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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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 읽기 전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에서 "... 그래서 사튀르닌은 칼을 들고 푸른수염의 침실로 돌진했다. 그가 결코 살인마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라는 대목을 읽고, 여러 이유에서 고개가 갸웃해졌습니다.


- 그런다고 뭐가 증명이 되나? 증명하려는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 제법 내공을 갖춘 저술가라고 해도, (여성의 경우) 소위 "팬심"에 빠져 作中에서 무리한 시도를 하는 수가 있다. 어려서부터 이 캐릭터에 너무 깊이 빠져 왔던 나머지, 이제는 돌아 와 거울 앞에 그저 조용히 서야 할 중년(어느새 그렇게 되었죠)의 노통브가 드디어 뒷감당 못할 일을 벌이는구나.
- 이미 닫힌 결말이 굳은 이 설화(페로 이전에도 근원 설화는 존재)를 두고, 근사한 어떤 재해석의 시도도 무위로 끝날 것이다.


반면, La Barbe bleue를, 이름도 긴 "돈 엘레미리오 니발 이 밀카르"라는, 스페인 귀족으로 국적과 혈통을 바꿔 놓은 것은 정말 기발했습니다. 이 돈 엘레미리오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무도 고귀한 혈통이라, 어차피 누구와 결혼해도 신분을 떨어뜨리게 된다."
"귀족은 '스페인 귀족'이라고 해야 어색하지 않다. '프랑스 귀족'이라니,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리는가?"
"헨리 8세라니? 어떻게 감히 그 천박한 튜더 녀석과 나를 비교할 수 있나?"


월세방을 구하러 왔다 사라진 8명의 여인은 다 평민들인데, 어떻게 그녀들을 사랑할 수 있(었)냐고 하니, 그가 내놓은 대답이 저 첫번째 것입니다. 그 뒤엔, 어설픈 귀족 행세를 하는 자들보다, 차라리 소박한 평민과의 결합이 더 낫다는 말도 이어집니다.

두번째 말도 틀린 게 아니죠. 프랑스는 대혁명 이전에도 신분 질서가 문란하여, 귀족의 족보도 금전으로 사 들이고 칭호와 작위를 사칭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반면 스페인은, 비록 그 때문에 역사 발전이 가로막혔건 아니건 간에, 누구의 조상이 어디서 뭐 하던 자였는지는 명확했고, 한번 틀어진 기득권이 좀처럼 혈통의 손아귀에서 놓여 나지 않았던 까닭에, 계층 이동이 불가능했던 건 확실합니다.

감히 그의 가문이, 랭커스터와 요크의 영향을 고루도 받은 튜더를 우습게 볼 격(格)과 위신을 갖추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여튼 "그 튜더"의 행동거지가 지극히 천박했던 것도 도저히 부인 못 할 "역사적 사실"입니다.

사튀르닌이, 시중에 파다한 나쁜 평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 놓는 방을 얻기로 결정한 건 여러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첫째, 일단 그런 나쁜 소문을, 방을 구하러 면접을 보러 가지 전까지는 듣지 못했다. (이유가 있는 것이, 속물스러운 경향이 상당히 적은 아가씨였고, 다음으로 그녀는 프랑스 토박이가 아닌 벨기에인이기 때문이죠)


둘째, 그 정도 가격(오백 유로라고 하네요. 물론 배경은 현대 프랑스입니다)에 그 정도의 호사와 편의, 쾌적을 누릴 수 있는 방은 파리에 없다.


셋째, 그녀는 도무지 겁이 없고, 오히려 그런 나쁜 소문의 주인공을 한번 만나서 제 할 소리를 퍼부어 주고 싶은 당찬 기질이 있다.


넷째, 그녀는 천박한 호기심 때문에 스스로 맺은 약속(집주인인 돈 엘레미리오의 암실, 즉 사진 현상실에 들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지금까지 여덟 명의 젏은 여성 세입자가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을 깨지 않을 자신이 있고, 호기심에 굴복하기엔 너무 시니컬한 성격이다(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난 관심 없어)


다섯째, 그녀는 사실, 아주 옛적부터 "푸른 수염"에 푹 빠졌던 아멜리 노통브의 분신이고, 지금 작품 속에서 이 푸른 수염을 열심히 인터뷰도 하고 다른 미션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농담입니다)

푸른 수염, 아니 돈 엘레미리오는 자신과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위인입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의 질서는, 레콩키스타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규범으로 확정되었던 그 가치관, 그 제도, 그 이상과 신념과 명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는 골수 가톨릭 신자요, 다만 현대의 썩고 타협적인 미사에 나갈 수 없어 전담 신부를 불러 자기 집에서 예배를 올립니다.


