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겟돈 레터 - 인류를 핵전쟁에서 구해낸 43통의 편지
제임스 G. 블라이트.재닛 M. 랭 지음, 박수민 옮김 / 시그마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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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마겟돈 레터가 뭐야?


길을 걷다가 느닷 위에서 떨어진 철근 덩어리를 간신히 피했습니다. 자칫 맞기라도 했으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짧은 순간 발휘한 반사 신경의 덕에 생명을 건진 것인데요(아니면, 그냥 당시 운이 좋았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심각한 체험을 하고서도 몸에 상처 하나 없이 위기를 모면했다면, 우리는 이 일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혹시 술자리에서라도 생각이 나면, "아,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녀석이냐면..." 같은 무용담의 소재로나 쓰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그저 예사롭게 넘겨선 안 됩니다. 그런 위험이 또다시 닥쳤을 (확률적으로는 낮겠지만) 때, 한 번 더 운이 좋으라는 법이 있겠습니까? 위험한 건조물이 있는 곳을 피해 다닌다든가 해서, 그런 위험이 신체에 그토록 근접할 수 있는 경로를 원천 차단해야 합니다.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런 장치를 알고리즘적으로 마련하고 나서 나머지 일상을 영위해도 할 것입니다. 


한 개인의 생명이나 안전 문제도 이처럼 중요한데, 하물며 이 지구라는 별에 사는 인류 전체의 생존 문제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엇이 되었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라면, 우리는 그것을 빨리 폐기처분하거나, 확실한 안전 관리 기제를 마련하여 위험이 현실화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인류가 핵무기를 끝장내지 않으면,

핵무기가 인류를 끝장낼 것이다."


1962년 10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벌어졌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세계의 패권을 둘러싸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했던 미국, 소련 두 나라가, 전 지구의 생존을 담보로 걸고 일촉즉발의 치킨 게임을 벌이며, 서로 상대의 퇴각만을 요구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 자칫 오판을 하거나, 과도한 욕심을 부리거나, 환각 때문에 현실을 보지 못한다든가, 그저 실수로 버튼을 잘못 누른다든가  하는 일이 생기면, 그래서 상대방의 세력권 한 구석에 용량이 작은 핵무기 한 발이라도 떨어트린다면, 상대는 바로 보복 대응에 나설 것입니다. 단 한 발이 떨어져도 수십 발의 난타가 오갈 것이며, 결국 지구 육지의 상당수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파국적인 결과를 피해야 합니다. 1962년 미국, 소련, 그리고 쿠바의 최고 지도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한 발씩 양보하여 최악의 결과를 일단은 피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반 세기 전의 일입니다. 이제 그것으로 다 된 것이라 안심해도 될까요? 절대 아니죠, 이 책 뒤에 나와 있는 카스트로 당시 쿠바 최고 지도자의 표현에 의하면, "(엄지와 검지를 서로 붙이듯 하며) 핵전쟁이 이만큼이나 가까이 와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합니다. 우리 인류는 "그때 멸종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이 주는 청량감을 만끽하는 우리들 중, 상당수는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거나, 신체 기형의 끔찍한 비운을 겪거나, 지독히 춥고 숨쉬기조차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위기를, 그저 간신히 최악의 결과를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사건 이후 양국 정상 사이에는 핫-라인(직통전화)이 설치되고, 비정기적이나마 군축 회담이 열렸으며, 그 결과 1980년대 후반에는 핵무기의 상당 부분이 해체, 감출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두 나라의 지도자들이 이성적이고 온건한 방향으로 얼마든지 생각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도자, 정치인의 양식에만 기댈 수는 없습니다. 이 책 서두를 보십시오. "케네디, 흐루쇼프, 카스트로 모두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111페이지를 보십시오. "이들 세 사람이 환상을 갖지만 않았더라도...." 카스트로는 소련이 끝까지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흐루쇼프는 쿠바가 결국은 엄청난 화력을 지닌 미국의 코앞에 자국이 위치했다는 현실을 깨달을 것이라고, 케네디는 미국이 세게만 나가면 소련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한 발 빼고 말 것이라고, 각기 다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세 사람, 아니 최소한 케네디와 흐루쇼프 두 사람은, 자국의 강경파에 비해선 상당히 온건한 편에 속하는 성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두 나라 사이의 열핵전쟁(hot nuclear war)로 인해, 인류 전체가 공멸할 상황까지 진행되었던 거죠. 지도자 개인의 양식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오작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들 개인개인이 각성을 해야 합니다. 대중이 깨어 있으면, 지도자들도 함부로 경솔한 판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일상을 사는 우리 모두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오래 간직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런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 아마겟돈 레터(정확하게는 "레터즈", 즉 복수형태입니다) 프로젝트가 되겠습니다. 최근에 미국 정부 문서가 극비 처리 시한을 넘겨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케네디가 흐루쇼프에 보낸 친서, 흐루쇼프가 특유의 그 격정적 어조로 케네디에 보낸 서한 등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문서 공개를 통해,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그 때 그 시점의 위기가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중대한 위기가 다시는 사람들을 절멸의 위기로 몰아넣지 못 하게, 어떤 행동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책 한 권만으로는 그 영향력이 부족합니다. 간단한 UCC도 만들어 배포, 공유하고, 연극도 짜서 공연하고, 단편 영화도 제작하고, 이 모든 노력을 통해 이웃에게, 대중에게 끊임 없이 환기시키는 겁니다. 주최자들은 이것을 "트랜스미디어 프로젝트"라고도 부릅니다. 미디어의 경계를 초월하여, 사용 가능한 모든 수단(미디엄, 미디어)을 동원하여, 일깨우고 외치고 또 생각나게 만드는 대규모 운동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정보는 이 사이트(www.armageddonletters.com)에 가 보시면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책은 뭐야?


