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역 사기열전 1 - 인물들의 흥망사 완역 사기 시리즈 (위즈덤하우스)
사마천 지음, 신동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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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는 동아시아 역사 서술의 가장 근원적인 모범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당대인들과 우리 후세 사람들에게 공히 큰 축복이자 기적과도 같은 저작입니다. 그 중에서도 <열전>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생생한 각축과 화려한 업적, 혹은 비루한 악행과 과오가 가감 없이 기술되어 있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처세와 수양에 큰 참고가 됩니다. 무엇보다 이 <사기 열전>은, 이후에 출현한 역사가들의 유교 편향적인 태도와 달리, 인물들의 행적 그 자체에 충실하면서도 문학적 묘사가 생생하여, 현대 독자들이 읽기에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는 게 장점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이 이 고전의 가장 빼어난 정수를 정확히 익히고 맛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하면서도 접근성 좋은 번역이 필수라고 하겠습니다.

신동준 선생님의 방대한 학식과 정곡을 찌르는 문필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던 이 <열전> 1권은, 이 더운 여름 독서를 즐기는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깨닫게 해 준 아주 소중한 읽을거리였습니다. 위대한 고전이 이처럼이나, 무협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독서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신기하게 느껴졌고요. 개인적으로 1) 故 홍석보 전 고려대 교수님의 <사기열전>(발췌역) 2) 정범진 전 성대 총장님 외 여러 역자의 <사기 열전(상)>(한국 최초의 완역본) 3) 김원중 교수님의 <사기 열전> 등을 모두 읽어 보았기에, 신동준 선생님의 이 책을 놓고 장단점을 대조하여 평가하는 재미까지 추가로 누릴 수 있었네요.

우선, 고전으로서의 <사기 열전>을 그저 얼개만 훑어 본다거나, 본격 탐독에 앞서 대강의 내용을 파악하려는 독자라면, 이 책 포함하여 위에 언급된 어떤 역본을 골라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다들 내용이 알차며, 중국이나 대만, 일본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질 바 없는 오랜 고전 연구 풍토를 갖고 있는 우리 나라의 학자들이 애쓴 솜씨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1) 문장의 박력은 홍석보 선생님의 역본을 개인적으로는 최고로 꼽고 싶고, 2) 엄정하고 균형 잡힌 서술의 미덕은 까치 역본이 나은 것 같으며, 3) 독자들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오고 고급 백상지를 써서 가독성을 높인 건 김원중 교수 역본이 낫지 싶습니다. 그러나, 위의 1), 2), 3) 등을 모두 읽은 후에도 학문적 갈증이 가시지 않는 독자라면, 이 신동준 선생의 번역본을 도저히 놓칠 수 없으리라 확언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2)나 3)을 메인으로 끝까지 삼고 싶은 분들이라 해도, 최소한 참고 자료로서 이 신동준 판을 간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겁니다. 그 이유는....

ㄱ. 한자로 된 원문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이는 비단 이 책뿐 아니라, <묵자>, <욱리자>, <한비자>, <춘추 좌전> 등 신동준 선생이 옮긴 모든 동양 고전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아무리 학식이 높아도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오류는 책에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마련이며, 또 권위자의 학설이라 해도 언제나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한문 원문이 있어야만 독자가 저자의 흐름에 노예처럼 끌려다니지 않고 주체적인 독서를 할 수 있습니다. 또 저자가 스스로의 논변에 자신이 있기에, 원문을 함께 실어 놓았으니 스스로 공부도 해 보고 혹 이견이 있으면 제기해 보라는 열린 자세,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ㄴ. 한자로 된 원문이 문장 부호, 따옴표 등과 함께 "비평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라틴어도 그렇고 한문 형식이라는 게 본래는 띄어쓰기조차 안 되어 있는 형식입니다. 어디와 어디를 서로 띄우고, 어디가 대화이며 서술인지 구별하는 건 이미 해석 작업의 일부인데, 대부분이 초심자들일 독자들로서는 날것 그대로의 원문에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책에 실린 한문 원문은, 한자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라면 거의 한글 번역문만큼이나 친숙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ㄷ. 이 책의 최고 강점은 역자께서, 현존하는 거의 모든 참고서와 연구서, 논문, 동양의 학자는 물론 서구의 연구자들이 남긴 두드러진 업적까지 거의 총망라하여 참고했다는 점입니다. 별다른 근거 제시 없이 "이 말은 이렇게 새겨야 한다"라고만 단언하고 넘어가는 책보다는, "이 말에 대해 A서에는 a라고, B서에서는 b라고, 그리고 C서에서는 c라는 주장을 펼치는데, 나(신동준 선생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정리하는 각주를 접할 수 있는 책이 더 친절하고 교육적입니다. 독자는 일단 납득이 될 뿐더러 혹 아니라 해도 제시된 다른 주장 중에 취사선택할 자유가 생기는 법입니다. 이 장점에 대해서는 다른 번역서가 도저히 이 책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ㄹ. 위의 모든 장점이 그닥 필요하지 않은 독자라 해도, 그냥 본문만 읽고 넘어가도 되게 짜여져 있습니다.

이하에선 다른 판본과 비교하여 구체적으로 몇 대목을 짚어 보겠습니다.

