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역사 - 현대판 노예노동을 끝내기 위한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지음, 하정희 옮김 / 예지(Wisdom)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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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년 전에 타계한 철학자-인문학자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의 명저가 한 권 더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학부 과정 교양교재로 널리 쓰이는 <20세기 서양철학의 흐름>, 그리고 몇 년 전 웹과 미디어에서 작지 않은 화제에 올랐던 <인종차별의 역사> 덕분에, 인문 쪽에 별 관심 없던 이들에게도 그의 이름은 낯설지만은 않은 울림을 남깁니다. 그를 존경하는 독자들에게 "전작"으로 인식되는 <인종차별의 ..>과 같은 역자분, 같은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네요. 하정희 선생님의 매끄럽고 정확한 번역은 정평이 나 있는데,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가 내용과 모습이 너무너무 맘에 들어 구입, 소장한 <마지막 대부>(마리오 푸조의 장편)을 통해 이분의 솜씨를 처음 접하게 되었더랬죠.



우리 동양에서도 인간의 본성을 두고 선하니 악하니 하는 오랜, 그리고 치열한 논쟁이 이미 2300여년 전부터 있었습니다. 이 책은 대개 청동기 문명과 도시 문명의 본격 정착기로 그 시발을 잡지만, 노예 제도야말로 "영혼을 지닌 인류의 수치"이며 누대를 이어오고도 영원히 씻을 수 없을 것 같은 본질적 죄의식의 한 근원이 된다 하겠습니다.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지점과 거의 기원을 같이하는 이 노예제는, 들라캉파뉴 뿐 아니라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시발을 우루크 도시 문명의 발생기 정도로 잡는 데에 의견을 같이합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핵심에 자리한 이 도시의 명칭은, 오늘날 "이라크"라는 나라 그 이름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그 이른 시점에 남겨 요행히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기록의 잔해 중 가장 앞선 것들에 벌써 노예, 노예제에 대한 언급이 나오니, 노예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라는 언명이 그리 과장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 들라캉파뉴를 비롯, 많은 서양 학자들이 큰 윤리적 회의감과 이론 구성의 난점에 빠져드는 대목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 철학의 토대를 놓은 헬라 인문의 거인들이, 거의 한결같이 노예제에 대해서만은 뚜렷한 언급이 없거나, 되레 지지, 옹호에 가까운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플라톤의 경우 이미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혐오, 고국 아테네 아닌 스파르타에 대한 동경" 등으로 후대의 독자, 학습자에게 당혹을 안기는 인물인데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처우, 냉담한 정서를 노예(헤일로타이)와 외국인에 대해 유지했던 스파르타의 여러 현황과 정치 사회 제도가 그토록 플라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계몽과 인본의 확고한 토대로만 여겨졌던 헬라 사상 체계가 기실 대단히 취약한 내실을 지니고 있음을 폭로합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노예제를 서술하며, 당시의 이 시스템이 "인종차별적 요소"와 어떤 교차, 종속, 상호 영향 관계를 가지는지 잠시 짚어 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그가 큰 반향을 일반독자와 학계에 불러일으킨 <인종차별의...>의 저자이기도 하기에 우리에게 큰 설득력과 매력을 풍기는 서술이기도 합니다. 결론에서 다시 언급되지만, 노예제는 결국 "나와 다른 것에 대한 경멸→증오→노예화"의 기제를 밟아 정착된다는 게 이 저서를 일관하는 저자의 관점이요 "가설(이는 저자 자신의 표현입니다)"이 되고, 우리는 이를 기초 인식틀로 삼아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대 노예 시스템을 다룬 다큐나 이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면 항상 궁금한 게, 왜 저들은 그 지옥 같은 억압에 정면으로 대항, 봉기하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리스의 경우 수적(數的)으로 얼마 정도의 지배층-노예소유자가, 얼마나 되는 노예를 재산으로 간수했는지에 대해 명확한 통계, 혹은 비슷한 자료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아테나이오스의 한 저술은 1:33 정도로 적고 있으나 이는 터무니없다는 게 저자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의 평가입니다. 오히려 미국 남부 노예제처럼 대략 2:1 정도의 우위를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게 통설적 추론이죠. 로마인들의 메인 오락 중 하나인였던 검투사 시합 산업에 소속된 노예였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 대해서도 상세한 서술이 베풀어져 있는데, 다만 저자는 "계급 해방 투쟁의 선구"로까지 이 사람을 평가하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오래된) 태도에 대해 회의어린 시선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많이 남아 있는 기록은 고대 로마 귀족이 보유했던 많은 노예들 중 상당수는 가재관리, 회계, 자녀교육(그리스 출신 노예에 한정) 등 가혹한 육체 노동이 아닌 고상한 영역에 다수가 종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해방노예"가 발생했으며, 이들은 제국의 역사에서 미미하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을 두고 이뤄진 다소 무리하다 할 현대의 일부 해석은, 이 시기의 노예상에 대해 "목가(牧歌)적 환각"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일각의 큰 비판을 받고 있는데("노예제는 그 당시에도 역시 극단적 비인도성을 띤 시스템이었다!"), 물론 저자 역시 이런 스탠스를 견지하는 편입니다. 결론에서 다시 강조되듯, "노예제에 대해서는 제로 톨러런스라야 한다."는 게 이분의 일관된 주창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 엥겔스 등이 확립한 도그마 때문에, 이념적으로 어떤 경향이건 무관하게 널리 지니고 있는 잘못된 상식이, "중세에는 노예가 없었다"입니다. 노예 대신에 장원이나 영지에는 "농노"가 그 기능적 신분을 차지했다는 게, 일반인뿐 아니라 학자들에게도 널리 퍼진 인식인데, 이를 최초로 교정한 업적은 마르크 블로흐의 몫으로 돌려져야 한다는 게 저자의 입장입니다. 중세 유럽에는 노예 역시 분명히 존재했으며, 우리는 사실 우리 세기에 쏟아져 나온 (비교적 고퀄의) 역사 팩션물이나, 심지어는 <데카메론> 같은 고전을 통해 파편적으로는 이 인식에 아주 어둡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공식적인 질문에 대한 정형화한 응답으로는 "노예는 없었음"을 내놓는데, 이는 어쩌면 "원죄적 수치심"이 심층 심리에서 기만 기제를 활성화한 소치가 아닐까 하는 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저의 추측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고대와 근세(자본주의 태동기 직전)에 엄연히 서양에 만연한 채였던 노예가 유독 그 "암흑기"에만 부재했다는 건 납득이 되지 않죠. 다만 보편적으로 "가난했던" 유럽이 노예까지 부려가면서 영위할 산업이 없었다거나, 가사노동에 활용할 여유가 없었다는 정도의 해석이 가능하겠구요. (다수 후대인들의 낙천적 기대를 배반하게도) 당시 지배이념이었던 "기독교적 박애주의"가 여기에 기여한 바가 크지 않았다는 정도는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고 있습니다.