이 책은 저 사이트에 실려 있는, 다양한 미디어로 표현된 작품과 문헌, 자료 중에서도, ⓐ그래픽 노블의 일부, ⓑ기밀해제된 문서(1차 사료), ⓒ3인의 지도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희곡 등을 담은 포맷입니다. 따라서 책만 놓고 보자면, "트랜스 장르"의 컨셉을 띠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1) 완성도 높은 그래픽 노블의 몇 컷을 통해, 반 세기 전 우리 인류가 어느 정도 심각한 위기까지 갔는지를 직관적으로 일깨워 주고, 2) 이 모든 외침과 결론이 공연한 호들갑이 아님을 증명하는 일차 사료를 원문 그대로 제시하며 확고한 근거 기능을 하게 하며, 3) 3인이 한 자리에 모였을 상황을 가정하여, 얼마나  판이하게 다른 의지와 개성의 대립이 이런 위기를 초래했는지를 환기하기 위한  문학적, 예능적 상황 재구성을 시도했다 하겠습니다.



서막: 몽유병 환자의 걸음

제 1막 : 충돌

시발은 1959년, 독재자 바티스타가 미국의 검은 돈을 끌여들여 형성한 매판 자본이 지배하던 쿠바에서, 30대에 불과했던 무장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가 정확히 1월 1일에 공산 혁명에 성공했던 사건입니다. 이것만으로는 미국의 핵심이익이 침해될 바가 없었으나, 전 재산을 날리고 결좌적으로 미국 본토 투자자에게까지 피해를 입힌 쿠바 망명자들이, 2년 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본토 재진입, 정권 탈환을 시도한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미국 정부 차원의 개입과 후원이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당시 대통령이던 아이젠하워가 최종 결정권자였는데, 그 계획의 구체적 실현이 1961년 4월 17일이었고, 대통령에 취임한 지 3개월이 될까말까한 케네디가 작전 집행 싸인을 (내키지 않게) 했던 데서 비롯됐습니다.


책은 다양한 자료를 통해, 케네디가 "이 어리석은 작전"을 결국 승인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케네디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흐루쇼프 소련 최고지도자는 크게 안도하는데, 강경 매파인 닉슨이 미국의 정권을 잡는 것보다는 자국 소련에 크게 유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례적으로 케네디애게 축하 서신을 보내며, 이에 대한 케네디의 답신은 매우 짧고 사무적입니다. 한편, 피델 카스트로는 1961년 4월의 침공(소위 피그 만 사건)을 격퇴하고 일단 한숨을 돌리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전무함을 알게 됩니다. 당연히 자구책을 마련할 생각이 들었으며. 그 결과가 소련에 대한 군사 원조 요청입니다. 흐루쇼프는 카스트로의 이 요구(그 유명한 체 게바라가 특사 자격으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습니다)가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으나, 케네디의 성향으로 보아 자국의 이익을 걸고 한번 해 볼 만한 도박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케네디는 1962년, 쿠바에 정체 불명의 군사 시설이 세워지고 있고, 소련의 전문가 수천 명이 상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흐루쇼프는 1년 전 케네디에 보낸 편지에서 이에 대해 강한 부인성 언질을 준 바 있는데, 그것이 거의 거짓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한편, 카스트로는 연일 강경한 어조로 미국을 비난하고 나섭니다. 이를 바라보는 소련 측의 태도는, 강경파는 제외하더라도 최소한 흐루쇼프만은 걱정스러운 기색입니다. 머뭇거리는 흐루쇼프를 향해 카스트로는 "우리 쿠바인은 수동적인 동독, 체코인과 절대 다르다.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그들을 지도에서 지워 버릴 것이다!"라며 그 미온적 태도를 맹비난합니다.



제 2막 : 소용돌이

제 3막 : 탈출

제 4막 : 쥐어짜기



카리브해를 경유하여 쿠바에 들어가려는 소련 선박을, 케네디는 저지하려고 합니다. "검역"을 하겠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범죄 혐의가 외관상 명백한 것도 아니고, 미국의 영해도 아닌 곳에서, 다른 나라의 배를 강제 수색하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흐루쇼프는 이를 "해적행위"라 비난하면서도 다시 친서를 통해 케네디를 달래고, 설득하려 애씁니다. #18로 넘버링된 이 흐루쇼프의 편지를 두고, 편집진(그리고 흐루쇼프 본인으로 설정된 캐릭터)의 평가는 "두서없다"였는데, 제가 보기엔 케네디의 심중까지 미리 헤아리면서도 가능한 한 최대의 동의를 이끌어 내려는 대단한 능변, 명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케네디의 답신 역시, 외교적 표현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 주는, 정치(精緻)하고 함축적인 공문서 문장, 구성의 표본과도 같았네요.


흐루쇼프는 UN 총회장에서 불만을 표현할 때 구두 한 짝을 벗어들고 마구 내리쳤다는 충격적인 에피소드로 유명합니다. 위 그림 아래 왼쪽의 모습과, 다음 사진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나 이는 조작된 사진이라고 합니다. 그 시절에도 소위 "합성"이 있었다니 좀 놀랍습니다




책 중 케네디의 모습. 선천적 자부심과 상황적 불만감이 동시에 잘 표현된 컷입니다.




