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 - 세계를 뒤흔든 교황, 그 뜨거운 가슴의 비밀
김은식 지음, 이윤엽 그림 / 이상한도서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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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이지만, 저는 "와(et)"라는 접속사 대신에, "대(對, vs)"를 써도 좋을 것 같아요. 이탈리아의 오래 전 성인(聖人)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바로 며칠 뒤면 한국을 찾을 현 교황 사이에는 닮은 점도 물론 많지만, 이 책을 읽고 새삼 떠올리게 된 건 "두 분이, 서로 떨어진 세월만큼이나 이처럼 차이가 많았었구나." 하는 점이었네요.


저자는 김은식 씨입니다.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이 란 책 읽어 보신 분들 많이 계시죠? 호남이 소외되고 극심한 상처와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을 무렵, 그들의 마음을 달래 주었던 두 아이콘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쉬운 회고를 털어 놓았던 바로 그 책. 저자는 이 신작에서도, 서로 무척이나 닮은 행보와 개성을 지닌 두 분에 대해,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고,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깊은 공감을 할 수 있게 친절하고 자상하게, 그러면서도 현실에 대한 비판을 잊지 않은 냉철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책의 시작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술회와 짧은 감상으로 시작합니다. 교황하고 세월호가 서로 무슨 관계인가 하시는 분도 있겠죠?, 이 교황은 시칠리아 람페두사에서 벌어진 난민선 침몰 참사에 대해 강력하게 주의를 환기한 바 있습니다. 연 대의 가치, 박애의 신념이 서서히, 우려스러운 속도로 퇴색, 퇴조하고 있는 이 때, 교황은 "가장 소외되고 가장 무관심하게 버려진 이웃들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가장 수치스러운 현실임"을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9백 년 전 아시시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 역시, 말 못 하는 동물들, 가난하고 버림 받았으며 멸시와 천대에 시달리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가르치며, 말 뿐이 아닌 행동으로 몸소 실천에 나섰던 위인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처음 안 사실인데, 그는 말 솜씨만큼은 어눌한 편이었다고 하는군요. 그가 설교에 나설 때에도, 사용하는 표현은 그리 현란하거나 다채롭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문의 반복, 평범한 진리에 대한 강조, 그 이상의 레토릭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모여 드는 군중은 언제나 많았습니다. 그는 권력층과 부자들의 견제와 질시를 언제나 받았고, 심지어 같은 가톨릭 교단 안에서도 이단이란 의심의 눈초리를 받은 사람이지만, 민중과 빈민들의 가슴 속에 언제나 참된 가르침을 설파하는 성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말보다 앞선 실천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실증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그는 즉위 초에 "1세"라고 덧붙이지 말라는 당부를 따로 했습니다) 역시, 진보적 성향에다, 현란한 말이 아닌 실천의 가치를 중시하는 분입니다. 서민 출신답게 전철 등의 교통 수단을 애용하는 분이었고, 즉위를 축하하러 온 군중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줄 아는, 권위의식이라곤 전혀 몸에 지니지 않은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기꺼이 빈민들 틈으로 파고 들어 자신의 가진 것을 다 나눠 주고, 심지어 끔찍한 병을 앓고 있는 나병 환자들에게까지 입맞춤과 광범위한 신체 접촉을 허용한 그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점과 매우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근래 보였던 행적 중 크게 아쉬웠던 것은, 동성애에 대해 강력한 반대 교의를 고수하면서도, 아동 성추행 등 비리를 저지른 성직자들의 처벌에 대해서는 왜 그리도 미온적이었을까 하는 사실입니다. 현 교황이 이 문제에 대해 앞으로 어떤 강력한 조치를 취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다만, 이 책에서도 지적하는 바처럼,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의 해임 단행에서 알 수 있듯, 종래 가톨릭의 주류를 형성했던 보수파 인사들의 행보에 대해서는, 보다 강경한 태도로 나갈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그저 보혁 간 정치 투쟁 정도의 인상을 주지 않고, 교회의 근본적 쇄신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아동 성추행 사건 같은 지독히 불미스러운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을 어떤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분은 이미 바티칸 시국(市國)의 국가 원수 지위로서, 특별 형법의 마련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이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모시는 분 중에는, 특별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방탕한 생활로 청 춘을 허비하다가, 어느 순간 회심하여 신앙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분들이 몇 있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했고, 바로 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러했습니다. 앞서 제가 "두 프란치스코"가 서로 다르다고 한 건, 바로 이런 점에서입니다. 호르헤 베르고글리오(베르골료)는 서민 집안 출신이고, 어려서부터 바르고 모범적인 처신으로 유명한 아이였습니다. 반면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난 청년이었고, 환경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다소 껄렁한 행각으로 젊은 시절을 낭비한 케이스였죠. 이러던 아이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거리에서 동냥을 하고, 안 찾던 예수 타령을 하니 아버지가 기겁을 할 밖에요. 매섭게 다그치는 아버지에게, 청년은 먼저 절연을 선언하며, "당신께 받은 것을 다 돌려 드리겠습니다."며 알몸으로 등을 돌립니다. 주교는 이 청년에게 옷 한 벌을 내어주는데, 그게 바로 수도 생활의 거룩한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현 교황은,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로 상징되는 번잡한 겉치장, 즉 권위를 혐오한다는 점에서 그 성인과 닮아 있습니다. 현 교황이 책임지고 처결하여 시성된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즉위 초기부터 이처럼 큰 기대를 모으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이 낮고 폄범한 출신이었고, 그 초심을 잊지 않아 언제나 낮은 곳으로 향하는 이 대성적자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건강하고 청렴한 교회를 세우는 데에 큰 공적을 남기실 것 같아요.


