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하라 - 존중받는 직원이 일을 즐긴다
폴 마르시아노 지음, 이세현 옮김 / 처음북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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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경 영학은 모든 학문으로부터 자양과 지류를 흡수하는 강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경영학이 모든 학문의 궁극적 귀결이라든가, 최종의 목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아직도 많은 非경영학도들은 경영학을 두고 "받기만 하지 주지를 않는 학문"이라고 비웃기도 하죠. 여기서 주지 않는다는 건, 경영학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그저 다른 학문이 <경영학>이라는 셈물에서 직접 길어 올릴 것이 부족하다는 뜻일 뿐이겠죠.


다른 말로 하면, 경영학을 공부하면 많은 다른 학문(꼭 인접 분야도 아닙니다)에 대해서도 유식해진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심리학, 사회학, 수학, 통계학, .... 특히 요즘 각광 받는 인적자원관리(HR-예전에는 인사관리라고 불렀죠)는, 직접적으로 심리학과 통계학의 영향, 수혜를 입은 학문입니다. 이 분야를 공부하다 보면, 심리학의 여러 이론에 대해 제법 밝아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아주 심층적인 최신 성과는 아직 반영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만. 어쨌든 요즘 <통섭>이다 뭐다 해서 새로운 학제간 연구, 융합의 바람이 불고 있는 현실이지만요, 경영학은 처음부터 복합 과학의 성격이 컸던 덕에 통섭 이전부터 통섭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 책은 인간관계론에서 그간 초미의 관심사였던 인센티브를 통한 동기부여 이론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론을 전개한 책입니다. 제목만 보면 무슨 인상을 받으시나요? "직원들을 당신의 가족처럼 여기고, 사랑하고, 감싸 줘라. 그럼 그들이 성과로 보답할 것이다." 물론 그런 내용도 있습니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5장부터 11장까지는 그런 추상적이면서도 듣기만 해도 가슴 뿌듯해지는 화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지막 12장은 이 모든 덕목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까 하는 내용이구요.


이 책은 이론과 실천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 저 이론 면에서는, 앞서 적은 대로 종래의 인센티브 체계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매우 과감하고 대안적인 주장을 폅니다. 그가 들고 있는 비유는 이렇습니다. "며칠까지 마감을 준수하면 인센티브를 부여하겠다는 회사가 있다. 직원들은 이 인센티 브를 얻기 위해 열심히 작업한다. 그런데 갑자기 마감기한을 준수하지 못할 사고가 생겼다. 이 때 a그룹은 <어쩔 수 없으니 포기하자>였고, b그룹은 <그래도 가능한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는데까지 해 보자>였다. 전자는 단지 동기부여만 되어 있었고, 후자는 몰입도가 높은 그룹이다. 동기는 일시적이고 변덕스럽지만, 몰입은 지속적이고 충성스럽다."


어떻습니까? 기존의 이론에 부분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분명 이 대목은 읽다 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 신선한 충격을 받습니다. 과연 맞는 말 아닐까요? 아름답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논리 전개입니다.


저 자는 이런 말도 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소위 <몰입도의 전도사>라고 할 만해서, 각지에 이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다닙니다. 한 청중이 그의 강연을 듣고 나서, "와ㅡ 그거 좋네요! 우리 직원들한테도 몰입 좀 하라구 말해주세요!" 저자는 이 일을 소개한 후, "이런 식으로 직원을 몰입하게 할 수는 없다."며 불쾌한 듯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 런데 저는 이런 생각이에요. 저 청중은 과연 저자의 열심 강연을 듣고도, 이해도가 떨어져서 그런 리액션을 보였을까요? 그보다는 "말은 좋다!" 같은, 일종의 비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죠. 동기부여는 일시적일 뿐입니다. 단물을 다 빼고 나면, 그 다음은 과감히 회사를 등질지 모릅니다. 반면 회사에 충성하는 직원은 거리에 휴지 하나 떨어진 걸 보지 못하고 자진하여 처리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찌 보면 기술적인 실천 사항이 아닌, 도덕심 함양이나 제고의 차원이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는 경영 기법으로 다루기에는 조금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회사의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의 방법이 요구될 테니까요. 반면 인센티브란 회사의 여건 불문 어느 정도 공통적입니다.