"왜 미사에 나가지 않으시죠?"
"미사가 내게로 오니까."


그는 집 안에서 여러 문헌과 서적을 탐독합니다. 그 중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녀 사냥이 한창일 때, 토르케마다로 대유(代喩)되는 종교 재판 기록도 포함됩니다. 그냥 재판 서류를 읽어도 재미는커녕 독해 과정에 엄청난 고통이 따를 만한데, 하물며 수백 년 전의 마녀 처단 기록이라니! 사튀르닌은 묻습니다.

"그 재판이, 이전 시대의 야만과 비교하여 엄청난 진보라고 하셨는데, 그 재판을 거쳐서 살아남은 마녀가 얼마나 되나요?"
"한 사람도 없소."
"풋, 정말 엄청난 진보군요."
"어차피 그 신명(神明) 재판은, 마녀를 마녀로 밝혀 내었을 뿐이니까!(그런 마녀들이 재판이라는 호사를 누린 게 어디냐는 뜻)"

돈 엘레미리오는 사튀르닌과 한 치의 양보 없이 치고받습니다. 그 배경은, 바로 이 유서 깊은 가문의 전통과 사치가 압축되어 있는 저녁 식사 자리입니다. 식사가 준비되면, 하인 멜렌이 와서 정중한 어조로 사튀르닌에게 주인의 초청 의사를 전합니다. 물론 사튀르닌은 거절할 수 있습니다. 초청에 응하고 그 비싼 한 끼 식사를 대접받아도 그녀가 추가로 부담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어느날 정찬 자리에서, 마침내 스스로를 신이라고까지 칭하는 엘레미리오의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튀르닌은 쏘아붙입니다. "정신병원에 가기 딱 좋은 분이시네요!" 사실 사튀르닌은 그 전, 첫 만남 자리에서 "왜 자살하지 않으세요?"라 는 더 심한 말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렸을 때 급사했다는 당신 부모님은 실제로 당신이 죽인 것 아니냐고까지 몰아 붙입니다. 고독한 귀족은 강력히 부인하는데, 사실 그는 물어보지도 않은 질문에 애써 대답을 하지 않을망정, 거짓 증언을 하지는 않습니다. 귀족이니까요.

이런 발칙하기 짝이 없는 사튀르닌에게, 엘레미리오는 정직한 고백을 털어 놓습니다. "난 당신을 사랑하오. 운명인 것 같소." 일단은 처음 면접 자리에서부터 반했다고 둘러대지만, 사실은 사튀르닌이 색채로서의 "노랑"을 거론했을 때 본격적으로 눈이 번쩍 뜨였던 것입니다. 물론 키가 크고 날씬한 몸매(엘레미리오는 "표범 같은 당신의 몸을 상상했소."라고도 털어 놓습니다)를 지닌 사튀르닌의 외양에도 매혹된 바 있었을 겁니다.

야만과 문명을 가르는 첫째 조건을, 날로 먹느냐 요리를 해서 먹느냐로 꼽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지극히 까다롭고 세련된 취향의 귀족은, 그래서인지 직접 요리를 해 먹기도 합니다. 사튀르닌에 대한 그의 첫째 고백은, 손수 만든 생토노레를 꺼내 귀가하는 그녀에게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생토노레를 내밀며 사튀르닌에게 뭐라고 하는지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케이크에 에스파냐의 위신을 부여하기 위해
부글부글 끓는 캐러멜에 금 잎을 몇 장 슬쩍 넣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내가 타인의 취향에 열려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꾹 참았소."


마지막 줄이 얼마나 귀여운 말인지 한번 보십시오. 사실 엘레미리오는 에스파냐의 위신 부여(소위!)라는 동기 말고도, 생토노레에 금을 집어 넣어야 할 더 강력한 내적 욕구가 있었습니다. 다만 스포일링이 되므로 여기에 제가 적을 수는 없네요.  귀족들에게 금 흡입이라는 오랜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 외에도, 이 절박한 귀족은 여태 자신이 살아 온 이유(적은 나이도 아닙니다)를 증명하기 위해 ars magna(라틴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위대한 기예"라는 뜻입니다. 이 맥락에서 어떤 뜻인지는 이상해 선생의 역주를 보시구요)를 드디어, 드디어 이 "제 5원소"에게 당장 베풀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반칙입니다. 그렇게 귀착되어야 할 마땅한 운명이긴 한데, 그런 방법으로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왜 자기 아들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죽게 했을까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려면 그냥 해 주면 안되나요? 대가를 치러야만 해 주겠다니 장사꾼이나 마찬가지군요."

