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트루스 - 진실을 읽는 관계의 기술
메리앤 커린치 지음, 조병학.황선영 옮김 / 인사이트앤뷰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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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면서 마주치는 도전 중,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가려 내는 과제만큼 우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것도 별로 많지 않을 듯합니다. 의사 결정을 하고 사리를 판단함에 있어 난마처럼 꼬인 진상의 맥을 꿰뚫어보고, 목적을 위해 꼭 필요한 행동만 영리하게 취할 수 있다면, 우리는 손 대는 과업마다 대부분 눈부신 성공을 거둘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의 말이나 정보, 스토리의 진위를 구별하는 데에 큰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판단할 수 없거나 판단에 많은 노력을 들이기 귀찮다는 이유로, 우리는 대개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 버린 후 일을 마무리합니다. 부정확하고 부실하게 매조지한 일처리가 남기는 파장은 사소할 수도 있지만, 그 중 상당수는 중대한 인과 관계로 이어져 우리의 앞날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결과가 악화된 후에도 우리는 판단 작용의 비효율, 오작동, 게으름 등에 귀인(歸因)시키려 들지 않고, "그저 운이 나빴을 뿐"으로 치부하고 만다는 데에 있습니다. 과정이 나쁜 것도 문제지만, 피드백과 리뷰 프로세스가 형편 없이 기능하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이 책은 전직 CIA 요원인 메리앤 커린치라는 분이 쓴,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법"에 주안을 둔 실용서입니다. 다른 사람이 지금 거짓을 말하는지, 그 반대인지 표정이나 제스처만 척 보고서도, 내 머리의 회로가 성능 좋은 거짓말 탐지기처럼 작동한다면, 그것 참 기분도 상쾌할 뿐더러 일을 할 때의 성과도 엄청 클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자는, 다년 간 범죄 용의자나 수상쩍인 일에 연루된 증인 등을 대면 접촉해서 정보를 얻거나, 직접 수사 대상으로 삼아 심문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그저그런 요원이라기보다 맡은 일을 아주 잘 해내는, 동료나 관계자들이 보고 경탄했을 만한 능력의 보유자였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군데군데 비춰지는 사담[私談] 여럿으로 짐작건대).



그녀는 예컨대, 3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TV에 나와 인터뷰하는 모습만 보고, 저 사람이 지금 머리 속에 어떤 시나리오를 만들어 놓고 그에 끼워맞춰 가며 거짓말을 늘어 놓고 있음을 바로 눈치챘다고 합니다.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직장 후배뻘 정도 될 수 있었던 스노든이었기에, 또 개인적 소신이나 성향 면에서 크게 어긋나는 점이 많아 보이는 인사였기에, 이런 판단은 어느 정도 사감(私感)이 끼어들었을 수 있습니다(그녀가 이 문장 뒤에 덧붙이고 있는, "내 판단에 동조하는 전문가들이 더 자격을 많이 갖춘 유형이었다." 같은 말도, 역시 독자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건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언술로 공식화하긴 어려워도, 해당 분야에 오래 종사해 온 구루들의 직관이나 직감이, 소위 "과학적 분석의 결과"보다 더 정확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도 주장되고, 이미 다른 믿을 만한 권위 있는 소스를 통한 학습에 의해 내심으로는 우리 모두가 동의할 만한 결론이죠.

이 책은, 타인의 거짓과 진실을 준별해 내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메타적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내 자신이, 기질적으로 범하기 쉬운 인지 오류들에 빠져 있으면, 남의 거짓말인들 그게 눈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습니다. 저 사람의 거짓말이 "평소에 내가 믿고 싶었던 바"와 일치하면, 여러 객관적 징후들이 정형화한 시그널로 눈에 뻔히 들어 와도, 이미 프레임이 지배하는 두뇌에 잡히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는 거죠. 반대로, 믿고 싶지 않은 사실, 이미 듣기 전부터 나의 정서가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항에 대해서는, 논리적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고 초기 단계에서 이미 기각을 해 버린다는 겁니다.

학계에서 자주 거론하는 이슈가, "발화자가 자신 역시 거짓인 줄 알면서도 거짓을 말하는 경우" 그리고 "발화자는 철석같이 사실로 믿고 있으나 사실은 착오, 망각, 기타 여러 비정상적 인지 작용에 의해 객관적 거짓을 말하는 경우", 각각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심리학의 영역에 들어오기 전, 이미 지난 몇 세기 전부터 철학, 논리학, 수학의 연구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용의자를 심문하거나 증인의 진술을 청취하는 일을 맡은 공직자가, 감쪽같은 거짓에 속아 넘어가거나, (거짓말 탐지기가 전혀 반응할 수 없는) 착오에 의한 확신을 어떻게 현명하게 처리해야 할지는 실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먼저 판단의 주체 자신부터, 본인이 일상에서 처리하는 갖가지 귀인 추론, 사실의 해석을 두고, 자기 비판적 - 객관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어야 이를 대상으로 적절한 작업을 해 낼 수 있습니다.

