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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 ㅣ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평점 :
막심 고리키라고 하면 막연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연상시키는 도식화한 승리담 -내지 궁상맞은 가난과 착취 학대의 참상)"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죄 없는 민중들은, 무능하고 탐욕스럽기까지 한 지배구조의 서슬 퍼런 압제 하에 정말로 참혹한 일상을 살았죠. 지배 계급이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을 보살펴 주기는커녕,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수탈과 폭력을 일삼았으니까요. 하지만 문학 작품에서, 그것도 대단히 판에 박인 방식으로, 격한 어조와 살벌한 비주얼의 "인생극장"를 보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이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은 그의 장편 <어머니>도 아주 건성으로 보았기에,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은 그 내용이 뭐였는지도 기억 나지 않았습니다.

작가정신에서 국내 처음으로 소개하는 이번 고리키의 단편선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저는 그 유명하다는 <어머니>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의외로 재미있더라구요. 제게 그 이전 체홉이나 투르게네프 등이 재미있었던, 감동적이었던 그런 스타일로 재미있었고나 할까요. 작가가 누가 되었건, 어떤 시대에 살며 무슨 사상과 그 신봉자들의 영향을 받았건 간에, 이들 러시아 작가들이 쓰는 풍이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고, 말하는 방법과 그 내용이 참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되었습니다.
여튼 그 <어머니>를 다 읽고 나서 이 책을 열게 되었죠. 단편이나 장편이나, 고리키의 스타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예습 과정"이 필요한 건 아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성취는 러시아 문학의 모범적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때로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유쾌한 옛날 이야기처럼 재미있고, 때로는 애들 놀래켜 주려고 뜬금없이 고안된 괴담처럼 무섭기도 한 분위기 속에, 우리들 인간이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하는 그 아득한 가치, 혹은 영혼의 순수성 같은 걸, 끊임 없이 경각시켜 주는 것도 같았습니다.

이 책에는 모드 열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중에는 서로가 서로를 닮은 것도 있고, 어느 한 편이 다른 이야기들을 추상화, 혹은 귀납하여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리해 주는 듯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고리키는 이 중 어느 작품에서나, "네 영혼을 더럽히지 마라.","신은 언제나 악마보다 더 멀리 떨어져서 널 지켜 보고 있지만, 너에게 악마보다 더 깊고 근원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았네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이라는 게, 꼭 기독교적 의미의 유일신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인과응보 권선징악을 모토로 내세우는 신령님인데, 다만 민중에게(그리고 지식인에게) 죄의식을 더 강조한다는 게 차이점인 정도의 그런 존재라고나 할지.
<마부>
아닌게아니라 이 작품 중에, 도스토옙스끼의 캐릭터 라스콜리니코프가 바로 대화 중에 언급되기도 합니다. "비범인은 범인(凡人)을 죽여도 경우에 따라 죄가 될 것 없다!" 어디서 왔는지, 행동 동기가 무엇인지 모를 마부는 파벨 니콜라예비치에게 "저런 쓸모 없고 사악한 노파는 죽여도 나쁠 게 없으며, 인류 사회에 봉사하는 길이기까지 하다."고 속삭입니다. 악마는 본시 웅변하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이처럼 유혹적으로 속삭인다는 게 성격의 공통이고 스타일의 전통이죠.

고리키가 아무리 도스토옙스키를 내심 존경하고 있었다고 해도, 작품 속에 대놓고 라스콜리니코프를 언급한 건 작가로서 선뜻 내키지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캐릭터 파벨 니콜라예비치와 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는 데 확신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제가 정리한 바론 이렇습니다.
첫째로, 라스콜리니코프는 범행 전에 그 자신의 명철한 이성으로 분명한 결론에 도달한 바 있었습니다. "내가 이런 노파를 죽이는 건 죄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쏘냐와 함께 있을 때이건,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을 때건, "죄의식"이란 녀석이 그를 한시도 편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대지에 키스한 후, 법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게 됩니다. 반면 우리의 파벨 니콜라예비치는, 노파를 죽인 것도 부족해 collateral damage로 죄 없는 젊은 여성 한 명까지 해치고 나서도, 아무런 가책이 없습니다. 그가 사전에 라스콜리니코프를 들먹인 것도, 어쩌면 적발되지 않고 일생을 편하게 살기보다, 적정 시점에 죄의식의 발동으로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장엄한 최후를 맞이해 보자는 은근한 소망이 있었던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에게 대단히 실망스럽게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리도 바라마지 않았던, "비범인의 평정심"을 지닌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거죠.
