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명절 때 저희 어머니께서 이 책 표지를 보시더니 좀 오래 시선을 두시더군요. 이런 경우는 일단 "표지가 이뻐서" 처음 관심을 끈다는 뜻이고, 그 다음에 의레 기대했던 반응("예쁘네."라는 명시적 표현)은 안 나왔다는 점에서 뭔가 이 표지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저도 책을 처음 받았을때 그 매끄럽게 코팅된 겉면과 잘 조화를 이루는 표지 디자인이 한눈에 확 들어왔었는데, 그림을 찬찬히 보면 마냥 예쁘기만 한 선과 색이 아닙니다(정확히 말하자면, 색이야 예쁘지만, 이질감을 자아내는 요소는 그저 "선"이죠). 이 여인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고, 전통 미인상에 비해 목이 너무 길고 얼굴형이 갸름하며, 그 복식은 차라리 대륙과 열도의 퓨전형이라 할 만합니다. 조선에서 나고 자랐으며 살아 온 처지에 웬걸 다 커서 농익은 지금은 이 조선을 이탈하고 싶다는 결기까지 살짝 비치는 모습이랄까요.
다 읽고 난 느낌은, 텍스트와 일러스트가 조화를 멋지게 이뤘다는 생각입니다. 단아한 외관(그러나 속내는 더 들여다 봐야 합니다만)에 혹해서 책을 접어든 독자들은, 막상 안을 펼쳐 보면, 격의와 삼감 없는 말투로 툭툭 던지는, MT 자리에서 세상 물정에 은근 닳은 선배가 담배 한 대 꼬나 물고 "니들 그거 아냐?"로 시작하는, 그러나 배려와 진정은 듬뿍 담아 들려 주는 "썰"을 접하는 느낌에 좀 당혹할 수 있습니다. "고전에 대한 해설서인데 왜...?" 그러나 다루는 주제가 옛것이라 해서, 다루는 스타일과 다룬 후의 결론까지 옛투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 유광수 교수님은 서문에서 "우리는 고전이 천편일률적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막상 고전들을 읽어 보면, 각자 다 다른 매력과 개성을 뿜고 있으며, 전달하려는 교훈-그런 게 있다면- 도 각양각색이다. 이런데도 천편일률이란 예단을 깔아 놓았기 때문에, 개별 작품의 사정과는 무관하게 천편일률적인 교훈, 의의를 억지로 도출할 수밖에 없었고, 의도와는 무관하게 이는 고전의 왜곡으로 이어져 왔다."는 취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장화 홍련 설화, 지귀 설화, 운영전, 이생규장전 등을 보면, 그게 충효인의예지신 같은 유교적 덕목을 일률적으로 이식하려는 의도로 보기 어렵습니다. 사실 설화나 문학의 창작 의도가 그것이면, 교훈 하나당 이야기 하나씩만 대표로 존재하면 됩니다.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표현욕의 산물이라, 사람의 표현욕과 내용이 천차만별이듯 그 결과물 역시 다양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천편일률적 문학"이란 그래서 애초에 형용 모순인지도 모릅
이 책은 과연, "전혀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않았던" 고전의 본 모습을, 아니면 최소한 그동안 우리가 주시하지 않았던 그 이면, 속모습을 자세히 살펴 보도록 도와 주는 책입니다. 워낙 "이 이야기들은 천편일률적이니 그리 알도록" 같은 세뇌를 그야말로 천편일률적으로 듣고 자라온 우리들이라서, 한국 설화만 들었다 하면 세세한 디테일은 전부 생략하고, 엄마 무릎맡에서 들어온 뼈대, 그리고 이후 학교에서 주입받아온 "레디메이드" 교훈만 부호화하여 머리 속에 넣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간혹 "잠깐, 뭔가 이 대목은 좀 이상한걸?" 같은 의문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도, 그런 표준적이지 못한 반응은 꾹꾹 억눌러 왔죠. 이 책은 그런 우리들의 지난 의문을, 기억 속에서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몽실몽실 피워가며, "너의 궁금증은 다 이유있고 건설적이었다."는 편안한 진실을 확인시켜 주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는 많은, 실로 많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유 교수님이 이야기 한 건 당 자신의 소회를 하나하나 참 자세히 풀어주시는 편인데, 그렇게 두껍지만도 않은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여전히 "이야기가 참 많았다"고 느껴지는 건, 우리가 몰랐던 고전이 이렇게도 많았던가 하는 새삼스런 각성 때문인 듯합니다. 내용은 갈등과 폐습의 통쾌한 해소와 구제로 끝나는 게 있는가 하면, 그저 듣기만 해도 마음이 답답해져 오는 한심한 사연도 있습니다. 굳이 세어 보자면, "사랑"을 테마로 한 이 책 중 이야기 자체로 개운하고 맑은 전개, 귀결을 보이는 이야기는 별로 없는 듯합니다. 답답한 사연에, 오늘날의 관점으론 이해할 수 없는 애정관과 인습이 배경과 테마를 가득 채웁니다.
그러나 유 교수님은 배경에서는 전근대 요소를 속속 짚어내어 이를 통렬히 비판하고, 다만 극복해야 할 낡은 남녀관이란 배경과, 이야기가 담고 있는 본체적 교훈은 분명히 분간해야 한다는 점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이 고전들은 천편일률적인 남존여비 관념이나 유교적 가치관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어이없는 주인공들의 행태(시대의 인습이 개개인의 의식을 짓눌러 왜곡이 일어난 결과)를 비판함으로써, 남녀 사이의 자연스러운 사랑이라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가치와 목적을 되레 독자에게 선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이야기에서는, "사랑은 이처럼이나 감미로운 것이니 당장 그 시원찮은 윤리란 가식을 벗어 던져버려!"를 (당연히)권하고, 그렇지 않고 아마 당대인이 읽어도 마음이 아득히 어두워지는, 주로 못되고 타락한 남자에게 농락당한 여성이 파멸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통해서는, "우리(고대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자연스러운 인성을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풍자와 역설을 통해 깨우쳐 주고 있다는 거죠.
