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강국을 다시 상상한다 - 방송통신위원회 2000일의 현장 기록
신혜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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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의 제목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저만 해도 책을 펴기 전에는 DMB의 시스템, 인프라 지원 같은 국가적 시책, 혹은 장차 케이블 채널과 지상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지에 대한 원론적 논의가 펼쳐질 줄 알았습니다. 제가 언제나 "방송통신정책"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박 모 국회의장이 통과시킨 DMB육성 법률이었는데요. 당시 여야가 극심한 정쟁(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요)을 벌이고 있던 와중에서도, 이 법안만은 국가 대사를 좌우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면서 합의로 조속한 처리를 시키던 모습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그 활용성이 증대될 지는 모르겠지만, DMB는 현재 큰 성공을 전망하기 힘든 형편이고, 업체들의 수익 구조는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이용자들은 앱기반 플랫폼에 더 크게 의지하는 모습이죠. 이처럼 한때 큰 주목과 기대를 모으던 정책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류와 실책이 드러나게 마련인데요. 이 책의 주제가 그런 국가 정책 고찰 쪽에 포인트를 두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이 책의 주제는 오히려,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할 이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지상파 채널과 유선재송신 업체가 의견 불일치로 인해, 상당수의 시청 가구들에 대한 방송이 느닷 끊어진 게 불과 얼마 되지도 않은 일입니다. 사실 이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인데, 소수도 아니고 국민 대다수의 일상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송출 중단이 그처럼 벌어질 수 있다는 자체가, 문명국에서 벌어지기 힘든 해프닝이기 때문입니다. 또, 얼마 전에는 KT가 삼성 스마트 TV의 컨텐츠를 일방적으로 차단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 사정은 보다 복잡합니다. 아는 분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기업으로서 KT와 삼성은, all-IP 시대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대단한 앙숙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앞의 사례가 계약 체결을 두고 협상력 이슈의 신경전 수준이라면(고작 신경전으로 국민의 권리가 침해되었다는 사실은 용납이 안 된다는 게 이 책의 주제입니다), KT와 삼성 간의 분쟁은 보다 근원적인 이해 충돌이 그 이면에 깔려 있다는 게 다른 점입니다.

 

어떤 컨텐츠를 생산자와 중계권자 사이에 주고 받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두 당사자 사이의 계약 문제이며, 제3자가 원칙적으로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들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피해를 보는 건 시청자, 국민이라는 점입니다. 아마 법체계의 원칙만 놓고 보자면, 일단 피해를 입은 시청자(개인 혹은 집단)이 모여 소송을 걸고, 그 소송에서 패소한(패소 가능성이 높겠죠) 재송신 업체가 다시 지상파 측에 소송을 거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죠. 허나 이는 그 구제 절차의 번잡성, 비경제성으로 인한 폐해는 물론, 즉시 방송을 향유할 권리를 상실한 시청자에게 근본적인 보상이 되지도 못한다는 면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방송위 위원들은 사태 발생 당시에 크게 개탄했다고 합니다. "시청자들의 시청권 개념을 이해를 할 소양이 도대체 있는 사람들인가?" 그런데 이 말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방송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사업자의 소양에 기댄다는 자체가 문제입니다. 방송이란 단지 사업자 개인간의 계약 문제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시청권이라는 공익의 이슈인데, 이런 중대한 사태가 사업자들 간의 의견 다툼이라는 사적(私的)인 원인에서 빚어질 수 있다는 게, 제도의 중대한 미비점이고 부실사항이라는 지적입니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방송위원회 혹은 제 3의 국가 기관이, 이런 사태에 즉각 개입해야 하는 쪽으로 법제의 정비가 시급하다는 주장을 합니다. 마치, 의료인, 법조인이 그 의무를 태만히 할 때, 혹은 거대 기업이 불공정행위를 벌일 때 공권력이 개입하여 시정 명령을 발하는 것이나 비슷하게 말입니다. 현재는 법적 근거가 명확지 못하여, 분쟁 발생시 그 시정 조치를 내릴 기관도, 그 내용의 한계와 효력도 분명치 못한 상황이죠.

 

그런데 왜 법제 마련이 미뤄지고 있는가? 전혀 납득 못할 이유는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는 망 중립성 이슈와도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통신사와 카카오톡 사이에 큰 알력이 빚어지고, 네티즌 사이에서도 설전이 오간 것을 기억들 하실 텐데요. 통신사는 여튼 트래픽 부담을 해소하기 위해 막 확충, 소프트웨어 정비 등 여러 조치를 해야 하는데, 수익은 오로지 컨텐츠 개발사가 빼 갑니다. 이러니 "덤프 파이프" 론이 나오기도 하는 거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터넷 종량제, 즉 향유자가 그 사용량만큼 요금을 부담해야 한다는 논란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가장 과격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최종 이용자인 시청자, 통신 가입자(인터넷, 전화, 모바일, TV 포함)에게 시장 원칙에 충실하게, 종량제 원칙으로 부과하면 그만이죠. 그런데 이것이 과연 국민의 저항을 부르지 않을까요? 더 나아가, 전문가들은 상황이 성숙하고, 사업자들이 혁신을 통해 생태계 "진화"를 이룰 때까지 법제 정비를 미뤄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의료, 법무 규제나 공정거래 법규는 선진 외국의 선례를 그대로 따 왔기 때문에 도입 과정에서 별 문제 없이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방송 통신 분야는 한국이 세계 첨단의 발전상을 보이기 때문에, 이를 규제할 제도 마련에 참고할 사례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섣부른 규제는 오히려 혁신을 방해하여 소비자 불편만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소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생산적인 방향으로 중지(衆智)가 모아지게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소할 수 있는 이슈에 주의를 환기해 준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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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근혜노믹스 - 정승일의 단도직입 경제민주화론
정승일 지음, 공은비 엮음 / 북돋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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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펼치기 전부터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현 정부도 나름 애는 쓰고 있겠지만, 또 국제 여건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점에서 한계는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경제 현황에 대해 크고 작은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대담자가 청년 세대를 어느 정도 대표할 수 있는 입장이고, 주된 논자인 정승일 박사가 이 분야에 대해 깊은 연구를 했다고 하니, 현실경제 운용의 모순과 미비점에 대해 어떤 냉철한 지적을 해 주고 있을지 관심을 처음부터 모을 자격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제1장은 "경제민주화가 밥 먹여 주나요?"라는 제목입니다. 사실 이 명제는 단순한 논리만으로 지지가 가능합니다. 이른바 트리클 다운 효과라든가, "파이를 키워서.. "의 논리는 많은 경제체제에서 큰 효과를 보기 힘든, 현실 설명력이 부족한 걸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분배가 효과적으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경제민주화"는 "밥을 실제로 먹여 주는"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1) 재벌중심 구조의 효율성이 어느 정도까지나 다른 대안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것이며, 2) 공평하고도 생산성을 해치지 않는 분배의 구체적 실천론이 무엇이 있겠는가에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정 박사로부터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합니다.

