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헤겔의 신학론집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 인간사랑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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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칸트와 헤겔은 근대 독일, 나아가 유럽 철학의 토대를 확립함에 있어 큰 공헌을 세운 두 위인입니다. 두 사람의 뚜렷한 공통점이라면, 철학의 어느 한 분과에 한정하지 않고, 거의 모든 분야의 철학, 그리고 당대의 성취 수준 범위 안에서 자연과학, 역사학, 문학, 종교학 등 포괄적인 영역에 대해, 그 이전까지의 성과를 거의 망라하다시피하여, 후배 학자들에게 잘 정리된 형태로, 넘겨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종합과 편집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이 두 거인은 종전의 철학자들이 전혀 엄두를 내지 못하던 방식으로 사물과 현상을 보고, 비판하고,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위대한 종합 만으로도 그것은 큰 성과인데, 두 사람은 종합을 뛰어넘어 철학 전반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종합을 성취해 낸 이들은, 대체로 그 세계관이 보수적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바로 "종합"이라는 개념 속에 이미 그 (보수주의의) 단초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종합"이라면, 그것은 기성, 기존의 것들에 대한 종합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종합의 대가들은 대체로 conservative의 아성에서 그리 먼 발짝을 떼려 하지 않습니다. 아퀴나스의 성 토마스가 그런 인물이며, 심지어 적폐 타파의 상징과도 같았던 마르틴 루터마저도 그 학문상 방법론이나 정치적 노선의 특징은 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거인, 칸트와 헤겔은 어떻습니까? 임마누엘 칸트는, 생애 단 한 번도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고 하죠. 물론 자신의 고향에 진중히 은거했다고 해서 항상 보수적 기질을 지녀야 한다는 단정은 대단히 억지스럽지만, 칸트는 실제로도 그러한 성향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어구를 보십시오. "네 자신의 의지의 격률이 항상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게 하라." 이런 도그마대로라면 아마 숨조차도 마음 놓고 못 쉴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는 학부 시절 그의 <실천이성비판(삼성문화사판)>을 읽던 때에, 그 서문에서 자신을 후원한 모 주권자(soverign)에 바치는 그의 헌사를 읽고, (좋게 말해서) 그의 질서와 체제에 대한 강한 신뢰와 외경심을 감지할 수 있었고, (나쁘게 말해서) 그의 다소 비루하다 싶은 권력 추종 성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이런 말투와 형식은 당대의 관습이었다는 사실을 넉넉히 감안해도 그렇습니다).

 

반면 헤겔을 보죠. 이 사람이 남긴 무수한 명언 중에 "예술가는 군주의 기상을 가져야 한다."는 게 있습니다. 물론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뛰라는 게 아니라, 군주의 처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현실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예술혼을 불사르며 불멸의 미학적 성취를 남기라는 그의 당부가 주된 취지였겠지만, 그렇다손 쳐도 함부로 군주를 거론했다는 자체가 그리 예사롭지만은 않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또한, 헤겔의 연구에 있어서는, (이 책 역자 정대성 교수님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청년 헤겔"이라는 분과가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노년 원숙기에 이르러 헤겔은 그 엄청난 폭과 깊이를 자랑하며 후세 독자와 연구자들에게 극악의(?) 하중을 안기고 떠났지만, 반면 38세가량까지의 청년기(이 시절이라면 더군다나 38세라는 나이가 "청년" 범주에 들기 어려워겠습니다만, 헤겔의 그 아득한 사상 반경을 감안한다면 진정 자연스럽습니다. 시점을 20세로 잡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겠습니다)까지의 헤겔이라면. 그 진취성과 대담함, 기존의 사유 체계와 그를 둘러싼 현실의 낙후성에 대한 비판이 워낙에 강경한 모습이라, 그를 피상적으로 알던 이들을 당혹하게 만듭니다. 최소한 "청년 해겔"은 누구 못지 않은, 강경 좌파였던 셈입니다!

 

본디 프랑스에서도 그러했듯, 기독교(특히 구교)는, 계몽주의의 대두 무렵에서는, 사회 발전을 가로막고 온갖 구폐와 기득권을 대변하는 사회의 公敵 비슷하게 치부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놀라는 건, 헤겔 역시 기독교에 대해 일반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신랄한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고입니다. 헤겔은 기독교의 구, 신 을 가리지 않고, 민중의 자발적 개과천선과 자유에의 희구를 철저히 가로막는 장벽 구실을 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오성과 자유의지를 자극하는 종교의 탄생을 강력히 열망하고, 그에 대한 試論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사이비 종교 창시자(?)로 오해 받을 지경입니다. 물론 이성과 오성에 대한 철저한 숭배자인 그가, "묻지마"와 "막무가내", "거짓과 허위 선전"으로 대표되는 사이비 세력과 엮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만 말입니다.

 

이 책 제목은 <신학론집>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로 헤겔이 생전에(혹은 사후에라도) 이런 제하의 단일 저서를 출판한 건 아닙니다. 역자 정대성 교수님이, 헤겔의 저작 중 그의 의도에 맞는 여러 저술을 추려 이렇게 모양 좋은 한 권으로 번역해 낸 것입니다. 엄밀하게는 "신학"의 주제에서 다소 벗어나는 것도 있고, :"논문"이라기보다는 중수필에 가까워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청년 헤겔" 나아가 "인간 헤겔"을 이해하는 데에,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문헌들이라서, 독자는 잠시 충격을 받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 헤겔의 글이었단 말인가?"