진술에는 여러 차원, 범주적 개성을 띤 것이 있습니다. 이 중, 그 진위값을 뻔히 밖으로 드러내고 있는 건 극히 드뭅니다. 일면에서 진실성을 띠고 있는 게, 다른 면에서 고찰하면 철저한 허위로 판명납니다. 이때 어느 각도에서 허점을 파고 들어서, 최종적으로 진실을 파악해 낼 것인지가 관건입니다.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끝에 "논리적으로, 실제적으로" 심문 대상자의 진술을 공박하는 요령을, 저자는 치밀하게 분류된 진술 유형론에서 각각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지나치게 진술(혹은 그 진술을 말하는 이) 개개에 대해 공격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싶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사회 자체가 기만, 속임수가 난무하는 곳이니만큼, 이 책에 나온 이론이나 노하우는 공감되는 구석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진실을 다가갈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더 큰 진실을 밝혀낼 것인가. 흔히 사실과 진실을 구별할 때, 자신의 개인적 가치관을 투영하여 "구미에 맞는 쪽"을 진실이라며 우기는 경향을 봅니다. 그래서는 단체 차원은 물론, 개인 레벨에서도 답이 나올 리가 없죠. "진실"과 개인의 신념을 먼저 준별하는 게, 이 책에서 말하는 "더 트루스"를 발견하고 이치에 맞는 판단을 내리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의 원제는 <Nothing But the Truth>인데, 이 말은 본디 미국에서 재판 등의 공적 절차에 앞서 필요한 경우 증인에게 선서를 시킬 때 "the truth, the whole truth and nothing but the truth"를 말할 것을 요구하는 정해진 문구에서 온 것입니다. 두번째 어구에서 the whole truth라 함은, 국지적이고 부분적으로만 진실일 뿐, 전체적 의미 체계 안에서는 오히려 거짓에 가까운 건 진실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있습니다. 이 책의 2부에서 "더 큰 진실"이라 함은 그를 지적하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바는, "진실을 알고 싶으면 먼저 당신 머리에 있는 선입견이나 비합리적 선호 체계로부터 해방되라"고 말합니다. 결국 자신이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고 있어야, 남들의 참말 거짓말도 바르게 가려 내고 수용할 수 있다는 요지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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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기업이 위대한 기업이다 - 직원을 생각하는 작은 행동이 위대함을 결정한다
류성 지음 / 비즈니스맵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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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람은 나면서부터 선한 존재이지만, 성장하면서 나쁜 환경, 대인 관계의 상처 때문에 악행의 습성이 몸에 배는 걸까요, 아니면 그 반대로, 태어나면서부터 짐승과 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으나, 좋은 교육을 받고 적절한 사회화가 이뤄지면서 (이른바)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걸까요. 고대 맹자와 순자 같은 현철들도 답을 내지 못한 질문이니 우리가 이 난문을 해결할 가망은 거의 없긴 합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건, 조직에서 위로 직급이 올라갈수록 "짜식들은 좋은 말로 하면 알아먹지를 못해!" 같은, 보편적 인간의 자질, 성품에 대한 회의적 태도, 불신을 표현하시는 경우가 많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좋은 말로 타일러도 될 걸 꼭 저러실 필요가 있나? 저렇게까지 해서 권력욕을 해소해야 하나?" 같은 불만을 털어놓는 빈도가 잦더라는 것입니다. 거칠게 분류하자면, 윗분들은 성악설, 아랫사람들은 성선설을 신봉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업 문화가 확실히 바뀌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대기업에선 당연하고, 작은 규모의 회사라고 해도 예외 없이(경우에 따라 더 지독하게), 직원들을 들들 볶는 문화가 조직 전체를 지배했습니다. 역사책을 보면 산업 혁명 직후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박봉만 지급한 채 "밥값을 하라"며 사정없이 피용인들을 몰아세우는 풍토가, 생산직은 물론 사무직을 부리는 방식에서도 예외 없이 팽배했습니다. 그 악명 높은 사용자였던 헨리 포드가, 동종 업계 대우에 비해 파격적인 기본급 상향 조치를 취하고, 유례가 없던 인센티브 시스템을 도입한 선택만으로도 "경영관의 혁신"이라며  그토록 칭송을 받은 것도 이런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시장 논리에 따르지만 않고, 일 못하는 직원을 닦달만 하고 해고의 위협만 주는 게 아니라, 반대로 일 잘하는 직원에게 포상을 하는 그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경영자로서 너그럽고 탁월하다는 평판의 형성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물론 한국처럼 경쟁이 치열하고, 대인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조직 문화에선 아직 요원한 감이 느껴지는 화제입니다만, "직원을 존중해야 일이 잘 되고 성과의 질이 높다"는 공감대가 서서히 확산되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대량 생산 - 대량 소비로 대표되는 근대 생산 체제에서는, 거대 설비를 마련하고 많은 직공을 고용해서 획일화한 작업을 정해진 일정에 맞춰 시키기만 하면 충분했습니다. 사람들의 기호, 취향, 소비 패턴이 다양해진 현대에는, 거대 공룡이 운신하는 폭이 오히려 줄어들고, (한국에서는 아직 실감할 수 없는 진단이지만) 확실한 메리트를 지닌 분야, 업종에서 치고빠지기에 능한 소규모 기업(대부분 벤처 기업이기도 합니다)들이, 대기업의 서툴고 느린 추격을 농락하며 큰 이윤을 창출하기도 합니다. 작업의 양이 아닌 "질'이 중시되는 산업 구도에서, 고용주가 직원들 기분, 사기를 상하게 하면 그건 고용주의 손해로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구조가 점점 대세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는 알 수 없으나, 인간은 빵만 먹고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은 누구의 눈에도 확실한 것 같습니다. 마지못해 하는 일과, 사장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신이 나서 하는 일은, 그 완성도와 고객 만족의 파장 면에서 같을 수가 없습니다. (소규모 기업의 경우) 사장이 아무리 똑똑해도, 그저그런 직원 십여 명이 종래 생각지도 못했던 관점에서 불쑥 내어놓는 아이디어를 모두 대체, 능가할 만한 활약상을 보이기란 불가능합니다. 월급 주고 부리는 직원에게서, 그 포텐의 최상이 터지게 하지 못 하면, 그게 바로 사장의 손해겠죠.

펀 경영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물적 자원을 낭비 없이 최대한 투입, 활용하는 게 영리한 경영이듯, 인적 자원의 효율을 최고치로 높이는 게 탁월한 기업의 수완이 라는 거죠. 물론 살살 기분만 띄워준다는 얕은 속셈으로 접근하면 그게 통할 리 없습니다(그마저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처음부터 자신이 공을 들여 뽑은 인재이니만치, 그 인재의 특성과 기질을 빨리 파악하여, 살 맛 나는 직장에서 스스로 책임감, 참여의식을 갖고 업무에 임한다는 기분을 들여 줘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의 CEO는 폭군형이나 음험한 사기꾼 타입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잘 꿰뚫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인격자라야, 거래처나 소비자는 물론 매일같이 얼굴을 대하고 부대끼는 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거죠. 일본 전국시대에 "그 주군은 그 부하들을 반하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고 한 격언이, 사실 리더십의 요체를 몇 백 년 앞서 통찰한 소치입니다.