이 사태에서 결국 상황을 리드해 나간 건 흐루쇼프였습니다. 책에서는 "카스트로의 양아버지"로 묘사되는 대목도 있는데, 사실 그는 케네디에게도 거의 아버지뻘 나이였죠.



묘한 것은 둘 다 결국 권좌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이고,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둘을 끌어내린(한 사람은 흉탄에 의해 저승으로 갔고, 다른 한 사람은 연금되어 어쨌든 물질적으로는 불편 없이 여생을 마쳤다는 게 다르지만) 건 강경파였습니다. 세계는 파국을 면했지만, 그들은 각기 자기 조국에서 정치적 패배자가 되었고, 반면 이 무대에서 가장 자기 중심적인 모습을 보인 카스트로는 지금까지도 사실상 자국에서 최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케네디는 핵전쟁 발발의 위기가 목전에 닥치자. 아직 5살이 채 안 된 딸 캐롤라인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내일 이 아이가 맑은 공기와 다사로운 햇살을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여튼 전쟁광, 도살자의 마인드가 아닌, 그나마 합리적 사고가 가능한 이들이 권좌에 있었기에, 그 캐롤라인은 내일, 모레, 그리고 반 세기 넘게 이어진 지구의 공전 주기를 다 겪으며 현재 주일 대사직에 부임해 있습니다.


캐롤라인 케네디 현 주일대사, 미코얀 당시 소련 제 1 부수상


위에서 느닷 낙하하는 물체의 위험은, 공사 현장 노동자나 감독자의 잘못일 수도 있고, 감독 관청의 직무 태만 소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핵전쟁의 위험은, 최소한의 양식과 인내만 있으면, 거창한 기술적 혁신이나 전면적 리빌딩 없이도 그 방지가 가능한 성격입니다. 상대의 양보를 받아낼 때까지 무모한 돌진을 하겠다는 미련한 호승심만 버려도, 자신 뿐 아니라 전 인류의 공존 공영이 가능한 일입니다. 이 책은 정말 생생한 묘사와 자극을 통해, 우리에게 다름 아닌 행동을 촉구하는 책입니다.


이 책은 공군에 오래 몸담았던 경력의 박수민 선생 번역입니다. 해당 계통에 종사한 분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정확한 용어 번역이 돋보였고(예: counter-threat를 "위협 대응"으로 옮김), 의미가 분명히 와 닿는 정돈된 문장이 일품이었습니다. 다만 예컨대 p180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서, "미국이" 앞에 전체 주어 "우리 소련은" 정도가 들어갔으면, 오해의 여지가 줄어들 것입니다(잘못 읽으면 흐루쇼프가 미국을 맹비난하는 걸로 들립니다. 여기서 흐루쇼프는 케네디를 필사적으로 달래고 있으므로 그런 태도를 보일 이유가 없습니다).


오타 몇 군데를 지적하자면,

p135: 1   흐루쇼프도 → 흐루쇼프도

p203: 밑에서 세번째 제국주의를 → 제국주의를

p273 : 6  나데즈 → 나데즈다  (러시아식 이름에는 "나데즈나"라는 게 없습니다. 또, 이 검은 눈동자와 흑발을 한 유능한 여성 속기사- 집시를 연상시킨다는- 의 바른 이름은 책 여러 군데에서 나옵니다)

p237 밑에서 다섯번째 터 →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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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 요가 - 더 이상 실패 없는
이승아 지음 / 미호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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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대 인도에서 명상과 수련의 한 방법으로 개발된 요가는, 오히려  현대인들이 보기에 더 많은 매력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일단 곧고 예쁜 몸매를 갖기 위해 이 운동을 시작하는 분들이 많고, 여기에 근래 불기 시작한 명상 수련 열풍까지 겹쳐 그 선호도가 더 높아졌습니다. 요가를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분들도 많고, 학원 역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하 지만 동양인, 그 중에서도 한국인에게 맞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건지, 아니면 본디 정통적인 수행 방법론이 확고히 자리잡히지가 않아서인지, 요가를 해서 건강과 셰이프-업에 효과를 ?다는 분들보다는 도로 그 자리라는 실패담이 더 많습니다.


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은 수련자 본인의 일관성과 끈기가 부조한 탓이 가장 크고, 다음으로는 강사들의 전문성, 숙련도, 학습자와의 공감 부족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학원 수강 시간 말고 바쁜 일상 속에서 어렵고 복잡한 동작을 제대로 복습할 기회가 없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학원에서 여러 수강생들과 함께하는 분위기 속에, 확실히 익혀 두지 않은 동작을 집에 와서 잊어버리고, 시간이 흘러 복습 하지 않고 넘기면 결국 도로아미타불이 되기 쉽습니다.


이 책은 요가를 수련함에 있어, 피상적인 동작 따라하기보다, 신체 특성 파악에 기반한 체계적인 자세 지도, 초급에서 고급에 이르는 단계적인 수련법 제시에 초점을 둔 이승아(나디아) 선생이 쓴 "요가 자습서"입니다. 책 아니라 비디오를 보고 따라 해도 쉽지 않은 게 다이어트 체조, 요가입니다. 만약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이 시도하려면, 진짜 아무나 다 따라할 수 있는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줘야 합니다. 또, 두서 없는 동작 나열이 아니라, 왜 이 단계에서 이 동작을 해야 하는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자세, 건강, 몸매 교정 효과가 무엇인지 좀 납득을 하게 가르쳐 줘야 합니다. 무작정 선생 동작만 따라하다 보니 지겹고 힘들어서 결국 실패하는 게, 저를 비롯한 많은 중도 탈락자들의 공통된 소회였을 겁니다.