관안열전
열전은 한 사람만을 주제로 삼은 것이 있고, 이 권처럼 둘 이상의 주인공을 다룬 것이 있습니다. 신동준 선생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둘 이상의 인물이 나올 경우 부제로 "관중열전", "안자열전" 등을 붙여, 원문의 형식에 무관하게 논리적 완결성을 보완하는 쪽입니다. 반면 김원중 선생의 책은 역자 스스로 판단한 내용적 차별성(토픽의 전환)에 따라, 그 장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는 주제문으로 부제를 다는 식입니다. 예를 들어 이 "관안열전"은, 김 교수님은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군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에게 뜻을 드러낸다"라는 소제목을 각각 붙이고 있습니다. 반면 신동준 선생님은 건조하게 "관중열전/안자열전"으로 나눌 뿐입니다. 아마 전자가 자계서 같다며 싫은 분도 있을 테고, 그 반대로 친절해서 좋다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36페이지를 보시면 아래에 긴 역주가 있습니다. 원문이 有三歸 · 反坫(가운뎃점도 신동준 선생이 첨가한 겁니다)이라고 되어 있는데, 신동준 선생은 특히 이 "삼귀"의 뜻이 무엇인지를 두고 곽승도, 하안, 주희 등 근대와 고대를 망라하여 무려 다섯 개의 대립하는 학설을 제시합니다. 반면 다른 책은, 출전을 밝히지 않고 두 개의 입장을 후주에서 간략히 거론할 뿐입니다. 솔직히 이 대목을 본 후엔, 도저히 다른 책을 메인으로 유지할 수가 없더군요.

열전 중 하이라이트로 꼽힐 만한 편이 <소진, 장의 열전>이겠습니다. 여기서도 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종래 소진과 장의가 동시대인라든가, 소진이 장의를 사주하여 연횡책을 주장하게 했다든가 하는, 사마천의 기술과 관점을 그대로 정통으로 간주하는 관점이 지배적이었죠. 그러나 신동준 선생은 <전국책>의 보다 상세한 기사를 논거로 제시하며, "거의 한 세대를 앞서 산 인물인 장의가, 소진과 생전에 한 번 만나기나 했을지 의문"이라고 명쾌히 평론합니다. 물론 이는 아직 학문적으로 당부가 판가름난 사항은 아니지만, <사기>의 태도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고전의 다른 기술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유익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든 텍스트는 비판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본문은 본문대로 충실히 번역하고, 緖論에서 이를 메타적으로 개관할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하는 점이 너무 좋더군요(참고로 김원중 교수님 판은, 간략하게 한 문장으로 "반대되는 입장도 있으나 타당성이 미흡하다"고 적습니다).

똑같은 한문 원문을 각기 다른 권에서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도 관심사였습니다. 妄人이라는 단어가 이 상권에는 최소 두 번 나옵니다. 그 중 <상군열전>에서 진 효공이 상앙더러 내리는 평가가 있고, <위공자 열전>에서 평원군이 신릉군더러 비웃듯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신동준 선생은 일관되게 "망령된 자"라고 옮기지만, 김 교수님은 전자에서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으로, 후자에선 "망령된 사람"로 각각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옳고 그르다는 게 아니라, 두 분의 개성이 어떻게 다른지 대조할 수 있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에는 영공(靈公)이란 통치자가 있었는데요. 이 사기 열전에도 <중니제자열전>에 등장합니다. 읽으면서 많이 웃었는데, 한문 원문에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동준 선생님은 "처음엔 남색을 즐겼으나... "같은 설명을 구태여 넣고 있습니다. 실제로 위 영공은, 이 정사 <사기>에는 안 보이지만, <한비자> 같은 고전에 보면 미자하라는 소년을 총애했다는 기술이 나오고, 그 유명한 "여도의 죄(복숭아를 남긴 죄)"의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하필 총애하는 빈첩의 이름이 남자(南子. 이분은 물론 여자임)라서 더 희화적이기도 합니다. 이런 여유 넘치는 번역은 신동준 선생의 책이 아니면 도저히 만날 수가 없죠.

<중니제자열전> 중 "자유열전"을 보면, "무성의 읍재가 되었다"는 기술이 있습니다. 한자 원문을 보면 그저 宰라고만 나와 있고, 김 교수님 번역에는 "무성의 재가 되었다"고만 옮기는데, 이렇게만 봐서는 무슨 뜻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신 선생님 태도처럼 "읍재"라고 부가설명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자고열전"에도 "비읍의 읍재"라는 번역이 있습니다. 이 대목은 김 교수님 책에선 "비읍의 재상"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일개 읍의 행정책임자를 두고 "재상"이라고까지 표현하는 건 좀 과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관성 면에서도 신 선생님의 태도가 낫습니다.

<평원군 열전>에서 모수가 초나라 왕과 결판을 본 그 유명한 일화가 마무리되는 대목에서 "상사(相士)"라는 원문을 신동준 선생은 그대로 살려놓고 있습니다. 각주에서 선생은 그에 대해 "선비의 관상을 살피는 일"이라며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놓았는데, 신동준 선생님 책은 이처럼 한문의 다양한 문법, 활용 사항을 공부하는 맛에 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고로 김 교수님 책은 "인물을 평가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라고, 홍석보 선생님 책은 "다시는 인물을 감정하지 않겠다"고 각각 옮깁니다. 모수의 일화는 전국시대에 활약한 여러 인걸들의 일화 중에서도 가장 박진감 넘치는 것들 중 하나이므로 꼭 읽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저는 열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달변, 열변 중 상당수는 "과연 이 긴 대사를, 한 사람이 한 자리에서 마쳤을까?" 같은 의문이 들었는데, 이 모수의 사자후는 그럴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설득력이 있습니다.

신동준 선생님이 원문에 충실하지 않게 옮긴 것도 몇 보입니다. 가령 "견백동이"를 논한 공손룡이, 추연의 등장 후 설 땅을 잃었다는 대목에서, 원문대로 "지극한 도"라고 하지 않으시고 "대도(大道)"라고 옮긴 건 저로서는 납득이 잘 가지 않았습니다. "견백동이"에 대해서도 평소처럼 간단한 설명이 있을 만한데 역시 그냥 넘어가고 계십니다.