사튀르닌으로부터 이 말을 들었을 때, 돈 엘레미리오는 속으로 뜨끔했을 겁니다. 그는 끝에 가서 "한 번도 그렇게 생각(무엇인지는 스포일러라서 적을 수 없습니다)해 본 적 없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소"라고 합니다. 그는 착각과 환상 속에, 자신의 가문을 "그리스도의 핏줄'이라고 여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왜 제가 이 리뷰에 이 말을 썼는지 다시 생각해들 보셨으면 합니다.

그의 혈통은 솔직히 좀 수상쩍기도 합니다. 아랍 어는 읽지를 못하고(이베리아 반도의 자랑스러운 귀족치고는 좀 부끄럽습니다), 조상은 카르타고에서 건너온 카탈루냐인인데, 다만 그도 그렇고 그 선조도 그렇고 에스파냐 인이 되기를 선택한 카탈루냐인입니다(이런 예는 너무도 많습니다. 꼭 민족 반역자로 볼 건 아닙니다^^ 그건 우리식 기준이구요). 그러니 순전히 혈통으로만 보자면 꼭 돈키호테와 자신을 동일시할 이유는 없습니다(라만차는 어디까지나 마드리드의 영향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돈키호테의 특징을 취해서 거기에 15를 곱해 보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가 나올 거요."

라고 말합니다.

사실 여기서, 돈키호테를 "돈 엘레미리오"로, 그리스도를 "돈키호테"로 바꾸어 놓아도 이 명제는 (돈 엘레미리오 본인에게와 소설의 맥락에 한해)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돈 엘레미리오에 225를 곱하면, 이번에는 그리스도가 나오는 셈입니다.  요 다음 장면에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므로, 이는 아주 일관성 있는 내러티브입니다.

사튀르닌이 언제나 직설적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자기 생각에 상대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한다 싶을 때, "당신의 말은 기묘한 인과성을 지니고 있군요."라며 점잖게 꼬집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과연 돈 엘레미리오는 광인일까요? 그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정말 정신의 건전성(sanity)이 염려되기도 합니다.


"우리 가문이 이리 프랑스로 망명 온 건, 조상 중 한 분(할아버지나 조부라고 하면 될 걸 굳이 "조상"이라고 하네요)이, 프랑코 총독을 급진 좌파(헉!)로 취급했다가 그만 그의 눈밖에 나고 말았소."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적들 역시 우리를 눈꼴시어 한다오."

노통브 특유의 유머가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프랑코를 좌파로 취급할 정도의 완고한 우경이라면, 대체 본격 좌파는 어떻게 본다는 뜻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유를 모르겠다니!

그러나 돈 엘레미리오는, 사튀르닌을 반하게 할 만한 섬세한 위인이었습니다. 생토노레를 손수 만들어 먹인 데에 이어, 이번에는 자기가 직접 바느질을 하여, 쓰다듬으면 손 끝이 미안해 질 만큼의 질 좋은 샌노란 안감과, 만든 이의 섬세함과 장인적 정성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촘촘한 바느질이 인상적인 치마를 선사합니다. 어쩌면 귀족의 본질적 정의는, 그 족보사항이 아닌 기질과 취향, 행동거지, 사고방식의 섬세함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은 진짜 귀족이고, 나는 그와 사랑에 빠져야만 하겠다!

그래서 사튀르닌은, (제가 이 리뷰 맨 처음에 적었듯이) 식칼을 들고 (별로 뭘 걸치지 않은 잠옷 바람으로 "거의 벌거벗다시피[엘레미리오의 표현입니다]") 푸른 수염의 침실로 쳐들어 간 겁니다.

"당신 같은 이가 살인마일 리 없어!"

이 소설의 주제는 색(色)의 탐구입니다. 색상표를 보면 색만큼 선명하고 똑 부러지는 게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런 색 역시 빛이 사물과 부딪혀서 내는 파장의 장난일 뿐입니다. 그저 우연의 산물입니다. 책에 그런 말은 없습니다만, 영미인들(타 백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은 yellow란 단어에 "비겁한. 천한"의 뜻을 그대로 집어 넣고 사용하지 않습니까? 반면 약간의 채도와 명도 차가 있을 뿐인 gold에 대해서는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말입니다. 똑같은 백발인데도 grey hair와 white hair가 현저한 차이의 느낌인 것처럼요.