둘째로, 그는 이 때문에 절망에 빠진다는 점에서 라스콜리니코프와 크게 다릅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의식 때문에, "신 앞에서 나 역시 별다를 게 없는 불쌍한 영혼이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지만, 파벨 니콜라예비치는 "과연 내 안에는 아무런 규범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는 수치심으로 괴로워합니다. 죄의식이 없는 존재는 우월한 비범인이 아니라, 짐승 같은 하등한 존재라는 각성을 그는 이미 하고 있었던 거죠. 요즘말로 하면, 그는 스스로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던가 하는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처벌을 라스콜리니코프와 다른 방법으로 집행합니다. 많은 사람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에게 존경심과 두려움을 품고 있었던, 비루하고 비굴한 이들 앞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커밍아웃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분노했는데, 그것은 사악한 범죄자에 대한 의분이 아니라, (작품에서 분명히 나오듯이) 모욕감에서 비롯한 행동이었습니다. 죄 지은 자를 처벌하라! 가 아니라, 이런 작자에게 그토록 오랜 동안 굽신거리고 산 억울함이 더 앞섰던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은 자라야 죄인에게 돌을 던질 텐데, 이 소소하고 구차한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파벨 니콜라예비치에게 돌을 던집니다. 마치 예수 옆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처럼, 그는 자신이 분명 큰 죄인이지만, 다른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는 희생양이기도 합니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굳이 큰 소리로 공표함으로써, 용기와 확신이 부족해서 살인만 하지 않았다 뿐 일상에서 영혼 팔기를 거리껴하지 않는 그 숱한 추악한 죄인들과 함께 운명의 저울에 달리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깨끗한 순교자로 혼자 죽은 라스콜리니코프와 다릅니다. 또 그의 옆에는 천사적 조언자인 쏘냐가 없었던 대신, "마부"라는 악마적 조력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차이이겠습니다.
사실 그는 운명의 파멸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마치 엄청난 파장과 뒷수습의 두려움 앞에서도 "진실은 여튼 밝혀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결말에서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는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습니다. 이 천역덕스러움은 느닷 동양풍의 남가일몽 고사에서 영향이라도 받은 듯, "모든 것이 꿈이었어."라는 다소 황당한 결말로 이어집니다. 아마 이 장치는, :"나는 도스토옙스끼라는 거장의 터치에는 못 미치는 하수입니다." 같은 자못 겸손된 태도를 취하는, 고리키 특유의 유머일수도 있고,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 존재를 건 파국의 속죄란, 감히 현실에서 수용할 수 없는 영웅적 결단일 뿐이라는 암시일 수도 있습니다.
<환영>
이 모든 것을 꿈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진짜 늙은 주인공 한 사람이 더 나옵니다. 포마 모솔로프는 구두쇠입니다. 자신 못지 않은 구두쇠이고 지난 시대의 낡은 규범을 자신에게나 주변에게나 강철 같은 태도로 강제하는 지독한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살아 온 죗값은 못난 후손을 보게 하는 식으로 치르는 게 하늘의 섭리인가 봅니다. 자신의 아들은, 말로는 그럴싸하게 "시대가 변했으니 다른 방법으로 재산을 쓸 줄도 알아야 우리 가문의 영향력이 더 커진다." 같은 궤변을 떠들지만, 내심은 그저 자신의 방탕벽을 합리화하려는 얄팍한 계산 뿐입니다. "저 녀석은, 제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맞아 죽었을 테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겪은 억압과 자기 부정으로 인한 내심의 상처 때문에, 망나니 아들에게 엄하게 굴질 못합니다. 바로 이 때, "당신이 취해야 할 현명한 방책이 뭔지 알려 주마!" 며 느닷 나타난 존재가 있습니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는데, 아마 저 앞 다른 무대에서 파벨 니콜라예비치가 만난 "마부"가 변장을 하고 나타난 놈일수도 있습니다. 포마 모솔로프는 그를 "인간-영혼"이라는 이름으로 일단 부르고 싶어하지만, 사실 이런 명명 속에 이미 정체가 드러나 버린 거나 마찬가지네요. 이반 카라마조프에게 (이복 동생) 스메르자코프가 자기 자신의 메피스토펠레스적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듯, 이 괴령 역시 마부나 비슷하게 결국 자신의 마음 한 켠에서 빚어진 의식의 덩어리입니다. 숨막힐 듯한 나르시즘으로 무장한 그이기에, 이 정체불명의 목소리에게, "당신, 짱이에연!"하고 탄성을 지를 수 있는 게죠(p58: 16).
