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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의 여행 - 헤세와 함께 하는 스위스.남독일.이탈리아.아시아 여행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7월
평점 :
여행을 즐겨 하는 이라고 해서 다 방랑자는 아닐 것입니다. 여행 중에는, 물론, 기약 없는 여행, 넉넉하지 못한 여비 탓에 가는 길목마다 고생인 여행, 도중에 못된 현지인을 만나 떠나지 않음만 못하게 된 여행, 모든 여건이 다 구비되었으나 정작 본인의 마음 자세가 불민하여 타락한 탈선이 되어 버린 여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즐겁지 못한 여행이라 해도, 여행자에게 돌아올 집, 본향이 있는 이상, 그 여행은 종착점이 있고 복귀할 일상이 있는, 잠시의 도락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 여행을 통해 무엇을 꼭 배우고자 했었다면, 그를 두고 "수학여행"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세(물론 우리가 아는 그 대문호 헤르만 헤세입니다)의 경우에는, 이 책을 다 읽은 저로선 이제 얄짤없는 방랑자라고 그를 불러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태생이 독일 순혈도 아니고(양친의 어느 쪽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태생이 그렇다 해도 어느 한 고장에 끈적한 정을 붙이고 아이텐티티를 형성할 수도 있었건만, 그가 거쳐 가는 그 어느 곳에도 최종의 귀속감을 두지 않고, 그저 일생을 두고 여기에서 저기로 떠됼았던 나그네였습니다. 우리는 그저 철학 깊은 명작, 눈물이 뚝뚝 들을 시(詩)만 쓴 책상 앞의 작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분은 언제 글을 쓸 시간을 냈나 싶을 만큼 세상을 돌고 돌았으며, 그가 나고 자란 고장 인근에서 지구 반대편까지 무던히도 바지런하게 왔다갔다한 천상 여행객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작가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을 그렇다고 해서 여행자라고 불러 줘도 안 됩니다. 여행(Reise)이라는 단어에는 불순물이 함유되어 있고, 여행자라는 개념에는 그가 그렇게도 혐오했던 속물적인 소비자들(이 책에 잘 나와 있죠)이 끼어 있습니다. 이 사람, 지독한 반골이자 고집불통 떠돌이를 두고는, "방랑자(Wanderer)"라는 세 음절 이름이 딱 어울립니다. 교통 발달도 시원치 않았던 당시 형편에 이처럼이나 천하를 주유하고 다닌 독설가에게 다른 이름이 어울릴 것 같지도 않습니다.
대문호의 수필, 여행기가 밋밋하고 싱거운 설교와 점잔뻬는 미사여구로 가득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분께는, 아주 통렬한 뒤통수 한 방을 준비하는 장난속으로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아주, 처음부터 욕입니다. "열심히 일하며 된장끼 폭발을 준비한 당신, 여행일랑은 꿈도 꾸지 말고 방구석에서 썩어라!"를 외치고 있습니다. 헤세에게 있어 여행은, 껍질이 깨지는 아픔을 겪으며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수련이요, 도제의 고통스러운 공붓길입니다. 현지인을 모독하고, 설익고 추악한 욕구를 풀기 위한 배설의 과정이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여행을 사랑하고, 본디 고정된 호적을 두지 않은 채 지구 전체를 고향으로 간주했던 헤세는, 이 숭고한 의식을 모욕하는 그 모든 속물에게 침을 뱉습니다. 이어지는 여행기들은, "여행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을 일갈하며, 그 모든 종류의 타락한 여행을 통해 타지(他地)와 자아를 오염시키는 우리들에게 분노의 심판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 원 이거 겁이 나서 앞으로 여행 한번 제대로 떠날까 싶습니다.
