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취업지도 - 당신이 원하는 채용에 관한 모든 정보 비즈니스 지도 시리즈
취업포털 커리어.한국비즈니스정보 지음 / 어바웃어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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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북이란 어느 분야에서도 필요합니다. 아무리 패기가 하늘을 찌르고 의욕이 가상하다고 해도, 자신의 능력을 펼칠 마당이 어떤 규칙에 의해 돌아가는지를 모른다면 그 노력은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도전자는 해당 분야의 정황을 정확히 알고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요즘 같이 취업이 어려운 세상이라면, 그를 참고하고 기준으로 삼으며 궁금한 내용이 있을 때마다 꺼내어서 들추어 볼 기업 정보의 총집결 소스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원하는 기업에 들어가기 위한 최초의 절차가 어떤 것을 요구하는지 알아야, 그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바로 나라는 인상을 정확히 주고 입사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첫째, 대한민국 취준생에게 선망이 되는 거의 모든 기업들의 정보가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최근의 수익 현황, 지배 구조(이런 정보가 다 나온다는 게 너무 놀라웠어요), 기업의 연혁, 사풍(社風), 비전, .... 한정된 지면에 이렇게 많은 정보가 다 담겨 있다는 게 경이롭기도 하고, 볼 때마다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라 서재에 꽂아 넣고 나서도 자꾸만 다시 꺼내 보게 되더군요.

 

둘째, 그렇게 총망라된 정보가, 현재 인포그래픽의 감각과 기술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시각적 아름다움과 기법을 총동원하여, 오로지 독자의 가독성과 편의에 초점을 두고 400여 페이지에 걸쳐 서비스를 펼치고 있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고, 소통이 되지 않는 정보는 아무리 높은 가치와 희소성을 지녀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정보 자체의 가치와 책 편집의 미학적 수월성 중 어느 편이 더 빼어난지 그 판단이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셋째, 특히 취준생에게는 목전에 다가온 입사 시험을 통과할 구체적인 조언이 필요합니다. 이 책은, 정보를 그렇게나 많이 제공하면서도,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할 취준생들에게 직접적이고 유용한 지침을 친절히, 자세하게 제공해 줍니다. 아무리 정보가 많아도, 그것을 날것으로 삼킬 수는 없습니다. 많은 취준생들은 스스로 알아서 취업 전략을 세울 만한 처지가 아닙니다.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는 보다 고급의 전략을 수립하게끔 많은 1차 정보를 주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당장 내일이라도 면접장에 들어가서 남들 하는 만큼은 할 수 있게, "이 기업은 인재의 이런 점을 중시한다.". "기업 철학이 이러니 이런 분위기에 미리 적응해서 대처해야 한다.", "압박 면접, 말꼬리 질문을 잘 던지는 기업은 이런이런 곳이다.", "이 기업에서 요구하는 시험 요강, 자격 요건, 절차는 이러이러하다."를, 정말 필요하다 싶은 부분만 잘 찔러 주고 있습니다.

 

넷째, 다른 책들은 이런 편집이 아니던데, 유독 이 책은 "기업들의 직원 대우와 혜택"을 책 말미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취업 시장이 기업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다고 해도, 응시자 역시 가고 싶은 회사, 넣어 준다고 해도 마다할 회사가 있을 것입니다. 내 능력에 비해 대우가 열악하다거나, 개인 사정상 이 부분이 충족 안 되면 근무가 곤란한 곳도 있겠지요. 그런 사항을 미리 필터링하고, 취업 공부가 힘들 때마다 동기 부여도 스스로에게 하게끔, 이 책은 자세히 직원 급여-복지에 대해서도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게 취업 준비 단계에서 당장 필요한 점은 아니기에, 책 끝에 구별된 항목으로 편집한 거겠죠. 독자와 수요자의 마음을 잘 배려했다고나 할까요.

 

요즘 가장 어려운 분야가 증권업입니다. 나이 마흔에 그간 실적도 좋았던 일등 부장이, 고작 월 사백대 급여에 그나마 전면 성과급 체제로 바뀐 체계의 압박을 감당 못하고 자살하는 곳이 이 분야입니다. 책에 잘 나와 있지만, 아예 대졸 신입 사원 공채를 하지 않는 곳도 있습니다. 기존 베테랑들도 목표치 채우느라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사람도 내 보내는 판에, 어느 시절에 초보에게 일 가르치고 업무 배당을 하겠습니까.

 

책에 나와 있듯, 이 업계는 현재 일반인 아닌, 자산가들을 향해 마케팅 역량을 총집중하는 추세입니다. 예로 KDB 대우의 프라이빗 뱅커 양성 과정을 꼽는데, 신규 채용 규모가 그만큼 줄었음을 잘 반증합니다. 직원 재교육, 일류 증권맨으로의 업그레이드가 대세라고 하겠습니다. 책에는 "인문 소양을 지닌 인재 중시"라는 대목이 있는데, 준비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다만 이 분야가 뭘 하는 곳이고,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 증권 회사에 들어 올 신입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 먼저 지원자 본인이 확실한 인식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인문"보다 더 우선이죠.

