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44 - 2 - 시크릿 스피치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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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톰 롭 스미스는 자신의 서사를 충실히 따라가는 독자를 내내 확실하게 고생시키다가(까다로운 문장으로가 아닌, 주인공의 혹사를 통해서), 마지막에 가서야 "우리의 기대를 역시 저버리지 않는 정의로운 영혼"으로 복권하는 재주를 통해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슬픈 쾌감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이 2편에서는 역시 충격적인 인트로를 통해, 러시아 민중의 정신 세계를 오래 지탱해 오던 종교란 요소를 끌어들여, 공산주의 체제가 얼마나 반인도적 방식으로 민중의 해방이 아닌 그 철저한 예속을 꾀했는지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연작이 21세기 아닌 직전 시대에 출간되었다면, 일방적으로 상대 진영을 비난, 폄하하는 블공정한 반공물이라며 많은 비난을 받았을 겁니다. 소련 체제가 무너지고 수십 년이 지난 시점, 그에 대해서라면 마치 나치 독일처럼 이미 철저한 단죄가 이뤄지고 난 후의 사정이라, 이제 마음놓고 "던전"의 배경대유로 이처럼 쓰일 뿐 이념적 함의가 작품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음을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서두는 지난 1편보다 더 충격적 삽화로 채워집니다. 여기서 사제가 왜 반려자를 두고 있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러시아 정교는 본래 대처를 허용합니다(장려하지는 않지만). 제자(...) 막심을 인간적으로 무척이나 아낄 뿐 아니라 신봉하는 종교에 대한 신심, 헌신도도 지극히 깊은, 무엇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모범적 인격자형 사제 라자르는, 그러나 그 제자에게 이중의 배신을 당합니다. 처음에는 이 막심에게 아내 아니샤를 유혹당하고, 나중에는..... 그렇죠. 이 막심은 MGB의 끄나풀이었던 겁니다. 스탈린 체제 하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던 장면, "너희들, 조국과 인민의 배신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면서 비밀 경찰이 들이닥치고 무지막지한 구타, 구금이 이어지는 그런 소동이, 이 작은 아지트에서도 재연됩니다. 악질적인 배신자가 그 사이에 끼어, 배신도 모자라 체제의 주구로서 극악스런 언동까지 희생양에 대해 추가로 저지르는 모습까지... 지켜보는 독자는 마음이 무한 지옥으로 추락하는 것 같습니다. "막심"이라는 (러시아에서) 흔한 이름을 가진, 외모도 잘생긴(이게 힌트였습니다) 청년이 스승과 상급자에게 이런 저열하고 패륜적이며 인간 사는 세상에서 지극히 예외적이라 할 추악한 배신을 행할 수 있는가?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청년은 젊은 시절의 레오 데미도프였습니다. 독자를 엿먹이는 진짜 반전은 바로 여기죠.

레오 데미도프는 1권 <차일드 44>에서도, 유능할지는 모르나 질이 아주 나쁘게 보이는 방식으로 체제에 충성하는 공무원으로 인트로에 등장합니다. 체제가 나쁘지 그 부속품인 사람이 나쁜 건 아니라고 변호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감싸 주기엔 그가 상황 속에서 저지른 개별 행동이 너무도 잔인하고 집요하며 반인도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의 어린 두 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깁니다. 타인의 어린 시절에 입힌 정신적 상흔이, 이후 당사자가 성인으로 자라난 후 그가 속한 사회에 어떤 식으로 잔혹한 복수를 행하며 그 근본의 응보율이 실행되는지는 1권 전체의 핵심 서사로서, 우리 독자가 이미 충격적으로 경험한 바 있습니다.

위에 적은 대로, 이 2권은 그보다 훨씬 전, 아마도 2차 대전(즉 소위 "대조국전쟁")이 종료된 후 국가적 영웅으로 떠받들어진 레오 데미도프가 공명심과 부풀려진 자아에 도취되느라 아마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무렵일 겁니다. 이런 자가, 또 한 번 영웅의 연단에 높이 세워질 수만 있다면, 그 친부모인들 당국에 고발하여 그 불건강한 허영을 충족시키지 못하겠습니까? 이 시절 레오는 그처럼, 젊은 혈기와 광기어린 국가관이 서로 섞여, 그 눈에 뵈는 게 없는 완장질 중독 괴물이었던 형편이었습니다. 한때마나 이런 썩은 영혼에게 지배받은 자를 두고, 우리 독자는 계속 주인공으로서 신뢰를 보내야 할지 여부를 놓고 심각한 갈등에 빠지는 게 당연합니다. 지지해 줄 가치가 없는 캐릭터에 대고 애정을 퍼붓다 (라자르처럼) 나중에 무슨 배신을 당하게요. "애국심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이 새삼 생각나기도 합니다.

