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과 짐 에디션 D(desire) 6
앙리 피에르 로셰 지음, 장소미 옮김 / 그책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이 사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애욕과 본능이 오로지 자신의 형질을 자연계 속에 보다 널리 퍼뜨리기 위한 데에만 그 목적이 있다면, 이토록 복잡한 감정의 변화와 격동, 설렘과 아픔이 있는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구애가 실패하면 다른 이성을 모색하면 되고, 거절의 두려움 때문에 접근을 주저할 까닭이 없습니다. 결합에 성공하여 자식을 보면 관계의 사명은 완수되었으니, 상대가 지겨워지면(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무엇이 지겨워지는 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인간에게 자연스럽습니다) 언제든 유대를 해소하고 다른 방향으로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뭔가 부끄러워지고, 타락했다는 자괴감, 죄책감을 떨치기 어럽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이성을 만나 죽을 때까지 처음의 결합을 유지하는 건 아름답고 윤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혹은, 그 정도가 되어야 인간다운 처신이라는 데에 우리 인간은 거의 합의를 보았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가식과 기만 없이, 한 영혼이 다른 영혼에게 완벽하게 기대고, 만족하고, 마르지 않는 애정의 샘으로 기능할 수가 있을지요. 처음에 걸었던 기대가 배반당할 수도 있고, 나는 여전히 사랑하는데 상대가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두려움에, 전속적 관계란 언제나 파경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배신의 징후, 불륜의 현실화, 혹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 그 자체가, 보기 좋게 익어가는 사랑을 망치기도 합니다.

 

영화 <엠마뉴엘> 2편에서 "진정한 사랑은 세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대사가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메인인 두 사람이 같은 정도로 신뢰, 우정, 때로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제3자가 끼어들어야,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상대의 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그 기꺼워하는, 환희에 가득찬 표정, 자태를 보며 상대를 더 사랑할 수 있다는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그런 "공유적" 태도를 아직은 내밀해야만 할 우리식 남녀 관계에 적용하기는 무리겠다는 생각도 물론 유지했습니다. 또 그 영화에서 강조한 건, 주로 육체적 사랑에 한정된 명제인데, 애인 사이의 관계가 육욕으로만 채워지는 게 당연히 아니기에, 이 메시지는 그런 점에서도 다분히 무리가 따른다고 생각했죠.

 

<줄과 짐>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한 세기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가상의 무대일지언정 이렇게나 자유분방하고, 그러면서도 타인과 자신에게 솔직한 관계 형성, 노력, 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정말 놀라웠습니다. 트뤼포의 영화에서는 세 사람의 관계에만 초점이 놓이지만, 이 원작 소설은 1/4 가량이 지나서야 카트린이 처음 모습을 드러냅니다. 소설 초두에서 제시된 에피소드와 설정은,  3각의 핵심 축이자 사실상 구심점 노릇을 하는 카트린이 비록 등장하지 않지만, 이 소설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히 첫 세 페이지는, 이후 전개될 모든 사건을 열 두어 문단 안에 다 암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완벽한 청자가 되어 줌을 발견하고는, 바이에른 인 줄과 파리지앵 짐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이렇게 두 남자가 친한 사이로 발전하면, 오늘날엔 다소 우려스러운 시선이 던져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소설은 그런 동성애적 해석 여지를 전혀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관점이 개입한다면(불가능합니다만), 아마 소설의 가치는 크게 깎일 것입니다. 왜냐면, 이 소설은 "영혼과 영혼의 교감, 이해, 소통, 전쟁, 그리고 타협과 화해"를 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뤼포의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오는 캐릭터는 아무래도 프로이샌 여인 카트린일 것 같습니다. 이 소설 역시, 줄과 짐 두 남성은 사실상 거의 폭력적으로 자기 중심적 성향인 카트린의 주위를 돌고 있는 위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책에 나오는 표현대로 "오직 카트린에만 온 주의를 집중하는" 두 사람이었기에, 육체적 매력이 월등한 다른 남자들을 마다고 카트린은 두 남자를 양 축으로 삼고 진자 운동을 반복합니다. 한쪽에 머물 때 그 남자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얻어 내고, 복수(남자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거나 않음에 대한)의 동기건 단순한 싫증에서건 다른 쪽으로 옮겨 올 때, 이번에는 앞선 남자가 베푼 모든 서비스 외에, 다른 것까지 바라고 요구하는 카트린. 그러나 그럴 자격이 있는 여신 같은 그녀이기에, 두 남자는 묵묵히 충직하고 사랑스러운 시종의 역할을 해 냅니다. 두 남자 역시 매력이 있는 편이기에(줄은 정신적 매력, 짐은 육체적 매력), 물론 카트린이 폭군과도 같은 약탈자로 구는 건 아니고, 그렇게까지 사악한 영혼도 아닙니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 사랑도 전쟁 같은 속성이 있기에, 주도권을 잡는 편은 있기 마련이며, 더 강한 주도권을 더 오래 잡고 놓아 주지 않는 편이 카트린이라는 정도입니다. 그것도 두 남자를 상대로 해서요.

