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을 지휘하라 - 지속 가능한 창조와 혁신을 이끄는 힘
에드 캣멀.에이미 월러스 지음, 윤태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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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뿌듯한 보람이 느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이런 책이라면 누구한테 권해 줘도 욕 안 먹겠다 싶었고, 만약 만족 못 하는 이가 있다면 찾아가서 제가 욕을 해 주고 싶을 만큼요^^ 책을 잡고 보통 하루면 끝을 냅니다만, 이 책은 지난 9월 말에 사서 지금까지 읽었습니다.

일단 자계서 같은 책 제목도 그렇고, 첫 1장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권두에 "스티브 잡스에게 이 책을 바친다" 같은 말이 뜬금 없이 붙어 있는 것도 그렇구요. 잡스 책은 그간 너무 많이 읽어서 좀 지겨웠고, 에드 캣멀의 첫 저서라고 해서 샀는데 잡스 이야기가 나오면(이 사람 이야기가 일단 나왔다 하면, 어디 적당히 나오고 마는 수준이겠습니까?) 에드 캣멀에 대해서 좀 알고 싶었던 독자로서는 아무래도 품었던 기대가 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에드 캣멀 단독 명의가 아닌, 에이미 월러스라는 (제게는) 낯선 이름의 공저자가 같이 붙어 있는 것도 일단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썼다고 해도 대필인 경우가 많은 세상이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다시 제목을 보니, 더더욱 자계서처럼 보였습니다. 자계서라고 해도 진정 자기 발전을 위한 의욕으로 가득한 독자에게는, 설사 흔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다 성장을 위한 자양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히 기업가의 책이라면 정말 그 기업가 본인의 육성을 듣고 싶은 게 독자의 바람입니다. 명언 인용은 이제 좀 지겹다고나 할까요.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최소한 제게는 "이 책은 에드 캣멀 본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책이고, 할 수 없는 말이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어느 책이든 그렇듯, 책 처음(혹은 뒤표지)에는 각계 인사들의 다양한 추천사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을 보면, "..... 인 작품"이란 말이 나와 있더군요. "작품"이라... 유명 인사의 회고록, 혹은 어떤 형식의 테마북이라고 해도, 그걸 "작품"이라고까지 불러 주는 건 그리 흔치는 않습니다(아니면 단순한 오용이던지). 그 말을 읽고 나서 다시 책 표지를 보았더랬습니다. 라틴어로 "작품"이라고 하면 opus, 그 복수 형태는 opera죠. 벌건 배경에 실루엣으로 표현된 어느 지휘자가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하자면 지휘자이니, 그 지휘자가 내 놓은 책이라 '작품'인가?" 처음 책 읽기 싫을 때는 이처럼 온갖 잡생각이 꼬리를 무는 게 제 버릇이어서요.




읽어 보니, 이 책은 정말로 "창의성을 지휘하는" 내용이더라구요. 에드 캣멀은 다들 아는 것처럼, 그냥 팀이라고 해야 할지, 밴드라고 해야 할지, 정말 회사로 분류해야 할지 모를 어메이징한 집단 픽사의 설립자이자 CEO입니다. 다들 기억하는 것처럼 1990년대 초반은, 한때 활기를 완전히 잃었던 미국 애니메이션이 화려한 중흥을 맞이했던 시기입니다. 1990년부터 4년 연속으로 흥행 대박을 쳤던 디즈니의 성과는, 지금에 들어서야 분석가들의 평가 대상이 되고 어느 정도 고착된 어구로 자리매김된 게 아닙니다. 이미 그 당시에도 (심지어 한국 언론에서도) 대중 문화가 아닌 경영이론상의 관심사로 떠오른 바 있습니다.

캣멀은 제가 보기에 화려한 변설가는 못 되지 싶습니다. 그 예로, 과연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싶은 사람 입에서 나올 만한, 이거는 진짜 자기 표현 맞는가 보다 싶은 개념이 나옵니다. "아기 키우기"와 "짐승 먹이 주기"가 그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뭔 소린가. 소규모 조직을 정성 들여 성장시키고, 본래의 목적에 맞게 매뉴얼한 주의를 매 단계마다 일일이 기울이는 건 "아기 키우기"입니다. 아기를 키우는 건, 엄마가 들인 노력에 꼭 양적으로 비례해서 성과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양적으로 정성을 들여도, 자기가 원하는 보호를 못 받는다 싶으면 꼭 울고 보채고 하는 게 아기겠죠(모르긴 해도). 별 노력을 안 쏟는다 싶어도, 꼭 필요한 정성이 제공되면 바로 만족하고 해맑은 웃음을 띠는 게 아기겠죠. 이러다가도 언제 한 순간 돌변해서 자기 집은 물론 이웃들 잠까지 다 깨울 지도 모르는 게 아기입니다. 회사에서 분명, 이런 "아기 키우기"의 마인드로 임해야 하는 작업과 섹터가 따로 있다는 게 그의 의견입니다.




"짐승 먹이 주기"는 그 반대입니다. 짐승은 질보다 양입니다. 일단 외적 시설을 잘 갖추고, 먹이를 풍부히 공급하고, 치밀한 시스템적 관리에 소홀함이 없는 게 "사랑" 같은 비정형적 요소보다 더 우선입니다. 캣멀은 예컨대 GM이나 IBM 같은 대형 회사가 보다 더 의존하는 조직 패턴이 이것이라고 분류합니다. 반면 자기가 꾸려 온 픽사 같은 회사는 "아기 키우기"를 하는 조직이라는 거죠.

