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법 - 상 - 제66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대상 수상작
야마다 무네키 지음, 최고은 옮김 / 애플북스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정신, 그 깊숙한 곳에 자리한 본질 중 하나는 욕구에 관한 것입니다. 한편, 욕구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오래 살고 싶은 욕구, 불멸을 지향하는 욕구만 하겠습니까? 충족될 수 없는, 아니, 그래야 만 할, 갈망, 희구가 충족되는 그 순간, 인간은 바로 신(神)이 되거나, 아니면 바로 파멸할지 모릅니다. 인간의 정신은 불멸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나의 불멸 뿐 아니라, 타자의 불멸, 혹은 추상으로서의 불멸도 감당할 수 없어 종교에 열광하는 게 인간입니다.  

 

단 한 명의 개체라도 불멸의 혜택을 입는 순간, 인간 사회가 애써 가꿔 왔던 윤리, 도덕, 예술적 가치, 정치 제도는 모두 무너지고 맙니다. 불멸을 관장하는 그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인간은 제 터전이 초토화될 때까지 싸우고 또 싸울 것입니다. 모두가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는 바로 모두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 중에서 누군가는 영원히 살고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면, 그 선택된 자의 특권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모두가 같이 죽는 길을 걷자고 들 것입니다. 불멸은 바로 즉시 파멸을 부른다는 역설이 눈 앞에 뻔히 드러납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런 혁명적인 의학 기술이 고안되기보다, 차라리 그런 감당 못할 결과를 미연에 방지할 사회제도적 장치의 마련이 더 시급하다는 사실(그리고 더 까다롭다는 사실)은, 이 인간 불멸의 시술(소설에서 HAVI라고 설정된)이란 게 까마아득한 공상의 세계에나 소속되어야 함을 반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과학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성숙 문제, 사회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HAVI의 본체는 사실 불멸불사의 레시피가 아니라, 불로(不老)의 시술입니다. 물론 후자가 더 좋은 것입니다(쭈그렁바가지로 천 년을 산들 그게 뭐가 부럽겠습니까). 소설의 설정에 따르면,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을 당하거나, 아니면 국가 기관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거나 해서, 인간들은 목숨을 "여전히" 잃을 수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 가끔,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건 정말로 끔찍해."라고 말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약간 일관성을 결여한 미장센이자 자리를 잘못 잡은 클리셰 같은 인상마저 줍니다. 그런 회오(悔悟)는 버지니아 울프의 "올란도", 스탠 리(혹은 제임스 맨골드)의 "울버린"의 입에서 나오기에나 어울리죠. 

 

그저 현생 인류가 지니고 있는 일상 수준의 주의력만 유지해도 영원한 청춘("청춘"이라는 단어도 이미 오래 전에 死語가 되었다는 재미있는 설정도 등장합니다)이 가능하다니, 그보다 훨씬 하잘것없는 가치를 놓고도 목숨을 거는 인류의 원시성에 비추어 보면, 고작 법안의 효력 발생 여부를 두고 "정상적인 수준의 여론 충돌"을 보인다거나, 지극히 국지적 수준에서 제도에 대한 개별적 도전을 보인다거나 하는 모습이 차라리 우습게 보입니다. 그 정도면 얌전한 것입니다. ID의 소비행위, 계좌 관리, 소속 직장 배당 등의 통제 장치가 있지 않느냐고요? 그 시스템은 누가 장악하고 있나요? 고위 정치인, 행정 관료의 권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양순한 일본인"들만 사는 사회라야 이 모든 상황이 최소한의 설득력을 지니고 다가옵니다. 

 

영원히 늙지 않고 20대의 미모를 유지하는 건 좋은데, 정신도 성숙하지 못한다는 게 큰 함정입니다(명확히 규명되지 못한 의학적 미스테리라고 하네요). 해서, 가족이라는 게 또 의미를 못 가집니다. 영속적인 배우자 관계를 맺는다든가, 2세를 낳는다든가 하는 게, 알고 보면 다 "나"란 존재의 사멸을 가정하고 벌이는 일종의 안전 장치였으니(정말요?), 이제 영원한 청춘(낡은 유행어입니다)을 얻은 지금, 결혼과 이혼은 밥 먹듯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패밀리 리셋"이라는 제도적 장치도 등장하네요. 아직 그래도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책임은 있는지, 스무 살 정도까지만 같이 살다가 이후 헤어져서 수십 년 동안이나 생사도 모르고 지내기 일쑤입니다. 늙지 않는 양친과 같이 살면 서로의 자유로운 생활을 서로가 방해할 뿐 아니라, 여태 인류가 채 알지 못하던 다른 종류의 온갖 불편이 끼어들기 때문이랍니다. 사실, 성년기 이후 부모와 떨어져 소식이 뜸해진 채 살거나, 그 부모가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 전혀 다른 생을 시작하거나 하는 모습은, 서구에서는 지금도 흔히 보는 일입니다. 개인주의적 삶을 보다 지향하거나, 자신의 잘 관리된 외모에 자신이 있다거나 하는 개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에서는 HAVI 따위의 도움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인간, 아니 괴물들(마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엡실론 분자들을 연상시킵니다. 물론 엡실론들은 늙습니다. 늙기도 하는 주제에 아무 불평 불만 없이 사회 최하층 노동 공급을 담당하며 말초적 쾌락에 탐닉한 채 소모품으로서의 역할을 열심히 수행합니다)은, "유니온"이라는 시스템에 등록되어 실직에의 위험 없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3개월마다 한 번씩, 유니온의 지침에 따라 직장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러면 자생적 노조(레이버 유니온)의 결성을 애초에 차단할 수 있고, 생산 설비로부터 노동자를 철저히 소외시킨다는 점에서 더없이 좋은 통제 장치로 기능합니다. 이런 단조로운 삶, 아무 지향성이나 성취 가치 없는 삶이 환영을 받을 리 없지만, "영원한 청춘"이라는 닽콤한 당근이 그 모든 아쉬움을 잊게 해 줍니다. 결국, 피지배계층은 영원히 그 바닥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또 하나의 장치가 생기는 셈입니다. 사실 저는 이 소설에서 불로의 시술보다, 이 사회제도적 장치에 대해 더 큰 관심이 가게 되더군요. 물론 HAVI라는 반대급부가 없으면 유지가 어려운 면이 있겠지만 말이죠.  