 

마르크스, 아니 그 이전의 유물론 전통이, 헤겔을 깊은 사상의 호수로 하여 태동하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변증법"을 빼면 대체 무엇이 남을까요? 헤겔의 適子는 우파 체제 옹호론자일지 모르지만, 설사 마르크스를 사생아로 분류한들 이 사나운 자식을 빼면 그 가계의 족보가 심심해지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확실한 것은, 마르크스야말로 이런 아버지의 씨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여태 아들을 보고 그 범상치 않은 기질에 놀라곤 했지만. 이제 그 아비의 젊은 시절을 보니 "씨도둑질은 못한다."는 우리 속담의 타당성을 되씹게도 됩니다.

 

칸트는 저 먼 동방의 벽지, (그 당시에도)거의 러시아에 가까운 고장에서 평생을 보내고, 게르만 겨레가 일군 나라 중에 가장 보수적이었던 프로이센의 신민으로 생을 마친 사람입니다. 반면 헤겔은 그때나 지금이나 게르만 종족의 거주지 중 가장 서편에 치우친, 프랑스와 등을 대다시피한 뷔르템베르크 공국 출신이고, 상당 기간을 타지 유람으로 보낸 이력이 있습니다. 종합의 거장이자 초인적 두뇌의 소유자인 두 사람이지만, 이처럼이나 남긴 업적의 성향이 차이남은 반드시 그들이 각각 산 시대의 격차에만 기인하는 건 아닐 것입니다.

역자 정대성 교수님의 해제가 일품입니다. 번역도 유려하지만, 과연 이처럼이나 명쾌한 헤제가 아니었다면 헤겔과의 대화가 가능했을까 하는 회의가 듭니다. 됵일 본토에서 정통 코스로 박사를 따신 분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감탄, 이 서평에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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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세를 읽는 승부사 조조 - 우세와 열세를 아는 자가 이긴다 삼국지 리더십 3
자오위핑 지음, 박찬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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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술(詐術) 없는 정정당당한 방법, 누구의 도움도 빌리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업적을 이루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기간에 망한 진(秦)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를 건설한 유방 역시, 순탄치 않았던 통일 과정에서 체면 깎이는 일을 수도 없이 당했으며, 건업(建業) 후에도 이른바 토사구팽으로 상징되는 공신 대숙청을 별 망설임 없이 감행했습니다. 이치와 명분에 비추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50여년이 흐른 후 주원장 역시, "시기호살"이란 표현으로 잘 알려진 특유의 의심증과 과도한 견제 심리의 발동으로, 십만 단위에 이르는 인명을 거리낌 없이 죽이고 또 죽였습니다. 하지만 이 둘에 대해, 당대나 그 이후나 민중들은 애정과 존경을 보내는 편이었습니다. 대체로 그 이유에 대해서는, 1) 둘 다 농민 출신이다. 2) 그 이전 체제 아래에서의 혼란이나 수탈이 극심하여 왕조에 대한 불신이 심했다. 정도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개인의 능력으로 보나, 자기가 부리는 인재에 대한 활용 능력, 권한 위임의 과감성으로 보나, 위 무제 조조는, 위에 거론된 유, 주 양인을 능가하고도 남는 파천황의 대 영걸(英傑)이자 전무후무의 경영자였습니다. 중국 오천 년 역사상 그만한 인물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아니 세계사를 통틀어 놓고 봐도 그만한 천재가 있었을까 하는 감탄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에는 두어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1) 귀족에 비해서는 평판이 다소 떨어지긴 하겠으나, 상당한 권세를 누렸던 집안 배경을 지니고 출발했다(친가 양가 모두)는 점에서, 순수 농민 출신 영웅에 비해 친화도가 떨어짐. 2) 그가 자신의 것으로 (사실상) 대체한 직전 왕조 한실(漢室)이, 아직은 백성에 의해 버림 받은 정도의 위신이 아니었다(즉, 멀쩡한 왕조를 뒤엎었다는 역적의 이미지). 의심이 많았다든지, 정적이나 총애를 잃은 신하에 대해 무자비한 처결을 했다든지 하는 건 어느 창업 군주나 마찬가지 모습입니다. 조맹덕이 특별히 욕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만 더 덧붙인다면, 3) 그가 창업(형식적으로야 선양을 받은 당사자는 아들 조비입니다만)한 왕조가 단명하고, 곧바로 사마씨의 진(晉)에 의해 교체되었다는 사실도 빼 놓을 수 없겠습니다. 그가 통일을 완수하지 못한 것도, 나머지 양국(촉, 오)의 실력이 다른 분열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5대 10국이나 남북조 말, 빈사의 원 치하에서 할거했던 군웅과는 상대가 안 될 만큼 강한 지방 정권들을 채 조복(調伏)시키지 못했다고 해서, 이걸 그의 능력 부족 탓으로 돌릴 일은 아닙니다. 오의 주공근은 "하늘이 나를 내고 왜 또 양(제갈량)을 내었는가!"라고 탄식했다지만, 맹덕으로서는 자신 외에 유비와 손씨 삼부자를 또 내려 보낸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1)과 2)를 가만히 살펴 보면, 둘 다 결국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철저히 외생적(exogenous)인 변수들입니다. 3) 역시 창업자가 어떻게 손을 댈 수 없는 부분이고, 제아무리 천재라 한들 후손의 DNA를 생전에 조작해 놓고 죽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보면, 조맹덕은 자신의 힘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모든 변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자신에 유리하게 바꾸어 놓고 게임을 진행했다는 뜻도 됩니다.