이공계 출신은 그나마 지원 여력과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취준생들이 잘 모르는 기업 중에, 이 책은 경북 봉화에 소재한 (주) 영풍을 소개하고 있네요. 금속, 화공 계통을 전공한 4년제 공과대학 졸업자라야 하며, 최근 대단한 활황을 보이는 이 분야의 실정을 감안할 때 추천 대상이라 생각합니다.

 

한전, 한수원 등은 꿈의 직장이죠. 이런 곳들은 종래 필기시험만 잘 통과하면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그 필기 시험의 통과가 무지 어려워서 문제였지만요). 그런데 최근 이런 곳들도, 응시자의 다면적 적성과 자질을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정보입니다. 자세한 건 책 해당 부분을 참조해 보십시오.

 

소셜커머스야말로 요즘 젊은이들에게 새로이 관심사로 부상되는 영역입니다. 물론 젊은이들의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매체이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취업 시장에서도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다는 뜻입니다. 선입견과는 달리, 임시직 위주로 인적 자원을 끌어다 쓰는 곳만은 아닙니다. 요즘 같은 열악한 형편 속에 상대적으로  폭 넓은 신규(물론 정규직) 채용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는 진취적이고 신선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상입니다. 기질 뿐 아니라 구체적인 청사진과 정보를 사전에 갖추고 면접에 임해야겠습니다.

 

제지업 분야에는 일상에서 친숙하면서도 내실 가득한 기업이 많이 포진해 있습니다. 구 전주제지였던 한솔제지는 이병철 씨가 직접 세운 기업으로, 모그룹인 한솔이 1990년대 말 PCS 사업 실패로 다소 社勢가 위축된 모습이지만, 여전히 이 분야 소리 없는 강자로 군림합니다. 이름이 헷갈리기 쉬운 전주페이퍼는 전혀 별개의 중견 기업인데, 신문 용지 제조 분야에서 발군의 위상입니다. 멀티형 인재를 중시한다는 점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문국현 전 사장 덕에 더 유명해진, 유일한 선생의 遺業 (주)유한킴벌리, (주)깨끗한나라 등도 건실한 업체들이죠.

 

뿌린 만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정직한 노력을 투자한 이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과실을 품에 안을 것입니다. 당장 힘들어도 자신에 대한 애정과 세상을 향한 열정을 놓지 않는 젊은이에게, 좋은 직장에의 합격, 진출, 그리고 성공은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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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곳이 글로벌이다
이영구 지음 / 이답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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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업인의 소명은 돈을 버는 일입니다. 우선은 혁신과 창조를 통해 영속적 기업(going concern)을 꾸려 나가고, 창출한 이윤을 통해 자신의 땀과 노력과 창의성에 대한 대가를 받아 내고, 자신의 기업을 위해 애써 준 직원에게 합당한 보수를 치러 주고, 주주와 채권자에게 만족할 만한 배당, 약속한 바대로의 이자를 지급하는 게 기업가의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 대한민국 경상남도 고성 출신의 어느 기업인은, "돈을 못 벌어도 좋다. 내가 고객에서 약속한 가치를 지키고 만들어 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가치 경영, 고객 중시"를 입에 담지 않는 기업은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문제는 실천입니다. 고작 단가로 몇 만원이 달린 결정의 순간에서도, 기업은 자기 손에서 빠져나가는(나갈 수 있는) 돈을 보며 손을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말과 현실의 괴리는 광년의 거리에 필적합니다.

 

여기, 당장 손해를 보아도 내 기업의 가치와 고객과의 신뢰를 지켜 나가고야 말겠다며, 세상을 성실과 신의로 물들여가는 분이 있습니다. 브리지 쥬얼리, 패션 쥬얼리의 세계적 트렌드를 선도하는 뉴욕 한복판에서, 타 브랜드를 압도하는 시장 점유율과 고객 사이에서의 평판으로, 경쟁자, 소비자, 시장 관측자 모두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한국인 출신"의 "남성" 기업인이 있습니다. 메트로섹슈얼의 외모라도 갖춘 분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나이는 이제 초로에 접어들고, 불룩 나온 복부가 후덕한 인상을 주며, 머리는 모두 밀어 숱이 안 보이는, 전형적인 동네 어르신 같은 모습입니다.

 

이런 분이, 세계 유행의 첨단을 걷는 뉴욕을 석권했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사실 현지의 전문가들도 자신이 보고 겪고 만지고 평가까지 했던 현상에 대해, 내심으로는 아직 못 믿고 있는 눈치입니다. 그만큼 최 회장이 해 낸 일은 놀랍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그의 태생지와 지척의 거리(글로벌 관점에서는 지척일 뿐이죠)에 사는 우리들은, 그런 놀라운 성취를 일군 분의 함자도 아직 채 모르는 처지입니다.