자, 그럼 "짐승 키우기"는 나쁘고, "아기 키우기"는 무조건 좋은 것인가? 그가 한때 상관으로 모시고, 지금도 여전히 숭배하는 스티브 잡스라면, 아마 "A는 좋고, B는 나쁘다"는 식으로, 명쾌한 도그마화를 시도했을 겁니다. 그런데 저자 캣멀은 (이 책 곳곳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잡스와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른 유형"의 인간입니다. 그런 그가, "모든 회사는 아기 키우듯 키워야 한다"고 주장할 리 없습니다. 사실 캣멀 아니라 누구에게도, 회사를 "전사(全社)적으로" 아기 키우듯 키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요즘 구멍가게도 그런 식으로 운영되지는 못하지 싶습니다.

캣멀은 오히려 "짐승 먹이주기"는 어느 회사에 있어서든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합니다. 당연하죠. 외연 확장에 무관심한 회사가, 어떻게 지속 가능한 성장은 고사하고 그저 현상 유지라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사실 디즈니가 1990년대 초 이래 계속 픽사와 외주의 형태로만 관계를 유지한 건, 캣멀이나 디즈니로나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그때는 디즈니 역시 (의식을 했건 못했건) "아기 키우기"를 잘하는 기업이었고, 캣멀은 아직 신출내기라 경영에 눈에 뜨이지 못했을 시점이었겠죠. 결국 그를 알아 본 것도, 기이한 독불장군이자 나르시스면서도 인재를 감별하는 안목만큼은 탁월했던(안 그럴 것 같아도) 잡스였습니다.

캣멀은 드디어 디즈니의 CEO로 부임합니다. 첫날 회사를 둘러 보니, 직원들의 책상 위가 깨끗합니다. 다른 회사도 아니고, 직원의 개성이 최대한 살아 있어야 할 사무실 개인 책상의 모습이 이러니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세 번을 묻고서야 "오늘 사장님 부임을 맞아 좋은 인상을 드리기 위해 일제 점검 지시가 내려졌습니다."라는 실토를 들었습니다. 캣멀은 이미 밖에서부터, "왜 디즈니가 점점 하향세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답을, 무려 취임 첫날에 들은 셈입니다.

저는 이 책이, 특히 이런 점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떤 책은 정당한 질문, 필요한 질문 자체를 제기하지 못하고 시시한 주제만 거론하다가 끝납니다. 어떤 책은, 강렬한 힘을 발산하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러고 뒷감당을 할 듯 말 듯하다가 대충 얼버무리고 끝납니다. 하긴, 이 두 가지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그건 대단히 드문 이른바 "명저"의 반열에 속하는 책이겠습니다만. 캣멀의 이 책은, 올바른 질문을 제시하고(독자의 구미를 미리 예상한 계산적인 주의 환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정직하게 품어 왔던 질문), 그에 대한 자기 자신의 성실한 답을 내어 놓고 마무리짓습니다. 정답 강박증 때문에 애써 정형화한 답을 내어 놓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이 살아 온 치열한 과정이 빚은 딱 그 수준 만큼의 정직한 답을 성실히 이야기합니다. 이런 문제에 정답이 사실 어디 있겠습니까. 정직하고 성실한 소통 자체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정도지요.

경영학 개론 교과서에서 앙상하게 그 이름만 접해 왔던 저스트 인 타임이니 하는 개념들이, 이 책에서는 캣멀의 버전(혹은 에이미 월러스의?)으로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창의력 있는 인재를 기용하는 섹터에선, 아기 키우기 식으로 조직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요즘, 존중받는 직원이 일도 잘한다는 식의 주장도 여러 군데서 제기되고 있습니다만, 캣멀은 철저히, "그들의 창의성을 북돋워주라"는 강력한, 그러나 부드러운 톤의 촉구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뽑을 때, 똑똑하다 싶어 뽑은 인재들 아니었는가. 그런데 왜 뽑고 나서는 부품 취급을 하는가"가 그의 말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맞는 말입니다.

한때 창의력은 CEO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죠. 영화 <토털 리콜>에서 회장님은 그렇게 말합니다. "생각을 하지 마, 누가 생각하라고 했나?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바로 이런 독선적이고 디미니셔스러운 스탠스가, 죽은 조직을 만듭니다. 지휘는 지시가 아니죠. 불협화음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가이드일 뿐입니다. 아무리 지휘자가 빼어나도, 박자 못 맞추고 음 틀리는 단원을 연주 도중에 교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휘자라는 위치가 어차피 한계가 있다면, 단원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고 기를 살리는 게, 요즘 시대의 오케스트라를 가장 잘 이끄는 방책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CEO는 지시가 아닌 지휘를 하는 시대이며, 기계적 능률 부양이 아닌 창의력의 고취야말로 기업이 살아 남을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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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주떼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2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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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나 작가의 삼부작 중 마지막이라고 하는 이 작품을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지만, "짧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전작 두 권이 하드커버로 나왔을 때도, "이렇게 짧은 분량을 양장본으로 낼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죠(양장/페이퍼백 선택이 책의 분량과 직접 관계는 없습니다만).