 

정박사는 아주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비판하는 건 이 대목에서 보수세력이 아니라, 진보세력의 무용한 대안 제시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재벌을 해체해서 단지 부의 소유 형태를 바꾸는 건,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의 변신 외에 아무 결과도 가져 오지 못한다는 거죠. 정박사는 냉철하게 "그건 재벌가에게 그리 손해보는 선택도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하나의 재미있는 주장은, 재벌 체제는 비주류가 아닌, "주류경제학"에서 싫어하는 요인이라는 거죠. 시장 경제는 각 경제 주체들이, 전적으로 시장의 룰과 가격이라는 독립 변수에 의해 작동할 때만, 최상의 효율로 이상적인 결과를 빚어냅니다. 재벌 체제는 완전 경쟁이라는 영원한 로망에 장애가 될 뿐이라는 겁니다. 물론 정박사의 관점은, 이런 이유에서 재벌 해체를 말하는 게 아니죠. 그가 주장하는 바는, "민주공화국"의 원리를 정치 아닌 경제분야에까지 확장하여, 기업의 소유와 국가주권의 보유 형태를 단일화하자는 주장입니다. 공산주의에의 혼동을 막기 위해, 그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민주공화국" 조항을 근거하여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2장에서 그는 다소 독특한 주장을 폅니다. 그의 논지를 밀고 나가면 경제는 결국 국가 주도의 방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는 지금 이 책에서 주된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박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식의 개발 독재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의문이 제기되죠. 질문자인 공은비씨도 그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정 박사는 2차대전후 폐허가 된 프랑스를 재건한 드골주의자들의 선례를 보고 배워서, 건전하고 진보적인 국가 주도형 모델을 상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군부독재가 끝나고 김영삼 정부에서 박세일 사단이 들어섬으로 해서, 지금과 같은 자유주의 기조가 자리를 잡았다는 분석입니다. 그가 보기에 지난 파시스트 정권의 국가 드라이브 기조는 그나마 효율성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의 우파가 지지하는 자유주의는 이도저도 아닌 최악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본질적으로 그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독재와 친한 운명이며, 주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완전 경쟁, 자유주의는 허구에 가깝다는 걸 지적합니다. 이런 논리를 밀고 나가면, 흔히 진보진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재벌 해체를 하면, 그나마 책임 소재도 불분명해지고 숨어 있는 경제실력자들이 막후에서 조종을 하는 식으로 체제의 모순이 더욱 심해진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해답은 무엇인가? 현 경제력 집중을 어느 정도 용인하되, 그 의사결정 과정과 평가 장치를 완전히 투명하게 운영하여, 철저히 민주적 통제 아래 두자는 것입니다. 정 박사가 강하게 영향 받고 있는 제도는 독일의 여러 시스템인데, 그 중에서도 공동의사결정제(Mitbestimmung)가 대표적입니다. 종업원이 회사의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제도는, 이를 경제 제 분야에 확장 응용할 여지가 아주 크다는 게 정 박사의 주장입니다. 경제민주화란 이런 수준까지 레벨 업 되어야 그걸 진정한 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정 박사는, 이 책에서 박근혜 정부의 시책을 비판하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아젠다를 잘못 잡고 있는 진보진영을 호되게 질타하고 있습니다. 이미 시체나 마찬가지인 자유주의 노선에는 아무 기대할 것이 없으나, 효과적인 대안을 내놓고 비전을 구체화하는 의무를 방기하는 진보진영의 불투철한 의식이 더 문제라는 쪽으로도 해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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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티르와의 대화 - 현대 말레이시아를 견인한 이슬람 마키아벨리의 힘 아시아의 거인들 3
톰 플레이트 지음, 박세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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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티르는 서양인들에게 "과격한 무슬림을 대변하며, 반미 성향이 강한 독재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지금이라고 해서 그런 평판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만, 유태인을 아내로 두고 있는 톰 플레이트 같은 빼어난 언론인은, 이 인터뷰 가 있기 일찌감치 이전 시점부터 그런 선입견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히티르가 월도프 아스토리아에서 서구의 기자들을 상대로 회견을 열 때, 톰 플레이트는 이미 회견이 끝난 후 어떻게 분위기가 바뀔지 짐작하고, 동료들과 내기를 하기까지 했죠. "멍청하고 아집에 가득한 독재자"란 표현에서, "멍청함"과 "아집"이란 개념은 "독재자"와 거의 동의어 관계입니다. 서양인들이 독재체제에 대해 가지는 혐오감은 그 정도입니다. 하물며 그 독재자가 무슬림이기까지 하다면 말 다한 셈이죠. 그러나 회견장에서, 이 전직 닥터가 보여 준 명철함과 카리스마, 활력과 자기 확신(올바른 신념에 기반한)은 좌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마하티르는 30년을 넘는 세월 동안, 광대한 국가를 통치한 사람입니다. 상대적으로 그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덜 구사하며, 그 긴 임기를 보낸 편입니다. 이 점은 대단히 높이 평가를 받아야겠죠. 이 책이 새삼스럽게 강조하는 것처럼, 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 대열에 듭니다. 무슬림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이루기 때문에, 국제 무대에서 미국 등 서방 세력과 보조를 맞추기 힘들고, 경제 등 실질적 이해관계도 충돌하는 바 많습니다. 무슬림 국가가 언제든 노출되어 있는 위험은, 이슬람 과격파의 발호입니다. 이란이나 이집트의 예에서 볼 수 있듯, 한번 원리주의자가 세력을 잡으면 해당 국가 내의 정정 불안을 야기하거나, 국제 정치 무대에서 분쟁 야기의 핵심 원인으로 떠오르기 쉽습니다. 마하티르가 정권을 잡고 있던 세월 동안, 말레이시아는 그러나 단 한 번도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지 않았고, 국내 경제는 근 50년 동안 6%대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이 비결이 무엇일까요.