 

똑같이 늙지 않는 인생이라고 해도, 상류층과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기존 가족 관계가 더욱 공고화됩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정략 결혼이 확고히 자리잡고, 장래 유권자 앞에 나서서 선택을 받아야 하는 정치인은 불로 시술을 비교적 늦게 받기도 하는데, 어느 정도 관록이 잡힌 외모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네요. 위에서는 전통적 컨벤션이 완결성을 더해가며, 반대로 아래에서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감각적 즐거움만 추구하는 사회, 사실은 바로 지금 우리들이 수렴해 가고 있는 일종의 디스토피아로 봐도 되는 모습들입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현실 풍자 소설입니다. SF라기보다 말입니다.

 

하권 리뷰에서, 이 소설의 "백년법"이 과연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적어 볼까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들의 일본 - 한 몽상가의 체험적 한일 비교 문화론
유순하 지음 / 문이당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터넷에 퍼져 있는 이런저런 주장들, 의견 표명들을 보면 우려스러운 게 많죠. 예전에 어느 중국인은 한국의 특정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아주 극단적인 주장 몇을 미국 사이트에 퍼 가서는, 한국인 전체를 매도하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일부 혐한들이 즐겨 쓰는 모략 역시 아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일부의 모습을 두고 과도한 일반화로 치닫는 건, 그 방법상의 오류만 노출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오류를 범하는 사람의 인식 능력, 지각 과정 자체가, 일부를 전체로 쉽사리 단정하는 미숙함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자체 폭로이기도 합니다.

 

타인이 나를 두고 "쉽사리 단정"하는 행태에만 억울해하고 분개할 일은 아닙니다. 나 역시,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이라야, 그런 호소를 할 최소한의 자격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퍼져 있는 일부 극단적인 주장이나 행태를 두고, 우리 민족 일반의 행태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자기 변호의 편한 태도가 아니라, 실제로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대해 보면, 무작정 반일 스탠스로 치닫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회사에서 주된 거래선을 일본 쪽에 대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 유학이나 개인적 교분 따위의 경험으로 인해 일본을 적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이들도 많습니다. 아니, 일본이나 일본 사람들과 업무상으로건 개인사로건 전혀 접촉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눈 감고 반일 같은 막무가내식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좀처럼 만나기 힘듭니다.  

 

저자는 원로 소설가입니다. 한국 문학에 겨우 어제오늘 취미를 붙인 독자가 아니라면, 구체적인 작품 명까지는 기억을 못 해도, 이분의 함자 정도는 귀에 낯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전 지식의 도움이 아니라도, 이 책의 문장은 물 흐르듯 유려합니다. 주장 자체의 찬반과 무관하게, 문장의 아름다운 매력 만으로도  결론에 휩쓸릴 만큼 매력적입니다.  

 

한국인은 과연 자기 정체성을 "반일" 하나에만 목을 매고 유지하는 미개한 민족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나오는 한 가지 예(일본인 저자의 책으로부터 저자가 재인용한 대목입니다)만 들어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일본 아가씨들처럼 우리 점원들도 친절이 몸에 배게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일본인에게 던진 한국인이 있다는 자체가, 저는 "배울 게 있으면 그 누구로부터도 배워야 한다"는 열린 생각을 가진 태도의 한 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에 대해 "그건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안 됩니다."라고 대답하는 모습이야말로, 개별 사안을 민족성과 불필요하게 일일이 결부시켜 생각하는 병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힌 저열한 인간성의 자기 고백이라고 오히려 봐 줄 만합니다. 이런 예는 우리 민족의 열등성을 드러내는 증거가 아니라, 차라리 반대쪽 주장에 대한 논거로 쓰일 만한 성질입니다.

