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드롭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작년에 개봉한 동명 영화의 원작 소설입니다. 물론 홍보대로 소설의 작가는 데니스 루헤인이고, 그의 평소 컬러대로 잔인하고 현실감 나는 묘사에다 보스턴 슬럼가의 약육강식 살풍경이 잘도 재현되어 있어, 이런 소재에 거부감 있는 독자를 제외한다면, 소설의 흡인력은 상당한 편이라 여겨집니다. 말미에 적당한 반전까지 있으니 끝까지 읽어나간 이들에겐 합당한 지적 보상도 부족하지 않게 주어지고요.

영화에서는 밥, 나디아 두 주인공 외에  커즌 마브의 비중이 큰 편이었는데, 소설을 보니 에릭 디즈가 마브보다 더 짙은 인상을 남기는 구조더군요. 밥은 우리가 잘 아는, 특히 한국인들이 좋아라하는 <인셉션>에서 강렬한 연기를 펼친 톰 하디가 맡았습니다. 만약 영화를 안 보고 이 원작을 펼친 독자라면, 밥에 대해 다소 흐릿한(물론 결말을 접하고 나선 전혀 그런 채로 남을 수가 없겠으나) 이미지만 중반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썩고 칙칙한 뒷골목에서 평생 살을 부비다 생을 마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교도소 복역 경력까지 있는 건달치고는, 그 매너가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고분고분한 것 아닌가, 뭐 이런 느낌이 소설 종반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나디아.. 작중 에릭이 평한 대로, 보스턴에서 흔한 이름은 아닐 것 같습니다. 쿨한 듯 사려 깊은 듯하면서도 한순간의 광기에 자신을 맡겨버리는 무책임함, 역시 사악한 환경적 굴레로부터 몸을 빼겠다는 결의가 전혀 보이지 않는, 될대로 되라 식의 생활 태도.... 이런 그녀에게 밥은 숙녀에게 베풀 수 있는 최상의 예의를 (자기 딴엔) 갖추려 합니다. 동기는... 쉽게 말하자면 "마음을 동하게 하는 이성"을 보아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뭔가 먼 과거로부터 그를 사로잡고 있는 부채 의식, 강박이 슬쩍 끼어들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나디아 역은 요 몇 년 간 이런저런 영화에 주연 혹은 주연급 조연으로 잘 팔리는 북구의 여인 누미 라파스가 맡았습니다. 둘 다 각자의 역에 근사하게 어울립니다.

에릭 디즈는 스스로 인정했듯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닌, 살인과 강도, 갈취로 생계를 잇고 도박으로 한탕을 노리는 구제불능의 악당입니다. 이 자가 이 더럽고 부패한 뒷골목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가뜩이나 불안정하고 한순간에 피비린내가 온 도시의 공기를 훅 감쌀 것 같은 분위기를 더욱 질 나쁜 단계로 몰아간다는 뜻입니다.

이 슬럼은 현재 체첸계 갱스터가 주도권을 장악한 상태입니다. 소설 속에 그런 언급은 전혀 없지만, 몇 년 전 벌어졌던 보스턴 마라톤 대회 테러 사건의 발생 경위와도 간접으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체첸 인들이 기질 사납고 잔혹한 폭력을 불사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소설은(그리고 영화도) 이 점을 유감 없이 생생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 읽은 분들은 눈치 챘겠지만, 다분히 아이러니한 결말 때문에 이 스토리는 장편보다는 단편에 더 어울리는 플롯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헤인은 본디 <애니멀 레스큐>란 제목으로 단편을 발표했었고, 이후 보스턴 슬럼의 음울한 색조를 배경으로 강화하여 제목도 바꾸고 확대 개작한 겁니다. 이 장편 1장 소제목이 "강아지 구조"인 것도 그런 내력이 있어서구요. "드롭"의 의미는 여럿이 있겠으나 일단 이 소설에선 "드롭 바"가 첫째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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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총평

, 개선점

- p259  밑에서 다섯째 줄의 10할

원문에는 10%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1할 이 바릅니다.