책 에는 자세를 담은 사진이 많이 실려 있었고, 이 사진들이 동작의 포인트를 정확하게 잘 포착하고 있어서, 나디아 선생님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음성 지원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또, 요가의 본래 정신을 잘 지적하여, 마음가짐과 결부된 개별 동작의 요체가 잘 이해되는 설명이 각 페이지마다 부기된 것도, 독자 입장에서 만족스러웠어요.

나 자신을 잘 모르면, 그것이 바로 불행의 근원이 된다고 합니다. 자신을 잘 알아야 참다운 자기애가 생기고, 여기에서 수행 동작의 정밀성이 따라나온다는 의미 같습니다. 만족은 추구하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말도 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평온하고 안정된 마음가짐이라야 효과적이고 정확한 수련이 가능합니다.


pp.30~31에는 요가 도구가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있습니다. 학원 수강을 해도, 집에 와서는 대충 방 치우고 기억에 의존해서 복습하는 일이 많았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기초 도구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서 마음가짐이 흐트러지고, 집중도 안 되는 악순환이 이어졌던 것 같아요. 책을 끝까지 읽으며 느낀 것은, 무슨 일에든 기초가 중요하며, 하물며 정신 수련법으로 탄생했던  요가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기본에 충실하는 게 더욱 중요했다는 반성이었습니다.


요가하다가 다치는 분들 많죠. 수행할 때 유난히 아픈 곳이 있는데, 이런 곳을 무리하게 움직이면 결국 부상으로 이어집니다. 저같이 서투른 초심자들이 언제나 이에 걸려서 중도 포기하게 되는 고비입니다. 신체의 그 부분이 특별히 아프다는 건, 평소에 잘 쓰지 않았거나, 반 대로 지나치게 뭉쳐 있어 일어나는 게 대부분이라고 저자 나디아 선생님은 말합니다. 이 책에 나온 동작을 따라하면서, 유난히 아프거나 당기는 부위는 더 신경을 쓰되, 결국 그 동작을 더 주의깊게, 자주 반복해야 성공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안 다치게 조심해야겠구요.


빈야사 요가를 별로 자세하게 안 가르쳐 주고 그냥 어려운 동작으로 넘어가는 선생님도 겪어 봤습니다. 이 책은 초보자에게 무리를 주지 않게, 빈야사 10동작을 먼저 체크해 주고 있습니다. 기초를 소홀히하지 않고 꼼꼼하게 체크하고, 아주 몸이 잘 적응될 때까지 서두르지 않고 따라하는 게 결국 몸에 무리를 안 주는 수행입니다. 책에선 군데군데 Q&A를 통해 초심자가 자주 묻는 질문이 소개되는데요, 저처럼 여러 번 실패를 한 사람이 많이 공감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메인 프로그램 15단계가 나옵니다. 시체 자세부터 시작하는 이 동작들은 마치 태권도 품새처럼, 여러 학원 전전한 이들에게 애증의 대상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자주 실패하고 잘 안 넘어가졌던 측면으로 늘인 삼각자세를 특히 주의해서 따라해 보았습니다.



혼자 하는 동작 설명도 있고, 그 뒤에는 전문가와 함께하는 자세 설명도 있습니다. 요가란 게 완전히 독학으로는 불가능하죠. 전에 학원을 제법 다닌 분들이라 해도 이 책만 갖고 독학하는 건 불가능하며, 그게 옳은 수행 방법이 되기도 힘들 것입니다. 옆구리 지방 제거, 장 연동 운동, 정력, 활력 강화에 직접 연결된다고 합니다.


다음 단계에서는 "강하고 활기찬 파워 요가"가 나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제가 쉽게 실습할 수 있는 수준이 현재로선 아니지만, 나중에 어차피 겪어야 할 단계이므로 미리 어설프게라도 책을 봐 가며 예습해 보았습니다. 초보 단계를 떼고 나면 앞으로 학원에 가서 제대로  배울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료 요가 아사나 완성이라고 불리는 "마하 요가"가 나옵니다.



앞서서 배운 자세들의 확장 변형, 심화 응용이 대거 실려 있습니다. 자세의 이름들도 "시체" 같은 게(시체 고급 동작도 물론 따로 있지만요) 아니라 "현인의 자세" 등 품격 있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책의 말미에는 요가 철학의 개요, 다섯 겹으로 형성된 우리의 몸, 요 가의 8단계 등 본격적인 이론이 보기 쉽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이 이런 이론적 바탕이 되어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요가를 무슨 다이어트 체조처럼 가르치는 선생님들 때문에 그간 많은 실망을 했거든요, 빨주노초파남보가 차크라의 일곱 단계와 연결되어 있는 게 신기했습니다.