(주)놀공발전소의 대표 피터 리는 아직 젊은 나이의 경영자입니다(이분 뿐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하는 CEO들은 대부분 이 또래더군요). 이분의 철학은, "노력하지들 마세요. 노력하시는 직원분은 그 자리에서 해고합니다." 라고 합니다. 딴청피우지 말고 일좀 하라며 눈을 부라리는 게 상사, 오너의 습성인데, 노력하는 직원을 오히려 짜른다니 슨 말인가. 이 기업의 특성상, 지루하게, 혹은 필사적으로 일을 하면 그 결과물이 시장에서 찬밥취급 당하는 일이 잦다는 겁니다. 저학년 아동용 교육 아이템을 제작하는 이 회사는, 사명이 말해주듯 "놀듯이 공부하게 도와준다"가 회사의 모토입니다. 아이들보고는 노는 것처럼 공부하라면서, 학습 애플리케이션은 절박한 마인드로 기일에 쫓겨 마지못해 만든 티가 팍팍 나면, 문장 하나 레이아웃 하나에서 그 기분이 어린 독자들에게 전해지지 않겠습니까? 놀고 싶고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려면, 제작자부터가 그런 기분으로 제작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즐기면서 일을 하라. 즐기면서 만든 컨텐츠가 아이들에게 즐겁게 소비된다." 비단 이 방법론이 이 영역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지 싶습니다.

37세의 김봉진 대표님은 요즘 나오는 경영서마다 언급이 빠지는 게 드문,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성공사례의 모범이 된 분입니다. 본업보다 이곳저곳 강연 스케줄이 더 바쁠 때가 있을 정도죠. 이분이 만든 "배달의민족"은 벤처 성공 신화의 센세이션을 유발했고, 이분이 개발자로서 프로젝트에 임한 자세뿐 아니라 조직을 관리하는 탁월한 기법도 여러 차례 화제가 되었습니다. 상처 받은 직원, 자긍심을 갖지 못한 직원에게서 건전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으니, 일에 찌들지 않고 항상 상상력이 저 먼 창공에서 날개짓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게 대표님의 철학입니다. 도서 구입비를 전폭 지원하고, 살찌고 몸매 망가지는 게 자신의 회사에서는 흉이 안 되게, 건물 곳곳에다 과일 등 간식거리를 잔뜩 비치하는 것도 (주)우아한 형제들만의 독특한 풍경입니다.

광고기획사 이노레드를 이끄는 박현우 대표님은, 어느날 정말 힘들게 따낸 수주를 클라이언트에 되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이유가 걸작입니다. "우리 직원들이 이 건 때문에 야근에 휴일 근무에 몹시 힘들어합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이 일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거래처에서 보인 반응이 더 의외였습니다. "박 대표님, 존경합니다. 이노레드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누구보다 행복한 분들이겠군요." 마치 홍보용으로 제작된 에피소드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는, 그러나 박 대표의 진실한 가득 묻어나는 표정과 풍채, 광고인답지 않은 비주얼을 보고서야 독자에게 놀라운 실감으로 다가옵니다. 한 건 잘 마쳐 내고 장사 접을 거 아니라는, 매우 속된 계산에서도 이 전략은 타당하며, 그런 얕은 계산을 떠나서도, 광고처럼 농도 짙은 크리에이티브를 요구하는 업종에서 "진정한 소통이야말로 궁극의 경영 비결"이란 점에서도 박 대표님의 이런 선택은 멀리 내다보고 깊이 들여다보는 경영 통찰입니다.

(주)이심전심은 떡볶이회사 체인점입니다. 이 회사는 우수사원에게는 모든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합니다. 정말로 "회사 경영권을 제게 넘기세요." "하늘의 별을 따다 주세요." 같은 무리한 소원을 말하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우려에, "백지수표에다 가장 적정한 금액을 써 내듯, 존중받는 직원은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을 합니다."라는 게 CEO의 답입니다. 최근 대한항공 사건에서, 해당 스튜어디스와 사무장이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내가 대접 못 받는다 싶으면 상황이 허용하는 극한까지 가고 보는 게 사람 심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 이치도 현실에서 통하겠다 싶은 짐작 역시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심규태 대표님의 탁월함은, 대담하고 진정성 있는 신뢰의 제스처를 직원들에게 바로 행동으로 보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재직 기간 중 150만원 상당의 월세를 지원하고, 최신 외제차 모델을 제공하는 결단은, 모든 직원에게 "아버지처럼 친형처럼 품어주는 사장님"이란 믿음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이 회사의 경우, 인적자원 관리뿐 아니라 개별 점포들과의 관계에서도 놀라운 파격 행보를 보이더군요. 각 지점이 공식 레시피에 구애 받지 않고 독자적 시도를 하게 하며, 불리한 약관 개정이나 지침 변경은 전체 가맹점이 참여하는 투표를 통합니다. 이 정도면 갑을 문화를 전면 거부하는, 거의 시민사회운동 단계입니다. 역발상 그 자체라고 해야 할 대단한 파이팅이라고 할까요.

위대한 기업은 어떤 자격을 갖춰야 하는가. 무엇이 기업을 탁월하게 만드는가 등을 놓고 여러 학자, 경영인, 평론가, 저널리스트들이 제각각의 해답을 내어 놓지만,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명확한 하나의 결론입니다. "행복한 기업이 위대한 기업, 끝까지 살아남는 기업이다." 마치 가정도, 돈 많고 풍족하며 여유로운 집안이, 불화와 대립의 요소를 미연에 제거하지 못하면 결국 붕괴, 해체되고, 구성원들은 파멸과 절망을 맛보는 것과 이치가 같습니다. 직원은 사장의 부속품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큰 울타리, 지붕 안에서 유기체의 기관처럼 호흡과 생리, 최종의 운명을 함께하는 공동운명체입니다. 사소해 보이는 새끼손가락 한 군데에 염증이 생겨도, 일상의 과업이 제대로 처리 안 될 만큼 신경이 쓰입니다. 기업의 몸체를 이루는 직원들이 즐겁고 행복한 기업이라야, 그 두뇌라 할 수 있는 경영자의 성취감, 비전도 궁극적으로 충족, 성취해 줄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조직을 이끄는 경영자뿐 아니라, 현장에서 독창적인 기법으로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책임자, 지역에서 신망 받는 약사 등 다양한 사례가 나옵니다. 전체를 꿰뚫는 공통의 코드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웃음과 소통"입니다. 인간 소외가 없는 직장이 생산성도 최고로 높인다는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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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5-2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기업을 많아야 사람들이 행복해질텐데....불행한 일터가 너무 많아요.ㅠ.ㅠ
 