 

저자는 노무현 대통령을 책 곳곳에서 예로 거론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책의 취지와 노 대통령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저자분이 다나카 가쿠에이와 노 전 대통령을 연관시킨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 정치인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요소인 "학력"의 팩터에서, 두 사람 다 소속 집단의 평균에 미달하였다는 사실, 여기서 굳이 공통점을 찾으신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노 대통령의 경우는 사법시험(요즘하고는 다르죠. 100명도 채 안 뽑던 시절이고,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판사 임용까지 되었으니) 페스라는 사항이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국졸이었던 다나카와 비교할 건 아닙니다. 노 대통령에 대한 반대자들이 그를 비난하고 조롱했던 건. 학력의 부족에 주된 초점이 맞추어졌던 건 아닙니다(그런 사람들도 분명 있었지만. 자기 진영에서조차 다수는 아니었죠). 다나카는 일본 주류층, 기득권층의 평균을 훨씬 넘을 정도로 체제 옹호적인 사상("사상"이라는 게 있었다면)을 가진 인물이었고, 야당이 아니라 집권 여당에서 최대 계파의 보스로 내내 군림한 사람이었습니다. 공통점이 있는 게 아니라, 극과 극의 인생을 살아 왔다고 봐도 되겟습니다.  

 

학력이라는 배경이 없음에도 그런 높은 자리에까지 출세할 수 있었던 게, 다나카가 과연 노 대통령처럼 좌파 스탠스였으면 그 폐쇄적인 일본 사회에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일본은 더군다나 수상을 의회가 뽑는 내각첵임제입니다. 우리처럼 국민이 최고 지도자를 직접 뽑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직접 국민의 손으로, 고졸 대통령을 만들어 낸 사례가, 열린 국민성의 더 전형적 증거로 원용되기 적합하지, 그 반대의 경우가 더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다나카는, 권력형 비리 때문에 자민당 소수파와 야당으로부터 탄핵되어 물러난 자 아닙니까?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 둘은 나란히 놓고 비교 선상에 오를 일이 애초에 아닙니다.

 

황우석 등의 인사가, 연구에 허위를 개입시키고도 버젓이 화제에 오르고 미디어를 타는 모습을 두고, 죄인이 깨끗이 물러나지 않고 대중의 주목을 받는 한국 사회의 미숙하고 병든 모습이라며 저자는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황의 드러난 비리 이전에, 그가 부분적이나마 동물 복제 분야에서 이룬 업적을 대중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공정한 모습을 유지하는 한국인들의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나마 황이 공직이나 기타 어떠한 포스트에 복귀한다고 하면, 비난의 여론이 봇물을 이룰 것임은 우리 뿐 아니라 황 자신도 알고 있기에, 당사자 역시 저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죄인이 완전한 단죄를 받지 않고 계속 제 자리를 지키는 예로, 이 황씨의 경우를 드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후지무라 신이치는 변변한 학자도 아닌 아마츄어였다는 점에서 이 건과 비교될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저자분이 그토록 모범적인 예로 보시는 다나카 가쿠에이야말로 록히드 사건 유죄가 확정되고 나서도 계속 정계에 일정 영향력을 유지했다가, 다케시다 노보루의 배신 행위, 하극상이 있은 후에야 최종적으로 정계 퇴출이 가능했지 않습니까? 다케시다는 그 대가로 다나카로부터 정치 보복까지 철저히 당하기까지 했고 말입니다. 이런 점은 일본이 우리보고 뭐라 할 자격이 있는 게 결코 아닙니다. 한국에서 대통령의 아들 신분으로 온갖 비리에 개입했다가, 현재까지도 여당은커녕 야당의 공천도 못 얻어서 야인으로 남아 있는 어떤 사람을 보십시오. 우리가 차라리 그들보다 나은 모습이네요.

 

