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리뷰어 모집 이벤트] 

 

 

책과 문화상품권을 동시에 받는다!

소설 [무게]의 첫 독자, 첫 리뷰어를 모집합니다.

 

10월 17일 출간

 

 

혼자라고 느껴질 때,  

혼자라는 사실엔 어떤 의미가 있어서 혼자여도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여 보셨나요? 그럼에도 끊임없이 외롭진 않으셨나요?  

 

어쩌면 이 외로움에서 멀리 벗어나 달리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다면,  

지금. 소설 [무게]의 첫 독자가 되어주십시오.

 

자신의 마음속에 품고 있던 모든 두려움과 희망을 물처럼 쏟아내고 싶은 독자 100분을 소설 [무게]의 첫 독자로 모시고 싶습니다. 

 

첫 독자 100인에 선정되신 후 리뷰를 보내주신 모든 분께는 또 다른 독서를 위한 문화상품권을 추가로 드립니다. 

 


 

상품  

1. 소설 [무게] 1권, 총 100명(10월 10일 발송 예정) 

2. 컬처랜드 문화상품권 5,000원 기프티콘(당첨된 100분 중 리뷰를 작성하신 분에게 추가 발송.) 

* 리뷰는 파일로 받지 않습니다. 블로그 등 리뷰를 남겨주신 URL만을 받습니다. URL을 보내주실 곳은 당첨자 발표와 함께 알려드립니다. 

 

참여법 

1. 본 게시물을 스크랩하신 후 아래 링크로 이동하여 스크랩하신 URL과 당첨 연락을 받을 이메일, 전화번호를 남겨주세요.(스크랩은 네이버, 다음, 페이스북, 서점 블로그 등 어느 곳이라도 괜찮습니다.)

남기는 곳 >> http://bit.ly/1bZLno5 

 

[퍼스트 리뷰어 이벤트] 일정

- 10월 8일까지 접수 가능

- 10월 9일 첫 독자 100명 발표 

(문예출판사 블로그에 당첨 발표 후 당첨자에겐 개별 연락드립니다.)  

- 10월 10일부터 도서 발송.  

- 10월 28일까지 리뷰 URL을 보내주신 분께 문화상품권 5,000원 추가 증정

 

[무게] 북트레일러

 

 

 

■ 추천평 

 

가슴 저미는 슬픔 속에서도 담담하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설...완전한 타인들이 만나 이루는 관계를 아름답게 그린다._《오프라 매거진》 

절제된 표현에 담긴 강렬한 감정이 독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_《파이낸셜 타임스》  

무어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놀랍도록 독창적인 이야기다._《뉴요커》  

가끔, 유려한 문체와 영원히 기억에 남을 잊지 못할 주인공들이 나오는 책을 만나게 된다. 이 소설은 눈에 띄게 근사한 작품이다. 나는 마음에 들었다._제니퍼 와이너(소설가)    

리즈 무어의 두 번째 소설은 복잡하게 얽힌 미국의 목소리를 담아낸다. 어느 소설가의 작품으로 독자는 너무도 쉽게 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안으로 숨어들고, 어둠 속에 파묻히는 세대에 공감하고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 소설은 그 속으로 들어가 숨어 있는 사람을 세상 밖으로 이끌어낸다. 우리 세대의 젊고 멋진 목소리가 탄생시킨, 긴장감 있으면서도 상처를 회복하게 하는 소설이다._칼럼 매캔(소설가)  

진정한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무어는 책장을 덮고 나서도 오래도록 마음을 떠나지 않을 소설을 썼다. 병적으로 비만한 교수나 십대 운동선수 아이에 대해 무어가 그 모든 걸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알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아름다운 책이다._러셀 뱅크스(소설가) 


이 소설은 연민과 명민한 시각을 훌륭하게 결합한 작품이다. 리즈 무어는 두 사람의 목소리—부유하고 교양 있으며 비만인 광장공포증 환자와 부모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십대 야구 선수—로 이야기하는 모험을 했고 이 모험은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다. 보기 드물게 독창적이고 세련된 소설이다._메리 고든(영화배우) 

이 소설에서 리즈 무어가 만들어낸 연약하고 외로운 사회 부적응자들은 독자의 마음을 무너뜨려놓고는 다시 행복으로 가득 차게 만든다. 탁월한 소설이다!_앤 후드(소설가)  

비만인 교수와 용커스 출신 야구 영재에 대한 소설이 유려하면서도 심오한 의미를 담아낼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노라고 독자들에게 자신 있게 말한다. 이 소설은 내게 큰 기쁨을 주었다._존 레이(소설가)  

 

 

 

 

 

 

올가을에 가장 잘 어울릴,
비감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소설
 

-외로움과 결핍의 무게를 짊어진 이들의 따뜻한 소통 

 

 

감성, 연민, 절망, 희망으로 엮인 세 사람의 나란한 동행 

 


이번 가을, 독자들을 적적한 감성에 젖게 할 근사한 소설 한 편이 선보인다. 《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문예출판사)이라는 미국의 젊은 작가 리즈 무어의 독창적인 작품이다. 출간되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 매체로부터 경이로운 찬사를 수없이 받아온 이 소설은 타인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 모습에 깊게 공감하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수줍음과 외로움으로 자기 주위에 스스로 커튼을 친 연약하고도 사랑스러운 세 인물, 아서, 켈, 샬린이 있다. 

 

쉰여덟의 은퇴한 대학교수인 아서는 250kg에 달할 만큼 몸이 병적으로 뚱뚱하다. 삶에 대한 실망이 주는 무게는 그를 십 년이 넘도록 뉴욕의 집 안에 숨어 살도록 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부자인 데다가 건축가로 매우 성공한 아버지도 있고, 부모님께 물려받은 아름다운 가구들과 책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 중의 어떤 것도 아서의 결핍을 메꾸어주진 못한다. 아서는 몇십 년 동안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그러나 정작 필요하지 않은 행운을 내팽겨둔 채로 살아간다. 온라인으로 쇼핑하는 것을 제외하고, 아서가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일은 그의 예전 여자 친구이자 야간 학교 학생이었던 샬린과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편지에서 샬린에게 자신에 대해 많은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자신이 품은 예민하고 나약한 자의식, 결핍, 소망을 수줍게 고백하며 자기 자신의 모습과 삶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한편 브루클린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가난한 동네 용커스라는 마을에 사는 열일곱 살 켈 켈러는 엄마 샬린 터너의 고집으로 펠스 랜딩이라는 부자 동네의 학교에 다니는 불쌍하고 외로운 고등학생이다. 아버지의 부재, 술로 인생을 사는 엄마의 망가지는 모습, 부유한 동급 학생들의 삶에서 박탈감과 열등감을 느끼지만, 야구 실력을 비롯한 운동신경이 뛰어나 학교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고, 메이저리그에서 뛰려는 꿈을 품은 아이다. 그러나 많이 배우고 똑똑해지고 싶어 했던 샬린은 경제적인 여건과 갑작스럽게 태어난 아들 켈에 의해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일까, 샬린은 프로야구 선수가 되려는 켈의 꿈을 인정하지 않고 켈을 대학에 보내고자 한다. 그리고 켈의 대학 진학에 대한 조언을 부탁하고자 오랜 세월 연락을 끊었던 예전 남자 친구인 아서에게 한 통의 전화를 걸게 된다. 