 

다시 그의 모습이 실린 사진을 들여다 봅니다. 그는 비록 전형적인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백인이 지배하는 세계의 수도 번화가 한복판을 걷는 보무의 당당함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풍채입니다. 당당한 체구에, 발걸음은 힘이 넘쳐 보입니다. 이런 자신감과 건전한 위엄은 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요? 내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기업인은 아닐지 모르나, 가장 올바른 방법을 쓰는 경영인이요, 고객에게 가장 큰 만족을 주는 판매자라는, 자타 공인의 평가에서 비롯한 것 아닐지요.

 

쥬얼리 산업은 고가 시장을 형성하는 "퓨어 쥬얼리", 저렴하나 알뜰하게 입는(걸치는) 이의 매력을 꾸려 주는 "패션 쥬얼리", 이 중간지대에 위치한 "브리지 쥬얼리"로 나뉩니다. 최 회장은 뉴욕 한복판에서, 메이시 등 유력 백화점에 당당히 NADRI라는 브랜드로 출점하여, 업계 관련자와 뉴요커 모두를 놀라게 한 굴지의 기업인입니다. NADRI, 한국인이라면 이 말의 뜻이 뭔지 모를 이가 없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으로 공감하는 그 모든 따뜻하고 건전한 심상이 이 단어 안에 들어 있고, 최 회장의 놀라운 사업 성공과 제품의 완성도는 이 단어를 이제 세계어로 만들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목걸이의 가격이 300불이라고요? 3,000불이 아니고요?"
"고객님, 300불이 맞답니다."

 

그의 제품을 구경하고 집어 든 손님들은 그저 호기심에 끌리거나 만족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입니다. "어떻게 이런 품질의 제품이, 고작 이 가격밖에 나가지 않는단 말인가?"

 

최 회장이 처음 뉴욕 시장에 진출했을 때, 오늘날과 같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기는 고사하고, 시장에서 평균수익이나 사업자로 남기에도 거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고성 출신 촌사람이 무슨....." 한국에서라면 특히 비웃음이나 사기 딱 좋은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그냥저냥 정미소집 아들에, 같은 또래라면 코나 질질 흘리고 다닐 나이인 10살에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다 망한 경력까지 있는, 봐 줄 것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다못해, 버젓한 학벌조차 없는(실업계 고교에 초급 대학 출신), 기술이나 열심히 배워 배나 곯지 않으면 다행인 처지로 여겨졌다고나 할까요.

 

그가 취한 선택은 대단한 역발상이었습니다. 그는 시장 조사도 하지 않고, 경쟁 업계의 실태와 전략분석도 하지 않았습니다(어차피,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요?). 그가 내린 결정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저 고객만 생각하고,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

 

그 고집이 통했습니다. 아니, 정성과 진심이 통했습니다. 고객들은 남다른 디자인과 품질, 그리고 무엇보다 "가격"을 보고, NADRI를 눈이 아닌 가슴에 새겼습니다.  세련된 디자인 감각 역시, 라이벌들의 스텝을 곁눈질하지 않고 "내가 고객이라면 어떤 제품을 꿈꿀까?"만 생각하는 마음에서 걸작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품질? 그는 본래의 전공이 아니었지만, 엔지니어로서 언제나 자기 분야에서 최고였기에, 엔지니어링 분야 공통에 해당하는 "최고 품질의 달성 이치"를 그리 오래지 않아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가격이었습니다.


아쿠아마린 같은 제품은, 제조원가의 1/5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팔아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팔면 팔수록 손해인 장사를 뭐하러 할까요? 최 회장은 중역들과 이해관계자를 향해 단호히 말했습니다. "NADRI가 고객에게 약속한 바는 그게 아닙니다. 난 이 가격으로 고객들에게 서비스하겠습니다."

 

"저 사람 이제 망했구만!"

 

천만에요. 최 회장은 지금 뉴욕 패션가를 지배하는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미국 동부 뉴욕 주의 그 뉴욕, "빅 애플"이고 다른 곳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뉴욕의 셀레브리티입니다. 모두가 경탄하고, 모두가 존경하고, 모두가 알아 모시는 유력 인사입니다.

 

그러나 그가 오늘도 잊지 않고 있는 건 바로 고객입니다. 언제나 초심과 겸손함을 잊지 않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내세우면 세상의 이치를 놓치게 된다."

 

당신은 최영태 회장을 알고 있습니까? 모르신다면, 세상의 중요한 이치 중 한 가닥을 놓쳐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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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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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 읽기 전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에서 "... 그래서 사튀르닌은 칼을 들고 푸른수염의 침실로 돌진했다. 그가 결코 살인마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라는 대목을 읽고, 여러 이유에서 고개가 갸웃해졌습니다.


- 그런다고 뭐가 증명이 되나? 증명하려는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 제법 내공을 갖춘 저술가라고 해도, (여성의 경우) 소위 "팬심"에 빠져 作中에서 무리한 시도를 하는 수가 있다. 어려서부터 이 캐릭터에 너무 깊이 빠져 왔던 나머지, 이제는 돌아 와 거울 앞에 그저 조용히 서야 할 중년(어느새 그렇게 되었죠)의 노통브가 드디어 뒷감당 못할 일을 벌이는구나.
- 이미 닫힌 결말이 굳은 이 설화(페로 이전에도 근원 설화는 존재)를 두고, 근사한 어떤 재해석의 시도도 무위로 끝날 것이다.