 

출판사에서 그녀의 작품을 평가(하고 홍보)할 때, "한국문학의 탈출구, 새 지평을 제시"했다는 문구가 보통 따라붙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을 읽어나갈 때, 어려운 말도 없고, 심오한 사상을 표면적으로 표출하지도 않는 그녀의 스타일(오히려 정반대라면 모를까) 때문에, 그런 미덕과 가치를 발견하게 되지는 보통 않았습니다. 다만 출판사에서 그런 의미 부여를 하고 있었기에, "아 우리 무지한 독자들도 그래야 하나 보다"며 머리를 싸매고 읽어 나가기는 했죠.

 

전 2작을 읽으셨을 분들은 어떤 느낌이시던가요? 솔직히 말해, 어떤 이지적인 작용을 그 독해 과정에서 내 뇌에 기대하고 명령하기보다는, 말초적인 흥미에 먼저 민감해지던 모습이 보다 정직한 기억 아닌가요? 저도 그랬습니다. "충격이다. 어른으로서 부끄럽다" 같은 반성과 소감을 누구나 이야기하시더군요. 하지만 그분들도 서평에 "짜릿짜릿 재미있었다" 같은 말을 쉽게 적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부조리의 대가를 치르겠다는 듯 암울하게 막을 내리는 결말에서 뭔가 살짝 숙연함이 들기는 했습니다만, 그 역시 은밀한 죄책감을 적당히 덮으라는 작가의 독자에 대한 영리한 배려로도 해석되었습니다. 우리의 금붕어 기억력은, 결말의 인상에만 지배되고, 이는 우리의 자발적 선택이기도 합니다, 골치 아픈 것 싫지 않습니까.

 

전작 <제리>만 해도 그렇습니다. 답이 없는 인생이고, 혐오스럽고 타락한 삶입니다. 겉으로는 일단 태깔이 나나, 속은 다 썩어 있고, 과연 늙어서 뭘 할지 혀를 끌끌 차게 되는, urban tragedy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여튼 주인공은, 얼마 있지 않아 도래할 처참한 시듦을 겪게 될지언정 아직은 빛나는 청춘입니다. 우리 독자는 그래서 불편할지언정, 그 성적(性的) 행태에 대해 혐오스러워할망정, 전적인 불쾌감과 분노만큼은 독후(獨後)에 면(免)하는 결과였습니다. 여튼 청춘을, 실수도 하고 비위도 저지를망정 아름다운 존재 아닙니까. 무슨 성(性)을 어떻게 향유하건, 젊은 시절에 벌이는 모습은 그리 추하지만은 않습니다. 아직 젊으니 나중에 무슨 돌파구가 생길지 또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 이 <그랑 주떼>는 그렇지도 않더군요.

 

주인공은 이중의 불행을 겪는데, 그것이 일생을 두고 치르는 고통입니다. 하나는 어린 시절의 성폭행이 가져다 준 트라우마요, (이것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보기는 힘든) 다른 하나는 또래들로부터의 왕따입니다.

 

작품에서의 서사 순서를 따르자면, 일단 주인공은 학창 시절 내내 극심한 왕따를 겪습니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다거나 한 것도 아닙니다. 키도 또래에 비해 큰 편입니다. 학습 능력이 아주 떨어진다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왕따입니다.

 

본인이 알고 다른 또래들이 느끼는, 왕따의 분명한 이유는 바로,


"저년은 그저 재수 없음, 드럽게 재수없는 년임."

 

입니다.


공부도 못하고, 센스도 없고, 평균치만 했으면 될 키까지 딱 재수없을 만큼만 크니, 저런 애는 왠지 싫다는 게 또래들의 "판결"입니다. 아이들은 반드시 어떤 상대가 열등해서만 왕따를 시키는 게 아닙니다. 우월한 존재도, "부러움"과 범벅이 된 묘한 "적대감"은 보통 아이들에게 왕따에의 충동을 유발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그녀의 친구(유일한 친구인데, 같이 왕따를 당하다 보니 당연하죠) 역시, 귀여운 외모에, 부유한 가정 환경에, 아무한테나 반말(미국에서 살다 왔으니 어쩔 수 없죠)을 하는 행동 따위가 처음엔 선망의 대상이다가, 나중에는 왕따의 좋은 표적이 됩니다.

 

왕따를 당하는 애들을 보면, 마음 한 구석에 뭔가 근원적 우울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애들과 잘 못 어울립니다. 못 어울릴 만한 심성을 떨치지 못하니 정말로 못 어울리게 되고, 원인과 결과는 서로 위치를 바꿔 가며 악순환을 낳습니다. 이 주인공 역시 마찬가집니다. 못난 구석이 많다고는 하나, 하나하나만 따지면 남들한테 비웃음과 경멸의 대상이 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게 모이고 모이니까, "천하에 재수 없는 년"이 되는 겁니다. 한 성깔 하는 구석이라도 있었으면, 반대로 구석(전면에서는 아니고)에서 나름 애들에게 겁깨나 주는 깡패가 되었을 수도 있을텐데(키가 크다고 하니), 그것도 아닙니다. 천상 왕따로 살아야 할 처집니다.

 

현재 주인공은 발레 강사(비슷한 것)입니다. 발레라고 하니 모르는 이들에게는 뭔가 있어 보이고, 사람들을 가르치기라도 한다니 허울이야 좋습니다. 게다가 주인공은 관련 학과를 졸업하기까지 헸습니다. 허우대는 멀쩡한데 내면에 깊은 문제가 곪아 있는 모습이 여기서도 반복 재생산되는데요, 그녀는 발레를 전혀 할 줄 모릅니다. 절망적인 몸치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들에게도 엄청 타박만 받다 교육과정을 겨우겨우 마쳤습니다. 그럼 뭘 가르치느냐? 고용주인 원장이 다른 스케줄로 레슨을 못할 때, 기초 몸동작을 원생들에게 반복시키는 일입니다. 어차피 동네 영세 학원이라, 발레를 본격적으로 배우는 이들이 적습니다. 말이 좋아 발레지, 관리를 안 해서 뒤룩뒤룩 찐 살을 빼러 오는 "다이어트반"의 관리입니다. 아무나 다 하는 비숙련 노동 비정규직에 가깝습니다.