 

 아서는 갑작스레 걸려온 샬린의 전화로 인해 삶의 전환점을 맞는다. 샬린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에 그는 잠시 주춤하지만 마침내 켈을 맞아들일 용기를 내고, 그 첫걸음으로 오랜 세월 먼지에 뒤덮여 있던 자신의 집을 청소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의 집에 찾아온,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될 운명에 처한 청소부 욜란다와의 대화가 시작된다. 그 둘 사이에 조심스럽게 피어나는 잔잔한 애정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삶을 열려는 아서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격려한다. 

 

아서와 켈, 둘 다 가족과 친구의 정에 고파 하는 외로운 이들이다. 이 두 인물이 샬린이라는 위태로운 다리를 거쳐 자신들만의 가족을 만들 수 있을까? 외모만큼이나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개성 있는 목소리는 독자의 주의를 이끌기에 충분하고, 소설의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시간의 분초를 샐 틈 없이 그 결말은 어느새 눈앞에 다가와 있을 것이다.


우리네 마음을 산산이 부서뜨리고 다시 엮어줄 아름다운 소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등장인물인 아서, 샬린, 켈 모두는 가족의 정에 대한 결핍, 외로움, 채워지지 않는 소망으로 인한 고독을 느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 음식, 술, 야구 등 무언가 다른 대체물에 중독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진짜 가족 관계에 있지 않은 등장인물들이 서로에게 연결되어 위로가 됨으로써 그 중독을 이겨낼 거라는 희망을 전달한다. 소설은 아서와 켈의 교차되는 독백으로 이어지며, 샬린은 그 사이에서 아서와 켈이라는 전혀 다른 두 인물이 연결되도록 하는 숨은 시선이 된다. 

 

겉으로 보기에 전혀 연결될 것 같지 않은 소설의 주인공들을 예기치 않은 한 곳의 장소로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설의 지은이인 리즈 무어의 탁월한 이야기 솜씨 덕분이다. 무어는 타이트하고도 절제된 말솜씨로 아서, 켈, 욜란다가 나란히 걸어가는 길을 만들어낸다. 무어는 사람들이 자기 밖의 세상과 충돌할 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주변에 쌓아두는 보호막, 예를 들어 음식이라든지 젊은이의 객기라든지 운동이나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집착이라든지 하는 것을 덤덤히 묘사한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어둡게 쳐 내린 커튼을 조심스럽게 열어 그들이 숨 쉴 수 있도록 보듬는다는 점에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지은이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아서와 욜란다와 켈의 외모, 그들이 사는 공간, 그들이 사용한 물건에 대한 묘사는 그들 삶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아서의 오래된 낡은 집, 그가 오랜 세월 앉은 채로 떠나지 않았던 소파는 그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지지만 그 빈자리만큼이나 공허하다. 켈의 짧고도 빠른 목소리는 가족의 결핍으로 인해 느끼는 두려움과 억제되지 못하는 십대의 예민함을 전달한다. 곳곳에서 유쾌하게 나열되는 음식의 종류는 소설의 줄기를 이루는 삶의 무거운 고독과 낯설게 조우한다. 앙증맞은 체구에 볼록한 배를 한 욜란다의 모습과 다리 사이로 뱃살이 늘어지는 거구의 아서 또한 어울리지 않을 듯하면서도 산뜻한 조화를 이룬다. 이처럼 작가가 꾸며놓은 독창적인 조합과 어울리게, 소설은 삶과 고독의 무게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언어로 전달한다. 그로 인해 독자는 눈물바람을 하지 않고도 깊은 울림에 빠져드는 독특한 체험을 하게 된다. 덤덤한 절망과 은은한 희망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은 올가을에 가장 잘 어울릴, 비감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여행이 될 것이다.

 


■ 본문 엿보기 

 

■ 위로가 필요해서 나를 위한 만찬을 준비했다. 코코넛과 마카다미아와 화이트초콜릿으로 만든 쿠키, 땅콩 엠앤엠 한 그릇, 씨와 곡물과 짭짤한 소금을 듬뿍 입힌 베이글 몇 개, 버터와 크림치즈를 듬뿍 바르고 빨간 즙이 흐르는 토마토 한 조각을 얹은 베이글 한 개, 전지유 한 주전자와 그 옆에 놓인 키 큰 유리잔 하나, 오레오 쿠키가 덮인 초콜릿 케이크, 햄버거 세 개와 감자 샐러드와 7번가에 있는 식당에서 주문한 크림 시금치. 그 시금치를 스토브 위에서 데우고 한가운데 크림치즈를 약간 얹었다. 깨끗한 녹색 바다 위에 흰색.  

 


이 음식을 모두 먹어도 좋다고 자신에게 허락했고, 그런 허락이 주는 황홀한 해방감을 만끽했다. 아삭아삭 소리가 가만히 입에서 새어나오는 순간 나는 긴장했다. 나는 내 소리를 듣는 게 싫다. 나는 혼잣말을 하지 않는다. 집에서 혼잣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는다. 바보 같아 보인다. 내 목소리를 들으면 구역질이 난다. 