일본인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에게 가업을 물려 주곤 하는 모습을 보고, 혈연에 무관하게 사람의 능력을 보고 대사를 결정하는 태도를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당장 현대 그룹 창업자 정주영의 청년 시절 그 됨됨이 하나만 보고 총애했던 그 고용주의 일화에서도 확인이 가능하죠. 감동적인 일화 하나만으로 민족성 전체를 재단하는 건, 저 위에 제가 적은 대로 인터넷 일각에서의 극악스런 덧글 몇으로 민족성을 평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과연 돈 한 푼 없는 자가 제 힘으로 일어서기에, 한국과 일본 중 어느 나라가 더 열린 구조를 가진 사회겟습니까? 한국은 계층 이동이 이제는 대단히 힘듭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신분제가 고착된 사회입니다. 한국도 요즘은 지역구 세습이 어느 정도 고정화된 모습을 보이는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오기와 参(まい)った의 구별 역시 마찬가지. 저자의 논리를 조금만 연장하면, 승자에 깨끗이 승복하고 현실을 인정하는 자세로, 1910년에 일체의 항일을 중단하고 그저 내선일체를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결론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도 않아 보입니다. 일본은 원폭 투하 직후에 미국에게 당장은 철저한 굴복을 했지만, 살만해진 지금은 오히려 평화 헌법을 훼손하려 들지 않습니까? 이게 더 더러운 뒤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이런 논리대로라면 일본과 굴욕의 외교 협상을 하려 들었던 박정희는 대단한 세계시민으로서 저자분께 칭송을 들어 마땅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자분이 책에서 칭송하는 분은, 웬걸 <친일 인명 사전>을 국책으로 추진했던 노 대통령이니, 독자는 이 혼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작정 반일"은 무지하고 혐오스러운 태도고, 그런 일차원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현대 한국처럼 복잡다단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초보적 적응조차 쉽지 않습니다.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인은, 그런 원시적인 태도를 갖고 싶어도 자신이 처한 현실이 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저자께서 지목하는 그런 무지몽매한 "그들"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만약 이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전체를 지칭한다면, 이런 주장을 하시는 1인칭 화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오히려 궁금해집니다. 이런 제목과 내용은, 구로다 가쓰히로 같은 일본인의 입장에서 쓰여졌으면 딱 어울릴 것입니다. 그런 분이 만약 이런 주장을 한다면, 그 외국인의 입장에서야 당연한 발상이겠으므로, 겸허하게 귀 기울이고 배울 건 배운다는 자세로 읽어 나가겠습니다. 저자는 "주장"이 아닌 "진술"을 하고 있다고까지 서두에서 말씀하십니다만, 저는 이런 "진술"부터가 실망스러웠습니다. 초인, 도인이 아니고서야 "진술"과 "주장"의 준별이. 기술서적도 아닌 이런 긴 수상록에서 과연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는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 - 세계를 뒤흔든 교황, 그 뜨거운 가슴의 비밀
김은식 지음, 이윤엽 그림 / 이상한도서관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은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이지만, 저는 "와(et)"라는 접속사 대신에, "대(對, vs)"를 써도 좋을 것 같아요. 이탈리아의 오래 전 성인(聖人)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바로 며칠 뒤면 한국을 찾을 현 교황 사이에는 닮은 점도 물론 많지만, 이 책을 읽고 새삼 떠올리게 된 건 "두 분이, 서로 떨어진 세월만큼이나 이처럼 차이가 많았었구나." 하는 점이었네요.


저자는 김은식 씨입니다.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이 란 책 읽어 보신 분들 많이 계시죠? 호남이 소외되고 극심한 상처와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을 무렵, 그들의 마음을 달래 주었던 두 아이콘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쉬운 회고를 털어 놓았던 바로 그 책. 저자는 이 신작에서도, 서로 무척이나 닮은 행보와 개성을 지닌 두 분에 대해,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고,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깊은 공감을 할 수 있게 친절하고 자상하게, 그러면서도 현실에 대한 비판을 잊지 않은 냉철한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책의 시작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술회와 짧은 감상으로 시작합니다. 교황하고 세월호가 서로 무슨 관계인가 하시는 분도 있겠죠?, 이 교황은 시칠리아 람페두사에서 벌어진 난민선 침몰 참사에 대해 강력하게 주의를 환기한 바 있습니다. 연 대의 가치, 박애의 신념이 서서히, 우려스러운 속도로 퇴색, 퇴조하고 있는 이 때, 교황은 "가장 소외되고 가장 무관심하게 버려진 이웃들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가장 수치스러운 현실임"을 우리에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9백 년 전 아시시에서 태어난 성 프란치스코 역시, 말 못 하는 동물들, 가난하고 버림 받았으며 멸시와 천대에 시달리는 이웃들에게 우리가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가르치며, 말 뿐이 아닌 행동으로 몸소 실천에 나섰던 위인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처음 안 사실인데, 그는 말 솜씨만큼은 어눌한 편이었다고 하는군요. 그가 설교에 나설 때에도, 사용하는 표현은 그리 현란하거나 다채롭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문의 반복, 평범한 진리에 대한 강조, 그 이상의 레토릭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려고 모여 드는 군중은 언제나 많았습니다. 그는 권력층과 부자들의 견제와 질시를 언제나 받았고, 심지어 같은 가톨릭 교단 안에서도 이단이란 의심의 눈초리를 받은 사람이지만, 민중과 빈민들의 가슴 속에 언제나 참된 가르침을 설파하는 성인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말보다 앞선 실천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실증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그는 즉위 초에 "1세"라고 덧붙이지 말라는 당부를 따로 했습니다) 역시, 진보적 성향에다, 현란한 말이 아닌 실천의 가치를 중시하는 분입니다. 서민 출신답게 전철 등의 교통 수단을 애용하는 분이었고, 즉위를 축하하러 온 군중에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할 줄 아는, 권위의식이라곤 전혀 몸에 지니지 않은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기꺼이 빈민들 틈으로 파고 들어 자신의 가진 것을 다 나눠 주고, 심지어 끔찍한 병을 앓고 있는 나병 환자들에게까지 입맞춤과 광범위한 신체 접촉을 허용한 그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점과 매우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근래 보였던 행적 중 크게 아쉬웠던 것은, 동성애에 대해 강력한 반대 교의를 고수하면서도, 아동 성추행 등 비리를 저지른 성직자들의 처벌에 대해서는 왜 그리도 미온적이었을까 하는 사실입니다. 현 교황이 이 문제에 대해 앞으로 어떤 강력한 조치를 취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다만, 이 책에서도 지적하는 바처럼,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의 해임 단행에서 알 수 있듯, 종래 가톨릭의 주류를 형성했던 보수파 인사들의 행보에 대해서는, 보다 강경한 태도로 나갈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그저 보혁 간 정치 투쟁 정도의 인상을 주지 않고, 교회의 근본적 쇄신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아동 성추행 사건 같은 지독히 불미스러운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을 어떤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분은 이미 바티칸 시국(市國)의 국가 원수 지위로서, 특별 형법의 마련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이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모시는 분 중에는, 특별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방탕한 생활로 청 춘을 허비하다가, 어느 순간 회심하여 신앙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분들이 몇 있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했고, 바로 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러했습니다. 앞서 제가 "두 프란치스코"가 서로 다르다고 한 건, 바로 이런 점에서입니다. 호르헤 베르고글리오(베르골료)는 서민 집안 출신이고, 어려서부터 바르고 모범적인 처신으로 유명한 아이였습니다. 반면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라난 청년이었고, 환경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다소 껄렁한 행각으로 젊은 시절을 낭비한 케이스였죠. 이러던 아이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거리에서 동냥을 하고, 안 찾던 예수 타령을 하니 아버지가 기겁을 할 밖에요. 매섭게 다그치는 아버지에게, 청년은 먼저 절연을 선언하며, "당신께 받은 것을 다 돌려 드리겠습니다."며 알몸으로 등을 돌립니다. 주교는 이 청년에게 옷 한 벌을 내어주는데, 그게 바로 수도 생활의 거룩한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현 교황은,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로 상징되는 번잡한 겉치장, 즉 권위를 혐오한다는 점에서 그 성인과 닮아 있습니다. 현 교황이 책임지고 처결하여 시성된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즉위 초기부터 이처럼 큰 기대를 모으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이 낮고 폄범한 출신이었고, 그 초심을 잊지 않아 언제나 낮은 곳으로 향하는 이 대성적자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건강하고 청렴한 교회를 세우는 데에 큰 공적을 남기실 것 같아요.


