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지지 않을 용기 - 나에게 힘을 주는 아들러 심리학
알프레드 아들러 지음, 박미정 옮김, 오구라 히로시 해설 / 와이즈베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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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3대 거장이라고 하면 보통 프로이트, 융과 함께 이분을 꼽죠. 이분은 스승 프로이트와도, 그리고 융과도 달리, 심리학과 사회학적 측면을 결합한 경향과 공로가 있습니다. 인격의 distortion이, 개인의 열등감과 이를 만회하려는 노력 사이에서 빚어진다고 한 그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의도와 관계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많은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는 이런 아들러의 이론적 성과를 자기계발 분야에 알맞게 적용, 변형하는 노력도 두드러진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 아들러가 (상대적으로) 생소하다고는 하지만, 최근 일이 년 사이에 "자계서 포맷"으로 많이 소개된 편이라서 요즘 독자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여튼 오늘날 우리에게 자기계발의 대가로 알려진 많은 저자들이, 알고 보면 이 아들러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약간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베스트셀러 자기계발 저자들에 대해서는 훤히 정보를 알다가도, 정작 이분처럼 순수 학문의 거장에 대하서는 까맣게 모르는 풍토가 과연 참된 독서를 위한 분위기가 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하지만, 결국 독서는 나 자신을 위한 노력이고 활동입니다. 아무리 아들러에 대해 원전을 읽고 정확한 이해를 얻었다손 쳐도, 그것이 읽은 이의 삶에 근본적 변화를 주고 역동적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한다면, 해당 분야 연구직에 있는 처지가 아닌 이상에야 별 큰 보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 알프레드 아들러가 우리 현대인, 바로 회사에 다니고 바쁜 시간 쪼개어서 내 몸값을 높일 궁리에 여념이 없는 우리들에게 미친 영향만 놓고 보자면, 프로이트나 융보다도 더 고마운 사람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 들여라." ,"나와 주변 환경을 절대 긍정의 정신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말들은 요즘의 자계서 작가들이, 그 최초의 출처가 어딘지도 모르고 열심히 퍼 나르는 말(물론 그 작가들은 나름대로 자기 확신과 흥이 있어서 하는 일이겠지만요)은, 알고 보니 이 아들러 박사가 학문적 동기에서 최초 규명하고 명제로 정립한 것들이었으니 말입니다. 파생적 저작이나 카피본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감동과 동기 피부여라면, 오리지널 저자(author)로부터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책의 분량은 그리 두껍지 않습니다. 250여쪽이 채 안 되어서 처음엔 조금 실망도 했습니다. 저자 명의는 아들러 본인"으로 되어 있지만, 정말 자계서 필진의 편집이 대거 개입한 느낌을 줄 만큼,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러 특유의 긴 호흡의 함축적인 육성은, 이 세련된 텍스트 속에서 많이 증류, 정류된 느낌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당장 이 팍팍한 사회 생활 속에서 핀치에 몰리고 메말라진 우리 마인드를 구제하려면" 긴 시간과 정력을 들여 읽어야만 할 텍스트보다는, 이런 포멧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영화 <대부>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난 억울해하거나 복수하려 들지 않았어! 왜? 이 모든 건 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거든!" 어쩌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엄청 책을 많이 읽은 분이죠)도, 아들러의 이 언명에 영향을 받아 그런 대사를 구상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들러의 인생관은 그것입니다. "You are what you have chosen." 내 의지가 작용하지 않은, 던져진(被投的) 요소가 아닌, 의식을 가진 후 독자적으로 선택을 해야 했던 그 무수한 순간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내가 이뤄진 것입니다. 결과가 나쁘다 해도, 현재의 처지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해도, 그것이 다 나의 귀책이라면 억울한 마음이 들 이유가 적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다음 번에 같은 실책을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는 최화정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쇼를 듣다가, 자신의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하지 않는 게스트 가수에게 "뭐 괜찮아, 성격은 바꿀 수 있으니까."라며 농담을 던지는 걸 들었습니다.  이 말의 속뜻이야 외모지상주의를 강조하는 것이니, 오히려 다른 이들은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여튼 중요한 건 "성격도 결국 본인의 각성 여부에 따라 바꿀 수 있다."는 점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각성'이라는 게 힘든 것입니다만.