1권에서도 숱한 과오를 저지르다 마침내 바른 길로 (다소 영악한 방법을 써서) 접어드는 레오는, 이 2권에서 그의 원죄 중 하나를 다시 드러내고 있습니다. 1권에서 두 아이의 부모를 앗은 죄에 대해 마음 속 깊이 통회하던 그는 (어디까지나 마음 속으로일뿐입니다. 국가의 명령에 의해 행한 결과를 두고 죄의식을 느낀다면, 그건 바로 당성(黨性)의 결핍 증명이요 반역행위이기 때문이죠) 두 아이를 입양하여 친부모처럼 사랑을 베풀려고 합니다. 허나 이도 여의치 않아서, 그와 처 라이사는 은밀하고 끔찍한 개인적 시련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1권에서 "아 왜 레오는 자살하지 않는 걸까" 같은 생각이 드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물론 주인공을 죽일 수 없는 상업적 고려에다, 독자에게 색다른 카타르시스를 안기려는 미학적 고려가 함께 작용한 덕입니다) 이 2권에서는 레오 외에 다른 인물들이, 주로 과거의 행적에 대한 죄의식을 못 이겨 속속 자살하는 설정이 나옵니다. 마치 셜록 홈즈처럼, 레오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진상을, 증거와 논리로서 시원하게 밝혀내는 활약상을 짧고 강력하게 초반에 보여 주는데, 이 역시 1권의 장치와 일관성을 유지하는 부분입니다.

레오는 명철한 논리적 사고가 가능한 인물이라, 독자는 이미 알고 있는 사태의 비극적 진상에 대해, 개인적으로 가능하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눈을 감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다 하는 확신이 (논리적으로) 다가오면, 망설임 없이 전면 수용하는 게 레오입니다. 아내 라이사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러나 레오는 말을 아끼고 또 아낍니다. 저 위 아니샤의 유혹은 아마도 이런 라이사를 만나기 한참 전에 이뤄진, 젊디젊었던 시절 또 하나의 과오일 뿐입니다.

이 2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속죄"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주인공을 끼고 살 필요 있나?"하는 회의감을, 이 2권에서 레오는 철저한 회개를 통해, 그리고 가혹한 실천에 기반하여, 더 이상 독자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지 않게, 자신의 죄과와 함께 말끔히 씻어 줍니다. 혹 1권에서 뭔가 개운치 않은 감정이 남아 있던 분들은, 이 2권까지 마저 읽어 보십시오. 레오 데미도프 시리즈가 단순히 상업적 프랜차이즈가 아니라는 각성이 생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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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44 - 1 - 차일드 44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 / 노블마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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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자유를 단 한 번도 누려 본적이 없는 영혼이라면, 모든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야 하는 극한 상황 속이라 해도, 그 가혹한 조건에 순응하며 살아가게 될 지도 모릅니다. 하긴 이는 모든 상황적 제약이 풀린 현대에 사는 우리들이 사치스럽게 행하는 자기 기만일지도 모르겠는데요. 만약 수양제 시절의 농민 신분으로 살게 된 우리라면, 대운하 건설 노역장에 동원된 처지에서 물에 잠긴 내 다리에 구더기가 들끓은 채 썩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과연 현장에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권력에 반항이라도 한번 해 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분연히 봉기의 대열에 가담할지, 아니면 당장 눈 앞의 채찍이 무서워 그저 타성대로 묵묵히 벽돌을 나르게 될지, "사고 실험"만으로는 답이 안 나오는 문제이니까요. 그 상황에 실제 처해 보지 않고서 나오는 모든 "의지의 표명"은, 그게 아마도 타인과 자신을 기만하는 언사일 확률이 매우 높으니 말입니다.