몰 입도 증진의 방법도 그렇습니다. 애사심을 갖는다. 인정한다, 칭찬해 준다. 다 좋죠. 하지만 이런 방법이 어디까지 효과를 유지할까요? "회장님, 말만 하지 마시고 돈을 주세요!" 나중에는 이런 직원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처음부터 몰입 경향이 낮지만 능력은 빼어난 직원이라면, 몰입 교육을 아무리 시켜 봐야 하는 척만 하고 말지 모릅니다. 이런 직원에게는 종래의 인센티브 제도를 유지하는 게 더 나을지 모릅니다.


존 증은 말만으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보상에는 여전히 금전이 결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직원 존중을 유도하고 생산성을 장려하다간, 직원이 아닌 거의 동업자 수준으로 대우를 향상해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좋은 일이죠. 하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장님들이 이 방식에 선뜻 동의하고 나설까요?


저 자는 고학력자답게 언어 사용에 있어 상당히 까다롭고 신중합니다. 심리학 용어인 <긍정적 강화, 부정적 강화>를 많은 사람들이 잘못 쓰고 있다고 합니다(예를 들어 84페이지, 현장에서 몰입 여건의 정의와 몰입 정의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불평). 그렇긴 합니다만, 본인이 예로 들고 있는 <엄마가 우는 아이를 안아 주는 일>이 과연 부정적 강화일까요? 안아 주는 일은 불쾌한 자극을 없앤다기 보다, 안아 준다는 유쾌한 자극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건 긍정적 강화지요.


engagement 가 이 책의 핵심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참여>라는 좋은 다른 뜻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서 말하는 많은 경우 engagement는 <참여>의 뜻에 가깝습니다. <몰입>은 개인적인 열중만 말하는 것 같아서 부자연스럽습니다. <참여>라고 옮겼으면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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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속도 탐욕 - 당신은 새로운 혁신 세 가지를 갖고 있는가
비제이 바이테스워런 지음, 안진환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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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 목을 보았을 때 대체 무슨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 책인지 참 궁금했습니다. 필요, 속도, 탐욕이라... 어떤 연결 고리가 이 세 키워드를 이어 주는 걸까요? 영어 원서의 제목은 <Need, Speed, Greed> 더군요. 그제서야 "아, 라임을 맞추기 위한 의도가 있겠구나."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 의 내용은 과연 이 세 추상개념어의 기묘하고 정교한 삼위일체를 만족시키고 있었을까요? 다 읽고 난 후의 개인적 느낌을 말하라면, 고개를 가로젓고 싶네요. 제목은 그저 제목일 뿐, 내용과는 별 상관 없었다는 게 제 솔직한 감상입니다. <필요, 속도, 탐욕>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아마 저것과 정반대되는 내용, 예를 들어 월든 식의 "인간과 윤리를 소외시키는 혁신일랑 걷어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내용도 충분히 저술해 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설 사 그렇다고 결론을 내더라도, 책 내용은 단연 최고였습니다. 정말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자주 인용하는 크리스텐슨(혁신 전문가이자 전도사죠. 최근 건강이 안 좋다는)의 책도 읽었지만, 이 책은 보다 넓고 유연한 시야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 책 못지 않게 유익했습니다. <혁신>의 각론도 그 퀄리티에 관계 없이, 너무 깊이 파고들면 읽는 입장에서 좀 피곤합니다. 눈이 피로해지면 뒷산에 올라가서 먼 광경을 보는 게 좋듯, 공부와 일에 지친 머리는 이처럼 넓은 비전을 제시해 주는 책을 읽고 달래 주는 편이 좋습니다. 아카데미즘이 아닌 저널리즘 종사자만이 가질 수 있는 멋진 스타일로, 이 책은 혁신의 핵심 개념과 구조, 실례에 대해 잘 소개해 주고 있었습니다.


내 용 소개는 인터넷서점의 상품 설명란에 잘 제시되어 있을 테니, 저는 제 주관적인 느낌만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그 전에, 이 책의 저자 바이테스워런이 어느 쪽 출신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바이테스워런이라는 이름만 보면 예전 얼 워런이라는 미국 대법원장(순도 100%의 와스프죠)이 생각나기도 하고, 덴마크나 스웨덴 쪽 인물일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름 <비제이>가 심상치 않죠? 네, 이 사람은 인도 출신입니다. 이코노미스트를 죽 구독해서 읽으시는 분들도, 고정필자 바이테스워런이 인도 출신인 걸 모르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저렇게 한글로 <~워런>이라고 쓰면 더하죠. 로마자 표기는 waran이라고 해서 Warren 따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실제 발음도 <~와란>에 가깝습니다.


