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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자기 여행 : 규슈 7대 조선 가마 편 ㅣ 일본 도자기 여행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동물과 큰 차이가 나는 점은, 생존을 위한 필수 양분을 어떤 방식으로 섭취하는지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날것을 아무렇게나 절단, 저작하여 소화하는 게 동물이고, 반대로 인류라면 원 재료를 "조리"한 후 먹습니다. 이렇게 해서 뜻하지 않은 식중독 따위를 예방할 수 있고, 섭취할 수 있는 재료의 범위를 넓힐 수 있으며, 나아가 풍미의 향유라는 인간만의 쾌락 영역을 확보합니다. 어떤 종류의 "그릇'이건 이를 필수 도구로 이용하는 것도 인간뿐이며, 처음에 그저 식사의 장치로 사용했던 것을 나중에 완롱, 감상의 고유 대상으로 삼은 건 더군다나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그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고된 노동 단계에서 벗어나 일종의 문화 생활을 누리는 수준으로 접어들었는지의 여부는, 손쉽게 도자기류의 구비가 얼마나 그 문화권에서 보편화되었는지로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동양에 대해 언제나 잉여 쾌락(주로 정신적)의 향유 면에서 큰 열등감을 느껴 왔던 서양이 근대 이후 필사적으로 도자기의 수입, 제조 기술 습득에 열을 올린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조용준 선생님께서 몇 년 전부터 펴내고 계신 <OOO 도자기 여행> 시리즈를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퀄리티가 진귀하고 텍스트(책) 취지에 부합하는 사진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게 초보자에게는 엄청 큰 응원이 되죠. 뿐만 아니라 (당연한 소리지만) 이 분야 입문자에게는 기초부터 착실히 가르쳐 주시면서도 한 권 떼고 나면 소양이 엄청 늘게 도와 주는, 도자기학의 친절한 교과서이기도 합니다. 이런 알찬 내용이 기행문의 형식으로(여행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풍부한 역사적 배경, 맥락의 설명과 함께 곁들여져 있으니(역사도 이야기로서의 역사는 누구나 좋아하죠), 예쁜 도자기 공부도 공부지만 책을 읽는 사람의 영혼과 정신이 몇 뼘은 더 자란 뿌듯함이 느껴집니다.

사실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낯선 유럽 도자기에 대해 그토록 간곡한 사연과 깊이 있는 문화, 역사적 내력이 숨어 있음을 전 저작들을 통해 배웠던 독자로서는, 이 일본 도자기에 대한 자세하고 친절한 책이 오히려 좀 늦게 나오지 않았나 하는 느낌마저 있습니다. 마치 유홍준 선생의 "일본 문화 유산 답사편"이 가장 늦게 나온 것과도 비슷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과는 또 경우가 다르니까요(개인적으로 저는 그 시리즈와 이 조용준 선생님의 기획을 동렬에 놓거나, 더 좋아합니다). 아무튼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설렘으로 책을 읽었고, 역시 대만족이었네요.
특히 제가 첫부분부터 눈을 크게 뜨고 읽은 대목은 소위 "엔슈류"의 기원과 발전 과정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일본 도자기의 시원은 그저 정유재란 후 조선 땅의 도공들을 대거 납치하여 규슈 일대에 가둬 둔 후 외부 세계를 상대로 한 무역 아이템을 제작하게 한 데서 잡아야 합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가깝지만, 저자께서는 이 팩트가 남긴 과도한 자부심과 자아도취가 오히려 우리의 눈을 멀게 했다며 일침을 가합니다. 우선 도공 집단이 해외로 끌려가 국부의 주요 섹터가 유실되었음에도 당국은 그저 내국인들의 송환 이슈로 여겼을 뿐 산업적 중요도에 대한 자각이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장인들의 송환이 극히 지지부진했을 뿐 아니라, 규슈 현지에서 오히려 더 합당한 대우를 받고 일하는 이들이 새 환경에서 더 의욕을 낸 것도 엄연한 사실이죠. 재능과 기예가 부가가치에 기여한 바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후진적인 조선의 시스템이 결국 국가적 고립과 경제적 피폐를 자초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저자의 관점은 결국 "왜란 이후 새로이 일어선 일본 도자기 산업과 그 예술적, 문화적 성취는 독보적이고도 광범위한 것"이라는 쪽입니다. 남 좋은 일만 시킨 게 마냥 자랑일 수가 없고, 좀 과장하자면 탱자가 회수 이남을 건너 비로소 귤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엔슈 류(流)"는 코보리 마사카즈가 도토미(遠江), 즉 엔슈(遠州)에 부임해 온 데에서 유래했습니다. 앞의 것은 훈독, 뒤의 것은 음독이라서 같은 한자인데도 발음이 저렇게 다르죠. 예전 일본 소설 번역판 같은 데서는 한결같이 "도토우미"라고 쓰던 기억도 있네요. 다카토리 가마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책에서 일부 내용을 접한 적이 있었는데, 이 둘이 합쳐져 이룬 "엔슈- 다카토리 (콜라보)"의 한쪽 부모가 어떤 내력이었는지는 이 책을 통해 자세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다카토리 가마에 대해 독자로서 제가 미흡하나마 작은 지식이 있던 것도, 이 책에서 아주 자세히 나오는 세이잔 여사의 사연이 그나마 한국인들에게 조금은 알려진 이유에서입니다. 세이잔 여사는 (이 책에도 나오지만) 벌써 40년 전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진 일로 당시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적이 있고(부끄럽게도, 물론 몰랐던 이들이 더 많을 줄 압니다만), 이때 두 분 어린 제자를 받아 일본 현지에서 사사(師事)하게도 했습니다. 책에도 나옵니다만 이 두 분(당시에는 청년)은 결국 병역 문제를 해결 못 해 중도 귀국해야만 했는데요. 이 당시 비슷한 케이스로는 바둑 기사 조훈현씨, 야구 선수(당시 경동고를 갓 졸업한) 백인천 씨 등이 있습니다. 어떤 원칙이 없었는지 그나마 일본 현지 체류가 가능했던 이는 이들 중 딱 한 사람밖에 없죠. 저자는 이 과정을 설명하며 한국인들의 몰이해와 무관심에 대해 크게 개탄합니다. 참고로 다카토리 가마는 후쿠오카 소재이며, 우리가 비교적 잘 아는 심수관 선생 가문은 사쓰마에 터잡은 분들입니다. 八山을 하치야마, 혹은 야쓰야마가 아닌 "팔산(파루산- 한국식 한자 독음)"으로 읽히기를 고집하는 이 가문의 고집에서 뭉클한 민족정신을 접한 독자가 많을 것 같네요.