책 곳곳에 삽입되어 있는 이윤엽 님의 판화 작품을 절대 놓치지 마세요. 이 책의 가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적의 토킹스틱 - 함께 토론하고 소통하는
필리스 크런보 지음, 이소희.김정미 옮김 / 북허브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무리 같은 조직 안에서 오랜 시간 동안 호흡을 맞춰 온 팀원 사이라고 해도, 회의나 의견 조율을 할 때마다 항상 바람직한 결론을 도출하고 잘 마무리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마무리가 잘 되는 때보다, 그렇지 않고 분위기가 험악해진 채 간신히 봉합되거나, 심지어 회식 자리에서까지 감정의 앙금이 남아 폭발하는 수도 있죠. 원활한 소통은 조직의 작둉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이 이치는 비단 조직(2차 집단)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가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사랑과 애정만으로 모든 다툼과 갈등을 해결할 수는 없고, 합리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의사의 교환이 이뤄져야 합니다. 

 

토킹 스틱 하나로 기적이 이뤄질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겠죠. 그렇다고 하면 그건 과장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이 한 마디 하려고 할 때 괜히 끼어들어 그의 심기를 상하게 한다든가, 다른 사람의 말을 곡해하여 차라리 아무 반응도 안 보이느니만 못한 결과를 가져 온다든가,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보다 바람직한 소통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면, 그건 눈에 확 두드러지지는 않으나 작은 기적이라 불러 줘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이 남기신 서평을 찬찬히 훑어 보았습니다. 대체로 토킹 스틱의 효용, 그리고 이 토킹 스틱이 활옹되는 자리에서, 그 분위기 형성의 전제가 되는 "주술적 상징"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p48에 보면 "방위의 노래"라고 해서, 우리의 상상이나 선입견을 훨씬 뛰어넘는, 아메리카 토착민들의 관념과 상징 체계가 아주 자세히 도식화되어 있습니다. 대화와 소통을 위한 실용적 메커니즘 문제를 넘어, 인문학적 시야에서도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아메리카 토착민이 이 체계를 활용하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백인 못지 않게 호전적이고, 싸움에 일단 임했다 하면 물러설 줄을 모르는 용감한 종족이었죠. 그런데, 이런 그들이 모여 살다 보니, 아무리 넓은 대륙이라고 해도, 또 아무리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 상황이었다고 해도, 자칫하다간 전쟁으로 절멸할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인식을 과연 당사자들이 실제로 가질 만큼 분별이 있느냐인데, 그들은 이런 소통 체계를 실제로 고안해 내었으니 충분히 현명했다고 하겠습니다.