구판으로 처음 읽을 때는 현대 스릴러의 공식에 맞춰, 전체주의 국가 체제가 발동할 수 있는 최악의 감시, 탄압 조치 속에서, 정의롭고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지향하고자 하는 레오의 필사적인 몸부림, 그리고 상황이 허락하는 중 가장 영리하게 돌아가는 그의 두뇌 작용 등이 결합한, 영웅적 투쟁의 서사로 이 작품을 이해했습니다. 국가는 이미 충성스러운 국민의 신뢰를 철저히 배신한 바 있기에, 앞으로는 그에 대한 람보 식의 복수만 남았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이 신판으로 다시 읽어 보니, 그런 고독한 영웅의 투쟁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큰 억지나 무리도 아니고, 또 그런 모럴에 입각한 독해라야 도덕적으로 바람직하겠지만, 마냥 그렇게 읽기에는 레오 데미도프가 너무 나가는 면이 없잖아 있더군요.

레오가 고비를 맞닥뜨릴 때마다 취하는 결단과 결행은, 사실 아무리 그것이 타협적인 성격이라 해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현실화하기 어려운 초인적인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는 이 소설에서 아내를 두 번 배신하고, 한 번 (그런 결단을 기대하기 어려운 제약 속에서) 지켜 줍니다. 후자에서 독자는 "과연 주인공이 될 자격이있었군!" 하며 감탄하나, 전자에서 "이런 사람도 사람 구실을 포기하며, 구질구질한 연명을 택할 정돈데!"하며 (순서대로) 절망하게 됩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저는 제 방식대로 조국 소비에트에 충성하겠습니다!"를 외치는 레오의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기막히게 영리한 체제 반역(동시에 보편적 휴머니티에 대한 충성)을 꾀하는구나 싶었는데, 지금 제2권 <시크릿 스피치>를 다 읽은 시점에서 보기에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그 역시 확고부동한 스탠스를 고수하는 게 아니라, 가혹한 외부 조건의 칼날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겁니다.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지난 구판 리뷰에서 "어린이 살인마"의 정체에 대한 언급을 최소화하며 작품 감상을 적었지만, 이 작품 <차일드44>는 탐정(?)과 범인 모두, 명확하게 비인도적인 환경의 희생양이며, 두 사람 다 그런 외적 조건에 맞서 정면 타파를 위해 투쟁을 전개하기보다는, 타협이나 자기 파괴를 시도하는 데 그친다는 점이 독자의 마음을 내내 불편하게 합니다. 연작에서 계속 출현을 이어가는 레오 존재의 개연성을 유지하려면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으나, 아마도 이 작품(시리즈)은 전통적인 영웅담의 성격만이 아닌 "잔혹 리얼리티 쇼"의 스타일도 같이 곁들여 꾸려진 듯 보입니다. 마흔 네 명의 어린이들 목숨을 앗은 범죄자뿐 아니라, 이런 체제 속에서 누구에게 고발당해 당국에 끌려갈 지 모르는 불안이 그 영혼을 좀먹어들어가는 평범한 시민, 그 강력하고 굳센 의지가 매 순간 모욕당해야 하는 주인공 레오 모두, 이미 존엄히 지켜져야 할 내적 세계가 치명적으로 파괴된 채 기껏해야 가망 없는 저항을 생물학적 충동에 의해 이어갈 뿐입니다. 이건 물론, 진부하고 통속적인 영웅담의 공식에서 벗어나, 이 작품만의 핍진한 개성을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비결임에 분명하긴 하지만 말이죠....