 

마하티르는 두 가지 점에서 우리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는, 그 스스로가 "폭력적인 정국 운영은 통치자 스스로의 수치"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터뷰어 톰 플레이트는 마하티르를 두고 "이슬람 마키아벨리"라는 별명을 독자에게 상기시킵니다. 이 호칭은 딱히 비난하는 투라고 보기 힘듭니다. 마키아벨리즘이 상정하는 통치 패턴은, 폭력이라기보다는 교활한 술수에 의존하는 방식에 가깝기 때문이죠. 아시아의 악명 높은 독재자들은, 한결 같이 국민의 피를 보는 결과를 마다하지 않는 폭압을 휘둘러 왔습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역시, 그가 다스린 나라의 영역과 인구가 지극히 작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오명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헌데, 마하티르는 영토와 인구 공히 세계 규모에서 빠지지 않는 광대한 나라를 다스리면서도, 유혈 사태를 지극히 적은 빈도로 겪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수완을 보였습니다. 이 나라가 영역이 방대하고 인구가 많을 뿐 아니라, 풍습과 문화가 다른 다민족 국가라는 점에서 더 주목할 만한 업적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의 신념과 스타일을, 조국의 주어진 환경과 현명하게 타협하는 그의 성격적 유연성과 인격의 깊이입니다. 마하티르는 명문 가문의 소생이고, 서구식 교육을 받고 성장한 엘리트입니다. 리콴유의 예에서 보듯, 이런 사람이면 철저히 서양식 세계관과 사고 방식에 젖기가 쉽습니다. 리콴유가 친서방 행보를 멈추는 순간은, 바로 자신의 이익이 서구와 충돌할 때 바로 그때뿐이었습니다. 헌데 마하티르는, 자신만의 스케일과 관점에서 국제 정치와 외교, 그리고 총체적 비전을 정리하는 지도자인 까닭인지, 보다 말레이시아적인 세팅으로 통치 전략을 수립하고, 이에 맞춰 구체적 행보를 밟아 왔습니다.

 

톰 플레이트는 리콴유와 대담할 때, 민감한 정치 이슈(독재와 후계 문제 등)을 제외하고선 대체로 그와 잘 이야기가 통했던 편이었습니다. 이 점이, 개인적 친분이 깊지 않고, 다소 음험하며 이중적인 리콴유와의 대담이 파국에 이르지 않고 그런 대로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죠. 반면 이 마하티르와의 대담은,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사고 방식이 너무도 다른 탓에, 인터뷰어의 인내와 이해심이 아니면 순조로운 경과를 보기 어려운 자리였을 수 있었습니다. 독자가 객관적으로 본 입장에서는, 이번 인터뷰가 훨씬 솔직하고, 인터뷰이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는 성과를 거둔 자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비결 중 하나는 역시 톰 플레이트의 빼어난 자질(피대담자를 이해하고, 동시에 핵심이 되는 질문을 멋진 포장으로 예의바르게 던질 줄 아는 능력)이겠지만, 다른 요인이라면 마하티르 자신의 인격과 품성이 대정치인의 그것에 걸맞았다는 사실도 한몫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죠. 마하티르는, 인터뷰어인 톰 플레이트가 묘사하는 것처럼, 따뜻하고 화사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얼굴이기도 합니다. 30년 동안 격심한 스트레스가 뒤따르는 포스트에 있으면서, 그만큼이나 자기 관리에 허술하지 않았다는 건 이 인물의 내공이 보통 아님을 암시합니다. 난감한 질문이 나왔을 때, 대답을 회피하거나 질문자의 수준을 한심하게 보는 기색을 비친다든가, 동문서답으로 얼버무리지 않고, 자신의 격정을 그대로 담아 가며 최대한 성실히 대답하는 자세는, 80을 넘은 국제적 거물이 쉽게 보일 수 있는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최소한, 진지한 질문에는 자신이 아는 최선의 답을 해야 하며, 자신의 말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믿는 바를 그대로 담은 것이라야 한다는 신념에 충실했습니다. 이 때문에, 톰 플레이트는 그를 "(그럴 리가 없지만) 순진한 사람이 아닐지" 잠시 의심하기도 했다는 거죠. 이 점에서 리콴유와는 커다란 차이를 보입니다.

 

사실 저는 마하티르가, 자신의 말처럼 순수한 무슬림 원리주의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의 빼어난 두뇌를 이용해서, 이슬람의 깊은 교의를 충분히 이해하고, 국내의 극단주의자들이 정치적 주장을 펴는 근거로 도그마를 동원하기 한 발 앞서 자신이 선수를 치는 방법으로 이용했다고 봅니다. 정연하고 빈틈 없는 그의 논리 앞에, 율법학자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을 겁니다. 그는 원리주의자를 가장하면서, 그 내실은 온건주의자, 평화주의자의 의도를 달성하고자 했던 것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이 이슈에서, 표현을 고르는 데에 대단히 민감해합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톰 플레이트가 문언 확인을 위해 보낸 팩스에 대한 응답에서, 그는 "주류 이슬람"이라는 무난한 표현을 두고서도 끝까지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슬람 충성도가 의심을 받아서는, 국가 붕괴의 위험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충직한 우려에서이겠죠. 이런 건 거짓말로 보기 힘듭니다. 말 그대로 믿어주는 걸로 충분합니다.