깊게 돌아봐야 멀리 내다볼 수 있다 - 꿈.사랑.도전
이인태 지음 / 리안메모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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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진이 많이 실려 있지 않으나 인생의 깊고 진득한 사연을 담았다"는 평가를 먼저 접한 후 책을 읽었으나, 이 책에는 사진도 많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사진들도, 어느 한 번의 여정에서 시리즈로 찍힌 것들이 아니라, 저자분이 서울대를 졸업하시고 갓 취업한 삼성을 다니면서 자주 수행한 해외 출장, 근무시에 틈틈히 찍은 기록들이라서, 긴 세월의 흐름과 변천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책 제목에 나온 그대로, 젊은 시절 세계를 누비고 다니신, 그리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어느 시니어의 깊고 굵게 살아오신 어느 인생을 통해, 진정 ""깊게 돌아보고 멀리 내다볼" 수 있게 도와 주는, 울림이 묵직한 수상록이었습니다. 해외에서의 다양한 체험이 실려 있으니 여행기로서의 노릇도 겸하는 책이랄까요.



우리는 보통 중국이라고 하면 기껏해야 1990년대 후반에 문호를 개방한 줄로 알지만,  특히 한국 기업과 사회 유력 인사들이 이 나라를 자주 드나들고 교류를 튼 건 벌써 1980년대 중반입니다. 웬만한(?) 어르신들은 "나 중공 다녀왔다"며 아이들 앞에서 자랑삼아 견문을 늘어놓곤 했었습니다. 거진 우리나라 민주화가 막 시작될 무렵과 궤를 같이하는데, 실제로 천안문(텐안먼) 사태가 발발했다가 덩샤오핑에 의해 며칠 만에 진압된 게 1989년, 한국의 유월항쟁이 있은지 2년 뒤(그리고 삼성 창업주 이병철씨가 타계한지로부터도 대략 그쯤 지난)이고, 한-중 수교가 있던 해로부터 3년 전 시점입니다. TV 화면에는 북경 시내의 탁 트인 도로로, 널찍이 열린 직장의 문을 향해 "자전거 부대"가 출근하는 장면을 자료로 보여 주던 시절이죠.



당시 한국 서울은 교통 지옥 출근길, 지하철 푸시맨이 화제에 오르던 때였습니다. 신출내기 사회 초년생 티를 아직 못 벗던 저자께서 삼성전자 직원 신분으로 중국에 파견된 게 딱 이 무렵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2005년 경에 "앞으로 중국어 못하는 사람은 기업에 취직도 못하는 때가 앞으로 몇 년이면 다가올 것"이란 말을 한 적도 있는데, 벌써 1989년에 삼성은 중국에 진출하고 있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저 발언은 새삼스러운 말이었다고 생각되기까지 하네요. 여튼 저자분은 공대를 졸업하시고 연구원 신분으로 재직하면서, 당시의 한국인에게는 아직도 낯설고, 낯설다 못해 금단의 땅이었던 중국에서 치열한 근무를 했던 회고를 적고 계십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단체 여행 다녀온 경험담을 자랑스레 늘어놓는 요즘(이라기보다 대략 10년 전부터 쭉)에조차, 중국인들 잘 안 씻고 다닌다, 부자들은 어떤지 몰라도 평균적 시민들은 미개인 같은 인상이다, 등등 폄하하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명동이나 동대문 등지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요우커들보고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게 보통인 우리들입니다. 하물며 30년 전에는, 그것도 중국 현지(베이징이라고 해도)라면 그 형편이 어땠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죠. 진출한 외국 기업이 물론 삼성만은 아니었기에, 중국인들은 체재하는 외국인들을 위해 여러 전용 시설을 (대단히 미흡하나마)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변기가 설치된 현대식 공중 화장실이란 것도 그들로서는 매우 생소했는지, 큰일을 보는 자리에는 앞 칸막이가 아예 없어서, 저자분이 매우 난감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현지 직원 왈 "그래도 여긴 옆 칸막이는 각각 있습니다. 그게 어딘가요." 이러면서 식당에서는 외국인 줄은 따로 서게 하고 식대는 몇 배로 더 받았다는군요. 메뉴의 질이 서로 큰 차이도 없는데 중국인 줄은 그 책정가가 매우 저렴해서 불평을 털어놓으니, "안 씻고 지저분한 차림으로 그냥 중국인 줄에 서서 식사하시죠."라고 하다가, "아닙니다. 지금 상태 그대로 가셔도 통과되시겠네요." 라고 짖궂은 대꾸를 하는 동료분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는 기억도 술회되어 있습니다.

저자분이나, 이 책에 등장하시는 다른 분들의 사정만 꼭 그런 게 아니라,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인은 용모가 비슷해서 구별이 잘 안 되죠. 밖에서 보기로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들끼리도, 옷 입은 거나 헤어스타일, 표정의 미묘한 차이를 보고, 혹은 주변 환경적 맥락의 도움을 얻어야 가능하지, 사우나에서 다 벗고 마주치면 얼굴만 보고 누가 중국인, 일본인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같은 한국인이라도 홀쭉이 뚱뚱이 사이에 더 위화감이 들 겁니다). 저자분의 사연이 아니라 일본에 출장갔던 선배 분의 회고로,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니 주인이 하는 말이 "쉐쉐(謝謝)"였답니다. 그 무렵이라고 하면 (비록 일본이 우리보다 10여년 일찍 중국과 수교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한국인 방문객이 많을 시절일 텐데, 하필 한국인을 중국인으로 착각했다는 점에 더 큰 실소를 터뜨리게 되네요. 센다이 출장 시 빈 호텔 방이 없어 사우나에서 매트 하나에 의지해서 임시로 1박하셨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게 꼭 센다이가 세계적 규모의 관광 도시라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보십시오. 타지인이 출입할 것 같지도 않은 외진 동네에도, 어지간하면 장급 모텔 하나 정도는 꼭 있습니다. 자영업(그 중에서도 숙박업)에 대한 우리 인식이, 미국과 일본 등과는 큰 차이가 나는 소산입니다. 국내 타지 출장이라면 어딜 가서도(심지어 시골이라고 해도) 잘 자리 걱정은 안 하는 게 한국이죠.