 

제게 큰 인상을 남긴 건 그 중에서도 세 가지 사항이었습니다. 하나는, 대화에 참여하는 성원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면, 반드시 그 자리가 상징하는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는 규칙입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떤 성향이며, 어떤 처지이냐에 무관하게, 그 사람이 현재 맡은 자리에서 해야만 하는 의무로서 이 과업은 그에게 부과됩니다. 공(公)과 사(私)를 준별하는, 대단히 엄중한 룰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차지하는 자리는 다음 순번에는 반드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문자 그대로 역지사지의 원칙 구현이며, 이번에는 타인의 입장에서 열심히 그 입장을 대변해야 하니, 그 사고와 태도가 더욱 성숙해지는 계기가 마련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스틱을 넘겨 받은 사람은, 바로 앞 사람의 발언에서 나온 표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받아서 반복한 다음, 자기의 말을 해야 한다는 조항입니다. 이때 괜히 다른 말로 대체한다거나(paraphrasing), 더 강한 의미로 강조, 과장하면 그건 규칙 위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시대가 거의 천 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 통용되는 토론, 토의 규칙을 오히려 앞서 나가는 면마저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에 다 동조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절차와 체제를 갖추고 있던 그들은, 왜 백인의 손에 망하고 말았을까요? 단지 백인이 악하고 비도덕적이었다는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뭔가 그들의 문화에 자체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패배를 겪은 것입니다. 저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그들의 문화와 상징, 신념, 가치 체계가 완벽했다고는 생각이 안 됩니다. 미국 헌법 제정과 독립 당시, 건국 선조(파운딩 파더)들이, 이 토착민들에게서 강한 영감과 영향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을 유럽 문화권에 대한, 일종의 과시적 선언 의도로서 이를 끼워 넣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토착인들이 완전히 축출된 건 미국 독립 후 거의 반 세기가 지나서의 일입니다. 조지 워싱턴 시절의 미국 백인 문명은, 원주민을 완전히 몰아낼 만큼 위력과 성숙함을 갖추지 못한 처지였습니다. 

 

아무튼 제가 그간 읽었던 미국 건국 초기(혹은 그 이전의) 문헌에서. 왜 그토록 "이로쿼이" 등 특정 토착 부족에 관한 언급이 잦으며, 또 좀 별다르다 싶은 외경심이 살짝 입혀진 말투로 언급되고 있었는지, 이 책을 읽고 더 깊은 이해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고, "토킹스틱 회의, 소통"을 자기 일상이나 업무에서 실천해 보고 싶은 분이 있을까요? 전 좀 쑥스러울 것 같군요. 그러나 그들의 대화 정신만은, 앞으로도 회의할 때나 각종 모임의 절차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좀처럼 잊혀지지 않고 인상 깊은 지침으로 계속 남지 않을까 생각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세의 여행 - 헤세와 함께 하는 스위스.남독일.이탈리아.아시아 여행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행을 즐겨 하는 이라고 해서 다 방랑자는 아닐 것입니다. 여행 중에는, 물론, 기약 없는 여행, 넉넉하지 못한 여비 탓에 가는 길목마다 고생인 여행, 도중에 못된 현지인을 만나 떠나지 않음만 못하게 된 여행, 모든 여건이 다 구비되었으나 정작 본인의 마음 자세가 불민하여 타락한 탈선이 되어 버린 여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즐겁지 못한 여행이라 해도, 여행자에게 돌아올 집, 본향이 있는 이상, 그 여행은 종착점이 있고 복귀할 일상이 있는, 잠시의 도락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 여행을 통해 무엇을 꼭 배우고자 했었다면, 그를 두고 "수학여행"이라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헤세(물론 우리가 아는 그 대문호 헤르만 헤세입니다)의 경우에는, 이 책을 다 읽은 저로선 이제 얄짤없는 방랑자라고 그를 불러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태생이 독일 순혈도 아니고(양친의 어느 쪽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태생이 그렇다 해도 어느 한 고장에 끈적한 정을 붙이고 아이텐티티를 형성할 수도 있었건만, 그가 거쳐 가는 그 어느 곳에도 최종의 귀속감을 두지 않고, 그저 일생을 두고 여기에서 저기로 떠됼았던 나그네였습니다. 우리는 그저 철학 깊은 명작, 눈물이 뚝뚝 들을 시(詩)만 쓴 책상 앞의 작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분은 언제 글을 쓸 시간을 냈나 싶을 만큼 세상을 돌고 돌았으며, 그가 나고 자란 고장 인근에서 지구 반대편까지 무던히도 바지런하게 왔다갔다한 천상 여행객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작가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이 사람을 그렇다고 해서 여행자라고 불러 줘도 안 됩니다. 여행(Reise)이라는 단어에는 불순물이 함유되어 있고, 여행자라는 개념에는 그가 그렇게도 혐오했던 속물적인 소비자들(이 책에 잘 나와 있죠)이 끼어 있습니다. 이 사람, 지독한 반골이자 고집불통 떠돌이를 두고는, "방랑자(Wanderer)"라는 세 음절 이름이 딱 어울립니다. 교통 발달도 시원치 않았던 당시 형편에 이처럼이나 천하를 주유하고 다닌 독설가에게 다른 이름이 어울릴 것 같지도 않습니다.