 

마하티르는 서양식 고등 교육을 그렇게나 높은 수준까지 받은 사람치고는, 다소 어이없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과연 그는 순진한 인간이었던 걸까요?). 예컨대, 911테러에 대해서는 미국 네오콘의 기획이라는 등 음모론이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진상은 아직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컨대, 빌딩에서 사망자 중 유태인이 한 명도 없었다는 말 따위는 완전한 루머이고, 이 점은 플레이트도 이 책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설사 말하는 대의가 맞다고 해도, 펙트의 디테일을 함부로 왜곡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하티르는, 가장 원시적인 수준에서 이 음모론을 받아 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열렬한 어조로 상대에게 설득하려고까지 했죠. 이런 점은, 뱀처럼 냉정한 리콴유에게서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마하티르의 반유대주의는, 여튼 1998년경 전 아시아에 재앙으로 닥쳐 왔던 금융위기 와중에서, 말레이시아를 굳건히 지켜내는 동인 중 하나로 작용했으니 딱히 탓할 것도 아닙니다. 당시 위기에 빠진 아시아는 두 가지 옵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말레이시아처럼 "마이 웨이"를 고집하는 것, 다른 하나는 IMF에게 경제 주권을 내어 주며 철저한 굴신과 긴축으로 내핍 생활를 하는 것(우리나라처럼)이었죠. 이때 나온 이야기가, "아시아에는 아시아적 가치가 있다."는 그의 유명한 언급이었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공개적으로 대립한 이슈이기도 한데, 정작 사석에서는 김 대통령에게 깍듯한 예우를 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김 대통령이 그보다 연장자였으니, 과연 "아시아적 가치" 운운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옮기기까지 한 셈이었네요.

 

마하티르는 다른 아시아의 독재자들에게서 찾아 보기 힘든 청렴성을 지닌 이이기도 합니다. 그의 보수 수준을 묻고서, 그게 주 단위의 금액인지, 월 단위의 금액인지 톰 플레이트는 몇 번이고 묻습니다. 퇴임 최고 통치자에 대한 예우치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뜻에서이죠. 화제는 자연스럽게 리콴유에 대한 것으로 옮아갑니다. 마하티르는 의미심장하게, "그(리콴유)는 그리 깨끗한 인물이 아니다. 아직도 경제권을 자기 손에 쥐고 있는 자"라는 암시를 합니다(국부 펀드의 지분을 통해). 그 같은 사람이 말하는 바니 믿음이 갈 수도 있고, 영원한 라이벌에 대한 평가가 공정하길 기대하기란 힘들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에누리가 필요하지 싶기도 합니다.  아니면, 혹시 자신도 비슷한 경로로 국가의 돈줄을 쥐고 흔드는 위치라서 그럴까요? 한때 자신이 후계자로 키웠던 안와르 부총리를, 억울한 혐의를 씌워 투옥하고 고초를 겪게 했던 비정한 보스, 현직 총리를 가차없이 비판하여 자신과는 대조적으로 짧은 임기만을 마치고 내려오게 하는 막후 실력자. 그는 미국식의 4년 중임제에 대해, "지도자가 그 비전을 실현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기간"이라는 진단을 내어 놓습니다. 우리 나라 개헌 몽상가들이 멀리서 듣고 반길 언급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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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디자인 북 - 잘나가는 인생 : 남부럽지 않은 인생 : 개념 있는 인생
박정효 지음 / 알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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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직 대학생인 시절까지만 해도, 남다른 인생을 꿈꾸고 뭔가 참신하며 새로운 일, 남들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 수단이 없을지 여러 모로 궁리를 합니다. 남들보다 안정되고 수입이 더 높은 직장에 취직하는 데까지 성공합니다. 대기업이라는 곳은 물론 모두가 선망하는 직장이나, 반면 제한된 과업만 수행하다 보니 창의력과 활력이 점점 고갈되어 가는 면이 있습니다. 제아무리 열심히 업무에 매진한다 해도 임원이 될 수 있는 길은 좁고도 좁습니다. 인생의 어느 기로에 서서, "왜 남들보다 더 현명하게,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단 말인가?"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의문을 품고 이 책의 저자는 걸어온 삶의 전면적 리빌딩을 꾀합니다. 그 결과물이 이 산뜻하고 유익한 정보로 가득한 책입니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장은 행복을 디자인하다
둘째 장은 "행복나무 프로젝트"
셋째 장은 "하하 프로젝트"
넷째 장은 행복 꽃 피우기


이렇게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행 복이란 주관적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해 철저히 조절되는 구조이다 보니, 주관적 느낌만으로 행복을 달성하기란 극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행복의 토대가 되는 재산적 토대, 혹은 객관적 지표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를 철저히 관리할 것을 주문합니다. "행복 디자인"의 대전제는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특수한 체험, 즉 노천탕에서의 돌연한 깨달음, "유레카"를 통해서, 행복을 정의하는 네 가지 문장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긍정적인 정서를 경험하는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으면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쇼핑몰,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과제를 설계하고 그에 몰입할 수 있는 작업실, ... 중요한 것은, "이곳과 이 시각이면 나는 행복해지며, 정신의 활력이 최고조로 높아진다"고 여길 만한 모멘텀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둘째는, 행복과 불행의 요소를 잘 조절하는 균형감각이 중요하 다는 말입니다. 이를 저자는, 뜨거운 수도꼭지와 찬 수도꼭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물만 고집하는 사람은 화상을 입을 것이며, 반대로 냉수만 몸에 끼얹다가는 건강에 해로운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아무리 행복한 사람도, 가끔한 절제와 고행을 치르어야 정신의 건강성이 유지된다는 말로 풀이됩니다. 저는 최근에 세원그룹 김문기 회장의 성공 스토리를 읽었는데, 이분은 어려서 천석꾼 집안에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란 인생이었고, 주유소 하나를 증여받아 평생 편하게 먹고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찾아온 깨달음은, "이렇게 살다가는 인간쓰레기로 생을 망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유소 경영이 만만한 일이라는 게 아니라, 생계가 주유소 경영의 성황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보니 간판만 걸었을 뿐 정작 자신은 향락 위주로 시간을 보내고 있더라는 거죠. 넉넉한 사람도 마른 자리만 골라 찾다 보면,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생으로 전락하기 쉽고, 바로 이것이 "행복의 수도꼭지" 이론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셋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머리 끝까지 온수에 담글 수는 없다." 아무리 안온한 느낌을 주는 온수라도, 마냥 잠수를 하고 있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것이나 같은 이치죠. 좋은 것이라고 절제 없이 탐닉하면, 안 하느니만도 못합니다. 위의 둘째 원칙과 결국은 같은 맥락입니다.