내용상으로도, 이 이자율이 로마 상류층에게 적용되는 기준이라고 뒤에서 부연하고 있습니다. 10할 이면 100%인데, 그런 가혹한 조건을 상류층에게 은행업자 따위가 적용할 수는 없죠. 제가 이상해서 원서를 뒤져 봤습니다.

 

- 이 1권에는 서한문 직접 인용이 자주 나옵니다. 단조로운 구성을 피하고, 우아한 만연투의 대사를 등장인물의 입에서 직접 나오게 하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교유서가의 이번 판은, 서간문 내용에 대해 한 줄 들여쓰기 체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어가면, 들여쓰기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됩니다. 편지가 다시 서사로 전환되기 전에는요.

 

예전 한국어 번역본(대략 20년 전에 출간됨)에서는, 폰트를 아예 다르게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도 CTS 제작 시스템이 도입되었던 터라 가능했습니다.

 

-p348 맨 마지막 줄 울릭세스

저는 이 용어는  오디세우스로 바꾸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인들은 물론 울릭세스라고 불렀고, 아프로디테가 아닌 베누스, 그리고 제우스가 아닌 유피테르로 부르듯, 로마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 라틴어식 표기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러나 신격(deity)은 치환 과정을 거치고, 인명이나 캐릭터는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즉, 둘은 경우가 다릅니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이타카) 사람(물론 가공의 캐릭터이지만) 사람이므로, 한국 독자에게 친숙한 오디세우스로 적는 게 좋다는 게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

 

-  p 176 하단에 히페르보레오이 는 고유명사라기보다, 우리식의 서방 정토(靜土)처럼 대유적 보편 명사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원어 그대로를 노출하고 그치는 건 좀 읽기에 껄끄럽습니다.

 

보밀카르 (아니면 전지적 화자)가 구태여 이 말을 쓴 의도가 뭔지, 역주를 통해 설명이 좀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 의도는, 이 무지한 자에게 마우레타니아에서 왔든 아니면 저승에서 왔다고 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정도를 포함하고 있거든요. 참고로, 요즘 한국인이 많이 진출해 있는 모리타니가 저 고대의 마우레타니아와 거의 일치한다는 점도 독자가 알면 더 흥미로울 겁니다.

 

- p285: 10 에서 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란 인명.

여기서 딱히 제가 이의를 제기한다기보다,

Gnaeus는 고전 라틴어 발음상 그나이우스에 가깝습니다.

어두의 g가 묵음이 되지 않죠.

 

나이우스는 영어식 발음이겠는데, 엄밀히 말하면 나이어스이겠으므로, 사실 저 표기는 이도저도 아닌 절충형에 불과합니다.

 

여기서는 그냥 넘어갈 수 있어도, 나중에 3부 <행운의 총아들>에선 폼페이우스가 본격 등장할 텐데, 그때도 나이우스라고 하실까요? 한국인들에게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꽤 익은 표기인데요.

 

- p38 맨 위를 보십시오.

일 년이 지나면 왜 나이를 십 년씩 먹을까요?

노년에 접어들면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주관적으로 느끼기 때문에, 마흔 일곱 이후에는 1년이 지났나 했는데 어언 10년이 흘렀더군,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 듣기에는 문맥상 보조 표현이 그 주위에 없어 일부 독자들이 혼란스러워 할 수 있습니다.

 

원문도 Next Year이라고만 되어 있어, 이게 오역은 아닙니다.

다만,

그 윗 줄 진부한, 원서에는 the same old라고 나옵니다.