■ 엄마는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다.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다. 내가 열 살 때부터 증상이 시작되었고, 엄마가 집에 있을 때 내가 친구를 데려오지 않는 데는 그 이유도 있었다. 엄마와 차를 타고 가던 날 태양이 엄마 두피에 내리쬐는 걸 보고, 맙소사, 맙소사, 엄마가 진짜 대머리가 되었구나, 하며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정수리 부분에 솜털 같은 머리카락 한 뭉치가 있다. 남은 머리카락은 길었고 엄마가 언제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았는지에 따라 지저분하거나 곱슬곱슬하다. 엄마는 깜빡 잊을 때를 빼면 늘 머리를 빨갛게 염색하고, 그러고 나면 머리는 희끗희끗한 색과 빨간색이 섞여 있다. 엄마는 피부가 나쁘고 얼굴에 발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의 늘 그렇다. 양쪽 눈꺼풀에 검은 선을 하나씩 그리는데, 속눈썹에 그리려 해도 언제나 그 경계 위에 긋고 만다. 바들바들 떨면서.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80년대 이후로 아무도 입지 않는 끔찍한 옷을 입었고, 그 문제에 대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는데 나도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 몸에는 문신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팔에 있는 꿀벌이고 또 하나는 어깨를 넘어 등을 타고 내려가는, 뱀처럼 기다란 줄이 달린 전자 기타, 빌어먹을 전자 기타다.  

■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 겁에 질려 문 열 용기가 다 사라지기 전에, 문을 발로 걷어차서 열고 침대에 있는 엄마의 형체를 본다. 방은 얼어붙을 듯 춥고 어둡다. 천장의 등을 켜니,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옷을 갖춰 입은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엄마는 청바지와 스웨터를 입고 있다. 몸을 둥글게 말고 옆으로 누워 있다. 엄마의 등이 나를 향해 있다. 무릎은 가슴 높이에 있다. 엄마는 잠든 것 같다.  

 


그동안 밤에 집에 와서 이런 모습의 엄마를 본 것이 단지 오늘을 위한 연습이었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그런 느낌이 든다. 지금, 그렇다.
잠 깐 생각 좀 해보자, 나는 큰 소리로 말한다. 이유도 없이. 재빨리 엄마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엄마는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로 꼼짝도 않고 누워 있다. 의식을 잃었을 때와는 다르다. 죽은 사람 같다.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번 엄마를 흔들어본다. height=360 src="http://www.youtube.com/embed/VgWerrDq_3I?feature=player_embedded" frameBorder=0 width=640 allowfullscreen="">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 매일 밤 나는 내일은 달라지고 새로워질 거라고, 좀 나아질 거라고,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고 자신에게 말한다. 어쩌면 내일은 산책을 하거나, 조깅을 하거나, 아니면 예전에 카탈로그를 보고 주문했던 그 뭣 같은 먼지투성이 스텝머신을 침대 밑에서 꺼낸 다음 몸에 딱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은 전문가가 텔레비전에서 하던 동작을 따라해보겠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매일 밤 침대에서 똑같은 다짐을 반복한다. 두 손을 배 위로는 모아 쥘 수 없기 때문에 — 침대에 누우면 배가 양옆으로 퍼지면서 퀸 사이즈 침대 가장자리까지 닿으려 한다 — 가슴 높이에 놓고서 내가 아주 조그마한 아서였을 때부터 기도했던 그 신에게 기도한다. 나의 신은 수염이 하얗고 눈이 반짝거리고 쾌활한 것이 산타클로스와 비슷해 보인다. 내 기도는 매일 밤 똑같다. 이런 식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어릴 적 종교 수업 시간에 모든 기도는 이렇게 시작하는 거라고 배웠다 — 내일은 제대로 먹게 해주세요. 건강하고 착하게 살게 해주세요. 몸무게를 빼게 해주세요.” 언젠가 집 밖으로 나가겠다는 결심을 아직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도가 끝나면 십자가를 긋고, 코로 깊이 숨을 쉰 다음, 가보았거나 늘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마음이 떠돌게 둔다.  

 


샬린 터너가 내게 전화하기 전, 욜란다를 만나기 전인 10월의 나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사람이다.  

 

■ 나는 언제나 상처 입고 아름답지 않은 여자들을 사랑했다. 사랑받고 아름다운 여자들도 늘 사랑했지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내 주변을 맴도는 것은 아름답지 않은 여자들이며, 잠자리에 들 때면 그들 모습이 눈앞에 나타난다. 내 어머니는 아름답지 않았다. 샬린도 아름답지 않았다. 마르티도.

 

■ 차례 

 

한국의 독자에게 드리는 말
아서
엄마에게 말하고 싶다
은총
일주일
또 한 사람의 아서
옮긴이의 말

 

 

지은이 소개

❚ 리즈 무어(Liz Moore)
작 가이자 음악가이며 교수다. 대학을 다닐 무렵인 2007년, 뉴욕에 있는 가상의 음반 회사를 소재로 지은이가 음악가로서 경험한 일들을 부분적으로 담아《The Words of Every Song》이라는 소설을 써 데뷔했다. 최근에는 〈Backyards〉라는 앨범을 내기도 했다. 2012년에 출간한 두 번째 소설인 《무게 : 어느 은둔자의 고백》은 뉴욕 특유의 세련된 절제미를 보여주며 마치 한 편의 악보처럼 유려하게 써내려간 작품이다. 출간되자마자 여러 매체로부터 다양한 찬사와 호응을 얻어내며 많은 이들로 하여금 지은이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현재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으며, 그곳의 홀리패밀리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며 창조적인 글쓰기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저자 리즈 무어 버스킹(길거리 공연)

 


옮긴이 소개

❚ 이순영
고 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와 성균관대 대학원 번역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전문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집으로 가는 먼 길》, 《키친하우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삶에서 가장 즐거운 것》, 《줄리&줄리아》, 《과식의 종말》, 《프랭클린 자서전》, 《인투 더 와일드》, 《빌 클린턴의 다시 일터로》,  《내 이름은 호프》, 《열일곱 제나》, 《고독의 위로》,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가》  등이 있다. 

 

 

 

 

문예출판사

페이스북 www.facebook.com/moonyepublishing

트위터 www.twitter.com/moonye_books 

블로그 www.blog.naver.com/imoonye 

홈페이지 www.moonye.com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 184-4 경기빌딩 305 ( 120-012)

전화 : 02-393-5681~4 팩스 : 02-393-5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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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수첩 : 사진 명작 수첩
발 윌리엄스 지음, 박우정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Every picture tells a story.


여기서 픽처는, 일반적으로는 그림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림이 스토리를 말하고 있음은, 미술 이론을 조금이마나 접한 이들은 다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요즘 나온 미술 관련 서적들을 보세요. "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모토 아래, 그림 안에 얼마나 많은 상징과 비유, 역사, 작가의 의도가 녹아 있는지 가르쳐 주는 게 그 미션입니다. 이 미션은 인문적 소명과 상업적 속셈을 둘 다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픽처가 스토리를 말하는 건, 격언의 형태로 알려 주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소리다 이겁니다.