 

왜 이렇게 암울한 인생이 되었을까요? 약간 스포일러성이지만, 리뷰에서 이 이야기를 안 하면 그건 직무유기에 가까울 만큼 중요요소라 어쩔 수 없네요. 모르긴 해도, 주인공이 아주 어린 시절 당했던 성폭행의 끔찍한 기억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이 내러티브의 의도 아닌가 합니다. 자기 책임으로(그 나이에 무슨 "자기 책임"이란 게 있겠습니까!) 조금도 돌릴 수 없는, 악한, 범죄자로 인한 트라우마가, 아직도 젊은 한 인생을 망쳐 놓은 거죠. 아마도 아이들이 그녀에게서 보았을 "재수없음"은, 그녀의 "주저함"이었겠고, 그 "주저함"이란 그 악몽에서 기인했을 텝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사람, 타인에게 가까이 갈 수 있겠습니까.

 

유아 시절의 그녀를 아파트 옥상에서 성폭행한 자는, 참으로 놀라울 만큼 비열한 품성을 지닌 인간이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성욕을 느끼는 자라면, 자기 인생이 자기 뜻대로 통제될 부분이 없는 정신 장애자이니, 차라리 동정을 느낄 여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는, 범행 한참 후 우리의 주인공과 다시 만납니다. 자전거를 타다 만난 그녀에게, 그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 폭행을 가합니다. "너 이 나쁜 X, 다시 내 눈에 뜨이면 죽을 줄 알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놀라운 광경입니다.

 

사실 요즘 논란이 되는 화학적 거세니, 전자 발찌니 하는 것도 다 호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이런 것만큼은, 저기 북한이나 중화인민공화국 표준을 따라 법시행을 했으면 합니다. 얼굴 공개하고 대중들 사이에 시끄럽게 떠들어 봐야 소용 없습니다. 지금 누가 "고종석"에서 나주 여야 성폭행 사건을 떠올리는 이가 있습니까(다들 글쓰기 선생님만 생각할 텐데)? 대중은 그저 냄비일 뿐입니다. 입으로 떠들 게 아니라, 법으로 그냥 해결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다소 의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주인공은 "왕따 유발성의" 우울함을 내면 특성으로 가지게 되었다....라면 그건 우리의 상식? 통념? 이런 것에 과히 어긋나는 바 없으므로, 차라리 편한 이해의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한 번 더 다른 갈래의 이야기를 덧입힙니다. 그것은, 주인공의 성격 자체가, 무언가 가해를 유발할 요인을, 그 성폭행 이전부터 안고 있었다는 은근한 암시입니다. 오해는 마시구요.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일부 있다"는 황당하고 사악한 논리가 아닙니다. 범죄자는 반드시, "어떤 종류의 취약함"에 끌립니다. 그 취약함이 이 범죄자의 공격에 의해 더 큰 상처로 자라면, 이번에는 "범죄자까지는 아니나 사악한 일반인들"이, 그 틈을 겨냥하여 공격하고 들어옵니다. 우리가 그토록 지탄해 마지 않는 범죄자들은, 알고 보니 똑같은 공격성과 가해적 성향을 지닌 일반인들의 선발대, 특수요원이었던 셈입니다.

 

주인공은 왜 발레를 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여자치고 남달리 큰 발, 그리고 그 발등에 돋아난 두툼한 뼈를 갖고 태어난 모습입니다. 이게 발레에는 천혜의 조건입니다. 발레 선생은 그녀의 그 발, 일반인들부터는 혐오의 대상이었을 그 발을 보고 반한 것입니다. 저런 발을 나도 가질 수만 있다면 영혼의 일부라도 팔겠어! 그러나 그런 발만 가지면 뭐하겠습니까. 몸 돌아가는 게, 균형 잡는 감각이 일반인보다도 못한데 말이죠. 그녀는 다시, 선망의 대상(거의 로또와도 같은 확률로 하나 걸렸던)에서, 다시 공인 왕따로 추락합니다.

 

인간은 본디 그렇게 태어난 존재입니다. 발이 발레에 최적화한 모습을 지닌 것이, 그녀가 전생에 남다른 공덕이라도 쌓아서였겠습니까? 뭔가 우물쭈물하고, 또래에 어울리지 못하고, 근거 없는 자만감으로 허황한 짓거리를 하다 표적이 되는 인생이 있다 해도,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타인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과의 화해도 도모하기 힘듭니다. 이 소설은 "그렇게 태어난 그녀들과 우리들"에 대한, 정직한 시선을 촉구, 각성하려는 작가의 마음이 짙게 배어나 있습니다.