이걸 진부한이 아니라, 좀 다르게 번역하면, 왜 1년이 어느새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만 10년이 되어버리는지, 독자들이 좀 편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똥돼지는 원어가 piggle-wiggle인데, 이 말은 작가가 창조해 낸 표현으로, 뒹굴거리는 돼지란 정도의 의미겠습니다. 똥돼지,메텔루스가 돼지 우리의 똥더미에서 뒹굴었으니 어느 정도는 원어와 통하겠지만, 그래도 좀 유치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 구판도 똥돼지라고 해서 거슬렸는데, 이 교유서가판도 같은 태도라서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 교유서가 신판만의 멋진 점

-아무래도 더 깔끔하고 윤문이 잘 되어 가독성이 높습니다. 다만, 이는 구판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다만……

저는 책 앞부분 등장인물소개코너가 활자를 좀 키우고 독자들(특히 로마식의 긴 이름에 안 익숙한 이들) 이 수시로 찾아 볼 마음이 들게끔 편집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저한테 구판이 남아 있지 않아 장담을 드릴 수는 없어도,

제 기억으로는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더 적었고,

가문 구별도 한 눈에 들어오게 하는 처리를 했던 것 같아요.

 

- 이건 꼭 지적하고 싶었는데, 예를 들어 메트로비오스 같은 이름은 이 자가 그리스출신이니, -오스라는 어미를 취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거죠.

원서에는 분명 ius 거든요. 이건 그리스 인명 표기를 영어식 고유 맞춤법(일단 라티나이즈한 후 다시 영어식변형)으로 지키는 거라 그들도 어쩔 수 없는 거고, 다만 우리는 구애 받을 전통이 없기에, 얼마든지 그리스식으로 다시 고쳐 쓸 수 있죠.

구판에는 메트로비우스였습니다. 구판이 잘못이고, 교유서가판은 섬세하게 영어 원문의 오류(까지는 아니고 한계)를 바로잡은 거라 정말 칭찬해 드리고 싶습니다!

 

- 원작 자체의 장점 (제가 생각하는)

문장력과 내용적 깊이가 탁월합니다.

보밀카르가 살인 청부를 시도하며, 살인할 수 있겠는가?라고 다짐을 주자, 장님 이발사에게 윙크든 고갯짓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되묻죠.

염려 놓으세요, 히힛. 이런 상투적인 처리보다, 얼마나 캐릭터의 개성이 잘 전달되는 표현인지 모릅니다, 끝에 가서 수부루 사람들은 허세를 부리지 않습니다. 라고 덧붙여 주면서, 약속한 바는 확실히 이행한다능 다짐까지 두는 장면.

나중에 어린 카이사르의  어머니가 수부루에서 임대업 하는 이야기도 나오죠. 체면 따지지 말고 재테크(!)를 해야 아들을 출세시킬 수 있다고 다짐하면서요.


 

 

 

이 수부루는 현대 미국의 브루클린 같은 빈민가를 상징합니다. 돈만 주면 빵을 사듯 사람을 살 (매수할) 수 있는 나라 역시, 현대 미국을 비꼬는 표현이고, 1년에 한 번 두 사람이 뽑히는 집정관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 표현하는 것도, 겉으로 내세워지는 대표자가 누구든 간에, 숨어 있는 실세, 구조는 불변이라는 의미에서 미국을 풍자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p69 바윗돌처럼 차갑고 파르티아의 태수처럼 교묘한

이런 표현은 너무나 멋진, 매컬로 여사의 문장에서만 볼 수 있는

절묘한 수사입니다.

대분열 시대 로마 황제가 어느 편지에서 구사한

고트 족의 눈처럼 차가운 네 마음으로는.과 맞먹는, 로마 풍의 레토릭의 멋이 뭔지 안 매컬로 여사만의 장기입니다.

 

老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지근거리에서 보고 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고 한 건, 신약성서에서 사도 바울(Paul the apostle)의 고사를 연상케 합니다. 비록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이 예수의 시대보다 한 세기도 넘게 앞서지만.

 

(3) 매력 있는 캐릭터와 그 이유

1권에서는 아직 가이우스 마리우스 (2부 넘어가면 그는 노환과 정치적 불운 때문에 광인이 되어 버립니다) 가 매력 있습니다.

타고난 천재이지만 현실적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선을 넘지 않는 자제력을 보이고. 훌륭한 상대방이라면 그 참뜻을 바로 알아 주는 안목과 선의를 지닌, 나무랄 데 없는 인격자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 가문의 가장(家長) 老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마치 동양이나 조선의 유서 깊은 가문의 양반처럼, 금도와 예절, 체면과 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결단할 때 결단할 줄 아는 모습.