노예제와 노예무역의 르네상스(!)는 유럽인들의 상업활동, 군사모험의 활기가 살아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때에 일어납니다. 고대 로마 이전까지만 해도 "피부색"은, 특정인에 노예 신분을 부여함에 있어 결정적 요소가 되지 못했습니다(저자가 지닌 "인종차별"에 대한 고유의 관점 때문에, 저 토픽은 이 책 내내 주요 논제, 준거틀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의 공격적 모험상인들이 식민지 개척 후 노예의 "수입"을 중요 수입원으로 간주하고부터는, "노예=유색인종"의 공식은 노예경제와 직접 연관을 맺지 않은 유럽인에게조차 "상식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릅니다.

저자가 통렬히 비판하는 점은, 소위 계몽사상의 선구자, 대가들 중에, 부인할 수 없는 반계몽 반휴머니즘의 상징과도 같은 이 노예제에 대해, 명시적 비판이나 반성을 드러낸 이가 한 명도 없다시피했다는 거죠. 오히려 대가들(로크,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왕성히 활동하던 기간은, 노예무역이 극성을 이뤄 막대한 수입을 창출하는 산업 구도의 확고한 일부로 자리한 시기이기도 했다는 거죠. 로크의 경우 "노예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항구적 전쟁상태의 연장, 부산물"이라는 게 그의 인식인데, "정당한 전쟁"에서 패배를 겪은 이가 노예로 사는 건, 패전국이 전쟁배상금을 물고 그 지도자가 전범으로 처벌되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는 취지이니, 오늘날의 우리는 그 황막하고 냉정한 논리의 기조에 전율할 만합니다.

인도의 카스트를 짚으며 저자는 "인종차별"의 문제를 다시 환기합니다. 초기 카스트 성립 당시 "바르나"는 분명 피부색이란 개념을 떠올리는 체계였습니다("카스트"는 포르투갈어일 뿐이며 현지에서 쓰는 말이 아닙니다). 이러던 것이 점차 인종적 색채가 옅어지고 사회 제도와 종교의 요소가 개입하며 "자티"로 대체되었다는 건데, 인도뿐 아니라 동양권 전체에서 노예는 세습신분, 혹은 범죄에 대한 응보와 관련이 있을 뿐 인종차별과는 거의 무관하죠. 하긴 근세 이후 상대적으로 문물 교류가 부진했던 이들 권역에서 "차별할 외부 인종" 자체와 만날 기회부터가 적었겠지만.

저자는 특히 동시대의 국지적 "노예 실상"을 짚으며, 발전된 서구에서는 "인식과 정서 속에 인종차별이라는 다른 형태로 잔존"하며, 그렇지 못한 권역에서는 아직도 고대적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강제노동"의 악습으로 남아 있는 게 이 노예제라고 지적합니다. 우리의 양심과 품위를 뿌리에서부터 갉아먹는 이 "노예제라는 해악"에 대해서, 인류는 "무관용"이라는 공동 전선을 형성해야 하며, 그 구체적 전략은 "즉시 행동에 옮김"이라는 결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이에 앞선 마지막 챕터에선 (다소 소략하지만)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매주 벌어지는 수요집회에 대해 사진과 간단한 언급 등으로 자신의 담론 체계에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편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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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 1 - 눈썹달
윤이수 지음, 김희경 그림 / 열림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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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의 제목은 "초월(初月)"로 붙어 있는데, 작가님은 이걸 "눈썹달"로 운치 있게 다시 고유어로 풀고 있습니다. 달이 삭(朔) 즈음에 살포시, 흐릿하게 제 모습을 드러낼 듯 감추듯 자태를 보이는 광경에다 이 권의 내용을 비긴 거겠죠. 주인공은 17세의 소년인데, 사내면서도 여자아이처럼 자태가 곱고 영리하며 "문장을 잘하는" 센스를 갖춘, 운종가(현재의 종로 일대)에서 복덩어리로 통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이름은 홍.라.온.인데... "라온"이란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가 "즐겁게 살라"는 의미에서 지어줬다고는 하나 왜 그 음소에 그 뜻이 대응되어야 하는지는 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름을 소리내어 발음해 보면 뭔가 긍정적인 주문처럼 발랄하게 들리긴 합니다. 사실 중요한 건 그의 성씨가 "홍"이란 사실인데, 여기에 담긴 내력은 2권에서 거의 완전히 드러나더군요.

