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생에 지지 않을 용기 - 나에게 힘을 주는 아들러 심리학
알프레드 아들러 지음, 박미정 옮김, 오구라 히로시 해설 / 와이즈베리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심리학의 3대 거장이라고 하면 보통 프로이트, 융과 함께 이분을 꼽죠. 이분은 스승 프로이트와도, 그리고 융과도 달리, 심리학과 사회학적 측면을 결합한 경향과 공로가 있습니다. 인격의 distortion이, 개인의 열등감과 이를 만회하려는 노력 사이에서 빚어진다고 한 그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의도와 관계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많은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는 이런 아들러의 이론적 성과를 자기계발 분야에 알맞게 적용, 변형하는 노력도 두드러진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 아들러가 (상대적으로) 생소하다고는 하지만, 최근 일이 년 사이에 "자계서 포맷"으로 많이 소개된 편이라서 요즘 독자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여튼 오늘날 우리에게 자기계발의 대가로 알려진 많은 저자들이, 알고 보면 이 아들러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약간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베스트셀러 자기계발 저자들에 대해서는 훤히 정보를 알다가도, 정작 이분처럼 순수 학문의 거장에 대하서는 까맣게 모르는 풍토가 과연 참된 독서를 위한 분위기가 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하지만, 결국 독서는 나 자신을 위한 노력이고 활동입니다. 아무리 아들러에 대해 원전을 읽고 정확한 이해를 얻었다손 쳐도, 그것이 읽은 이의 삶에 근본적 변화를 주고 역동적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한다면, 해당 분야 연구직에 있는 처지가 아닌 이상에야 별 큰 보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 알프레드 아들러가 우리 현대인, 바로 회사에 다니고 바쁜 시간 쪼개어서 내 몸값을 높일 궁리에 여념이 없는 우리들에게 미친 영향만 놓고 보자면, 프로이트나 융보다도 더 고마운 사람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 들여라." ,"나와 주변 환경을 절대 긍정의 정신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말들은 요즘의 자계서 작가들이, 그 최초의 출처가 어딘지도 모르고 열심히 퍼 나르는 말(물론 그 작가들은 나름대로 자기 확신과 흥이 있어서 하는 일이겠지만요)은, 알고 보니 이 아들러 박사가 학문적 동기에서 최초 규명하고 명제로 정립한 것들이었으니 말입니다. 파생적 저작이나 카피본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감동과 동기 피부여라면, 오리지널 저자(author)로부터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책의 분량은 그리 두껍지 않습니다. 250여쪽이 채 안 되어서 처음엔 조금 실망도 했습니다. 저자 명의는 아들러 본인"으로 되어 있지만, 정말 자계서 필진의 편집이 대거 개입한 느낌을 줄 만큼,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러 특유의 긴 호흡의 함축적인 육성은, 이 세련된 텍스트 속에서 많이 증류, 정류된 느낌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당장 이 팍팍한 사회 생활 속에서 핀치에 몰리고 메말라진 우리 마인드를 구제하려면" 긴 시간과 정력을 들여 읽어야만 할 텍스트보다는, 이런 포멧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영화 <대부>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난 억울해하거나 복수하려 들지 않았어! 왜? 이 모든 건 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거든!" 어쩌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엄청 책을 많이 읽은 분이죠)도, 아들러의 이 언명에 영향을 받아 그런 대사를 구상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들러의 인생관은 그것입니다. "You are what you have chosen." 내 의지가 작용하지 않은, 던져진(被投的) 요소가 아닌, 의식을 가진 후 독자적으로 선택을 해야 했던 그 무수한 순간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내가 이뤄진 것입니다. 결과가 나쁘다 해도, 현재의 처지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해도, 그것이 다 나의 귀책이라면 억울한 마음이 들 이유가 적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다음 번에 같은 실책을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는 최화정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쇼를 듣다가, 자신의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하지 않는 게스트 가수에게 "뭐 괜찮아, 성격은 바꿀 수 있으니까."라며 농담을 던지는 걸 들었습니다. 이 말의 속뜻이야 외모지상주의를 강조하는 것이니, 오히려 다른 이들은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여튼 중요한 건 "성격도 결국 본인의 각성 여부에 따라 바꿀 수 있다."는 점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각성'이라는 게 힘든 것입니다만.
아무래도 아들러의 말 중 압권인 건 "인간이란 본디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라는 그 명언이겠습니다. 익히 아는 말이지만, 아들러의 저작으로 표시된 책에서 그 말을 직접 접하니 그 감회는 또 다른 면이 있더군요. 열등감이 문제인 건, 그 열등감이 주는 마음아픔이라든가 감정상의 장애도 있겠지만, 열등감을 만회하려고 벌이는 과정에서 저지르는 더 큰 실수와 패착입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감정 포지션의 적극적 설정의 권유는, 학자치고는 드물게 보는 아들러만의 실용성과 명쾌함입니다. 사실 그는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이런 실용적 분야에서 더 큰 성공과 두각을 나타내었을지도 모릅니다. 강연을 상당히 잘했던 편이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분명히 나의 것인데 그 쓰임이 너무도 어려운 게 바로 "감정"입니다. 오히려 아들러 후대에 들어 감정이란 것을 논리적, 도식적으로 분석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아들러는 감정의 실체나 본질을 애써 구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는 그저, "잘 사용하라"고만 했죠. 유한한 인생을 향유해야 할 우리들에게, 학자나 도인도 하기 어려운 작업에 굳이 시간을 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들러는 이처럼, 명쾌하고 단순한 틀로 모든 것을 볼 줄도 알았으며, 그 중 많은 결과물은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우리에게 실용적 가르침의 쏠쏠한 쓸모로 이처럼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