하지만 상황을 언제나, 제 힘만 부려서 일일이 바꿔 놓는다는 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대단히 비효율적이고 미련한 방식도 됩니다. 바로 초한 쟁패기의 항우가 그러했습니다. 항우가 바위 위의 파리를 잡으려고 주먹을 내리쳐서, 파리는 잡지 못하고 바위만 부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史實)이 아니라 일종의 우화입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이런 항우와는 달리 유방은 매우 실리적인 성격이었으며, 위신을 내세우지 않고 솔직하게 타인을 대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사기 열전을 인용하여 저자 자오위핑은, (현재는 자기 휘하에 있다고는 하나)잠재적 적수인 한신 앞에서 "그 두 가지 점 다 내가 못하오."라며, 조금의 가식이나 말재주 없이 약점을 인정하는 유방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사실 "조조"를 다룬 책에. "유방"의 예가 나오는 건 좀 의아합니다(물론 저자의 능력 증명이요, 독자로서는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접한다는 재미가 있습니다만). 저자로서도 고육책이었던 것이, 조조라는 인간은 경영자로서 군주로서, 별로 미달하는 자질이나 덕목이 없는 형편이었던지라, 제 아랫사람에게 뭘 인정하고 말고 할 사항이 애초에 없었던 겁니다. 대신 저자는, 관도의 대전에서 조조 필생의 적수(과거 내력으로 보면 조조가 감히 대적할 수도 없는 강하고 귀한 지위였지만)인 원소의 약점을 거론합니다. 아랫사람을 두고 겉으로는 인자하고 너그롭게, 좋은 표정을 꾸며 대접합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끊임 없이 의심하고, 좋은 간언이나 헌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항우와 정확히 닮은 점입니다. 이러니, 좋은 판세를 등에 업고서도 그 이(利)를 살리지 못하고 제풀에 엎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조조는 제 주변에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꿔 놓으려는 감투 정신의 소유자요, 또 그런 구상을 실전에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지만, 미련스럽게 모든 변수에 대해 수정을 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능력이 뛰어났기에, 마음만 먹으면 못할 바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공연한 일에 진을 빼고, 정작 힘을 발휘해야 할 때 가서 힘을 못 쓰고 성과를 못 내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노장의 가르침처럼, 무위(無爲)함만도 못한 것입니다. 저자 자오위핑은 그 말을 하고 있진 않지만, 조조의 진정한 위대함은 각종 수완과 책략에 능하고 두뇌가 빼어났으며 사람의 마음을 잘 읽었다는 자질 뿐 아니라, 판을 잘 읽고 타인의 힘을 제 유리할 대로 이용할 줄 알았다는, 자원 활용의 경제성 원칙에 충실했던 그 영악함이었습니다.

그가 서부를 안무하고 나서, 눈을 돌려 동쪽을 보니 여포, 원소, 유비라는 걸물들이 제각기 자기 세력 구축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조조는 섣불리 천하 통일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아마 이 3웅(雄)이 단결하여 조조의 목에 공동의 칼을 겨누었을 겁니다. 조조가 수세에 몰려 몰락하고 난 뒤, 이 셋은 아마도 다시 필사적 각오로 상호 쟁패에 돌입했겠습니다만, 내가 죽고 난 후 어부지리를 취하는 게 다 무엇이겠습니까? 판을 앞당겨 서로 싸워서 세를 쇠잔하게 만드는 게 최상의 방법이고, 그 수에 말려 들지 않으면 각개 격파를 시도해야 합니다. 조조는 이런 구상으로 원소를 안심하게 하고, 유비는 먼저 여포와 반목하게 한 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당시 가장 가공할 적이었던 후한 최고의 무장 여포의 새력을 궤멸시킵니다.

관도에서 원소에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루는 일은, 조조로서도 피하고 싶었을 겁니다. 강대한 병력, 넉넉한 군량(전쟁에서 보급이란 얼마나 중요한 요소입니까), 지역에서 세력을 유지해 온 그 오랜 세월에 비례한 세간 평판의 깊이 면에서, 조조가 원소를 대적함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는 무모한 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판세를 정확히 읽고, 그 허점만을 정확히 타격"함으로써, 불리한 형세를 뒤엎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풍은 이런 계책을 올렸습니다. "조조가 용병에 능하니 우리는 지구전으로 맞서 손실 없이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는 일시적 승리가 아니라 조조가 다시는 발호하지 못하게 하는 발본색원의 방안입니다." 라고 하자, 원소는 마치 자신의 능력이 조조에 못 미친다는 암시처럼 듣고는 그를 투옥했습니다. 허유가 "조조가 저리 부족한 병력으로 무리한 진형을 짜고 있으니, 이 틈을 타 허도를 기습하면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것이며, 조조는 이 과정에서 자중지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원소에 결정적인 한 마디 충언을 했습니다. 사실 전풍의 A안과 허유의 B안은 서로 모순되는 것입니다. A안이 신중하고 수세 중심의 선택이라면, B안은 이와 극단적 대조를 이루는, 병법에서 최고로 치는 寄策의 전형입니다.