이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책의 논지와 경향은 그 사람의 출신지와 분리하여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현실 때문입니다. 이는 인종적 편견이라기보다 오히려 엄연한 현실이며, 또 어떤 책의 논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필요한 선행 작업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혁신을 이야기하는 많은 책들은 상당수가 냉혹한 효율성의 관점에서 주장을 펴고, 또 그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리버럴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바이테스워런은? 이코노미스트의 독자라면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보수 성향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출신지의 영혼을 진하게 감싸 안는 길을 선택한 그로서는(아닌 사람도 많습니다), 과격한 효율론(과 그 배후에 은근히 깔린 인종차별주의)을 무작정 옹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구의 혁신론자들에게 "아시아의 부상(浮上)이 반드시 서구의 손해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동아시아의 독자인 우리도 이에 전혀 주저없이 동의하고, 동의 이전에 열렬한 옹호를 보내지요. 그렇지만 왠지 이 부분 주장에서 그가 제기하고 있는 근거(다양한 실례를 좀 들어줬었으면 좋았을 텐데요)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물론 우리야 처음부터 그 생각을 공유하는 집단이니, 근거 따위는 제공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만, 항상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게 또 우리 동양 군자의 미덕 아니겠습니까?


책 내용은 정말 명쾌하고, 한 구절 한 구절을 메모해 가며 행동 원칙으로 삼을 만합니다. 경영자나 임원이 아니라도, 장차 그런 꿈을 꾸는 직원이라면 새기고 또 새겨야 할 좋은 말들로 가득합니다. 바이테스워런은 이 모든 내용을, 자신의 스타일로 잘 조립해서 독자에게 설명해 주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가 들어 주는 숱한 역사적 실례들은 꼭 경영학과 연결 짓지 않아도, 그 자체로 멋진 역사 뒷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 지만 몇몇 대목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그는 "사업체 인가 하나를 내 주는 데 19일이 걸리는 독일"을 비판하며, 그나마 일본(23일)보다는 나은 수준이라고 비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례가 과연 관료주의, 레드탭, 혹은 만달리니즘의 폐해로 거론되어야 할 만큼 나쁜 예였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장 이번 그리스 사태만 해도, 독일의 적절한 개입과 조치, 혹은 <튕김>이 없었다면, 사태가 어떻게 악화되었을지 모릅니다. 이번 그 급박한 국면에 처해서, 다른 나라들은 모두 손 놓고 독일이 과연 쌈지를 여는지 여부에만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심한 글로벌 경기 침체 와중에서도, 유독 독일만은 별다른 고생 없이 순항을 하고 있습니다. 혁신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만능의 미덕일까요? 물론 황골탈태의 관점만 중시한다면, 독일(그리고 일본)은 관전자로 하여금 큰 답답함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특히 독일의 경우 내부 구성원의 만족이나, 객관적 지표 어느 면에서도 여느 외국에 뒤처지거나 부족할 바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쁜 예를 들었으면, 그 나쁜 예가 어떤 나쁜 결과를 맞이했는지의 실증이 뒤따라야 하는데, 바에테스워런은 처음부터 잘못된(들지 말았어야 할) 예를 든 탓에, 책 서술에 있어 이런 구조의 허점을 드러내고 만 거죠.


117 쪽에 보면 스티븐 핑커를 재인용하면서 "....그럼에도 불구, 그 피해인구(사상자)의 비율로 보면, 20세기는 그 어느 앞선 시대보다도 문명화, 인간화된 시기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그 결론에야 동의하지만, 주장의 근거가 잘못되었습니다. 어떻게, 20세기의 사상자가 총 인구 대비(무엇을 대비하건 간에)로 적은 수치일 수가 있나요? 분명 20세기는 여태의 그 어떤 재앙보다도 절대 수준으로나 인구비로나 많은 생명이 희생된 시기입니다. 이는 분명한 숫자가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20세기가 문명화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이런 참혹한 결과에 대해 반성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 전에는 사람을 죽이고도 종교, 도덕, 인종적 광신으로 이를 합리화했을 뿐 반성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기술이 부족해서 사람을 못 죽였다 뿐이지, 그 잔인한 심성에 만일 20세기의 첨단 기술을 쥐어 줬으면 벌써 인류는 절멸했을 것입니다.


