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데카이
키릴 본피글리올리 지음, 성경준.김동섭 옮김 / 인빅투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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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형적이고 반듯한 세계관을 가진 모범생과는 달리, 위선적이고 타락한 사회에 대해 반항과 배신을 일삼되,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재치와 순발력으로 적수들을 희롱하고 좌절시키는 모습을 보이며, 독자와 팬들을 열광시킵니다. 가상의 세계라곤 하나 일단 그에 정신의 일부를 몰입시킨 청중이 다시 현실로 복귀헸을 때, 통상의 가치관과 생활 감각에 혼선을 빚어서는 안 되기에, 픽션의 주인공은 일단 보편적인 독자가 쉽게, 기꺼이 지지를 보낼 수 있는 유형이라야 합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 속에서 일탈과 규범 파괴를 사소하게나마 저지르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기에,  순진하고 충직하기만 한 성격으로는 전폭적인 공감을 내내 끌어낼 수 없습니다. 반영웅은 이런 점에서, 우리들의 현실 또 다른 모습의 반영이요 포기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아이돌입니다.

 

앵글로색슨 문학에서 정석적인 영웅 못지 않게 인기 있는 타입의 주인공은 바로 "반영웅(反英雄), 안티히어로"입니다. 프랑스어권 문예도 뤼팽이나 비독(실존인물이기도 합니다) 같은 예가 있지만, 이들은 포지션이 범죄자일 뿐 가치관이나 외모 면에서 표준적,  평면적 모범생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거나(뤼팽), 체제에 순응, 편입되는 모습을 보이며 반항아 고유의 매력을 순일하게 보존하지 못합니다. 반면 K. 본피그릴리오리가 창조한 이 모데카이는, 뤼팽과는 정반대로 1) 반기사도적 비열한 스타일에 2) 출생성분은 다소 미심쩍긴 하나 일단 고귀하고(그러나 내력이 뭔가 미심쩍은 것이어서, 예컨대 귀족다운 행동거지를 능숙히 보이지 못해 크램프의 장모에게 바로 대접을 낮추어 받기도 하는 장면이 이 소설에도 나오죠) 3) 자신의 말에 따르면 화려한 과거의 흔적이 살짝 연상될 정도로만 잘생긴 얼굴에, 평균에도 못 미치는 작은 키, 뚱뚱한 체형의 소유자일 뿐입니다. 특히 대중이 열광을 보내려면 외모만큼은 훤칠한 스타일이어야 하는데, 이 모데카이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다만 과거 군 복무 경력의 산물인 "의외로 빼어난 격투술"이 있어서, 방심하던 상대를 혼내주는 모습을 가끔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의 행동 원칙은 귀족 출신 답지 않게 도덕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오히려 밑바닥 출신들이 어렵사리 사회에 적응하며 자신의 몸에 배게 한, 구질구질한 생존 기법 같은 게 대부분입니다. 자기 출신을 배반하는 격룰과 스타일(외모 포함)이라고 할까요. 대신 시종(이 번역본에서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조크 스트랩이 홀딱 반할 만한 재치, 지능, 순발력, 그리고 쿨한(그저 쿨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습니다) 세계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랫사람을 마음으로부터 자신에게 반하게 하고 (그들이 흔히 쓰는 표현으로) "대신 총알도 맞을 만한" 각오와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건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닙니다. 조크 스트랩은 머리가 둔하고 오로지 힘만 쓰는 타입이 아니라(진정 괴력의 소유자이긴 하죠), 위기에 닥쳐 비상한 머리를 굴릴 줄 알고, 세상사 어두운 구석을 훤히 꿰뚫는 나름 달인형의 인간입니다. 이런 그가, 완력 면에서 상대도 안 되는 모데카이에게 그처럼 충성을 바치는 건, 자신의 상전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판세를 정확히 읽고, 최종적 위력을 지니는 전략을 짜내는 비상한 전략가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층민 정서를 격하게 감동시키는 "융통성(좋게 말해서)"이 있어, "저 양반은 귀하게 자란 분이 나보다 더한 사람일세!"같은 탄식 반 경탄 반 고백이 나오게 하는 거죠.

 

엄격하고 고상한 인격과 영혼을 가졌던 아버지에게 지리하게 훈육 받은 아들이 흔히 겪는 성장기의 갈등, 그리고 배태한 반감 같은 것이 이런 타입의 "성공적 악한"을 낳았다고도 보입니다. 모데카이는 가만히 보면 쉴새없이, 그리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유쾌한 영혼이긴 하나, 사실 내면으로부터 행복한 타입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상속자 크램프 3세가 거침 없이 제 부친을 폄하하는 언사를 내뱉을 때, 그는 그 질나쁜 젊은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일부 보기도 하지만, "난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다"며 이내 선을 긋습니다(그리고선 바로 이자를 제압하는데, 그 날카로운 두뇌회전에 조크는 또다시 감탄하죠). 그는 수시로 자신이 악당임을 자인하며 소위 인지부조화가 초래하는 정신의 타락과 쇠약을 멀리하려 애쓰는 모습도 보입니다("악당도 행동 원칙이 있어야 한다." 등등).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 은근 자유롭게, 그리고 여러 대목에서 프로이트적 패러다임을 갖고 자신과 타인을 분석하는 대목이 많습니다. 모데카이의 직업인 미술품 딜러라는 신분부터가, 프로이트의 고향이기도 한 비엔나적 아우라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설정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치명적 판단 실수와 탐욕 때문에, 정신 없이 위험한 모험에 던져진다는 점에서 모데카이- 조크 듀오는 오백 년 전 스페인의 돈 키호테- 산초 판자 커플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얄미울 만큼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고,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점이 차이이긴 합니다만... 이 소설 p279에 잠시 언급되기도 하는 P G 우드하우스의 작풍, 캐릭터와 유사하다는 평가도 종종 듣는 본피글리올리(이탈리아계 영국인이므로 g를 빼고  "본필리올리"라고 읽는 게 더 바람직합니다)는, 이 소설에서 독자들의 혼을 빼놓는 위트와 풍자, 블랙 유머를 통해, 모데카이라는 캐릭터를 영상화 없이도 완벽하게 독자의 눈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데카이 역에는 잭 니콜슨(본피글리올리가 활동하던 시절의 그보다 좀 더 젊은 모습- 실제로 동안이라 그렇지 조니 뎁도 지금 적은 나이는 아닙니다)이나, 약간 과거로 돌아간 데이빗 서칫 같은 배우가 잘 어울렸을 것 같지만, 그리 뚱뚱하지는 않고 텍스트 속의 캐릭터에 비해 과분하게 매력적인 조니 뎁이 이번 영화에 캐스팅되었습니다. 소설의 풍미와 개성을 다 살릴 순 없지만, 플롯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미스테리, 사기극, 그리고 첩보물이므로, 영화화가 오히려 늦은 감마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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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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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뒤의 역자 후기에 보면 "1988년작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미저리>는, 이제 이 소설 때문에 아이들 동화나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먼저 소개된 <그림자>를 재미있게 읽으신 독자는, 카린 지에벨의 이 작품도 전혀 실망하지 않고 즐기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즐긴다"는 말에 좀 어폐가 있긴 합니다만.