사튀르닌은, "색을 몰라도 사는 데에는 전혀 지장 없다. 색을 두고 일본인들은 그래서 쾌락의 동의어로 쓰기도 한다(그건 그녀의 착각입니다. 당연 중국의 구법승들이 오리지널이죠. 일본이 여기서 왜 나옵니까). 그러나 색을 모르면, 궁극의 쾌락은 결코 모른 채 생을 마치게 된다."고 합니다. 엘레미리오는 "그건 미처 몰랐던 바지만 멋진 이야기"라며 동의합니다. 수수께끼(무엇이었을까요?)를 풀어낸 사튀르닌에게, 이 귀족은 이제 전폭적인 인정과 대등한 지위를 허(許)합니다. 이는 그로서는 영혼의 동요를 불러일으킬 만큼 중대한 결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른 결과는,... (책을 직접 읽어 보십시오)

"니발 이 밀카르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문 바깥의 사람은 모두 평민이라오. 어느 가문이 감히 우리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할 수 있다는 말이오? 나는 그런 망상보다는 차라리 우연이 좋소."


결국, 색(色)도 그렇고 공(空)도 그렇고, 모두가 우연일 뿐입니다. 그 우연 속에서 성(聖)스러움을 발견하는 능력을 serendipity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암실은 비어 있기도 하고, 일곱 빛깔과 나머지 두 색채의 결합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할 것입니다. 돈 키호테와 연쇄 살인마 사이에 그리스도가 있을 수도 있고, 번화가를 지나가는 어느 새침한 아가씨의 백 안에서 느닷 세상의 종말과 기적이 동시에 튀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사튀르닌은 으로 변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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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고 백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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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잭 리처의 정신적 본향은 어디까지나 군대입니다. 그는 아직도 특수 부대 대장으로서의 정체감이 자아의 최우선이며, 그를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이들도 군인들이고, 그의 가장 자랑스러운 행적도 군인으로서의 그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는 전역 후에는 영낙없는 떠돌이 신세인데, 사실 사내로서 멋진 그의 모습에 감탄하기도 하면서도, 대체 왜 저 정도 되는 사람이 저렇게 살아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여튼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군대로부터, 그 중에서도 모부대發로, 커다한 위기가 바로 그에게 닥칩니다. 하나는 그가 특수부대원 시절 모 민간인(이라고는 하나 질 나쁜 깡패입니다)을 구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 또 하나는 서울(!)에 군인 신분으로 체류하던 시절(군인 신분이 아니었으면 큰 문제가 안 됩니다), 한 여인과 간통 끝에 아이 하나를 낳게 한 사건입니다. 이상하게도 이 두 사건이 동시에 소송의 형식으로 그의 발목을 옭죄어, 그는 간만에 접근한 부대 소재지로부터 멀리 떨어지라는 압력을 받습니다.  

 

범법을 저질렀으면 공권력으로부터 구금이나 출두의 압박이 가해져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그를 최우선적으로 찾은 물리력은 "당장 이곳을 떠나." 같은 어설픈 협박입니다. 누가 이런 시도를 했던 간에, 그 방법이 옳지 못했습니다. 옳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이유 중 하나는, "FIGHT OR FLIGHT"의 상황에서 그는 언제나 "맞서 싸우는 편"을 선택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가 대단히 치밀하고 잘 돌아가는 두뇌를 가진 이여서, 사리에 맞지 않다 싶은 상황에 대해서는 겁에 질리기보다 "왜 이런 현상이 내게...?" 같은 의문을 먼저 품는다는 점입니다. 

 

람보(의 완력, 용기)와 셜록 홈즈(의 두뇌)를 결합한 사기 유닛 답게 그는 이 거대한 음모에 맞서 싸우는 편을 선택하고, 반(半) 자진(自進)하 여 영창에 구금되었다가, 같은 시설에 수감된 터너 소령(시리즈 역대급으로 꼽아야 할 미모의 소유자인데다, 사리 판단도 참으로 현명하게 돌아가는 여성입니다. 리처와의 두어 번 정사신을 통해 우리 독자에게 주는 서비스의 강도도 녹록지 않습니다)과 함께 동반 탈옥하여, 모든 정보망(카드 결제 내역, 항공기 탑승 이력, 거대 호텔 체크인 사실 등등)을 손 안에 넣고 둘을 추적하는 가공할 적을 따돌릴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역으로 압박하기까지 합니다.  

 