책 곳곳에 삽입되어 있는 이윤엽 님의 판화 작품을 절대 놓치지 마세요. 이 책의 가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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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토킹스틱 - 함께 토론하고 소통하는
필리스 크런보 지음, 이소희.김정미 옮김 / 북허브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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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같은 조직 안에서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춰 온 팀원 사이라고 해도, 회의나 의견 조율을 할 때마다 항상 바람직한 결론을 도출하고 잘 마무리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마무리가 잘 되는 때보다, 그렇지 않고 분위기가 험악해진 채 간신히 봉합되거나, 심지어 회식 자리에서까지 감정의 앙금이 남아 폭발하는 수도 있죠. 원활한 소통은 조직의 작둉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 이치는 비단 조직(2차 집단)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가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사랑과 애정만으로 모든 다툼과 갈등을 해결할 수는 없고, 합리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의사의 교환이 이뤄져야 합니다. 

 

토킹 스틱 하나로 기적이 이뤄질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겠죠. 그렇다고 하면 그건 과장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이 한 마디 하려고 할 때 괜히 끼어들어 그의 심기를 상하게 한다든가, 다른 사람의 말을 곡해하여 차라리 아무 반응도 안 보이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 온다든가,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보다 바람직한 소통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눈에 확 두드러지지는 않으나 작은 기적이라 불러 줘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이 남기신 서평을 찬찬히 훑어 보았습니다. 대체로 토킹 스틱의 효용, 그리고 이 토킹 스틱이 활옹되는 자리에서, 그 분위기 형성의 전제가 되는 "주술적 상징"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p48에 보면 "방위의 노래"라고 해서, 우리의 상상이나 선입견을 훨씬 뛰어넘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관념과 상징 체계가 아주 자세히 도식화되어 있습니다. 대화와 소통을 위한 실용적 메커니즘 문제를 넘어, 인문학적 시야에서도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아메리카 토착민이 이 체계를 활용하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백인 못지 않게 호전적이고, 싸움에 일단 임했다 하면 물러설 줄을 모르는 용감한 종족이었죠. 그런데, 이런 그들이 모여 살다 보니, 아무리 넓은 대륙이라고 해도, 또 아무리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 상황이었다고 해도, 자칫하다간 전쟁으로 절멸할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인식을 과연 당사자들이 실제로 가질 만큼 분별이 있느냐인데, 그들은 이런 소통 체계를 실제로 고안해 내었으니 충분히 현명했다고 하겠습니다.

 

제게 큰 인상을 남긴 건 그 중에서도 세 가지 사항이었습니다. 하나는, 대화에 참여하는 성원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반드시 그 자리가 상징하는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는 규칙입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떤 성향이며, 어떤 처지이냐에 무관하게, 그 사람이 현재 맡은 자리에서 해야만 하는 의무로서 이 과업은 그에게 부과됩니다. 공(公)과 사(私)를 준별하는, 대단히 엄중한 룰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차지하는 자리는 다음 순번에는 반드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문자 그대로 역지사지의 원칙 구현이며, 이번에는 타인의 입장에서 열심히 그 입장을 대변해야 하니, 그 사고와 태도가 더욱 성숙해지는 계기가 마련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스틱을 넘겨 받은 사람은, 바로 앞 사람의 발언에서 나온 표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받아서 반복한 다음, 자기의 말을 해야 한다는 조항입니다. 이때 괜히 다른 말로 대체한다거나(paraphrasing), 더 강한 의미로 강조, 과장하면 그건 규칙 위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시대가 거의 천 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 통용되는 토론, 토의 규칙을 오히려 앞서 나가는 면마저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다 동조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절차와 체제를 갖추고 있던 그들은, 왜 백인의 손에 망하고 말았을까요? 단지 백인이 악하고 비도덕적이었다는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뭔가 그들의 문화에 자체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패배를 겪은 것입니다. 저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그들의 문화와 상징, 신념, 가치 체계가 완벽했다고는 생각이 안 됩니다. 미국 헌법 제정과 독립 당시, 건국 선조(파운딩 파더)들이, 이 토착민들에게서 강한 영감과 영향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을 유럽 문화권에 대한, 일종의 과시적 선언 의도로서 이를 끼워 넣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토착인들이 완전히 축출된 건 미국 독립 후 거의 반 세기가 지나서의 일입니다. 조지 워싱턴 시절의 미국 백인 문명은, 원주민을 완전히 몰아낼 만큼 위력과 성숙함을 갖추지 못한 처지였습니다. 