 

극심한 경기 불황에 시달리는 요즘 세태가 배경으로, 사실적 설명을 통해 제시된 것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계속 주변부만 떠도는 주인공의 처지와 인생에 대한 적절한 환기 혹은 메타포어 같기도 했습니다. 다만, 성폭행(두 건이 나오는데, 하나는 친척 오빠로부터의 성폭행이었습니다)과 왕따, 비정규직의 문제가 좀 작위적으로 결합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고, 전작과는 달리 도무지 밝은 면, 긍정적 분위기가 전무한 것도 갑갑함을 더하더군요. 희망적 색채를 띤 요소는 오로지 제목 "그랑 주떼" 하나뿐이었다고나 할까요. 내가 좀 조증이다 싶을 때 진정제로 처방하면 그냥 왓다일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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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 - 백 년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박상설 지음 / 토네이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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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사악함이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악함이 그런 분에게도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본디 사악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00세 시대를 쉽게 운위하는 요즘이라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 그 정도 연세를 드신 분은 쉽게 보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기력이 정정하시고, 젊은이들 못지 않게 정신도 또렷또렷 맑으신 분이라면 말입니다. 저자 박상설 선생은, 평생 동안 글로벌 무대에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며 타의 귀감이 될 인생을 살아 온 분입니다.

 

연치 높으신 분들 중에 자신의 영역에서 뚜렷한 성취를 이룬, 존경할 만한 인사들을 우리 사회는 많이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 중에는 지난 시대 한국 고유의 정서, 가치관, 신념에 충실하시다 보니, 지금의 젊은이들과 많은 국면에서 충돌, 갈등을 빚는 분들도 많습니다. 한국이 지금 치르고 있는 내홍 중 상당수는 세대 갈등이거나, 아니면 세대 갈등에서 파생된 것들입니다. 젊은이들도 반성과 수련을 행해야 하겠으나, 세대 갈등의 첫 고리를 푸는 이니셔티브는 (제 생각에) 노년층에서 먼저 취해 주셔야 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세대 갈등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는 여러 가지 현상과 동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인자를 꼽자면 제 생각에 아마, 지난 시대의 소중한 가치관과, 현재에 있어 표준이 되는 여러 트렌드가, 서로 모순, 상충을 빚는다는 사실도 한몫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겠지만, 현재의 트렌드는 글로벌 표준과 호흡이 잘 맞는 수가 많죠. 결국, 전통적 미덕과 지향, 그리고 글로벌 가치가, 문화 안에서 서로 유리한 자리를 잡으려 다툼을 빚는 와중에 그 모든 대립과 다툼이 세대갈등이란 이름으로 빚어지는 것 아닐까 합니다.

 

박상설 선생은,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경험이 있는 젊은이보다 더 현대적인 마인드를 지니신 분입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제 생각에, 그 비결은 간단합니다. 처음부터 정신의 좌표를, 글로벌 표준에 맞추고 청년기와 경제활동기를 보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거푸집이 먼저 마련되어 있어야, 그로부터 생성되는 컨텐츠("내용"이라는 원칙적 의미에서의)가 올바른, 혹은 보편적인 성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자, 이런 박상설 선생이, 젊은 시절에도, 그리고 뜻하지 않은 병마로 쓰러지시고 그로부터 기적적인 회복을 한 후에도, 그의 생에서 줄곧 손에서 놓지 않았던 쾌락, 혹은 성찰의 장(상반되어 보이는 이 둘을 겸한다는 게 놀라웠습니다)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오토 캠핑이었습니다.

 

오토 캠핑은, 본디 자연의 아들인 인간이, 자연 속에서 생명을 영위해 나가는 방법의 현대적 재현입니다. 자연이란 엄한 부모님입니다. 자식 귀하다고 오냐오냐 하며, 된 욕구 안된 투정 일일이 다 들어 주다가는, 인간 하나 망쳐 놓기 십상이죠. 자연은 인간을 빚을 때에, 죽지 않고 훌륭히 생존해 남을 만한 자질과 도구를 다 베풀어 주었습니다. 적응에 유리한 신체 구조, 자연의 도전을 이겨 낼 수 있을 만한 적당히 강인한 신체, 앞으로의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빼어난 두뇌 등입니다. 그러나 모든 위험을 한번의 노력으로 다 배제할 수 있는, 만능의 도구는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열심히 노력하면 만물의 영장이 될 수도 있으나, 태만한 마음으로 노력을 않는다면 바로 생존을 위협 받습니다. 자연의 정의롭고 오묘한 이치가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박 선생은 그래서, 자연에 마냥 순종하지 않고(그러다가는 목숨을 잃기나 딱 좋죠) 적정 선에서 나의 편의를 추구하고 자연에 도전도 하되, 자연을 마냥 정복하려 들며 나의 기본 생존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인간이 어머니 대지를 섬기는 초심을 회복하는 훈련, 도락, 그리고 제의(祭儀)가 바로 오토캠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업화되고 불순한 목적이 끼어 있으며, 그로부터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는 편의 위주의 캠핑 프로그램은 경멸 받아 마땅합니다. 오토캠핑이야말로, 인간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자아와 타인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마당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글로벌 표준을 논하면서 웬 오토캠핑인가? 미국인, 독일인 할 것 없이, 자신의 분야에서 뚜렷한 성취를 이루고, 생각하는 삶, 존재 이유를 반추하는 인생을 추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 오토캠핑에 기쁨과 정성을 들이고 있더라는 게 저자의 경험입니다. 오토캠핑은 준비가 번거롭고, 가벼운 신체 부상의 위험도 언제나 따르며, 순간순간 머리도 써야 하고, 신체적으로도 주의를 항시 기울여야 합니다. 적다 할 수 없는 노동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완수 후에 찾아오는 기쁨은 무엇에 비길 게 아닙니다. 완수 후에 기쁨만 체험하는 게 아닙니다. 깨달음이 있습니다. 자연이 낳아 준 원초적 모습의 "내"가 누구였는지, 오토캠핑은 총체적으로 깨닫게 도와 줍니다.