음악과 같은 시간 예술도 아니고, 미술 같은 공간 예술이 "스토리, 내러티브(시간성이 그 핵심인)"를 지니고 있다 함은 그러나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면 있습니다. 아무리 배워서 알고 있다 하나, 진정한 직관은 인식과 이성을 배신하는 수 있기 때문이죠. 뭐 좋습니다. 그림은 그렇다고 칩시다. 허나 사진도 스토리를 지니고 있습니까? 사진은 순간의 포착, 모사가 그 본질이 아닙니까? 영어의 picture에는 "사진"이란 뜻도 있음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저 문장의 picture를 사진이라는 뜻으로 새겨도 되는 것인지요. 우리의 돌사진, 수학 여행 기념 사진, 대학 입학-졸업 사진, 엠티 가서 찍은 사진, 그(그녀)와 둘만이서 은밀한 장소 은밀한 사연을 배경으로 한 채 야시꾸리하게 찍(어서 폰에만 저장되)어진 사진 등이야 우리가 그 배경을 알기에 분명 뭔가 "스토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 일반이, 개인차를 고려 함 없이, 공감의 화법으로 보통의 스토리를 일반 대중에게, 바벨 탑 공사 현장에서의 방언적 교란 없이 쩌렁쩌렁, 혹은 조곤조곤 전달하는 게 가능하냐 이 말입니다.


그게 그런 줄, 구체적인 케이스에 적용하며 개별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이 책의 원제목을 보십시오.

What Makes Great Photography


무엇이 위대한 사진을 만드는가.


조금만 문장을 바꿔 보겠습니다.

What Makes Photography Great

무엇이 사진(술 일반)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이 책의 기획 의도는 제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위대한 명작 사진을 보자, 안데르스 페테르센, 래리 설튼, 로버트 카파(얼마 전 전시회에 다녀왔어요), 호르스트 P 호르스트, .. 왜 이들이 찍은 광학물질은, 간단한 셔터 누름 동작 이외 어떤 고차원적 사고나 해석이 개입하지 않을 것 같은 "저차원 창조 행위의 산물"이, 미켈란젤로나 고흐의 피나는 손놀림의 자식들과 같은 차원의 "위대함"을 지니는가?

그것은 플라톤 이래 인류가 인식해 온 그 먼 곳에 있는 이데아(이 책의 목차에 따르자면 일, 이야기, 집, 갈등, 아름다움,.. 야외에서 등)를 저 작가들은 순간의 포착 능력과 이미 장착하고 있던 미학의 프레임으로 필름 안에 담아 내는 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묘하게 번지는 수면 위의 기름띠가 가장 절묘한 곡선과 면의 배치를 이룰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떠 내는 능력이 마블링 예술가에게 중요하듯, 사진작가 역시 기계적 기교와 편집의 테크닉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가장 vivid한 컷으로 담아 내는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제가 바꿔 놓은 두 번째 문장을 보십시오,

What Makes Photography Great

본디 사진술이란 그리 위대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진을 위대하게 만드는 건, 작가의 인생관과 통찰 능력입니다. 그가 남긴 명작을 그 사진작가의 인생과 개성과 함께 고찰하여, 사진의 숨은 위대함을 간파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여성 사진작가이자 런던 정경대 교수인 저자 발 윌리엄스의 의도입니다. 그녀는 과연 페미니스트답게,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잡아 내어 비판의 아고라에 올려 두는 작가들에 더 치중하여, 사진의 사회 참여적 기능까지 더 절절하게 부각하고 있습니다. 로버트 카 파가 빌바오에서 찍은 그 유명한 사진(p124)을 보세요, shock and awe로 넋이 나간 사람들의 시선 정중앙에, 오불관언이라는 듯 냉소적 체념, 현실 도피를 시도하는 여인을 배치한 대담함을 보시고, 왼쪽 아래에 두려움 없이 패기와 증오심 가득한 눈으로 적기(敵機)를 응시하는 아이를 보십시오. 이게 위대함이라는 겁니다. 이 구도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이로부터 40년 가까이 지난 후에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영화 <대부 2>에서 소년 코를레오네가 대서양을 건너 미 대륙 항구에 도착하는 그 장면을 찍으면서 이와 똑같은 구도로 모방했겠습니까? (그냥 제 생각일 뿐이니 너무 큰 신뢰와 권위는 주지 마세요^^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영화가 괜히 motion picture가 아닌 게 이래서라는 거죠.



무엇이 위대한 사진을 만드는가? 나도 만약 위대한 사진 작가 까지는 아니더라도, 위대한 사진 몇 컷이라고 남기고 싶다면, 이 책에 수록된 컷을 휴대하고 수시로 참고하면서, 무작정이나마 그 구도와 색감을 모방해 볼 만합니다. 세세한 디테일을 암만 배워도, 잔재주는 늘 수 있으나 "위대함"에 이르는 길의 진도는 제자리걸음이기 쉽죠. 위대함을 내것으로 하려면, 인문의 바탕이 있어야 합니다, 이 책은 위대한 "사진"과, "위대한" 사진, 둘에 대한 가르침을 동시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p99 에서, "마지막 유원지"로 번역된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last resort를 옮긴 건데, 이 어구에는 최후의 의존 수단이라는 뜻이 더 강하고, 그렇게 새겨야 본문의 내용대로 퇴락해가는 영국의 국세를 암울하게 전달한다는 맥락과 통합니다. "마지막 유원지"라고 하면 얼핏 들어도 뭔가 어색합니다. Martin Parr의 이 작품은 저 한 컷뿐이 아니고(책에도 연작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수십 장의 모음으로 구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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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수첩 : 미술 명작 수첩
앤디 팽크허스트.루신다 혹슬리 지음, 박상은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이 "수첩"으로 되어 있어 다소는 낯설어하실 분들도 있겠죠.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화첩"이라는 형태로 대화가의 작품집을 꾸리는 일을 하나의 컨벤션으로 삼았습니다. 저술가에게 "문집"이 있다면, 화가에게는 "화첩"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확실히, 마스터피스의 모음을 책 한 권의 모습으로 꾸리고 휴대하는 일은, 그 예술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뿌듯함과 전 우주를 휴대한 듯 벅찬 감격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예술가는 그가 생전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든 간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나 먼 후대인(이를테면 우리)들에 대해서나, 작은 창조주나 마찬가지의 위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 로렌초 데 메디치나 율리우스 2세를 모르는 이는 숱하지만,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거만 봐도 이 말의 타당성이 입증됩니다.