삼성 직원 신분으로 중국보다 먼저 방문, 체류했던 곳이 미국이었습니다. 유학에 대해 많은 갈등도 하다 결국은 포기했다고 하시는데(저자분은 서울대에서 학부, 석사까지만 마친 분), 그 이유가 "유학생 부부치고 결국 잘되는 경우가 없었다"란 조언을 윗분에게서 들었다는 이유입니다. 물론 요즘엔 해당 없을 이야기입니다. 저자분이 유학을 하던(혹은 유학을 계획하던) 시절이라면, 도피성 유학 같은 허수 아닌, 진짜 실력되고 능력 있는 알짜 인재만 모색하던 때였죠. 출세도 좋고 학문적 대성을 이루는 일도 좋지만, 가정의 화목과 유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당시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세 자녀를 두셨는데, 부모가 자녀들에게 반드시 갖춰 줘야 할 여건으로서, 수영 실력, 영어 구사 능력, 그리고 적금 통장이라고 하시는군요. 이 역시 제가 어렸을 적 특정 부류의 어르신들이 자주 하던 말씀입니다. 연배는... 저자분보다 조금 손위이시긴 하나...... 꼽으시는 삼대 리스트는 세번째 항목에서 다소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만, 수영과 영어는 꼭 들어가더군요. 사실 그 이유(특히 수영을 두고)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 근무하시던 시절 업무상의 일로 자주 접하시게 된 게 골프였습니다. 처음 손에 잡은 클럽으로 너무도 샷을 잘 날리셔서 "인생의 길을 이참에 아예 바꾸라"는 충고(?)까지 들으셨다고 합니다. 꼭 보면, 공부만 잘하는 것도 부러운데 운동신경까지 탁월해서 이렇게 펑펑 스윙하며 그린을 누비는 분들 보면 시샘이 생깁니다. 골프 실력 외에 회사에서의 순항 승진에 필요한 건 역시 얼굴만 보고도 척 심리를 감 잡는 눈치, 육감이 아닐까 합니다. 그 앞에서 "No"를 말할 수 없는 상사분이 계셨는데, 하루는 어느 동료분이 "오늘은 기필코 안건에 대해 반대의사를 밝히고 말겠어!"라고 다짐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보고를 마치자마자 그분 하는 말이 "너 지금 아니요라고 하려고 했지?"라고, 속을 훤히 꿰뚫은 선제 멘트를 날리더라는 거죠. 저자분이 이 챕터를 마무리짓는 문장은 "이분은 이후 사장까지 지내고 물러나셨다."입니다. 어떤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고 영예로운 별을 다느냐 하는 점에 대해, 직장인으로서 깊은 생각을 하게 도와 주는 에피소드라 하겠습니다.

휴양지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신 모습을 담은 사진이 이 책에는 많이 실려 있습니다. 아주 근황의 샷이라기보다는 십오륙여 년 전, 어떤 건 이십 년 전쯤의 모습들로 추측됩니다만, 저자분 본인이나 사모님 표정이나 막연한 이미지 등으로 미루어, 그보다 십여 년 전, 혹은 더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셨으며 어떤 집안 출신이시겠다 하는 점까지 (제 마음대로) 짐작해 보았습니다. 저자분의 (젊은 시절) 모습도 그렇지만, 평균적인 한국 중류층에서 나고 성장하셔서 조심스레 여유로운 중산층의 삶을 가꿔 가시는 분들 특유의, 조신하고 소탈하며 겸손한 인상이 묻어났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다 깜짝 놀란 게, 사모님께서 일본인이셨다는 군요. 위에도 적었지만, 동아시아인들은 본디 잘 구별이 안 됩니다. 하지만 전 틀림없는 (그 당시) 강남 중산층 주부님의 이미지를 사진으로부터 받았기에, 이 대목을 읽고 약간 충격을 받았더랬습니다. 그리고 과연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특히 어떤 특정 성격, 타입을 지닌 분들이란, 반드시 비슷한 사람을 만나 운명적인 해로를 하는구나 하는 결론도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자께서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까지, 삼성이라는 굴지의 대기업(그때도 그 위상이란 마찬가지였죠)에서 청춘을 불사르던 시절, 한국의 청춘은 물론 장년층도 희망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 책 곳곳에서도 저자분의 일에 대한 집념, 애착, 그리고 사랑(이게 포인트죠! 사모님 만난 사연- 그리고 자녀분 이야기들-이 없으면 이 책의 내용은 매우 공허해집니다), 이 모두를 두루두루 돌보며 함께 몰아갈 수 있던 시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도권 거주 20대 절반이 백수라는, 놀라운 현실이 대한민국의 어깨를 짓누르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이 시련은, 그간 너무 앞만 보고 다른 걸 희생한 한국인들에 대해, 하늘이 우리들 자신을 돌아다 보라고 부과한 짐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책, (지난 과거를)깊게 돌아보고 (밝아오는 미래를) 널리 내다보길 권하는, 산뜻한 편제의 책을 읽고, 나이든 세대는 추억을 반추하며 공감을 보내고, 젊은 세대는 자신에게 부족한 게 무엇이었는지 깊이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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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타이쿤 환상의 숲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임근희 옮김 / 이모션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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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본디, 가문의 배경이나 번쩍이는 학벌 같은 것의 도움 없이, 그저 밑바닥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타고난 재치와 약삭빠름, 대담함, 번득이는 한순간의 영감 같은 것만 믿고 힘차게 거리를 누비며 거부(巨富)를 그러모은, 업스타트 제왕들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한 세기 전에 활동한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오늘날까지 널리 사랑받는 건, 그의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잘 드러나듯, 이런 자수성가형 야심가들의 모습을 너무도 잘 그려낸 데에도 한 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라스트 타이쿤>은 미완성작입니다. 한국어 역자와 편집자 에드먼드 윌슨의 평가에 따르면, 작가에게 불과 몇 주의 시간만 더 주어졌어도 대작 하나가 멋진 모습으로 완성되어, 문학사상 금자탑 하나가 우뚝 세워졌으리라는 아쉬움이 있다는 거죠. 하지만 작가 사후 신속히, 그리고 꼼꼼한 성의가 기울여져 탄생한 이 판본만 보아도, 우리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캐릭터와 흥미진진한 드라마, 그 속에 녹아 있는 사회에 역사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이 점은 중요합니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채 보이지 않던 개성이요 성취라서입니다) 등을 충분히 음미하고 그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따라서 까뮈의 <최초의 인간>과는 경우가 다르게, 완성작이 주는 것 못지 않은 감흥과 들뜸을 완독 독자들에게 충분히 안겨 줍니다. 사십 년 전 이미 영화로도 한 번 만들어졌으며(작품이 쓰여진 때로부터는 대략 삽십 년 후였습니다), 최근 TV 미니시리즈로도 새로 제작이 이뤄진다는 소식입니다. 오히려 미완성작이기에, 열성과 상상력을 동시에 지닌 독자들에게는, 오픈된 여백에 마음껏 뛰어들어 인물들의 품평을 하고, 나 같으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짓겠다는 식으로 "참여"를 할 여지마저 던져 줍니다. 특히 편집자 E 윌슨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사후 그가 남긴 원고와 메모, 집필 계획 등을 모두 모아 자신의 해설과 함께 이 책에 실었는데, 독자로서는 "일류 소설가의 작업이 이렇게 이뤄지는구나."하는 생각에, 미처 못 채워 온 호기심을 마음껏 달랠 수도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먼로 스타입니다. 그의 이름 철자는 Stahr이지만, 발음이 유사하기에 읽는 이들은 이 "신동" 제작자가 주체로 행하는 동작, 주어로 기능하는 문장에서 일일이 "하늘에 뜬 찬란한 별"로 동일시하는 (자발적) 착오마저 저지릅니다. 비단 독자만의 과오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그를 경계하거나, 그를 두려워하거나, 그를 지독히 혐오하여 죽이려 들거나, 그에게 굴복하거나, 그를 존경하거나, 그를.. 사랑하거나, 여하의 입장 차이에 관계 없이, 그를 항성 삼아 주위의 궤도를 도는 행성, 위성과도 같은 위치를 잡고 있습니다.