그 매너라든가, 둘째 딸을 키울 때 엄격한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네 양반 가문의 절도와 미덕이 그대로 연상됩니다.

 

 

(4)

가장 몰입도 높은 부분은

술라가 연쇄 살인을 저지르며 자신의 알리바이, 무혐의를 완벽하게 조작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건 본격 추리 장르에 써먹어도 될 만큼, 작가가 공을 들여 구성한 솜씨입니다.


사실 전 이 소설에 완전히 빠진 마니아라서, 저거뿐 아니라 모든 장면에 다 몰입했다고 해도 됩니다.

 

(5)

위에 다 적었습니다.

한국 독자들은 딱 시오노 나나미 수준에 맞추어 로마를 정리하고 말았기 때문에, 좀 복합적인 내용이 나온다 싶으면 이 정도 수준까지는 내게 필요 없어.라고 외면할 지도 모릅니다. 수준 높은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지못한 시황에 비추어 이 책의 강점이 바로 약점인 셈입니다.

 

그래서 제가, 소설 주인공 하나하나가 (일단 정만 붙이기 시작하면) 바로 몰입할 수 있는, 훨씬 깊이 있는 피조물이란 걸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등장 인물 소개란을  더 개선해야 한다고 앞에 적은 겁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위대한 작품이, 20년 동안 한국에서는 외면 받아 왔다는 게 진정 개탄스럽고요.

 

사실 한국인에게 로마는 인기가 없습니다. 1959년 헐리웃 영화 <벤허>, 그리고 동인녀, 부녀자 할머니의 어이없는 "대하 일기장"이 일으킨 1990년대의 붐 말고는, 한국인에겐 로마를 가까이할 매체 자체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미드 <로마>, <스파르타쿠스>도 한국에선 시청률이 높지 않았죠.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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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1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빙혈님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읽으며 느낀 점들인데 10할과 울릭세스는 몰랐네요. 모리타니와 마우레타니아의 연관성도 덕분에 알게되었어요, 감사합니다. 10년 후, 이 부분은 여러번 읽고 영문으로 고쳐 이해했고요 똥돼지도 처음엔 마리우스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젊은 시절을 생각하니 적당히 상스럽고 좋더라고요. 아마 팬심으로 극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가이드북에 참고되지 않을까 합니다.. 로마 공부중인데 참 매력적이고 체제 자체의 완성도가 꽤 높더군요.. 매컬로 여사의 작품을 알게되어 기쁩니다. 빙혈님 글도 로마사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집니다. 잘 읽고 갑니다

빙혈 2015-07-10 14:38   좋아요 0 | URL
에이바님 안녕하세요^^ 로마사와 이 소설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신, 내공 깊으신 분을 만나게 되어 제가 기쁩니다. ㅎㅎ 말씀 하신 대로, 팬심으로 극복해야 했던 여러 부분도 있었지만, 이런 책이 다시 산뜻한 번역과 고증을 거쳐 한국어판으로 나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기쁠 뿐입니다.

여러 번 읽고 영문으로 고쳐 이해하셨다는 말씀에서, 진지한 독자로서의 고충과 애로가 확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 텍스트 외적 장애에 시달려야 한다는 게, 당분간은 극복이 어려운 현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출간되는 가이드북은 이런 모든 우려를 일거에 날릴 수 있는 예쁜 동반자로 우리에게 다가와 줬으면 좋겠습니다!

덧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답방 드릴게요^^

비로자나 2015-07-1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정오표로군요. 감사합니다.