저는 헤세의 여행기라고 하면 그저 스위스에 인접한 남독(南獨) 일대나, 호엔슈타우펜의 군주들, 아니 더 멀리 샤를마뉴 대제 이래 줄곧 만족(蠻族)의 동경 대상이 되어 왔던 이탈리아가 그 주된 소재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왔습니다. 이 책의 분량 절반 이상은 그러나 아시아를 두고 벌인 편력 로그입니다. 예전 일본의 어느 평론가가 헤세의 <싯다르타>를 두고, "서양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피상적인 판타지"로 폄하한 말이 생각납니다만, 그의 태생도 그렇고, 중년에 접어들어서도 찾고 찾고 또 찾아 맛본 아시아에 대한 그의 탐닉, 외경의 정도를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싯다르타>를 다시 겸손한 마음으로 읽고, 우리 자신도 미처 몰랐던 아득한 정신적 본향의 한 구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톨릭 수뇌부와 제후들이 모여 반항자 후스를 활활 태워 죽일 것을 그 예전에 결의한 보덴 호수에서 그는 유난히 노를 자주 저어 다닙니다(꼭 여기에서뿐 아니라 그는 노젓기를 참 즐기는 신사의 모습을 많이 드러내더군요). 가본 분들은 알겠지만 보덴 호수는 유럽에서 보기 드물 만큼 넓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보리수의 향취를 즐기며 끝없는 상념에 빠져 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향인들의 역겨운 속물성에 대한 자각도 끊임 없이 뇌리에 새깁니다.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정착에의 혐오, 경각은 그의 태생적 병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덴 호수는 물론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한, 서남 독일의 변방이자 원심력의 극한입니다. 고향 문제를 떠나서도, 이처럼 그가 이곳을 즐겨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태생적 방랑벽이 어느 정도 중증이었는지 짐작게 합니다. 그럼 어쩌겠습니까. 떠나야죠. 식당에서 버릇 없는 웨이터의 뺨을 냅다 치는 다혈질의 그가 아니겠습니까.
이탈리아 반도가 좌우로 폭이 넓지야 않습니다만,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지리적 위치의 동서 이격을 떠나서, 그 역사적 배경과 풍토의 차이 때문에 오가기가 쉽지만은 않은 동네들입니다. 이 책 3장은 바로 이 두 곳의 방문 기록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 꽃 파는 소녀가 거리를 누비고 거리의 택시를 곤돌라가 대신하는 베네치아는 석호의 도시입니다. 아드리아 해 가장 깊은 구석에 위치한 이 도도한 도시는 바닷물의 침식을 운명으로 간직하지만, 그 도시를 떠도는 물이야 당연 바닷물이 아닙니다. 기이하게도 베네치아의 물, 물은, 그러나 저 멀리 지중해의 그것처럼 에메랄드의 청록빛입니다. 헤세는 이 빛깔의 마법을 초자연성으로 규정합니다. "베네치아의 물빛에는 태양과 수면이 빚는 빛의 물리적 산란 외에, 자체적으로 뿜어내는 명도와 채도의 그 무엇이 있다." 그렇기야 하겠습니까만 헤세의 이 이국적 풍광에 대한 예찬과 열광은 극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외국, 이방이 좋다기보다, 제 나고 자란 고장에 대한 반(反) 근친혼적 혐오의 발로요, 건강한 (정신적) 번식욕의 일환 같습니다.
그는 <싯다르타>에서뿐 아니라, 이런 여행기들에서 본격적으로 "인도의 시"를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 동양인들도, 더군다나 요즘처럼 각종의 여행 상품이 잘 개발된 환경에서도 이처럼이나 많은 곳을 다니기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헤세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 말레이시아, 남중국, 스리랑카, 인도네시아까지 잘도 돌아보고 그 아니면 절대 언술되지 않을 열정적이고 참신한 감상까지 토로하고 있습니다. 헤세는 인도 문화 뿐 아니라, 중국의 전통적 경전, 인문 텍스트의 내력과 평가에까지 훤히 밝은 소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못 배운 백인 특유의 동양 문화 경시 태도에 극렬한 경멸과 노여움을 표현하며, 총명한 동양 소녀의 눈에 잘 드러나는 무제한의 지적 호기심과 그 성취에 대해 경의를 표시합니다. 그냥 "그림"만 보러 다니는 관광객이 아니라, 그 지역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사람"에 대한 선이해를 갖춘 그입니다. 그는 관광객으로서 현지인을 관찰, 감상하지 않고(치를 떨며 싫어하더군요), 그 자신이 너그러운 피사체가 되어 현지인의 호기심에 노출되어 줄 줄 아는 대속(代贖)을 자청합니다.