 

판타지 로설과 본격 역사소설의 차이점은, 다른 캐릭터들은 몰라도 최소한 주인공(특히 여주)은 철저히 현대의 틴에이저들이 갖는 개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사가 고어투이건 아니건 간에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윤이수 작가님은 사료를 통해 시대 어휘를 많이 연구하신 분인지, 적절한 용어들이 문장과 대화 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고 있습니다. 고어를 최대한 쉽게 풀어 썼다고 처음에 밝히고 있는데, 너무 현대어화하면 "궁중로맨스"만의 맛이 떨어집니다. 반대로 고어를 요령 없이 문장 안에 편입하면 가독성도 떨어지고 느낌을 전달할 때 아주 어색해질 수 있는데요. 작가님은 이 딜레마를 참 쉽게 해결하고 있어서,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옛 어휘에 대한 공부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홍라온은 우리 동시대의 소년(...)이 갖는 감성 그대로를 갖고 2백년 전 조선에 태어난 별종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예쁘장한 외모, 싹싹한 태도와 밝은 심성, 민첩한 판단 등 어른들에게 이쁨 받을 장점을 많이 갖고 태어난 인생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는 그 나름대로 많은 아픔을 지니고 누구의 도움 없이 제 힘으로 역경을 헤치고 살아와야 했던 처지인데... 이 사정을 알고 나면 주변의 어른들은 더 그를 기특히 여기고 도움을 주려 들게 됩니다. 자기 걱정 건사하기도 힘든 처지고 나이까지 어린데도, 그는 주변의 어른들이 가진 고민을 세상 다 산 노인처럼 노숙한 솜씨로 척척 해결해 주는 걸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가 장기를 보이는 건 연애 상담입니다.

 

여동생의 병 때문에 그는 궁궐에 들어가 3년 정도 일을 해 주고 대신 큰 돈을 미리 빌려 쓸 수 있는 계약을 맺습니다. 헌데 우리가 잘 알듯, 사내가 왕궁에 고용직 신분으로 드나들 방법은 없습니다. 남성이 왕의 거처 부근에서 시중을 들고 기거하려면, 생식 기관이 먼저 제거된 상태라야 자격이 주어지고, 우리는 이들을 가리켜 당시 "내시, 환관"이라고 불렀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습니다. 내시의 자격을 갖추는 시술은 아주 끔찍하고 원시적인데, 책에는 두 가지 방법이 "내관 만드는 장인, 마스터"의 입을 통해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모르고 무시무시한 작업장에 들어온 소년 홍라온은 그러나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니 마음대로가 아니므로" 엄공 채천수의 시술을 받아야만 할 처지입니다. 라온의 빼어난 요량으로 까짓 탈출 정도야 당장 못 할 바 없지만, 문제는 계약(속아서 맺었다 해도)을 어길 때 병든 여동생의 치료와 늙은 어머니의 형편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라온은 이 기회에 궁정에 들어가서 3년을 버텨야 합니다. 아직도 더 큰 문제가 하나 남아 있는데, 라온과 그의 가족을 제외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로, 사실은 라온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는 겁니다. 장비를 들고 다가오는 채천수는 이제, 그가 시술을 베풀어야 할 신체 부위가 라온에게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할 수 있겠는데... 늙은이가 놀라건 당황하건 그게 중요하지는 않겠으나, 라온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시로서 궁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앞에서 말한 사정 때문이죠.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지요.

 

이 일이 있기 전 라온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어떤 옥골선풍의 귀공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이런 쪽으로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치가 전혀 없는 라온은, 이 사람이 그저 돈 많은 한량이거나 행세깨나 하는 양반 댁 자제인 줄로만 알지, 그 엄청난 신분상의 비밀에 대해 전혀 감도 잡지 못합니다. 라온이 "화초서생(온실 안 화초처럼 곱게만 자란 서생)"이라 부르는 이 귀공자는, 영리한 라온만 까맣게 모를 뿐 조선 나라님의 아들, 세자 신분의 지존인 몸입니다. 독자들은 다 아는 걸 주인공만 모른 채로 귀여운 삽질을 하게 하는 패턴은 뭐 이 장르의 정해진 공식 중 하나겠습니다.

 

궁에 들어가서는 처음에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희한한 기남자를 또 한 명 만나는데, 알고보니 이 사람은 저 "화초서생"의 친한 벗이라고 합니다. 라온은 그를 "김 형"이라고 부르는데, 이 "김 형"은 라온을 "성가신 녀석"으로 즐겨 호칭합니다. "김 형"은 철저히 마음을 숨기는 타입이고, 구체적으로 뭔진 모르겠으나(1권 끝에 대충 나옵니다) 웅대한 뜻을 속에 품은 지사형 인물로 등장합니다. 잘생긴 외모는 로설의 필수 요소라 이 사람 역시 "화초서생"에 별로 처지지 않는 풍신인데, 우리의 주인공 라온도 짐짓 이런 사태에 어리둥절하는 모습을 보여 독자 앞에서 속보이는 뻔한 쇼(?)를 하고 있습니다. 로설의 정해진 공식이라 해도 될, "아주 높은 신분의 남성이 여주를 좋아하고, 여주는 그를 알면서도 팅기면서 그보다는 낮은 지위(보통 친구 같은 측근으로 설정)의 또다른 남성을 더 좋아하는" 삼각 관계 패턴이 깔리는 게 이 작품 속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화초서생"의 이름은 이영(李旲)인데, 이 이름은 순조의 적장자였던 효명세자의 휘와 같습니다. 즉 누가 뭐래도 이 소설의 남주는 조선 24대 임금이 될 뻔했던 실존 인물, 능력과 자태가 공히 뻬어나 만약 보위에 올랐다면 조선국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었다는 (헛된) 기대를 품게 하는 그 인물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김 형"의 이름은 김병연인데, 이는 우리가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알고 있는 그 사람의 본명입니다. 실제 두 사람은 두 살밖에 나이 차가 나지 않는 같은 또래였으나, 물론 두 사람이 역사상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단 한 번이라도 조우했다는 기록은 없고, 그럴 가능성도 거의 0에 가깝습니다. 보통은 이 둘이 동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조차도 모를 텐데, 기발하게도 이 점에 착안하여 가공의 여인 하나를 두고 연적 아닌 연적이 되는 설정을 꾸린 작가분의 착상이 놀랍습니다. 1권 끝무렵에 라온이 "김 형"에게 이게 어울린다며 어디서 삿갓을 구해 와 씌워 주는 장면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이 장면은 또한, 세자 이영에게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라온의 태도가 이영의 심기를 자극하고, 동시에 라온의 본심이 누굴 향하고 있는지 독자에게 암시한다는 점에서 긴요한 장치입니다.