<종>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이 단편에는 "크리스마스 주간"이란 부제가 없는데, 이는 소설의 배경이 빤히 나와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에밀레종 설화에도 나오듯이, 종이란 주조물이 제대로 오랜 세월 그 기능을 하려면 제작 과정에서 장인적 기술 못지 않게, 뭔가 초자연적이라 할 만큼 상당한 정성이 들어가야 하나 봅니다. 마을에서 대단히 큰 미움을 받지만 그 영향력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안티프 프라호프는, 저 대서양 북쪽에 위치한 섬나라가 빚어낸 고유한 구두쇠상 스크루지와도 비슷한 성격입니다. 그와 차이가 있다면, 크리스마스를 자신의 회심이 빚은 기쁨으로 그 아침을 맞게 된 스쿠루지와는 달리, 부활절 전야에 그토록 마음 한구석에서 평정심을 갉아 먹던 불길한 예감, "종이 깨질지도 모른다." 가 현실화되었다는 참담한 체험입니다. 사실 종소리는 그의 위신과 체면, "시장 당선"을 위한 전제조건이긴 했지만, 오히려 그 종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서는 안된다는 점도 이미 프라호프 자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종소리"는 본디 양심의 가책을 상징합니다. 만약 부활절 새벽에 종소리를 듣는다면, 이는 아마 그의 더 오래된, 제 인생의 기억에 켜켜이 쌓인 그 모든 죄악을 송두리째 들고 일어나게 했을 텝니다(영화 <스파이더맨3>에도 나오듯이). 종소리가 들린다면, 이처럼 그는 존재 자체가 붕괴했을 테고, 만약 안 들리면 이는 일시적으로 마을에서 자신의 체면이 깎이는 결과 정도에 그칩니다. 저는 이 결말에서 그는 짐짓 패배(남들이 모두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는 순간, 자신만은 종의 균열과 더불어 홀로 저주받았다는 죽음과 같은 수치를 느껴야 함)를 가장하지만, 층계를 내려가는 걸음은 안도로 가득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종이 깨어진 것으로, 그는 일시적인 죗값을 치른 것입니다. 그가 정말로 분노했다면, 워낙 악질의 성품인 이상 종지기 노인 루카에게 엄청난 분풀이를 하고 바로 해고했을 것입니다. 헌데, 왠지 모르는 사이에 종에다가 미심쩍은 짓깨나 했을 법한 노인을 그냥 넘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로맨스>
최소한, 연하의 소년이 연상의 여인(많이 연상은 아니지만)으로부터 충격적이라 할 만한 연정의 컴팩트를 접하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 황폐해진다는 설정은 투르게니예프의 <첫사랑>을 닮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소년은, 마치 여의도에 밀집한 금융가에서, 재빠르고 센스있게 배달과 퀵서비스를 전담하는 모 실존 인물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니면, 에드가 스노의 르포 <중국의 붉은 별>에 나오는 어린 홍군("홍위병" 아님!) 소년을 연상하게도 하죠. 장개석의 추격전에 당장 오늘 저녁이라도 생명이 날아갈 수 있는 위험 속에서, 셔츠 깃 하나를 세우는데도 온갖 멋을 다 부리는 스트리트- 스마트 타입. 일이 고되고 궂다 보니 얼굴에 묻은 때를 씻어낼 시간도 없지만, 그 와중에서도 타고난 외모의 맵시를 가꿀 생각에 여념이 없습니다. 어느 날 공장에서 갑자기 사고를 당하고, 이런 사고는 보통 신체일부가 불구가 되는 걸로 귀착이 잘 나지만 천만다행히도 그런 결과는 면했나 봅니다. 그런데 이건 웬걸, 어떤 누나(정도겠죠?)뻘 되는 여인에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쇼크를 입고, 어떤 육신의 상처 없이도 구제불능의 폐인지경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이런 설정에서 꼭 훼방꾼 연적으로는 군인이 등장하는데, 아마 자신이 갖지 못한 남성성의 총체를 상징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완껏 접근하다 보면 꼭 안되라는 법도 없고(신분이나 재산 따위의 벽이 있는지도 딱부러지게 안 나옵니다), 면전에서 거절을 당한 것도 아닌데, 여튼 짝사랑은 바로 파국으로 치닫고, 그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마치 서른은 넘은 듯한 찌들고 늙은, 생명의 불꽃을 잃은 듯한 외모로 바뀝니다. 작가가 하고자 했던 말은, 찬란하게 빛나는 청춘도 한 순간에 시들게 할 수 있는 그 찰나적 연정의 불운한 교차 따위가 얼마나 하잘것없는 원인인지를 지적하며, 우리네 인생의 그 숱한 격정과 환희 따위의 부질없음을 지적하고 잇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푸른 눈의 여인>