자연에서의 삶이라고 해서 마냥 낭만적으로 볼 건 아닙니다. 낭만은커녕, 산이란 사회에서 도태되고 천대 받던 이들이, 흘러흘러 갈 데가 없어 주저앉은 곳이기도 합니다. 미국 애팔래치아 산악 지대는 아직도 그런 이들이 주거를 이루고 있고, 이런 계층 출신들은 사회로 다시 나와도, 피부색에 무관하게 차별을 받습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굳이 할 것도 없습니다. 나이 든 분들에게 여쭤 보면(이 책을 읽고 실제로 제가, 곁에 계신 분께 물어 봤습니다), 산에서 사는 삶에 대해 손사래를 휘휘 치는 분들이 태반일 겁니다. 그분들은 대뜸 "화전민"을 떠올리기 때문이죠. 박 선생도 이 책에서 "화전민" 이야기를 하십니다.

 

화전민들은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선 농사가 제대로 안 되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지극히 열악한 작물만을 섭취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서워 산으로 숨어 들었건만, 생활에서 느끼고 겪어야 하는 불편이란 지옥을 방불케 했나 봅니다. 그 와중에, 구성원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심각함도 이루말할 수 없습니다. 박 선생은 이 주제를 이야기하며, 박정희 정부 당시 일어났던 이승복 사건과, 이것이 계기가 되었던 강제 이주 정책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디 어느 외계에서 떨어진 게 아닌, 오랜 진화 과정에서 발달시킨 천성 면에서나, 지금 당장 보유한 체질, 성향 면에서나, 자연 속에서만 최상의 건강과 활력을 발휘하게 설계된 존재입니다. 그런 숙명을 거부하고, 지금 우리는 도시라는 허울 안에 포장된 허위와 기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단한 발상의 전환, 그리고 그리 큰 무리가 따르지 않을 실천만 해 준다면, 다른 차원의 체험과 각성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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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취업지도 - 당신이 원하는 채용에 관한 모든 정보 비즈니스 지도 시리즈
취업포털 커리어.한국비즈니스정보 지음 / 어바웃어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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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북이란 어느 분야에서도 필요합니다. 아무리 패기가 하늘을 찌르고 의욕이 가상하다고 해도, 자신의 능력을 펼칠 마당이 어떤 규칙에 의해 돌아가는지를 모른다면 그 노력은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전자는 해당 분야의 정황을 정확히 알고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요즘 같이 취업이 어려운 세상이라면, 그를 참고하고 기준으로 삼으며 궁금한 내용이 있을 때마다 꺼내어서 들추어 볼 기업 정보의 총집결 소스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원하는 기업에 들어가기 위한 최초의 절차가 어떤 것을 요구하는지 알아야, 그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바로 나라는 인상을 정확히 주고 입사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첫째, 대한민국 취준생에게 선망이 되는 거의 모든 기업들의 정보가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최근의 수익 현황, 지배 구조(이런 정보가 다 나온다는 게 너무 놀라웠어요), 기업의 연혁, 사풍(社風), 비전, .... 한정된 지면에 이렇게 많은 정보가 다 담겨 있다는 게 경이롭기도 하고, 볼 때마다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라 서재에 꽂아 넣고 나서도 자꾸만 다시 꺼내 보게 되더군요.

 

둘째, 그렇게 총망라된 정보가, 현재 인포그래픽의 감각과 기술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시각적 아름다움과 기법을 총동원하여, 오로지 독자의 가독성과 편의에 초점을 두고 400여 페이지에 걸쳐 서비스를 펼치고 있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고, 소통이 되지 않는 정보는 아무리 높은 가치와 희소성을 지녀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정보 자체의 가치와 책 편집의 미학적 수월성 중 어느 편이 더 빼어난지 그 판단이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셋째, 특히 취준생에게는 목전에 다가온 입사 시험을 통과할 구체적인 조언이 필요합니다. 이 책은, 정보를 그렇게나 많이 제공하면서도,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할 취준생들에게 직접적이고 유용한 지침을 친절히, 자세하게 제공해 줍니다. 아무리 정보가 많아도, 그것을 날것으로 삼킬 수는 없습니다. 많은 취준생들은 스스로 알아서 취업 전략을 세울 만한 처지가 아닙니다.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는 보다 고급의 전략을 수립하게끔 많은 1차 정보를 주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당장 내일이라도 면접장에 들어가서 남들 하는 만큼은 할 수 있게, "이 기업은 인재의 이런 점을 중시한다.". "기업 철학이 이러니 이런 분위기에 미리 적응해서 대처해야 한다.", "압박 면접, 말꼬리 질문을 잘 던지는 기업은 이런이런 곳이다.", "이 기업에서 요구하는 시험 요강, 자격 요건, 절차는 이러이러하다."를, 정말 필요하다 싶은 부분만 잘 찔러 주고 있습니다.