 

저는 처음에 전혀 의식 않고 읽어내려가다가, 중반 쯤에 세도정치가인 장김의 김조순이 갑자기 등장하기에 비로소 처음으로 돌아가 세자의 이름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 중에서도 명시적으로 그런 언급이 나오지만, 조선조의 왕세자 중 정실 소생의 장자로 보위에 오른 이도 드물고, 아예 세자 시절을 거치지 않고 왕이 된 이도 제법 있습니다. 효명세자는 출생상으로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보기 드문 예였습니다. 소설 속에서도 나오지만 회화 솜씨나 구사하는 필체 역시 출중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김삿갓은 대중의 통념상, 홍경래의 난 당시 적도에 붙어 일신의 안위를 구차하게 도모한 조상을 힐난하는 답안을 써서 급제했음을 뒤늦게 깨닫고 속세를 등지며 풍자시인으로 산 인물인데(다만 사실 여부는 불확실합니다), 작가는 여기서 반체제-혁신의 코드를 짚어 내어, 리버럴 성향(이 역시 작가의 상상입니다만)의 효명세자와 사회 변혁에 한 뜻을 모으는 동지 정도로 꾸며 내려 하는 것 같습니다(마치 합스부르크가의 모 황태자를 연상시키는). 이 정도 깊이라면 종래의 로설의 구성, 밀도 수준을 조금 넘어서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궁중을 배경으로 삼은 한국 문예에서 언제나 그렇듯, 여기서도 못된 상궁 대신 교활하고 사악하며 가학성향의 내시 몇이 등장하여 신참 라온을 괴롭힙니다. "신래침학"의 악습은 비단 내관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오른 이들 사이에서도 큰 문제를 일으킬 만큼 횡행했는데, 우리의 라온이 이 난관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지켜 볼 일입니다. 말미에 이영의 친여동생 명온공주가 처음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도도하지만 매우 단순한 기질과 사고의 소유자로 보이는 이 여성이 향후 극 전개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도 주목할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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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 2 - 달무리
윤이수 지음, 김희경 그림 / 열림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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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나쁜 우두머리 내관 성씨가, 라온을 제대로 골탕먹일 의도로, 궁중에서 찬밥 신세인 박 숙의를 모시는 직분을 맡깁니다. 박 숙의는 임금의 후궁인데(임금은 물론 순조이겠고, 박 숙의 역시 일단은 실존 인물입니다). 정궁 순원왕후의 등쌀 때문에 철저히 소외되고 핍박 받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런 분을 모시는 내관이라면 그 역시 피곤하고 위태로운 처지로 덩달아 떨어지기 쉬운데(내명부를 대놓고 모욕할 수는 없으니 그 나인이나 내시가 대신 고생을 하는 건 흔히 보는 일), 라온은 "순진해서인지 성실해서인지" 제 몸 힘든 건 아랑곳않고 박 숙의를 받들고 모셔서 그녀로부터 큰 신임을 얻게 됩니다. 박 숙의 본인이 실권이 없는 처지이니 별 도움이 되진 못합니다만.... 이 과정에서 라온은 특유의 지혜를 발휘해 주위를 놀라게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직접 읽어 보시면 됩니다.

 

명온공주가 상당히 단순한 사람이라는 건, 1) 연서를 주고받다 자신이 버림 받았다는 마음의 상처, 2) 오빠 이영이 라온에 흑심을 품고 곁에 두려 한다는 질투심으로 혼자 끙끙 앓다가, 이를 눈치챈 이영의 간단한 제스처 하나에 마음이 확 풀어지는 태도만 봐도 우리 독자가 알 수 있습니다. 사람 마음을 그렇게 잘 이해하고 시원시원한 처방을 내려주면서 정작 자신에 얽힌 연사(戀事)를 두고는 해결은커녕 얽힌 실타래를 더욱 꼬이게만 만드는 라온의 행동은 사실 노골적으로 독자를 향해 부리는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로설 팬들, 아니 로설 팬 아닌 사람들도 다 아는 상식이죠.