먼로 스타의 직업은 영화 제작자입니다. 이 소설에서 (한국어 번역본에서도 물론)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프로듀서"입니다. 한국의 어느 방송국 PD가 미국에 업무차  방문했는데, 자신의 신분을 "producer"로 소개한 명함을 내미니까 다들 이상한 눈으로 보더랍니다. 이렇게 젊고 행색도 캐주얼한 차림이 무슨 producer냐는 거죠. 미국에서 producer라고 하면 어디까지나 대자본을 갖고 영화 산업을 운영하는, 혹은 개별 기획을 발주하는 사업가이지, 고용된 director, 연출 감독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이도 지긋할 뿐더러, 거동시에는 리무진과 스포츠카를 편의에 따라서 골라 몰 재력이 되어야 하며, 이 책에 잘 나오는 묘사처럼 유능한 스탭, 재주꾼들을 상황에 따라 고용하고 부리고 지휘하며 "짜를" 수 있는 독재자 노릇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재능보다 남들의 재능을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 거죠(단, 남들의 무능에 대해서도 가차없다는 게 함정).



영화 제작자란 명함을 내밀며 행세할 수 있는 저명인사가 미국 전체(동부, 서부 통틀어)에서 몇 되지도 않지만, 사업가 중에서도 "프로듀서"라고 하면 대단한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사업 감각도 좋아야 하고, 큰 조직을 오케스트라처럼 지휘, 조율, 관리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 외에, 대중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그 꿈과 기호를 (환상 속에서나마) 충족시켜 주는 통찰이 있어야 합니다. 사업가와 예술가 노릇을 모두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재능과 자질이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먼로 스타가 하는 일(비즈니스)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타 씨의 나이가 몇이냐 하면 서른 일곱입니다. 남 밑에서 일하는 처지라면 이 나이가 적지 않습니다. 혹 프리랜서라고 해도, 이미 크리에이티브가 시들어 갈 때입니다. 그러나 먼로 스타는 제작자, 회장님입니다. 남들 애써 노력해서 이제 중역 명찰을 달아 볼까 고민하는 나이에, 그는 수백 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수십만 명이 버는 급료 상당액을 한 손으로 주무르며, 수천 만 관객을 웃겼다 울렸다 할 수 있는 위치라는 뜻입니다. 이러니 그가 나이 서른 일곱에 "신동"이라는 소릴 듣지 않겠습니까. 비록 자신에게 작업을 거는(그 반대가 아닙니다) 대학교 3학년 여학생 세실리아 브래디에게는 "손을 대기에 난 너무 늙었어."라며 의뭉을 떨지만 말입니다.

미완결작이니 장담은 못 해도, 먼로 스타 회장님은 정말 세실리아 브래디(교차적으로 1인칭 관찰자 시점을 취하는 대목에서 나레이터이기도 합니다)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 어려서 여자로 안 보이기도 하고, 진성 워커홀릭이라 일이 애인인 이유도 있습니다. 그의 라이벌이자 일시 동업자인 세실리아의 부친 브래독 브래디와는 이 점에서 다릅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지도 않고, 오로지 탐욕과 야수적 적개심에만 움직인 채, 이 주인공 스타를 파멸시키려 획책합니다. 브래디 씨의 이런 약탈자 기질은, 훨씬 나이 어린 비서와 밀통하다 딸 세실리아에 들켜("아빠 어디 아프세요? 왜 이렇게 땀을 뻘뻘 흘리시고 기운도 없어 보여요?") 망신을 하는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버지라지만(그리고 자신을 딸로서 지독히 아끼고 자랑스러워 한다지만), 이런 비열하고 부족한 남자,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알아차렸기에, 세실리아는 반발심에서 (자신보다 훨씬 연상인) 먼로 스타에게 접근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너무도 아릅다운 눈빛, 일에 몰두할 때 꿈꾸는 듯한 특유의 표정" 운운하는 걸로 보아, 진짜 한 남성으로의 매력에 빠졌는지도 모릅니다. 와일리 화이트와 사귀고 있긴 하나(스타 회장은 신중하라고 조언합니다), 이 남자는 2순위일 뿐입니다.