여 튼 이런 점들은 이 멋지고 유익한 책에서 몇 안 되는 극히 사소한 단점에 불과합니다. 112페이지에는 할 배리언이라는 구글 수석 임원이 나오는데요, 이 사람은 미시경제학 교과서 저자로 세계적 명성을 날린 학자입니다(저는 학부 시절 이 사람 책으로 공부했기에 이름을 잊을 수가 없죠). 워낙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근거를 구하고 있는 저자라, 뜻하지 않게 유명인사의 근황까지 독자에게 알려 주고 있는 가외의 헤택을 베풀기까지 합니다.


이 책의 멋진 점은 안진환씨의 멋진 번역입니다. 106쪽에는  "...10년 단위의 기간 중 단 한 번의 10년을 제외하고는.." 이라는 매끄러운 문장이 있습니다. 보통 다른 번역자들은 영어의 decade를 문자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우리말에는 없는 이 '십년기'라는 단어를 그대로 방치하니 문장이 제대로 읽힐 리가 없죠. 이 외에도 안진환씨는 생소하다 싶은 개념에 일일이 역주를 달아, 그것만으로도 독자에게 공부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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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문제는 호감이다 : 똑같이 말해도 호감 있는 사람에게 끌린다 - 똑같이 말해도 호감 있는 사람에게 끌린다
전경우 지음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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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의 핵심은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어떻게 하면 이런 위험으로부터 슬기롭게 탈출할 것인가의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내용이었죠(저의 예전 리뷰 참고). 그 책은 단순한 팁의 나열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문제의 원인과 처방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조금 뒤에, 저는 <매력자본>이라는 책도 읽었습니다. 이 책은, 한 개인의 자산을 구성하는 요소로, 기존 부르디외가 꼽던 문화-경제-사회 자본에 이어, < 매력자본>이라는 새 팩터를 논의에 추가한 논지였습니다, 저자는 캐서린 하킴이라는 페미니스트였는데, 자신의 독특한 견해와 입장을 주장에 잘 반영한 개성이 돋보이더군요. 물론 그 주장 하나하나에 동조하는지 여부야 별개겠구요.


한 마디로, 제목은 전자의 그 책을, 내용은 후자의 저작을 연상케 하는 면이 있어서, 기본 프레임으로 이 두 선행 독서를 염두에 두고 읽어나가자는 게 개인적 방침이었습니다.


제가 파악한 이 책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부분으로 나뉘는 것 같더군요.

첫 째는 팔로워십입니다. 부하 직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자신의 확고한 신념과 가치관, 혹은 대체 불가능한 능력이 있더라도, 조직 내에서 책임 있는 성원으로 장기 근무할 일을 고려할 때, 상사에게 일정한 예의와 존경을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퉁명스러운 대꾸는 어느 상사도 좋아하지 않으며, 에드워드 홀의 정의를 인용하며 "고맥락(high-context)" 의 대화, 혹은 소통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상사가 뭐라고 하면 눈치 100단을 발휘하여 몇 십 마디 뒤의 상황을 미리 캐치해야 한다는 거죠. 조금만 더 심하게 표현하면? 알아서 기는 일에 인색하지 말라는 겁니다. 팔로워십에서 거론하기는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지만, 이 장에서 일부 민주적이고 리버럴한 상사에게도 저자는 고언합니다. "위아래 없이 마구 대하는 걸 허용하는 상사는 결국 실패한다." 상사는 부하들에게 일정 선을 긋고 대해야 하며, 부하는 상사를 불가근불가원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결론이죠.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대체로 현대 한국의 직장 분위기를 감안할 때 틀린 구석은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맞고 틀리고를 논하는 게 새삼스러울 만큼요.