리 차일드의 이 시리즈를 가리켜 페이지 터너라고 하는 건, 단지 스토리 전개상의 재미라든가 캐릭터의 매력 형성에 과다 투자된 자원 따위의 덕분이 아닙니다(매력이 고작 그것뿐이었다면 이 시리즈가 그리 장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건의 진행은 최대한 빠르게 하되(따라서 간결하고 호흡 짧은 문장이 사용됩니다만), 리처의 심리 묘사(특히 상대의 육체적 공격 전술을 미리 읽고, 자신의 대응 방법을 연구하는 모습)나,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풍경, 배경의 묘사(외계인이 보았을 때, 이 별의 생명체들은 음료수나 손톱 관리가 외과 시술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여길 것이라는 등의 표현),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블랙 유머와 repartee가, 마치 이 소설이 헤밍웨이식 간결체로 일관하는 듯한 착각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는 독자에게 안기기 때문입니다. 밀도와 깊이 있는 내용 이해를 버거워하는 독자에게도 그 수용 범위 안에서 선택적으로 쾌감을 안겨 주고, 소설에 푹 몰입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그만의 깊이를 따로 선사하는 데에서, 리 차일드의 작가적 역량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과연 15세 소녀 사만다는 잭의 딸일까 아닐까? 악당들의 하수인들을 마침내 거리에서 퇴치하고, 이 가공할 음모 최종의 mastermind를 마침내 밝혀 내는 과정 말고도, 이런 자잘한 재미를 곳곳에 심어 놓아 독자가 대체 딴 데 정신을 못 팔게 만듭니다. 페이지 터너가 아니라 페이지키퍼입니다. 빨리 읽어내고 나면 그 아까움과 아쉬움을 어찌할까 하는 행복한 걱정에, 아끼고 살펴 가며 책장을 넘기게 하기 때문이지요.

 

아주 불만이 없는 건 아닙니다. 소송 사건(그 중 하나는 형사사건인데요)의 개시와 진행이, 변호사(군인 신분이라고는 하나)들의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붊명확할 수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한때 그렇게나 리처를 옭죄던 압박이, "편하게도(리처의 해명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던 당국자들의 표현이기도 하죠)" 한순간에 그리 "관련 서류 열람"만으로 해소될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리뷰에서  결말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결국 "태산명동에 서일필"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들었구요. 정경호씨의 시원시원한 번역은 언제나 감탄스럽지만(번역문 같지가 않습니다), "파슈툰"처럼 굳이 우리 눈과 입에 익은 고유명사를 "패쉬턴"으로 쓸 필요가 있었을지요. I'll see what I can do를 "내가 할수 잇는 게 무엇인지 찾아 볼게요."라고 옮긴 건 좀 기계적이라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불만은 다 잠재울 수 있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오래 전 원서로 한 번 읽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독자인 저에게도, 이 한국어판은 여전한 쾌감, 스릴러가 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만족을 다 안겨다 주었습니다. 영화도 빨리 개봉했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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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왜 삽질을 시킬까?
데이비드 디살보 지음, 김현정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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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군대에서도 "삽질" 위주의 업무 부과를 지양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머리가 좋게 태어나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쪽으로 머리를 쓰지 못하고 단순 반복 노동에 몰리면, 누구를 막론하고 억 울한 느낌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뇌가 우리에게 삽질을 시킨다"고 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만약 "삽질"이라는 게 (그런 걸 우리에게 시킨다는) 뇌를 머리에 품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기왕 시키는 그 "삽질"의 방향과 질(質)을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좀 놀라운 깨우침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더군요. 첫째는, 생 각이라는 것에도 단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물론 하고 삽니다. 몸 곳곳에서 체액이 분비되거나, 체온 유지를 위해 갖가지 일이 다 벌어지는 것처럼, 생각이라는 건 우리의 뇌 속에서 멈출 줄 모르고 지속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도 단계가 있어서, 지금 하는 생각을 두고 이를 반성하는 생각이 따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메타적인" 생각 입니다. 저자는, 이런 메타적인 생각을 하되(일단 보통 사람들은 메타적인 생각 자체를 잘 떠올릴 줄 모릅니다), 자신에게 유익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는, 이 메타적인 생각을 고리로 해서, 개념, 판단, 행동으로 옮김 따위의 단계가 끊임 없는 고리를 이루어, 그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이어 주는 피드백 시스템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이 과정에서, 사람의 성격은 바뀔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더군요). 지난 시대의 통념이라고 할 수 있는 좌뇌/우뇌의 분립 가설(그동안 여러 책에서 그림 같은 걸 보셔서 아시겠지만, 좌뇌와 우뇌는 구조적으로 뚝 떨어져 있다는 게 통설이었습니다)이 거의 오류나 환상에 가까우며, 좌뇌와 우뇌는 끊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게 오늘날 학자들 거의가 동의하고 있는 포인트라는 겁니다. 뇌는 이처럼 역동적인 기관이며, 그러기에 오늘날처럼 진화된 모양과 기능을 이룰 수 있엇습니다. 어른신들 하는 말씀 중에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것도 다 이를 두고 이름이며,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특성을 두고 "신경가소성(뉴로플라시티)"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생각은 우리 자신 그 자체가 아니다." 저는 이 말이 가장 충격으로 와 닿았습니다. 데카르트도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생각하는 자신"에서 찾았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뜻일까요? 저자는 그보다, 머리 안에서 대뜸 떠오르는 생각의 익숙한 흐름은, 오랜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그게 내 생각인데 나도 모르다니!) 형성된, 일단의 습관 결과물이지, 바로 나 자신인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 습관적인 생각의 뭉치들은, 앞으로 환경이 급변하거나 내가 다른 생각 습관을 가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기왕 그렇게 바뀔 수 있다면, 종 더 영리하게 바뀌어 보는 건 어떤가? 이것이 저자의 제안입니다. "메타 생각"의 유용성은 여기서 나옵니다. "잠깐, 내가 지금 이 생각을 왜 하고 있는 거지?" 처럼, 생각을 한 단계 위애서 내려다볼 수 있는 "멈춤 생각", "생각을 제어하는 생각"을 해 보자는 거죠. 이렇게 되면 외부 요인이 새롭게 바뀌어 나의 생각 습관을 고쳐 주길 기다리지 않아도 되며, 동시에 머리의 씀씀이가 더 효율적이 되고, 뇌는 더 유연하고 변신에 적합한 유능한 도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책은 뇌 신경과학과 심리학의 최신 성과를 정리한 제 1부와, 그러한 연구 결과를 어떻게 우리 생활에서 응용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제 2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2부의 내용은 "메타 생각을 잘하는 똑똑한 뇌 만들기"를 위한 30가지 요령(많죠?)을 제시하고 잇는데, 제 생각에는 이 30가지 오령 중 자기에게 맞는 것만 추려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껌 씹기 같은 것도 있습니다. 껌 씹는 활동으로 뇌가 메타적으로 단련된다는 착상에 귀가 솔깃하실 분도 잇을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는 평생 뇌의 3%도 쓰지 못 하고 죽는다."고 했는데, 다만 나머지 97%를 어떻게 해서 끄집어 낼 수 있는지를 모르니 결국 그 3%가 100%나 뭐가 다르겠는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을 가졌더랬죠. 메타적 생각은, 과학적 근거에서 이 잠재되고 그간 사장되었던 뇌의 기능을 최대한 활성화시키는 비책이었습니다. 꼭 그 묵혀 두었던 옛 쌈짓돈을 내어 쓴다는 식이 아니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통제와 반성을 할 수 있는 습관을 가진다면 그만으로도 보람된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착한 삽질, 남는 게 있는 삽질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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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독스의 힘 - 하나가 아닌 모두를 갖는 전략
데보라 슈로더-사울니어 지음, 임혜진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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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 옛 말에, "게도 구럭도 다 놓친다."는 게 있습니다(혹은 비슷한 말로, "집토끼와 산토끼 모두 손에서 놓고 만다"도 있죠). 어느 한 가지 목표를 정했으면, 가능성이 높은 것에 (속된 말로) "올인"해야 하지, "두길마보기"를 하다가는 모든 것을 다 잃는 최악의 수를 둘 수 있다는 뜻입니다.