리디아는 빨간 곱슬머리를 기른, 늘씬하고 아름다운 이십 대 중반의 여성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에게는 정상인으로 행동하거나 사고할 수 없게 하는 큰 상처가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일란성 쌍둥이 자매로 태어났는데, 그녀들이 열한 샬 되던 무렵 오렐리아라는 이름의 이 자매가 실종된 것입니다. 아마 성폭행 당한 후 살해되고 암매장당한 걸로 추측되지만, 범인도 알 수 없고 사체의 행방도 여태 묘연한 채,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때부터 경찰에 대한 불신까지 같이 품게 됩니다. 오렐리아는 죽었지만, 죽지 않고 그녀 의식 한 구석에 자리잡은 채 리디아를 놓아 주지 않아, 남은 리디아는 일생을 두고 오렐리아의 복수를 대신 해 주어야 한다는 집착에 시달리게 됩니다. 오렐리아와는 마침 사건 발생 직전, 같이 애정을 다투던 한 남자아이 때문에 생전 처음으로 싸움까지 한 터라, 그녀의 죄책감(자매를 지켜 주지 못하고 혼자 살아 남았다는)은 더욱 깊어갑니다.

리디아는 그러던 중, 누가 그 끔찍한 살인과 성폭행, 사체 은닉을 저질렀는지 암시하는 편지를 받습니다. 놀랍게도 그 편지가 지목한 범인은,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데다 아직 젊은 나이에 경감직에까지 오른 현직 경찰, 브누아 로랑이라는 남성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무능한 경찰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던 그녀는, "먕백한 물증(무엇인지는 소설을 직접 읽어 보십시오)"이 손에 들어 오자, 앞뒤 가리지 않고 브누아를 납치합니다. 그녀는 약제 지식과 초급 간호학에 밝았기 때문에, 건장하고 영리한 남자- 게다가 현직 경찰 신분- 인 브누아를 힘 안 들이고 납치하는데, 여기에는 천성적으로 여자 꼬시기를 좋아하는 브누아 자신의 성격적 결함과, 브누아의 눈에는 꽤 매력적으로 비친, 그리고 웬만한 남자에겐 꽤 강렬한 인상을 남길 만한 리디아의 미모도 각각 한몫 거들었습니다.

 



리디아는, 자신의 쌍둥이 자매를 강간, 살해, 사체 유기했다고 철석같이 믿은 이 남자를 시골 한적한 곳에 위치한 지하실에다 잡아다 두고, 강도를 서서히 높여 가며 각종 고문을 가합니다. 혹시 이상 성격을 지닌 사이코패스 여성이 있다면, 이 소설을 읽고 모방범죄를 저지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이 과정은 대단히 치밀하고 긴장감 넘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위에 적은 대로, <미저리>에서 묘사되는 악녀의 행적 따위는 저리가랄 만큼, 특히 남성 독자들이 읽는 도중 몸서리가 쳐지고 자신의 국부, 어깨, 허벅지, 가슴 등이 무사한지 수시로 더듬게 될 만큼, 아주 신랄하고 생생하게 이 과정이 그려져 있습니다. 육체적 가학 절차 뿐 아니라, 가해자 여성과 피학대자 남성이 벌이는 심리전, 그리고 특히 일방적 열세에 놓여 있는 브누아의 의지와 결의가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에 대한 실감나는 서술이 압권입니다.



브누아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봉변을 당하면서, 온갖 생각과 상상을 머리 속에 교차시킵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을 다 치르면서도, 자기 눈에 지나치게 매혹적인 외모를 소유한 이 여자에게 수시로 반하기까지 합니다(워낙 천성이 여자를 밝히는 쪽이다 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매저키즘적 쾌락을 느끼는 데까지 가지는 않습니다(그러는 편이 차라리 그 자신에게는 나았을 텐데요). 오히려 독자는, 이 사나이가 강력한 의지와 체력을 겸비한, 보기 드문 타입이라는 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읽는 도중 그에게 열심히 몰입하게 됩니다. "이 순간에도 아들 제레미를 생각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드는군! 그래, 조금만 더 힘을 내 보라구!" "어차피 그 광녀는 널  살려 줄 생각도 없고, 혼자 힘으로 빠져 나갈 가망도 없는데, 차라리 그 여자의 광기를 깨우쳐 준다는 의미에서 장렬하게 죽음을 택하는 게 어떨까?" 독자의 반응은 같은 남성이라고 해도 이처럼 천차만별이겠으나, 캐릭터 브누아는 그 지옥 같은 시간 동안 자신의 한 의식 안에서 양 극단, 즉 포기와 오기 사이를 오가는 진자처럼 감정과 이성의 격변을 겪습니다. "내가 이 처참한 지경에서 행여 살아나간다 해도, 이미 미쳐 버려 있을 지도 모른다."