넷째는 "집에서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입니다. 일상에서 의외로 작은 것에서 큰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이 책 저자를 예로 들면 반드시 노천탕에 가야먄 안락한 목욕의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죠. 행복을 실천하고 중폭함에 있어 중요한 건 언제나 마음가짐입니다.

저자는 논의 과정에서 재미있는 예를 듭니다.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다단계 판매구조위험성과 허황됨에, 왜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이 현혹되어 소중한 인생을 망치기까지 하는가? 답은 간단합니다. 분위기에 휩쓸리고 성공한 예만 눈 앞에 보여주며, 대체로 소외되어 있던 이들에게 공동체 생활과 소속감을 불러 넣어 주면, 건전한 판단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거죠. 행복을 디자인함에 있어 구체적 내용 형성 못지 않게 중요한 건, 불행을 가져다 주는 요인을 극력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 p79에, 그 실천 요령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어 느 사업가는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업이란 결국 약자를 공략하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강자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치사하게 약자를 착취하는 식으로 살지는 말자고 생각하곤 합니다만, 세상 돌아가는 일이 이처럼이나 비정한가 봅니다. 부모님들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소속 집단의 결정에서 절대 을(乙)의 위치에 놓이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복을 디자인할 것인가?


저 자는 "행복나무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불룸컴퍼니가 주관하는, 프로젝트 기반의 학습 과정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입니다. "자신의 긍정 정체성을 다양한 관점에서 탐색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언어로 표현"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핵심 과정이라고 하는군요.

역시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사 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는 부정적인 것도 있고 긍정적인 것도 있습니다만, 행복의 탐색을 시작할 때에는 긍정 요소로부터의 시작이 원칙입니다. 그 이유에 대한 저자의 설명도 명쾌합니다. 행복이라는 게 본디 주관적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자신의 긍정 요소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 행복의 진정한 단계에까지 올라설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프로젝트의 개념은 크게 "토양-나무-씨앗"으로 구성됩니다.

1단계: 토양 다지기
시 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 일단 기분 좋게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기분이 좋아지기만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자는 이를 위해 체크리스트를 주고 자신의 환경을 점검할 것을 권합니다. 별 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토양이 부실하면 나무가 자랄 수 없음은 매우 당연한 이치입니다.
2단계: 씨앗 나누기 (긍정 관점 열기)
이 단계에서 중요한 건, 나를 둘러싼 주변인들과의 관계의 건강성을 점검하는 일입니다. 행복이 아무리 주관적이라 한들,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철저한 주관 한계 안에서라면 큰 의미가 없고, 우리는 누구나 사회 속에서의 소통을 통해서만 의미를 지니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3단계: 씨앗 모으기
나 자신 안에 놓여 있는 긍정적 요소를 모두 관찰하는 단계입니다. 어떤 것이 건전한 열매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인지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모색하는 순서로 보면 되겠습니다. 막연하게 시도할 게 아니라 이 체크리스트에 빈칸을 채워나가는 방식이 권장됩니다.


4단계: 나무세우기
이 프로젝트에서 중추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모든 가능성을 다 안고 과업을 진행하면, 제아무리 유능한 인재라도 과업 수행에 무리가 오는 게 당연합니다. 버릴 건 버리고, 가장 좋은 것만 골라서 효율적인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일단 저자가 권하는 모범적인 샘플 리스트에서는 8개의 긍정 요소만 선택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숫자는 개인 혹은 모임의 성격에 따라 증감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5단계: 나무 키우기
아 무리 긍정적 가능성이 많았다 해도, 성장 과정에서 체계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커스와 누리우스의 언급을 빌려, 보다 구체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전 단계에서 취해진 8가지 선택 방안을 다듬고 키워 나가는 것입니다.


이 책은 프로젝트 진행과 참여를 위한 교재입니다. 따라서 혼자서 해보는 것도 물론 의미있는 작업이지만, 비슷한 동기를 지니고 유사한 상황에 처한 이들끼리 동아리를 엮어 실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행복하고 싶고, 주어진 여건 안에서 최대한 기쁨을 찾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행복 역시 노력과 성과가 일정 함수 관계를 지니는 인간의 일인 이상, 그 성취를 위해서는 분명한 이정표와 스케줄,  패러다임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이 책은, "행복에도 그를 많이, 빨리 얻기 위한 공식과 지름길이 있다"는 명제를 확인시켜 주는 귀중한 "실천 매뉴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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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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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키라고 하면 막연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연상시키는 도식화한 승리담 -내지 궁상맞은 가난과 착취 학대의 참상)"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죄 없는 민중들은, 무능하고 탐욕스럽기까지 한 지배구조의 서슬 퍼런 압제 하에 정말로 참혹한 일상을 살았죠. 지배 계급이 가난하고 힘 없는 이들을 보살펴 주기는커녕,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수탈과 폭력을 일삼았으니까요. 하지만 문학 작품에서, 그것도 대단히 판에 박인 방식으로, 격한 어조와 살벌한 비주얼의 "인생극장"를 보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이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은 그의 장편 <어머니>도 아주 건성으로 보았기에,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은 그 내용이 뭐였는지도 기억 나지 않았습니다.

작가정신에서 국내 처음으로 소개하는 이번 고리키의 단편선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저는 그 유명하다는 <어머니>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의외로 재미있더라구요. 제게 그 이전 체홉이나 투르게네프 등이 재미있었던, 감동적이었던 그런 스타일로 재미있었고나 할까요. 작가가 누가 되었건, 어떤 시대에 살며 무슨 사상과 그 신봉자들의 영향을 받았건 간에, 이들 러시아 작가들이 쓰는 풍이 어느 정도 공통점이 있고, 말하는 방법과 그 내용이 참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갖게 되었습니다.

