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을 보았을 때 대체 무슨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 책인지 참 궁금했습니다. 필요, 속도, 탐욕이라... 어떤 연결 고리가 이 세 키워드를 이어 주는 걸까요? 영어 원서의 제목은 <Need, Speed, Greed> 더군요. 그제서야 "아, 라임을 맞추기 위한 의도가 있겠구나."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의 내용은 과연 이 세 추상개념어의 기묘하고 정교한 삼위일체를 만족시키고 있었을까요? 다 읽고 난 후의 개인적 느낌을 말하라면, 고개를 가로젓고 싶네요. 제목은 그저 제목일 뿐, 내용과는 별 상관 없었다는 게 제 솔직한 감상입니다. <필요, 속도, 탐욕>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아마 저것과 정반대되는 내용, 예를 들어 월든 식의 "인간과 윤리를 소외시키는 혁신일랑 걷어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내용도 충분히 저술해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설 사 그렇다고 결론을 내더라도, 책 내용은 단연 최고였습니다. 정말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하는 크리스텐슨(혁신 전문가이자 전도사죠. 최근 건강이 안 좋다는)의 책도 읽었지만, 이 책은 보다 넓고 유연한 시야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 책 못지 않게 유익했습니다. <혁신>의 각론도 그 퀄리티에 관계 없이, 너무 깊이 파고들면 읽는 입장에서 좀 피곤합니다. 눈이 피로해지면 뒷산에 올라가서 먼 광경을 보는 게 좋듯, 공부와 일에 지친 머리는 이처럼 넓은 비전을 제시해 주는 책을 읽고 달래 주는 편이 좋습니다. 아카데미즘이 아닌 저널리즘 종사자만이 가질 수 있는 멋진 스타일로, 이 책은 혁신의 핵심 개념과 구조, 실례에 대해 잘 소개해 주고 있었습니다.
내 용 소개는 인터넷서점의 상품 설명란에 잘 제시되어 있을 테니, 저는 제 주관적인 느낌만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그 전에, 이 책의 저자 바이테스워런이 어느 쪽 출신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바이테스워런이라는 이름만 보면 예전 얼 워런이라는 미국 대법원장(순도 100%의 와스프죠)이 생각나기도 하고, 덴마크나 스웨덴 쪽 인물일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름 <비제이>가 심상치 않죠? 네, 이 사람은 인도 출신입니다. 이코노미스트를 죽 구독해서 읽으시는 분들도, 고정필자 바이테스워런이 인도 출신인 걸 모르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저렇게 한글로 <~워런>이라고 쓰면 더하죠. 로마자 표기는 waran이라고 해서 Warren 따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실제 발음도 <~와란>에 가깝습니다.
이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책의 논지와 경향은 그 사람의 출신지와 분리하여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현실 때문입니다. 이는 인종적 편견이라기보다 오히려 엄연한 현실이며, 또 어떤 책의 논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필요한 선행 작업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혁신을 이야기하는 많은 책들은 상당수가 냉혹한 효율성의 관점에서 주장을 펴고, 또 그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리버럴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바이테스워런은? 이코노미스트의 독자라면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보수 성향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출신지의 영혼을 진하게 감싸 안는 길을 선택한 그로서는(아닌 사람도 많습니다), 과격한 효율론(과 그 배후에 은근히 깔린 인종차별주의)을 무작정 옹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구의 혁신론자들에게 "아시아의 부상(浮上)이 반드시 서구의 손해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동아시아의 독자인 우리도 이에 전혀 주저없이 동의하고, 동의 이전에 열렬한 옹호를 보내지요. 그렇지만 왠지 이 부분 주장에서 그가 제기하고 있는 근거(다양한 실례를 좀 들어줬었으면 좋았을 텐데요)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물론 우리야 처음부터 그 생각을 공유하는 집단이니, 근거 따위는 제공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만, 항상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게 또 우리 동양 군자의 미덕 아니겠습니까?