이런 주인공의 행보를 지켜 보기 위해 연작 소설을 다 구해 읽어야만 하나? 깊은 회의가 밀려오는 분들은 일단 재미로 이 1권을 펼쳐 보십시오. 결말에 가서 피로와 극한 감동이 동시에 찾아오는 통에 몸과 마음이 곤죽이 될 겁니다. "이 작품은 대체 상업적 흥미, 영혼의 건전한 고양, 그 어느 쪽을 추구하는 의도였나?" 여전히 미심쩍으면 2권도 이어 읽어 보십시오. 그런 시도는 기껏해야 한 번으로 족할 것 같은데, 작가는 2권에서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더럽혀지고 추악해졌던 주인공을 다시 끌어내어 "영웅적인 채무 변제"를 수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채무란 도덕적 채무를 뜻합니다. 아동 살인마 스토리와 반인도적 체제 고발이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은 두 요소를 이처럼 성공적으로 결합하였으나, 그것도 어쩌다 한 번이지 두 번이 가능할까? 바로 그게 작가의 의도입니다. 두 번 세 번도 나에겐 이런 곡예가 가능하다는 걸 독자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 우리 독자들은 진정 임자를 만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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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카드
마이클 돕스 지음, 김시현 옮김 / 푸른숲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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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의 흑막은 세계 어디에서나 사정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영국은 세계 최초로 의원 내각제라는 헌정 시스템을 확립한 나라죠. 형식적으로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 직위에 머물러 있는 군주를 두고서도, 선거를 통해 뽑힌 다수당의 리더가 국가 살림의 실권을 쥐게 한 건 당시로서는 대단한 파격이었습니다. 이런 체제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고 근 한 세기가 지나서도 예컨대 대륙의 오스트리아 같은 곳은 여전히 전제정의 성격을 떨쳐버리지 못했으며, 실세였던 메테르니히 재상 같은 이도 황실의 이익과 구체제 수호에 충성을 바치는 범위 안에서만 권력자였죠. 얼핏 보아 취약하기 짝이 없는 곡예와도 같은 의원내각제를 오랜 시간 동안 발전시켜 온 영국 헌정사는, 복잡다단한 이해 관계로 대립하는 제 세력 사이에서 막후 조율과 타협을 이뤄낼 수 있는 수완 좋은 리더들의 자취를 필연적으로 그 만신전에다 봉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벤저민 디즈레일리, 로이드 조지, 윈스턴 처칠 등이 그 예입니다(아무래도 시점이 보수당 인사들 쪽에만 위치하기 때문인지 역대 반대당의 당수들은 잘 거론되지 않더군요).

대처 전 수상(이 책에서 유일하게 실명으로 나오는 인물입니다)이 민심을 완전히 잃은 후에도, 보수당은 그 다음 선거에서 또다시 집권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어떤 이는 이 소설이 집필 당시 시점에서 근미래를 설정했다고도 보지만, 여러 정황상 이 작품은 1992년에 치러진 영국 총선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맞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이 작품에선 선거 당일 며칠 전부터도 집권당의 승리가 점쳐졌고, 방송사 주관의 출구 조사에서는 3,40여 석 정도의 차이로 이기리라는 전망이 나오는 걸로 설정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투표가 종료되고서야 보수당의 승리 결과가 알려져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지요. 의석 수가 종전 140석 차이에서 60여석 차이로 급격히 감소한 것도 소설 속의 가상 세계와 비슷합니다. 소설에서는 프랜시스 어카트 원내 총무(이제는 원내 대표라는 번역어가 더 좋을 것  같지만)가 서리 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데, 실제 역사에선 존 메이저 총리가 서리 출신이기도 합니다.

존 메이저 총리를 모델로 삼은 듯한 작중 캐릭터는 헨리(할) 콜링리지입니다. 화자인 어카트의 표현에 따르면 "세상의 규칙을 바꿔 나가기보단 교활하고 좀스럽게 순응해 가며" 그 자리에 오른, 별반 평가해 줄 것 없는 그릇 작은 인물에 불과합니다. 요즘처럼 매스미디어가 비정상적 권력을 행사하는 현실 속에선, 콜링리지처럼 고만고만한 정치인들이 수상 자리에 번갈아 오를 뿐, 나라의 틀을 건강한 방향으로 과단성 있게 몰고갈 만한 걸물들은 그 전 단계에서 번번히 좌절할 뿐이라는 거죠. 처칠이나 로이드 조지는, 요즘 같았으면 신문과 방송의 집요한 공세에  벌써 낙마하여 야인 신세에 평생 머물렀으리라는 게 그의 전망입니다.

콜링리지를 두고 "대단히 재미없는 인물이라 그의 부인도 아마 다른 데 찍었을 것"이라는 게, 대중의 평판을 대변하는 눈치 빠르고 화통한 스타일의 여기자 매티 스토린의 신랄한 단평의 형식으로 나오는데, 이는 실제로 존 메이저 총리를 두고 세간에서 찧어대던 입방아와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곡마단 곡예사의 아들인 메이저 총리에게는 형이 있었는데, 자신과 아주 다른 길을 걸으며 가업을 이으려 노력했으나 성과가 좋지 못했던 무능한 형을 둔 점도 콜링리지가 메이저 총리와 닮아 있는 대목입니다. 성품이 악하지는 않으나 룸펜처럼 인생을 허송하던 형의 존재라는 약점을 냉큼 잡아, 이후 파워게임에서 유리한 패로 활용하려는 어카트 총무지만, 당장은 실세인 총리에게 그 명백한 실책을 두고서도 직언을 삼가며 꼬리를 내리는 모습은 독자의 고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언플"이란 말이 요즘은 주로 연예기획사의 행태를 두고 쓰이지만, 과거에는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특히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 씨의 장기였죠) 주로 정계에서 널리 구사되던 술수를 두고 비꼬는 용어로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이 책에도 언론사는 정치 게임의 유력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정치인과의 오프 더 레코드 회동을 통해 다음날 기사의 핵심 소재를 잡고, 웨스트민스터 街 전체에 파장을 일으키는 모습은 이미 플레이어 레벨을 넘어섰다고나 해야겠습니다. "사회의 공기(公器)"라는 교과서적 평가가 무색할 정도죠.