미자하의 스폰서인 "위 영공"의 경우, 신동준 선생님은 이 책 말고 다른 책에서도 "위령공"으로 자주 쓰십니다. 그러나 나라 이름과 군호를 혼동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참고로 신동준 선생님은 국명과 왕명도 안 띄우고 붙여 쓰시는 게 보통입니다. 이에는 선생님만의 원칙이 있으리라 짐작되므로 더 이상의 반론은 자제할까 합니다. 띄어 쓰는 게 맞다면 그에 따라 두음법칙도 적용시켜야 하는데, 이 책과 같은 시리즈 <사기 세가>에는 거의 일관되게 "위 영공"으로 나와 있습니다. 표 형식의 제약을 받는 <사기 표>는 말할 것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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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가족
전아리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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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는 세상에 신분, 등급의 차별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지귀 설화를 처음 아동용 만화로 접했을 때, 저는 상당히 짜증이 나더군요. 아니,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그저 "분수를 알아야지!"라는 한 마디 말로 억누르라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이성을 좋아하는 건, 자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도 큰 (타인들의 부수적인) 희생이 따르고, 결국 자신도 상처 받을 게 뻔하면서 부득부득 티를 내는 그 추한 모습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상대방인 여왕 입장은 생각도 안 한 셈이니 그게 어디 사랑이겠습니까, 더러운 정욕이지.

서민들은 보통 있는 사람 높은 사람 욕하는 재미로, 고달픈 생의 스트레스를 달랜다고도 합니다. 비록 돈은 없지만 오순도순 사는 맛이 있어, 체면 따지고 뭐 따지고 돌보고 살필 게 많은 상류층 부러울 게 없다고도 하죠. 이 소설은 어쩌면 그런 평범한 독자들에게, 저들을 당신네들의 기준과 범주 안으로 끌여들여 주겠다며, 조금은 끔찍하고 대체로는 통쾌하면서도 훈훈한 이야기로 어깨를 토닥여 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그게 사실이고 아니고를 일단 떠나). 많은 TV 드라마들도 아마 이런 기능을 수행하겠지요.

줄거리는 책 소개 같은 데 잘 나와 있을 테고, 제가 느낀 점 중심으로 간단하게 소설의 매력을 짚어 볼게요. 우선 진욱, 이 사람은 소설의 "도덕적" 주인공 같습니다. 처음에 서회장(용훈)이 이 자의 뒤를 캘 때, 너무도 평범한(악당치곤) 배경만 줄줄이 나와 독자들이 의아해할 만했죠. 결국 눈치빠른 독자들이 예상했던 대로 진상이 드러나고요. 물론, 혜윤(첫째딸)이 "그런 본능"을 타고났다는 것까지 거짓말이라거나 "계획"은 아니고, 실제로 여러 남자를 만나고 다닌 건 사실이더군요. 이제 이렇게 사랑하는 진욱이를 만났으니 그런 더러운 일탈은 꿈도 안 꾸길 바랍니다. 숨막힐 듯한 집안 분위기에 억압된 자아가 과잉보상심리 때문에 억지로 사고를 치고 다녔다는 설명(후천적 요인)이었으면, 보통은 이야기가 심각한 방향을 틀 뿐 아니라 길이도 엄청 길어졌겠죠? 그러나 이 소설은 아주 훈훈하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마무리일 뿐입니다.

제가 위에 지귀 설화를 뜬금없이 꺼낸 것도, "불"이라는 소재에서 연관고리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ㅎㅎ 제 생각에 지귀의 불이 엄청 추했다면, 이 진욱의 "불"은 (좀 얼척없는 비약이긴 하나) 뭐랄까, 일본식 은혜- 수치의 폭발적 언표 같은 느낌? 아무리 별 장점 없고 어리석다시피한 성실함으로 세상을 살아 온 인생이라고 하나, 일관된 도덕성 하나로 난마처럼 얽힌 그 복잡한 말썽을 한 큐에 정리하는, "근본에서 올바른 것"의 엄청난 위력을 상징하는 캐릭터 같았습니다. 뭐 이렇게 말도 안되는 초인적 선량함을 갖췄으니 혜윤이가 끌렸는지도 모르지만, 독자 입장에선 공감이 안 되었네요. 여기 나오는 사람들 중에 가장 그림이 안 그려졌습니다.

혜란은 어떤가. 이름난 신경외과의였다는 부친과 달리 외향적이고 사람들사이에서 짜릿한 게임을 즐기며 사업적 성공을 거두는 쪽에 타고난 적성인 용훈(혜윤, 혜란의 부친), 그런 기질을 잘 물려받았다는 설명인데, 중반쯤 그런 탁월한(냉혹하고 이기적이어도 탁월했다는 점만큼은 부인 못하죠) 계획을 짜 내었으니, 만약 이 안대로 일이 이뤄졌다면 아버지 사업은 그녀가 물려받아 마땅했을 겁니다. "아 왜 이럴 때만 가족들은 내 말을 들었던 거야?" 그녀의 잘못은 제가 보기에 없는 듯하고, 무슨 하늘의 섭리 같은 게 개입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해 보이는 진행이었어요. 이래서 어른들이 착한 사람됨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 아닌가. 확률로만 따지면 혜란의 계획은 (이 훌륭한 가문의) 골칫덩이 두 개를 일거에 쓸어버리기에 충분히 치밀했는데도요. 그래서 honesty is the best policy 라고도 하는 거겠습니다만.

저는 서회장(용훈)이 그 두 "해결사"를 다루는 방식이 아주 서툴렀다고 봅니다. 출판사 사장님이 고전을 안 읽으셨나 봅니다. 위나라 사람 오기는 장병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졸개의 고름을 빨기도 했는데, 이렇게나 일을 잘하는 아랫사람들에겐 더 과감한 제스처를 취했어야죠. 유미옥 여사도 옆에서 어설프게 거드는 품으로 보아 "진짜 계산"을 잘 못하는 분 같습니다. 결국 세상에 막장성만 폭로하고 서민(누구?)의 품에 안겨 훈훈한 감동을 선사하는 데 그친 결과만 봐도, 이분들은 진짜 상류층의 기질이 좀 부족했던 것 아닌가... (ㅎㅎ 농담입니다)

제가 가장 끌렸던 캐릭터는 진환이었는데요. 혜란이가 입으로야 "이게 안 되면 플랜B로 가자"며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그런 게 있기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이기적이고 말은 많고 못됐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예쁘지도 않고(본인도 털어놓았듯 화장빨) 혜란이를, 그 단점까지 사랑한 진환이야말로 둘이 잘 어울리는(출신 성분도 서로 비슷하고) 천생연분인 것 같네요. 혜란이도 잔머리 잘 굴리고, 진환이야말로 제 몸으로 플랜B를 집행한 거나 마찬가지인데다, 이게 계산의 결과라기보다(본인이 머리도 좋지만) 다 진심이 뒷받침되어서 가능했던 거니까요.