 

아무튼 제가 그간 읽었던 미국 건국 초기(혹은 그 이전의) 문헌에서. 왜 그토록 "이로쿼이" 등 특정 토착 부족에 관한 언급이 잦으며, 또 좀 별다르다 싶은 외경심이 살짝 입혀진 말투로 언급되고 있었는지, 이 책을 읽고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고, "토킹스틱 회의, 소통"을 자기 일상이나 업무에서 실천해 보고 싶은 분이 있을까요? 전 좀 쑥스러울 것 같군요. 그러나 그들의 대화 정신만은, 앞으로도 회의할 때나 각종 모임의 절차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좀처럼 잊혀지지 않고 인상 깊은 지침으로 계속 남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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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여행 - 헤세와 함께 하는 스위스.남독일.이탈리아.아시아 여행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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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즐겨 하는 이라고 해서 다 방랑자는 아닐 것입니다. 여행 중에는, 물론, 기약 없는 여행, 넉넉하지 못한 여비 탓에 가는 길목마다 고생인 여행, 도중에 못된 현지인을 만나 떠나지 않음만 못하게 된 여행, 모든 여건이 다 구비되었으나 정작 본인의 마음 자세가 불민하여 타락한 탈선이 되어 버린 여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즐겁지 못한 여행이라 해도, 여행자에게 돌아올 집, 본향이 있는 이상, 그 여행은 종착점이 있고 복귀할 일상이 있는, 잠시의 도락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 여행을 통해 무엇을 꼭 배우고자 했었다면, 그를 두고 "수학여행"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세(물론 우리가 아는 그 대문호 헤르만 헤세입니다)의 경우에는, 이 책을 다 읽은 저로선 이제 얄짤없는 방랑자라고 그를 불러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태생이 독일 순혈도 아니고(양친의 어느 쪽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태생이 그렇다 해도 어느 한 고장에 끈적한 정을 붙이고 아이텐티티를 형성할 수도 있었건만, 그가 거쳐 가는 그 어느 곳에도 최종의 귀속감을 두지 않고, 그저 일생을 두고 여기에서 저기로 떠됼았던 나그네였습니다. 우리는 그저 철학 깊은 명작, 눈물이 뚝뚝 들을 시(詩)만 쓴 책상 앞의 작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분은 언제 글을 쓸 시간을 냈나 싶을 만큼 세상을 돌고 돌았으며, 그가 나고 자란 고장 인근에서 지구 반대편까지 무던히도 바지런하게 왔다갔다한 천상 여행객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작가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을 그렇다고 해서 여행자라고 불러 줘도 안 됩니다. 여행(Reise)이라는 단어에는 불순물이 함유되어 있고, 여행자라는 개념에는 그가 그렇게도 혐오했던 속물적인 소비자들(이 책에 잘 나와 있죠)이 끼어 있습니다. 이 사람, 지독한 반골이자 고집불통 떠돌이를 두고는, "방랑자(Wanderer)"라는 세 음절 이름이 딱 어울립니다. 교통 발달도 시원치 않았던 당시 형편에 이처럼이나 천하를 주유하고 다닌 독설가에게 다른 이름이 어울릴 것 같지도 않습니다.

 

대문호의 수필, 여행기가 밋밋하고 싱거운 설교와 점잔뻬는 미사여구로 가득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분께는, 아주 통렬한 뒤통수 한 방을 준비하는 장난속으로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아주, 처음부터 욕입니다. "열심히 일하며 된장끼 폭발을 준비한 당신, 여행일랑은 꿈도 꾸지 말고 방구석에서 썩어라!"를 외치고 있습니다. 헤세에게 있어 여행은, 껍질이 깨지는 아픔을 겪으며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수련이요, 도제의 고통스러운 공붓길입니다. 현지인을 모독하고, 설익고 추악한 욕구를 풀기 위한 배설의 과정이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여행을 사랑하고, 본디 고정된 호적을 두지 않은 채 지구 전체를 고향으로 간주했던 헤세는, 이 숭고한 의식을 모욕하는 그 모든 속물에게 침을 뱉습니다. 이어지는 여행기들은, "여행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을 일갈하며, 그 모든 종류의 타락한 여행을 통해 타지(他地)와 자아를 오염시키는 우리들에게 분노의 심판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 원 이거 겁이 나서 앞으로 여행 한번 제대로 떠날까 싶습니다.