이하 생략~ 이하에 생략된 부분이 혹시나 더 있으면 보고 싶군요 ^^

namudle3 2015-08-15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어떻게 읽는 것인지 꼼꼼하게 읽고 책에 표시해두면서 다시 한번 새겨봤습니다.
로마에 대한 공부도 없이 책을 읽고 있는데 저자의 식견과 글 구성력에 매 장마다 감탄하며 읽는 중이랍니다.
고맙습니다.
다음 것도 기대하게 됩니다.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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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중 등장인물 미란다의 한 대사에서 따온 이 유명한 제목은, 요정계에서 더 근사하고 더 도덕적으로 완결된 세상을 접해 왔을 그녀 입장에서 내뱉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긍정적인 감정 표시입니다. new할지언정, 뭐가 brave하다는 걸까요? 이 소담출판사 판의 번역자 안정효 선생은, 저 영단어 brave의 뜻에 대해, 각주로 부연하고도 있습니다만, 아무리 비천하고 한심한 모럴을 지녔으며 질서 전반을 위협하는 "불안정성" 요소가 상주하고 있어도, 감정을 지닌 필멸의 존재들이 아둥바둥하면서 엮어가는 이 인간 세상만큼, 위대하고 멋진 세상도 다시 없다는 취지의, 더 우월한 존재로부터 나온 찬탄이기에, 이 대사가 그토록 명대사로 평가받는 것이겠습니다.

마법사 프로스페로의 착하고 아름다운 딸 미란다는 그 위대한 희극 속에서, 자신의 눈 앞에 희망적인 양상으로 가득 펼쳐진 미래를 두고 저 감탄사를 터뜨리지만, 20세기에 다다라 물질 문명 발달의 불길한 양상만을 지켜 보고 이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창조해 낸 A. 헉슬리는, "우리가 목도하는 이 현상이야말로 진정 멋진 신세계로구나!" "미란다 눈에 그토록 아름답게 비친 누리를 어쩌다가 우리들이 이토록 망쳐 놓았던가!" 같은 소회로부터 저런 작명을 했을 법합니다.

작중 "야만인 선생"은 이런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여, 두 번에 걸쳐 멋진 신세계란 표현을 토해 놓습니다. 한 번은 야만인 유보 구역(reservation)으로부터 인간 세상에 막 귀환했을 때, 다른 한 번은 이 문명 세상에서 이방인인 자신이나 원 주인인 소위 "현대인"들에게나 아무 희망이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고 비탄에 젖을 때입니다.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원작 <템페스트>에서도 혹여 우리 미란다에게, 아버지의 본향 인간계(그녀 자신은 한 번도 접하지 못한)로 귀환한 후, 어떤 총체적이고 불가역적인 환멸, 각성이 이후 그녀를 덮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멋진 신세계>는 "다시 찾아 본 템페스트"라고 부를 수도 있겠네요.

이 안정효 선생 번역본은, 기존 텍스트들과 많은 차별점을 보입니다. 원작부터 사실 아주 가독성 좋게 독자를 흡입하는 구조는 아닙니다. 이 작품은 비범한 두뇌와 초인적 통찰력을 지녔던 최고 지성인의 음울한 예언적 계시가 문학의 몸을 빌린 것이니만치, (이미 당대에도 유행했던) 소프트 SF장르의 접근용이성을 현대 독자들이 기대해선 곤란하겠습니다. 내용이 워낙 기발하고 소름끼치는 영감을 제시해서, 준비 안 된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는 것 뿐이지, 본래부터가 술술 읽히는 포맷은 전혀 아닙니다.

안정효 선생은 최대한 많은 어휘와 표현들을 두고, 우리 말로 읽어서 의미가 바로 와닿게 텍스트상 세심한 손질을 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타 번역본에서 다른 분이 그저 '"오르지, 포지"라고 원문을 노출했던 걸, 이 책에서는 "흥겹고도 흥겹구나"라고 고쳐 놓고 있습니다. "새비지"를 "야만인"이라고 일일이 의역하는 점도 이런 태도와 궤를 같이합니다. 이는 번역가로서 그가 일관되게 유지해 온 원칙의 실천이기도 하겠습니다.