이덕무 의 책에서 뽑은 <은애전>은, 마치 조선판 테스를 연상시키는 비운의 여성이 주인공입니다. 여기서 악역은 노파입니다만, 이런 괴물 같은 인간형을 빚어낸 건 숨막힐 듯 여성을 억압한 남성 우위의 사회구조였습니다. 억압의 위계질서는 여성을 여성의 적으로 만들고, 여성성을 거의 상실한 노파에게 그 최상위 서열로부터의 착취와 굴종을 가하는 대리역을 맡기는 셈인데, 전근대적 체제에서 홀로 깨어 있는 의식을 지닌 이들(어쩔 수 없이 남성이라야 합니다)이 선의, 이성, 지혜로 이를 어떻게 해결하는지가 독자의 입장에서 관건입니다.

여성의 본성에 대해 육욕과 천한 본능으로 가득차 있다고 본 건, 심지어 본능적으로 신뢰와 애정을 보낼 수밖에 없는 부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저자의 지적은 으레 "바람이 나 종적을 감추었겠거니"라고 체념하며 가려진 무서운 진상에 대해선 꿈조차 꾸지 못했던 그 밀양 부사(저는 현감으로 알고 있었는데, 밀양은 조선 시대 대부분을 "밀양부"인 채로 지냈더군요- 너무 고관이라 일개 통인에 대한 의심까지는 채 갖지 못했나 봅니다)에 대해서도, 저자는 시원시원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당연 아버지에게 먼저 호소하는 게 딸의 본능인데, 왜 아랑은 부임해 오는 지방관마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소청을 넣으면서도, 그 부친에게의 직소만은 시도하지 않을 걸까?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어야 합니다. 저자는 나름대로 타당한 해석 하나를 꺼내고 있습니다만, 기왕 봉인의 문이 열린 이상 우리 독자들도 자기식의 대답 하나 정도는 이제 구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천편일률이 아닌 걸로 드러난 이상, 설화에 대한 해석에 정답이 하나뿐일 순 없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주제가 남녀간 애정이라고 하지만, 그를 담은 설화를 바르게 감상하기 위해선 시대 배경에 대한 이해는 별개로 필수적입니다. 위인에 대한 존경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우리는 "무려 당나라에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최치원을 대단한 인재, 일등 신랑감, 엄친아로 보지만, 당나라 여인들의 입장에선 그 정도는 아니고 "그저 괜찮은 남자" 정도였으리라고, 저자는 아주 쿨한, 그리고 탁월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전제가 아니면. 감히(감히!), 최치원을 주인공으로 삼아 지어진 <쌍녀분>에 대해, "마스터베이션 문학"이라는 대담하고 발칙한 규정은 시도되기 어려웠을 텝니다. 사실 이런 마스터베이션적 의도는, <구운몽> 등 정치와 문화의 주변부에서 생기를 잃어가고 만성적 좌절에 시달렸던 조선의 선비들에게 거의 공통된 기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스터베이션 모티브는 그래서 그저 피식하고 웃어넘길 게 아닙니다. 남성이 제 기능을 못하고 주저앉아야 했던 반도 조공국의 숙명적 애환을 투영하고 있으며, 이 팩터는 다시 연쇄적으로 여성 억압으로 넘어가는 게 필연이니 말입니다.
며칠 전 간통죄가 폐지되어 아직도 사회적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 책 역시 애정사 중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도) 중요 이슈일 "간통"에 대해 큰 비중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루어지는 이야기들 중 어떤 것은 1) 간통이라기보다는(사랑이긴커녕, 간통 축에도 끼지 못할) 추잡한 매춘에 가깝고, 2) 반대로 그저 간통에 그치지 않고, 애정의 정당성과 자존을 지키기 위해 대단히 능동적으로 항거하는 여인의 모습을 다룬 것도 있다는 점입니다(대조적으로, 상대 남성은 말할 수 없이 치사하고 비루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다만 여기서 저는, 그토록 현명한 여성이었다면 왜 처음부터, 상대 남성의 추악하고 비정한 면모를 꿰뚫어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는 제 생각에, 자신의 출신 컴플렉스 때문에 어떤 프레임에 갇혀 버려, 마치 로렌츠 효과처럼 초기 각인으로 이상적 남성 하나를 작위적으로 만들고, 그 남성의 객관적 실체에 무관하게 여성 본인의 희구를 다 쏟아 부은 데서 파생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이 정도라면, 마치 종교적 순교와 크게 다를 바도 없습니다. 여튼 그녀로서는 목숨을 잃어도 후회가 남지 않았겠으나, 현대를 사는 여성이라면 보다 냉정한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지 생각해 봅니다. 저항은 좋으나, 그 전단계의 인식과 판단은 그리 권장할 만한 게 못되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다시 표지를 보십시오, 저 뾰로퉁하게 내민 입은 여인 자신의 불만을 표시함과 더불어, 남과 여의 통성에 대한 불신을 상징한다고 이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남은 옵션은, 사랑 말고는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존재가 사멸하는 그 순간까지, 사랑하고 또 사랑할 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