다 음으로 리더십을 논합니다. 이 대목 역시 좋게 말해 모범적이고, 나쁘게 말해 다소 고리타분합니다. 현 스타벅스 CEO 하워드 슐츠가 예시의 대상으로 나옵니다. 어려서부터 극히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일찍부터 알았다는 겁니다. 그의 경영철학은 "우리에게 최우선은 고객이 아니다. 파트너들이다."랍니다. 여기서 파트너는, 영어에서 이 단어가 갖는 뜻인 <공동출자자>나 <동업자>가 아니라, 자기가 고용한 부하직원이나 가맹점 점주, 혹은 지배인을 말합니다. 실제로 그는 어느 <파트너>가 죽었을 때 지체없이 빈소를 방문해서 거의 상주 노릇까지 도맡아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물론 감동적이죠. 이 일화에 이어서는 페덱스의 철저한 직원 중심 경영 풍토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공통점은,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어버이처럼 자상하게 챙길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윗사람은 물론 아랫사람이 지나치게 허물 없이 대하는 걸 허용해선 안 되지만, 그건 리더십 파트가 아닌 팔로워십 파트에서 논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저는 지금 <존중하라, 존중받는 직원이 일을 즐긴다>와 <win의 거듭제곱>이라는 책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둘 다 성공적인 기업체와 경영의 혁신, 모범을 논하면서, 이 책이 이야기하고 있는 전통적인 직장상과는 정반대의 논의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권위 의식, 차별화, 위계질서, 느슨하지 않고 철저한 규율과 매뉴얼에 의해 돌아가는 분위기 따위는 이미 낡았다는 게 저 두 권의 논지인 반면, 이 책은 저 두 책이 철저히 배격, 혹은 지양의 대상으로 삼는 것들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과연 독자는 어느 장단에맞춰야 할까요? 개인적인 선호와 철학, 처한 환경(어느 직장에 다니는지)에 따라 결론을 달리할 일이지만, 어느 하나만을 골라 폭주하는 건 경계해야겠죠. 중용만한 답은 어느 시대에도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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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버려졌다 다독다독 청소년문고
마리 오드 뮈라이유 지음, 이선한 옮김 / 큰북작은북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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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만 봤을 때는, 아프리카의 기아라든가 동남아시아 최빈국에서 비참한 처지에 빠져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그래, 그저 고마운 줄 알고 살아야지." 옷깃을 여미고 엄숙한 마음가짐으로 자세를 바로하고 책을 펼쳤더랬습니다. 물론, 코믹하고 가벼운 표지 그림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온 터라 이런 생각이 전혀 방해 받지 않은 건 아니었죠. 하지만, 선입견과 시각적 감각의 힘 둘 중 어느 쪽이 더 힘센 편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제 경우는 전자라고 별 망설임없이 답하겠습니다.


선 입견은 그저 선입견일 뿐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더 믿어야 할 건 보다 근접한 영역에서 제공하는 정보라는 점 다시 새기게 되었습니다. 코믹한 표지 그림이 암시하는 건 정말로 코믹한 컨텐츠였죠. 이 깜찍하고 작은 표지와 형식에 담긴 스토리는, 합쳐서 다섯의 배다른-나이 편차도 상당한- 남매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중 셋은 아직 나이가 어린 데다 어머니가 같습니다만, 나머지 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셋은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를 잃습니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그들을 버린 데다, 지금은 세상까지 등진 상태입니다. 사회 안전망이 잘 갖춰진 프랑스가 배경이니, 당국은 이 셋에 후견인 노릇을 해 줄 가까운 피붙이를 찾아 나섭니다. 아직 젊은 나이에 판사라는 중책을 맡은 여성은 수소문 끝에 두 후보자를 발견하는데, 그 둘이 바로 이 셋의 배다른 누나와 오빠입니다. 전자는 나이도 지긋한데다 재력도 충분하지만, 쌀쌀맞고 이기적인 여성이라 큰 기대를 갖기 힘듭니다. 후자는 빼어나게 잘생긴 청년(판사는 이 사실을 만난 후에야 알게 되죠- 아무리 판사라도 이성의 외모로부터 자연스럽게 받게 되는 호감을 거부하긴 힘든가 봅니다)이고 다정다감한 성격이지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무자력자인데다 성적 소수자이기까지 합니다.


특 이한 운명은 그들의 외적 환경뿐 아니라, 세 아이가 타고난 내적 자질과 외모에서까지 뚜렷한 궤도를 예정합니다. 아이 중 맏이는 영재소년입니다. 중학교 저학년인데도 고3 졸업 자격 시험(번역서에는 안 나오지만 우리가 아는 바카로레아겠죠?)을 준비하는데, 그나마 고득점이 기대되어 다니는 학교의 교장 선생님 이하 모든 직원의 관심의 초점입니다. 다만 그 생긴 모습이.... 미소년을 기대했던 판사를 거침없이 실망시키는 수준입니다(일는 독자도 몰랐는데, 판사의 그런 심경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같이 비로소 눈치를 채게 되죠). 둘째는 여자아이인데, 공부를 꽤나 잘하지만 더 커서 오빠처럼 빼어난 모습을 보일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생긴 모습은 그저 키만 껑충 클 뿐, 보는 사람을 서운하게 하는 수준이죠. 막내는 완전 바비인형인가 봅니다. 보는 사람 모두를 홀딱 반하게 할 귀요미임이 강하게 암시됩니다.