 

여튼 그 <어머니>를 다 읽고 나서 이 책을 열게 되었죠. 단편이나 장편이나, 고리키의 스타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예습 과정"이 필요한 건 아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의 성취는 러시아 문학의 모범적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때로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유쾌한 옛날 이야기처럼 재미있고, 때로는 애들 놀래켜 주려고 뜬금없이 고안된 괴담처럼 무섭기도 한 분위기 속에, 우리들 인간이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하는 그 아득한 가치, 혹은 영혼의 순수성 같은 걸, 끊임 없이 경각시켜 주는 것도 같았습니다.

이 책에는 모드 열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이 중에는 서로가 서로를 닮은 것도 있고, 어느 한 편이 다른 이야기들을 추상화, 혹은 귀납하여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리해 주는 듯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고리키는 이 중 어느 작품에서나, "네 영혼을 더럽히지 마라.","신은 언제나 악마보다 더 멀리 떨어져서 널 지켜 보고 있지만, 너에게 악마보다 더 깊고 근원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았네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신"이라는 게, 꼭 기독교적 의미의 유일신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인과응보 권선징악을 모토로 내세우는 신령님인데, 다만 민중에게(그리고 지식인에게) 죄의식을 더 강조한다는 게 차이점인 정도의 그런 존재라고나 할지.

 

<마부>
아닌게아니라 이 작품 중에, 도스토옙스끼의 캐릭터 라스콜리니코프가 바로 대화 중에 언급되기도 합니다. "비범인은 범인(凡人)을 죽여도 경우에 따라 죄가 될 것 없다!" 어디서 왔는지, 행동 동기가 무엇인지 모를 마부는 파벨 니콜라예비치에게 "저런 쓸모 없고 사악한 노파는 죽여도 나쁠 게 없으며, 인류 사회에 봉사하는 길이기까지 하다."고 속삭입니다. 악마는 본시 웅변하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이처럼 유혹적으로 속삭인다는 게 성격의 공통이고 스타일의 전통이죠.

고리키가 아무리 도스토옙스키를 내심 존경하고 있었다고 해도, 작품 속에 대놓고 라스콜리니코프를 언급한 건 작가로서 선뜻 내키지 않았을 텐데.... 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캐릭터 파벨 니콜라예비치와 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는 데 확신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제가 정리한 바론 이렇습니다.

 

첫째로, 라스콜리니코프는 범행 전에 그 자신의 명철한 이성으로 분명한 결론에 도달한 바 있었습니다. "내가 이런 노파를 죽이는 건 죄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쏘냐와 함께 있을 때이건,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있을 때건, "죄의식"이란 녀석이 그를 한시도 편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대지에 키스한 후, 법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의탁하게 됩니다. 반면 우리의 파벨 니콜라예비치는, 노파를 죽인 것도 부족해 collateral damage로 죄 없는 젊은 여성 한 명까지 해치고 나서도, 아무런 가책이 없습니다. 그가 사전에 라스콜리니코프를 들먹인 것도, 어쩌면 적발되지 않고 일생을 편하게 살기보다, 적정 시점에 죄의식의 발동으로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장엄한 최후를 맞이해 보자는 은근한 소망이 있었던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에게 대단히 실망스럽게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리도 바라마지 않았던, "비범인의 평정심"을 지닌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거죠.

둘째로, 그는 이 때문에 절망에 빠진다는 점에서 라스콜리니코프와 크게 다릅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의식 때문에, "신 앞에서 나 역시 별다를 게 없는 불쌍한 영혼이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지만, 파벨 니콜라예비치는 "과연 내 안에는 아무런 규범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는 수치심으로 괴로워합니다. 죄의식이 없는 존재는 우월한 비범인이 아니라, 짐승 같은 하등한 존재라는 각성을 그는 이미 하고 있었던 거죠. 요즘말로 하면, 그는 스스로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던가 하는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처벌을 라스콜리니코프와 다른 방법으로 집행합니다. 많은 사람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에게 존경심과 두려움을 품고 있었던, 비루하고 비굴한 이들 앞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커밍아웃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분노했는데, 그것은 사악한 범죄자에 대한 의분이 아니라, (작품에서 분명히 나오듯이) 모욕감에서 비롯한 행동이었습니다. 죄 지은 자를 처벌하라! 가 아니라, 이런 작자에게 그토록 오랜 동안 굽신거리고 산 억울함이 더 앞섰던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은 자라야 죄인에게 돌을 던질 텐데, 이 소소하고 구차한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파벨 니콜라예비치에게 돌을 던집니다. 마치 예수 옆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처럼, 그는 자신이 분명 큰 죄인이지만, 다른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는 희생양이기도 합니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굳이 큰 소리로 공표함으로써, 용기와 확신이 부족해서 살인만 하지 않았다 뿐 일상에서 영혼 팔기를 거리껴하지 않는 그 숱한 추악한 죄인들과 함께 운명의 저울에 달리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깨끗한 순교자로 혼자 죽은 라스콜리니코프와 다릅니다. 또 그의 옆에는 천사적 조언자인 쏘냐가 없었던 대신, "마부"라는 악마적 조력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차이이겠습니다.

사실 그는 운명의 파멸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마치 엄청난 파장과 뒷수습의 두려움 앞에서도 "진실은 여튼 밝혀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결말에서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는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습니다. 이 천역덕스러움은 느닷 동양풍의 남가일몽 고사에서 영향이라도 받은 듯, "모든 것이 꿈이었어."라는 다소 황당한 결말로 이어집니다. 아마 이 장치는, :"나는 도스토옙스끼라는 거장의 터치에는 못 미치는 하수입니다." 같은 자못 겸손된 태도를 취하는, 고리키 특유의 유머일수도 있고,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 존재를 건 파국의 속죄란, 감히 현실에서 수용할 수 없는 영웅적 결단일 뿐이라는 암시일 수도 있습니다.