반면, La Barbe bleue를, 이름도 긴 "돈 엘레미리오 니발 이 밀카르"라는, 스페인 귀족으로 국적과 혈통을 바꿔 놓은 것은 정말 기발했습니다. 이 돈 엘레미리오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무도 고귀한 혈통이라, 어차피 누구와 결혼해도 신분을 떨어뜨리게 된다."
"귀족은 '스페인 귀족'이라고 해야 어색하지 않다. '프랑스 귀족'이라니,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리는가?"
"헨리 8세라니? 어떻게 감히 그 천박한 튜더 녀석과 나를 비교할 수 있나?"


월세방을 구하러 왔다 사라진 8명의 여인은 다 평민들인데, 어떻게 그녀들을 사랑할 수 있(었)냐고 하니, 그가 내놓은 대답이 저 첫번째 것입니다. 그 뒤엔, 어설픈 귀족 행세를 하는 자들보다, 차라리 소박한 평민과의 결합이 더 낫다는 말도 이어집니다.

두번째 말도 틀린 게 아니죠. 프랑스는 대혁명 이전에도 신분 질서가 문란하여, 귀족의 족보도 금전으로 사 들이고 칭호와 작위를 사칭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반면 스페인은, 비록 그 때문에 역사 발전이 가로막혔건 아니건 간에, 누구의 조상이 어디서 뭐 하던 자였는지는 명확했고, 한번 틀어진 기득권이 좀처럼 혈통의 손아귀에서 놓여 나지 않았던 까닭에, 계층 이동이 불가능했던 건 확실합니다.

감히 그의 가문이, 랭커스터와 요크의 영향을 고루도 받은 튜더를 우습게 볼 격(格)과 위신을 갖추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여튼 "그 튜더"의 행동거지가 지극히 천박했던 것도 도저히 부인 못 할 "역사적 사실"입니다.

사튀르닌이, 시중에 파다한 나쁜 평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 놓는 방을 얻기로 결정한 건 여러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첫째, 일단 그런 나쁜 소문을, 방을 구하러 면접을 보러 가지 전까지는 듣지 못했다. (이유가 있는 것이, 속물스러운 경향이 상당히 적은 아가씨였고, 다음으로 그녀는 프랑스 토박이가 아닌 벨기에인이기 때문이죠)


둘째, 그 정도 가격(오백 유로라고 하네요. 물론 배경은 현대 프랑스입니다)에 그 정도의 호사와 편의, 쾌적을 누릴 수 있는 방은 파리에 없다.


셋째, 그녀는 도무지 겁이 없고, 오히려 그런 나쁜 소문의 주인공을 한번 만나서 제 할 소리를 퍼부어 주고 싶은 당찬 기질이 있다.


넷째, 그녀는 천박한 호기심 때문에 스스로 맺은 약속(집주인인 돈 엘레미리오의 암실, 즉 사진 현상실에 들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지금까지 여덟 명의 젏은 여성 세입자가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을 깨지 않을 자신이 있고, 호기심에 굴복하기엔 너무 시니컬한 성격이다(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난 관심 없어)


다섯째, 그녀는 사실, 아주 옛적부터 "푸른 수염"에 푹 빠졌던 아멜리 노통브의 분신이고, 지금 작품 속에서 이 푸른 수염을 열심히 인터뷰도 하고 다른 미션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농담입니다)

푸른 수염, 아니 돈 엘레미리오는 자신과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위인입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의 질서는, 레콩키스타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규범으로 확정되었던 그 가치관, 그 제도, 그 이상과 신념과 명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는 골수 가톨릭 신자요, 다만 현대의 썩고 타협적인 미사에 나갈 수 없어 전담 신부를 불러 자기 집에서 예배를 올립니다.


"왜 미사에 나가지 않으시죠?"
"미사가 내게로 오니까."


그는 집 안에서 여러 문헌과 서적을 탐독합니다. 그 중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녀 사냥이 한창일 때, 토르케마다로 대유(代喩)되는 종교 재판 기록도 포함됩니다. 그냥 재판 서류를 읽어도 재미는커녕 독해 과정에 엄청난 고통이 따를 만한데, 하물며 수백 년 전의 마녀 처단 기록이라니! 사튀르닌은 묻습니다.