이 쯤 되면 그저 즐겁기만 한, 미디어 소개대로 한 편의 시트콤인가 보다 생각하게 되겠죠?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나라 시트콤들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외국의 경우 그 기본 상황은 상당히 심각한 비극이나 갈등을 포태하고 있는 예가 많죠. 일단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 자체는 비극적입니다. 이 웃으래야 웃을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휘하는 지혜가, 바로 웃음을 그 본질로 하는 우회적 돌파 방안입니다. 마치 얼마 전에 출간된 하지현 박사의 <에능력>에서 주장하는 바처럼, 사람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은, 웃음으로 돌아가듯 극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듯 말이죠.


아 직 제 앞가림도 못할 어린 나이에 천애고아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본인은 물론 지켜 보는 주변인들도 똑바로 응시할 용기가 안 생기는 곤경 중 곤경입니다. 무려 후견인으로 지목된 20대 바르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 나이에 아직 고정된 일자리도 없고, 나아질 전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힘든 이들이 모여 사는 배경이 된 동네 거주민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저 우울과 절망만이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가 되어 마땅합니다. 제목에서 괜히 독자가 무거운 인상을 받은 게 아닙니다. 물리적, 객관적 요소만 추출하면 이보다 더 암울한 스토리가 없습니다.


인 간의 위대함은 절망을 웃음으로 극복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게 신통한 존재죠. 스티븐 스필버그의 <칼라 퍼플>을 보셨나요? 이 감독의 재능은, 도저히 눈뜨고 못 지켜 볼 비극에서도 한 줄기 여유를 찾고, 유쾌함으로 반전한 후 일말의 희망을 모색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집니다. 빈곤과 차별, 폭력과 자기파괴가 교차하는 비극 중에서도 인간들은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그 웃음 속에는 희망이 있고, 연대가 있습니다. 무거운 주제를 이처럼 경쾌한 이야기 속에 청소년들에게도 부담이 안 되게 잘 녹여낸 작가의 솜씨가 좋습니다. 저 같으면 10대 아이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해 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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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 묵시록
최희원 지음 / 청조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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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 현대사 IT, 사회 분야에 인상 깊게 남은 사건 중 하나가 있습니다. 1994년 청와대를 사칭한 어느 해커의 대규모 사취 사건이었는데요, 그 컴퓨터 작동 실력을 높이 평가한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은 이례적으로 그를 그룹에 특채하기도 했습니다. 해커라는 단어가 일반인들의 뇌리에 깊이 남은 계기라면 아마 이 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세월이 그 이후로 흘렀습니다. 아마 사건의 화제가 되었던 그 정상급의 해커까지는 몰라도, 당시의 그저그런 수준의 해커라면, 요즘의 일반인보다 시스템의 이해가 뒤처질지 모릅니다. 세상은 그간 단순히 양적으로만 팽창한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상이 환히 열어젖혀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질적으로 진화했습니다. 요즘 세상에 해커라고 하면 아마 두 부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간의 모든 테크닉을 그저 평범한 걸음마 수준으로 낮춰 버리는 초 사이언 급 해커이든지, 아니면 시중에 흔하게 널린 매뉴얼 몇 권만 읽고 어설픈 영웅심리에 젖어 겁도 없이 범법을 저지르는 철부지든지.

이 책은 가공할 만한 스케일의 배경을 바탕으로, 현시대 최첨단의 전술 구사 수단이 된 각종의 전산 테크닉을 몸에 익힌 천재들, 그들 중 일부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인재를 이용하려는 파렴치한 부패 정치인과 악당들, 그리고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기술 체계와 세상의 발전상을 재해석하여, 적그리스도에 준하는 사악함으로 세상을 망치려 드는 세력을 저지하는 어느 양심적인 과학자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적혀 있습니다.