학원을 다니건 책이나 앱, 비디오을 보고 따라하건, 진지한 자세와 꾸준함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나다. 이 책은 신체 구조, 건강, 생리학적인 사항이 아주 간단하게나마 지적되는 게 좋았고, 책에 들어 있을 수 있는 내용은 다 들어 있는 책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소한 저는, 내가 이래서 과거에 실패했는가 보다 하는 점을 체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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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사물들 - 시인의 마음에 비친 내밀한 이야기들
강정 외 지음, 허정 사진 / 한겨레출판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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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보는 눈은 청아하고 순수합니다. 시인이야말로 예전 플라톤이 이야기한 것처럼, 사물 속에 감춰진 이데아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결에 보고 지나치는 사물들도, 시인의 눈에는 그 속에 몇 겹으로 숨겨진 비의를 내포하고 있고, 지난 삶의 자취를 증언하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예언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 안에는 또한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진리가 새겨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전 독일의 피터 빅셀은 "책상은 책상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한갓 책상도 그를 책상이라고 보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초심으로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사르트르는 돌이 돌이고 보도블럭이 보도블럭일 뿐일 깨닫는 순간, "그 지독한 일상성과 무의미성에 구토가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 뿐"임을 깨닫는 게 돈오돈수의 요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의식을 가진 우리 인간이란 존재와 가장 친하면서도 가장 이질스러운 존재가 사물입니다.

 

사물과 대화를 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알게 됩니다. 사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추어 사물을 응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 사물은, 이제 우리의 이웃으로, 우리의 스승으로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들, 뮤즈와 가장 친함으로써 천상의 신비에 가장 가깝게 닿아 있는 시인들의 목소리에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판>에 연재되던 52주 동안, 여성의 글은 단 한 번뿐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마침 그 회분을 읽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고, 책이 나오기 전에는 으레 다른 여성 시인의 글도 그 52주 동안 몇 번은 이뤄졌겠거니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유일한 연재분이었다는 게... 그 뿐 아니라 이 책 중에 유일하게 대화체로 쓰여진 글이기도 합니다. 사라 베른하르트와 레너드 코언의 대화. 코언이 베른하르트를 보고 누나라고 부르늕데, 누나이긴 하지만 둘 사이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죠. 무려, 그녀가 죽고 나서 십 년 정도 지나서 코언이 태어났으니... 영혼 사이의 대화라고 부르기에도 좀 뭣한 것이, 코언은 나이가 많긴 하지만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나누는 크리스마스 실에 대한 대화는 좀 웃기면서도, 크리스마스 실이 풍기는 그다지 따뜻하고 정겹지 만은 않은 묘하게 산업화한 냄새를, 가내 수공업의 비인간성에 빗대어 가며 묘한 여운을 남기는 모습입니다.

조영석 시인은 야구팬입니다. 1976년생이니 이 책이 실린 분들 중에서는 중간, 혹은 그보다 조금 젊은 편인 나이겠습니다. 그는 서울 출생이지만 해태 타이거즈를 좋아했고, 선동열을 "데모 할 때 짭새에 잘 대항할 수 있겠다"는 이유로 부러워하는 정서를 가지는 세대이기도 한가 봅니다. 야구공을 영어로 뭐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냉소적으로 "베이스볼 볼"이라 대답한다고 합니다. 마치 검은 칠판을 "블랙 블랙보드"라고 한다는 엉터리나 비슷합니다. 해설가 하일성의 말처럼, 아무도 모르는 게 인생이고 야구입니다.

 

이원 시인의 말을 보면, 이어폰은 귀도 아니고 귀 바깥도 아닌 "유희의 연장'이라고 합니다. 이어폰은 분명 귀에 부착될 때 귀를 닫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어폰을 착용하는 이유는, 세상을 향해 귀를 닫으려는 게 아니라,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서입니다. 이어폰은 그런 의미에서 나의 확장이요 세상의 접근입니다. 우리는 이로써 말을 하기보다 귀를 여는 게 우선의 이치임도 알 수 있습니다.

 

유병록 시인은 간판에 대한 깊은 사색과 추억을 동시에 털어놓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아는 시골에선, 가게 간판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세운 간판이 중요하지 않다고는 하나, 양두구육을 자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잘 아는 사람들끼리, 간판에 정해진 용건 이상은 취급 안 하는 각박함을 드러내거나 융통성 없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간판은 결국 한 편의 시입니다. 맞춤법이 틀려도 그건 그것대로 정겹고, 간판의 이미지를 가진 주인을 과연 가게 문을 들어서면 볼 수 있는지, 정반대 인상의 주인이 나오지는 않는지도 관심거리입니다.

사물은 결국 다차원의 존재입니다. 나의 시선, 나의 관찰을 통해 그것은 비로소 한 가지 의미로 고정되고,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나에게 고유한 의미로 다가온 사물은, 이제 소통을 통해 타인에게 전달됩니다. 어느 새 그 친밀은 나를 넘어 우주로 전파되고, 세상은 자와 타가 구별되지 않는 통일을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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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 인터넷 - 클라우드와 빅데이터를 뛰어넘는 거대한 연결 사물인터넷
정영호 외 지음, 커넥팅랩 엮음 / 미래의창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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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으로 "사물인터넷"이란 이미 5, 6년 전부터 업계와 정부 당국의 화두 중 하나였습니다. 명칭도 공모했었는데요, 이 책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처음에는 "사물지능통신"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했었죠. 저는 지금도 이 명칭이 본래적 의미를 잘 전달한다고 판단합니다. "사물인터넷"은 뭔가 아직도 어색한 감이 있습니다만, 이미 언론 등을 통해 대중에게 익은 위치를 선점했으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원어는 (이 책 표지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Internet of Things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며 정보의 교류와 컨텐츠 창조의 수단이 되는 게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인터넷이라면, 사물인터넷은 가전제품부터 해서 거의 모든 사물에 센서와 칩이 붙어서, 사물과 인간,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결, 네트웍 구축을 가능하게 해 주는 신개념 통신망을 의미합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이 사물인터넷의 상용화, 현실화가 우리 눈 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입니다, 스마트 홈 기기는 벌써 국내 가전, 보일러 업계, 아파트 건축사 등에서 사양의 일부로 포함시키고 있고, 각종 광고에서 자주 접하는 아이템입니다. 정부와 업계는 이미 컨셉트화를 마친 상태이며, 다만 아쉬운 것은 수익 모델입니다. 커넥팅랩(이 책 말고도 이미 다른 분야의 경제 전망서 여럿을 펴 낸 우수 저자 집단이죠)의 표현에 따르면, 솔루션 단계로는 여러 모델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업계에서 현실로 수익을 올리는 재화와 서비스 환경이 창출되느냐 입니다. 제조 업체는 업체대로 이 미지의 불루 오션에서 강자가 되는 방안을 모색 중이고, 통신사는 자체 보유망의 활용으로 새로운 수익 창출원을 매의 눈으로 물색하고 있습니다.