 

우리 독자가 카트린보다 더 유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줄과 짐 두 남자의 관계입니다. 이 소설 제목이 "줄과 짐"인 것도, 거칠게 말해 그렇게 붙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정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삐를 날카롭게, 매섭게, 쉬지 않고 잡아채는 카트린이지만, 두 남자는 결코 굴종이나 예속이 아닌, 나름 주체적 위치에서 관게의 건강성과 생기를 유지하는 역할입니다. 매력이 시들지 않는 여신으로 싱싱히 가꿔 나가는 것도 이 두 남자의 몫인데, 카트린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줄과 짐이 마냥 이타적이냐면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짐의 경우, 여러 여성에게 어렵지 않게 구애를 받는 입장이니만치, 카트린 같은 여성을 해바라기하느라 정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죠. 그가 소중히 여기는 건 정신적 교감(둘 다 문인에 가까운데, 백아와 종자기가 서로를 알아 주듯 정신적 교류를 완벽히 이룰 수 있는 상대가 이 친구밖에 없다는 데에 둘이 완벽한 합의를 이룹니다)이고, 이 점에서 그는 줄에게 큰 유대와 우정, 채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건, 줄에게 가혹하거나 불공평한 결과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우선적 신조입니다. 줄은 자기가 못 가질 바에는 줄리를 짐에게 주려고 했고, 이런 고마운 마음과 우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혹 줄리와 맺어지면 그는 줄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도록 배려하려 합니다. 카트린 이전에도 이미, 짐은 줄이 배제된 이성 관계를 생각할 수 없었던 거죠. 까마귀떼에게 봉변을 당하기 직전까지 가면서도 친구를 위해 희생양처럼 실험 대상이 되기를 마다지 않는 줄을 보며, 짐은 더더욱 깊은 우정과 죄책감을 느낍니다. 가장 분방한 개인주의 같지만, 어느 집단주의보다 더 철저하고 유효한 연대 의식이 자리한 관계입니다.

 

삼각 관계라면 보통 추악하고 비윤리적인 관계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세 명(앞서 말한 대로 카트린 이전에 여러 여성이 나옵니다. 그 여성들의 장점을 한 몸에 다 가진 존재가 카트린이고요)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장점에서 이익을 취하면서, 동시에 상대를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배려가 작용하는 곳입니다. 질투도 있고 의심도 있지만, 서로의 영혼을 아끼고 상처 받지 않게 해야 한다는 성숙한 의식이 우선입니다. 시대는 1차 대전을 사이에 두고 긴 시간을 이어가지만, 세 주인공(간간히 끼어드는 다른 인물들조차)은 늙지도 않고 처음 줄과 짐이 만난 20대 초반을 그대로 유지하는 느낌입니다. "시간이 아닌 순간을 살았다는" 카트린과, 그에 동반한 짐의 죽음은 그래서 파멸이 아닌, 영원에의 축배처럼 느껴집니다. 줄의 회고. " 두 투신 속에 나는 살았다"는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이 모든 꿈 같은 격정과 사랑을 잘 요약하는 잠언이기도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셰익스피어를 사랑한 여자
최복심 지음 / 문이당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프면서도 작은 희망으로 마무리되기는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현실에서의 굴곡, 시련이 힘들게 해도, 작가로서 모든 역량을 쏟아 넣은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기만 하면 결국 다 보상이 되어서일까요. 셰익스피어의 어느 작품 제목처럼, 끝이 좋으면 결국 모든 게 좋은 것이어서일지도 모르겠고, 주인공 김문영에게 평소에 잘 대해 준 정부장님, 그 외 여러 "선생님"들, 은사님들과의 인간 관계는 소중히 간직되었기에 해피 엔딩으로 받아들여지기는 합니다.

 

소설의 시작은 신비로운 꿈 이야기와 함께 열리는데요. 셰익스피어로 추측되는 어느 남자가 나타나, 그 옆에는 연상의 아내(?)를 앉혀 둔 채, 마지못한 듯 보이는 태도로 책 몇 권을 주더니, "대신 대가는 치르어야 한다"고 다짐을 둡니다. 처음에는 공짜로 나눠 주던 몇 권의 (평범한) 책이 있었는데, 김문영 바로 앞에서 비축분이 소진되고 맙니다. 따라서 김문영이 받은 책은, 운 좋게 걸린 더 가치 있는 아이템이었겠죠. 김문영은 처음엔  "추가의 대가"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기왕 준 후 나중에 토를 다는 듯한 쩨쩨한 태도가 불편하기도 합니다. 애인 장선우(동명의 영화 감독과는 무관한 가공의 캐릭터입니다)는 작가답게 멋진, 그러나 문영의 비위를 맞추는 게 우선인 해석을 내놓지만, 여전히 그 운명 같은 계시를 두고 명쾌한 이해를 하기는 힘듭니다.