저는 라루스 미술사 세트를 소장하고 있으며, 기타 예쁘고 장중한 도록집을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수시로 펼쳐 봐 주곤 하는 사람입니다(미술품은, 돈이 없어, 애장하고 있는 게 없습니다만). 하지만 초등학생 시절부터 품어 오던 한 가지 의문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어요.

"어떻게 미술을 감상할 것인가?"

이 말은 제가 어려서 보던 백과사전의 미술편 첫머리에 나온 말이었습니다. 풍부하게 수록된 명화(그 중에는 사춘기에 막 접어든 제게 모종의 생리적 변화와 설렘을 안겨 주는 아름다운 인체 묘사를 담고 있는 게 많았죠)를 비록 지면을 통해서나마, 그리고 간간히 찾을 수 있었던 전시회를 통해, 제법 눈과 영혼을 통해 익힐 기회가 적지 않았지만, 아직도 한 편의 미술 작품을 보고서, "와 잘 그렸다, 와 잘 빚었네?" 를 넘어, 어디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 지 속시원하게 가르쳐 주는 책이 없었습니다. 미 술 평론가가 존재하는 이유는, 미술품 시장에서의 가격 형성과 변동에 불건강하지 않은 수준으로 영향을 끼쳐야 할 외재 변수를 마련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모두가 스탕달일수는 없어서, 걸작 명작을 두고 영혼의 충격을 올바른 방법으로 느끼는 것도 생래의 특권만은 아닙니다. 과거의 전통과 관습, 그리고 이의 현대적 변용을 온전한 방식으로 터득한 스승의 코칭이 있어야, "아 나도 이제 느낌 아니까!"가 정직하게 나올 수 있는 거죠. 이의 레슨은 결국 "언어"를 통해, 다소 인위적인 방법으로라도 습득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창조는 고사하고 올바른 감상조차, 모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 점에서 미술은 음악보다도 인문적 교양이 깊숙히 개입하는 영역입니다.


이 책은 영국에서, 고전 지식의 엑기스를 좋은 환경에서 가장 알뜰히 배우고, 여기에 현대의 최신 트렌드를 스스로의 재 능으로 익히거나 창조까지 해 내는 두 분의 동시대 저자가 쓴 책입니다. 명작 앤솔로지이니 당연히 지난 시대의 명작이 고스란히 실려 있고, 물론 명작이라도 한정된 지면에 망라할 수는 없기에 저자들의 안목이 반영된 엄선 과정을 거쳐 리스팅, 에디팅이 이뤄졌으며, 제가 이 책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요소로, "어떻게 그림을 독해해야 하는가(일단 총체적 직관이 순조롭지 않은 이라면)?"의 원칙을 제대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좌우로 늘씬하게 벌어지는 판형에, 대체로 왼쪽에는 명작의 도판을, 오른쪽에는 저자의 해설을 담았는데, 이 해설 부분이 기가 막히다는 뜻입니다. 글을 글로 푸는 일(문학 평론)보다, 다른 매체와 분야인 그림을 글로 푸는 작업이, 우리 선입견과는 달리 더 절실한 필요성과, 수요를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 이 책을 보면서 절실히 들었습니다.


이 책의 빼어난 점은, 그림(or 조소)과 그 창조주에 대한 알뜰하고 핵심 있는 해설 외에, 다른 이의 명언을 함께 수록하여, 일종의 아포리즘 컬렉션까지 겸하고 있다는 거죠. 아주 속물적인 의도로, 이 책을 가지고 있으면 "미술에 관한 그럴싸한 명언"을 주제에 맞춰서 그때그때 찾아 요긴하게 써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잘난 척하고 싶을 때 명언을 동원할 수는 있겠지만, 그 명언을 적시에 써 먹지는 못한다면, 오히려 큰 망신을 당할 수도 있을 건데요, 이 책은 시대별로 그림을 죽 나열한 체제가 아니라, 키워드 주제어에 의해 카테고리를 나눠 놓았기 때문에 , 처한 상황에 맞춰 요령껏 끄집어 낼 수 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이 책은 동양권 작가의 작품들도 고루 싣고 있어 더 마음에 듭니다(물론 우리 조상들의 솜씨라든가, 유사한 풍의 작품이 빠져 아쉽습니다만). 보시면 가스시카 호쿠사이의 <어부 아내의 꿈>이 나오죠. 참 대담하다고밖에 할 수 없네요. 에로틱하다기보다는, 당시 시대상을 감안할 때 어떻게 이런 표현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경이감이 우선입니다.  책 맨 뒤에 나온  <가나가와의 거대한 해일>을 그린 화가와 동일 인물입니다.


이 그림은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대망> 전집의 어느 한 권에 뒤표지 디자인으로 실려 있기도 합니다. 묘한 우연입니다.



아래 그림 중 왼쪽 컷은 이 책 p158, p160, 두 군데에 실려 있습니다. 안드레아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입니다.

(책에는 "죽은 예수"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같은 화가의 <십자가형Crocifissione>입니다. 이 책에는 안 나와 있으나, 예수의 처형을 다룬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므로 다들 아실 겁니다.

이 책의 저자는, "왜곡"이라는 챕터에서 이 그림("죽은 그리스도" . 左)을 다루며, 원근법이라는 혁신의 기념비적 등장을 알립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그토록이나 당연한 테크닉이, 이처럼 입체적이고 분류사적인 조망 아래 새로운 의미로 다가 오는 거죠. 오른쪽 그림에서도 원근법과 소실점 기법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책은, 미술 작품의 구체적인 기법을, 역사적 맥락과 동시에 전달하고 있어, 구경이 아닌 공부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습니다.



자, 어디 가서 미술 좀 안다고 잘난 척 하고 싶은, 속물적이지만 귀여운 당신, 이 책을 주머니 안에 두고 마음껏 비서로 부리십시오, 스마트폰이 못 해주는 일을 이 친구가 해 줄 겁니다.

어 디 가서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요란하게 떠벌이는 모습 몹시도 혐오하며, 나 자신과 절대자 앞에 떳떳한 순수 내공만을 기르고 싶어하는 착하고 고상한 당신,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고르십시오. 앞의 녀석보다 이 책은 오히려 당신께 필요합니다. 집에 있는 두꺼운 책 일단 젖혀 놓고, 눈높이에 맞는 레슨을 해 줄 이 책을 당신의 진짜 스승으로 모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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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 추적자들 -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인들의 발칙한 에덴 탐험기
브룩 윌렌스키 랜포드 지음, 김소정 옮김 / 푸른지식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 염두에 두게 되는 기준은 두 가지 정도입니다.