그런데 원소는, 둘 다를 잘 추려 수용하는 운용의 묘까지는 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그저 둘 중의 하나는 그냥 골라 잡아 마땅한 상황에서도, 둘 다를 묵살하는 최악의 수를 두고 말았습니다. 리더가 제 주견이 없을 뿐 아니라, 뛰어난 아랫사람의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는 열등 컴플렉스까지 지니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스스로의 망상 세계에서 머물며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고, 처음의 자기 판단이 옳았기만을 끝까지 집착하며 빌고 있는, 여지없는 패배자의 모습을 노출한 거죠. 유리한 판세도, 제 마음 하나 편하고자 왜곡하고 비트는 습성은, 가진 판돈을 불리한 패에 걸고 다 날리는 파멸의 정코스로 사람을 몰게 되어 있습니다.

조조는 이와 정반대였습니다. 허유가 귀순의 뜻을 밝힐 때, 자신 없는 타입이라면 "이게 혹시 반간계의 일종 아닐까?"하며 우왕좌왕하거나 반대의 패착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조조는 허유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깁니다. 의사 결정은 신속함이 최대의 미덕인데, 조조는 (어느 정도 리스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단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영웅이 영웅을 알아 보고 좋아한다는 건 바로 이를 두고 이름입니다. 맞는 말은 누가 하는 말이건 무조건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게 win이란 걸 체질로 아는 것입니다. 조조가 판세를 읽었다 함은, 타인의 힘 중 유리한 건 애써 뺏으려 할 게 아니라 그대로 타인의 수중에 둔 채 내것으로 활용하고, 타인의 허술한 구석은 틈을 두지 않고 바로 찔러서 무력화하는 데 당대 누구보다 능했다는 뜻입니다.

판세를 잘 읽었다는 건, 외부 형편이나 적의 형세를 두고만 이르는 게 아닙니다. 나 자신의 형편, 내가 부리는 아랫사람들의 객관적 상황 파악에도 능했다는 뜻입니다.


이 책은 <연의>에만 의존하지 않고, 정사(진수의 삼국지)나 다른 문헌을 두루 참고하여 재미있게 각색했다는 사실이 돋보이는데요(이 점은 자오위핑의 전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은 <연의>에서 거의 비중 없는 인물로 다뤄지지만, 정사의 행적을 보면 초조의 창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인재였습니다. 이전 역시 상관의 기색과 심기를 잘 살피고 능숙한 처신을 보였지만, 조조 역시 그런 이전의 본의를 잘 읽고 극진한 대접을 베풀어, 출중한 인재의 능력이 십분 발휘되게 조장했습니다. 아랫사람이라고 해도 배신, 불만의 여지는 언제나 상존하게 마련인데, 조조의 뛰어난 점은 인재의 심중을 언제나 헤아려 선제적으로 최상의 대우를 베풀고 이를 미연에 방지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야말로 또다른 "판세읽기"의 미덕입니다.

연의에 나오지 않는 조조의 행적으로서, 그가 20대 초반 일시 좌절을 맛보고 낙향했을 때도, 반드시 자신의 패착이 어디 있었는지 반성하고 복기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그는 이 기간에 천운의 반려자인 변황후와 연을 맺는데, 어쩌면 가장 소중한 성과와 자원 확보를 이룬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에 나와 있듯 변황후는 그 걸출했던 아들 조비와 조식을 낳아 준 동반자였습니다. 자오위핑은 이처럼,  <연의>의 후일담이라도 들려 주듯 재미있는 이야기를 곳곳에 섞어 넣어, 주제의 설득력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재미도 있지만, 일개 소설에 불과한 <연의>에 비해 권위도 더 높은 것들입니다. 역사와 허구를 교묘히 오가면서, 캐릭터로서의 조조와 역사적 위인으로서의 조조를 총체적으로 분석하여, 오늘의 처세 그 핵심을 묘파하는 저자의 능력이 또 한번 빛나는 두툼하고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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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보는 32가지 물리 이야기
레오나르도 콜레티 지음, 윤병언 옮김 / 작은씨앗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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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어느 베스트셀러 저자가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라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과학 본연의 연구보다 대중과의 소통을 더 중시하는 듯한 카이스트 출신의 그 저자의 작업은, 어찌 보면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영화에는 스토리가 있고, 감독이나 제작진 중에는 대학에서 과학이나 공학을 전공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 때에는, 대중에게 전달하려는 게 미학적 감동 외에도, 모종의 과학적 맥락의 전달 역시 있게 마련입니다. 캐릭터나 피사체가 움직이기도 하고(영화를 영어로 하면 motion picture입니다), 스토리(영화가 품고 있는) 중에서 스토리(예컨대 정재승 박사의 이야기)를 뽑아 내는 건,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극히 어려운 과제도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화(motion picture)가 아니라, 그냥 회화(picture)에서, 그 그림을 해석하고(답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이야기를 풀어내라고 해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한정된 공간 안에서 구현된 구상 혹은 추상에서 "과학을 본"다라? 그건 어쩌면 처음부터 불가능한 과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림을 그린 그 거장들의 의도도 그게(과학의 구현 같은 것) 아닐 뿐더러, 정지된 이미지 한 컷에서 그 복잡한 수학적 구상이 개입해 있는 원리를 줄줄 풀어낸다... 물리학에 통달한 이에게도 힘든 일 같고, 회화와 미술사에 어지간히 밝은 이에게도 어려운 일 같습니다. 두 분야에 다 도가 튼 사람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지만, 그런 사람이 많지도 않겠거니와,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둘을 동시에 엮고 버무려 가면서 "썰"을 푸는 건 정말 힘들 것 같습니다.