여성 입장에선 어떻겠습니까? 쌍둥이로 태어나고 자라보지 않은 입장에서 알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만약 리디아와 같은 경험을 했다면, 자신의 분신이, 그것도 어린 나이에, 악마나 짐승 같은 어느 사내에게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치욕을 겪고, 어느 컴컴하고 차가운 지하에서 백골만 남아 썩어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증오에 타오를 수도 있겠습니다. 여성 독자라면 경우에 따라 리디아에 공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이 브느아라는 남자는, 쉽게 여자를 만나고 쉽게도 버리는 질 나쁜 바람둥이인데, 정작 미인은 자기 아내(가엘)은 따로 감춰 두고 순도 높은 사랑을 바친다니, 좀 당해도 싸다는 느낌 마음 한 구석에서 비밀스럽게 키울 만도 하겠습니다. 게다가 소설을 끝까지 읽기 전엔, 기가 막힌 반전으로 "그래! 사실은 내가 진짜 유아 강간 살해범이었다!"라고 자백하는 브누아의 모습이 나올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내용 누설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 마디 하자면, 다 읽은 독자로서 브누아는 결백하다는 점 미리 확실히해 두겠습니다)

조금만 더 내용 누설을 하자면, 사실 브누아도 죄가 없지는 않습니다. 오렐리아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어느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죽음 근처까지 몰아간 적이 있습니다. 지하실에서 그가 받은 지독한 고초는, 어쩌면 그가 저지른 악행의 대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묘한 건, 죄를 저지른 자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악행에 대한 응보를 치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최종 보스" 한 분만 빼고 말입니다. 오렐리아를 25년 전에 죽인, 이 소설에서 최악 극악의 등장 인물이라 할 조아킴(이름 밝혀도 별로 내용 누설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도 결국 죽습니다(더 지독한 방법으로 죽어야 했을 수야 있겠지만). 사실, "그분"도 소설 끝날 때까지만 죽지 않았다뿐, 반드시 가까운 시일 안에 제 죄과를 치를 것 같은 느낌을, 소설은 강하게 풍기기도 합니다,. 따라서 책을 다 읽은 독자는, "이렇게 끝나면 안되는 거잖아!" 같은 의분을 느끼게 되진 않습니다.  사실 반전이 나름 절묘하기 때문에 독자가 그럴 정신적 여유도 못 가집니다만.

이 소설에서 다른 등장인물도 흥미롭습니다. 타지에서 급파된 파브르 경감은, 늙고 추한 외모의 소유자지만, 침착하고 이성적이며 직감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결국 브누아의 행방은 그가 찾게 되고, 아마 사건도 그가 해결해 주리라 독자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소설 초반에 "이런 실종 사건은 초동수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지?"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 말은 25년 전의 미제 사건 희생자인 오렐리아에게도 (읽다 보니)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라, 독자는 특히 아동 성폭력 사건의 경우 뭔가 특별한 시스템적 조치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과 불안을 짙게 가지게 됩니다. 조아킴 한 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희생되었습니까.

피해자이긴 하나 리디아의 정신 상태와 인격 역시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물증이라고 그녀는 확신했지만, 다른 가능성도 있다는 걸 조금은 생각을 했어야죠. 브느아가 진짜 범인이라고 해도 법치국가에서 사력(私力) 구제는 안 될 말입니다만, 한번 생각을 정한 바를 귀를 막고 안 바꾸려하는, 말이 안 통하는 모습을 보며 독자는(특히 남성이라면) 분명 피해자인 그녀에게 동정을 가지기가 힘듭니다. 물론 일부 비뚤어진 사이비 여권론자라면 이 경우에도 "남자가 무조건 잘못!"이라며 폭주할 수 있겠으나, 어차피 건전한 상식을 갖지 못한 자에게 어떤 경우라도 온당한 반응을 기대하기는 힘든 법입니다. 남자분들은 제발 이 소설 좀 읽고, 밤 늦게 행여 만취 상태로 다니다 정신이상녀에게 몹쓸 봉변이나 안 당하도록, 간통죄도 폐지된 이 마당에 특히나 조심들 좀 하십시다.

파브르 경감(이름이 오귀스트라서 더 밉살맞다는)이 가엘 부인을 잡아들였을 때, "생긴 것도 멍청한 위인이 과연 생긴 값을 하는구만!"하고 짜증을 낸 독자도 많았을 겁니다. 브누아 로랑 경감 실종 건과는 무관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직감이 뭔가 하나 건지기는 한 셈입니다. 카린 지에벨은 이처럼, 엑세서리 플로팅을 꾸려 독자의 긴장감이 도중에 낭비되지 않게 하는 데에도 아주 능합니다. 제가 이분이 쓴 스릴러를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대목이죠.

저는 처음에, "브누아를 선배라고 부르는" 토레즈 경사가 범인인 줄 알았습니다. 동기는 뭐냐, 남자로서 잘난 그에 대한 시기심과 적대의식, 그리고 브누아의 아름다운 부인 가엘에 대한 이룰 수 없는 연정, 이 정도면 뭐 적절하죠. 그래서 처음 파브르가 그녀에게 혐의를 두었을 때 그토록 격하게 반응했던 거고, 가엘이 자신에게 "삼천 유로의 진짜 용도"에 대해 털어 놓았을 때 "아니 매춘을 하다뇨!"라며 길길이 (필요 이상으로) 날뛰었던 것 아니었을까. 하지만 범인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용의자 하나 정도 배제하는 게 큰 스포일러는 아닐 것 같습니다. 범인을 찾는 데에 가장 큰 힌트는, 지하에 갇힌 브느아가 입으로 계속 반복하는 그 한 마디에 있습니다. "그 말"은,. 비록 브누아가 그 진위를 판명할 전문지식은 없었으나, 결국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브누아의 그 말이 사실이라면, 누구 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다. 바로 그 거짓말을 한 사람이, "최종 보스", 범인입니다. 트릭이 치밀하면서도 독자가 너끈히 풀 수 있는 게임이라는 점에서, 카린 지에벨은 애거사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보다 최소한 "공정성" 면에서 더 나은 작가라고도 하겠습니다. 이 소설의 진상, 당신의 머리로 풀 수 있으므로, 제레미의 말처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풀어 보십시오. 당신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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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백작부인
레베카 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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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에 그 기록이 올라 있는, 세계 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마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에르제베트(엘리자베스) 바토리 백작부인입니다. 삼백 년 후에 등장한 하층민 출신 잭 더 리퍼 따위와 나란히 악인의 대명사로 일컬어져 왔고, 현재에도 그 악명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서구권에서는 악녀의 아이콘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실존인물인데, 예를 들어 일라이 로스 감독의 <호스텔 2>를 보면, 여대생 로르나를 납치하여 천정에 매달아 놓은 후, 상처에서 떨어지는 피를 욕조에 받아 가며 바로 아래에서 목욕을 하는 변태성욕자(이자 살인자)인 어느 여성 캐릭터가 나옵니다(당연히 이 영화는 현대가 배경이구요). 조금만 변형을 가해 줬어도 좋았을 텐데 너무 전형적인 기믹으로 출연시킨 까닭에,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코믹한 느낌까지 풍기는 장면이고 설정이었습니다.