 

이 2권에서는 중반 이전에 청나라 사신과 그 수행자들이 대거 입경하는 이벤트가 마련되어, 그 접대와 외교, 정치적 요구를 둘러싸고 상당히 미묘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효과가 생깁니다. 이 과정에서 성내관, 마내관(마종자) 등은 은근 중국 쪽에 다른 줄을 대려는 낌새까지 보이며 독자에게 이중의 배신감과 분노를 부르는데(反라온, 反민족), 그때마다 그들의 추악한 의도는 세자 이영과 그의 "벗" 김병연의 출현에 의해 번번히 좌절됩니다. 세자 이영은 과연 이 나라의 미래를 한 어깨에 짊어진 재목답게, 유씨 성을 가진 중국 상인 하나가 이번 방문단의 대열에 갑자기 낀 걸 두고 어떤 음모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지 헤아리는, 나이에 전혀 걸맞지 않은 사려 깊은 면을 드러냅니다.

 

세자에게는 외할아버지가 되는 세도가 김조순과 대면하여, 이영은 경전의 그 유명한 구절 "임금이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를 인용하며 노-소, 보-혁의 미묘한 신경전을 펼치는  모습도 보입니다. 부원군의 세력이 사실상 왕실의 그것을 능가하는 형편임을 강조하면서, 2권 처음에 나온 대로 박숙의에 대한 처우에서 임금(순조)이 그처럼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사정이 다 설명되고도 있습니다. 2권 마지막에서 왕이 주최하는 연회에 청 사신, 조선 대신들이 거의 불참한 채 썰렁한 자리가 연출되는 장면은, 세도 정치 하에서 제 위신을 세울 수 없었던 왕가의 딱한 사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2권의 최대 재미는, 라온-이영-병연을 축으로 전개되는 삼각 애정관계의 발전이 갈수록 흥미진진해져 간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김병연의 손자이자 이영과는 외사촌 관계가 되는 이조참의 김윤성이 따로 등장하여, 성별도 애매하고 신분도 천한 라온 한 명을 둘러싸고 애정사는 더욱 복잡하게 꼬입니다. 김윤성은 원칙적으로 사대부 출신일 뿐이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 사실상 최고 권력을 독점한 외척 가문의 종손이라는 점에서 "준 왕세자 신분"이라 불러 줘도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묘하게도, 체제의 모순을 혁파하려는 진보 성향은 세자 이영이 대변하고, 김윤성은 그 반대 입장에 선다는 게 독자에게는 볼거리입니다.

 

딱한 건 남장 차림의 라온이 사실 여성임을,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첫눈에 알아챈 이가 김윤성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대단히 섬세하고 자상하며 이지적 인물임에는 분명하다는 거죠. 라온은 1권에서 "여자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 헤아려 주는 남자에게 반할 뿐"이란 말을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라면 이영과 김병연은 여인의 심정을 이해하기는커녕 상대의 성별도 모르는 맹인이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사랑을 얻을 자격이 없습니다. 반면 김윤성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여인의 복식을 해 입히고, 타고난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을 시켜 준 "기사, 챔피언적 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2권에선 무서운 복선이 하나 깔리는데, 여성 앞에서는 가장 젠틀하고 선량한 사람인 척 굴다,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무대에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본성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 점을 앞으로 지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권의 관전 포인트는.... 청에서 사신단에 끼어 온 소양 공주가 조선의 세자 이영에게 반해서 들이대는 장면이라든가, 명온공주하고 신경전을 벌이며 누가 더 예쁜지 판정을 받아 보자는 식의, 원형 신화나 로설 아니면 도저히 구경할 수 없는 오글거리는 에피소드 등이겠습니다. 여기에 코믹한 캐릭터도 많이 등장하여 감초 구실을 해 주는데, 1권에서 "손끝 야무진 내관"으로 아주 별명이 붙어 버린 장내관이 이 2권에서도 터무니없는 착각과 실수로 독자를 많이 웃게 해 줍니다. 세자 이영이 여기에 작정하고 호응하는 모습은 더 큰 폭소를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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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S 투자 바이블
안훈민 지음 / 참돌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금리가 너무 낮습니다. 고도의 성장기를 질주해 왔던 한국이니만치 두 자리 수가 안 되는 건 이자로 쳐 주지도 않던 감각이 아직 남아 있는 장노년층에서는 1~2%를 운위하는 작금의 실정이 도무지 꿈만 같습니다. 1990년대에 일본은 이미 "제로 금리, 마이너스 금리"를 운위했습니다만 그게 먼 나라의 기이한 변고인 줄로들만 아셨겠죠. 파생상품이다 선물이다 하는 건 단지 남 사정으로만 여겨 왔던 계층, 심지어 은퇴 노인들까지도 요즘은 ELS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지금 수준의 이자 수준으로는 도무지 견딜 수 없기에, 기웃거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데, 어떤 분들 말을 들어 보면 이게 그렇게 위험하니 절대 하지 말랍니다. 사정은 급하지만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들이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누구 말을 들어야 바른 선택일까요.

 