소설은 "포드님", "포드 기원" 같은 지극히 냉소적인 어구에서 알 수 있듯, 효율성과 정연한 질서야말로 문명화한 인간이 추구, 향유할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 되어버린 비극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습니다. 매사에 합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인 존재지만, 불멸의 영혼보다 더 아름답고 선한 본성을 지닌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 홀딱 반한 미란다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극한의 합리성이 지배, 통제하는 세상에서 인간 고유의 장점을 모두 잃어버린 비극을 목도한 채, 절망 속에 울부짖는 "야만인 선생"을 통해 헉슬리는 셰익스피어가 시작한 희망의 노래를 이제 자신의 손을 통해 처절한 만가로  바꿔 놓겠다며 지옥 아닌 지옥을 펼쳐 놓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냉철하고 침착한 영국인에 비해, 아일랜드인이니 스페인인이니 하는 부류들은 "피 속에 알콜 함량이 높아 어리석고 감정적"이라는 식의 평가, 통념이 있었습니다. 엄격한 통제와 인위적 조절을 통해, 태어날 때부터 제 분수에 충실하여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고유 기능만 수행하게 하는 시스템은, 이처럼 시끄럽고 불안정한 사회보다 오히려 발전한 면도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최하 등급의 구성원 역시, 자신들만의 거리낌없는 쾌락의 시간이 주어져 고된 노동의 기억을 잊을 수 있으니, 비록 존엄이 뿌리채 박탈되었을망정 본인들은 전혀 인식을 못한 채 행복할 뿐 오히려 현대의 노동계급보다 나은 처지 아니겠습니까? 위도 아래도 다 만족이며, 기초적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일절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그 누리는 효용도 훨씬 높은 수준이니, "멋진 신세계"가 맞긴 합니다. 보카노프스키 그룹에 편성되어도 좋으니 당장 그리 보내달라는 이들이, 지금 우리 중에도 없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가장 흉칙하고 야만적으로 들리는 세상, 누구나 다 무부, 무모의 존재로 세상에 던져져 지극히 합리적인 시스템 아래서 부속품처럼 소모되다 세상을 마치는 모습, 괴로울 것도 없고 일견 완벽한 감각적 만족, 흠 없는 자기기만이란 컨베이어 벨트 위에 얹혀 돌아가는 인생이지만, 이게 사람 사는 양상이 결코 아님은 우리 모두가 잘 압니다. 야만인 선생은 이런 더럽고 구원 못 받을 타락한 세상에 잠시나마 몸 담고 더렵혀진 영혼를 씻어내려는 뜻에서, 중세의 편타 고행자처럼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데, 현대인들에게는 이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는 또 하나의 서커스 관람 이상이 아닙니다. 이 소설은 여러 대목에서 수위 높은 성적 묘사를 시도하고도 있는데, 그게 오늘날 일부 엔터테인먼트 문학에서 꾀하는 의도와는 아무 관계 없는, 오히려 은밀한 쾌감을 기대하는 독자를 꾸짖으려는 계산이었음을 안다면, 절로 얼굴이 붉어질 수밖에요. 이 소설을 읽고도 남 이야긴 줄로만 아는 우리들이야말로 "소마 1그램"에 취해 고귀한 존재의 본분을 망각한 "멋진 신세계"의 멍청이들에 다름 아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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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조선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78
김소연 지음 / 비룡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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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눈으로 본 20세기 초의 조선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러시아와 조선은 국토의 크기, 인종적 구성, 역사의 궤적 등 모든 면에서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도무지 나란히 선 이웃이 될 수 없는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1860년 열강과 청 제국의 분쟁을 거중조정하고 방대한 영토를 할양받은 후, 우리 조선과 러시아는 두만강 자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접경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와중에서 대원군의 외교정책이 좌절, 이후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라는 비극을 부르기도 했고요. 인천 개항 후 러시아는 다른 열강들처럼 반도에서 이권 침탈 경쟁에 적극 개입하고, 절영도(현 부산 영도) 조차 등 한반도를 자국의 전략적 이해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활용하느라 온갖 책동을 부린 바도 있습니다. 소설의 태도와 무관하게, 이 점은 역사적 진실로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입니다.