한국의 도자기 하면 청자나 백자 외에 떠오르는 게 없음이 우리 못난 자손들의 부끄러운 현실이지만, 저자께서는 다른 권위자(신한균 회장님)의 지지를 얻어, 이 다카토리 도자기, 그리고 (다음에 새로 등장하는) 아가노 도자기의 근원이 회령 자기라고 의견을 개진하십니다(이후에 소위 4대 지방요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심). 이 회령 자기라고 할 때 회령은 물론 함경북도의 그 회령입니다. 우리는 함경도 일대 거주민들에 대해 그저 조선 내내 차별 받던 반(半) 여진족의 후예 정도로 치부하기 일쑤입니다만 이처럼 민족 문화의 중요한 한 자락을 구성하는 주체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요삼채 같은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북방 유목 민족이라고 마냥 고급 문화의 창조에 어두웠던 건 아니죠. 저자는 이 회령 자기의 원조를 허난(하남. 사기 근성과 손버릇 나쁜 걸로 유명한 그 하남 성입니다) 자기에서 유래했다고 보시는데요. 그게 어떻게 해서 두만강 일대를 거쳐 회령에 정착했는가. 이유는 역사를 조금만 알아도 쉬이 납득이 됩니다. 여진인이 송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허난 성의 카이펑(전국시대 위[魏]나라의 대량)에 도읍한 후 고유의 도자기 제조법을 발달시켰고, 이후 몽골에 쫓겨 도로 제 고장으로 밀린 후 그 도공들을 데려 와 기반을 잡게 한 게 연원이었다는 주장입니다(p102 본문 설명에다 약간 첨가). 이러던 게 임란 훨씬 이전 함경도 일대 동해 연안을 침범하던 왜구가 현지인들을 납치해 간 게 이들 유파의 일본식 기원이 되었다는 건데, 읽으면 읽을수록 안타깝습니다. 물론 저자님의 관점에 따르면 이후 일본에서 훨씬 창의적이고 생산적으로 기법을 발전시킨 그 이후의 과정이, 반도 내에서의 산업, 기예 침체상과 대조할 때 더 부끄러운 실상이지만요. 이어령 선생도 지적합니다만 일본인들은 문화를 수입해 오는 데도 거침이 없고, 그 수입 문화를 열도식으로 변용, 변형하는 데에도 언제나 거리낌이 없습니다. 당연히 (원) 회령자기는 남성답고 투박하며 거친 맛이지만, 이게 아가노 풍으로 정착하면서는 (저자님의 표현대로) 고분고분하게 스타일과 심미적 구조가 변했다는 거죠.
앞에서 잠시 음식 섭취 문화를 거론했지만, 도자기 문화는 그 자체로 완상용이지 반드시 안에 무엇이 담겨야 하는 게 아니며, 당연한 말이지만 내부에 함부로 뭘 담다가는 큰일나죠. 그러나 히젠 나고야로 건너와서 사가 현(역시 역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고장입니다)의 가라쓰야키에 대한 설명에서는, 이른바 "음식과의 합일이 이뤄진" 경지를 또 엿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이처럼 국지적 생활문화가 한번 집중적으로 발전하면 그 집착이랄까 종교적 숭배 경향이 아주 극단적으로 치닫는 걸 알 수 있는데요. 이 책에 나오는 여러 도자기(각 유파를 대표하는)라든가, 풍신수길 집정기에 극성을 이룬 다도 문화에서 한 벌 고가 세트가 성 한 채 가격에 육박했다는 설 등을 접하면 정말 한국인으로서는 아연실색해질 뿐입니다. 물론 특수 기예와 장인의 일가를 이룬 성취에 대해 그만큼의 존중이 있는 문화였기에 가능했던 부작용(?)이기도 했지만 말이죠.
조용준 선생님의 책에는 첫째 현지를 직접 답사한 저자의 성실한 노력과 실감나는 감상, 현지에서 직접 겪은 이만 토로할 수 있는 지방색과 여행자의 격정이 그대로 배어납니다. 둘째 어떤 대목은 역사적 지식이 좀 있어야 매끄러운 소화가 가능하지만, 대부분은 그 자체로 쉽고 재미있는 역사 공붓거리입니다. 셋째로 대상을 포착한 모든 사진과, 지도 등등 보조 미디어가 텍스트에 하나하나 달라붙는 적실성을 지녀 독자의 이해가 몇 배는 더 높아지고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이 두꺼운 책이 고작 규슈의 7대 가마를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저자께서 장담하셨듯 이제 혼슈로 이어지는 대장정이 예쁜 책(언제나 예쁘죠) 안에 또 어떤 모습으로 담길지 벌써부터 기대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네요. 별 스무 개도 아깝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