 

여튼 이 소설은 종래에 완전히 굳었다 할 이런 통념을 뒤집고, 그녀의 진면목이랄까 대안의 해석 비슷한 것을, 작가 레베카 존스의 관점에서 시도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시선에서 언제나 "역사상의 마녀"들이 억울하고 불쌍한 희생양으로 비치는 건 아니더군요. 엉뚱하게도 자신의 비뚤어진 심성 같은 걸 맹목적으로 악녀의 (정당한) 악평에 투사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그저 타인의 미모와 고귀한 출신 성분 따위가 부러워서 별 근거도 없이 매도와 폄하를 일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그런 말을 내뱉을 때는 "정의, 객관"의 이름을 빌리며 절절한 말투의 외관을 덮어쓰니(예를 들면 이 소설에서, 바토리 백작부인에게 추궁당한 후 본인 혹은 죄르지 투르조에게 항의하는 하녀들도, 자신의 잘못과 거짓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제 나름 크게 억울하다는 듯 거짓말을 울며불며 늘어놓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첫인상만으로 오판을 하지 않게 주의할 일이겠습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이런 중상모략은 흔히 겪는 일입니다.

 

아무튼 작가 레베카 존스의 이 최근작 하나로, 그 악명 높은 바토리 부인이 당장 오명을 벗는다든가 복권된다든가 할 가망은 거의 없습니다. 수백 년 동안 흔들림없이 굳은 선입견이라는 게 있고, 사람들은 대개 이성과 근거에 의해 판단하기보다 오래 간직해 온 자신의 느낌과 가치관에 따라 편한 판단을 하는 게 그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바토리 백작 부인에게는 대단히 안된 일이지만, 역사적 자료와 증거 따위가 남은 바로도 그녀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 소설의 액자처럼 기능하는 "성의 탑루에 감금되어, 아들 팔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부지한 채, 상당히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 몇 년이나 더 연명하였습니다. 그녀의 성정이 독한 까닭도 있었겠지만, 처우가 (이 소설에서 드러나듯 추위가 심했다는 점 말고는) 그다지 열악하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겠고, 무엇보다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건 그녀가 너무도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있었던 이유가 큽니다.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녀가 저지른 죄과는 모조리 그녀의 하인, 하녀들이 받았습니다. 이 소설에는 일로너 요, 도로처 센데시 정도만 큰 존재감으로 부각되지만, 실제 재판 기록에는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하인, 하녀들이 그녀의 잔혹행위에 관여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 역사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서양 독자라면, 아마 개중에 "이것은 역사 왜곡이다!"라며 분노를 표시하는 이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근거가 딱히 있어서라기보다, 자신의 선입견에 묘하게 침투된 신조 한 자락에 어긋나는 바가 있으면, 대개 평범한 사람들은 "윤리적 거부감(본인은 이를 두고 "정의감"이라고 인지합니다)"을 느끼기 마련이죠. 하지만 바토리 백작 부인에 대해 별반 아는 바 없는 한국의 독자들은, 이 재미있게 쓰여진 소설을 읽고 신나게 주인공에 공감하면서 1부까지 읽어나가다, 2부 중반 남편 페렌츠의 죽음 이후로 급전직하하는 그녀의 운명을 보고 격하게 안타까워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녀를 마녀, 살인마로 몰았던 당대인과, 사태의 진상도 모른 채 남 따라 증오를 퍼붓는 대중들에 대고, 한심하다며 혀를 끌끌 찰 것 같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흔히 남들의 질시를 사는 법이지!" 어디 여인 뿐이겠습니까.

 

이 소설에서 묘사된 에르제베트 바토리 부인은, 애만 안 낳고 결혼만 안 했다 뿐 스칼렛 오하라의 면모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복당하길 싫어하고 시시한 남자에게는 눈길도 안 주는 그녀와는 달리, 바토리 부인은 남자를 꽤나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야심과 자긍으로 뭉친 여성치고는, 언드라시 같은 시시한 귀족(더부살이꾼)에게 너무 쉽게 몸을 주고, 피임도 서투르게 해서 고향까지 먼길을 가 해산하는 수고를 겪고, 자신의 배로 낳은 첫 딸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들려 보내며 차마 못할 짓을 행합니다. 이런 게 다 자기 자식에게 못할 짓일 뿐 아니라, 본인의 마음 한구석에 씻지 못할 죄의식이 남는다는 점에서, 부도덕하기 이전에 어리석은 짓입니다.

 

물론 진성 마녀 스타일로 비판받아 마땅한 인간형은, 아예 이런 거리낌이나 죄의식, 명예감 따위가 없더군요. 손톱만한 이득이 된다, 혹은 이 남자와 자는 게 향후 로또식 요행이 터질 통로가 된다 싶으면, 기꺼이 상대가 늙은이든 추남이든 행동에 옮기고 터무니없는 합리화를 일삼습니다. 도덕률이나 양심이 자신의 품위와 존재 가치를 위한 게 아니라, (가상의) 남성 우월 세력이 자신에게 부과한 부당한 속박이기라도 한 양 여기나 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자기를 파괴하는 줄도 모르고, 무슨 투사로서 대단한 명분이나 수행하는 줄로 자신을 기만합니다. 하긴, 즐기기도 하고 투쟁했다는 허영(환각)도 채우니 일석이조이긴 합니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1부에서 어렵사리 페렌츠의 마음을 얻고, 삼십을 넘기면서까지 남편과 사이에서는 불임인 채로 있다 늦게나마 딸 하나를 본 후로는 아이 넷을 연달아 낳고, 드디어 이 백작이 그토록 갈망하던 아들-즉 후계자-를 낳은 대목에서는, 주인공과 함께 환희, 뿌듯함 같은 걸 느꼈을 겁니다. 또, 제발 좀 에르제베트에게 잘해줬으면 하고 우리가 바라던 페렌츠가, 예쁜(예쁘기야 하겠지만 절대 미인은 아닌 것도 같은 게, 소설 초입에 거울을 보면서 아쉬워하는 캐릭터 본인의 고백도 있으니까요) 부인, 약혼자를 오래도 외면하고 천한 하녀들과만 어울리는 게 그리도 밉살스럽다가, 하녀 어말리어를 "별차기" 수법까지 가르쳐 줘 가며 가학적으로 혼내는 데 동참하고서부터 친해지는 장면에서, (하녀가 겪을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 안도를 느끼기도 했을 겁니다. 이상하게 저도,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감정이입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러다가도, <엉클 톰스 캐빈>이나 <노예 12년> 같은 걸 읽으면서는 무자비한 귀족들의 처사에 얼마나 분노하겠습니까? 사실 이 소설에서, 얼굴 좀 예쁜 하녀는 무조건 주인을 홀리려 들고, 반대로 어느 이성도 거들떠 보지 않을 것 같은 추녀는 같은 하녀 계급 중 예쁜 이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타락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게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인 언너 바토리야말로, 미모와 영리함, 귀족으로서 나름 고충일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지혜와 무자비함을 고루 갖춘, 이 소설의 주인공 에르제베트보다 더 "바토리스러운" 원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가 사위에 대해 예언한 대로 "그는 좋은 사람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라"는 말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어쩌면 에르제베트는 자신만의 매력(이라기보다 결점)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후천적으로 배운 잔혹함을  그대로 실천하고서야, 남편의 마음을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걸 보면 페렌츠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장모 언너의 눈에 찼을 뿐인 "우둔할 만큼 아랫사람에게 잔인하고 냉혹한" 전형적 귀족이라는 점에서만 "좋은 귀족"이었나 봅니다.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아랫것들이란 그저 하루가 멀다 하고 버릇을 고치고 제 분수를 깨닫게 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존재로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전제가 깔려야, 바토리 백작부인이 행한 엄한 처분이 합리화도 되겠고 말입니다.