 

저자 레오나르도 콜레트는 본분이 물리학 연구직입니다. 이탈리아 트렌토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현직 교수이며, 미국 물리학협회 APS 회원이라고 책 소개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 이력을 가진 사람 입에서는 절대 안 나올 것 같은 주제가 바로 회화의 역사, 기법 등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그러나 이 책에서, 미술사상 특정 유파나 조류에 속한 작가나 작품만 거론하는 게 아니라, 다빈치나 카라바조에서 마네와 샤갈, 오토 딕슨에 이르기까지, 정말 아무 공통점도 서로 갖지 않은 거장들을 32명 뽑아 놓고, 말 그대로 그림과 물리학의 역사를 종횡무진 오가면서 "썰"을 풀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아마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대학에서, 어린 학부생들을 상대로 교양 강의차 들려 주던 내용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주제를 전달하는 형식은 두 남녀 대학생(아직은 본격 사귄다기보다 썸타는 정도로 보이는 사이)의 대화로 꾸려져 있더군요. 남자 대학생이 물리학을 설명하고, 여대생이 그를 이해하는 위치에서 둘은 신나게 말을 주고 받으며, 독자와 저자의 사이에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해 냅니다. 대화는 유머러스하고 화기애애하며, 특히 프란체스카의 날카롭고 당돌한 질문은, 파올로의 도도한 논변을 힘겹게, 때로는 의아한 느낌으로 따라가는 독자의 심겨을 상당 부분 대변하고 있습니다.

 

분리하면서 포착한다. 사실 이 말은, divide and rule을 살짝 비튼 것입니다. 파올로의 대사 중에는 "포착"이 아니라 "정복"이라고 되어 있고, 이렇게 읽으면 저 어구와 거의 일치하죠. 물론 저자는 어지간히 진보 성향의 스탠스라서 그런지, "정복"이라는 단어가 전달할 수 있는 의미가 그런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이 아님을 구태여 여러 번, 변명하듯이 덧붙입니다. 이런 책을 읽는 독자가 그런 오해를 할 가능성은 낮을 텐데도 말입니다.

 

저자의 입장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총체적으로 보자는 것이었고, 이런 입장이 교조적으로 굳어 과학은, 물리학은 수 세기 동안 발전을 할 수 없었다."
"갈릴레이가 처음으로, 부분적으로 선명한 진리를 포착하기 위해 관계 없는 다른 사정과 상황을 제거하고 사실을 관찰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였고, 그것이 바로 사고 실험(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이며, 이 시도를 통해 "관성"이라는 것의 개념 정립이 시도되었으며, 이를 통해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물리학이 처음 자리잡았다."
"근대 과학은 이 갈릴레이의 시도를 기점으로 눈부신 발전을 보일 수 있었으나, 이후 플랑크에 와서 한계에 부딪혔고(소위 양자성의 문제), 비로소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적 총체성으로 복귀할 필요성을 일부 느끼기 시작했다."


이 모든 주장을 저자는 움베르토 보초니의 <동시적 착상> 한 폭의 그림에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저 표현들은 제 느낌과 기억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므로 책 원문과 차이가 있을 수 있고요)

 

옳은 말이고, 이 1장은 이후 계속 이어지는 뉴턴의 고전 역학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 있어 토대와 대전제를 이루는 내용이라서, 독자는 반드시 읽고 지나야 합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발췌독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명작 32점은 그 배열에 별반 필연성이나 깊은 의도가 없지만, 그 명작 32점을 모티브로 하여 펼쳐지는 과학사(이 책 내용은 과학 이론 현황 설명이라기보다는 과학사 해설에 가깝습니다. 지금은 폐기된 에테르論, 플로지스톤 說도 등장하니까요) 설명에는 반드시 시간적 맥락(어떤 이론이 무엇을 극복하고 등장한 것이다)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순서를 바꿔서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과학사에 이미 밝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도, 저자만이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개념어가 여러 번 나오기 때문에, 발췌독 형식은 어렵습니다).

 

저자는 과학의 발전과정, 혹은 과학이라는 정신 작용을 독특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분명 저자는 상대론적 관점에서 이 모든 주제를 소화하고,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충격을 받은 건, 저자는 "원자" 개념에조차도 얼마든지 향후 붕괴할 수 있는 가설 정도의 위치 이상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원자가 물질의 최소 단위라는 돌턴식 개념은 타파된 지가 한 세기가 넘었습니다만, 적어도 "원자"라는 단위가 물리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에는 아무에게서도 이의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저자는 그러나, "원자 역시 그 누구도 눈으로 본 사람이 없으며, 더 유력한 설명이 나올 때까지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설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투로 이야기합니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원자는 끈(혹은 초끈) 이상의 실감이 나는 개념도 못 되는 셈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나오는 중입니다.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건, "불변의 진리라고 받아들였던 그 모든 도그마를 손쉽게 버릴 줄 알아야 대가라고 할 수 있다"더군요.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총체성을 폐기함으로써 새로운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고, 그런 갈릴레오의 관성 개념이나 원운동 역시, 뉴턴에 의해 전면적으로 비판, 수정되고야 말았습니다. 저자가 직접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서양 회화 역시 관점과 스타일을 그토록 정교하고 세련되고 발전시켜 오다가, 어느 천재(마네나 마티스 등)에 의해 송두리째 버려지고 전혀 새로운 기법, 스타일이 만들어지면서 발전해 온 사정이나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지요. 그냥 과학 이야기만 해도 될 것을 굳이 그림까지 끌여 들여 온 건 그런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자기 스승(티코 브라헤)를 충실히 섬긴 걸로 유명한 케플러, 그리고 교회와도 큰 마찰을 빚지 않고 무난히 넘어갔던 케플러에게서 "혁명가, 파괴자"의 성격을 찾는 건 좀 힘들어 보입니다. 저자는 그러나, 갈릴레오의 원운동 개념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고 타원 운동설을 정립한 그야말로, "틀린 것을 과감히 포기할 줄 아는" 진정한 혁명적 과학자의 자격이 있다고 단언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저 케플러가, 티코(이 책에서는 "튀코"라고 표기합니다. 그게 정확하죠) 브라헤와 갈릴레오라는 두 神 사이에서 전자를 선택한 것 뿐 같습니다만.