1) 표현이나 내용이 매우 기발하고 독창적이라 페이지를 넘기는 재미가 있다.

2) 유익한 정보, 혹은 도덕적인 가치가 충분히 담겨 있다.


이 책은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담은, 정말 유쾌하면서도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인 간은 흔히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최소한의 생존 욕구가 충족된 후에는, 사랑이라든가 명예와 같은, 한 차원 높은 범주의 다른 상위 욕구로 그 지향이 옮아감은, 심리학의 매슬로우가 이미 밝혀 낸 사실이죠. 그런데 인간은, 가장 고차원의 자아 실현 욕구를 채운 후에도,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있을, 혹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 형이상학적, 초월적 욕구를 여전히 지닙니다. 이는, 경우에 따라, (보이지 않는 피안을 향할 때) 종교적 열정이 되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물리 세계를 향할 때) 극지, 험지, 오지를 찾아 나서는 탐험에의 열정이 되기도 합니다.

책의 테마를 담은 예쁜 책갈피가 딸려 있어요.


이 책은 이 두 가지 욕구와 야망을 둘러싸고, 실존했던 유명인 14명과, 이 14인의 주위를 맴돌거나 큰 영향을 주고 받았던 각종의 인간 군상이 연출했던 희극, 혹은 비극을 재미 있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욕구와 물리 세계에서의 모험이 동시에 얽혀 있는 경우는,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매우 드문 게 당연한데요, 이런 드문 주제를 책 한 권에 관철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성서 속의 주제인 "에덴 동산"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숱한 논쟁과 소동, 혹은 촌극에 대해 이 책이 망라적으로, 또 디테일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 동산" 하나로 책 한 권을 다 채운단 말인가? 의문이 들 만도 하지만, 이 책은 정말로 그런 일을 해 내고 있습니다.


첫 째 장은 보스턴 대학의 학장이자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워런의 이야기입니다. 보스턴은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온 청교도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도시로 잘 알려져 있고, 현재는 그 도시를 포함한 메사추세츠 주 전체의 성향이 그렇듯 대단히 진보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이자 워런이 살았던 19세기만 해도, 엄격한 청교도 교리와 분위기가 정관계를 지배하는 곳이기도 했죠. 헌데 우리는 여기서, 현대 미국 남부를 지배하는 기독교 원리주의 같은 걸 생각하면 좀 곤란하겠습니다.


그 는 정통 신앙를 고집하되, 최신 과학 이론으로 무장한 새로운 흐름을 무작정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대화가 통하는 방법으로 전쟁을 벌여, 마침내 불신자들을 설복시킨다는 심산이었습니다. 한참 후에 등장한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리면 "담론 윤리"가 뭔지 이해를 한 사람이었죠. 그런데, 그 결과가 반드시 성공적이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역사의 진실을 또박또박 전하고 있으나, 읽는 내내 폭소를 멈출 수 없는 내러티브로 가득 한 이 책에 실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치 챌 수 있지만,... 윌리엄 워런은, "북극에 에덴 동산이 있었다."는, 오늘날의 눈으론 터무니없고 황당한 주장을, 두꺼운 책 한 권에 가득 싣고, 각종의 인용문헌과 증빙을 부가하여 길게 서술하여 보급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 주장 하나로, 현대(그의 동시대)에 만연한 불건강하고 불온한 반(反) 기독교 사상을 일소하겠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엄청나게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다 뿐이지, 대단히 논리적입니다. 우리가 어떤 주장의 진위를 판단함에 있어 동원하고 있는 기준 중, 1) 직관 2) 권위 3) 논리 의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4) 증거가 부족했고, 이는 이후의 발달한 과학 지식이 결정적으로 오류임을 보이기까지 그런 대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습니다! 자, 에덴 동산이 북극에 있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 직관으로 벌써 이 억설을 기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그 시대를 살던 이들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는 게 가장 놀라운 점이었습니다. 이 1장에는 그 외에도, 우리가 북극을 가장 먼저 밟은 인간으로 기억하는 피어리에 대해서도 잠시 나와 있는데, 그가 그런 영예를 차지하게 된 배경에는 정치적 로비력이 결정적이었다는 점도 밝히고 있습니다. 종교건 과학이건 탐험이건, 그 진가를 평가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추악한 정치가 빠질 수 없다는 게 가슴 아픈 깨우침으로 다가 왔습니다.



디음 장에 등장하는 사람은 더 재미있습니다. 유 태인의 혈통으로 태어났으나, 주류 사회에 합류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이런 유태인들은 제법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사람이죠)한 아버지 밑에서 엄격한 훈육과 최상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프리드리히 델리치라는 학자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후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평생을 시달렸던 그는(이는 이 책 저자의 해석일 뿐이며, 다른 시각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라크(옛 메소포타미아)로 달려가 놀라운 고고학적 발견을 해냅니다. 이 로부터 얻어 낸 결론이란, 구약성서란 한갓 고대 바빌론 신화의 표절물에 불과했다는 거죠! 이는 지금 와서야 현대인의 상식이 되었습니다만, 기독교적 세계관이 확고히 지배하던 당시의 유럽으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겁니다. 순수 학문의 영역에 정치가 개입하자, 상황은 진흙탕싸움으로 변합니다. 저자는 대단히 재미있게도, 이 델리치 역시 황제의 눈에 들어 영달을 도모하던 정치적 인물 그 이상이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셋 째 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독일감리교의 일파인 "형제단" 소속 목사였던 한 미국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진정 엉뚱하게도, 미국 오하이오 주에 위치한 어떤 인디언 유적지를 두고, 에덴 동산의 증거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킵니다. 사실 이를 둘러 싼 소동은, 이 책에 실려 있는 다른 나머지 13인의 촌극에 비해 역사적 중요성 면에서 비중이 떨어지는 편이라, 과연 수록될 가치가 있었을 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원주민을 집단 학살하고 그 터전을 빼앗아 현재의 삶을 일군 미국인들의 집단 죄의식을 반영하는 작자의 의도로 읽히기도 합니다,