 

저는 헤세의 여행기라고 하면 그저 스위스에 인접한 남독(南獨) 일대나, 호엔슈타우펜의 군주들, 아니 더 멀리 샤를마뉴 대제 이래 줄곧 만족(蠻族)의 동경 대상이 되어 왔던 이탈리아가 그 주된 소재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왔습니다. 이 책의 분량 절반 이상은 그러나 아시아를 두고 벌인 편력 로그입니다. 예전 일본의 어느 평론가가 헤세의 <싯다르타>를 두고, "서양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피상적인 판타지"로 폄하한 말이 생각납니다만, 그의 태생도 그렇고, 중년에 접어들어서도 찾고 찾고 또 찾아 맛본 아시아에 대한 그의 탐닉, 외경의 정도를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싯다르타>를 다시 겸손한 마음으로 읽고, 우리 자신도 미처 몰랐던 아득한 정신적 본향의 한 구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톨릭 수뇌부와 제후들이 모여 반항자 후스를 활활 태워 죽일 것을 그 예전에 결의한 보덴 호수에서 그는 유난히 노를 자주 저어 다닙니다(꼭 여기에서뿐 아니라 그는 노젓기를 참 즐기는 신사의 모습을 많이 드러내더군요). 가본 분들은 알겠지만 보덴 호수는 유럽에서 보기 드물 만큼 넓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보리수의 향취를 즐기며 끝없는 상념에 빠져 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향인들의 역겨운 속물성에 대한 자각도 끊임 없이 뇌리에 새깁니다.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정착에의 혐오, 경각은 그의 태생적 병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덴 호수는 물론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한, 서남 독일의 변방이자 원심력의 극한입니다. 고향 문제를 떠나서도, 이처럼 그가 이곳을 즐겨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태생적 방랑벽이 어느 정도 중증이었는지 짐작게 합니다. 그럼 어쩌겠습니까. 떠나야죠. 식당에서 버릇 없는 웨이터의 뺨을 냅다 치는 다혈질의 그가 아니겠습니까.

 

이탈리아 반도가 좌우로 폭이 넓지야 않습니다만,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지리적 위치의 동서 이격을 떠나서, 그 역사적 배경과 풍토의 차이 때문에 오가기가 쉽지만은 않은 동네들입니다. 이 책 3장은 바로 이 두 곳의 방문 기록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 꽃 파는 소녀가 거리를 누비고 거리의 택시를 곤돌라가 대신하는 베네치아는 석호의 도시입니다. 아드리아 해 가장 깊은 구석에 위치한 이 도도한 도시는 바닷물의 침식을 운명으로 간직하지만, 그 도시를 떠도는 물이야 당연 바닷물이 아닙니다. 기이하게도 베네치아의 물, 물은, 그러나 저 멀리 지중해의 그것처럼 에메랄드의 청록빛입니다. 헤세는 이 빛깔의 마법을 초자연성으로 규정합니다. "베네치아의 물빛에는 태양과 수면이 빚는 빛의 물리적 산란 외에, 자체적으로 뿜어내는 명도와 채도의 그 무엇이 있다." 그렇기야 하겠습니까만 헤세의 이 이국적 풍광에 대한 예찬과 열광은 극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외국, 이방이 좋다기보다, 제 나고 자란 고장에 대한 반(反) 근친혼적 혐오의 발로요, 건강한 (정신적) 번식욕의 일환 같습니다.

 

그는 <싯다르타>에서뿐 아니라, 이런 여행기들에서 본격적으로 "인도의 시"를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 동양인들도, 더군다나 요즘처럼 각종의 여행 상품이 잘 개발된 환경에서도 이처럼이나 많은 곳을 다니기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헤세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 말레이시아, 남중국, 스리랑카, 인도네시아까지 잘도 돌아보고 그 아니면 절대 언술되지 않을 열정적이고 참신한 감상까지 토로하고 있습니다. 헤세는 인도 문화 뿐 아니라, 중국의 전통적 경전, 인문 텍스트의 내력과 평가에까지 훤히 밝은 소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못 배운 백인 특유의 동양 문화 경시 태도에 극렬한 경멸과 노여움을 표현하며, 총명한 동양 소녀의 눈에 잘 드러나는 무제한의 지적 호기심과 그 성취에 대해 경의를 표시합니다. 그냥 "그림"만 보러 다니는 관광객이 아니라, 그 지역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사람"에 대한 선이해를 갖춘 그입니다. 그는 관광객으로서 현지인을 관찰, 감상하지 않고(치를 떨며 싫어하더군요), 그 자신이 너그러운 피사체가 되어 현지인의 호기심에 노출되어 줄 줄 아는 대속(代贖)을 자청합니다.

 

5장은 제목부터가 "방랑"이며, 뭔 의도인가 싶게 부제는 "수기"라고 붙어 있습니다. 이 장은 제목이 저리 붙었건만, 책 중에서 가장 차분하고 정적(靜的)인 필치로 쓰여진 부분입니다. 주제 하나를 정하고 깊은 성찰을 표현한 다음, 마무리는 그의 장기인 정갈한 시로 짓는 식입니다. 여행 욕구에 들쑤셔지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싶을 때 읽으면 차라리 좋을 것 같습니다.