 

페렌츠는 아내에게 완전히 마음을 준 후에도, 지속적으로 하녀들과 통간하는 걸로 나오는데, 그 중에 별로 예쁘지도 못하고 (그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는) 가문의 위신과 부를 위태롭게 할 만한 여인에 대해서도 분별 없이 가까이하는 걸 보면, 봉건 질서에 의심 없는 충성과 신념을 간직한 인물일지는 몰라도 지혜는 결여된 타입으로 보입니다. 투르조가 그처럼 악질적인 배신자(이 소설의 관점에서만 그렇다는 걸 유의해야겠습니다. 역사적 판단은 별개입니다)일 줄도 모르고 생전에 그와 재혼하라고 아내에게 권하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죠. 이는 물론 지극한 아내 사랑이긴 합니다. 그가 가문의 보존, 후계자 승계에 얼마나 큰 집착을 보였는지를 감안하면 큰 파격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천한 하녀들을 건드리고 다닌 걸 보면 참... 아시아의 술탄이나 파디샤도 한 여인에 대해서만 일생의 순정을 유지한 경우도 있는데 말이죠) 그가 어리석다는 건, 사촌이라기보다 하인과 같은 존재였던 언드라시가, 자기 약혼녀와 놀아나는 걸 방치한 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약혼녀에게 본인이 애정을 느끼고 안 느끼고와는 별개로,  아랫사람이 본인 허락도 없이 "자기 물건"에 손대는 짓은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바토리 벡작부인은 역사상 기록으로는 각종 고문 기구를 들여 놓고, 하녀뿐 아니라 귀족의 영애들까지도 교육의 명목으로 자기 성에 들인 후, 가학적 만행으로 목숨을 앗은 걸로 나옵니다. 이 소설에는 하녀, 하인들의 권익도 당시 헝가리 법제가 제법 잘 보호한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 귀족의 영지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누가 번거롭게 정의를 내세우며 개입하려 들었겠습니까? 이 소설에서 설정한 대로, 그 귀족의 재산과 지위를 빼앗는다거나 정치적 공작이 깔려 있지 않았으면, 하녀 따위야 죽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실제 역사에서 이 바토리 부인이 파멸을 맞은 건, 1) 종교적으로 문제가 될 법한 방식으로 하녀들의 목숨을 앗앗고, 2) 귀족 자제들의 신변에 위해를 가했다는 이유가 끼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뿐입니다.

 

소설 속에서도 그렇고, 실제 행적으로도 바토리 백작 부인은 대단한 교양과 학식을 갖춘 인물로 보입니다. 한국의 일부 부유층 자제가, 영어는커녕 모국어로 행하는 의사 표현마저도, 정신박약이나 문맹자의 그것이나 다름 없는 수준을 보이고도 부끄러운 줄조차 모르는 모습과는 크개 대조됩니다. 귀족이 되려면 아래 신분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서양의 컨벤션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율 브리너,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 <아나스타샤>를 보면, 로마노프 대공을 두고 집사가 "이 글씨 쓴 꼬락서니 하곤.." 하며 경멸 가득한 표정을 짓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신보다 필체가 안 좋다는 뜻이 아니라(자신은 당연히 그게 자기 본연의 일인데 필체가 좋아아죠), 귀족이 으레 갖추어야 할 자질을 연마하지 못한 채 세상에 나온 "불량품"이라는 뜻입니다. 귀족이 되려면 지식 뿐 아니라 판단력도 좋아야 합니다. 이 소설에서도, 하녀들 사이의 분쟁을 말끔히 해결하지 못하면, 아랫사람들로부터 조소의 대상이 된다는 분위기가 분명히 제시되고 있죠.

 

언너 더르불리어는 그 음산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다 할 만큼 긍정적 인간형으로 묘사됩니다(실존 인물은 아닌 듯합니다). 에르제베트는 그녀와 처음 마주칠 때부터, "당신이나 나나 여기선 똑같은 하녀 처지니, 형식적이고 외교적인 모습만 보이지 말고 속을 터 놓아 보라"고 요구합니다. 이때 에르제베트의 속셈이 따로 있어서 정보 따위를 캐내려는 게 아니라, 진짜 외로워서 친구가 필요했던 걸로 보입니다. 가식이 아니라 이 소설에서 에르제베트가 유일하다시피 사람 제대로 알아 본 게, 사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더르불리어를 두고서였습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와 본분을 안다는 것만으로, 이처럼 가치가 올라갈 수 있구나 하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에르제베트는 나름대로 순수한 성격이지, 음모를 꾸미고 계산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타입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언드라시, 투르조, 그 외 그녀를 거쳐 간 인물들을 보면 대개 그녀를 이용해 먹고 버린 셈이지(소설의 시점이 1인칭이라 이 점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독자가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정작 악녀라는 그녀는 상대의 속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피해만 보았습니다. 페렌츠가 처음에 그녀에게 끌리지 않았던 것도, 가슴과 둔부가 덜 발달한 아이라서기보다는, 어딘가 맹해 보이는 타입이라 매력이 안 느껴진 건 아니었는지, 그러다가 의외로 독해 보이는 면을 발견하고서야 마음이 열린 게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물론 이건 졍상이 아닙니다. 남자라면 당연히 순수한 여성을 좋아하기 마련이죠).