안훈민 선생은 본인 자신이 성공한 투자가로서 남부러울 실적과 이력, 평판을 쌓아 왔고, 현재로선 PB처럼 특정 고객 집단을 상대로 어떤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입장도 아닙니다. 실력과 내공 가득한 분이 어떤 거래상의 제약 때문에 구애 받음 없이 자유롭게 풀어 주는 설명이니, 권위와 신뢰를 동시에 갖춘 주장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전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책-분야 불문하고- 이 이렇게나, '맞는 말'만 골라서 할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에 감탄을 그칠 수 없었습니다. 투자에 크게 성공한 입장이라면 일단 당장의 수익 상황에 연연하고 조바심칠 일이 없기에, 즉 절박한 플레이어가 아니기에, 예컨대 두 세기 전 로스차일드가 그랬던 것처럼 "역정보"를 흘려 경쟁 투자자들에게 집단 빅엿을 먹일 이유가 없죠. 실력 있는 고수는 (자기 입장이 있기에) 바른 판단을 하고서도 일일이 타인에게 정직한 분석과 진단을 내놓지 않고 결정적 사항은 (왜곡하지는 않더라도) 감추는 수가 많은데, 이 책은 ELS에 대해 현 시점에서 투자자들이 알아야 할 거의모든 것을, 정말 필요한 것만 골라, "정확하게"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ELS는 일단 고정된 수익을 보장하여 지급합니다. 언제? 기초자산 가격이 오를 때만입니다. 이를 발행한 금융기관에선, 해당 기초자산의 시세가 아무리 폭등, 속등(續登)한다 해도, 처음에 정한 비율 외에 고객에게 더 주지 않습니다. 이건 주식이 오르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에는 "아 차라리 직접 사 둘 걸"하며 큰 아쉬움이 드는 경우입니다. 반면, 만약 큰 폭으로 가격이 떨어지면, 투자 원금 전부 혹은 일부분을 날리는 게 이 ELS의 특징입니다. 그러니, 이렇게만 설명을 하면, 1) 올라도 약이 오르고(극히 일부밖에는 내 주머니에 들어 오는 게 없음) 2) 일정 가격대 이상으로 떨어지면 돈을 원금까지 날리는 상품이니, 뭐가 되어도 고객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 오는, 천하에 몹쓸 녀석만 같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유수의 대기업도 재테크 수단으로 고려할 리가 없죠.

 

일단 이론상으로는 지수건 종목이건 개별주식이건 뭘 기초자산으로 해서도 ELS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상품이라고 해도 마케팅이 잘 안 되면 창고에서 썩어야 하는 냉정한 시장 중심의 체제에서, 경우의 수대로 ELS를 찍어낸다고 해서 그게 소화되라는 보장은 없죠. 지금 한국에서 주류를 이루는, 즉 금융 원리와 투자 요령에 훤한 전문가급 고수가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 선호될 만한 ELS는, 지수형과 적립형 ELS가 대부분입니다. 이 책 서론, 본문, 결론에서 수시로, 그리고 명확하게 제시되는 안훈민 선생의 결론도 "잘 모르겠거든 지수형 적립형만 하라. 그래도 안전할 것이다."입니다. 왜 그런가? 이런 ELS 상품들이 기초자산으로 삼고 있는 코스피는 여태 그처럼 큰 폭으로 떨어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원금 손실 상환"이 이뤄진 예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거죠. 물론 안 저자는 대단히 신중하고, 또 정확성을 기하는 분이라, "현 시점까지는 그렇다"는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바뀌는 사정이 궁금하다면, 자신이 운영하는 네이버카페에 가입해서 업데이트 사항을 확인하라고 합니다. 한번 찍어낸 책을 통해서는 입장 변경을 다시 할 수 없으므로,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겠죠?

 

그러니 위에 적은 2), 즉 가격 폭락시 원금을 다 날리는 악몽은, 현실적으로 그리 발생 가능성이 높지 않으니 일단 큰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그럼 1)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그 기회 비용을 "직접 투자한 상황"에 기초하여 매기지 말고, 은행 정기예금 따위에 넣고 미미한 저수익을 올릴 경우와 대조하면 그게 정답이라는 겁니다(책에 이런 말은 없습니다만 책을 읽고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게 정리해도 되겠다는 거죠). ELS가 뜨는 근본 이유는, 종래 제도권 표준 금융상품의 메리트가 너무 줄어들었다는 그 상황에 기인합니다. 그리고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이미 선진국이라서" 더 이상 고도성장의 호시절이 다시 찾아 오기 힘든 한국에서는, 이제 다른 기대를 가질 수도 없는 겁니다.

 

ELS가 그렇게 좋은 거라면, 금융기관은 국민에게 봉사를 하기 위해 이 상품을 만든 건가? 물론 그렇지는 않죠. ELS를 찍을 때 해당 기관은 일단 가격이 크게 오를 것이라는 전망 하에 설계를 합니다. 투자한 고객에게는 일부만 떼어줘도 자기들에게 남는 게 있을 만큼요. 발행기관이 진짜 노리는 건, 기초자산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졌을 때, 이 위험을 투자자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그  헷징의 이익을 보기 위함이죠. 저자도 책 내내 강조하고 있지만, 국내 사정이 열악하다 보니 머리를 짜내고 짜낸 결과가 이 ELS의 발달입니다. 기본적으로 기관의 헷징이 주된 동기이며, 이런 기법은 이후 중국에 수출해도 될 만큼이라는 게 저자의 평가입니다.

 

물론 부작용도 있습니다. 첫째 코스피가 변동성이 떨어지고 "박스피"라는 오명을 쓰는 건, 상승요인이 좀 생길라치면 이 ELS로 자금이 흘러들어가니 추가탄력을 못 받는다는 거죠. 반대로, 하락의 국면에서도 ELS에서 빠진 자금이 유입되니, 시장에 불안요인이 있어도 제때 제대로 반영이 안 된다는 겁니다(저자는 이 위험을 "안 좋을 때 집중적으로 펀치를 맞고 바로 쓰러질 수 있다. 평소에 조금씩 맞아두는 것만도 못함"이라고 아주 적절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자본시장의 체질 건전화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게 ELS"라는 거창한 언사도 등장하는 거겠구요.