 

6장에 소개된 "테신"은 단행본으로도 나온(한국어 번역도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저 앞 4장 역시 그 부분만 단행본으로 나오기도 했죠), 스위스 테신에서의 5년 체류기입니다. 여기에는 베를린의 벗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도 나오고, 좀 징그럽게 웃통을 벗고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그의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 겨울밤이 시(詩)의 친근한 소재라면, 여름밤은 매콤한 맛을 풍기는 수필의 반가운 글감이죠. "테신에서의 여름밤"은 우리가 여름의 한적한 정취와 밝아오는 내일의 유흥을 기대하는 설렘, 밤을 새워 정담을 나누고 노래를 불러도 시간이 아쉽고 아까운 그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언제나 이 검고 푸른 공감을 최대한 누리고 맛보려는 아이들에게 "일찍 잠자리에 들 것"을 권합니다. 여기에는 또한 정돈되고 경건한 정신적 세계에서 그만의 순결을 지키려는 헤세가, 다른 편 세계에서 추한 물욕을 채우려는 세속인들을 어떻게 보는지, 반대로 그들은 헤세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편린적 진술도 나와 있습니다.

 

7장의 뉘른베르크 여행기는 앞 장의 공간적, 시간적 속편입니다. 뉘른베르크는 바이에른에 위치해 있고, 완고하고 보수적인 고장으로 독일 내에서도 많이 고립된 정치적, 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죠. 대체로 이 책의 글들이 시간순을 따라 배열된 걸 생각하면, 독일에서 나고 자라 이례적이라 할 만큼 객지를 지향했던 그가, 그 편력의 마무리를 가장 변화를 거부하는 땅에서 체류하며 지었다고도 하겠습니다(물론 이 책의 세계를 한계로 잡아서요). 회귀의 구조로 파악한다면 그리 발전적인 여정은 아닌 셈이겠는데, 여기서 그는 토마스 만 등 그와 어깨를 나란히할 문인협회 거인들과 (대체로) 우호적인 회동도 갖습니다. 이 무렵의 그가 대략 40대 후반, 50 초엽이니, 생각이나 스타일, 철학 등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시기를 넘어 장렬한 낙조를 멀리서 볼 무렵입니다. 이 시기에 자리를 같이한 토마스 만과 같이 찍은 사진도 나오는데, 두 분을 다 팬으로 모시고 있는 제게는 정말 기적 같은 한 컷입니다.

 

이 책은 단행본의 번역본이 아니고, 전집에서 발췌하여 한 권의 책으로 번역해서 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생전의 헤세가 그 의도를 매우 기꺼워하며 칭찬했을 것 같은, 충실한 구조와 이유 있는 짜임새가 돋보입니다. 문장도 매끄로워서 배경의 이국성이 아니라면 번역문이 아닌 것처럼 술술 읽힙니다. 격정과 성마름 속에 인간과 자연, 삼라 만상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간직한 위대한 영혼을 잘 알 수 있는 멋진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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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투혼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양준호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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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혼을 불태우다"라는 말은 일상에서 흔히 쓰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한국인들은, 웬만큼 게으르거나 사회의 낙오자, 부적응자,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가 아닌 이상에는 자신의 일에 열과 성을 다하면서 전념하는 편입니다. 경제적 성공을 거두기 위한 목적도 있고, 같은 조직에 몸 담고 있는 타인들의 눈치를 보는 데에도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투혼을 발휘하다"라는 말은, 그보다는 좀 더 강한 표현입니다. 이 책의 주제이자 제목이고, 이 책에서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 어구이기도 합니다. 책은 그 저자의 인격, 개성, 가치관을 잘 드러내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겉으로 예쁘게 그 형식을 가다듬고 치장하기보다는, 자신의 격정(그러나 "진정"이기도 합니다)을 드러내며 독자에게 "대체 왜 당신들은 이렇게 하지 않는가?"를 외치며 독려하는 그의 어투에, 어떤 이들은 살짝 불쾌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경제활동의 최전선에서, "내가 오늘 부린 게으름은 반드시 다른 성원에게 부담으로 돌아간다."는 점을 피부로 깨달으며 일하는 이들에게는, 이 "유능하고 부지런한 사장님"의 채근에 별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아직 나이도 젊은데, 왜 저 사장님처럼 더 열심히 뛰지 못하는 걸까?" 같은 작은 자책감마저 듭니다.

 