 

종래 경제학이나 경제학에서도, 한 가지 goal에 전력을 쏟다 보면 다른 부문에서 소홀해지고 마는 것, 혹은 상쇄(offset) 효과가 일어나고 마는 걸 두고 항상적(恒常的) trade-off 라는 개념 술어를 써 왔습니다.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실무를 맡은 경영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한 목표를 추구하다 보면, 다른 걸 소홀히할 수밖에 없다는 아쉬움, 두 가지 미덕을 한 몸에 동시에 갗출 수 없다는 제약은, 인간사 어디서도 통용될 수밖에 없는 원초적 제약 사항으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궁(窮)하면 통(通)한다고 했던가요? 최근 글로벌, 로컬 할 것 없이 워낙 시장 전방위적으로 경쟁이 치열하게 일어나다 보니, 기업가들과 그 밑의 실무가들 역시 그 두뇌의 내연 엔진에서 김이 다 날 만큼, 쓰고 쓰고 또 머리를 써서 위기와 한계 상황을 탈피하려 애씁니다. 이러다보니, 과거에 안 되었던 것이 (어느 새) 지금은 되고 있고, 과거에 철칙에 가까운 상식이던 것이 지금은 우습게 보이는 낡은 구호로 전락해 있기도 합니다. 워낙 변화가 빠르다 보니, 일일이 log를 적어 가는 일조차 무의미하며, 그저 현황의 첨단(art of the state)를 하루하루 추격하기조차 버거운 게 현실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제는, 토끼 한 마리를 쫓아서 무슨 일이 그냥 이뤄지는, 자기 맡은 소임을 다한 걸로 밖에서 쳐 주는, 그런 만만한 세상이 아닙니다. 한 마리 토끼를 추격하다 보면, 그 한 마리나마 수중에 확보되는 게 아니라, 한 마리는 결국 그 한 마리대로 놓치고, 다른 녀석을 다른 기회에 다른 길로 포획할 여지도 상실하고 마는 그런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어디 가서 일 잘 한다 소리를 들으려면, 두 마리를 토끼를 동시에 몰아 나가야 합니다.