 

<환영>
이 모든 것을 꿈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진짜 늙은 주인공 한 사람이 더 나옵니다. 포마 모솔로프는 구두쇠입니다. 자신 못지 않은 구두쇠이고 지난 시대의 낡은 규범을 자신에게나 주변에게나 강철 같은 태도로 강제하는 지독한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살아 온 죗값은 못난 후손을 보게 하는 식으로 치르는 게 하늘의 섭리인가 봅니다. 자신의 아들은, 말로는 그럴싸하게 "시대가 변했으니 다른 방법으로 재산을 쓸 줄도 알아야 우리 가문의 영향력이 더 커진다." 같은 궤변을 떠들지만, 내심은 그저 자신의 방탕벽을 합리화하려는 얄팍한 계산 뿐입니다. "저 녀석은, 제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맞아 죽었을 테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겪은 억압과 자기 부정으로 인한 내심의 상처 때문에, 망나니 아들에게 엄하게 굴질 못합니다. 바로 이 때, "당신이 취해야 할 현명한 방책이 뭔지 알려 주마!" 며 느닷 나타난 존재가 있습니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는데, 아마 저 앞 다른 무대에서 파벨 니콜라예비치가 만난 "마부"가 변장을 하고 나타난 놈일수도 있습니다. 포마 모솔로프는 그를 "인간-영혼"이라는 이름으로 일단 부르고 싶어하지만, 사실 이런 명명 속에 이미 정체가 드러나 버린 거나 마찬가지네요. 이반 카라마조프에게 (이복 동생) 스메르자코프가 자기 자신의 메피스토펠레스적 분신이나 마찬가지였듯, 이 괴령 역시 마부나 비슷하게 결국 자신의 마음 한 켠에서 빚어진 의식의 덩어리입니다. 숨막힐 듯한 나르시즘으로 무장한 그이기에, 이 정체불명의 목소리에게, "당신, 짱이에연!"하고 탄성을 지를 수 있는 게죠(p58: 16).

 

<종>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이 단편에는 "크리스마스 주간"이란 부제가 없는데, 이는 소설의 배경이 빤히 나와 있는 것처럼 기독교의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에밀레종 설화에도 나오듯이, 종이란 주조물이 제대로 오랜 세월 그 기능을 하려면 제작 과정에서 장인적 기술 못지 않게, 뭔가 초자연적이라 할 만큼 상당한 정성이 들어가야 하나 봅니다. 마을에서 대단히 큰 미움을 받지만 그 영향력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안티프 프라호프는, 저 대서양 북쪽에 위치한 섬나라가 빚어낸 고유한 구두쇠상 스크루지와도 비슷한 성격입니다. 그와 차이가 있다면, 크리스마스를 자신의 회심이 빚은 기쁨으로 그 아침을 맞게 된 스쿠루지와는 달리, 부활절 전야에 그토록 마음 한구석에서 평정심을 갉아 먹던 불길한 예감, "종이 깨질지도 모른다." 가 현실화되었다는 참담한 체험입니다. 사실 종소리는 그의 위신과 체면, "시장 당선"을 위한 전제조건이긴 했지만, 오히려 그 종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서는 안된다는 점도 이미 프라호프 자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종소리"는 본디 양심의 가책을 상징합니다. 만약 부활절 새벽에 종소리를 듣는다면, 이는 아마 그의 더 오래된, 제 인생의 기억에 켜켜이 쌓인 그 모든 죄악을 송두리째 들고 일어나게 했을 텝니다(영화 <스파이더맨3>에도 나오듯이). 종소리가 들린다면, 이처럼 그는 존재 자체가 붕괴했을 테고, 만약 안 들리면 이는 일시적으로 마을에서 자신의 체면이 깎이는 결과 정도에 그칩니다. 저는 이 결말에서 그는 짐짓 패배(남들이 모두 부활의 기쁨을 맞이하는 순간, 자신만은 종의 균열과 더불어 홀로 저주받았다는 죽음과 같은 수치를 느껴야 함)를 가장하지만, 층계를 내려가는 걸음은 안도로 가득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종이 깨어진 것으로, 그는 일시적인 죗값을 치른 것입니다. 그가 정말로 분노했다면, 워낙 악질의 성품인 이상 종지기 노인 루카에게 엄청난 분풀이를 하고 바로 해고했을 것입니다. 헌데, 왠지 모르는 사이에 종에다가 미심쩍은 짓깨나 했을 법한 노인을 그냥 넘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로맨스>
최소한, 연하의 소년이 연상의 여인(많이 연상은 아니지만)으로부터 충격적이라 할 만한 연정의 컴팩트를 접하고, 영혼이 빠져나간 듯 황폐해진다는 설정은 투르게니예프의 <첫사랑>을 닮았습니다. 여기 나오는 소년은, 마치 여의도에 밀집한 금융가에서, 재빠르고 센스있게 배달과 퀵서비스를 전담하는 모 실존 인물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니면, 에드가 스노의 르포 <중국의 붉은 별>에 나오는 어린 홍군("홍위병" 아님!) 소년을 연상하게도 하죠. 장개석의 추격전에 당장 오늘 저녁이라도 생명이 날아갈 수 있는 위험 속에서, 셔츠 깃 하나를 세우는데도 온갖 멋을 다 부리는 스트리트- 스마트 타입. 일이 고되고 궂다 보니 얼굴에 묻은 때를 씻어낼 시간도 없지만, 그 와중에서도 타고난 외모의 맵시를 가꿀 생각에 여념이 없습니다. 어느 날 공장에서 갑자기 사고를 당하고, 이런 사고는 보통 신체일부가 불구가 되는 걸로 귀착이 잘 나지만 천만다행히도 그런 결과는 면했나 봅니다. 그런데 이건 웬걸, 어떤 누나(정도겠죠?)뻘 되는 여인에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쇼크를 입고, 어떤 육신의 상처 없이도 구제불능의 폐인지경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이런 설정에서 꼭 훼방꾼 연적으로는 군인이 등장하는데, 아마 자신이 갖지 못한 남성성의 총체를 상징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완껏 접근하다 보면 꼭 안되라는 법도 없고(신분이나 재산 따위의 벽이 있는지도 딱부러지게 안 나옵니다), 면전에서 거절을 당한 것도 아닌데, 여튼 짝사랑은 바로 파국으로 치닫고, 그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마치 서른은 넘은 듯한 찌들고 늙은, 생명의 불꽃을 잃은 듯한 외모로 바뀝니다. 작가가 하고자 했던 말은, 찬란하게 빛나는 청춘도 한 순간에 시들게 할 수 있는 그 찰나적 연정의 불운한 교차 따위가 얼마나 하잘것없는 원인인지를 지적하며, 우리네 인생의 그 숱한 격정과 환희 따위의 부질없음을 지적하고 잇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푸른 눈의 여인>
여기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목소리는 경찰관 조심 키릴로비치입니다. 어느 여인이 그를 찾아오는데, 사연이란 한심합니다. 매춘부로 등록해 달라는 거죠. 아이가 여럿이고 남편은 죽어서 생계를 꾸려 갈 도리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여인을 믿지 않습니다. 자신의 타락과 음욕을 두루 채우고 손쉽게 돈도 벌 생각인데, 거짓으로 명분을 꾸려 대고 있다고 본 거죠. 하지만 우연히도 그녀의 이어지는행적을 지켜 보게 되고, 자신에게 털어 놓은 말들이 다 사실임도 확인합니다. 생의참상과 질곡 속에 어쩔 수 없이 몸을 팔게 되지만, 감춰진 내적 동기는 지극히 숭고한, 그러면서도 전형적인 러시아의 어머니상이었던 것이죠. 경찰관이란 직책이 제정러시아에서 대단히, 반민중적이고 잔인한 압제적 체제의 주구였다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리키는 이 조심 키릴로비치를 냉정하고 공정한 제3자적 조력자의 시야에 둠으로써, 민중 스스로 오해하기 쉬운 취약 계층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베풀고 있습니다. 여인을 단죄할 때, 그는 어리석은 대중의 손쉬운 군중심리에 매몰되지만, 다시 공정한 법집행자이자 심판관의 위치로 복귀할 때, 그는 사물의 진상을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쿨리나 할머니>
역자 이수경 박사님은 이 아쿨리나 할머니가 진짜 고리키의 외조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이라면 참 놀라운 일인데요. 막심 고리키 자신이 최하층 빈민 출신이니 가능성이 없지도 않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이 아쿨리나 할머니라는 존재를, 자신도 천대 받으면서 자신보다 더 못한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어떤 상징적인 존재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여기서 할머니한테 빌붙고 사는 자들은 계층과 연령대도 다양합니다. 그 중에는 "변호사"도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민중을 보호하고 구호해야 할 지배계층이, 전혀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근로 대중에 기식하고 사는 기막힌 참상, 그 와중에서도 "어머니 대지"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체제의 모순과 병폐를 고스란히 자기 희생으로 떠받치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민중의 어떤 화신 정도로 해석했습니다.