사업상 라이벌이자 감정적 원수인 자의 딸과 묘한 관계에 놓인다는 설정은, 이 소설이 나오고 십여 년 후에 발표된 에드나 퍼버의 장편 <자이언트>에서 베네딕트와 링크의 관계와도 비슷합니다. 물론 1) 베네딕트가 누대의 지주 명문 가문 출신인 반면, 브래디와 스타는 둘 다 밑바닥 출신이라는 점, 2) 먼로 스타는 순수한 마음을 아직 잃지 않은 영혼이고, 브래디는 구제불능으로 타락했다는 점에서 <자이언트>와는 입장이 180도 바뀌었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이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은, 사업판에서야 아직 어린(?) 나이라서인지, 스타의 마음씀씀이나 감정의 동선이 참 순진한 편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는 직원이나 거래 상대방에게 직선적 어조로 면박을 주기도 하고, 현장에서 한창 작업 중인 감독(스탭 레벨이 아니고 무려 감독입니다- 레드 라이딩우드- 이름도 참...)을 바로 짜르고 현장에서 대체 감독을 바로 불러들이기도 하합니다("찍던 씬은 마저 찍고 갈게요.""아니, 다른 감독이 벌써 들어와서 찍고 있습니다. 당신 코트는 내가 여기 가져 왔으니 다시 들어갈 필요 없소, 미안하게 되었네요. 다음 기회에 같이 일합시다.").

작가의 생리도 훤히 깨치고 있어서, 능률을 못 발휘한다 싶은 작가(보통 2인 1조로 돌립니다)가 보이면 바로 다른 팀을 투입합니다("작가로서 지나친 압박에 시달리는 것 같습니다. 이번 건은 쉬시고 집에서 몇 개월 정도 쉬며 부담 없는 창작에 먼저 몰두해 보십시오."). 이렇게 소모품으로 부려지는 "작가(원어는 writer입니다. 이 단어는 author와는 구별되죠)"와는 달리, 영국 본토에서 모셔 온 진짜 작가(author)에게는 그 대접이 깍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 제작자가 왜 제작자인지, 영화 따위라며 애써 경멸하려 드는 구세대 인사에게 자신의 가치가 무엇인지, 확실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어때요? 이러면 관객이 정말 다음 씬이 궁금해서 계속 보지 않겠습니까?" "대체... 그런 솜씨가 있으면서 왜 당신은 내게 페이를 지급하는 거죠?(직접 쓰면 될 것을- 진심 탄복해서 하는 말입니다)"

경영자는 (이 소설에서 스타 본인의 입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무엇이 어디에 있고 그게 필요할 때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입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용인술입니다. "내가 커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그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구(그래서 자기가 사장이라는 뜻)." 하지만 그는 경영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 어느 예술가 못지 않게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천부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먼로 스타를 대신할 사람은, 이 헐리웃 바닥에 거의 없습니다. 밑바닥에서 숱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성장하고 이치를 터득한 자라, 사람들 마음을 파악하고 급소를 찌르는 일에 아주 능합니다.

이 소설은 이런 영화판의 비사, 생리만 전달하고 있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 대공황 이후 극심해진 빈부 격차, 그로 인한 사회 분위기의 변화를, 지식인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예리한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이런 대목에서는 "(스스로 인정하듯)배운 게 없는" 먼로 스타가 나설 수 없고, 부친에 대한 반항심에서 리버럴로 기우는 듯한 세실리아가 역을 맡아, 상류층이 바라보는 좌경화에 대한 경계, 혁명에 대한 공포, 속물스러운 동류 계급에 대한 거리두기 등 모순된 감정의 복합을, 주고받는 대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공황을 미국 신흥 부유층이 주도한 "사다리 걷어차기"로 규정하는 작가 피츠제럴드 본인의 견해도 은근 짙게 묻어납니다. 이무렵 경제적으로 대단히 고전하던 그에게(더군다나 지식인이었던 처지로), 혁명 분자들의 이런저런 주장이 그에게 결코 남의 사정이 아니었겠죠. 먼로 스타는 스스로를 "러시아에 대해 지극히 공정한 태도"를 유지한다고 평하는데, 그런 것도 아닌 것도 같을 뿐입니다. "이 사람은 다른 배역은 안 되고,... 뭐랄까 몰락한 러시아 귀족 역을 맡기면 딱이겠군.""사실입니다. 망명 귀족이에요..... 단, 소신이 공산주의라 그 역은 절대 안 맡겠다고 합니다."....." 이런 장면에서 독자는 웃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 이 작품의 원제는 The Love of the Last Tycoon입니다. love of 가 빠진 건 영화제목에서만 그렇습니다. 세실리아는 일방적으로 스타를 좋아했지만, 스타 씨가 좋아한 여성은 따로 있습니다. 죽은 처와 너무도 닮은 캐슬린 무어가 바로 그 대상입니다. 영리하고 빈틈없는 그는, 누가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아내와 닮은 배우 하나를 고용한 것 아닌가 처음엔 의심합니다. 헌데, 예리한 그의 눈으로도 보면 볼수록 캐슬린은, 자신의 the one 그 자체였습니다.... 쿨한 콜걸(나중에 정체가 밝혀지죠) 에드나의 친절한 소개로 캐슬린을 만나게 된 먼로 스타는, 그녀와 하룻밤 진한 정사를 나누고 지속적 관계를 맺으려 하나 여의치 않습니다. 소설의 애정 관계는 이처럼 밀도를 잃지 않은 다각적 양상으로 이어지는 게 또한 빼어난 점입니다.

연예인처럼 화려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자신이 몸담은 체제와 사회에 언제나 한 발 물러서 지식인적 냉정을 지키려 했던 스콧 피츠제럴드. 미완인 상태로도 워낙 웅대한 스케일과 치밀한 계획으로 시작한 작품이기에, 거진 70년이 지난 이 시점에 읽어도 여전한 몰입감과 감동을 줍니다. 한국어로 이 작을 드디어 접할 수 있는 게 행운이었고, 상세하고 친절한 역자 후기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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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2 - 누구를 사랑하든, 누구와 일하든 당당하게 살고 싶은 나를 위한 심리학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2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두행숙 옮김 / 걷는나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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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나로 사는 것, 말은 쉬워도 행동으로 옮기기엔 결코 용이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꾸미는 자아가 있고, 속으로 상처 받으며 약한 모습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는 자아가 따로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상처"가 두려워 몸을 움추리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란 본래가 이렇게 약한 존재인가, 학교에서 지식과 기능을 전수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다스리고 원활한 대인관계를 가꾸는 방법부터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진짜 상처가 무엇인지, 상처를 낫우고 아문 자리 위에서 새롭고 건강하며 매 순간이 기쁨 가득한 관계를 새로 구축하는 비결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려는, 아니 일방적으로 뭔가를 전달하려 든다기보다, 독자와 청중과 함께 소통하고 공감하려는 몇몇 전문가의 시도, 그리고 그 성과물인 저서들은 참 고맙기까지 합니다.