 

넷째, 다른 책들은 이런 편집이 아니던데, 유독 이 책은 "기업들의 직원 대우와 혜택"을 책 말미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취업 시장이 기업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다고 해도, 응시자 역시 가고 싶은 회사, 넣어 준다고 해도 마다할 회사가 있을 것입니다. 내 능력에 비해 대우가 열악하다거나, 개인 사정상 이 부분이 충족 안 되면 근무가 곤란한 곳도 있겠지요. 그런 사항을 미리 필터링하고, 취업 공부가 힘들 때마다 동기 부여도 스스로에게 하게끔, 이 책은 자세히 직원 급여-복지에 대해서도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게 취업 준비 단계에서 당장 필요한 점은 아니기에, 책 끝에 구별된 항목으로 편집한 거겠죠. 독자와 수요자의 마음을 잘 배려했다고나 할까요.

 

요즘 가장 어려운 분야가 증권업입니다. 나이 마흔에 그간 실적도 좋았던 일등 부장이, 고작 월 사백대 급여에 그나마 전면 성과급 체제로 바뀐 체계의 압박을 감당 못하고 자살하는 곳이 이 분야입니다. 책에 잘 나와 있지만, 아예 대졸 신입 사원 공채를 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기존 베테랑들도 목표치 채우느라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사람도 내 보내는 판에, 어느 시절에 초보에게 일 가르치고 업무 배당을 하겠습니까.

 

책에 나와 있듯, 이 업계는 현재 일반인 아닌, 자산가들을 향해 마케팅 역량을 총집중하는 추세입니다. 예로 KDB 대우의 프라이빗 뱅커 양성 과정을 꼽는데, 신규 채용 규모가 그만큼 줄었음을 잘 반증합니다. 직원 재교육, 일류 증권맨으로의 업그레이드가 대세라고 하겠습니다. 책에는 "인문 소양을 지닌 인재 중시"라는 대목이 있는데, 준비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다만 이 분야가 뭘 하는 곳이고,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 증권 회사에 들어 올 신입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먼저 지원자 본인이 확실한 인식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인문"보다 더 우선이죠.

이공계 출신은 그나마 지원 여력과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취준생들이 잘 모르는 기업 중에, 이 책은 경북 봉화에 소재한 (주) 영풍을 소개하고 있네요. 금속, 화공 계통을 전공한 4년제 공과대학 졸업자라야 하며, 최근 대단한 활황을 보이는 이 분야의 실정을 감안할 때 추천 대상이라 생각합니다.

 

한전, 한수원 등은 꿈의 직장이죠. 이런 곳들은 종래 필기시험만 잘 통과하면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그 필기 시험의 통과가 무지 어려워서 문제였지만요). 그런데 최근 이런 곳들도, 응시자의 다면적 적성과 자질을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정보입니다. 자세한 건 책 해당 부분을 참조해 보십시오.

 

소셜커머스야말로 요즘 젊은이들에게 새로이 관심사로 부상되는 영역입니다. 물론 젊은이들의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매체이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취업 시장에서도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다는 뜻입니다. 선입견과는 달리, 임시직 위주로 인적 자원을 끌어다 쓰는 곳만은 아닙니다. 요즘 같은 열악한 형편 속에 상대적으로  폭 넓은 신규(물론 정규직) 채용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는 진취적이고 신선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상입니다. 기질 뿐 아니라 구체적인 청사진과 정보를 사전에 갖추고 면접에 임해야겠습니다.

 

제지업 분야에는 일상에서 친숙하면서도 내실 가득한 기업이 많이 포진해 있습니다. 구 전주제지였던 한솔제지는 이병철 씨가 직접 세운 기업으로, 모그룹인 한솔이 1990년대 말 PCS 사업 실패로 다소 社勢가 위축된 모습이지만, 여전히 이 분야 소리 없는 강자로 군림합니다. 이름이 헷갈리기 쉬운 전주페이퍼는 전혀 별개의 중견 기업인데, 신문 용지 제조 분야에서 발군의 위상입니다. 멀티형 인재를 중시한다는 점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문국현 전 사장 덕에 더 유명해진, 유일한 선생의 遺業 (주)유한킴벌리, (주)깨끗한나라 등도 건실한 업체들이죠.

 

뿌린 만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정직한 노력을 투자한 이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과실을 품에 안을 것입니다. 당장 힘들어도 자신에 대한 애정과 세상을 향한 열정을 놓지 않는 젊은이에게, 좋은 직장에의 합격, 진출, 그리고 성공은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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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곳이 글로벌이다
이영구 지음 / 이답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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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업인의 소명은 돈을 버는 일입니다. 우선은 혁신과 창조를 통해 영속적 기업(going concern)을 꾸려 나가고, 창출한 이윤을 통해 자신의 땀과 노력과 창의성에 대한 대가를 받아 내고, 자신의 기업을 위해 애써 준 직원에게 합당한 보수를 치러 주고, 주주와 채권자에게 만족할 만한 배당, 약속한 바대로의 이자를 지급하는 게 기업가의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 대한민국 경상남도 고성 출신의 어느 기업인은, "돈을 못 벌어도 좋다. 내가 고객에서 약속한 가치를 지키고 만들어 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가치 경영, 고객 중시"를 입에 담지 않는 기업은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문제는 실천입니다. 고작 단가로 몇 만원이 달린 결정의 순간에서도, 기업은 자기 손에서 빠져나가는(나갈 수 있는) 돈을 보며 손을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말과 현실의 괴리는 광년의 거리에 필적합니다.