 

이 사물인터넷의 다른 명칭은  ambient of everything 입니다. 이 표현을 들으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웨어러블 기기의 부상과 함께 익숙해졌던 "유비쿼터스"가 떠오릅니다. 그러면 이 "유비쿼터스"와 "IOT(사물인터넷)"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전자는 어디까지나 기기를 놀리고 환경 가운데에서 무엇인가를 콘트를하는 인간이라는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IOT는, 인간이 개재해도 좋고, 인간 없이 사물들끼리만으로도 유효한 소통과 작동이 가능하다는 데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그야말로 SF에서나 보았던 장면이 현실이 되는 순간입니다.

 

물론 인공 지능 단계와는 아직 큰 차이가 있고, <터미네이터> 같은 영화에서 우리를 적잖게 겁주었던 "로봇의 인간 지배" 같은 "주체적 의식"을 담은 기기가 아니니만큼(그저 센서가 부착되어 있을 뿐입니다) 편의는 증폭시키되 역 컨트롤의 우려는 전무하니, 그저 반길 일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진보한다는 사실을 예상하기만 해도 마음이 설렙니다. 궁극적으로는 "지능"을 갖춘 사물이 핵심 피처를 이루지만, 설사 최종의 단계까지 간다 해도 아직 IOT가 마치 스카이넷 같은 통합적 창조적 지능을 상정하는  건 아닙니다. 여기서의 지능은 그저 "리모컨이나 PC처럼 일일이 사람이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상황의 변화애 따라 자율적으로 동작을 처리하는" 완비된 연산 체계 정도의 의미입니다.

 

예전에 어느 전문대가 "나를 알아 주는 대학"이란 캐치프레이즈로 수험생들의 관심을 모은 적이 있습니다. 사물인터넷이 고작 리모콘의 확장이나, 정해진 극소수의 명령만 수행한다면 그건 "소통"이 아닙니다. 이 책은 사물인터넷의 사물이 "지혜를 가진 물건"이라는 기본 속성을 갖는 걸로 정의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지문 인식, 홍채 인식 등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시스템을 영화 등에서 아주 일찍 전부터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불법적 수단을 마다않는 집단이 해당 구성원의 신체 절단 등의 수단을 통해 얼마든지 우회할 수 있습니다(단일 규격 정보는 복제가 가능하기도 하죠). 사물인터넷에서 사물의 지혜는, 멤버의 신체 각 피처를 복합적으로 인식하여, 그인지 그가 아닌지를 보다 고차원적 알고리즘으로 결정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인간이, 눈 크기나 머리색, 얼굴 골격 중 어느 하나로 정체성을 판단하지 않고 종합적인 사고를 거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이, IOT에서 사물에게 요구되는 "지혜"요건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차적으로는 스마트 홈이 구축됩니다(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IOT라는 개념이 우선은 소비자 개인의 편의와 행복을 목표로 하는 상품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스마트 홈에서, 사람의 손(혹은 신체 어디라도)에 붙어서 중심 제어를 할 기기가 무엇인지 결정되어야 합니다. 그게 무엇인가? 여기서 이 문제는 SF나 과학 기술의 영역이 아닌 경제, 산업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애플과 구글이 치열하게 싸우고, 여기에 삼성 같은 디바이스 제조사까지 혈투를 벌이는 건, 아직 이 기본 플랫ㅍ폼에 대해 결정된 바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넥스트 띵", 서서히 스마트폰 시장이 축소되고(바로 어제, 삼성전자의 어닝 쇼크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으려 모두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지금, 블루 오션 중의 블루 오션인 IOT는 기술적 조건은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으나 아직 기본 패러다임만이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습니다. 먼저 자리를 잡는 사람이 임자인데, 필지 구획이 안 되어 있으니 서로 눈치만 보는 격입니다. 이만큼 매혹적인 프론티어도 기업에게는 없을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IOT는 거쳐야 할 첫 단계가 대중을 상대로 한 상품 기획입니다. B2B나 도시 계획은 아직 먼 미래입니다.

 

이제 스마트 시티 단계로 넘어가면, 친환경 설계나 에너지원의 그린화 등 그간 정책 결정자의 골치를 썩게 했던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 단계로 접어듭니다. 감시 당국이 일일이 인력을 동원하여 현장 감찰에 나서지 않아도, 사물에 붙어 있는 센서, 아니 지혜를 발휘하는 연산 장치가, 규율 위반자의 신원을 보고하고, 온실 가스 배출량도 업계 총량 차원에서 자동 규제가 가능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로봇 3원칙을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이러한 로봇은,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해도 발생핳 수 있는 알고리즘상의 버그 때문에 시스템 정지를 초래할 수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무결점이면 역 통제의 문제가 생기죠.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IOT에는 4원칙이 제시되고 있다 합니다.