 

ELS에 대한 오해나 유언비어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오해도 어느 정도 이 상품의 구조에 대해 알아야 할 수 있긴 하겠습니다만... 오르지도 못하고 적당히만 내린 상태에서 기준가격(이걸 knock-in이라고 합니다. 이 "낙-인"이하로 떨어지면 원금 일부 혹은 전부를 날리는 거죠) 위에서 알짱알짱대면(확 떨어지든지 하지는 않고), 기관은 고의로 매도함으로써 가격 속락을 유발, 결국 투자자가 원금을 잃게 조작한다는 겁니다(그래야 기관이 이익). 이게 경제학 이론에서 말하는 "모럴 해저드"의 아주 전형적 예입니다. 모럴 해저드의 속성상 이를 방지할 방법은 "일일이 캐고 적발"하는 수동식 노가다 말고는 없죠. 이러니 대중의 오해에도 일단 어느 정도 타당성과 근거는 있는 셈입니다. 배임의 유인은 충분합니다.  다만 안 저자는, 한국의 현실(금융당국의 감시나 일반 소비자의 회의 어린 주시 등)상 기관이 ELS에서 조작을 할 여지나 조건이 잘 생성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책 서두에 소개된 어느 기관 솜씨의 홍보 문구 "성적이 85점 이하로 떨어지면 용돈을 줄이고... " 어쩌구 비유는 진짜 엉터리 같은 소리죠. 발행기관과 고객은 다소 이해상충의 여지가 있습니다(소위 에이전트 이슈). 반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면, 아이가 시험 잘치는 게 어디 남 좋으라고 시간 내어 고생하는 거겠습니까? 일반의 이해를 돕기는커녕 정반대로 왜곡하는 셈이죠. 안 저자는 점잖게 돌려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사례는 해당 직종 종사자조차 ELS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책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세계 정세는 이런 투자전문가에게 들어야, 어떤 어설픈 이념상 왜곡이나 현실에 맞지도 않는 인문 담론의 엉터리 개입을 피하고 거를 수 있습니다. ELS에 관심 없는 분도, 이 책에서 국제 원자재나 소재 가격의 전망을 담은 파트만이라도 한번 읽어 보십시오. 왜 이렇게 유가가 곤두박질치는지, 사우디 등 중동국가와 미국 사이는 왜 긴장이 높아지면서도 바로 파탄에 이르지 않는지, 속이 시원할 만큼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화폐와 실물, 또는 금, 은 따위와의 상관 관계 역시, 간단한 몇 마디로 그 본질을 꿰뚫어 주고 있습니다. 역사 공부하면서 금본위제 부분이 잘 이해가 안 되면, 역사책 몇 권 몇 챕터가 구구절절하게 빙빙 돌려 늘어놓는 설명보다, 이 책 불과 몇 문장이 더 칼날같이 맥을 잘 짚어 주고 있으니 참고할 일입니다. "보험은 은행에서 가입하고, 그보다 더 나은 건 인터넷이다" 등 당연한 상식인데도 일반인이 아직도 낯설어하는 팁을, 근본원리에 대한 명쾌한 해설로 해결하는 것도 이 저자만의 장기입니다. 버릴 게 없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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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메이드
아이린 크로닌 지음, 김성희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책 소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아일린 크로닌은 작품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 50대 초반의 여성  현직 작가입니다. 그러나 전 미국에 그녀의 이름을 알린 건 바로 이 자전적 에세이, <머메이드>입니다. 한 다리가 불구인 채 태어났고, 다른 한 다리는 유아기 침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부러졌습니다. 손가락 역시 온전치 못한 합지증을 앓고 있었는데, 이는 의사의 조치로 간신히 바른 모양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는 임산부가 회임기간 중 "탈리도마이드"란 약품을 복용했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증상으로, 1960년대 초 기형아의 대거 출산으로 엄청난 사회 문제가 발생한 적도 있습니다. 다만 아일린의 어머니 조이 크로닌(조이 팽어)은 이 사실(자신이 해당 약품을 섭취)을 부정하는데, 책을 통해서는 분명하게 진위가 드러나진 않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인지부조화를 보이는 것일 수 있고, 조이 크로닌 여사는 여러 이유로 중년에 조울증 증상이 심해져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으니 진술을 다 믿을 건 못 되는 형편이기도 합니다. 여튼 "태어나고 보니 내 몸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달랐다"는 충격적 깨달음은, 어린 생명이 건강하고 행복한 성장을 이루는 데에 얼마나 큰 방해가 되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아일린 크로닌은 이 책에서 10대 초반~ 대학생 시절까지의 청춘기를 회상, 토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 어느어느 시기에 무슨 사건이 있었다 정도는, 작가나 특별한 정신적 능력이 없더라도 대개는 기억하고 삽니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그런 이벤트, 사건, 추억, 악몽 속에 깃든 자신의 "그 당시 느낌"을, 생생하고 창의적인 언어로 적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내가 중학생 때 학업 최우수상을 탔다, 친구와 대판 싸웠다, 선생님께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같은 건, 언제나 느낌과 함께 기억이 되기 마련이죠.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 동생, 언니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반응이나 소통에 무슨 감정이 느껴졌다, 혹은 12살경 친구들과 동네에서 무슨 놀이를 했고 그때의 느낌이 어떠했다 같은 건, 당시 본인이 적은 "그림일기" 따위를 찾아보지 않고선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보통일 겁니다. 사건은 기억해도, 그에 접착된 "당시의 느낌"은 웬만해서는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이 책은 사전 정보 없이 읽어나갈 때, 다리가 불구이지만 "현재" 그 역경을 딛고 발랄하게, 다른 "정상인"처럼 살아가는 어린 아가씨의 재기 넘치는 미셀러니처럼 착각될 수 있습니다. 물론 엄마가 1960년대에 초에 자신을 낳았다든가, 신시내티 레즈의 조 넉스홀(책에는 "눅스홀"로 적혀 있더군요)이 활약했다든가 하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저자분이 지금은 나이를 꽤 드셨겠구나 하는 추측은 곧 할 수 있습니다.