저는 결말이 해피엔딩이라서 좋았던 게 아니라, 경수 있죠. 그 경수란 캐릭터가 의외로 촘촘히 사연이 짜여진 채 끝나서 좋았습니다. 머리가 안 좋은데 어찌어찌해서 집안에서 뭐 하나 만들어 보려고 서포트해서 인재로 포장하는 예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막상 일선에 나서 보면 세상이 어디 누구 맘 편하게 롤 플레잉하도록 베이스 깔아주는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요. 어차피 낙하산이다 뭐다 이런 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한계가 다 드러납니다. 흙수저니 뭐니 불평만 할게 아니라 정말 본인이 목숨 걸고 있는 포텐 다 끌어올려서 일하면, 저런 경수 같은 애들은 경쟁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 필요가 있죠. 그렇다 쳐도, 이것저것 두루 갖춘 진환이 같은 애들 때문에 세상은 불공평한 게 드러나나요? 뭐, 그럴 수도, 아닐 수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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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 이완용에서 노덕술까지, 나라를 팔아먹고 독립운동가를 때려잡은 악질 매국노 44인 이야기
정운현 지음 / 인문서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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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리를 지어 사는 게 존재의 숙명인 까닭에, 자신이 그 정체성 상당 부분을 빚지고, 아울러 (사회화 과정에서) 영혼의 충성을 맹세한 집단을 등진 배신자에게는 가장 높은 수위의 비난과 단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특히, 한국처럼 나라 전체가 (거의)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단위에서는, 민족 반역자는 본인뿐 아니라 그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파문에 가까운 평판이 뒤따르는 게 당연합니다.

한편으로, 민족(곧 국가이기도 한)이 외세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그 정통에서 벗어난 강점기 동안 불의하게 이뤄진 통치의 잔재가 채 청산되지 않고, 범법자 개인에 대한 법적, 도덕적, 역사적 평가마저 유야무야된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친일파에 대한 정죄(定罪)는 고사하고, 역사적 평가나 연구마저도 그간 금기시되었습니다. 어떤 헌법학자는 민족 정기가 헌법에 우선한다는 말씀도 하는데, 이처럼 무리 전체가 옳다고, 혹은 그르다고 일단 규정짓고 합의한 바의 작은 실천조차 현실에서 각종 장애에 가로막힌다면, 그 사회, 혹은 체제는 총제적이고 근본적인 규모에서 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운현 선생님은 중앙일보 기자로 재직 중이던 이미 삼십 년 전부터 이 친일파 문제를 언론 섹터에서 열심히 제기한 분입니다. 저도 무크지(그 당시에는 북+매거진의 합성어인 이 단어가 꽤 유행했었어요) 포맷으로 발행된 <친일문제연구>를 몇 권 사 봤습니다. 이때 참여하신 분들이, 요즘 독자들에게는 평전 전문 집필로 유명한 김삼웅 선생 같은 인사였죠. 친일 문제는 광복 후 근 사십 년 동안 버려진 황무지와도 같았는데, 고 임종국 선생의 선구적인 연구, 외로운 투쟁 끝에 작은 불씨가 살아 정 선생님 등 2세대로 잘 전수되었다고 평가하겠습니다. (책에 이런 연혁이 아쉽게도 잘 나와 있지 않아 제 나름대로 서평에서 정리합니다. 현재의 결과만 볼 게 아니라, 독자들이 그 앞에 어떤 고독한 노력이 있었는지 반추함이야말로 역사를 접하는 지행일치의 자세입니다)

속표지에는 44인이라고 나오지만, 이번 개정판은 총 41인을 주제로 다룹니다(3인은 동생, 아들 등 추가된 인물이 있어서입니다). 매국노가 44인뿐이었다면 우리의 역사가 이처럼 혹심한 질곡을 벌써 벗어났겠습니다만, 그 44인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반역자들이 민족의 가는 길을 더럽히고 망가뜨렸음은 우리 모두가 또한 잘 아는 사실이죠. 개정판의 41인 중에는 역시 문인들이 많이 포함되었습니다. 이광수, 최남선, 주요한, 김동환 등등.. 특히 해방 직후 민족의 공분을 산 인사 중 앞 대열에 놓였던 게 이들 문인들인데, 물론 말과 행동으로 친일의 최선봉에 선 구체적 죄과가 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겠습니다.