"그 재판이, 이전 시대의 야만과 비교하여 엄청난 진보라고 하셨는데, 그 재판을 거쳐서 살아남은 마녀가 얼마나 되나요?"
"한 사람도 없소."
"풋, 정말 엄청난 진보군요."
"어차피 그 신명(神明) 재판은, 마녀를 마녀로 밝혀 내었을 뿐이니까!(그런 마녀들이 재판이라는 호사를 누린 게 어디냐는 뜻)"

돈 엘레미리오는 사튀르닌과 한 치의 양보 없이 치고받습니다. 그 배경은, 바로 이 유서 깊은 가문의 전통과 사치가 압축되어 있는 저녁 식사 자리입니다. 식사가 준비되면, 하인 멜렌이 와서 정중한 어조로 사튀르닌에게 주인의 초청 의사를 전합니다. 물론 사튀르닌은 거절할 수 있습니다. 초청에 응하고 그 비싼 한 끼 식사를 대접받아도 그녀가 추가로 부담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어느날 정찬 자리에서, 마침내 스스로를 신이라고까지 칭하는 엘레미리오의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튀르닌은 쏘아붙입니다. "정신병원에 가기 딱 좋은 분이시네요!" 사실 사튀르닌은 그 전, 첫 만남 자리에서 "왜 자살하지 않으세요?"라 는 더 심한 말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렸을 때 급사했다는 당신 부모님은 실제로 당신이 죽인 것 아니냐고까지 몰아 붙입니다. 고독한 귀족은 강력히 부인하는데, 사실 그는 물어보지도 않은 질문에 애써 대답을 하지 않을망정, 거짓 증언을 하지는 않습니다. 귀족이니까요.

이런 발칙하기 짝이 없는 사튀르닌에게, 엘레미리오는 정직한 고백을 털어 놓습니다. "난 당신을 사랑하오. 운명인 것 같소." 일단은 처음 면접 자리에서부터 반했다고 둘러대지만, 사실은 사튀르닌이 색채로서의 "노랑"을 거론했을 때 본격적으로 눈이 번쩍 뜨였던 것입니다. 물론 키가 크고 날씬한 몸매(엘레미리오는 "표범 같은 당신의 몸을 상상했소."라고도 털어 놓습니다)를 지닌 사튀르닌의 외양에도 매혹된 바 있었을 겁니다.

야만과 문명을 가르는 첫째 조건을, 날로 먹느냐 요리를 해서 먹느냐로 꼽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지극히 까다롭고 세련된 취향의 귀족은, 그래서인지 직접 요리를 해 먹기도 합니다. 사튀르닌에 대한 그의 첫째 고백은, 손수 만든 생토노레를 꺼내 귀가하는 그녀에게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생토노레를 내밀며 사튀르닌에게 뭐라고 하는지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케이크에 에스파냐의 위신을 부여하기 위해
부글부글 끓는 캐러멜에 금 잎을 몇 장 슬쩍 넣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내가 타인의 취향에 열려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꾹 참았소."


마지막 줄이 얼마나 귀여운 말인지 한번 보십시오. 사실 엘레미리오는 에스파냐의 위신 부여(소위!)라는 동기 말고도, 생토노레에 금을 집어 넣어야 할 더 강력한 내적 욕구가 있었습니다. 다만 스포일링이 되므로 여기에 제가 적을 수는 없네요.  귀족들에게 금 흡입이라는 오랜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 외에도, 이 절박한 귀족은 여태 자신이 살아 온 이유(적은 나이도 아닙니다)를 증명하기 위해 ars magna(라틴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위대한 기예"라는 뜻입니다. 이 맥락에서 어떤 뜻인지는 이상해 선생의 역주를 보시구요)를 드디어, 드디어 이 "제 5원소"에게 당장 베풀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반칙입니다. 그렇게 귀착되어야 할 마땅한 운명이긴 한데, 그런 방법으로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왜 자기 아들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죽게 했을까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려면 그냥 해 주면 안되나요? 대가를 치러야만 해 주겠다니 장사꾼이나 마찬가지군요."

사튀르닌으로부터 이 말을 들었을 때, 돈 엘레미리오는 속으로 뜨끔했을 겁니다. 그는 끝에 가서 "한 번도 그렇게 생각(무엇인지는 스포일러라서 적을 수 없습니다)해 본 적 없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소"라고 합니다. 그는 착각과 환상 속에, 자신의 가문을 "그리스도의 핏줄'이라고 여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왜 제가 이 리뷰에 이 말을 썼는지 다시 생각해들 보셨으면 합니다.

그의 혈통은 솔직히 좀 수상쩍기도 합니다. 아랍 어는 읽지를 못하고(이베리아 반도의 자랑스러운 귀족치고는 좀 부끄럽습니다), 조상은 카르타고에서 건너온 카탈루냐인인데, 다만 그도 그렇고 그 선조도 그렇고 에스파냐 인이 되기를 선택한 카탈루냐인입니다(이런 예는 너무도 많습니다. 꼭 민족 반역자로 볼 건 아닙니다^^ 그건 우리식 기준이구요). 그러니 순전히 혈통으로만 보자면 꼭 돈키호테와 자신을 동일시할 이유는 없습니다(라만차는 어디까지나 마드리드의 영향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돈키호테의 특징을 취해서 거기에 15를 곱해 보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가 나올 거요."

라고 말합니다.