일본 재계 인사들 중에는 반한, 혐한, 심지어 증한 성향을 가진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식과 이성을 갖춘 이들, 현실을 어설픈 색안경을 끼고 제 식대로 왜곡하려 들지 않는 이들이 훨씬 많습니다. 현실을 외면하는 자는, 치열한 생존 경쟁의 장에서 아무 소득을 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 이나모리 가즈오 전 교세라 회장은, 책의 서두부터 대뜸 "망국의 위기를 맞아 개인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며 난국을 타개한 국민"이라며 한국을 치켜세우고 듭니다. 이 양반이 무슨 지한파니 친한파니 하는 범주에 들어서가 아닙니다. 누가 봐도 타당하고 객관적인 현실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죠.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현재의 일본이 처한 상황이, 결코 희망적이거나 생산적이지 않다고 진단합니다. 애는 쓰지만 여러 한계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인식은 아닙니다. (우리로선 그 근거에 대해 다소 회의가 가는 바 없지 않지만) 이나모리 씨는, 일본은 지금의 모습이 달성 가능한 최선의 상태가 아니며, 앞으로 얼마든지 더 발전하고, 더 번영할 수 있다고 아주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인해 전쟁에서 패배, 폐허가 된 일본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입니다. 그가 성년이 되어 경제 활동을 막 시작했을 무렵은, 일본 전역이 재건을 위한 몸부림으로 한창 들썩일 시기였습니다. 한국전쟁이라는 (그들에게 있어) 뜻하지 않은 호기도 찾아 왔고, 미 군정 당국의 너그러운 처사와 상공인들의 성실하고 부지런한 태도 덕택에, 일본은 비교적 짧은 시기에 전쟁의 피해를 다 복구하고, 세계적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일종의 기적이었고, 이런 놀라운 성취를 이룬 대열에 본인이 한 주역을 담당하기까지 한 사람으로서, 그는 "왜 지금의 일본은, 훨씬 유리한 여건에서 그저 무기력하게 퇴보만 하고 있는가?"를 개탄합니다.

 

흔히, 한창 일할 나이의 남성들이, 직장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다 쏟아 붓고, 정작 가정과 일상에서 원기 충전이 힘들거나 개인적 삶의 지향점을 잘 찾지 못할 경우, 극심한 무기력 상태에 빠지곤 합니다. 이를 두고 "번아웃 증후군"이란 말도 씁니다. 그런데 이나모리 회장은, 오히려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직장에서 일이 잘 안 풀리는 것은, 당신의 에너지를 남김 없이 태워 없애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끼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겁내지도 말며, 하나 남김 없이 불태워 버려라!"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바 "투혼"의 내용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언제나 마음에 새기고, 또 주위에도 권하는 모토가 바로 "목표는 약간 높게 설정하라"는 것입니다. 이나모리 회장 역시, 다소 높게 설정한 목표치야말로 정신에 바람직한 긴장을 주고, 단기에서건 장기 계획에서건 조직 구조와 그 비전에 긍정적인 견인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제 경험에 의하면, 대단히 의욕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스타일이라야, 이런 모토가 제 효과를 낼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좌절감과 슬럼프 때문에 의욕이 떨어져 있는 이에게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죠. 그러나 이나모리 회장이 염두에 두고 있는 "행위자"는, 딴 생각이란 조금도 없이 "난 내 분야에서 최고의 일꾼이 되겠다!"는 결의로 가득찬 타입입니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이런 무시무시한 정력을 지닌 회장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 역시, 그 긍정의 기운을 이어받아 눈부신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자신이 창업한 교세라 등에서 그가 이룬 업적도 업적이지만, 다 망해가던 일본항공의 경영진에 취임하여, 불과 1년여 만에 회사를 흑자로 돌려 놓았다든가, 전통적으로 저(低)수익 기조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항공업계(평균치가 1%라고 하는군요)에서 이례적으로 높은 17%라는 실적을 올린 그의 성과야말로, 한 경영자의 능력 진가를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어느 회동에서, GE 회장 잭 웰치와 만나, "세라믹 필드에서 우리를 파리 쫓듯 내몰아 버린 회장님의 솜씨를 잘 기억합니다."라며 씁쓸한 미소를 짓던 그를 회고하고 있습니다. 세계적 거인이 막강한 자본력을 무기로 삼아, 신생 유망 시장에서 단번에 판도를 장악하려던 그 기세를 보기 좋게 꺾어 버린 그의 솜씨에, 자신도 무척이나 자부심을 느끼나 봅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얼마 전 저는 모 신문 기사에서, "대기업이 철수해 버린 시장에서 중소 기업 몇만 남아 버티다가, 결국 국제경쟁력을 잃고 모두가 패자가 되고 말았다"는 르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기사 내용의 정확성, 논리 전개의 치밀성, 의도의 공정성 면에서 적지않은 의심이 드는 컨텐츠였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호조건이 회사를 에워싸고 있다 해도, 그에 안이하게 머무를 게 아니라, 불 같은 투혼과 근성, "살아남는 데 필요한 수준으로 적당히 하고 그칠 게 아니라, 무조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최상의 노력을 다하고 본다."는 자세로 임해야만, 결국 장기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나모리 회장은 일본 역사에서 언제나 빛났던 장인 정신을 다시 환기합니다. 사무라이들이 세계 수준에서도 최상의 전투력을 뽐낼 수 있었던 건, 무사 개인의 기량도 기량이지만, 그 무사가 실전에서 휘두르고 부리는 칼의 완성도가 뛰어나서라고 합니다. 칼 뿐 아니라, 도자기, 공예품 등의 미적, 실용적 가치도, 동시대의 그 어느 지역에서 생산되던 제품에 못 미칠 바 없었다는 게 회장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건 돈이나 화려한 경제적 번영상이 아닌, 바로 어느 순간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분투의 정신, 불굴의 의지라고 강조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일본의 평균적인 직장보다야 우리 한국의 업무 강도가, 개별 기업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조금이라도 높으면 높았지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평균적인 일본의 경제활동 인력보다 우리 한국인들의 의지와 능력, 의욕이 높은 것 역시 사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책의 주장은 사실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나모리 회장의 개인 이력과 성취는, 전 세계를 통틀어 놓고 봐도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이 드문 초인적 수준입니다. 행여 직장에서 회의와 의욕 부진이 나를 엄습해 올 때, 이 책을 펼쳐 놓고 재기의 각오를 다진다면, 보다 일찍 본연의 나 자신 모습으로 복귀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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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파울로 코엘료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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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은 지하 50m 암반에서 뽑아 낸 천연 광천수처럼 톡 쏘고 알싸한 맛이지만, 사람에 따라 일생에 단 한 번으로만 찾아 오는 찰나의 축복입니다. 첫날밤을 치르고 난 처녀가 더 이상 처녀가 아니듯, 첫사랑이 아무리 좋다 한들 세상 누구라도 두 번은 맛볼 수 없습니다.