 

이처럼, 모든 이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과감히 다은 이론을 내어 놓음으로써 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이런 말은 없습니다만 독자로서의 제 해석)이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니,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론이 빠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저자는 카라바조의 <바울의 회심>을 두고, 회심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빛"을 가득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보통 권위 있는 미술 평론가들에 의해 내려지는 그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멉니다. 거의 꿈보다 해몽이라고 될 만큼, 이 걸작을 놓고 풀어지는 설명은 저자 특유의 물리학사 해설이 주종을 이룹니다.

 

예컨대 저는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을 두고, "사실주의적 결함"을 들고 나오는 저자의 태도에서 과연 물리학자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총을 쏘는 군인들이 꼿꼿이 서 있느냐는 거죠. 물론 이는 저자의 편협한 주장은 아닙니다. 인상파 작가들이 처음 나올 때부터 받은 비판이 바로 그런 류였습니다. 마네는 처음부터 "그 꼿꼿한 인상"을 포착하여 전달하려 했던 것으므로, 아무 잘못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탁월하기까지 합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개인으로서 막시밀리안 1세(멕시코의)를 두고 저자가 너무 왜곡된 주장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황제로서 실권을 가지지도 못했고, 나폴레옹 3세의 농간에 놀아나 대신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뿐이었죠. 빈민과 약자에 대해 대단히 온정적이었고 굳이 사지로 가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남자답게 군주답게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좀 지나친 평가가 아닌가 했습니다. 물리학자는 물리학 이야기만 해야 하지 않았나 싶은 대목이었습니다. 물론 이 장에서 펼쳐지는 작용 반작용 설명은 대단히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사울의 죽음>은, 제 개인적으로 가장 탁월한 챕터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전쟁터에서 보이는 무수한 창날을 보고 "벡터"를 떠올린다든가, 울퉁불퉁한 지평선의 완급을 보고 함수의 개념을 설명한다든가 하는 건, 어린 학생들에게 읽히면 참 유익한 설명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말 역자의 센스가 돋보이는 게, 벡"터"와 전쟁"터"를 갖고 벌이는 언어 유희가 일품이었네요. 어원적으로는 전혀 무관한 두 단어인데도 말이죠.

 

아쉬운 건, 그림 사이즈가 작아서 저자의 의도, 설명을 그림과 함께 대조해 가면서 읽기가 불편했다는 점입니다. 하긴 개인적으로는 그림 많고 텍스트 적은 책을 좋아라 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이 책에 대해 불만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입장이 다른 독자도 있을 것 같고요. 정 그런 분은 인터넷에서 해당 작품을 검색하면 큰 해상도의 파일이 쉽게 구해질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릴 것은, 이 책은 명화를 해설하는 책이 아닙니다. 정통적인 해석은 다른 책에서 알아 보셔야 할 것 같고, 이 책은 그림 하나를 구실(?) 삼아, 지난 물리학의 역사 자취를 짚어 가고, 바람직한 과학인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은근 강도 높게 설파하는 "과학책"이란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탈리아인이라서, "전화의 최초 발명자"를 두고 A G  벨만 꼽지 않고, (우리가 잘 모르는) 메우치(미국식 발음으로는 메유치죠)를 슬쩍 끼워 넣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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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지음 / 다섯수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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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이라는 게 그래서 무섭습니다. 가톨릭 교회라고 하면 보수주의, 전통에의 완강한 집착 같은 막연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현존하는 종교 조직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유지된 실체이니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는 시선이 그렇다는 것이고,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마냥 변화를 거부하고 지냈다면, 아마 오늘날까지 교회가 존속하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실제, 16세기 초의 로마 대 약탈, 19세기말의 이탈리아 통일 등, 교황청은 아예 그 존폐가 문제될 정도의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그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이어져 온 건, 끈질긴 생명력 같은 이유라기보다,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 일반이 생각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열심히 적응해 온, 아니 그를 넘어 어쩌면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시대를 이끌어 온, 성직자들의 노력 그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 그 역할은,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교황보다는, 진보적이고 열린 생각을 지닌 교황들이 보다 더 비중 높게 맡아 왔을 것 같아요.