 

대문호의 수필, 여행기가 밋밋하고 싱거운 설교와 점잔뻬는 미사여구로 가득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분께는, 아주 통렬한 뒤통수 한 방을 준비하는 장난속으로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아주, 처음부터 욕입니다. "열심히 일하며 된장끼 폭발을 준비한 당신, 여행일랑은 꿈도 꾸지 말고 방구석에서 썩어라!"를 외치고 있습니다. 헤세에게 있어 여행은, 껍질이 깨지는 아픔을 겪으며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수련이요, 도제의 고통스러운 공붓길입니다. 현지인을 모독하고, 설익고 추악한 욕구를 풀기 위한 배설의 과정이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여행을 사랑하고, 본디 고정된 호적을 두지 않은 채 지구 전체를 고향으로 간주했던 헤세는, 이 숭고한 의식을 모욕하는 그 모든 속물에게 침을 뱉습니다. 이어지는 여행기들은, "여행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을 일갈하며, 그 모든 종류의 타락한 여행을 통해 타지(他地)와 자아를 오염시키는 우리들에게 분노의 심판을 내리는 것 같습니다. 원 이거 겁이 나서 앞으로 여행 한번 제대로 떠날까 싶습니다.

 

저는 헤세의 여행기라고 하면 그저 스위스에 인접한 남독(南獨) 일대나, 호엔슈타우펜의 군주들, 아니 더 멀리 샤를마뉴 대제 이래 줄곧 만족(蠻族)의 동경 대상이 되어 왔던 이탈리아가 그 주된 소재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왔습니다. 이 책의 분량 절반 이상은 그러나 아시아를 두고 벌인 편력 로그입니다. 예전 일본의 어느 평론가가 헤세의 <싯다르타>를 두고, "서양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피상적인 판타지"로 폄하한 말이 생각납니다만, 그의 태생도 그렇고, 중년에 접어들어서도 찾고 찾고 또 찾아 맛본 아시아에 대한 그의 탐닉, 외경의 정도를 생각해 볼 때, 아무래도 우리 동아시아인들은 <싯다르타>를 다시 겸손한 마음으로 읽고, 우리 자신도 미처 몰랐던 아득한 정신적 본향의 한 구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톨릭 수뇌부와 제후들이 모여 반항자 후스를 활활 태워 죽일 것을 그 예전에 결의한 보덴 호수에서 그는 유난히 노를 자주 저어 다닙니다(꼭 여기에서뿐 아니라 그는 노젓기를 참 즐기는 신사의 모습을 많이 드러내더군요). 가본 분들은 알겠지만 보덴 호수는 유럽에서 보기 드물 만큼 넓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그는 보리수의 향취를 즐기며 끝없는 상념에 빠져 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동향인들의 역겨운 속물성에 대한 자각도 끊임 없이 뇌리에 새깁니다.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정착에의 혐오, 경각은 그의 태생적 병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덴 호수는 물론 스위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한, 서남 독일의 변방이자 원심력의 극한입니다. 고향 문제를 떠나서도, 이처럼 그가 이곳을 즐겨찾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태생적 방랑벽이 어느 정도 중증이었는지 짐작게 합니다. 그럼 어쩌겠습니까. 떠나야죠. 식당에서 버릇 없는 웨이터의 뺨을 냅다 치는 다혈질의 그가 아니겠습니까.

 

이탈리아 반도가 좌우로 폭이 넓지야 않습니다만,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지리적 위치의 동서 이격을 떠나서, 그 역사적 배경과 풍토의 차이 때문에 오가기가 쉽지만은 않은 동네들입니다. 이 책 3장은 바로 이 두 곳의 방문 기록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 꽃 파는 소녀가 거리를 누비고 거리의 택시를 곤돌라가 대신하는 베네치아는 석호의 도시입니다. 아드리아 해 가장 깊은 구석에 위치한 이 도도한 도시는 바닷물의 침식을 운명으로 간직하지만, 그 도시를 떠도는 물이야 당연 바닷물이 아닙니다. 기이하게도 베네치아의 물, 물은, 그러나 저 멀리 지중해의 그것처럼 에메랄드의 청록빛입니다. 헤세는 이 빛깔의 마법을 초자연성으로 규정합니다. "베네치아의 물빛에는 태양과 수면이 빚는 빛의 물리적 산란 외에, 자체적으로 뿜어내는 명도와 채도의 그 무엇이 있다." 그렇기야 하겠습니까만 헤세의 이 이국적 풍광에 대한 예찬과 열광은 극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외국, 이방이 좋다기보다, 제 나고 자란 고장에 대한 반(反) 근친혼적 혐오의 발로요, 건강한 (정신적) 번식욕의 일환 같습니다.