 

아무래도 아들러의 말 중 압권인 건 "인간이란 본디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라는 그 명언이겠습니다. 익히 아는 말이지만, 아들러의 저작으로 표시된 책에서 그 말을 직접 접하니 그 감회는 또 다른 면이 있더군요. 열등감이 문제인 건, 그 열등감이 주는 마음아픔이라든가 감정상의 장애도 있겠지만, 열등감을 만회하려고 벌이는 과정에서 저지르는 더 큰 실수와 패착입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감정 포지션의 적극적 설정의 권유는, 학자치고는 드물게 보는 아들러만의 실용성과 명쾌함입니다. 사실 그는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이런 실용적 분야에서 더 큰 성공과 두각을 나타내었을지도 모릅니다. 강연을 상당히 잘했던 편이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분명히 나의 것인데 그 쓰임이 너무도 어려운 게 바로 "감정"입니다. 오히려 아들러 후대에 들어 감정이란 것을 논리적, 도식적으로 분석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아들러는 감정의 실체나 본질을 애써 구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는 그저, "잘 사용하라"고만 했죠. 유한한 인생을 향유해야 할 우리들에게, 학자나 도인도 하기 어려운 작업에 굳이 시간을 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들러는 이처럼, 명쾌하고 단순한 틀로 모든 것을 볼 줄도 알았으며, 그 중 많은 결과물은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우리에게 실용적 가르침의 쏠쏠한 쓸모로 이처럼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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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이력 - 평범한 생활용품의 조금 특별한 이야기
김상규 지음 / 지식너머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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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면, 과연 김상규 선생님께서 이 책에 담으신 주제가 되는 다양한 사물들이, 그저 "소소한 사물들"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니, 의문이라기보다는, 흔히 보고, 눈에 채이고 발에 채이던 것이, 그저 흔한 사물이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 중대한 동반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저자는 이 책 서문에서, "디지털의 문법이 이제는 아날로그의 그것을 배워 가고 있는" 새로운 트렌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저는 조니 아이버의 책을 읽었습니다만, 그 책에서는 "디자인은 종래의 디자인 개념, 세련된 겉모습의 논리에 그치지 않고, 쓸모와 용도 자체가 디자인임"을 새롭게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분명 "사물의 디자인"에 대해 한 말씀 하시고자 하는 의도였음에도, 내용을 보면 오히려 미시사의 한 범주가 아닐까 싶게, 사물에 얽힌 "역사"를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Every Picture tells a story." 모든 그림은 그 그림에 나타난 한 장면만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제법 지속된 과거의 이력, 그리고 장래의 예측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책에 나타난 그 상세하고 자상하게 풀어헤쳐진 "사물의 이력을 보며, "Every Thing(일부러 띄웠습니다) tells a history."라고 말을 바꾸어도 될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Every Design tells a story."라든지요.

 

그 사물이 하고 있는 모양은, 그 사물의 지난 이력을 알려 주며, 동시에 그 사물이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양과 용도는 일체이며, 가장 우수한 디자인은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그 효용을, 쓰는 사람 보는 사람에게 바로 알려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거죠.

 

사물은 우리 일상에서 아주 흔히 만날 수 있어서, 그 소중함과 깊은 가치를 우리 가 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당신이 흔히 보던 사물이 결코 하찮은 게 아니며, 너무 소중해서 오히려 하찮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잘 다듬어지고 잘 발전해 온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위에 흔하게 굴러다니는 물건, 예를 들면 전구, 책상, 의자, 냄비 등은, 어느 날 하늘에서 불쑥 떨어진, 영화 <부시맨>의 콜라병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경이로운 쓰임새를 담고 있어도, 우리에게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없고, 결국 일상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죠(영화에서도 결국 부시맨은 그 병을 들고, 그것이 속해야 할 곳으로 돌려 주러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물이 가장 일상적이라면, 그 일상적임은 우리 느낌처럼 "흔함"이나 "무가치함"이 아니라, 반대로 "가장 일상에 긴요함"을 의미한다는 걸, 이 책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저는 가장 기막한 역설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 책 중에서 "지게"를 꼽고 싶습니다. 지게가 아무리 한국적 일상에서 가장 고맙고 쓸모 있는 사물로 발전해 왔어도, 우리들 현대인은 물론 당대인조차 "지게나 지고 다닐..."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천대의 대상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전 당시, 미군 인사들은 "A-frame"이라 이를 지칭하며, 그 기능에 대해 "디자인 일체적 표현"으로 감탄을 표시했습니다. 이 사례에서처럼, 희소성(교환 가치와 연결되는)과 효용성(사용 가치)가 서로 얼마나 괴리를 보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읽으면서도 진정 놀라웠습니다.