 

이 책의 제목은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입니다만, 이런 비슷한 제목을 달고 있는 다른 책들과는, 그 보는 시야와 취지, 담고 있는 내용이 사뭇 다릅니다. 아마 이 교황, 호르헤 베르골료는, 지금까지 구교가 맞이했던 교황 중 가장 진보적 색채가 짙은 인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이 교황이 어떤 족적을 보이고, 어떤 업적을 남기고 가실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만(뉴스에 의하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임자처럼 생전에 은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자들에게 시사한 적 있다고 합니다), 이 정도씩이나 진보적인 인사가 교황직에 착좌(이런 용어를 쓰더군요)했다는 자체가, 교회사에 뭔가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저자는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내용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타원의 초점 중 하나로 놓고, 다른 하나의 초점을 보수 세력에 둔 후, 가톨릭 교회가 그려 나갈 타원의 반경이 앞으로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을지, 혹은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움츠려들지, 최근 한 세기 정도를 주된 범위로 잡아 교회 전반의 형편, 내력을 조명한 책입니다. 물론 교황 개인에 대한 여러 신변 사항,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 그 전임자인 대교황(아직 정식 호칭은 아닙니다만) 요한 바오로 2세 등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신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신변잡기가 아니라 보수-진보의 대립, 혹은 발전적 갈등에 대한 저자 나름의 정리와 해석입니다. (그래서 저는 <보-혁 구도를 축으로 놓고 본 현대 가톨릭 교회사> 정도로 부제를 달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이 책의 저자는 가톨릭계 언론 기관에서 주필로 오래 봉직했던 한상봉 선생입니다. 저자는 사제가 아니지만, 학문적 배경을 구교 관련 영역에서 갖춘 분입니다. 저자는 먼저 "현 교황은 공산주의자인가?"라는 당혹스러운 질문으로 책의 서두를 열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 같은 분이 그런 시각을 가질 리는 없고요, "현 교황처럼 온건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인사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자'로 손쉽게 매도하려는 세력이 교회 내에 엄존한다."는 논의를 열기 위함입니다. 진보적 분위기, 민중과 호흡을 같이하려는 성직자에 대해 언제나 마뜩지 않은 시선을 주어 왔던 세력이 교회에는 상존해 왔고, 이는 물경,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활약하던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도 잘 나오듯, 가난한 이와 함께 하고 민중의 아픔을 지배층에 알리려는 움직임은, 언제나 이단으로 경원시되어 왔습니다. 아시시의 성인이 활약하던 시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당사자가 세상을 떠난 후 그리 오랜 시간을 끌지 않고 시성함으로써, 교회가 결코 변화의 움직임에 눈을 감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 보였습니다. 반면, 교회가 변화를 거부하고 타락한 소수의 책동에 놀아날 때에는, 프로테스탄트와의 대립 등 파국적인 결과를 맞이해 왔다는 점을, 저자는 여러 역사적 사실을 들며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자의 관점은 그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는 언제나 빈민과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해 왔다. 지금의 교회가 가져야 할 사명 역시 그것이다. 너무도 단순 명쾌하지 않은가?" 마르크스의 명제 중에 유명한 것으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가 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쟁쟁한 명성의 해방 신학자들(예: 볼프)은 한결같이 지적합니다. "이 명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무엇이 다른가?"

 

저자는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인입니다. 한국인 평신도로서 그는, "용산 참사 등 민중이 억압받고 생존의 위기에 몰렸을 때, 교회 관계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고 묻습니다. 한국의 경우 예컨대 정진석 추기경 등은 현장에 몸소 나와 이들의 고충을 묻고 위로를 건넨 일이 전무하다는 게 저자의 지적입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현 교황은 대주교 베르골료이던 시절, 나이트클럽 화재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던 때, 누구보다 먼저 현장을 찾은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사가 이제 세계 십 수억 가톨릭 신도를 이끄는 수장이 된 시점에서, 실천과 탈권위의 소통을 보이지 못한 고위 성직자들은 반성해야 하지 않냐는 게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이 책에서도 여러 번 나오는) 강우일 대주교처럼 진보적인 인사도 한국 교회에는 존재합니다. 아니, 주필직 같은 중책을, 이 책의 저자처럼 진보적인 성향의 인사가 오랜 기간 동안 맡아 왔다는 사실부터가 무엇인가를 강력히 시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입견은 엄연한 현실 앞에 아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 책은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저는 현 교황을 담은 여러 사진을 보면, 자애롭고 깊은 수양이 담긴 표정이 있는가 하면(저자의 평가로는, 현 교황이 외모 면에서도 아주 출중하다고 하십니다), 뭔가 수심 가득하고, 인간적인 불안이 짙게 배어나오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가 지극히 소탈하고 가식 없는 분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앞으로 교황으로서 그가 교회 내부의 반대 세력, 교회 외부에서 가해져 오는 심각한 위협, 부정 부패 등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그 전망이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걸 암시해 주는 것도 같더군요. 앞에서 인용한 "전임 베네딕토 교황처럼 조기 은퇴할 수 있다."는 언급도, 해석하기에 따라선 상당히 무거운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고요. 교황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기보다, 내가 교황께 무엇인가 힘을 보태고 싶다는 성숙한 생각이 드는 가톨릭 신자라면, 이 책을 읽고 현 교황이 얼마나 어려운 입지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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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당신을 최고로 만드는가
스티브 올셔 지음, 이미숙.조병학 옮김 / 인사이트앤뷰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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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 많은 놈이 밥 굶는다"란 말이 있습니다. 참 역설적인 이치랄까요. 재능이 많으면 남들보다 몇 배는 넉넉한 삶을 누려야 마땅한데, 오히려 남들보다 더 평탄치 못한 결과를 얻는다... 이것은 물론 주된 원인이, "사회성 부족"에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자아실현이건 경제 활동이건 다른 동료들과 어울려 이뤄 나가는 길 말고 다른 방법이 없는 게 보통이죠. 재능보다 더 중요한 건(중요하다기보다는 더 기본적인 덕목) 사회성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진단한 결과입니다. 타인의 팩터를 떠나서 그 사람 개인의 문제를 본다면, 이는 "선택과 집중"의 문제를 등한히한 탓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제아무리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난 인생이라고 해도,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동일합니다. 한정된 시간 동안 이것저것 건드리며 정력을 분산하면, "한 우물만 판" 사람보다 오히려 더 나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재주가 많은 사람"도 효율적인 자기 관리가 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을 살 수도 있는데, 하물며 별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어중간한 위치의 우리들이라면 어떨까요? 효과적으로 가용 자원을 써 먹지 못하면, "중간도 가기 힘든" 위태위태한 처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스티브 올셔라는 사람은, "보잘것없는 재주만을 타고난 사람도, 자기만의 특별한 끼를 계발하고 그것에다 가진 모든 정력과 주의를 쏟아 부으면, 당장이라도 최고가 못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더군요.