 

<이제르길 노파>
같은 러시아 할머니지만 이분은 정말 "자유부인"으로 한 생을 화끈하게 살다가, 육체적 매력이 다했구나 싶은 순간 화류계 생활을 과감히 정리하고 조용히 명상적 정착 생활로 패턴 체인지를 했다는 점에서, 위의 아쿨리나 님하고는 차이가 많이 나죠(정도가 아니라 극과 극). 러시아는 우리가 알다시피 이 무렵 제정 체제로 인근 나라와 민족들을 많이도 괴롭혔습니다. 한때는 더 강력한 국력으로 볼가 강 유역을 넘봤던 투르크 제국의 국민, 루마니아인, 뱀처럼 사악하면서도 "그리스인이 무슨 상관이라고 제가 나선" 폴란드 귀족, ... 등등 해서 거쳐간 남자만도 셀 수없이 많습니다. 매춘부 생활은 했지만, 돈을 푸대자루로 들고 와서 그녀의 머리 위로 퍼 부은 늙은 부자 영감에게 끝까지 몸을 허락하지 않은, 강단과 주관이 강한 여인이었죠. 이제 그녀는 인생의 황혼에 서서 마치 초자연적 염력이나 발휘하듯, "네 눈엔 저 먹구름의 그림자가 그림자로만 보이디? 저건 불멸의 라라라는 녀석이다." "저 빛깔이 푸른 색이더냐? 하긴 이제 내 눈에는 색이 안 보이지만 아마 그럴게다. 저건 제 손으로 제 심장을 꺼내 흩뿌린 단코의 자취지."

 

역자는 라라를 두고 극단적 이기주의자, 단코를 이타주의자, 그리고 이베르길 노파를 그 가운데 선 리버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노파의 일생을 거쳐간 그 수많은 남자들 중에, 특별히 노인의 영혼을 홀렸던 남자 둘의 이상형을 그리 우화적으로 풀어 놓은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다른 말로, 라라와 단코는 같은 인물의 다른 두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대중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범한 존재를 중상 모략하고 저주합니다. 그 비범한 존재가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면, 그는 무리에서 추방당한 파문자가 되지만, 그렇다고 그 불멸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우월성의 증거인데, 범속한 무리들 사이에선 오히려 저주의 징표가 되는 것입니다. 단코 역시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추종자들로부터 "우리를 잘못 인도하고 있다!"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심장을 꺼내들고 순교를 한 그 순간부터, 그는 정의와 박애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피맛을 보아야 대중은 유순해지고, 자신의 분수를 알게 됩니다. 자유로운 여성 이제르길은 그 모든 어리석음을 경멸하고, 자신에 내재한 모성을 발동시켜 그 가장 우수한 유전자만을 남겨 자신의 힘으로 배태할 것을 열망합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오로지 비범한 남성과의 결합이었으며, 혹은 그녀 자신에 내재한 아니무스에의 간절한 희구였다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라라와 단코는 결국 이제르길 노파 영혼의 가장 빛나는 한 귀퉁이를 잘라 빚은 펜던트였다고 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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