 

이는 단지 욕심에 불과한 것도, 출세욕 때문에 무리수를 두는 것도 아닙니다. 저자 슈로더사울니어 박사는, 그 자신이 뻬어난 경영 이론가일 뿐 아니라, 컨설팅 회사 대표직을 맡은 경영자이기도 합니다. 이분의 말에 따를 것 같으면,

 

어느 한 목표(A)를 추구해 가면서, 동시에 다른 목표(B)에서 시선을 놓치지 않고 있어야만, 원래의 목표(A)까지 완수할 수 있다.

 

한번 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A는, 이번에는 반대편 추에 놓여 있던 B에까지 영향을 주어, 선순환이냐 현상 고착이냐 그렇지 않으면 악순환으로 이어지냐의 새 상황을 열게 된다.

 

즉, A가 안 되면 B도 안 되는 것이며, A가 잘 되다가도 어느 순간 B에 주의를 놓치기 시작하면, 이번에는 그나마 잘 되던 A도 침체에 빠질 수 있다.

이상의 이 책의 골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제한된 능력과 자원으로 어느 하나라도 확실히 잡아야지, 둘 다에 신경을 분산하는데 일이 잘 될리가 있는가? A도 잘 되는데, 동시에 B까지 잘 된다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말이 안 되는 듯 보이면서도, 그 속에 진짜 진리(피상적 표피적 진리가 아닌 근원적 타당성을 가진 명제입니다)를 내포하고 있는 걸 두고, 우리는 국어 시간에 패러독스(역설. 逆說)이라고 배웠습니다. 저자 슈로더사울니어 박사는, 작금의 경영은 패러독스 경영의 묘미를 깨닫는 이와, 그렇지 못하고 낙오하는 이, 둘로 갈릴 것이라고 이 책에서 말합니다. 얼핏 들어 대담하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로 우리가무의식 중에 은근 수긍하고 있던 진리이기도 합니다.

영어에서 or이라는 접속사는, 양가적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A와 B 사이에 배중(排中)의 원칙을 적용하여, 이것이면 이것이고 저거면 저거지 중간 지대가 없음을 뜻하는 택일적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수학 시간에 배운 대로, 각각의 영역(차집합)과, 교집합, 이 둘을 모두 포함하는, 합집합으로서의 or입니다. 철학 서적에서는 이를 두고 and/or이라고 표기하는 예도 아마 많이 보셨을 겁니다.

 

저자 슈로더사울니어 박사는, 이 두번째 의미의 and/or 개념을, 우리가 일상(그리고 비즈니스 영역)에서 마주치는 모든 상황에 적용시켜 나갈 것을 패기만만하게 제안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단기적 수익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장기적 성장을 바라볼 것인가. 전통적 의미에서 이 두 목표는 택일적 성격이었지, 동시에 달성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죠. 하지만 지금은? 수익을 내지 못하는 회사는 장기적으로도 성장을 못 합니다. 성장을 못할 회사는, 단기에마저 수익을 올릴 능력이 없습니다. 아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상식이 아니었습니까?

 

화폐금융론이나 재무 관리 시간에 배우셨을, 고수익이라는 메리트는 반드시 고위험이라는 달갑지 않은 장벽과 마주친다, 수익과 위험 회피라는 두 가지 미덕은 결코 동시에 추구되거나, 단일 벡터상에 놓일 수 없다는 명제 역시, 최근 극한의 부진과 불황을 맞고 있는 증권업계에 큰 경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궁하면 통한다고, 옹색하게 청담동, 대치동에 호화 점포만 차리고 프라이빗 뱅킹 마케팅만 할 게 아닙니다. 매력적인 상품을 꾸려 고객에 제시하여, 슈퍼 리치 노멀 리치들에게 "제발 내 돈 좀 맡아 주세요"라며 매달리게는 왜 못하겠습니까.

 

이 모든, 가망 없고 허황되어 보이는 상황들에 대해, 저자 슈로더사울니어 박사는 "당신이 눈만 크게 뜨고 마음만 긍정적으로 먹는다면, 안 될 것이 없음!'을 책 내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반론이나 대전제만 내세우는 게 아니라, 실제 사례가 많다는 것도 이 책의 강점입니다. 이는 실무의 현장에서, 저자 슈로더사울니어 박사 자신이 다양한 처지에 있는 기업들과 호흡을 같이했다는 사실에 크게 기인합니다. 아마 실무종사자들, 그리고 당장 운영의 한계점에서 묘수가 없을까 전전긍긍하는 자영업자들에게, 이 책은 아마 좋은 영감과 활력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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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은 왜 이디야에 열광하는가 - The EDIYA Story
김대식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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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야, 언젠가부터 거리를 지나다보면 자주 마주치는 브랜드이고 그 로고입니다. 라틴어 edere를 그 어원으로 했을 것 같은 이 신선한 메이커는, 다른 경쟁자들과는 달리 너무 자주 눈에 뜨이