 

장선우는 문영에게서 선배 소리를 듣는, 그녀보다 많이 연상인 남자이고, 그녀를 "귀여니, 사랑이" 등의 애칭으로 부릅니다. 미모의 여성을 두고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노총각일까 생각했는데, 소설을 읽어 나가다 보니 기러기아빠인 유부남으로 나오네요. 플라토닉한 사랑을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고, XX 등에서 뜨거운 사랑(이들은 서로의 공통점 중 하나를, "밝힌다"로 꼽습니다)을 불사르는 분명한 XX 관계인데요. 선배라고 해서 처음에는 대학 선후배 관계로 긴 인연을 가진 사이일까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일 때문에  비교적 최근에 만난, 그리 오래지 않은, "신선한 열정에 타오를 수 있는", 상하지 않은 XX이었습니다.

 

김문영은 남자의 탐심과 변덕에 놀아나는 구시대적 여성이 전혀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회사에서 일도 최고로 잘하고(여튼 설정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내 정치, 세력 다툼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파이터 기질을 보이며, 같은 라인 안에서도 후원자에게 거침없이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당찬 커리어우먼입니다. 이런 김문영 과장을 내내 괴롭히는 상급자가 있으니, 김문영의 표현에 따르면 <오셀로>에 나오는 이아고 같은, 싸이코패스에 이중인격자인 신 상무입니다. 신 상무는 권위 의식이 강한 음모형 인간으로서, 고분고분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은 전력이 있는 김문영을 찍어 놓고 두고두고 코너에 몰아넣습니다. 라인이 다르면 그렇게 지속적 원한을 가질 필요는 없는데, 불필요한 전선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싸이코패스라기보다는 그냥 무능하고 멍청한 주제에 성질만나쁜 유형으로 보입니다.

 

여러 번 함정을 팠으나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사내에서 위신과 명분만 잀게 된 신상무는 결국 명퇴자 리스트에 오릅니다만, 같이 퇴직할 대상자를 추리는 업무도 신상무가 맡게 되고, 이 와중 사내 자기 인맥을 확실히 구축하려는 부사장과 공 이사(둘 다 낙하산입니다)에게도 다시 "찍힌" 김문영은, 영어 입문 사전 출간 기획을 성공적으로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퇴사자 명단에 들게 되네요. 근데 김문영은 고분고분 회사 실력자들의 의지에 굴하지 않습니다. 제부인(동생은 당연히 그녀보다 일찍 결혼했겠죠) 노무사의 도움을 받아, 그녀는 해고의 효력을 다투며 끝까지 투쟁합니다. 채 받지 못한 야근수당까지 모조리 챙기고 회사와 유리한 조건으로 합의를 본 후, 여유로운 승자의 입장에서 적들에게 적절한 위로의 말까지 던진 후, 홀가분한 심정으로 그녀는 회사를 그만둡니다.

 

 XX 관계 - 그러나 김문영에게건 장선우에게건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너무나 잘 맞고 달콤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 역시 그녀의 바람과는 반대로 파탄을 맞게 됩니다. 장선우와 데이트하던 장소에서 우연히 그의 아내 친구 부부를 만나게 되고, 낭만적이라면 낭만적이고 경솔하다면 다분히 경솔한 그의 말 때문에 XX 사실이 결국 미국에 체류하는 아내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네요. 그런데 아내도 이미 현지에서 어떤 남자를 만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먼저 이혼을 요구한 건 아내였습니다. 다만 남편도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XX암 초기 진단을 받은 일 등이 겹쳐 결국 그녀는 마음을 바꾸게 되고, XX인 채로도 그저 오래 만남이 지속되었으면 하던 김문영의 희망은 이 때문에 깨지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참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장선우는 매너도 좋고 작가답게 소양도 풍부한 인물이지만, 그가 즐겨(문영의 비위를 맞추려) 인용하는 셰익스피어의 문장이나 특유의 썰처럼 늘어놓는 철학 등은, 제가 느끼기로는 별 깊이가 없는 겉발림 같았는데요. 그런 선우 -더군다나 나이도 많은 - 에게 김문영 같은 여자가 왜 집착하는 걸까요. 작품 도중에 슬쩍 나오는 것처럼 "아버지와 원만한 관계를 이루지 못한 여성은 연상의 남자에게 집착한다"는 말이, 혹시 김문영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되었습니다. 아니라고 해도, 둘의 관계는 XXXXX 이상이 아니어 보이기도 했고요.