비록 육체와 정신의 활력과 선도가 퇴색해 가는 나이에 접어든 이들이라지만, 뇌리에 새겨진 그 옛날의 짜릿한 추억을 시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첫사랑의 대용품 그 무엇인가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에 자주 나오는 말처럼, "아무리 서로 깊이 사랑하던 부부 사이라도, 길어야 5년이면 이후엔 섹스에 아무 감흥이 없"어서이겠습니다. 그러나 그 대용품은 도저히 "정품"을 대신할 수 없는 "짝퉁", 게다가 죄책감까지 부산물로 딸려 오는, 내 눈에 마뜩지 않은 구리고 조악한 모조품입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불륜"이라 부릅니다.

신혼 시절에 가졌던 기대와 설렘은, 현실의 난관과 지루함 속에 원 모습을 찾아볼 길 없을 만큼 퇴색하고 시들었습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꼭 남편이 경제적으로 무능하다거나 정신적으로 불성실해서 이런 환멸이 오는 게 아닙니다. 최소한 파울로 코엘료가 이 작품 속에서 빚어낸 진실,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배우자와의 영속적 결속을 장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같습니다. 닥쳐 오는 시련을 성공적으로 꼭 이겨 내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아무 외적인 문제 없이, 비슷한 환경, 조건의 성실하고 유능하며 아직은 외적인 매력조차 넉넉히 뿜어 내고 있는  배우자와도, 어느 순간 작은 균열이 발생하고, 그 틈은 파경의 상태로 언제든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공 린다는 아름답고, 영민하고, 돈 잘 버는 착하고 잘생긴 남편과, 귀여운 아이들까지 곁에 두고 있는 여성입니다. 본인도 수습 기간을 거쳐 초보 기자의 딱지를 벌써 떼고, 이제 간부직 승진을 넉넉히 바라볼 수 있는 커리어 우먼이니, (그 나이 또래 주부들에게 곧잘 오곤 하는)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권태감이나 성취에 대한 갈증의 싹이 돋을 틈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부러울 게 아무것도 없는, 여자로서 모든 걸 갖춘 축복 받은 인생입니다.

이런 그녀지만, 승진에 대한 부담도 적지만은 않고,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결혼 생활에 대해서까지 서서히 회의가 싹틉니다. 독자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녀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불안감 사이에서 정신을 좀먹는 방황을 체험합니다. 1) 이 모든 행복이 일순간에 소멸하면 어떻게 하지? 2) 이 모든 행복한 상황이, 내가 죽을 때까지 전혀 변하지 않고 지겹게 지속되면 어떻게 하지?

나른할 만큼 튼튼히, 건실히 지속되는 행복은, 한편으로 권태를 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상실에 대한 공포를 작은 맹아로나마 배태합니다. 자신에 대한 긍지와 확신으로 뭉친 그녀로선, 이런 작은 교란이나마 묵인할 수 없습니다. "남편과의 정사 도중 내가 가장하는 오르가즘은, 나를 조금씩이마나 서서히 죽어가게 만든다." 스스로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 도도하고 새침한 영혼은, 이 상태를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린다에게 남편에 대한 불만은 조금도 없습니다. 린다가 이 상태에까지 치달은 건, 너무 완벽했던 남편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할 정도랄까요.