 

고답적인 형이상학 담론 저술도 저술이지만,  사회에서의 경제활동 참여에 열심인 일반인을 위한 실용서의 제작에도 성의를 소홀히하지 않는 독일어권 저자들의 좋은 챋책이 요즘 부쩍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트렌드에 속한 일군의 도서 중 처음 읽은 것은 "번아웃 증후군"을 다룬 어느 독일 신경생리학자의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일 중독, 성과(成果) 강박, 속도에 치어 태생적으로 지닌 리듬과 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채 주위에 끌려가며 사는, 우리네 직장인들의 모습과 독일인들의 그것이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면, 독일인들은 라인강의 기적을 그로부터 수십 년 앞서 달성해냈습니다(어구의 기원이나 성격이 분명치 않다는 지적도 있긴 합니다만). 이처럼 폐허 속에서 각오를 다지며 당대와 후세에 무엇인가를 남기려 분투한 근성과 열의 면에서 두 민족(국가) 사이에 유사한 점이 많기에, 일류 전문가-저술가의 작품이 우리 독자들에게도 호소하는 바 많은 건 어쩌면 분명한 인과가 존재한다 하겠습니다.

 

저자 배르벨 바르데츠키 박사님의 책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1>은, 우리 한국에서도 정말 많은 독자들이 찾아 읽은 화제작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 독자들의 대열에 참여해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열심히 읽었더랬습니다. 힐링을 그 목적으로 표방한 책은 여러 수십 권이 이미 서점에서 독자를 만난 바 있습니다. 인생사 별스러운 바 없는지라 결론이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라서인지, 아니면 저자들이 서로를 참조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내용을 보면 비슷비슷 대동소이, 어느새 책과 책을 오가 본 독자들을 지치게 하는 것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이 책은,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겠다"는 다짐과 오기, 그리고 강한 자존감이 적절히 배어나는 선명한 느낌의 제목도 제목이지만, 세심하게 편집된 챕터마다 진정성 있는 저자의 사연, 조언이 꼭꼭 채워져 있어서 그토록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 두번째 책의 원제는 <Souverän & Selbstbewusst>입니다. "자신만만하고 자의식 강한 (나)"의 의미인데, 확실히 한국어 번역 제목이 잘 붙은 것 같습니다. 책 내용이 한 문장 안에 다 압축이 되며, "너에게 부당하게 상처 입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 선을 넘어 너에게 어떤 상처를 주지도 않겠다. 나는 관계의 참된 승자가 되겠다"는 은근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1권도 그렇고 이 후속작도 그런 저자의 주장과 격려가 곳곳에 녹아 있어서, 읽는 이들로 하여금 소외감 없는 과정을 통해 자발적 힐링이 가능하게 돕고 있습니다. 1권이 "상처(Kränkung)를 입고서도 잘해 나가는 관계"를 표방했다면, 이 후속작은 "자신에 대한 회의감을 잘 어루만져 가며 이끌어 나가는 관계"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2권에서(우리처럼 1,2 하는 넘버링은 없지만 독일어 원서들도 두 권이 깊은 연계를 갖고 전후작 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당신이 왜 상처를 받는가? 그것은 자기 회의감 때문이다. 라는 전제적 문답으로 책 전체의 논의를 일관되이 꾸려가고 있습니다. 서문에서 어원상 "(자기)회의"는, 둘(zwei)로 쪼개어진다"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어의 doubt도 마찬가지로서, 잘 보면 안에 double이 들어 있습니다. (대상이) 하나라면 고민할 게 없는데, 둘로 쪼개지니 이건지 저건지 확신이 안 생기는 거죠. 저자는 "원시 시대 거대한 매머드를 만난 혼자인 인간이, 무기를 들고 그대로 돌진할지 아니면 멈춰 서야 할지 '회의'가 들지 않았다면, 그가 과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후손을 남길 수 있었을지"를 말하면서, 자신에 대한 회의감은 결코 부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며, 오히려 효과적인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장치라고 정리합니다.

 

저자 바르데츠키 박사님의 책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특징은, 1) 자신이 강연이나 수업, 연구를 통해 접한 많은 사례를 잘 정리, 소화하여 책에 담아 실감, 공감 범위를 넓히고 있다는 점, 2) 독자 여러분과 내가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며, 예컨대 여러분만 쉽사리 상처를 입곤 하는 못난이가 아니라, 상처의 힐링을 도와주려 나선 나 역시 쉽게 상처받고 자기 회의감에서 빠져 나올 줄 모르는 "동병상련 처지"임을 숨김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도 그녀는 구체적이고 감정이 살아나는 서술을 통해, "상처는 누구나 받고 입고 지니고 가는 일상인데, 왜 당신만 벙어리 냉가슴 앓듯 괴로워하는가? 다만 당신이 빨리 상처를 정리하면 할수록, 당신이 남들보다 더 행복해질 수는 있다."는 사실을, 친절하고도 진실되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회의에 쉽게 빠지지 않거나, 빠지더라도 곧 벗어나 평정심을 찾는 이들을 두고 우리는 "심지가 굳다"란 말을 씁니다. 근거 없는 자기확신에 빠져 파멸, 실패로 무모하게 돌진하라는 게 아닙니다. 결국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가감 없는 성찰이, 든든한 기반의 자기 확신을 마련하고(최소한, 바닥 없는 자기 회의에 빠지는 걸 막고), 타인으로부터 상처 입지 않는 바탕까지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결국 현실은, 이 세상은, 살기에 겪기에 제법 괜찮은 곳임을 알게 됩니다. 혹시 나의 환상을 깨는 순간 세상이 지옥이 되어 나를 덮칠 것 같다는 괜한 두려움을 버린다면,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장벽과 허울도 어느새 사라지고, 상처보다는 활력과 기쁨의 원천이 주위에 더 많다는 점도 안도하며 깨닫게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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