이광수는 특히 해방을 몸으로 겪은 세대(당연히 현재 거동도 불편한 초고령 노인들)에게는 이완용과 동급의 매국노로 꼽힙니다. 이완용보다 나이도 훨씬 어릴 뿐 아니라 정치적 중요성, 가문의 휘광 면에서 비교도 안 되는 일개 문필가일 뿐인데도요. 이에는 아마 1) 젊어서부터 엄청 기대를 모았던, 조선 전체의 자랑이라 할 천재형 문인이었던 점, 2) 그 훼절이 특히 갑작스럽고, 방식과 빈도가 열혈성이었던 점, 3) 해방이 되고서도 구차한 변명과 발뺌이 먼저였던 점 등이 이유겠습니다. 이게 역사 교육이 제대로 안 되어서인지, 요즘 세대에게 물어 보면 춘원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이광수와 비슷하게 문재로 이름을 떨쳤지만, 전문분야가 역사 쪽에도 깊숙한 한 발을 들인 케이스로서 육당이 있죠. 이분은 한국 문예사의 명문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하기도 했고, 그 특유의 동아시아사 패러다임으로 여러 문제적 저술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분은 춘원과는 달리, 자기 나름대로 애착을 뒀던 연구의 지속을 위한 방편으로 친일행위에 빠진 케이스로 봐 줄 여지가 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여튼 반일 항일 정신만은 일관되게 유지했던 이승만도, 육당이 죽었을 때 "한국의 토머스 제퍼슨이 타계했다"며 특히 성명을 발표한 것도, 당시 대중의 분노가 춘원에게와는 달리 이 사람에게는 조금 완화되었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는 작용했겠죠. 이 책에도 나오듯 <자열서>는 다소나마 진정성이 담겼고, 또 그의 거의 모든 저술, 성명이 그러하듯 참 명문으로 꼽힙니다. 이광수는 나이 들어서 친일력(?) 상승과 반비례하여 문필력도 감퇴한 것 같죠.

참담한 자기 반성으로 잘 알려진 케이스라면, 민족 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최린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의 해당 파트 제목은 <항일은 짧고 친일은 길다>인데요. 그의 영욕에 가득찬 인생을 이만큼 잘 요약한 표현도 없을 것 같네요. 그런데 특히 이 책을 보면, 이미 3. 1운동 관련 재판기록을 봐도, 그 자술서와 진술 일부를 보면 민족 대표라는 명목이 무색하게, 일제의 논리와 선전의 기조에 그대로 동조하는 말로 가득하다고 지적합니다. 사실이 이렇다면, "항일"은 그저 "짧기"기만 한 게 아니라, 존재하기나 했나 싶을 만큼 미미하다고밖에 할 수 없네요. 가재는 게편이라고 이 파트에서도 그의 역성을 드는 이로 최남선이 등장하는데("이번 최군의 일을 보며 '백열'의 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종씨이기도 하네요?), 이로서 우리는 어떤 악행과 배덕의 이면에는 개인의 사정을 떠나 어떤 구조로서의 병폐가 작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범죄자들은 특유의 비뚤어진 심성 때문에라도 서로 끌리기 마련이죠.

가장 애매한 게, 겉보기에도 "항일의 행적"이 길고 뚜렷하지만, 그 밝혀지지 않은 암흑의 행보에 친일의 등불이 아로새겨진 것으로 의심되는 이갑성 같은 인물의 경우입니다. 이갑성씨는 해방 이후에도 독립 유공자로 예우되어, 광복회 등에서도 큰 역할을 수행했고 지금도 이쪽 인맥이 탄탄합니다. 많은 이들은 의심할 여지 없는 애국지사로 그를 인식합니다. 어떨까요? 이 점에서 우리가 자신을 돌아봐야 할 대목은, 명분이나 원칙을 내세움에 아무 의심이 없고 확신으로 가득찼다 한들, 나의 이해관계, 내가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람의 문제에 다다라서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기 십상이라는 점입니다. 그를 넘어서서,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당사자를 감싸기까지 합니다. 이 경우는 유일한 예외다 이거죠. 이런 식으로 내 자신의 안면을 봐서 부패와 부정과 비리와 불의에 매번 누구의 역성을 들어 주기 시작하면, 법과 정의가 설 땅이 없습니다. 이분 말고 나머지 40명은, 혹 누가 합리화의 시도와 변호를 펼치면 동원할 핑계가 없어서 단죄가 이뤄졌겠습니까?

흔히 우리가 생계형 친일이라면서 정상을 참작하자는 말을 하는데, 이 책에는 "직업이 밀정이었던" 선우순, 선우갑 고등계 형사 형제가 나옵니다. 우리 중에는 아직도 형사, 경찰직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보시는 나이든 분들도 있는데, 바로 이런 케이스, 즉 같은 조선인 출신으로 공권력 집행에 몸을 담아 같은 동포에게 훨씬 못된 짓을 한 이런 자들 때문에 직분 전체가 오명을 쓴 까닭이 큽니다. 한편으로, 같은 성씨인 선우혁, 선우훈 같은 분은 역시 형제이지만, 우리가 잘 아는 독립 운동 계열의 빛나는 투사로서 유방백세의 대표적 모범 사례입니다. 저 위에 언급한 육당의 경우, 그 셋째아들인 한검씨는 반대로 항일운동에 나섰고, 해방 후 북한 체제에서 일정 역할을 맡기도 했다는 서술이 이 책에 나옵니다. 안중근 의사의 아들은 악질적 친일 가담으로 부친의 명성에 먹칠을 하기도 했는데, 이처럼이나 일제의 지배는 같은 핏줄 한 집안 출신의 여러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갈림길을 만들기도 했네요.

공주 갑부 김갑순은 1980년대 초반 MBC에서 특집 드라마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한말이라면 어디서 사람 취급도 못 받을 이런 천민 출신이 느닷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떳떳지 못하게 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제의 토지 수탈과 더불어 소위 근대적 소유권제를 정비하던 와중, 특정 지역의 지가가 급등했기 때문입니다. 땅값이 갑자기 오르면 예나 지금이나 투기꾼만 재미를 보게 마련인데, 이런 요행과 얍삽한 처신으로 부를 모은 자들이, 그 씀씀이라고 정정당당할 리 없죠. 해방 이후 반민 특위에 걸려 가세가 풍비박산이 났는데, 근본 없고 배운 바 없고 천성부터 타락한 이런 졸부들의 말로가 언제나 이렇습니다. 민족의 장래에 암운을 드리우는 대세에 영합하여 돈을 모은 자들이, 어디 일제 시대의 혼란기에만 설쳐 댔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죠.