 

여튼 직장과 남자관계, 두 전선에서 동시에 치명타를 맞은 김문영. 남자가 이런 일을 겪어도 그게 참 견디기 힘든 일인데, 하물며 여자가 치르어야 할 시련으론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마구 무너져내리는 여성의 심정을 감상적으로 늘어놓지 않고, 셰익스피어의 여러 인용구 속에 담담하게, "아 본래 인생이 그런 거려니"하는 쿨한 태도로 넘기고 있단 사실이었어요.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인생은 본디 연극 무대에 불과한 법" 정도로 생각하면, 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도 사실이죠. 어쩌면 이 소설이, 작가 최복심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건 아닌지 조심스러운 추측도 들었습니다.

 

소설 처음에서 소개된, 불길한 예언("대가는 따로..")이 마치 실현이라도 되듯, 결말에 가서는 큰 비극적 사고가 터집니다. 이걸로 보아(김문영을 잡기 위해 새벽에 급히 차를 몲), 선우는 나름 문영을 두고 작품을 위한 뮤즈라든가 XXXXX 이상으로 여긴 건 분명해 보입니다. 오히려 김문영은 이 비극을 두고 적잖이 쿨한 태도를 보이며(자신에게도 책임이 없다곤 못할 건데요), 이제는 산 채로 볼 수 없는 장선우를 자신의 뮤즈로 삼아, <셰익스피어 인 드림>이라는 야심작을 발표합니다. 상관이었던(그리고 같은 퇴직자 신분인) 정 부장과 함께 새로운 직장도 잡는 듯 보이니(그녀는 나름 커리어 관리에 까다로워서, 급하다고 아무 회사나 들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건 뭐 회사를 관둔 게 더 해피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젊은 여성이 이 시대에 겪을 수 있는 일치고는 제법 파란만장한 사건이었는데요, 이 모든 걸 셰익스피어라는 액자 속에 넣고 바라보니 즐거운 풍속도로도 보입니다. 인생 만사가 결국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능의 충격 - 심리학의 종말
이일용 지음 / 글드림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제목은 보시다시피 "지능의 충격"입니다만, 저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지능의 충격의 충격"을 받았다고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분에 대해선 일절 약력 표시 사항이 없어서 대체 어떤 분이실까 하는 궁금함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가능하면 찾아 뵙고, 테이블 아래에 떨어진 가르침의 부스러기라도 좀 주워서 가져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요즘 "이것이 퓨처다"라고 선언될 만한 R&D의 화두는 단연 "인공지능"분야가 되겠습니다. 얼마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불과 한 달도 지나지 않은 과거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공 지능이 이 추세대로 발전하면, 인류는 그 생존에 위협을 맞이할 것이다"라는 취지의 발표를 한 적 있습니다. 사실 저는 "아무리 회로 집적 기술이 발전하고, 또 빅데이터의 이용 방안이 개선된다 해도, 과연 CPU와 하드, 메모리가 그 본체에 불과한 EDPS가 인간의 두뇌를 넘보는 일이 과연 생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감정"이라는 요소를 아무리 분석한다 해도, 이를 부호화(코딩)하거나 프로그램으로 구축할 수 없는 이상, 지능은커녕 지능 유사의 어떤 시스템 구축도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는데요.


이 책의 저자분께선 일단 지능의 정의를 달리 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능이란, 아주 제한된 분야에 특출한 솜씨를 보이는 게 지능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훈련을 통해, 혹은 타고난 천성, 선호 본능에 의해 뭐 하나를 제한적으로 잘 수행하는 건 "지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란 거죠. 돌고래가 곡예를 펼치는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애완 동물이 신기한 짓을 하면, "지능이 높다"는 칭찬을 자주 해 줍니다.