5장은 제목부터가 "방랑"이며, 뭔 의도인가 싶게 부제는 "수기"라고 붙어 있습니다. 이 장은 제목이 저리 붙었건만, 책 중에서 가장 차분하고 정적(靜的)인 필치로 쓰여진 부분입니다. 주제 하나를 정하고 깊은 성찰을 표현한 다음, 마무리는 그의 장기인 정갈한 시로 짓는 식입니다. 여행 욕구에 들쑤셔지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싶을 때 읽으면 차라리 좋을 것 같습니다.
6장에 소개된 "테신"은 단행본으로도 나온(한국어 번역도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저 앞 4장 역시 그 부분만 단행본으로 나오기도 했죠), 스위스 테신에서의 5년 체류기입니다. 여기에는 베를린의 벗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도 나오고, 좀 징그럽게 웃통을 벗고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그의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 겨울밤이 시(詩)의 친근한 소재라면, 여름밤은 매콤한 맛을 풍기는 수필의 반가운 글감이죠. "테신에서의 여름밤"은 우리가 여름의 한적한 정취와 밝아오는 내일의 유흥을 기대하는 설렘, 밤을 새워 정담을 나누고 노래를 불러도 시간이 아쉽고 아까운 그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언제나 이 검고 푸른 공감을 최대한 누리고 맛보려는 아이들에게 "일찍 잠자리에 들 것"을 권합니다. 여기에는 또한 정돈되고 경건한 정신적 세계에서 그만의 순결을 지키려는 헤세가, 다른 편 세계에서 추한 물욕을 채우려는 세속인들을 어떻게 보는지, 반대로 그들은 헤세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편린적 진술도 나와 있습니다.
7장의 뉘른베르크 여행기는 앞 장의 공간적, 시간적 속편입니다. 뉘른베르크는 바이에른에 위치해 있고, 완고하고 보수적인 고장으로 독일 내에서도 많이 고립된 정치적, 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죠. 대체로 이 책의 글들이 시간순을 따라 배열된 걸 생각하면, 독일에서 나고 자라 이례적이라 할 만큼 객지를 지향했던 그가, 그 편력의 마무리를 가장 변화를 거부하는 땅에서 체류하며 지었다고도 하겠습니다(물론 이 책의 세계를 한계로 잡아서요). 회귀의 구조로 파악한다면 그리 발전적인 여정은 아닌 셈이겠는데, 여기서 그는 토마스 만 등 그와 어깨를 나란히할 문인협회 거인들과 (대체로) 우호적인 회동도 갖습니다. 이 무렵의 그가 대략 40대 후반, 50 초엽이니, 생각이나 스타일, 철학 등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시기를 넘어 장렬한 낙조를 멀리서 볼 무렵입니다. 이 시기에 자리를 같이한 토마스 만과 같이 찍은 사진도 나오는데, 두 분을 다 팬으로 모시고 있는 제게는 정말 기적 같은 한 컷입니다.
이 책은 단행본의 번역본이 아니고, 전집에서 발췌하여 한 권의 책으로 번역해서 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생전의 헤세가 그 의도를 매우 기꺼워하며 칭찬했을 것 같은, 충실한 구조와 이유 있는 짜임새가 돋보입니다. 문장도 매끄로워서 배경의 이국성이 아니라면 번역문이 아닌 것처럼 술술 읽힙니다. 격정과 성마름 속에 인간과 자연, 삼라 만상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간직한 위대한 영혼을 잘 알 수 있는 멋진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