제 아비의 죄를 대신 씻기 위해 해방 후 연구자로서 많은 공헌을 한 우장춘 박사의 부친 우범선의 사연은, 이 책 첫머리에 올라 있기도 하지만 읽기가 참 불편합니다.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이, 이처럼이나 역사의 거대한, 그리고 불쾌한 고비에 마디마디 걸려 있을 수 있을까요? 배정자 같은 이는 이런 침침하고 음습한 역사의 언저리에, 언제나 등장하기 마련인 소위 "마타하리형 여간첩"입니다. 김희선은 우리가 흔히 말하듯, "한 번 배신한 x은 두 번 세 번도 거침없이 배신한다"는 속설을 그대로 증명하는 끔찍한 예입니다. 저자는 단지 역사 속에서 규정된 그의 민족 반역자로서의 행적뿐 아니라, 기초 인간성마저 저열하고 추레한 유형으로 그를 규정합니다. "효 앞에 충이 있고, 국가를 욕되게 한 자가 제 가문 제 부모 하나도 바르게 건사하고 모실 수 없다"는 저자의 지적처럼, 민족 정기가 바로 서는 과업은 우리 개개인의 일상이 도덕과 윤리로 지켜지기 위한 선결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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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작하는 동양고전 입문 - 하룻밤에 읽고 배운 지혜를 만든 지식
이현성 지음 / 스타북스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예전에는 그저 과거시험에나 합격하여 입신 양명을 꾀한다거나, 사회에서 (힘있는) 어른들과 교유하려 들 때, 유교 텍스트에 대한 교양이 없으면 도무지 채널을 통과하거나 말을 트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경전을 읽고 오의를 탐구하는 게 모든 젊은이들의 필수 과업이었습니다. 요즘은 사회화의 구조, 성년 편입의 경로가 너무도 달라져서, 그저 출판된(인쇄술이 이만큼이나 발전했는데도) 책의 꼴로 동양 고전을 접하기조차 만만치가 않습니다(그 책을 읽고 새기는 건 고사하고). 뿐만 아니라, 본디 진의를 궁구하기 어려운 게 고전이니만치, 설사 책을 구한다 해도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건 또 별개의 어려운 과제입니다. 1) 접하기도 쉽지 않고, 2) 내용도 어렵거니와 3) 깨친 바를 실제에 적용, 응용하기(이는 자계서의 기능이기도 하죠)란 더욱 난감합니다.


이 책은 동양 고전의 정수만 잘 뽑아 독자에게 전달할 뿐 아니라, 이 핵심의 가르침을 우리 독자들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요긴히 잘 활용할 수 있을지, 저자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쉽게 전달라는 내용입니다. 잘 모르는 독자가 읽어도 재미있고(머리 속에 일단 들어가기라도 하려면 일단 텍스트에의 접근 장벽이 낮아야 하죠. 숙성 과정은 그 다음이고), 동양 고전에 꽤나 밝은 이가 읽어도 "아 그런 뜻이었나" 혹은 "그렇게 새길 수도 있겠네" 같은 곱씹음의 마당을 제공합니다. 본디 우리 의식 구조의 심층을 꿰뚫은 성현들의 가르침 자체가 아주 알찼던 까닭도 있고, 이 저자께서 깊이 깨달으신 분이라 좋은 말씀을 잘 간추린 덕분도 있겠습니다.


제가 위에서 "유교 텍스트"를 언급했지만, 모두 3부 12장으로 이뤄진 이 책에는 노장 사상이 1/6을 차지합니다. 과거에는 이 두 입장이 서로 날카로운 대립상을 보였지만(성현, 교조들이 그랬다기보다 그 일부 후계자들의 그릇된 태도로 인해), 통 트게 핵심의 궁극을 엿보기라도 한 이들에게는 결국 "원융회통"의 차원에서 모든 가르침이 하나의 통로로 연결되기 마련이죠. 궁색하게, 혹은 편협하게 칸막이를 나누는 식의 태도가 아니라, 두루두루 연결되고 사람 사는 이치를 막힘 없이 짚고 나가시는 저자의 태도가 참 좋았습니다. 유가와 도가 외에는, 손자의 병가가 한 장을 차지하고, 그 외 과거 합격을 위한 필독서였던 십팔사략이 주제로서 또 한 장을 점합니다. 앞서 말했듯 답답하게 특정 주제에 국한되지 않으며, 다른 장에서 논의되었던 주제가 다시 끌여들여져 하이퍼링크처럼 상호 언급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게 일품입니다.


<논어>를 처음 접하는 이들이 첫째 문장이 소략하고 번거로운 수식이 없다는 점, 둘째 대화를 주고받는 이들이 대단히 소탈하며 말하는 본인의 개성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딱딱한 유교 경전이라고 하면 이상화한 현인, 성인의 엄격하고 절제된 모습만 강조할 것 같은데 그 반대이니 말입니다. 저자도 이 점을 누누이 지적합니다. 성현들도 이처럼 가식 없는 어투로 진리를 논하고 일상을 걱정했는데, 아무 잘난 바 없는 어린 후손들이 말과 글과 체면과 형식에 얽매어 스스로를 옭아맬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거죠. 이처럼 참된 고전은 그 겉모습에서부터 어떤 긴한 이치를 깨우치고 들어갑니다.

"군자는 태연하나 교만하지 않다."
"군자는 항시 마음이 편안하고 너그럽다."

이는 공자가 책상 앞의 문건으로 허상의 지식 체계를 잔뜩 담은 이가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많은 경험을 체득하고, 소인배든 군자든 날품팔이 하층민이든 왕실의 금지옥엽이든 병적인 거짓말쟁이이든 수완 좋은 사업가이든 간에, 폭 넓게 인간을 상대하여 깊은 지혜를 깨친 위인이라서 자연스레 내뱉을 수 있던 멋진 언명입니다.