이 책은 뒤로 가면 갈수록 재미있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다분히 계획적으로, 저자가 보편적 상식에 비추어 더 파격이다 싶은 캐릭터를 점층적으로 배치한 까닭이 아닙니다. 맨 마지막의 조셉 스미스(현재 한국에도 선교사가 많이 파견되어 있으며, 지난 번 대선 후보였던 미트 롬니의 종교이기도 한 몰몬 교의 창시자입니다)를 제외하면, 이 14인의 인물들은 단순한 에덴 동산의 탐사자, 몽상가가 아닙니다. 우리 현대사의 굴곡과 모순을 그대로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들입니다, 다시 저 위로 돌아가 2장의 델리치를 보십시오. 이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선량한 인격자였으나, 결국 그의 사상은 이후 나치 발호의 한 토양을 마련하게 됩니다. 5장에 나오는 홍콩의 사회운동가 사찬태(謝纘泰)를 통해, 우리는 에덴 동산이 東투르키스탄에 위치해 있다는 식의 황당한 코미디를 접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중국 근현대사의 일단인 의화단 운동, 그리고 신해 혁명에 이르는 거대 흐름의 한 지류를 엿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인물들의 현대사적 비중이, 뒤 시대일수록 우리의 감정과 가치관과 교차하거나 혹은 크게 역행하는 요소가 많을 테니, 더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게 당연할 밖에요. 



알 고 보면 은근 심각한 주제와 도덕적인 교훈을 다루고 있기는 하나, 저자의 문장과 위트가 너무도 빼어나서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습니다. 213~221페이지에 실린 스콥스 재판은, 그 내용상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위트와 자기 패러디가 진하게 배어 있어, 이 책의 압권으로 생각될 만큼이었습니다.


몇 가지 재미있었던 부분을 추려 보면,


p46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가능한 일일지도 → 이런 이슈가 기독교의 신구 종파를 가릴 리 없죠, 종교상의 대립을 풍자한 명 위트였고요.

p141 문명이 끝나려고 하는데(일차 대전 발발 직전) 문명의 기원(에덴동산)을 고려할 여유가 없음은 당연했다. 블랙 유머죠. 학문적 논쟁이라고 해도 결국 소속 국가의 이해를 반영하여 전개되는 게 보통이었던 당시의 쓰디쓴 상황을 풍자합니다.

같은 페이지 "한 사람(델리치)은 청력을 잃고, 한 사람(세이스)은 시력을 잃어 대화가 될 지 의문이었다. " 신체상의 기능 장애를 거론하는 게 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성격의 See No Evil 같은 구절이 연상되어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역시, 국가 간의 탐욕으로 인한 전쟁열기를 풍자한 대목입니다. 

p131 "뱀에 물린 그는 뱀의 사악함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코미디 대본처럼 웃음이 나왔던 부분입니다.

p213  학장 생일은 그 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고령의 워런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서술하는 부분이 매우 우스웠습니다.


책에는 잘못된 부분도 적지 않게 보였습니다.

p58 에 보면 1903년에 오스만(유러피안 페이션트)이 무너졌다고 하고 있으나, 오스만 제국은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에야 문을 닫습니다. 이 시기는 오히려 술탄이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나라를 추스리던 시기입니다. p167에 보면 그 이후에 제국이 건재했음이 잘 나와 있고, p180 청년 투르크 당의 혁명을 언급한 부분도 있습니다. 책 자체만 놓고 봐도 말이 안 되는 서술입니다.

p58에 보면 "토리아"라는 인명이 나오지만, 이런 발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Viktoria는 독일식으로도 그저 "토리아"일 뿐입니다. 독일어라고 해서 V가 언제나 [f]로 발음되는 게 아니며, 이 경우는 외래어이므로 예외입니다.


p172에 보면 "강의로부터 5년 후"라고 되어 있지만 틀렸습니다. 바빌론과 성서(Babel and Bible인데 이걸 독일어로 읽으면 바벨 운트 비벨입니다, 기발하죠)라는 강의는 1902년에 있었으므로, 6년이 정확합니다. p216의 1903년 운운도 틀린 것입니다.


p151의 역자 주 the boxesthe boxers의 잘못입니다.


p63에서 '조엘'은 "요엘' 이 맞을 것입니다.


p297 "바레인은 섬나라였다." 바레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섬나라이므로 과거형 시제는 눈에 거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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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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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든 순례가 놀라운 것은 아니고, 모든 인생 혹은 그 인생의 한 특정 체험이나 여정이 "순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순례는 설령 그것이 자신의 성지(聖地)를 향한 것이라고 해도, 범속하거나 루틴하기가 쉬우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상업적이기까지 합니다. 주변에 종교(어떤 종교라도요)를 믿는 분들이, 성지 순례를 어떤 기분으로 다녀 오고, 또 돌아 오신 후 어떤 영적 고양을 맛보는지 지켜 보시는 분들은 공감할 것입니다. 주위에서 흔히 보는 순례는 아쉽게도 대개는 그 순례자의 before & after에 차이가 없습니다. 순례는 거의 "거듭남"의 효과를 보려 감연한 용기를 내어 행하는 것임에도 불구, 우리는 그저 종래의 안온한 껍데기를 벗어 날 생각를 하지 못한 채, 이 번잡한 여행, 예식을 통해 외관의 대청소를 행하는 데에 그칩니다. 그러니 그게 놀라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모든 일상과 체험이 규격화의 편한 틀로 재단되어 생산, 소비되는 요즘, 어떤 감동과 환희도 그저 있을 법한 일,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likely할 뿐입니다.


하물며 더 많은 이들에게는, 살아 왔거나 살아 갈 인생 통째부터가 범속한 일상의 연속이며, 패키지 상품으로서의 원거리 여행조차도 드물게 맞는 전환점일 뿐입니다. 제 두 발로 걸어서, 혹은 대단히 고달픈 전통적 수단에만 의존해서 어느 타방을 다녀 온다든가 하는 일은 좀처럼 겪기 힘듭니다. 만약 누가 그런 체험을 실제로 마쳐 내었거나, 단지 결심만 해 보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만 해도, 아마 주위로부터 대단히 별난 사람 취급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은 대단히 unlikely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례라는 이름만 붙었다 뿐 참다운 자아와 궁극자를 발견함과는 거리가 먼 행차, 의식이 그 명칭의 진정성을 배신하기 일쑤인 세상에서, 그저 직장에서의 책무와 할당과업 수행에만 자신의 정력을 봉헌한 인생, 퇴직한 직장으로부터 변변한 보상이나 대우도 받지 못 한 채,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자신처럼 늙어 버린 아내로부터의 보살핌, 개입, 리딩, 승낙의 연속체에 둘러 싸여 어정쩡한 노년을 맞고 있는 해럴드 프라이 씨에게라면, 더더군다나 무슨 순례 같은 것이 일어날 법하지 않습니다. unlikely는 이처럼 일어날 가망 자체가 없었다는 점에서도, 또 그 일어난 순례의 내용이 대단히 이색적이었다는 점에서도 그 정의(定義)를 충족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unlikely한 순례의 촉발 동기는 대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해럴드 프라이 씨는 여느 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던, 불길하리만치 평범한 어느 날 오전에, 편지 하나를 받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잉글랜드 서남부 중에서도 땅끝이라 할 사우스데본으로, 저 동북 방향으로 그 대척에 자리한 노섬벌랜드의 버윅(-어폰-트위드)로 부터 서신이 도착한 것입니다(잉글랜드의 끝이라고 해도 됨니다. 그 위는 스코틀랜드니까요). 처음에는 무슨 착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던 바로 그 무렵부터 최근까지, 자신의 일생을 바쳐 온 직장에서 고락을 같이하던 동료가, 어느 의료 시설에서 암에 걸려 죽어간다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소식을 전해 온 것입니다. 