지도 않고, 소비자들의 괜한 허영심을 자극하지도 않는 조용한 행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커피점을 보았을 때 느끼곤 했던 이미지는 친근함과 믿음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의 주관적인 느낌일 뿐, 실제로 이 회사가 어떤 원칙으로 제품을 만들고, 개별 점포를 관리하며, 고객을 보는 시선을 어떻게 가지는지야 알 수 없었습니다. 소비자, 혹은 지나가는 손님이 그런 것까지 알 수는 없는 게 당연하죠. 막연하게 형성된 이미지만큼, 합리적인 구매에 지장을 주는 건 없습니다. 그런데 마케팅이라는 게, 씁쓸하지만 바로 이런 소비자의 심리와 허점을 노리고 들어오는 겁니다. 이디야에 내가 언제 이런 식으로 "마케팅을 당하"기라고 했던가? 뵨디 소비자 마음에 언제 파고들어왔는지도 모르게 하는 게 마케팅의 정석이긴 하지만요.

 

음, 그런데 이 책을 보고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 기업은 간단히 말해 "마케팅을 잘 안 하는 기업"이더군요. 이런 요식 브랜드에서, 지나친 마케팅은 어찌 보면 이미지 조작이요 나쁘게 말해 세뇌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전 작업에도 다 돈이 들게 마련이니, 그 투입 원가는 고스란히 우리가 마시는 커피 값에 입혀져서, 기분 한번 내느라 내 호주머니는 그만큼 가벼워지게 됩니다. 근사한 옷 입고 넷북이나 모 패드를 보며 그렇게 숍 바깥에 풍경으로 전시되는 무드에 빠지는 걸 두고 우리는 "된장질"이라는 점잖지 못한 용어로 부르기도 하죠.

 

된장질은 결국 거품입니다. 이 거품은 기업이 부추겨서 최종 소비자에게까지 이전되는, 없어도 그만이고 너무 잦으면 결국 부작용을 일으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해악 중 하나죠. 커피 한 잔에 과도한 거품을 쏟는 건, 결국 모두를 위해 좋지 못한 일입니다.

 

지나가며, 혹은 가끔 문 열고 들르기도 하며 느낀 친근감은, 괜한 착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품을 뺀 경영은 합리적인 가격을 낳고, 또 우리의 진짜 혀와 뇌를 만족시킬 수 있는 맛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커피, 아니 어떤 상품이라도, 그것을 구매하며 원하던 것은 기분이었을까요, 아니면 상품의 본체적 효용이었을까요? 게다가 커피는 우리의 인체에 흡입되는 것이니, 될 수 있으면 건강도 함께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기업은, 소비자의 눈을 가리고 주머니를 노리는 곳이 아니라,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우리들과 공유하기를 원하며,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곳입니다. 진심이 아닌 마케팅은 속임수일 뿐 아니라, 이미 소비자에게 통하지도 않습니다. 책을 읽고 느낀 건, 내가 거리를 지나며 느낀 감흥이 괜한 환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죠. 이 각박한 도심에서 때론 이런 진심이 전해져 올 때도 있구나 하는 안도와 희망이었다는 걸 오히려 깨달았습니다.

 

이디야는 또한 직원들을 존중하는 내부 풍토를 가지고 있나 봅니다. 고객과 직원은 먼 과거에는 업주의 착취 대상이었죠. 현대에 들어선 고객 접대 때문에 직원을 닦달하는 행태도 흔히 봅니다. 그런데 이디야는 그런 게 없다고 합니다. 직원의 기를 최대한 살리고, 이로부터 창의적 업무 성과를 이끌어 내어 서로가 윈-윈 하는 풍조가 제대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디야의 철학 중 하나는 개별 점포를 상대로 "갑질"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기업이 그를 둘러싼 사회, 공동체와 분리된, 생태계 포식자적 존재가 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공존을 위한 소통을 해야 하고, 영업에 있어 진심을 먼저 내세우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바쁜 발걸음으로 출근하면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에, 검은 속셈이 아닌 선명한 채도의 낭만이 담기길 원합니다. 마냥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는 그 짧은 점심 시간에도, 우리는 진정한 회복과 위안을 커피 한 잔에서 얻길 바랍니다. 이디야가 이런 지친 직장인과 소비자에게, 가식 없고 서로 통할 수 있는 친구로 오래 남아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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