 

페렌츠의 대사 중에 "난 처음에 돈과 작위만 보고 내게 시집 온 여자인 줄 알았소."라고 하는 게 있는데, 사실 계보를 따지고 보면 에르제베트의 바토리 가문이 더 높은 지위이기 때문에, 이건 좀 사실성이 결여된 대목 같습니다. 결혼 후에도 바토리라는 성을 유지한 건 그런 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왕"이라는 칭호로 자주 나오는 루돌프, 마티아스 등은, 물론 "헝가리의 왕"이지만, 그 이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바토리 백작 부인 사후에 터진(물론 상관관계는 없습니다만) 30년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무능한 군주들이었습니다(같은 시기 프랑스에는 앙리 4세라는 현명한 왕이 나와 여튼 프랑스의 중흥을 이끈 것과 대조되죠). 마티아스 왕은 헝가리 왕으로는 마티아스 2세이며, 제국 황제로선 그냥 마티아스 황제일 뿐입니다. 이 사람은 사실 친계 조모가 헝가리 왕실 공주 출신입니다. 따라서 바토리 부인과는 그리 멀지 않은 친척인데, 이 소설에서는 투르조의 농간에 넘어가 커니저이 가문의 돈(따라서 상속자 바토리 부인의 채권)을 떼먹는 걸로 나옵니다. 소설에는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투르조가 마티아스와 황제 사이에서 얼마나 이중플레이를 열심히 벌였는지는 눈에 선히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듯 "나름 순수한" 캐릭터 바토리 부인은 자신만 그 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결국 이때 마티아스 황제와 사이가 벌어진 게 그녀의 몰락을 자초한 걸로 암시됩니다.

 

이 소설 최대의 악역인 투르조의 신분은 "영주"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약간 이상한 느낌입니다. "영주"라고 하면 남작도 종남작도 그저 기사 신분도 자기 영지 안에서는 다 영주입니다. 그런 시시한 보편 지위에서, 불입권을 지닌 백작 부인의 성 안에 범죄 조사차 수색을 할 수 있고 처분을 내린다는 게 어색하죠. 영어 원문은 "영주"가 아니라 "팔라틴"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책에서 흔히 "궁정백" 혹은 "궁중백"으로 번역되는 그 작위입니다. 이 자리는 법적으로 황제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바토리 백작의 영지에 이처럼 진입을 하는 게 경우에 따라 가능한 것입니다. 그저 친분만 있다고 이런 실력 행사가 가능한 게 아니죠. 투르조의 이름은 죄르지인데, 이는 사실 바토리 부인의 아버지의 그것과 같아서 묘한 아이러니를 풍기는 듯 보이지만, 조지, 조르쥬, 게오르그 따위가 다 같은 계통이며, 유럽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큰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헝가리 인명은 안드라시, 안나 등으로 쓰는 게 보통이나, 이 책에서는 액센트가 놓인 a는 "아", 없는 a는 "어"로 철저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좀 어색해도 정확한 현지 발음에 가까운 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왕국 수도 "포조니"는 현재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의 헝가리식 이름입니다. 슬로바키아는 역사상 오랜 기간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기에 이런 사연이 있고, 저 위에 적은 현대 호러물 <호스텔 2>에도 느닷 바토리 부인 캐릭터가 나오는 게, 배경을 브라티슬라바로 삼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연관 고리가 있다고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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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스쿨
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한창호 옮김 / 와이즈베리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고등생명체인 인간에게 특히 중요한 활동은 휴식이고, 그 중에서도 수면은 활력의 회복에 있어 중추적이라 할 만한 비중을 지닌 프로세스입니다. 저는 예전, 김대중 대통령이 야인으로 지내던 시절, 수사기관에 연행되기 전 그를 끌어가려고 온 수사관들에게 단 한 가지를 부탁했다는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탁인데 단 15분만 자게 해 주시오."