"여보, 퀴니가 암에 걸렸다는군. 어쩌면 좋지?"

"암은 낫기 힘들어."


아내 모린은 매정하거나 타산에만 밝은 여성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해럴드 자신처럼 그 지루하면서도 잔인하게 단조로운 일상과 숱한 책임으로부터 마모되고 탈진되어 많은 것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퀴니란 이름과 존재, 그 불행한 만년의 운명이 동료였던 자신에게만큼이나 큰 충격을 줄 리가 없습니다.


"소용 없어."


어느 새 아내는 편지 발신인을 화제에서 배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다시 복귀해. 내일을 어제만큼이라도 안전하게 챙기려면, 오늘에 그제처럼 매몰되야만 하니까.'


그러나 해럴드 프라이 씨는 더 이상 경화된 나무등걸처럼 루틴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뭐라도 행동에 나서서, 그간 애써 외면해 온 소중한 무엇인가를 먼지구덩이로부터 찾아 와야만 합니다. 하지만 더 불행한 일은, 대체 이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아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사실이죠. 편 지를 쓰고 부치려고 하나, 그는 재게 내딛는걸음 솜씨가 야속하게 느껴질 만큼, 다가 오던 우체통이 그의 목전에 와 닿을 때마다 외면하고 끝내 지나칩니다. '다음 우체통에 넣도록 하지. 아직 수거 시간이 남았으니까.' 그는 이러다가 평상에서 결코 닿아 본 적 없는 먼 지점까지 와 버립니다. 그리고 거기서 마주친 한 임시직 종사 소녀로부터 unlikely한 충고를 듣습니다.


"간절히 그것을 바란 적이 있으세요? 이루어 질 수 있다니까요."


여태 아내 모린으로부터 일상의 사소한 일에까지 승낙을 들은 후에야 모종의 실행에 나섰던 그는, 소녀의 이 차분한 넋두리를 벽력 같이 영혼을 때라는 계시(?)로 인지하여, 터무니없는 순례를 걸어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물론 아파 죽어가는 퀴니에게로 향한 것입니다. "살아 있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내가 도착할 때까지 살아 있으라고."


우리는 노인의 결심이 언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 그는 일단 편지부터 부치고 여행을 결행하지 않았을까요? 집에 돌아가서 여장을 꾸린다든가 하는 일은 그 자신의 작중(作中) 해명을 통해, 그 불가한 사유를 우리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알지도 못한 채로 며칠을 보낼 수 있는데, 그는 선착의 통보도 없이 기약도 없는 출발부터 무작정 하고 봅니다. 다음으로, 그는 병자를 보겠다면서, 가능한 한 가장 빠른 교통편을 챙길 생각은 하지 않고, 시간의 경과로 이미 상대를 산 채로 만나지 못 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도보편을 선택합니다. 그 길은, 우리 식으론 아마 목포에서 함흥 정도까지의 거리인 800km, 이천 리에 달하는 거리입니다. 이 길을 걸어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가 전주에서 영흥으로 엑소더스를 결행할 때는 최소한 사회적, 정치적 압박이라는 외부 추동력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 해럴드 프라이 노인은, 그저 영혼의 충격 하나만으로 일견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감행하려 합니다.


그 배경과 내심에 희극적 요소나 정신병리학적 색채가 없다 뿐이지, 상식과 제약 조건에 비추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이런 순례에의 출발은, 마치 문호 세르반테스의 "아들'" 돈 키호테의 그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나이가 좀 많다 뿐, 그의 정신은 아직 맑습니다. 오히려 그 도덕적 건강성은 여느 젊은이 못지 않게 고양된 상태죠. 그 는 돈 키호테 못지 않게, 그 긴 여정의 사이사이에 참으로 많은 이들과 그 사연을 만나게도 되며, 이 "있을 법하지 않은" 순례를 구경하는 우리도 덩달아, 갖은 인간 군상의 곡절과 미묘한 심리 일단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세일즈맨으로 평생을 살아 왔습니다. 세일즈맨이 무엇입니까. 성공하고 인정 받건 그렇지 못하건, 불특정 고객의 마음에 들어야 그 생존 최소 조건이 실현되는 부평초 같은 인생입니다. 남의 "예스"를 거 치지 않으면 존재가 부정되는 직종입니다. 이래서, 아서 밀러의 "아들" 윌리 노먼은, 직장에서 번-아웃되고 모기지 상환으로 솔드-아웃된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여 처량한 죽음을 맞게 되었던 거죠. 우리의 해럴드 프라이 씨는, 말하자면 예정된 추락과 퇴장을 거부하고 반대편을 주시하며 일어서되, 호기나 광기에 의존하지 않은 채 로키 발보아의 정제된 오기로 기적을 꿈꾸는 오디세이를 시작하는 중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주인공이고 싶지만, 결국 대부분은 초라한 단역으로 소모되어 정해진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처분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해럴드 프라이는, 슬프고 부당한 소식을 눈과 영혼으로 접한 후, 그저 해럴드 프라이 자신이 과연 원래 누구였으며, 여태 무엇이었는지 그 하나만 확인하러, 산 채의 동료 퀴니를 만나야겠다는, 기이하나 건강한 확신으로 무장한 채 도보 순례를 떠납니다. 저는 그 결말을 현재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 모르는 분들은 이 잔잔하고 다정한 장편에의 순례를 통해 영혼의 정화와 함께 그 호기심을 충족하는 건 어떨지 권해 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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