저자는 특히 "군자"라는 말을 오늘날의 의미로 바꾸면 "지도자"와도 통한다고 했습니다. "지도자"란 꼭 연단에 올라 정견을 발표하고 선거에 출마하는 직업 정치인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조직에서 아랫사람을 잘 이끌고 동료간의 협화를 도모하며, 정해진 기간 안에 소기의 성과를 잘 올리는 리더, 나아가 수신제가의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잘 돌보고 통제하는 모든 사람이 다 "지도자, 리더"입니다. 꼭 공적 모임, 2차 집단, 이익 사회일 필요도 없습니다. 가정에서 아내 혹은 남편에게 존경, 사랑을 받고, 자녀를 잘 돌보는 부모 자신이 바로 "지도자"입니다. 자녀를 올바르게 가르치는 일 역시 군주나 기업체 오너가 하는 일 못지 않게 어렵고 중대합니다. 그래서 옛 성현들도 먼저 가정이 각각 바로서야 천하가 태평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어느 드라마 제목이 아니라도).

대략 30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그간 유교 도그마에 억눌리고 권위주의 체제의 잔해를 떨치려는 동기에서인지 노장 사상이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아니, 꼭 이렇게 현대사적 의의와 결부시킬 필요도 없을 지 모릅니다. 제가 어쩌다 실시간 시청률 순위를 보면, <자연에 산다> 등 현대인의 모두스 비벤디를 정면으로 배반하고 산 속에 들어가 독특한 자신만의 터전을 일구는 분들을 다룬 다큐가 의외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더군요. 그런 분이야 어떤 사회에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분들을 소재로 (적지 않은 제작비를 들여) 다큐를 제작하고, 이런 프로그램이 시청률까지 높다는 사실에 더 놀라곤 합니다. 이는 이미 노장 사상의 정수가 우리 민중, 우리 국민의 정신 깊숙한 곳에 침투해 들었다는 작은 반증입니다.


조참은 한나라에서 명재상을 지닌 인물이지만, 그의 행정 기법은 딱히 두드러진 게 없고, 선임자가 잘 다져 놓은 전철을 조심해 밟는 것이 첫째 원칙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그가 황로술에 정통한 어느 노인에게 하달받은 깨달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노장 사상에 경도된 사마 천 등의 사가가 주로 제기하는 주장이기는 합니다. 각양 각색 기상천외의 취향과 개성을 지닌 수백만의 인민이 모여 사는 공동체의 질서를 인위적으로 각박하게 통제하면, 달성하려는 목적이 주는 이점 이상의 악폐가 새로 생겨날 뿐이니, 상선약수, 모든 것은 그저 물 흐르듯 제 타고난 본성에 맞게 다뤄야 한다는 이치가, 사실 중원 본토나 여기 한국을 넘어, 인간 생리의 깊은 구석을 잘 갈파한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맹자는 도탄에 빠진 백성의 생활상에 크게 의분을 느껴, 백성을 못살게 구는 위정자를 향해서는 역성 혁명에의 결단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등, 집권자나 권세가의 입장에서는 크게 불온해 보일 수 있는 주장을 서슴지 않고 제기한 인물입니다. 이런 정의롭고 민본주의적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반면, 의외로 실용의 기법이라 할 "설득술(저자의 표현입니다)"의 흥미진진한 각론도 찾아 익힐 수 있다는 게 그만의 매력입니다. 아마도 정치상황은 더욱 복잡히 꼬이고, 유세가들의 주장에 더 이상 솔깃해하지 않는 군왕, 재상 들의 행태에 적응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출된 노하우가 아닐까 추측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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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지던트 힐러리 -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꿈과 열망의 롤모델 청소년 롤모델 시리즈 (움직이는 서재) 8
캐런 블루멘탈 지음, 김미선 옮김 / 움직이는서재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롤 모델"을 이야기할  때, 특히 그들의 성별이 여성이라면 이제는 힐러리 로댐 클린턴을 빼놓곤 논의가 아예 안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이분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작년, 대략 4월까지 이분을 다룬 책이 여러 권 출간되었는데요. 이들 중 제법 볼륨이 두터운 진지한 분석서만도 두 권이었죠. 이런 책들을 읽고서 그간 오래 품어 왔던 저 자신만의 생각이 냉큼 바뀌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람 생각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니기도 하고 말이죠.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새파란 정치신인이었던 일리노이 주 연방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에게 민주당 대통령 후보직을 내놓아야 했을 때, 누가 보기에도 그녀의 정치생명이 그것으로 끝인 듯 했을 겁니다. 경륜이 일천한 상대에게 패배했다는 사실 외에도, 선거 과정에서 미국의 대중들이 그녀에 대해 품은 감정적 장벽이 생각 외로 높다는 점이 새삼 모두에게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자신 앞에 어떤 방해나 애로가 놓였을 때, 이를 돌파하고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바꾸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입니다. 오바마에의 패배가 그녀 경력의 끝이 되기는커녕,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무 장관 4년을 지낸후 "역시 다음 대안은 힐러리밖에 없다."는 대세론이 확산되기까지 했죠. 퇴임 후 다음 대선을 노리라는 여론이 그녀의 진영에서 주도된 게 아니라, 장관으로서의 업적을 보고 자연스럽게, 여러 섹터에서 붐이 일듯 조성되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합니다. 더 이상 그녀는 자신만의 의욕과잉에 의해 정치 노선이 추동되는 정치인이 아니었던 거죠. 한때 공화당의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젭 부시가 들고 나온 구호가 "누군가는 그녀를 막아야 한다"였듯, 호불호를 떠나 여성이 그만큼이나 뚜렷한 존재감을 지닌 정치인으로 우뚝 선다는 자체가 세계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힐러리 로댐은 우리가 흔히 잘못 알듯 엄청난 금수저 가문에서 금지옥엽으로 자라난 여성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소박한 삶 속에서 자신만의 꿈을 간직할 줄 알았던 평범한 분이었고, 아버지는 직업 군인의 경력을 유지하다 늦게 사업에 뛰어든, 규율의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적 인사였습니다. "힐러리"라는 이름은 어머니가 지어주셨다고 책에 나오네요. 남다른 인생을 살라며 이런 중성적인 이름을 택했다는 설명인데요(여자란 티가 뻔히 나는 이름이라면, 평범한 여성들처럼 정해진 길을 갈 것 같다는 뜻이겠죠?). 저는 고교 때 영어 선생님이 라틴어 어근("즐거운")을 설명하시면서 이분 이름을 거론하던 게 기억 납니다. 그때 우리들은 다 웃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저 정확한 설명이었을 뿐 웃을 일은 아니었네요.