 

디자인에 있어 기능과 미학적 수월성은 과연 상충하는 가치일까요, 아니면 여러 선구자들이 지적하는 바대로 일체를 향해 나아가는 중일까요? 이 책에 소개된 여러 사물들은,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품어 온 기능상의 진화와, 외관상의 화려함이 반드시 한 방향으로 가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한계가 앞으로 우리 일상에 속출할 그 모든 사물들이 걷게 될 길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물은 쓰임새가 다하여 시장과 일상에서 퇴출되는데, 이걸 가리켜 저자는 "퇴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퇴물이란 물론 흔히 쓰는 말이지만, 책 내내 강조되고 있는 "보편 개념"으로서의 "사물"을 접하고 머리에 새기다 보니, 이제는 상당히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퇴물이 신선하다니 참 역설적입니다만).

 

사물은 지속되기도 하고, 퇴물이 되어 일상에서 퇴장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하고 귀치 않은 취급을 받을망정 일상 요긴한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물이 되느냐, 아니면 예쁜 모양의 정체성만 고집하다 퇴물이 되느냐 역시, 내력과 비전을 균형감 있게 정신 속에서 길러낼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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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쓴 인생론
박목월 지음 / 강이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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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쓴 인생론>은, 민족의 시인, 국민적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목월의 수상록입니다. 영식 박동규 교수님의 두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알았지만, 목월은 뻬어난 산문가이기도 하며, 그 주옥 같은 산문 속에 인생의 본질을 꿰뚫은 통찰과 지혜를 가뜩 담아낸 스승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참 신선했습니다.

 

이 책은 시인 목월 자신이 직접 쓴, 다양한 출처의 산문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이미 예전에도 출간된 적이 있지만, 이번에 예쁜 장정과 현대적 편집으로 새로 나온 고전이라고 하겠습니다. 고전은 시절을 거쳐도 그 빛이 바래지 않고, 읽을 때마다 읽는 사람에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게 특징이라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저는, 욕심 없고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면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고 나의 가족 나의 친구에게까지 고루 그 행복을 전파할 수 있는 삶이 무엇이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이 책은 시인 목월의 비교적 젊은 시절까지를 두루 다루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더라도, 한국전 직후나 자유당 집권기처럼 아직 목월이 젊은 혈기와 열정을 간직하던 시기에 쓰여진 글들이 다수 실려 있어서 그렇습니다. 물론 글들은 대부분 목월의 1인칭 시점입니다. 그러나 목월 자신이 워낙 전설적 존재이다 보니, 우리는 1인칭으로 쓰여진 글에서도 화자의 시선으로 대상을 보지 않고, 대상과 화자를 동시에 관찰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독서가 가능해지는 느낌입니다. 이 이유는, 보통의 경우야 화자의 전달, 표현에 신뢰를 보내면서 그 대상에 집중하게 되지만, 다른 이도 아닌 전설적 시인 목월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면, 그 "무엇"보다는 오히려 그를 말하는 화자에 더 시선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독서는, 저에게 이중의 레이어를 가졌습니다. 하나는 물론 목월 자신의 가르침을 경청하고 내 것으로 새기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알던(물론 부정확하고 오류나 선입견도 많지만) 목월과, 이런 주제를 두고 이런 말을 하는 목월의 태도나 분위기로부터 추론 가능한 목월의 모습 사이에서, 미세하게나마 느껴지는 그 차이를 느끼는 은근한 각성의 쾌감입니다. 이 책은 그래서, 목월의 가르침과, 인간 목월을 동시에 공부하는 보람이 있었다고나 하겠습니다.