1. 사물은 지속적으로 호흡 가능해야 한다: 기술적 문제입니다. 저전력과 무선 충전이 핵심이라고 하네요. 이 책에는 안 나오지만 현재 가장 각광받는 연료 소재는 wood fiber라고 합니다.
2. 사물은 (단수 혹은 복수의) 표준어로 소통해야 한다
여기서 플랫폼의 문제가 나옵니다. 혹시 주식 공부하려고 이 책 사신 분들은, 다른 건 설사 허무맹랑한 느낌이 들더라도 이 챕터만은 꼭 읽어봐야 합니다. 왜 애플이 아니라 구글인가가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주식은 고립된 자기 소신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의 생각, 시장의 동향을 읽어야 합니다.
3. 사물에는 자물쇠가 채워져야 한다
4. 기존 투입 개인정보보다, 사물이 산출하는 정보가치가 더 우월해야 한다

 

사물인터넷은 매우 가까이에 와 있지만, 아직은 멀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이를 홯용하는 인간의 지혜와 마음가짐입니다. 빅데이터다 클라우딩이다 해서 각종 프레임이 많이도 강조되었지만, 이제 IOT로 큰 틀이 통일되는 느낌도 듭니다. 아직 시장에 절대 강자가 없고, 시장의 기본틀도 형성되지 않았으니, 업계와 개인은 반드시 최신 동향 파악에 주의를 곤두세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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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성당 이야기
밀로시 우르반 지음, 정보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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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적 예술가는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눈길을 돌려 과거를 바라본다."


이것은 이 책 뒤표지에 나와 있는데요, 출처는 니체라고 합니다. 니체가 이런 말을 한 줄은 미처 몰랐지만, ⒜"자신", 그리고 "자신이 살아가는 과거"로부터 눈길을 돌려서, ⒝ 과거를 바라보는 게, ⒞ 꼭 낭만주의적 예술가라야 가능한 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낭만주의적 예술가가 언제나 그렇게 할 것 같지도 않고요. 니체의 위대한 사상적 편린은 둘째 치고라도, 한 개인으로서 그가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았는지를 돌이켜 보면, 들어서 마음이 엄청 설레는 말도 아닙니다. 현세적 성공을 향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 가는 우리들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밀로시 우르반의 이 작품은 보통 "고딕 미스테리"의 범주에 넣습니다. 사실 제가 읽기로는, 몇몇 소름끼치는 장면 묘사라든가, 등장 인물이 약간 상궤에서 벗어난 인물이라든가, 작가가 그렇게나 의식하는 것처럼 배경을 체코 고(古)건물로 삼고 있다거나 하는 점 외에, 딱히 저 카테고리에 넣어야 하는지는 의문이었습니다. 물론 소속을 무엇으로 잡든 간에, 단단하고 치밀하고 에피소드가 풍성하며 재미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고딕 미스테리"의 핵심은 여튼 낭만주의입니다. 회고적 분위기 속에 현실의 제약을 무시한다는 게 낭만주의의 핵심이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퍼스트네임을 "크베토슬라프"라고 씁니다. 이름이 저렇게 무신경(왜 그런지는 책에서 찾아 보세요)하기 지어진 이유는, 그의 부모가 이 사람의 양육에 큰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들이어서입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현실이 괴로웠던 부적응자였고, 커서도 루저로서 일생을 연명해 갑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영웅적으로 멋지게 죽는 순간을 잡기 위해(진짜 죽을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경찰직을 택하지만, 광신도들이나 진짜 영웅처럼 "무엇을 위해" 죽을지에 대해선 전혀 개념이 업습니다. 어쩌면, "잘못 태어난" 인생에 대한 회의, 리셋 본능으로 내세를 지향하는 지도 모르지만, 그의 관심사는 온통 과거 역사를 향해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의 분위기도 그렇고, 주인공의 컬러도 그렇고, 우리가 낭만주의 하면 퍼뜩 떠오르는 바이런 경 식의 비비드한 낭만과는 아주 먼 거리가 있습니다. 하긴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 세계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그곳에는 그 모든 비관적 묘사를 위상기하학적으로 비틀면 완전한 이상향이 나온다는 짖궂은 낙관주의가 있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죠.


애초에 경찰직을 특별한 소명 의식으로 시작하질 않았으니, 그 업무인들 제대로 행할 리 없습니다. 펜델마노바라는 이름의(물론 펜델만이라는 남자의 배우자겠죠) 어느 부인에게 "무슨 경찰이 사격 연습 같은 건 하지 않고 역사 공부에만 몰두한담?"하며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얼빠진 주인공은 그저 맞다고 웃어 줄 뿐입니다. 근데 우연인지 필연인지(결말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이런 크베토슬라프, 혹은 K가 직무 중인 그날 하필, 이 부인은 경위가 대단히 미심쩍은 살인 사건의 희생자가 되고 맙니다. 작품의 사건은 일단이 변사를 시발로 전개되고, 넉 달 뒤 벌어진 더 엽기적인 살인 사건과 맞물려 더 파장이 커지는 식입니다.