그런데 이건 모순이 있습니다. 만약 "지능이 높다"는 말을 그렇게 해석하고 활용하면, 왜 그 애완동물은 그 단계에서 한 치의 발전도 못 보인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까요? 인간은 나무 위에 머물러 있다가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저 나뭇가지를 손으로 집어, 손으로 못 하는 일을 하는 게 낫겠다"는 자각을 했습니다. 존재하는 도구(처음부터 도구로 존재한 게 아니라, 인간이 손을 뻗어 도구로서 활용하고 나서야 그것이 도구가 되었습니다)를 그대로 손으로 잡고 휘두를 게 아니라, 간단한 건 이어붙이기도 해서 기능과 모양을 게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겠습니다만, 여튼 기존 패턴의 반복에 그친 게 아니라 발전이요 진화였습니다. "지능"을 가진 주체라면, 이처럼 우연히 습득한 행동 패턴을 반성 없이 되풀이하는 게 아니라, 머리 속의 아이템을 종합, 통합하여, 새로운 컨텐츠와 행동 지침을 만둘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동물한테는 그게 있습니까? 우리는 그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지능"이라면, 그 지능은 단순한 "흉내내기", "베끼기"의 기술에서 벗어난 것이라야 합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귄위 있는 소스를 베낌"을 자랑으로 삼고(실제로 그 저자들 급의 뻬어난 선생에게 배운 적도 없으면서, 몇 십 년 전의 활자 잔해를 두고 자기 기만의 페티시로 삼습니다. 실제 저자들이 보면 어이없어할 일이죠), 굳어 버린 머리로는 단 한 줄의 신선한 컨텐츠도 창조해 내지 못합니다. 이십 년 전 대학 리플렛 쪼가리에서 주워 들은 구호의 파편이 머리에 든 것의 전부일 분, 정작 정평이 난 텍스트 본의는 해석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부실한 정보 조각과 일치하는 것만 골라 근근히 꿰어 맞출 뿐입니다. 


저자분은 "지능이란, 특수한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항에 대해 두루 통하는 이해, 발견, 응용력, 그리고 재창조"에 연관된 것이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만 잘하는 건 지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저 우연히 감정적 선호가 그 대상에 꽂힌 결과일 뿐입니다. 저도 싧제로, 어느 전기 작가가 처칠에 대해 논한 글에 이런 말이 나왔던 것이 생각납니다. "처칠이야말로 정치, 예술, 문학, 군사"에 두루 능한 사람이었으므로 진정한 천재라 할 만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저 뛰어난 장군이었을 분이니 천재라 불릴 자격이 없다." 여기서 이 사람은 "천재"란 단어를 쓰고 있지만, 그건 단어의 오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말("천재")을 "(이 책의 저자분처럼) 우리가 계발하고 지향해야 할 참다운 지능"으로 해석한다면, 앞뒤가 척척 들어맞는 맥락이 완성됩니다. 


수 세기 전 그토록 뛰어난 천재들도(특히 조선 시대라면), 기초적인 수의 개념이나 도형을 이해하는 데에 그토록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분도 지적하시다시피) 지금 세상엔 유치원생들도 장난처럼 다루는 내용들에 불과합니다. 이 아이들이 머리가 특별히 뛰어나져서 그런 걸까요? 결국 인간은 자기 두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속한 시대의 첨단 지식 정도는 얼마든지 자유자재로 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특별한 컨텐츠의 창조야 천재의 전속 권한이라고 가정해도 말입니다.


저자분께서는 "어떤 사람이 학습에 실패한 것은, 정말로 실패해서가 아니라,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무가치한 학습에 대한 자발적 차단을 행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공감가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이런 걸 뭐하러 배우나" 싶어 미뤄 놓았던 분야를 지금 다루고 있습니다만, 이게 이렇게 재미난 분야였나 라고 지금 깨달아서 신나게 하는 중이죠. 과연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지는 건지, 다만 어깨 근육에 무리가 안 갈 정도로 몰두하면 이 분야에서 못할 게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저자분이 말씀하시는 학습의 새로운 쾌감 발견 아니겠습니까?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좋은 내용, 평소에도 어렴풋이 이거 아닌가 하고 여겨 왔던 생각들을 콕콕짚어 주셔서, 정말 큰 기쁨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완독은 했으나 아마 제가 채 캐치 못하고 지나간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두고두고 읽어서, 남 좋은 일 시키는 게 아니라 내 능력을 계발하는 소스,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싶네요. 이런 책을 써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목민심서 - 상
황인경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가 다산 탄생 250주년이 된다는 건 이 책 뒤표지를 보고 알았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아마도, 성리학 그 지구 최후의, 그리고 유일한 보루로 조선 반도를 지키고 있을 무렵, 그 땅에서 용감하게, 그리고 외로이, 그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땅에서 굶주리고 수탈당하는 백성들을 위해 대안(代案)의 사상을 궁구한 분입니다.