사실 여기서, 돈키호테를 "돈 엘레미리오"로, 그리스도를 "돈키호테"로 바꾸어 놓아도 이 명제는 (돈 엘레미리오 본인에게와 소설의 맥락에 한해)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돈 엘레미리오에 225를 곱하면, 이번에는 그리스도가 나오는 셈입니다.  요 다음 장면에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므로, 이는 아주 일관성 있는 내러티브입니다.

사튀르닌이 언제나 직설적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자기 생각에 상대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한다 싶을 때, "당신의 말은 기묘한 인과성을 지니고 있군요."라며 점잖게 꼬집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과연 돈 엘레미리오는 광인일까요? 그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정말 정신의 건전성(sanity)이 염려되기도 합니다.


"우리 가문이 이리 프랑스로 망명 온 건, 조상 중 한 분(할아버지나 조부라고 하면 될 걸 굳이 "조상"이라고 하네요)이, 프랑코 총독을 급진 좌파(헉!)로 취급했다가 그만 그의 눈밖에 나고 말았소."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적들 역시 우리를 눈꼴시어 한다오."

노통브 특유의 유머가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프랑코를 좌파로 취급할 정도의 완고한 우경이라면, 대체 본격 좌파는 어떻게 본다는 뜻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유를 모르겠다니!

그러나 돈 엘레미리오는, 사튀르닌을 반하게 할 만한 섬세한 위인이었습니다. 생토노레를 손수 만들어 먹인 데에 이어, 이번에는 자기가 직접 바느질을 하여, 쓰다듬으면 손 끝이 미안해 질 만큼의 질 좋은 샌노란 안감과, 만든 이의 섬세함과 장인적 정성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촘촘한 바느질이 인상적인 치마를 선사합니다. 어쩌면 귀족의 본질적 정의는, 그 족보사항이 아닌 기질과 취향, 행동거지, 사고방식의 섬세함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은 진짜 귀족이고, 나는 그와 사랑에 빠져야만 하겠다!

그래서 사튀르닌은, (제가 이 리뷰 맨 처음에 적었듯이) 식칼을 들고 (별로 뭘 걸치지 않은 잠옷 바람으로 "거의 벌거벗다시피[엘레미리오의 표현입니다]") 푸른 수염의 침실로 쳐들어 간 겁니다.

"당신 같은 이가 살인마일 리 없어!"

이 소설의 주제는 색(色)의 탐구입니다. 색상표를 보면 색만큼 선명하고 똑 부러지는 게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런 색 역시 빛이 사물과 부딪혀서 내는 파장의 장난일 뿐입니다. 그저 우연의 산물입니다. 책에 그런 말은 없습니다만, 영미인들(타 백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은 yellow란 단어에 "비겁한. 천한"의 뜻을 그대로 집어 넣고 사용하지 않습니까? 반면 약간의 채도와 명도 차가 있을 뿐인 gold에 대해서는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말입니다. 똑같은 백발인데도 grey hair와 white hair가 현저한 차이의 느낌인 것처럼요.

사튀르닌은, "색을 몰라도 사는 데에는 전혀 지장 없다. 색을 두고 일본인들은 그래서 쾌락의 동의어로 쓰기도 한다(그건 그녀의 착각입니다. 당연 중국의 구법승들이 오리지널이죠. 일본이 여기서 왜 나옵니까). 그러나 색을 모르면, 궁극의 쾌락은 결코 모른 채 생을 마치게 된다."고 합니다. 엘레미리오는 "그건 미처 몰랐던 바지만 멋진 이야기"라며 동의합니다. 수수께끼(무엇이었을까요?)를 풀어낸 사튀르닌에게, 이 귀족은 이제 전폭적인 인정과 대등한 지위를 허(許)합니다. 이는 그로서는 영혼의 동요를 불러일으킬 만큼 중대한 결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른 결과는,... (책을 직접 읽어 보십시오)

"니발 이 밀카르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문 바깥의 사람은 모두 평민이라오. 어느 가문이 감히 우리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할 수 있다는 말이오? 나는 그런 망상보다는 차라리 우연이 좋소."


결국, 색(色)도 그렇고 공(空)도 그렇고, 모두가 우연일 뿐입니다. 그 우연 속에서 성(聖)스러움을 발견하는 능력을 serendipity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암실은 비어 있기도 하고, 일곱 빛깔과 나머지 두 색채의 결합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할 것입니다. 돈 키호테와 연쇄 살인마 사이에 그리스도가 있을 수도 있고, 번화가를 지나가는 어느 새침한 아가씨의 백 안에서 느닷 세상의 종말과 기적이 동시에 튀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사튀르닌은 으로 변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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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고 백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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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잭 리처의 정신적 본향은 어디까지나 군대입니다. 그는 아직도 특수 부대 대장으로서의 정체감이 자아의 최우선이며, 그를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이들도 군인들이고, 그의 가장 자랑스러운 행적도 군인으로서의 그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는 전역 후에는 영낙없는 떠돌이 신세인데, 사실 사내로서 멋진 그의 모습에 감탄하기도 하면서도, 대체 왜 저 정도 되는 사람이 저렇게 살아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여튼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군대로부터, 그 중에서도 모부대發로, 커다한 위기가 바로 그에게 닥칩니다. 하나는 그가 특수부대원 시절 모 민간인(이라고는 하나 질 나쁜 깡패입니다)을 구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 또 하나는 서울(!)에 군인 신분으로 체류하던 시절(군인 신분이 아니었으면 큰 문제가 안 됩니다), 한 여인과 간통 끝에 아이 하나를 낳게 한 사건입니다. 이상하게도 이 두 사건이 동시에 소송의 형식으로 그의 발목을 옭죄어, 그는 간만에 접근한 부대 소재지로부터 멀리 떨어지라는 압력을 받습니다.  