수사관들은 차마 거부할 수 없었고, 그는 양해를 얻은 후 잠시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거짓말처럼 15분 후 정확히 깬 후 수사관들과 동행했는데, 더 놀라운 건 불과 15분 동안 수면을 취하고 일어난 그의 얼굴이, 다른 사람처럼 달라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15분간의 수면만으로 저처럼 원기가 회복될 수 있을까?" 비슷한 경우로, 전(前)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 씨 역시, 바쁜 스케줄 때문에 항공 여행이 일상이 되다시피한 터라,  기내에서의 수면이 에너지 충전을 위해 필수적이었다며 여러 매체를 통해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왜 어떤 사람은 그토록 단잠을 잘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잠을 못 자서 그처럼이나 고생을 하는가?"에 대해, 체계적이고 풍성한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수면제의 적절한 처방을 받기만 하면 무리 없이 수면을 이룰 수 있는 이가 따로 있고, 수면제가 잘 듣지 않거나, 건강에 큰 지장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의 체질에 따라, 잠을 못 이루는 원인과 해결책이 천차만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잠을 잘 자려면 이러이러한 방법을 쓰면 된다"는 안이한 팁, 요령은, 대개 효과도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오히려  위험하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잠이 안 와 고생한 게 아주 오래 전 일일 뿐입니다. 한 2년 정도,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제법 속을 썩였는데, 그때마다 의존한 건 대학원 과정 실해석학 교과서를 읽는 방법이었습니다. 머리를 한창 혹사하고 나면,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잠이 쏟아지더군요. 요즘은 "머리만 대었다 하면 자는" 스타일로 바뀌어서, 가벼운 소설책을 읽다가도 곯아떨어지기가 예사입니다. 물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 숙면이 가능한 쪽이겠죠. 잠이 안 와서 다음날 스케줄을 걱정해야 할 때의 그 초조함이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이 책은, 수면 부족이라든가, 질(quality)가 떨어지는 수면이, 얼마나 당사자의  활동과 (심지어는) 운명에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경고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잠을 잘 못 자는 처지라 해도, 그저 "스트레스 과다나 컨디션 저하, 슬럼프" 정도로 가볍게 넘어갈 뿐, "존재의 위기"까지를 떠올리고 경각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자 리처드 와이즈먼 교수는, "어제 자지 못한 잠은, 오늘 당신의 직장과 명성을 눈 깜짝할 사이에 날려버릴 수 있고, 내일 당신이 가진 모두와 다른 사람의 이익까지 무(無)의 상태로 돌려 놓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잠은 이미 목숨이 달린 문제라고단정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잠이 안 오거나 할 때, 인터넷에서 간편한 요령을 검색하는 게 보통이고, 위험 부담이란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그 지침(?)들을 쉽사리도 행동에 옮깁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이치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근본적 효과가 나올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왜인가. 당신이 잠을 못 이루고 있다면, 그에는 당신 고유의, 생활 습관이든 타고난 체질이든 인생에서 겪은 어떤 체험의 기억이든, 무언가 강한 연결 고리를 지닌 원인이 있기 때문이죠. 이 책은 제법 두꺼운 볼륨 안에서, "잠을 못 자게 되는, 체계적이고 심리학적이며 심지어 인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잘 풀리지 않는 문제나 애로에 봉착했을 때에는, 그 근본 원인을 파헤치고 다방면에서의 접근을 해 봐야 합니다. 저는 이전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책을 읽고 큰 각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기력"이란 얼마나 모호하고 막연한 "병명"이겠습니까. 보통 누군가가 무기력의 고통을 호소하면, 그 사람은 "한가한 소릴 한다"며 주변으로부터 면박이나 듣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제목의 그 책은, 무기력이 얼마나 치명적인 질환이며, 만만치 않은 이 늪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인 전략이 필요한지, 상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가벼운 위험을 두고 과잉대응하는 것도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결코 경시해서는 안 될 불길한 재앙을 두고 그 위험의 중차대함을 간과한 채 "패기"만으로 맞서는 것 역시 피해야만 합니다.




이 책의 분류에 따르면 저는 "슈퍼 슬리퍼"인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잠 때문에 다음날 제 일정에 지장을 받은 적이 최근에는 없었으니, 이 책을 읽어 내었을 필요나 이유가 없지 않냐고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만에요. 잠이 안 와서 그렇게 고생하시는 이들보다, 오히려 저야말로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케이스였습니다. 암환자라고 해서 여태 인생을 암과 투병만 하며 살아온 게 아닙니다.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그도 평생 암이란 녀석과 인연이 없을 줄로만 낙관해 왔을 것입니다. 암에 비길 건 아니라고 하나, 불면증도 언제 어디서 (현재 슈퍼 슬리퍼인) 당신을 엄습하여, 결코 만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재앙을 당신 코 앞에 들이댈지야 누가 알겠습니까? 이 책의 존재가치는 바로 거기 있었습니다. "불면은 선명한 원인을 지니고 있는 병이니, 당신의 경우에 맞는 처방을 찾아 바로 치료하라!" 하물며 저 같은 경우, 오래 전이라고는 하나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있으니 "병력"도 보유한 셈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보시다시피 <나이트 스쿨>입니다. 왜 "스쿨"이 붙냐면, 첫째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불면"에 대한 종합적, 망라적인 설명과 분석을 담고 있기 때문이며, 다음으로는 이 책의 형식이, 마치 학생들에게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 선생님이나, 문센에서 주부님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명강사처럼, 경어체의 자상한 말투를 쓰고 있기 떼문입니다. 당신은 올빼미형입니까, 아니면 종달새형입니까? 책은 독자, 아니 청중에게 이 두 유형의 분류를 제시하고, 스스로 범주 진단을 한 다음 각각 그에 알맞은 상세한 솔류션을, 제법 두꺼운 책 안에 담아 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또한 "꿈"의 기능과 본질에 대해서도, 참신하면서도 현실 설명력 높은 탐구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건강 이슈에 한정된 게 아니라, 인간 존재의 해명 영역에 대해 한 발 들여 놓는 대담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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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명화 한 점 - 명화 같은 인생, 휴식 같은 명화
이소영 지음 / 슬로래빗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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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칸트의 저술을 읽어 보면, 인간의 지각과 이성에 대해 대단히 유보적인 정의를 내려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수학이나 자연과학의 공리에 대해서도, 그 출발점은 "동시대인 사이에서 합의된 선지식"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을 정도죠. 그 이른 시기에조차 "절대 진리"에 대한 섣부른 인정을 이처럼 꺼리고 있는 신중함이 놀랍습니다. 심지어, 가시광선 7색이 섞이고 교차하며 빚어내는 시각을 비롯한 오감에 대해서도, 그저 "인간의 망막과 광선 사이의 상호작용이 유발하는 한계" 안에서의 현상이라는 점을 명확히하고 있습니다. 객관적 실재(만약 그런 게 있다면)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고, 다만 우리 눈에 그저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비치는 상, 색깔, 모습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에 동의하고 나서야, 사실주의, 고전주의 이후에 꽃을 핀 그 모든 개성적인 화풍이, 제각기 자기만의 타당성 있는 어법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이성적 사유 이전에도, 우리는 마네, 쇠라, 고흐,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중에, 마음이 평온해지고, 채 잊고 있었던 푸근한 심상을 아득히 먼 이전으로부터 끌어올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눈에 비치고 우리의 뇌가 해석하는 바 한 가지 가능성만 존재한다면, 사진을 제외한 모든 시각 예술품들은 그저 우리 마음만 산란하게 하는 유해물일 것입니다. 화가들이 그런 파격을행하고도 우리의 환영을 받는 건, 현실 혹은 형이상에 대한 그런 식의 포착이, 지금 우리 망막이 놓치고 있는 어떤 비주얼을 "영혼의 눈"을 통해 전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은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이 책 저자인 이소영 대표가 우리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도 그런 쪽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요즘 9호선 연장 때문에 배차간격이 늘어서, 해당 노선 이용하시는 분들은 극한의 불편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자차를 이용하지 않고 대중교통에 몸을 싣는 건, 그나마 그 시간을 독서 등에 선용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걸 꿈도 못 꾸게 되었으니 실망이 더 크죠.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내 마음을 푸근하게 이끌어 주는 그림, 조형은 어떻게 해서건 출근길의 벗이 되어 줄 수 있더군요. 이 책은 요일에 따라 총 7부로 나뉘어 편집되었는데, 아침에 집을 나오기 전 해당 페이지를 펼치고 내 눈에 뚜렷하게 이미지를 새겨 놓습니다(마치 튜브 물감이 발명되기 전 야외에서 재빨리 스케치를 한 후, 기억을 되살려 아뜰리에에서 채색 작업을 하던 이전의 화가들처럼 -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철에 몸을 실으면 눈을 감고(사람이 많으니 손잡이를 잡을 필요도 없고, 때가 되면 인파에 쓸려 저절로 내려지죠), 그 그림의 이미지만 재생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마음이 편해지고, 동시에 그 그림 밑에 저자 이 대표가 적어 놓으신 이 구절을 떠올리면서, 예컨대 "당연한 것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같은 말을 떠올리면서 짜증을 가라앉힙니다. 그림을 통해 이 각박한 물리계를 넘어 저 피안의 조형도 떠올리고, (인위적이지 않은) 마음 수양도 하니 일석 이조입니다.