 

목월 역시 인간이었는지라, 사모님과의 동반 행로가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매우 조심스러운 대목이고, 제 지식(으로부터의 기대)과는 많이 어긋나기도 하고, 책에서도 분명하게만은 다뤄지지 않아서 이 독후감에서 적기가 조심스럽지만, 목월처럼 성자에 가까운 분도 살아 오신 인생 내내 마냥 가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첫 글은 사모님이, 목월과의 첫 만남과 시모 되시는 어른의 당부, 그리고 힘든 시련의 시기를 회고한 글입니다. 시인의 배우자로 사는 그 고단함과, 남모를 보람, 그리고 그 시인을 빼닮은 자제들을 교육하는 일의 숭고함을, 그 극히 일부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책 역시, 아드님 박동규 교수님의 모습이 살짝이나마 등장합니다. 첫 월급을 받아 양친께 드리는 모습, 아직은 어렸던 다른 아드님의 (요즘 아이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어른스럽고 의젓한) 모습, 그로부터 알 수 있는, 딱히 가부장적이지도 않으면서 전통적 모범으로 간주되었던 우리네 옛 가정의 풍경을 머리 속에 선하게 복원할 수 있었지요.

 

따뜻합니다.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밖에는 정체 모를 들짐승이 울부짖는 황량한 밤이 아니라, 그저 화롯불에서 속 든든히 밤이나 까먹고 할머니가 들려 주시는 옛이야기 외에 어떤 간난도 근접지 않은, 안온한 겨울밤만 연상되는 그런 "밤에", 가장 진실된 도덕과 명철한 논리를 지닌 스승이 들려 주는 "인생론'입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싶습나다. 가을, 겨울, 봄, 그리고 태양이 작렬하는 여름에도 맑은 톤의 피붓빛을 잃고 싶지 않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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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 우리가 몰랐던 신비한 땅이야기
민홍규 지음 / 글로세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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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쯤 전에, 명장(名匠) 민홍규 선생의 억울한 사연이 담긴 책 <누가 국새를 삼켰는가>를 읽었습니다. 그 책은 저널리스트 조정진 씨의 시점에서 저술되었고, 서언과 마무리를 두 분 거물 변호사가 집필한 형식이었죠. 그 책에도 간간히 민홍규 씨의 인간적 면모가 언급되기는 했었지만, 대체로 그 책은 팩트에 치중하여 검찰의 논고에 대항하는 일종의 "답변서, 상소장" 형식에 가까웠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지 않고서는 가치를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저 개인적으로도 신문 기사-민홍규씨 입장과는 정반대 시각에서 기술된-를 검색해 보고 나서야 책의 의도와 효용을 알게 되었죠).


이제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을 다시 살펴 보니, 어찌 보면 참 고지식하게 써 내려가신 책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형사사건의 당부, 유-무죄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피고인(혹은 그 상대방)의 "인간적 측면"에 치우치면, 객관적 시각을 잃을 수 있습니다. 위인이라고 해도 범법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고, 흉악한 이라고 해도 선행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안은 그 개별 사안의 진위, 당부를 놓고 판단해야 하지, 그 사안에 관련된 인물들의 품행에 먼저 시선이 가서는 곤란합니다. 하지만,... 우리들 범속한 이들은, 행위에 앞서서 사람을 먼저 판단하고, 편안한 공식에 따라 판단을 내립니다. "후광 효과"니 (반대로) "인신 공격"이니 하는 건 규칙에 어긋나는 일인데, 그 규칙을 어김이 너무도 일상이 되다 보니, 잘 모르겠다 싶으면 바로 사람을 보고 판단을 해 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국새 ....>는 참 고지식하게 쓰여진 책이었습니다. 이 책 <터>에서는, 한평생을 예술, 기예의 연마에 바쳐 온, 명인 명장으로서의 민홍규 선생 그 인품과 깊이가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또 한, 전각 분야의 예술적 성취를 넘어서,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를 고이 떠받쳐 온 풍수 지리 사상, 또는 풍류도에 대한 저자의 심오한 깨달음, 그리고 이의 실천이 농도 깊게 드러나 있기도 했구요. 만약 이런 선생의 깊이 있는 인격과 정신 세계가, 일반 대중, (그리고 가상적으로 당시 그의 재판에 배심제라도 도입이 되었다면) 형사 재판을 앞둔 패널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3년 옥살이를 하고 나온 민홍규를 옹호, 신원하려는 책이었다면, 건조한 팩트보다는 이런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게 효과적이었을 텝니다. 다만 그 책은 팩트의 입증과 제시에 치중하느라, 대중서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적었지만) 상소장이나 소송 답변서 같은 인상을 준 게 사실이었죠.