소설이 시작하는 지점은 1905년,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가고, 내우외환이라더니 마침 국내에선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져 나라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도저히 국가 역량을 전쟁 수행에 기울일 분위기가 못 되던 시국이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청년 장교 알렉세이는 극동으로 파견되어, 조선이란 나라의 정세와 환경적 조건을 면밀히 파악하라는 명령을 시달 받습니다.

귀족 출신 자제들이 구성의 주류를 이루던 러시아 장교단이지만, 그 중에는 계몽 의식을 지니고 민중들의 비참한 실상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지닌 부류도 많았습니다. 이 소설 후반에도 나오지만, "황제 폐하가 안 계신 궁정에 무슨 요구 사항이니 뭐니를 가지고 난입하려는, 그 자체가 이미 폭동이다!"라고 외치는 대공 같은 이도 있고, 그에 반대하며 신중한 처사를 유도하려는 알렉세이 같은 이도 있었습니다.

알렉세이의 이런 동정적(compassionate)한 태도는, 도적 무리의 약탈 때문에 기초적인 안보 여건도 누릴 수 없던 당시 국경 부근 거주 조선인들에 대해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지방관이란 자들이 백성의 가장 긴급한 현안에 대해서도 외면, 방관하는 현실을 개탄"하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알렉세이는 윗사람들이 거의 손도 대지 않고 물린 밥상을 두고 "일하는 마부에게 주면 어떨지" 하는 의사 타진을 하는데, 여기서도 그의 자상한 마음씀이 현지 조선측 관리에게 칭찬 받습니다. 보는 독자로서의 우리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생길 뿐이고요.

조선에서 지도층으로 군림하던 양반들의 낙후한 의식에 대한 비판도 여러 번 나옵니다. "아라사(러시아)도 10년 전 청국처럼 일본에 패배하는 걸 보라고. 속 빈 강정이나 아닐지?" 이렇게 열강 간의 우열을 간사하게 가늠하면서도, 정작 자국의 내실을 다지는 실천적 과업에는 무관심합니다. "강상의 도를 부인한 채 폭동을 일삼는 무리들(동학도 지칭)은 이미 나라의 백성이 아니오!" 외국인인 알렉세이가 더 황당해하는, 소위 지배층이란 이들의 뒤떨어진 봉건 의식이 집약적으로 표현된 언사입니다.


알렉세이는 "근석"이라는 이름(러시아인에게는 그 발음이 상당히 어려운)을 가진 아이 하나를, 가이드, 하인, 말동무 삼아 일정 중 자신과 일행을 수행하게 합니다. 삼천리 강역 곳곳에서 암담하고 희망 없는 모습을 주로 목도하며, 국경의 한 모피상(작가 모파상이 아닙니다)이 일러준 대로, "무책임하고 게으른 민족"으로서 이 험난한 국제 정세 속에 열강들의 각축에 밀려 그대로 사멸할 것 같은 이 민족의 참상 중에 그나마 이 어린 소년의 총기와 활력을 보고 어렴풋한 희망을 갖습니다.

소설 제목 "굿바이 조선"은 그저 주인공 알렉세이가 제 할 일을 마치고 이땅에 고하는 작별인사만은 아닙니다. 마침내 이 머나먼 땅 조선에도 양심과 역사의식, 불굴의 재생 의지를 놓지 않은 민중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태동하고 있음을 깨달은 알렉세이, 그리고 그의 "벗" 근석(알렉세이는 소설 초두에서, 부관 비빅이 근석을 호되게 구타하려 할 때 엄한 추궁을 하며 제지하죠)이, 같이 "낡은 조선"을 향해 고하는 이별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새로운 조선은, 외세를 몰아내고 봉건 잔재를 일소하여, 정의와 평등이 먼 시골 구석까지 민생을 어루만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들이 보게 될 조선은, 무기력하고 나태와 인습에 젖은 백조의 나라가 아니라, 불의에 단호히 저항하고 자유와 자존을 찾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산신" 호랑이와도 같은 의병의 나라입니다. "한번 러시아인은 영원한 러시아인"을 되뇌는 비빅처럼, 한번 조선인의 영혼과 정체성을 새긴 겨레는 그 생령을 놓고 결코 이민족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소년 근석의 두 눈빛에 아로새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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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어령 선생님께 따님이 있어서, 생전에 부친의 많은 기대를 모으고 듬뿍 사랑을 받았다가, 투병 중 별세하셨다는, 소위 "참척"의 아픔을 보셨다는 안타까운 사연은 이미 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은 당신의 저작을 통해선 좀처럼 이 말을 잘 안 꺼내시다가, 비교적 최근에 낸 책 중에서 간간히 따님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가 그 예입니다.