 

내러티브는 정말 10대 소녀의 조잘거림처럼, 제법 두꺼운 책 분량 내내 경쾌하게 울려 퍼집니다.  이것은 화자가 생의 어느 순간에도, 삶에 대한 낙관과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확증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체 장애를 생각하면 즐거운 기분도 한순간에 꺼질 수 있을 텐데(어린 소녀임을 감안하면 더욱), 아일린은 때론 자신의 곤경을 농담의 소재로도 삼고, 마치 어른들이 집 밖에 나왔다가 지갑을 잃은 것처럼 일시적인 난처함을 현실로 인정한 후 대책을 찾는 태연함과 침착함을 가지듯, 자신의 장애에 대해 대체로 "쿨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어린 여성이 이 정도 의연함을 보이는 건 실로 대단한 일입니다. 이런 사정은, "어려서부터 죽 익숙해 왔다"는 사정으로 정서적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변수가 결코 아니겠기 때문이죠.

 

아일린 크로닌은 범상치 않은 가문에서 나고 자란 여성입니다. "나의 출생, 나의 존재는 한때 우리 집안에서 입에 올리는 게 금기였다"는 문장에서 다소는 짐작할 수 있듯, 그녀의 가정은 제법 부(富)와 명성을 지역에서 누리는 편이었습니다. 그녀의 조부가 자수성가로 큰 재산을 일군 인사이고, 아버지 역시 괜찮은 수완을 발휘하여 명사로서 행세하는 쪽입니다. 한편 어머니 조이 팽어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집 출신이며, 친부(즉 아일린의 외할아버지)가 알콜 중독과 도박 등의 습벽으로 가출(조이 팽어의 회고에 따르면 "축출")한, 결손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녀(조이 팽어)의 성격이 정상이 아닌 건 유전적 요소보다 이같은 후천적 환경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책에는 아일린 크로닌의 부모가 "독일계, 아일랜드계"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크로닌(아일랜드계)+팽어(독일계)"라는 건지, 아니면 양친 모두 "저먼 아이리쉬"라는 건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책 전체 맥락으로 봐서는 후자인 것 같은데요.

 

조이 팽어 여사가 딸 아일린 앞에서 "너의 외할머니는 교황이 인정한 성자(성녀)란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저 주관적으로 그렇게 평가한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아이다 부르헬 팽어라는 이름은 가톨릭 성인 명단에서 제가 못 찾았기 때문에, 이는 그저 본인의 주장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대단히 아름답기는 하나(솜털 하나도 내가 본받아야 할 혈통의 증거였다, 라는 말까지 딸 입에서 나옵니다), 성격이 정상이 안 되었던 어머니 때문에, 이 대가족은 많은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물론 조울증을 빼면 조이는 착하고 다정하며 순진한 편에 속하는 여성이었습니다. 참고로 아일린의 양친은 아일린 외에도 슬하에 열 명이 넘는 자녀를 둘 정도로 금슬이 좋은 사이로 나옵니다. 1960년대라고는 하나 미국에서 이는 대단히 드문 풍경입니다.

 

아일린과 언니들은 나이 차가 제법 나서, 그녀가 고등학생일 때 이미 언니 브리짓은 결혼도 했습니다. 보통 같은 민족끼리 맺어지는 게 당시의 관습이었을 텐데, 브리짓은 무려(아일린의 표현입니다), 무려, 이탈리아인 남성과 결혼합니다. 책에는 "언니는 점점 다이앤 키튼을 닮아가고 있었다"라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해당 배우가 영화 <대부>에서 앵글로색슨 혈통으로 마피아 가문의 며느리가 된 케이 역을 맡은 걸 두고 꺼낸 비유입니다. 왜 하필 다이앤 키튼인지는 이런 배경 지식이 있어야 그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아일린 자신도 첫사랑을 무려 쿠바계 백인인 제임스 카브레라와 어설프게나마 시도합니다. 장애인의 육체적 욕망이 어떻게 외적으로 나타나는지는 이 책 13장의 그 소동 묘사가 잘 보여줍니다. 이런 대목이 이 책의 가장 뚜렷한 매력인 "가감없는 솔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녀의 정신적 첫사랑은 프랭크 오빠라고 볼 수 있는데, 작품 후반에 나오듯 그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고 말죠. 그녀를 "인어(머메이드)"라고 처음 언급하는 장면에서, 아일린은 "아, 그 탐 행크스가 나오는 영화에서처럼?"이라고 대꾸하는데,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대릴 해너 주연의 그 영화입니다. 1960년대 초반 생이니 그녀가 대학생 때 개봉한 영화가 거론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좀 더 나가면 바버라 부시도 이름이 나오는데, 사적인 성장 스토리만 말하는 것 같지만 이처럼 세심하게 그 시대의 특징적 코드를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또래들과 구체적인 시대를 호흡하며 열심히 살아왔다는 걸 은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출판사 책이 대부분 그렇듯 장정이 예쁘고 읽기가 참 편합니다. 역주가 많아서 아일린 크로닌 본인의 개성과 어조가 그대로 살아나는(의역이 최소화한) 체제가 돋보입니다. 의욕이 안 생기고 정신적 슬럼프다 싶을 때 읽어 보면 좋은 자극이 되겠습니다. 한 번에 읽는 것보다 하루에 한 챕터씩 마치면서, 작가가 사실 이 장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생각해 보는 것도 효과적인 독서가 될 것 같습니다. 문장 스타일은 현재 트렌드를 대표할 만큼 감각적이고 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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