저는 솔직히 말해, 지형과 산세, 이와 결합한 물과 바람과 기운의 배치 같은 것에 어떤 심오한 독자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큰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서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이 책을 두 번 읽고 나서도, 풍류도, 풍수 지리 사상에 대해 깊은 외경을 느끼게는 될지언정, 그에 대한 귀의(?)에의 욕구는 그리 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인간이 (그것이 아무리 전통 사상의 구전, 혹은 문헌적 전승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토록 총체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몸에 체화하고, 대규모 사업의 모습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땅에 두 발을 디디고, 또 조상들이 이고 있었던 에의 그 푸른 하늘을 우러르는 처지에서, 헤아릴 수 없는 존경과 삼감의 마음을 다지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 터"를 잘 다루면 자신과 후손의 사업과 진로가 평탄해지고, 운수의 트임이 유리해진다는 믿음, 이는 종래 전근대적 미신으로만 취급되어 온 게 사실이죠. 그러나 몇 주 전 민족 전체가 쇠고 난 명절에 지낸 차례, 그 상 차리는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동육서니 홍동백서니 하는 건 과학적 근거가 있어서 우리가 이를 준수하는 걸까요? 사람이 어떤 일을 성사하려는 데 있어, "진인사 대천명", 혹은 성(誠)과 경(敬)의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하는 게, 이런 절차적 예법에 다 녹아 있는 것입니다. 땅의 형세와 기운(추상적이긴 합니다만)에 맞게 집을 짓고 터를 고르라는 게, 어찌 과학과 반드시 상충된다고만 하겠습니까? 지극한 도(道)는 궁극에 가서 다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풍수 지리 역시 반드시 기복 신앙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 지극한 성의를 다하고 만전의 주의를 다 기울이는 한 방법으로 봄이 타당하겠습니다.


민 선생은 스스로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으셨으니, 그 통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셨을 텝니다. 허나 그는 "이 역시 일차 책임이 있는 내가 땅을 잘 다루지 못한 탓이다"라고 스스로를 낮춥니다. 성인은 언제나 귀책을 자신에게서 찾는다고 했는데, 이 역시 그의 인격적 완숙도를 잘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위 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존경과 우러름을 받는데, 민 선생 역시 그 질 나쁜 인간들이 모여 있는 수형 시설에서도 한결 같은 예우를 받았으니, 이 점에서도 의인은 빛을 발하는 거겠죠. 풍수 지리 사상, 그 현대적 표현과 발전의 가장 선명한 모습을 보려면 이 책을 일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을 관심 깊게 읽으신 분은, <누가 국새를...>도 같이 읽어 보면서, 우리가 우리의 땅을 어떻게 잘못 다루었기에 정의와 명분의 질서가 이처럼 퇴색할 수 있는지 깊이 반성할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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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평민열전 - 평민의 눈으로 바라본 또다른 조선
허경진 지음 / 알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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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명의는 허경진 교수의 "편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열전" 은 일차 사료이고, 따라서 어느 정도는 사관의 직접 취재가 개입해야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기록자의 시대가 피(被)기술의 시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문헌 고증이라는 간접적 방법론조차 통용의 한계가 있습니다. 허 교수님은 주로 <연려실기술>등 사인의 기록을 통해 이 책을 편집하였으므로, 제목에 쓰인 "열전"은 가장 넉넉한 의미로 새기는 게 나을 것입니다.