박사님이 워낙에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사요 석학이시다 보니, 사실 그 전후 경위에 대해선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나, 당신의 입으로 직접 그 아픈 마음을 표현하시는 건 극히 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번 이 책이. 온전히 그 화제에만 집중하여 한 권으로 엮여져 나왔네요. 박사님의 책은 어떤 주제와 의도 하에 쓰여진 것이라도, 최소 그 아름다운 문장 하나만으로도 탐독의 가치가 있지만, 박사님의 인간적 면모까지를 존경해 온 독자로선, 따님에 대한 그 간곡한 소회가 담겨 있을 이 책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굿나잇 키스"는 다음 날 아침을 기약하는 달콤한 다짐이기도 하지만, 영원한 잠에서 깨어날 수 없는 이에 대한 비통한 고별의 의식이기도 합니다. 선생의 이 책 제목은 그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다 여겨집니다. 육신을 가지고 호흡, 생동하던 이승에서의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고했지만, 영혼으로서 한 번 맺어진 인연은 그 매듭을 결코 풀지 않은 채, 구천과 예토의 경계를 넘나들며 부녀 지간의 애틋한 정을 이어갈 테니 말입니다.

선생 연배의 어르신들이 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을 맑은 흙과 상쾌한 공기가 뿜던 그 정기를 흡수하며 시골에서 자란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설사 자신이 도회에서의 세속적 성취, 즉 "출세"에 성공했어도, 자신의 아들딸들에게 결코 도시의 콘크리트가 내뿜는 독기에 그 혼이 압사되지 않길 기원합니다. 선생님 역시, 장항선편 그 낡은 삼등 열차간에서 지극히 서민적인 메뉴인 삶은 계란을 사먹이며, 금지옥엽이신 따님에게 "인생의 본맛"이 무엇인지 프루스트 효과를 통해 가르치려 했습니다.

선생은 결혼을 하신 후에도 문인 특유의 무책임한(?) 삶을 그대로 이어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던 분이, 딸을 슬하에 보고서야 그 고고히 천상을 향하던 눈을 내리고, 땅만 쳐다보며 일상에 집착하는 "속물(본인의 표현)"이 되셨다는군요. 사실 선생은 워낙 젊은 시절부터 문명을 날린 스타였기 때문에, 세들어 살던 시절에도 집주인이 알아볼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런 자신을 두고 그는 스스로 메롭스란 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다 알듯 박사님의 따님은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 미국 현지에서 법조인으로 활약하기도 한 분입니다. 박사님이 문화부 (초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 따님은 미국 내 흑인 폭동과 관련, 특정인(들)의 변호인으로 선임되어, 현직 관료로서 재외국민의 고충 해결 사무에 잠시 관여하던 부친과 조우하게 됩니다. 이 사건 관련, 박사님은 자세한 사연을 적어 두고 계신데,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참고할 만한 자료도 되겠습니다. 물론 이 대목 회고는 저자 이어령 박사님 입장에서야 돌아가신 따님에 대한 애끊는 부정이 그 저술 동기겠지만서도요.

책의 70% 정도를 차지하는 1부가, 이런 식의 절절한 사연의 행렬이라면, 2부는 다소 뜻밖에도 박사님이 직접 지으신 여러 시편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인 박사님 솜씨라 그 완성도야 뭐라 말을 꺼내는 게 무엄할 뿐이고... 3부는 영애 이민아 변호사의 서신, 인터뷰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열림원에서 낸 모든 책이 다 그렇듯 이 책도 디자인과 장정이 참 예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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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5-07-10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