공자는 일찍이 학문의 바른 길을 올곧이 걷는 이들을 두고 실학(實學)에 몸담는다며 규정한 바 있었지만, 주희가 유학을 하나의 도그마로 만든 이래 현실과 유리된 무익한 논의만 일삼는 풍조를 결과적으로 조장한 후, 조선의 성리학은 허학(虛學)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다산은 명문가의 소생이고, 금상(今上)의 총애를 받았으며, 용모도 준수했고, 타고난 재능도 출중했기에, 당대 사대부들이 선택한 표준적인 경로만 밟았어도 입신과 출세에 아무 지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편한 길, 넓은 문을 마다하고 구태여 가시밭길 걷기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집안은, 다산의 대(代)에 이르러 그 총명한 자질을 높이 산 정조대왕이 젊은 그를 아끼고 요직에 등용했기에 벼슬길에의 전망이 비로소 트이기는 했으나, 소속 당파가 남인이었기에 여전히 주위의 견제와 압박이 심했습니다. 정조 같은 걸출한 임금이 등장하여 실질적 탕평책을 펼쳤지만, 노론의 굳건한 인맥이 곳곳에 심어 둔 인의 장막을 걷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던 셈이죠.

 

남인 진영의 젊은 인재들이 하필 당시에 쉬이 경도되었던 흐름이 천주학, 즉 가톨릭이었습니다. 괴력난신을 논하는 걸 금기로 삼았던 유학과는 달리, 서양의 이 신선한 종교는 태초에 어떤 원인이 작용하여 만물이 생성(창조)되었고, 그 창조주의 모습을 따라 빚어지고 입김에 의해 영혼을 갖게 된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평등한 존재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소설 속에서 이벽과 그의 부친이 벌이는 짧은 논쟁처럼, 존재와 이치의 근원을 논하는 서양 종교의 가르침과, "영원 따위가 어디 있냐"면서 눈 앞에 보이는 인륜과 질서를 더 중시해야 한다는 전통의 입장이 서로 맞서고 있었습니다. 다산의 형 정약전은 동생과 거의 같은 시기에 과거에 급제한 인재였는데, 이 천주학에 대해 동생보다 더 경도된 입장이었습니다.

 

능력은 떨어지지만 출세욕, 과시욕은 그 누구에 못지 않게 발달한 이들이 많죠. 간신히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성적이 낮고 업무에 미숙하며 글재주가 부족하다 보니, 각별히 영명했던 임금의 눈에 들 길이 없어 절치부심하던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기경 같은 이는 처음에 다산의 좋은 벗이었으나, 그의 끝없는 총기와 기억력, 바른 마음, 심지어 번듯한 용모 등의 장점에 깊은 열등감을 느낀 나머지 홍낙안 같은 간교하고 사악한 무리의 모략에 동조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은 이처럼, 노론과 남인의 대립이라는 익히 알려진 프레임을 통해 다산의 고초를 분석하지만은 않고,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에 언제나 있기 마련인 뭇 인간들 사이의 시기, 질투, 모략, 중상 등을 잘 묘파하고 있습니다.

 

작가분은 이 시대 양반층에 대해 자주 처분되었던 "유배형"에 관하여, "요즘 식으로는 집행유예에 해당한다 할, 편의를 좇은 조치"라고 평가합니다. 천주학이 분명 체제 윤리와 원칙에 반하니 여론(양반 지배층의)에 따라 처벌은 해야겠고, 살펴 보니 아까운 인재인데 신체형(곤장 등)을 내리기는 망설여질(이 책에도 자주 나오지만, 장형은 대부분 상처가 악화되어 목숨을 잃는 지경까지 이르릅니다. 사실상 유예된 사형 집행이나 마찬가지였죠) 때 이런 선택이 쥐해졌습니다.

 

민생이 도탄에 빠지면 (이 시대로부터) 삼백 년 전의 상황처럼, 도적이 들끓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도 박만덕이라는 자가 등장하여, 탐관오리 김양직에 대한 성토를 늘어놓고, 당시 정조에게 암행어사직을 부여받아 지방 행정 감찰에 나섰던 다산은 이 불학무식한 악민(惡民)의 사연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남다른 귀골과 태도에서 배어나는 배짱에 이미 이 젊은 선비가 이인(異人)임을 눈치챈 만덕, 그리고 그 졸개들과 다산이 서로 소통하는 장면도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재미입니다.

 