사마천의 <열전>도 언제나 개인 중심의 구성을 취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영행열전>, <자객열전>, <골계열전> 등 테마 위주의 편집을 택한 게 제법 되며, (그들 입장에서) 이민족의 내력과 최근의 동향을 다룬 <흉노열전>, <조선열전> 같은 것도 있습니다. 저자 허 교수님도 말씀하시듯, 어떤 가치 판단과 사상의 체계에 맞춰, 개인사는 하나의 도구적 방편으로 차용했을 뿐인 게 동양의 역사 기술 그 기본적 태도입니다.


따 라서 이 책이, "평민 열전"이라는 제목을 취한 건, <연려실기술>등의 문헌(혹은 그 저자)이, 자신이 속한 시대 정신 그 변화를 예리하게도 포착하여, 태생의 신분이 아닌 그 개인의 능력에 의해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려는 대담한 시도들이, (유감스럽게도) 여러 문헌에 산재하여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채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처럼 책 한 권에 묶어 그 이상형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19세기에 이 이름을 달고 대로를 뢀보하며 낙양의 지가를 올렸어야 마땅했던 그 내러티브들이, 만시지탄의 감이 있으나 이제서야 뜻이 통하고 배가 맞는 동무들끼리 한데 엮인 것으로 봐야겠죠. (저자는 자신의 전작 제목을, <조선위항문학사>로 하여 내었을 때의 아쉬움을 이제서야 해소했다는 취지의 소회를 밝히기도 합니다)


대상이 양반 신분인 경우에도, 사실 친우나 후손에 의해 문집 편찬이나 기록이 이뤄진 경우 그 객관성에는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하물며, 면천(免賤)에 갓 이르렀을 뿐인 한미한 출신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조명이 이뤄졌을 리가 없습니다. 다만, 시문에 능하고 즉흥의 서술에 달통하거나 동서고금의 사항에 대한 박학한 이의 재주를 워낙 쳐 주는 시대였다 보니, 비록 신분이 버젓하지 못할 뿐 자유자재로 문자를 구사하는 은사(隱士)에 대한 찬탄이, 보는 이 누구에서건 정직하게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출신 성분에서나 스스로 성취한 문재의 수준에서나 타에 꿀릴 것 없는 이들로부터라야 정직한 칭찬이 나왔을 것이고(예를 들면 이 책의 전거를 이루는 이긍익 같은 이들), 그렇지 못한 채 타인의 성취를 시기 질투하기에 바쁜 속물들은 그저 남을 까내리기 바빳으리라 예상됩니다.


열전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단명하거나, 무고한 옥사를 치르거나, 괜한 모함을 당한 이가 유독 많습니다. 재주는 빼어난 데 비해 신분이 받쳐 주질 못하니, 그들이 헤치고 나가야 할 풍파의 험난함이 그만큼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드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악한 여건 속에서 제 재주를 갈고 닦은 사연이 있어서인지, 후학을 돕고 곤궁한 동기, 친족을 보살피는 대인의 도량 역시 더 빛나더라는 게 공통되는 점이었습니다. 시대가 많이 앞선(심지어 종계 변무가 아닌 임란 청병의 공을 그에게 돌리는 version이 다 있을 정도니) 역관 홍순언의 사연을 다룬 것도 있고, 경종 때 노론 4대신 중 김창집, 그의 동생 김창흡 등이 보조 역할로 나오는 일화, 그리고 19세기까지 내려와 이건방 등이 등장하는 사연도 실려 있습니다.


각기 시대의 편차는 크지만,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나간 재사들의 분투기는 언제나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바 있습니다. 또, 평소에는 주연급으로 등장했던 명문 거족의 명사들이, 이 책에서는 "평민 주연"을 빛내는 조연으로 출연하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이런 위대한 평민들에게, 근대화나 개방의 물결에서 더 큰 역할이 주 어졌다면 국권의 침탈이 그리 쉬이 이뤄지지는 않았을 텐데, 저 현해탄건너 열도에서, 정치적 소외 세력이었던 사쓰마 -조슈 번의 지사들이 막부의 동요를 틈타 거침 없이 발흥했던 사실과 크게 대조되는 바 있어 읽는 이의 깊은 탄식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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