리 뷰가 스포일러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제가 신나게 읽은 소설의 독후감을 후기로 적을 때는 언제나 조심스러워집니다. 이 책 역시, 초반에 전개되는 살인사건들과 의문투성이의 사고가, 정확한 배경이 미궁에 싸여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재밌어지고 독자의 궁금증이 커집니다. 소설의 빼어난 점은, 우리가 미처 상상도 못할 엄청난 테크놀로지의 집적이 특정 세력의 영구 집권 음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환기해 주는 것입니다. 생체칩이란 개념은 이미 사고나 생래적인 원인으로 몸이 부자연스러운 이들의 치료, 재활 수단으로 그 길이 열려 있고, 이의 활용 가능성은 어느 정도 보편적 상식이 되어 있죠. 웨어러블 컴퓨터도 최소 십 년 내에는 상용화의 단계에 진입할 것이고, 구글 글래스(안경+스마트폰)의 등장은 얼마 전 큰 뉴스가 된 적이 있습니다. 피사체가 미처 눈치를 채지 못할 만큼 교묘히 숨겨지는 도청 장치는 이미 우리 생활에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적발해 낼 것인가를 두고 경찰이 크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도 뉴스에 낫었구요. 이처럼,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각종 피처들은 그리 새롭거나 놀라운 수준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을 소설 하나에 잘 버무려낸 것은 작가의 솜씨라고 생각합니다. 잘 알려지고 익숙한 사실들이지만, 그것이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처럼) 사악한 손에 한꺼번에 장악되기라도 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또 이 소설처럼 기발한 가상 공간, 내러티브가 창조될 수도 있는 거겠죠.


역시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은, 젊고, 잘생기고, 세상에 대한 불신과 정의감으로 가득한 젊은 층입니다. 한편으로 기독교 신자가 주를 이루기도 하는데, 이는 이 소설과 소재인 게임이 <요한계시록>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분위기인 때문도 있습니다. 이는 아마, 이 소설을 쓴 작가의 신원이나 주변의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게 제 추측입니다. 작가는 각별하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실제와 무관한 가상의 엔트리일 뿐이라고 밝혀 놓았습니다만, 저는 읽으면서 최소한 그 지명들은 실제의 어느어느 곳들을 연상하게 되더군요. 이 소설은 현대 한국의 수도 서울을 빼놓고는 그 묘한 분위기의 창출이 어려울 만큼, '서울스러운' 아우라가 지배하는 스토리였습니다.


한편으로 이 소설은 국제 무대를 넓게도 활용하는 글로벌 배경의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소설에 나온 대로, 아마존은 세계에서 가장 긴 (혹은 2위라고도 하지만) 강이니만큼, 남미대륙 중에서도 대서양 아닌 태평양에 면한 페루까지 그 유역이 미치는 대단한 범위입니다. 이 아마존의 오지 중에서도 가장 오지인 곳이 바로 강 목사가 선교지로 삼은 소설 속 그곳이죠. 작가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다면 등장시키기 힘들지 않았을까 추측해 봤습니다.


소 설의 결론은 대단히 비관적입니다. 악당이야 제 갈 길(?)을 가고 맙니다만, 결국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파멸로 몰아 넣고 말 뿐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과학기술을 적대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와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튼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이 왠지 뇌과학 쪽에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더라구요. 과연 이대로 기술을 분별 없이 발전시키기만 해도 되는 건지.... 어떤 의미에서 1990년대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테러리스트 유나바머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느낌도 살짝 받았구요.


읽으면서 불편했던 건 오타의 잦은 등장이었어요.

108 고생은 세팅하느라 선배님이... → '고생은' 다음에 마침표가 찍혀야 의미가 전달됩니다. 안 그러면 선배가 고생을 세팅했다는 뜻이 되죠.
117 태호가 알려준데로 → 대로
146 일년인 된거야 → 일년이
150 매쾌한 → 매캐한
175 33을 앞뒤로 놓고 사선이라고 한 건 죽을 고비지만 → '놓고' 다음에 쉼표가 안 찍히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179 주검 → 여기서는 '시체'가 아니므로, '죽음'이 문맥상 맞다고 보입니다.
187 뭐 길래 → 띄어쓰기를 하면 안 되죠.
197 선마이크로시스템즈을 →선마이크로시스템즈를. (저도 이 글자를 치면서 '을'로 순간 오타가 났지만요)
198 소설에 → 소설의
249 운영체재 → 운영체제


이 외에도 많이 있었지만 이 정도만 적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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