여기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목소리는 경찰관 조심 키릴로비치입니다. 어느 여인이 그를 찾아오는데, 사연이란 한심합니다. 매춘부로 등록해 달라는 거죠. 아이가 여럿이고 남편은 죽어서 생계를 꾸려 갈 도리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인을 믿지 않습니다. 자신의 타락과 음욕을 두루 채우고 손쉽게 돈도 벌 생각인데, 거짓으로 명분을 꾸려 대고 있다고 본 거죠. 하지만 우연히도 그녀의 이어지는행적을 지켜 보게 되고, 자신에게 털어 놓은 말들이 다 사실임도 확인합니다. 생의참상과 질곡 속에 어쩔 수 없이 몸을 팔게 되지만, 감춰진 내적 동기는 지극히 숭고한, 그러면서도 전형적인 러시아의 어머니상이었던 것이죠. 경찰관이란 직책이 제정러시아에서 대단히, 반민중적이고 잔인한 압제적 체제의 주구였다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리키는 이 조심 키릴로비치를 냉정하고 공정한 제3자적 조력자의 시야에 둠으로써, 민중 스스로 오해하기 쉬운 취약 계층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베풀고 있습니다. 여인을 단죄할 때, 그는 어리석은 대중의 손쉬운 군중심리에 매몰되지만, 다시 공정한 법집행자이자 심판관의 위치로 복귀할 때, 그는 사물의 진상을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쿨리나 할머니>
역자 이수경 박사님은 이 아쿨리나 할머니가 진짜 고리키의 외조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이라면 참 놀라운 일인데요. 막심 고리키 자신이 최하층 빈민 출신이니 가능성이 없지도 않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이 아쿨리나 할머니라는 존재를, 자신도 천대 받으면서 자신보다 더 못한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어떤 상징적인 존재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 할머니한테 빌붙고 사는 자들은 계층과 연령대도 다양합니다. 그 중에는 "변호사"도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민중을 보호하고 구호해야 할 지배계층이, 전혀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근로 대중에 기식하고 사는 기막힌 참상, 그 와중에서도 "어머니 대지"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체제의 모순과 병폐를 고스란히 자기 희생으로 떠받치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민중의 어떤 화신 정도로 해석했습니다.
<이제르길 노파>
같은 러시아 할머니지만 이분은 정말 "자유부인"으로 한 생을 화끈하게 살다가, 육체적 매력이 다했구나 싶은 순간 화류계 생활을 과감히 정리하고 조용히 명상적 정착 생활로 패턴 체인지를 했다는 점에서, 위의 아쿨리나 님하고는 차이가 많이 나죠(정도가 아니라 극과 극). 러시아는 우리가 알다시피 이 무렵 제정 체제로 인근 나라와 민족들을 많이도 괴롭혔습니다. 한때는 더 강력한 국력으로 볼가 강 유역을 넘봤던 투르크 제국의 국민, 루마니아인, 뱀처럼 사악하면서도 "그리스인이 무슨 상관이라고 제가 나선" 폴란드 귀족, ... 등등 해서 거쳐간 남자만도 셀 수없이 많습니다. 매춘부 생활은 했지만, 돈을 푸대자루로 들고 와서 그녀의 머리 위로 퍼 부은 늙은 부자 영감에게 끝까지 몸을 허락하지 않은, 강단과 주관이 강한 여인이었죠. 이제 그녀는 인생의 황혼에 서서 마치 초자연적 염력이나 발휘하듯, "네 눈엔 저 먹구름의 그림자가 그림자로만 보이디? 저건 불멸의 라라라는 녀석이다." "저 빛깔이 푸른 색이더냐? 하긴 이제 내 눈에는 색이 안 보이지만 아마 그럴게다. 저건 제 손으로 제 심장을 꺼내 흩뿌린 단코의 자취지."
역자는 라라를 두고 극단적 이기주의자, 단코를 이타주의자, 그리고 이베르길 노파를 그 가운데 선 리버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노파의 일생을 거쳐간 그 수많은 남자들 중에, 특별히 노인의 영혼을 홀렸던 남자 둘의 이상형을 그리 우화적으로 풀어 놓은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다른 말로, 라라와 단코는 같은 인물의 다른 두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대중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범한 존재를 중상 모략하고 저주합니다. 그 비범한 존재가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면, 그는 무리에서 추방당한 파문자가 되지만, 그렇다고 그 불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우월성의 증거인데, 범속한 무리들 사이에선 오히려 저주의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단코 역시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추종자들로부터 "우리를 잘못 인도하고 있다!"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심장을 꺼내들고 순교를 한 그 순간부터, 그는 정의와 박애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피맛을 보아야 대중은 유순해지고, 자신의 분수를 알게 됩니다. 자유로운 여성 이제르길은 그 모든 어리석음을 경멸하고, 자신에 내재한 모성을 발동시켜 그 가장 우수한 유전자만을 남겨 자신의 힘으로 배태할 것을 열망합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오로지 비범한 남성과의 결합이었으며, 혹은 그녀 자신에 내재한 아니무스에의 간절한 희구였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라라와 단코는 결국 이제르길 노파 영혼의 가장 빛나는 한 귀퉁이를 잘라 빚은 펜던트였다고 하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