빼어난 학자, 관리가 다른 이들이 채 보지 못하는 바를 보고, 태연히 자행되는 기만과 비위를 있는 그대로 그르다고 지적하면, 이를 역으로 타매하여 구린 속을 감추고 도명하려는 악당들이 흔히 있기 마련입니다. 학문이 부족한 자는 열등감 때문에, 부정을 저지른 자는 추급 , 사정에의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지도 모르고 옳은 이를 도리어 매도하게 마련입니다. 다산은 이로 인해, 벼슬길에 머물 때보다 더 많은 기간을 유배지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유배지에서도 저술 작업에 몰두하고, 평민과 토착민 사이에서 능력 빼어난 이를 뽑아 제자로 기르는 등, 가장 어려운 시절에도 애민과 애국에 실천으로 나선 인물이었습니다. 민족의 스승으로 모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 다산의 생애에 대해, 재미있는 소설 형식을 통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 최신 인지심리학이 밝혀낸 성공적인 학습의 과학
헨리 뢰디거 외 지음, 김아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어 과목이 절대 평가로 전환된다든지 하는 조치로, 앞으로 학생들은 입시 지옥으로부터는 점진적인 해방을 맞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사실 과거와는 달리, 요즘은 입사 전형에서도 대학 간판을 잘 보지 않는 추세라, 이 책에도 나오는 표현처럼 과연 명문대 졸업장이 당사자에게 과연 큰 도움이 될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 있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과거에는 고3 시절 열심히 공부하다 좋은 대학 진학 후엔 (특별한 일 없으면) 무난히 졸업해서 좋은 직장 얻는 게 정해진 코스였습니다. 그러나 평생 직장 신화가 무너지고 나서는, 중간 간부직 이상으로 승진한 후에도 공부 안 하면 하루도 못 버티는 형편이 되었죠. 오죽하면 삼전에 근무하는 이들이, 라이벌 모 전자 직원들을 두고 "너희들이 여기 오면 얼마나 버틸 것 같냐?"고 조롱하는 분위기가 아주 어색하지만은 않은 반응을 얻습니다. 그 모 전자 역시, 입사하기에 얼마나 어려운 곳입니까.

 

입시를 앞둔 아이들뿐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접한 후 이른 시간 안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업은, 이제 경제 활동을 하는 인구 모두의 미션이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일단 현장에서 바로 써먹어야 하기 때문에, 신속히 습득하는 것도 문제이고, 이 습득한 지식으로부터 2차 성과를 내기 위해, 자신의 머리 속에 진득히 장착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가면 갈수록, 그저 무난한 직장인 정도로 사는 것조차 힘들어지는가, 그건 (역시 이 책에도 나와 있듯) 지금 세상이 유난히 지식 폭발, 신기술 이노베이션이 인류 역사상 초유의 모드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서 그렇습니다. 앞 세대들은 이런 곤란을 겪은 적이 없고, 은퇴한 지금은 노동 능력이 부족하니 기득권에 집착하고, 요즘 세대들은 일은 일대로 힘들고 손에 떨어지는 건 더 빈약하니 세대 간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하죠. 그렇다고 개인 차원에서 당장 구조를 뒤집을 힘은 없으니, 현 직장이 요구하는 바 과업을 충실히 해 내는 게 그나마 최선의 선택입니다.

 

사회의 실정이 이러니, 아이들에게 현실을 들려 주면 "이 지옥을 통과해도 더한 지옥이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깊은 절망에 시달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현실 도피, 왜곡이 정답일 수는 어느 경우에도 없는 법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결국 평생 공부하는 길만이 생존의 비결이라면, 바르게 공부하는 방법을 익히는 수밖에 없죠. 흔히 하는 말로, 물고기를 먹이지 말고 그 잡는 비결을 가르쳐 주라고 합니다만, 거액의 유산- 그 형태에 따라 시세의 변동, 혹은 경솔한 판단으로 하루 아침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을 물려 주는 것보다, 배운 후 평생 재활용, 변형 응용이 가능한 지식을 아이의 머리에 깊이 심어 주는 게 더 고마운 부모의 은혜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읽으면서 충격을 선사하는 내용을 가득 담고 있더군요. 저는 제 나름대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공자님의 그 유명한 학이(學而)편 서구(序句)처럼,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만한 공부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말이죠, 지금 이 책에 따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더군요. 그것 참....

 