 

어찌보면 모든 자기계발서가 판에 박힌 모습으로 다루는 주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책을 읽을 때 항상 먼저 보는 건, 책의 저자가 무슨 경력을 가진 인물이냐 하는 점입니다. 대체로 저는, 학력 좋고 지식 많은 이들보다는,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제 사업을 일구면서 크게 성과를 올린 이들에 더 신뢰가 갑니다. 또 하나는, 같은 말을 해도 얼마나 읽는 이의 동기를 자극할 수 있는, 신명나는 어조로 말하고 있느냐로 기준을 삼습니다. 말이 흔하고 정보가 널려 있는 세상에, 남의 말을 비슷하게 카피해서 그럴싸하게 꾸미는 건 누구나 할 수 있고, 많이 배운 사람(저자)일수록 이런 일은 더 쉬운 법이죠. 하지만 자기가 몸소 겪은 바를 사무치게 증언하는 사람,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버젓이 책까지 쓸 만큼 성공한 사람의 어투는, 직접 들으면 더할 것이고 이렇게 책으로 읽으면서도 감동이 몰려 옵니다.

 

이 책의 저자도 그렇더군요. 체계를 세워서 하는 이론은
학습에는 네 단계가 있다
1) 무의식적 무능력
2) 의식적 무능력
3) 의식적 능력
4) 무의식적 능력

 

상식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특별한 건 없습니다. 처음에는 잘해야겠다는 의식도 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으니 무능하고, 그 다음에는 "아 내가 많이 부족하구나"를 아는 수준으로 올라오고(여전히 무능), 그 다음에는 나름대로 노력을 해서, 낑낑거리는 가운데 무엇인가를 해 내기는 하는 단계, 최종적으로는 힘 하나도 안 들이고 몸에 밴 요령만으로 척척 임무를 해 내는 단계를 각각 가리킵니다.

 

그럼 이런 학습 단계를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거칠 수 있는가? 저자는 여러 가지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인생에 있어 내가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인가? 철저한 무기력 상태에 빠졌던 건 언제인가? 내가 가장 환희에 차서 무엇인가를 성취해 낸 적은 언제였던가? 등으로 내적 의지, 감정의 구조를 재편성하라는 것입니다. (자세한 건 책 고유의 주장이므로 여기에 적지 않겠습니다)

 

저자는 또한 사분원을 그려서, 내가 지금 당장, 가장 가까운 범위에서 접촉하고 의지하는 이들을 네 명 배치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특성과 성향을 파악하라고 합니다. 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맥(저자는 그런 말을 쓰지 않지만 우리식 표현으로는 인맥이겠죠)을 다 쳐 내라고 고언합니다. 사실 저는 전에 읽은 어떤 자계서와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이, 너무 똑같아서 좀 놀랐습니다. 자계서의 내용은 다 그게 그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읽으면서도 어느 책이 시간 순서로 다른 책의 영향을 받았겠다 싶은 건 읽다 보면 눈에 훤히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읽은 두 책의 그 대목들은, 저자 자신의 경험담을 적은 내용이라, 뭘 표절할 가능성이 없었죠. 아무튼 도움 안 되는 인맥을 솎아 내라는 주장은, 마음이 좀 아프긴 해도 맞는 말이다 싶어서 가슴에 좀 새겨 놓아야 할까 봅니다. 분명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저자는 매슬로의 5단계 욕구 이론을 원용하며, 다만 자신은 여기에 중대한 수정을 가하겠다고 합니다. 뭐냐면, 매슬로는 하위 욕구가 만족된 후에야 상위 욕구가 만족된다고 했으나, 자신은 그에 대해 반대한다는 겁니다. 인간의 5욕구는 계층이 없으며, 동시적으로 고르게 만족되는 게 최대 수준의 행복을 가져 온다는 겁니다. 물론 매슬로의 이론을 그렇게만 이해하는 건 학문적 태도와는 거리가 멉니다만, 이 책은 자계서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죠. 중요한 건 누가, 내 발전하고자 하는 기분이랄까 동기를 띄워 주면, 나는 그 흐름에 힘 안 들이고 올라타면 된다는 겁니다. 내가 내 기분 스스로 업 시키는 것도 돈 들고 수고스럽거든요. 그런데 누가 그걸 공짜로(책값만 빼고) 해 주겠다? 그럼 받아 들이면 됩니다. 그게 자계서 읽는 이유입니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신나고 고마운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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