책 내용은 정말 명쾌하고, 한 구절 한 구절을 메모해 가며 행동 원칙으로 삼을 만합니다. 경영자나 임원이 아니라도, 장차 그런 꿈을 꾸는 직원이라면 새기고 또 새겨야 할 좋은 말들로 가득합니다. 바이테스워런은 이 모든 내용을, 자신의 스타일로 잘 조립해서 독자에게 설명해 주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가 들어 주는 숱한 역사적 실례들은 꼭 경영학과 연결 짓지 않아도, 그 자체로 멋진 역사 뒷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 지만 몇몇 대목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그는 "사업체 인가 하나를 내 주는 데 19일이 걸리는 독일"을 비판하며, 그나마 일본(23일)보다는 나은 수준이라고 비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례가 과연 관료주의, 레드탭, 혹은 만달리니즘의 폐해로 거론되어야 할 만큼 나쁜 예였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 이번 그리스 사태만 해도, 독일의 적절한 개입과 조치, 혹은 <튕김>이 없었다면, 사태가 어떻게 악화되었을지 모릅니다. 이번 그 급박한 국면에 처해서, 다른 나라들은 모두 손 놓고 독일이 과연 쌈지를 여는지 여부에만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심한 글로벌 경기 침체 와중에서도, 유독 독일만은 별다른 고생 없이 순항을 하고 있습니다. 혁신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만능의 미덕일까요? 물론 황골탈태의 관점만 중시한다면, 독일(그리고 일본)은 관전자로 하여금 큰 답답함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특히 독일의 경우 내부 구성원의 만족이나, 객관적 지표 어느 면에서도 여느 외국에 뒤처지거나 부족할 바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쁜 예를 들었으면, 그 나쁜 예가 어떤 나쁜 결과를 맞이했는지의 실증이 뒤따라야 하는데, 바에테스워런은 처음부터 잘못된(들지 말았어야 할) 예를 든 탓에, 책 서술에 있어 이런 구조의 허점을 드러내고 만 거죠.
117 쪽에 보면 스티븐 핑커를 재인용하면서 "....그럼에도 불구, 그 피해인구(사상자)의 비율로 보면, 20세기는 그 어느 앞선 시대보다도 문명화, 인간화된 시기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그 결론에야 동의하지만, 주장의 근거가 잘못되었습니다. 어떻게, 20세기의 사상자가 총 인구 대비(무엇을 대비하건 간에)로 적은 수치일 수가 있나요? 분명 20세기는 여태의 그 어떤 재앙보다도 절대 수준으로나 인구비로나 많은 생명이 희생된 시기입니다. 이는 분명한 숫자가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20세기가 문명화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이런 참혹한 결과에 대해 반성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 전에는 사람을 죽이고도 종교, 도덕, 인종적 광신으로 이를 합리화했을 뿐 반성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기술이 부족해서 사람을 못 죽였다 뿐이지, 그 잔인한 심성에 만일 20세기의 첨단 기술을 쥐어 줬으면 벌써 인류는 절멸했을 것입니다.
여 튼 이런 점들은 이 멋지고 유익한 책에서 몇 안 되는 극히 사소한 단점에 불과합니다. 112페이지에는 할 배리언이라는 구글 수석 임원이 나오는데요, 이 사람은 미시경제학 교과서 저자로 세계적 명성을 날린 학자입니다(저는 학부 시절 이 사람 책으로 공부했기에 이름을 잊을 수가 없죠). 워낙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근거를 구하고 있는 저자라, 뜻하지 않게 유명인사의 근황까지 독자에게 알려 주고 있는 가외의 헤택을 베풀기까지 합니다.
이 책의 멋진 점은 안진환씨의 멋진 번역입니다. 106쪽에는 "...10년 단위의 기간 중 단 한 번의 10년을 제외하고는.." 이라는 매끄러운 문장이 있습니다. 보통 다른 번역자들은 영어의 decade를 문자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우리말에는 없는 이 '십년기'라는 단어를 그대로 방치하니 문장이 제대로 읽힐 리가 없죠. 이 외에도 안진환씨는 생소하다 싶은 개념에 일일이 역주를 달아, 그것만으로도 독자에게 공부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