이 책에 나온 힐러리 로댐의 웰슬리 여대 재학 중 사진은 와 이분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구나 생각이 절로 들 만큼 귀엽고 때 안 묻은 모습입니다. 이 책에는 그녀의 지난 역정이 어땠는지 단계별로 추측이 가능할 만큼 여러 컷의 대표적인, 그리고 상징적인 사진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여대생 때는 뭔가 엉뚱한 생각만 잔뜩 하고 있는 듯 순수하고 꾸밈 없는 착한 표정입니다. 그러다가 30대, 남편 클린턴 주지사를 만나 중요 공직 한 자리를 차지하던 시절에는 당차고 야무지면서도 20대 시절보다 훨씬 세련되어진, 약간 무서워보이기까지 한 의지가 눈빛에서 풍기는 모습이에요. 사람의 인상이란 참으로 많은 것을 그 사람의 내면에 대해 말해 줍니다.



어떤 사람의 인격과 영혼의 색채를 이루는 건, 그 사람이 어느 누구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아 왔는지가 아닐까요. 힐러리 로댐은 어렸을 적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활동을 보고 인생의 지표를 결정했다고 털어 놓습니다. "허영은 그것이 인기가 많은지를 묻습니다. 하지만 양심은 그것이 옳은지를 묻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양심의 문제는 도외시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부각되고 주목 받으려는 의도 하나로 별의별 파렴치한 짓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허영을 양심인 양 위장하여, 정작 그런 양심적 결단과 지적이 필요했던 시점에선 실리를 쫓아 조용히 묻어가다가, 상황이 다 끝난 후에야 무엇이 옳다며 진리를 자기가 독점한 양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더군요. 킹 목사의 저 말은 진실과 허위를 가리는 준열한, 그야말로 행동하는 양심의 불 같은 시금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댐의 양친이 대체로 보수적인 성향이었고, 힐러리 자신도 (다소 기인으로 평가받던) 배리 골드워터 같은 정치인에 자원 봉사를 나섰다는 점은 이후 그녀의 행보를 고려할 때 정말 흥미롭습니다. 사실 배리 골드워터는 이후 엄청 젊은 부인을 맞이하고, 그 부인의 정치적 성향을 따라 리버럴로 전향했다는 걸 고려하면, 힐러리는 대학생 때부터 사람을 정확히 알아봤던 셈입니다.



빌 클린턴이 어느 인턴과 추문이 생겼을 때, 당사자의 아내로서 그녀가 처했던 입장은 세상 누구도 그 곤경이 상상되지 않을 만큼의 난관이었을 겁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남편의 실수가 안긴 고통도 고통이지만, 정치적 입장만 고려해서 본심을 숨기고 남편을 옹호하는 척한다는 일각의 삐딱한 시선이 더 참기 어려웠을 겁니다. 세월이 그때로부터 이십 년 가까이 흐른 지금, 그런 당치도 않은 편견이 얼마나 사악한 것이었는지는 최소한 증명이 되었습니다. 빌 클린턴이 퇴임만 하면 둘은 즉시 이혼할 것이라는 관측은, 이후 이어진 전례 없는 잉꼬 부부의 금슬이 드러나면서 스스로 꼬리를 내렸죠. 저는 민주당 전당대회를 얼마 전 TV 생중계로 보면서, 이제는 노인인 빌 클린턴이 아내의 후보 수락 연설을 경청하며 "어쩌면 내 마누라는 저처럼 말도 잘 하고 똑똑할까. 어쩌면 말 한 마디를 해도 저렇게 사랑스러울까."라고 고백이나 하듯,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의 미소를 지으며 연단에 시선을 주는 걸 봤습니다. 지금 이분이 건강도 안 좋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게 남들 보라고 가장하는 연기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게 의심된다면 의심하는 그 사람이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crooked) 인간일 겁니다.

힐러리는 단지 "내가 대통령 한 번은 해야 되겠어." 같은 맹목적 권력 의지를 지닌 유형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과 지표를 갖고 이미 영부인 시절부터 대중 앞에 나서고, 이를 공개적인 토의와 검증의 장에 내세우려 했던 인물입니다. 모범적인 정책 지향 정치인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분야에서 과감하게 개혁을 내세웠기 때문에 그토록 오해와 미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겠고 말입니다.

그녀 역시,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리빙 히스토리>를 처음 출간했을 때처럼 아집과 허상에 사로잡힌 미숙한 모습이 아닙니다. 반대 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단점을 개선하고 전의는 몇 배로 더 키웠으며, 상대를 포용해야 할 순간에 감정을 이성에 의해 다스릴 줄 아는 성숙함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오바마측과 경선 직후 대타협을 이루고, 줄 건 주고 받을 건 확실히 챙기는 과정에서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상대에게 배울 건 과감히 배우는 대범함도 어느덧 자신의 덕목으로 내면화했습니다. 역시 사람은 어느 정도 시련을 거쳐야 재목으로 성장하는가 봅니다.

힐러리 클린턴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1) 시련이 닥쳐도 굴하지 않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한 후 정면돌파하는 그 의지 2) 보편타당한 대의 명분을 추구하는 노선이라야 정치인으로서 장수할 수 있다는 바른 신념 3) 무엇보다도 여성에게 인습이 부과하는 장애와 한계를 거의 완전한 방식으로 타파, 극복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 등이겠습니다. 그녀는 유려한 연설가이기도 한데, 책 말미에 실린 영어 원문과 번역은 좋은 독해 교재로 쓰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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