린다가 현상 타개의 수단으로 삼은 이는, 신인 정치인으로서 꽤나 유망한 전도를 보이고 있던, 학창 시절의 친구 야코프 쾨니히입니다. 헨리 키신저가 인용했던 유명한 말처럼, "권력은 최고 효능의 최음제"여서인지, 직업상의 좋은 핑계를 두고 그녀는 옛 친구(어린 시절 한때 자신의 가슴을 만지기도 했던)를 찾아 나섭니다. 적지 않게 나이도 든 모습인데다, 출세, 정략 결혼,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정치 활동이 남긴 나쁜 영향 탓에, 그는 옛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서도 두세 개의 가면을 번갈아 쓰며 사람을 대하는 속물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상관 없습니다. 린다는 이 옛 친구와의 만남, 그리고 접촉을 통해, 무엇인가 위안을 찾아야 합니다. 다행히도(?) 이 정치인은 육욕만은 왕성하게 발동하고 있는 상태라, 린다의 대담한 선제 공격을 아무 거부감 없이 환영합니다. 욕구에 비해 정력은 그닥 강하지 못했는지 오랜 시간 지속된 접촉(intercourse)은 아니었으나, 린다는 일단 만족하고 자리를 뜹니다. 잠시의 죄책감만 잘 달래고 나니(게다가 노련한 야코프의 충고도 있었습니다 - 귀가 후 바로 화장실로 가라는), 남편과의 관계도 더 만족스러워진 것 같습니다. 섬세한 그녀는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에서 영리한 남편이 뭔가 낌새를 챌 것을 우려하고, 쾌감을 최대한 자제하며 표현하기까지 합니다.

그녀의 계획은 그러나 순조로이 풀리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계획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던 이유가 큽니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명명한 "중독"이라는 심적 상태를 타개하려 이 속물을 계속 만나지만, 사실 그녀는 야코프 같은 저열한 속물에 중독될 만큼  격 떨어지는 여성도 아니었고, 색정증 환자도 아니었으며, 그 대상이 약물이건 뭐건 처음부터 어떤 것을 두고 중독에 빠질 만한 허약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정확히 뭔지 몰랐으니, 임시방편으로 찾은 해결책 역시 결코 그녀의 갈증을 해소시킬 수 없었죠.

대재벌가 출신에다 개인적 능력도 빼어나 확고한 사회적 평판까지 다진 쾨니히 부인  마리안은, 그러나 이 린다에게 불필요한 적대감을 가집니다. 심적으로 약한 상태에 빠진 린다는, 이 마리안을 실제 가치에 비해 과대평가하는 오류에 빠집니다. "우월한" 마리안이 자신의 작은 활로 모색 노력을 가로막았다고 판단한 후, 그녀는 교수 마리안이 근무하는 대학 연구실에 찾아가 마약 소지 혐의로 무고할 생각을 품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비열한 책략이었을 뿐 아니라, 평소의 린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저능하고 품격 떨어지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워낙 현명한 린다이니만치, 파국으로 치닫는 선택을 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고전 소설들    에서의 여주인공이, 상황적 불운과 성격상의 사소한 결함 때문에 비극적 운명에 종종 빠지기도 합니다만, 파울로 코엘료가 창조한 세계에서 그런 결말이 나기란 좀 어렵다는 걸 우리 독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린다가 최악의 선택을 피한 데에는, 너무 완벽해서 인간적인 냄새가 좀 덜 나기까지 하는 남편의 조력도 크게 한몫 했습니다.

린다와 남편, 그리고 쾨니히 부부는 저녁을 함께한 자리에서, 마리안의 무례한 태도 때문에 대단히 어색한 분위기에 빠집니다(린다는 이 정찬 자리의 마련부터가 마리안의 음모라고 여기는데, 사실 이 역시 린다가 지나치게 예민해 있던 탓에 내린 오판에 가까웠습니다). 마침내 린다는 마리안에게 정면으로 맞선 후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에 빠집니다. 자신과 남편의 사회적 경력에 얼마간의 위험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였으나,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상황의 심각성을 다소 과대평가했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린다와 그 남편이 서로의 힐링을 도모하는 장면, 사실 전 이 대목까지 읽으면서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만, 코엘료는 언제나 그랬듯 결코 무리하지 않습니다. 린다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여성이었고, 그런 그녀답게 적절한 과정을 통해, 완벽한 치유를 하고 작은 의식을 마무리짓습니다. 이 장면이 성적(性的) 체험의 은유일 수도 있고,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새길 수도 있지만, 린다의 동작과 내면 심리가 묘하게 어우러지며 상호 참조를 행하게 하는 시도는, 코엘료의 기법과 내적 성찰의 기교가 일정 경지에 도달했다고 평가하기에 충분했어요.

"자궁"에서 다시 태어난 린다는, 이제 다시 완벽한 아내, 어머니, 그리고 독립된 여성으로서 건강과 자아를 회복합니다. 작가 코엘료가 이처럼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잡아낼 수 있었던 게, 이야기꾼으로서의 천재성, 실제로 사회적 체험(사업적 성공, 여성 편력 등)을 충분히 한 작가로서의 자산, 그 어느 쪽의 기여가 더 컸는지는 판단이 힘듭니다. 뷸륜 같은 진부하고 간혹 위험하기까지 한 소재를 두고, 이처럼 건강하고 희망어린 결론을 이끌어 낸 그의 낙관적 세계관에 대해서는, 그러나 아무 의심과 주저 없이 존경과 찬의를 보낼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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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된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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