는 삼국이 분열했던 정치적 취약성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겁니다. 조상들의 찬란한 위업을 돌아보며, 우리 후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얼마나 본분을 다하는 중인지, 진지한 역사의식의 각성과 분발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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