 

그는 <싯다르타>에서뿐 아니라, 이런 여행기들에서 본격적으로 "인도의 시"를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 동양인들도, 더군다나 요즘처럼 각종의 여행 상품이 잘 개발된 환경에서도 이처럼이나 많은 곳을 다니기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헤세는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 말레이시아, 남중국, 스리랑카, 인도네시아까지 잘도 돌아보고 그 아니면 절대 언술되지 않을 열정적이고 참신한 감상까지 토로하고 있습니다. 헤세는 인도 문화 뿐 아니라, 중국의 전통적 경전, 인문 텍스트의 내력과 평가에까지 훤히 밝은 소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못 배운 백인 특유의 동양 문화 경시 태도에 극렬한 경멸과 노여움을 표현하며, 총명한 동양 소녀의 눈에 잘 드러나는 무제한의 지적 호기심과 그 성취에 대해 경의를 표시합니다. 그냥 "그림"만 보러 다니는 관광객이 아니라, 그 지역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사람"에 대한 선이해를 갖춘 그입니다. 그는 관광객으로서 현지인을 관찰, 감상하지 않고(치를 떨며 싫어하더군요), 그 자신이 너그러운 피사체가 되어 현지인의 호기심에 노출되어 줄 줄 아는 대속(代贖)을 자청합니다.

 

5장은 제목부터가 "방랑"이며, 뭔 의도인가 싶게 부제는 "수기"라고 붙어 있습니다. 이 장은 제목이 저리 붙었건만, 책 중에서 가장 차분하고 정적(靜的)인 필치로 쓰여진 부분입니다. 주제 하나를 정하고 깊은 성찰을 표현한 다음, 마무리는 그의 장기인 정갈한 시로 짓는 식입니다. 여행 욕구에 들쑤셔지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싶을 때 읽으면 차라리 좋을 것 같습니다.

 

6장에 소개된 "테신"은 단행본으로도 나온(한국어 번역도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저 앞 4장 역시 그 부분만 단행본으로 나오기도 했죠), 스위스 테신에서의 5년 체류기입니다. 여기에는 베를린의 벗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도 나오고, 좀 징그럽게 웃통을 벗고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그의 사진도 실려 있습니다. 겨울밤이 시(詩)의 친근한 소재라면, 여름밤은 매콤한 맛을 풍기는 수필의 반가운 글감이죠. "테신에서의 여름밤"은 우리가 여름의 한적한 정취와 밝아오는 내일의 유흥을 기대하는 설렘, 밤을 새워 정담을 나누고 노래를 불러도 시간이 아쉽고 아까운 그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언제나 이 검고 푸른 공감을 최대한 누리고 맛보려는 아이들에게 "일찍 잠자리에 들 것"을 권합니다. 여기에는 또한 정돈되고 경건한 정신적 세계에서 그만의 순결을 지키려는 헤세가, 다른 편 세계에서 추한 물욕을 채우려는 세속인들을 어떻게 보는지, 반대로 그들은 헤세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편린적 진술도 나와 있습니다.

 

7장의 뉘른베르크 여행기는 앞 장의 공간적, 시간적 속편입니다. 뉘른베르크는 바이에른에 위치해 있고, 완고하고 보수적인 고장으로 독일 내에서도 많이 고립된 정치적, 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죠. 대체로 이 책의 글들이 시간순을 따라 배열된 걸 생각하면, 독일에서 나고 자라 이례적이라 할 만큼 객지를 지향했던 그가, 그 편력의 마무리를 가장 변화를 거부하는 땅에서 체류하며 지었다고도 하겠습니다(물론 이 책의 세계를 한계로 잡아서요). 회귀의 구조로 파악한다면 그리 발전적인 여정은 아닌 셈이겠는데, 여기서 그는 토마스 만 등 그와 어깨를 나란히할 문인협회 거인들과 (대체로) 우호적인 회동도 갖습니다. 이 무렵의 그가 대략 40대 후반, 50 초엽이니, 생각이나 스타일, 철학 등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시기를 넘어 장렬한 낙조를 멀리서 볼 무렵입니다. 이 시기에 자리를 같이한 토마스 만과 같이 찍은 사진도 나오는데, 두 분을 다 팬으로 모시고 있는 제게는 정말 기적 같은 한 컷입니다.

 

이 책은 단행본의 번역본이 아니고, 전집에서 발췌하여 한 권의 책으로 번역해서 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생전의 헤세가 그 의도를 매우 기꺼워하며 칭찬했을 것 같은, 충실한 구조와 이유 있는 짜임새가 돋보입니다. 문장도 매끄로워서 배경의 이국성이 아니라면 번역문이 아닌 것처럼 술술 읽힙니다. 격정과 성마름 속에 인간과 자연, 삼라 만상에 대한 넘치는 사랑을 간직한 위대한 영혼을 잘 알 수 있는 멋진 책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