 

여기, 당장 손해를 보아도 내 기업의 가치와 고객과의 신뢰를 지켜 나가고야 말겠다며, 세상을 성실과 신의로 물들여가는 분이 있습니다. 브리지 쥬얼리, 패션 쥬얼리의 세계적 트렌드를 선도하는 뉴욕 한복판에서, 타 브랜드를 압도하는 시장 점유율과 고객 사이에서의 평판으로, 경쟁자, 소비자, 시장 관측자 모두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한국인 출신"의 "남성" 기업인이 있습니다. 메트로섹슈얼의 외모라도 갖춘 분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나이는 이제 초로에 접어들고, 불룩 나온 복부가 후덕한 인상을 주며, 머리는 모두 밀어 숱이 안 보이는, 전형적인 동네 어르신 같은 모습입니다.

 

이런 분이, 세계 유행의 첨단을 걷는 뉴욕을 석권했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사실 현지의 전문가들도 자신이 보고 겪고 만지고 평가까지 했던 현상에 대해, 내심으로는 아직 못 믿고 있는 눈치입니다. 그만큼 최 회장이 해 낸 일은 놀랍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그의 태생지와 지척의 거리(글로벌 관점에서는 지척일 뿐이죠)에 사는 우리들은, 그런 놀라운 성취를 일군 분의 함자도 아직 채 모르는 처지입니다.

 

다시 그의 모습이 실린 사진을 들여다 봅니다. 그는 비록 전형적인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백인이 지배하는 세계의 수도 번화가 한복판을 걷는 보무의 당당함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풍채입니다. 당당한 체구에, 발걸음은 힘이 넘쳐 보입니다. 이런 자신감과 건전한 위엄은 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요? 내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인은 아닐지 모르나, 가장 올바른 방법을 쓰는 경영인이요, 고객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 판매자라는, 자타 공인의 평가에서 비롯한 것 아닐지요.

 

쥬얼리 산업은 고가 시장을 형성하는 "퓨어 쥬얼리", 저렴하나 알뜰하게 입는(걸치는) 이의 매력을 꾸려 주는 "패션 쥬얼리", 이 중간지대에 위치한 "브리지 쥬얼리"로 나뉩니다. 최 회장은 뉴욕 한복판에서, 메이시 등 유력 백화점에 당당히 NADRI라는 브랜드로 출점하여, 업계 관련자와 뉴요커 모두를 놀라게 한 굴지의 기업인입니다. NADRI, 한국인이라면 이 말의 뜻이 뭔지 모를 이가 없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으로 공감하는 그 모든 따뜻하고 건전한 심상이 이 단어 안에 들어 있고, 최 회장의 놀라운 사업 성공과 제품의 완성도는 이 단어를 이제 세계어로 만들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목걸이의 가격이 300불이라고요? 3,000불이 아니고요?"
"고객님, 300불이 맞답니다."

 

그의 제품을 구경하고 집어 든 손님들은 그저 호기심에 끌리거나 만족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입니다. "어떻게 이런 품질의 제품이, 고작 이 가격밖에 나가지 않는단 말인가?"

 

최 회장이 처음 뉴욕 시장에 진출했을 때, 오늘날과 같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기는 고사하고, 시장에서 평균수익이나 사업자로 남기에도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고성 출신 촌사람이 무슨....." 한국에서라면 특히 비웃음이나 사기 딱 좋은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그냥저냥 정미소집 아들에, 같은 또래라면 코나 질질 흘리고 다닐 나이인 10살에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다 망한 경력까지 있는, 봐 줄 것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다못해, 버젓한 학벌조차 없는(실업계 고교에 초급 대학 출신), 기술이나 열심히 배워 배나 곯지 않으면 다행인 처지로 여겨졌다고나 할까요.

 

그가 취한 선택은 대단한 역발상이었습니다. 그는 시장 조사도 하지 않고, 경쟁 업계의 실태와 전략분석도 하지 않았습니다(어차피,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요?). 그가 내린 결정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저 고객만 생각하고,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

 

그 고집이 통했습니다. 아니, 정성과 진심이 통했습니다. 고객들은 남다른 디자인과 품질,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을 보고, NADRI를 눈이 아닌 가슴에 새겼습니다.  세련된 디자인 감각 역시, 라이벌들의 스텝을 곁눈질하지 않고 "내가 고객이라면 어떤 제품을 꿈꿀까?"만 생각하는 마음에서 걸작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품질? 그는 본래의 전공이 아니었지만, 엔지니어로서 언제나 자기 분야에서 최고였기에, 엔지니어링 분야 공통에 해당하는 "최고 품질의 달성 이치"를 그리 오래지 않아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가격이었습니다.


아쿠아마린 같은 제품은, 제조원가의 1/5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팔아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팔면 팔수록 손해인 장사를 뭐하러 할까요? 최 회장은 중역들과 이해관계자를 향해 단호히 말했습니다. "NADRI가 고객에게 약속한 바는 그게 아닙니다. 난 이 가격으로 고객들에게 서비스하겠습니다."

 

"저 사람 이제 망했구만!"

 

천만에요. 최 회장은 지금 뉴욕 패션가를 지배하는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미국 동부 뉴욕 주의 그 뉴욕, "빅 애플"이고 다른 곳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뉴욕의 셀레브리티입니다. 모두가 경탄하고, 모두가 존경하고, 모두가 알아 모시는 유력 인사입니다.

 

그러나 그가 오늘도 잊지 않고 있는 건 바로 고객입니다. 언제나 초심과 겸손함을 잊지 않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내세우면 세상의 이치를 놓치게 된다."

 

당신은 최영태 회장을 알고 있습니까? 모르신다면, 세상의 중요한 이치 중 한 가닥을 놓쳐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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