먼저, 무작정 기계적으로 행하는 복습은 아주아주 해롭다는 게 저자들의 결론입니다(이 책은 단일 저자가 쓴 게 아니라, 학습 방법론과 심리학에 정통한 여러 학자들의 콜라보, 그리고 실증적 실험과 연구의 결과물입니다). 사실은 본인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보기만 보다 보니, "모르는 걸, 혹은 깊은 이해도 이뤄지지 않은 걸, 안다고 착각"하고서는, 약점을 보충하거나 깊은 내용으로 파고들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지적은 정말 너무도너무도 타당한 사항입니다. 제가 현재 실무에서 자주는 아니라도 종종 겪는  일이거든요. "아니 그게 그런 뜻이었어?" 마치... 뭐랄까요. 와이프의 고마움을 모르고 그녀의 진가를 평가하지 못한 채(와이프 좋은 일 시키는 게 아니라, 내 아내가 이런 사람이었어?를 먼저 알고 그녀를 즐겁게 해 주면 그건 나에게 좋은 일이라고 상무님이 그러시더군요 ㅎㅎ) 맨날 보는 여자라면서 심드렁하게 대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습관의 반복은 권태기로 이어지고, 뜻하지 않게 "위기의 부부"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죠.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즉 메타적 재귀적 비판 없이, 반복적으로 그저 보다 보니 내가 아는 것, 내가 잘하는 것이겠다 착각하는 건, 누적이 되어 치명적인 업무 실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겪은 건, 처음에 좀 고생이 되더라도 이해 안 되는 부분을 확실히 짚어 가며, "이 모호한 설명은 진짜 의미가 뭘까?", "이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까?" 라며 물어가고 검색하고 여러 권의 책을 찾아 보는 노력이, 그 지식을 진짜 머리 속에 오래 남게 하는 비법이더라는 겁니다. 이건 제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부분입니다. 엉터리로 의대 공부 마친 놈팡이가 평생 돌팔이 노릇하는 것이나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런 의미에서, "배우고 (기계적으로) 때때로 익히"는 건, 만약 그 "습(習)"의 의미가 종래 피상적으로 이해한 바의 확인에 불과하다면, 아주 치명적으로 해로운 방식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자, 그러면, 그 구절의 앞부분, 즉, "배우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니, 무엇이어야 할까요?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게, "자기 주도 학습법"입니다. 누구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 나가는 방법이야말로, 이상적인 공부 패턴이요 자립형 인격의 완성이기까지 한 의의를 지니고 있겠죠! 누가 감히 동의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위에 제가 스스로 찾아 나가는 학습법의 미덕을 적어 두기도 했습니다. 아닌게아니라요) 이 책 저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도 문제가 크다는 말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자기 주도 학습의 크나큰 맹점은, 말 그대로 자기가 주도하다 보니, 크로스 체크, 혹은 메타적 시선에서 자기 반성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쉽게 말해, 틀린 게 있어도 자기 확신에 빠져(똑똑한 사람일수록 더 이런 경향이 강합니다), 틀린 줄을 모르고 그대로 프로세스를 진행해 나간다는 거죠. 이게 예를 들면, 단어 뜻을 잘못 알고 있거나, 수학 문제를 잘못된 방법으로 접근해 나가도, 내가 본래 잘하는 사람이니 내 방식이 맞겠거니 하고 고칠 줄을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 방법이 안 통하는 문제에 처음 직면하고서야 큰 낭패, 회복 불가능한 실패를 겪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타이거 우즈 같은 천재형 스포츠 선수도, 우수한 코치를 언제나 곁에 두는 팩트를 지적합니다. 우수한 인재일수록, 매너리즘에 빠져 어느 순간 잘못 들어선 경로를 수정하지 않기 때문에, 곁에서 쓴소리를 하는 멘토를 필요로 한다는 겁니다. 역사의 예를 들면 당 태종 이세민 같은 사람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머리도 좋았고, 무예도 뛰어났으며, 전술 전략의 판단도 아주 명쾌하고 신속하게 내리는, 한마디로 사기 캐릭터였습니다. 위징은 반면 자신의 정적이었던 형의 최측근 모사였고, 형의 세력이 완전 파멸한 후에도 (이미 최고 실력자가 된)자신 앞에서 죽을 각오로 할 말은 하는 위인이었죠. 그러나 이세민은, 메타형 자기 체크를 언제나 곁에 두고행해야 내가 살아남는다는 뚜렷한 자각이 있었기에, 위징을 죽이지 않고, 아니 죽이기는커녕 지근거리에 중신으로 대접하며 그의 쓴소리, 멘토링을 경청했습니다.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더 코칭이 필요하다는 건 이를 두고 이름입니다.

 

저자들은 그런 주장을 합니다. "요즘은 뛰어난 학습자일수록, 그리고 머리에 더 정돈된 지식과 판단 체계가 구축된 사람일수록, 자기 교정 작업에 능숙하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일이 안 풀리고 성과를 못 내는 사람일수록, 잘못을 고치기는커녕 비뚤어진 보상 심리로 오히려 자기주장의 고수에 더 맹목적으로 집착한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자신의 본업에 몰입하기보다, 도피 심리에서 거대 담론에만 빠져들기 쉽기도 하고요. 일이 안 풀릴 때, 귀인(歸因)을 외부에서 찾기보다, 나의 학습 방법이 잘못된 바가 없었는지 먼저 반성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참으로 유용한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읽고, 공부가 잘 안 되는 아이에게 마음을 터놓은 대화를 시도하기에 좋은 책입니다. 이런 방법론을 주제로 하고, 기존의 통념을 다 뒤집고 실무에까지 도움을 주는 책을 극히 드물게 보았기에 하는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