 

범법을 저질렀으면 공권력으로부터 구금이나 출두의 압박이 가해져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그를 최우선적으로 찾은 물리력은 "당장 이곳을 떠나." 같은 어설픈 협박입니다. 누가 이런 시도를 했던 간에, 그 방법이 옳지 못했습니다. 옳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이유 중 하나는, "FIGHT OR FLIGHT"의 상황에서 그는 언제나 "맞서 싸우는 편"을 선택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가 대단히 치밀하고 잘 돌아가는 두뇌를 가진 이여서, 사리에 맞지 않다 싶은 상황에 대해서는 겁에 질리기보다 "왜 이런 현상이 내게...?" 같은 의문을 먼저 품는다는 점입니다. 

 

람보(의 완력, 용기)와 셜록 홈즈(의 두뇌)를 결합한 사기 유닛 답게 그는 이 거대한 음모에 맞서 싸우는 편을 선택하고, 반(半) 자진(自進)하 여 영창에 구금되었다가, 같은 시설에 수감된 터너 소령(시리즈 역대급으로 꼽아야 할 미모의 소유자인데다, 사리 판단도 참으로 현명하게 돌아가는 여성입니다. 리처와의 두어 번 정사신을 통해 우리 독자에게 주는 서비스의 강도도 녹록지 않습니다)과 함께 동반 탈옥하여, 모든 정보망(카드 결제 내역, 항공기 탑승 이력, 거대 호텔 체크인 사실 등등)을 손 안에 넣고 둘을 추적하는 가공할 적을 따돌릴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역으로 압박하기까지 합니다.  

 

리 차일드의 이 시리즈를 가리켜 페이지 터너라고 하는 건, 단지 스토리 전개상의 재미라든가 캐릭터의 매력 형성에 과다 투자된 자원 따위의 덕분이 아닙니다(매력이 고작 그것뿐이었다면 이 시리즈가 그리 장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건의 진행은 최대한 빠르게 하되(따라서 간결하고 호흡 짧은 문장이 사용됩니다만), 리처의 심리 묘사(특히 상대의 육체적 공격 전술을 미리 읽고, 자신의 대응 방법을 연구하는 모습)나,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풍경, 배경의 묘사(외계인이 보았을 때, 이 별의 생명체들은 음료수나 손톱 관리가 외과 시술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여길 것이라는 등의 표현),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블랙 유머와 repartee가, 마치 이 소설이 헤밍웨이식 간결체로 일관하는 듯한 착각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는 독자에게 안기기 때문입니다. 밀도와 깊이 있는 내용 이해를 버거워하는 독자에게도 그 수용 범위 안에서 선택적으로 쾌감을 안겨 주고, 소설에 푹 몰입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그만의 깊이를 따로 선사하는 데에서, 리 차일드의 작가적 역량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과연 15세 소녀 사만다는 잭의 딸일까 아닐까? 악당들의 하수인들을 마침내 거리에서 퇴치하고, 이 가공할 음모 최종의 mastermind를 마침내 밝혀 내는 과정 말고도, 이런 자잘한 재미를 곳곳에 심어 놓아 독자가 대체 딴 데 정신을 못 팔게 만듭니다. 페이지 터너가 아니라 페이지키퍼입니다. 빨리 읽어내고 나면 그 아까움과 아쉬움을 어찌할까 하는 행복한 걱정에, 아끼고 살펴 가며 책장을 넘기게 하기 때문이지요.

 