살인이든 뭐든 이렇게 매사에 미적지근한 낙오자 유형이, 가장 활기 있고 명철하며 신체적으로도 강인해야 할 탐정 노릇을 제대로 할 리가 없죠, 그에게는 따라서 "의외의 의뢰인"의 출현이 필요합니다. 다소 신원이 의심스럽기는 하나, 엄청난 재산과 거대한 신체적 골격을 가진 "백작" 그뮈드, 그리고 진실로 그로테스크한 그의 시종(광대?) 난쟁이 프록슬린이, 생의 의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몽상가 크베토슬라프의 동기유발자입니다. 어려서부터 크베토슬라프, K의 장점을 분명히 봐 준 사람은  단 둘 뿐이었는데, 고등학교 역사선생(딸보다 어린 학생과 결혼하여 퇴직한), 그리고 이 정체불명의 백작 뿐입니다.


K의 장점이 무엇인가. 저 위의 니체의 말을 다시 보십시오, 과거를 바라보긴 바라보되, 마치 영화를 보듯, 혹은 다차원의 존재 패턴을 갖고 있어 타임리핑이나 하듯 지나간 과거의 생생한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게 그만의 장점입니다. 이게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 같은 건 아니구요, 그만의 병적 환각이나 망상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런 능력, 과거 역사에 대해 "문서의 출전 제시" 같은 기계적 수월성으로 대답하는 게 아니라, 그 공간과 시대를 사는 참여자의 느낌으로 두 세계를 이어 주는 능력이, "괴백작과 그의 미친 광대"에게 매우 요긴한 수완이라는 사실입니다. 끔짝한 살인 사건도 해결해야 하고, 동시에 분명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저 백작의 계획도 만족되어야 합니다. 과연 무엇을 꿍꿍이에 품고 있으며, 잔혹한 범죄의 진상은 무엇일까요?


대담하게도 간단한 조작으로 경찰서장의 전화를 도청하는가 하면, 제 고용주의 표현 중 시제를 정정(현재르 과거로)해 주기도 하는 섬세한 언어 감각(이 정정은 그저 말장난이 아니라, 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누구로 보고 있는지, 혹은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암시입니다)을 지닌 난쟁이는, 거대한 체격과 위압적인 용모를 한 제 주인인 백작과 여러 모로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이런 괴기스러움은, 현대인들로부터 대숙청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던 고딕 양식의 그 오랜 건축물들의 묘사와 함께, 소설의 분위기에 형식적 "고딕스러움"을 더합니다. 분위기만 그럴 뿐 아니라. 실제로 이 3인은 고딕 예찬론자입니다. "바로크 같은 썩은 야만 풍습이, 순수하고 장엄하며 자기 주장이 뚜렷했던(그러나 제 주제를 넘지도 않았던) 고딕을 말살하려 들다니!" 하며 붅개하는 모습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K는 사회적 낙오자라서 현재를 부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지만, 이 당당한 체구의 "지배자" 그뮈드는 대체 무엇 때문에 환각적 과거를 낙오자와 장애인과 공유하려 드는 것일까?


소설의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체코 현대사를 좀 알아야 합니다. 체코는 종교 개혁의 불길이 본격 번지기도 전에, 후스라는 선구자를 맞이해서 가톨릭의 억압 기제를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리려 했던 대단한 자유주의의 선구였습니다(이 소설에서 재밌는 부분은, 작가가 주인공의 입을 빌려 후스를 어리석은 광신도로 폄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30년 전쟁의 경과 속에서도(한참 뒤 벌어진 30년 전쟁도 그 시발은 보헤미아였죠) 정작 체코만은 종교의 자유를 찾지 못하고, 국민의 절대 다수는 무려 1차 대전 종전까지 합스부르크적 카톨릭의 믿음을 강요당했습니다. 그 자취가 바로 이 작품의 소재인 Sedmikostel, 일곱 성당입니다. 주인공 K와 출세주의자 경사 유젝, 죽은 펜델마노바, 그리고 그뮈드 등은 각각 다른 의미에서 정치적 격변과 파란 많은 역사의 희생자들인데, 사회의 지배층이 하루 아침에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고 몰락하는 일을 반 세기만에 두 번 겪은 것도 체코 외에는 드뭅니다. 그리고 체코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관된 영지이자 핵심 봉토였지만, 그 거주자들(평민)은 언제나 식민지 노예의 대접을 받고 살아야 했는데, 체코 출신 귀족이라는(나중에 덴마크 귀족 가문과도 연을 맺었다는) 그뮈드 가의 내력이 이 복잡한 역사를 상징하는 장치입니다.


유럽 배낭 여행을 가 보신 분은 알겠지만 마기스트랄레는 EU 국가들을 서에서 동으로 관통하며 브라티슬라바에서 끝나는 하이웨이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체코 프라하를 지나지는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마기스트랄레는 그와는 무관한, 소설 속에 자주 나오듯 무자비하고 신중치 못한 체코 도시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프라하 시내의 대로입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리고 아직도 상당수가 남아 관광객을 유혹하는 오랜 보헤미아의 건물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랜 문명의 유산이되, 다만 그를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지켜 줄 능력이 (언제나) 미비했던 거주자들의 능력과 의지 부족으로, 억울한 소멸의 위험에 최우선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비운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귀가 열려 있는 영혼에게 필사적으로 말을 거는데, 그 응답자 중 하나가 바로 K였습니다. "박물관이 살아 있다"가 아니라, 이 보헤미안들에게는 "성당들이야말로 살아 있(었)다"가 되는 셈입니다. 인간보다 더 진실한 의식과 "순수함"을 지닌 이 과거의 유적이야말로, 원초적 순결이 훼손되지 않은 채 그 먼 옛적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휴머니티의 정수 바로 그것이었다는 "피맺힌" 증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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