이 책은 기계적이지 않은 구성이 가장 큰 매력입니다. 요일에 따라 7부로 나뉜 각 챕터는, 챕터마다 시대에 따른 유파를 설명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고, 그런 책들을 익히 읽은 우리 독자들도 웬만한 지식은 갖추고 있단 말이죠. 이 책은 그런 우리 심리를 미리 꿰뚤어보기라도 했다는 듯, 교과서적인 설명은 최대한 자제하고, 대신 (얼핏 보아) 신변잡기나 개인 회상 같은 작가 개인의 말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림의 해설(이 역시 필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물론 개인 감상이라 해도 전문가의 그것이니 무게가 다르긴 하지만)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니, 그냥 친구나 아는 분이 옆에서 들려 주는 이야기 같아 공감이 더 빠르게 이뤄지더군요.



설명도 입체감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보통 보면 필치와 기법에 대한 기술적 설명을 나열하거나, 앞 유파, 그리고 이후의 전개와 고립된, 당해 트렌드에 대해서만 자세한 이해를 의도하는 게 보통인데요. 이 책은 (때로 느닷없다 싶은) 통시대적 설명이 적시에 끼어드는 게 좋았습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이처럼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넘나드는 건, 저자가 오랜 세월 이 주제와 밀착한 환경에서 살아올 수 있었기에 이런 정직한 표백이 가능했을 텝니다. 자신만의 아이템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뻔하고 흔한 구호의 나열 끝에, 세상이 자기 부모처럼 제 응석을 안 받아주더라는 어처구니 없는 원한을 싸구려 무족보 페미니즘 타령과 얼기설기 섞은 넋두리와는 크게 구별됩니다.




존 윌리엄 고드워드는, 인상파와 입체파가 화단을 풍미하던 시대에 신고전주의 터치를 고수한, 일종의 낙오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후기 인상주의 파트 뒤에 이 사람 이야기를 뜬금없이 싣고, 또 그의 대표작 몇 점을 같이 실어 독자에게 감상을 권합니다. "나는 그가 좋았고, 이런 그림을 남겨 준 그에게 감사한다." 그 말을 듣고 나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독자 중 한 사람인 저도 그의 선명하고 깨끗한 화풍이 마음에 들더군요. "스타일을 개창하고 열어 젖힌 사람뿐 아니라, 그를 마무리하고 떠난 이에 대한 기념도 있어야 한다." 사실 고드워드 같은 사람은 "마무리를 했다"고 하기엔, 루벤스 등의 시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죠. 피카소 같은 이도 그런 기법 구사에 서툴러서가 아니라, "새로운 표현법으로 세계와 소통하고 싶었던" 욕구가 강했기에 대가가 될 수 있었겠죠. 고드워드 같은 이는 사실 안이하게 자기 세계에만 머물렀지, 거듭나려는 의지가 부족했기에 그가 동시대로부터 박한 평가를 받은 건 당연합니다. "어쨌든 나는 내가 잘하는 걸 계속하겠다!"라는 타협과 거짓 없는 그의 정신은 그러나 높이 평가해야 하겠죠. 다만 저는, 고드워드가 작품 제목을 잘 지었다는 평에 대해서는 그리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시회를 자주 가 보지 않으면, 유명한 화가가 생전에 얼마나 많은 작품을 남겼는지 감을 잡기 힘듭니다. 전시회란 그래서, 그 많은 작품들 중 어떤 피스들을 모았느냐를 통해서도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며, 오너십이 단일하지 않은 그 작품들을 한 장소에 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이, 대가들의 대표작 아닌,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컷 여럿을 싣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소개할 때에도, 사진 중에 번호를 삽입하지 않고(사소하나마 벌써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죠), 매개 인덱스를 거치는 방식을 쓰신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림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저자 이 대표는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겨 온 다른 미디어에서의 체험과 감상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점도, 이 책이 입체적 개성을 지니게 하는 비결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 서양고전음악, 대중가요, 소설(예를 들어 최근 히트작인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또한 그런 추억을 환기하는 배경으로는 반드시 홍대, 건대앞 등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장소, 아니면 친구들과 함께 다녀온 파리 등이 곁들여져, 일종의 공감각 효과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심오한 감상이나 상념이 아니라, "서른을 넘기니 불안하다" 같은, 친근하고 보편적인 느낌이 대부분이라서, 이 책에 실린 그림들과 우리 평범한 독자 사이의 거리를 더 좁히고 있습니다.

결국 예술이나 업적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우선"입니다. 이 책에 실린 예술가들 중 일부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세웠겠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은 평범한 대중인 우리 같은, 관객과 청중이 있어야 그 존재 의의도 사는 법입니다. 심각하지도, 고매하지도 않은 채, 그저 팍팍한 일상을 사는 우리 곁에 머물며 작은 위안을 주고, 다시 일선의 경제활동으로 복귀한 우리들에게 재생산의 활력을 부여하는 그런 그림들이야말로, 예술을 넘어 영원의 가치에 기여하는 그런 불멸의 존재로 남는 것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시각의 창조와 해석에는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게 절대로 아니겠습니다. 정직한 인생과 함께하는 우리 모두에게 고유의 해석권이 주어지는, 완벽한 민주주의의 장이 바로 그림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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