아주 불만이 없는 건 아닙니다. 소송 사건(그 중 하나는 형사사건인데요)의 개시와 진행이, 변호사(군인 신분이라고는 하나)들의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붊명확할 수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한때 그렇게나 리처를 옭죄던 압박이, "편하게도(리처의 해명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던 당국자들의 표현이기도 하죠)" 한순간에 그리 "관련 서류 열람"만으로 해소될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리뷰에서  결말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결국 "태산명동에 서일필"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들었구요. 정경호씨의 시원시원한 번역은 언제나 감탄스럽지만(번역문 같지가 않습니다), "파슈툰"처럼 굳이 우리 눈과 입에 익은 고유명사를 "패쉬턴"으로 쓸 필요가 있었을지요. I'll see what I can do를 "내가 할수 잇는 게 무엇인지 찾아 볼게요."라고 옮긴 건 좀 기계적이라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불만은 다 잠재울 수 있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오래 전 원서로 한 번 읽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독자인 저에게도, 이 한국어판은 여전한 쾌감, 스릴러가 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만족을 다 안겨다 주었습니다. 영화도 빨리 개봉했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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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왜 삽질을 시킬까?
데이비드 디살보 지음, 김현정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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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군대에서도 "삽질" 위주의 업무 부과를 지양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머리가 좋게 태어나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쪽으로 머리를 쓰지 못하고 단순 반복 노동에 몰리면, 누구를 막론하고 억 울한 느낌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뇌가 우리에게 삽질을 시킨다"고 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만약 "삽질"이라는 게 (그런 걸 우리에게 시킨다는) 뇌를 머리에 품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기왕 시키는 그 "삽질"의 방향과 질(質)을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좀 놀라운 깨우침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더군요. 첫째는, 생 각이라는 것에도 단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물론 하고 삽니다. 몸 곳곳에서 체액이 분비되거나, 체온 유지를 위해 갖가지 일이 다 벌어지는 것처럼, 생각이라는 건 우리의 뇌 속에서 멈출 줄 모르고 지속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도 단계가 있어서, 지금 하는 생각을 두고 이를 반성하는 생각이 따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메타적인" 생각 입니다. 저자는, 이런 메타적인 생각을 하되(일단 보통 사람들은 메타적인 생각 자체를 잘 떠올릴 줄 모릅니다), 자신에게 유익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는, 이 메타적인 생각을 고리로 해서, 개념, 판단, 행동으로 옮김 따위의 단계가 끊임 없는 고리를 이루어, 그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이어 주는 피드백 시스템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이 과정에서, 사람의 성격은 바뀔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더군요). 지난 시대의 통념이라고 할 수 있는 좌뇌/우뇌의 분립 가설(그동안 여러 책에서 그림 같은 걸 보셔서 아시겠지만, 좌뇌와 우뇌는 구조적으로 뚝 떨어져 있다는 게 통설이었습니다)이 거의 오류나 환상에 가까우며, 좌뇌와 우뇌는 끊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게 오늘날 학자들 거의가 동의하고 있는 포인트라는 겁니다. 뇌는 이처럼 역동적인 기관이며, 그러기에 오늘날처럼 진화된 모양과 기능을 이룰 수 있엇습니다. 어른신들 하는 말씀 중에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것도 다 이를 두고 이름이며,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특성을 두고 "신경가소성(뉴로플라시티)"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생각은 우리 자신 그 자체가 아니다." 저는 이 말이 가장 충격으로 와 닿았습니다. 데카르트도 자신의 존재 근거를 "생각하는 자신"에서 찾았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뜻일까요? 저자는 그보다, 머리 안에서 대뜸 떠오르는 생각의 익숙한 흐름은, 오랜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그게 내 생각인데 나도 모르다니!) 형성된, 일단의 습관 결과물이지, 바로 나 자신인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 습관적인 생각의 뭉치들은, 앞으로 환경이 급변하거나 내가 다른 생각 습관을 가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기왕 그렇게 바뀔 수 있다면, 종 더 영리하게 바뀌어 보는 건 어떤가? 이것이 저자의 제안입니다. "메타 생각"의 유용성은 여기서 나옵니다. "잠깐, 내가 지금 이 생각을 왜 하고 있는 거지?" 처럼, 생각을 한 단계 위애서 내려다볼 수 있는 "멈춤 생각", "생각을 제어하는 생각"을 해 보자는 거죠. 이렇게 되면 외부 요인이 새롭게 바뀌어 나의 생각 습관을 고쳐 주길 기다리지 않아도 되며, 동시에 머리의 씀씀이가 더 효율적이 되고, 뇌는 더 유연하고 변신에 적합한 유능한 도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책은 뇌 신경과학과 심리학의 최신 성과를 정리한 제 1부와, 그러한 연구 결과를 어떻게 우리 생활에서 응용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제 2부로 나뉘어 있습니다. 2부의 내용은 "메타 생각을 잘하는 똑똑한 뇌 만들기"를 위한 30가지 요령(많죠?)을 제시하고 잇는데, 제 생각에는 이 30가지 오령 중 자기에게 맞는 것만 추려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껌 씹기 같은 것도 있습니다. 껌 씹는 활동으로 뇌가 메타적으로 단련된다는 착상에 귀가 솔깃하실 분도 잇을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는 평생 뇌의 3%도 쓰지 못 하고 죽는다."고 했는데, 다만 나머지 97%를 어떻게 해서 끄집어 낼 수 있는지를 모르니 결국 그 3%가 100%나 뭐가 다르겠는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을 가졌더랬죠. 메타적 생각은, 과학적 근거에서 이 잠재되고 그간 사장되었던 뇌의 기능을 최대한 활성화시키는 비책이었습니다. 꼭 그 묵혀 두었던 옛 쌈짓돈을 내어 쓴다는 식이 아니라도,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통제와 반성을 할 수 있는 습관을 가진다면 그만으로도 보람된 일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착한 삽질, 남는 게 있는 삽질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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