어카트는 민간 홍보 회사 대표 오닐을 통해, 그의 오랜 지기이자 반대당 의원인 켄드릭에게, 집권 내각에 치명적일 수 있는 정보를 고의적으로 흘리게끔 공작을 벌입니다. 어카트는 원내 대표라기보다, 우리 식으로 따지면 구 안기부장에나 해당할 만큼 자당 의원들에 대한 각종 약점을 잡고 전선 이탈을 막는 데에 노련한 술수를 구사하는데, 오닐은 민간인이지만 보수당의 하청 업체로 사실상 오닐은 당내인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마약 상용이 약점으로 잡혀 어카트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 되는데, 이미 예순을 넘겨 정치적 야망이 조바심으로 변한 어카트는 마지막 용틀임으로 대권을 넘보는 터라, 수단의 청탁을 가리지 않고 휘두를 만큼 코너에 몰려 있는 처지이기도 합니다.

야당이라고 상황이 다를 바 없어서, 결국 이해관계의 궁합 여부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뤄지는 모습은 당의 경계를 따지지 않습니다. 출구 조사 결과 발표 후 웨일즈어로 욕설을 내뱉는 반대당 당수는, 실제로 웨일즈 출신에다 거침 없는 언행으로 구설에 올랐던 닐 키녹을 모델로 했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실제 영국의 정당사와 숱한 추문을 알고 읽으면 재미가 몇 배로 늘어나는 멋진 풍자소설이며, 현재 미국 넷플릭스 신디케이트로 방송되는 케빈 스페이시 주연 미니시리즈는 배경과 설정을 미국식으로 통째 번안한 작품입니다.

 

처칠은 이런 명언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 체제다. 하지만 현존하는 그 어느 정치 체제보다도 나은 제도이다." 이 책 뒤표지에는 "민주주의는 과대평가되었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21세기에 접어들고도 우리는, 가장 안락하게, 건전하게 의존해야 할 정치시스템을 두고서도 최소한의 확신을 갖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런 한심한 정치 모사꾼들의 부패한 행태가 보기 싫어서라도, 이제는 다른 대안 모색에 나서야만 하는 전환점에 도달한 걸까요? 히틀러의 변덕에 국민의 생사가 좌우되는 폭압 행태에 비하면, 그래도 이런 "소인배"들의 잔머리 굴리기 게임이란, 차라리 귀여운 구석이라도 있는 것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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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 - 전략이란 무엇인가 인문플러스 동양고전 100선
조유 지음, 문이원 옮김, 김근 감수 / 동아일보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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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전 중에는 일반명사인지 고유명칭인지가 헷갈릴 만큼 기이한 이름을 달고 있는 게 많습니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이탁오로 잘 알려진 거사의 저술 <분서>가 그러합니다. 불을 싸질러 버려야 마땅하다는 뜻의 반어적 명명인 그 책은, 당대 지식인들이 보았을 때 "소지나 일독만으로 반역자 처단을 받을 수 있는" 불온하고 발칙한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책 <반경>도 얼핏 보아 그런 인상을 줍니다. 기존의 경전들이 가르치고 있는 내용에 잔뜩 반(反)하는 내용만을 담은, 삐딱한 가르침만 한껏 품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렇지는 않더군요. 여기서 반(反)은 오히려 자신을 반성, 성찰한다는 의미도 적잖이 담고 있었으며(수기치인이라는 유가의 정통 스탠스입니다), 사물의 이면을 애써 통찰한다는 격물치지의 원리까지 바탕에 깔고 있었으니, 우리 현대인의 눈으로 보자면 넉넉히 정통파 교리에 포함됩니다. 중국 고전이 언제나 그런 태도를견지하지만,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고 현세의 구복과 입신 영달에의 길이 무엇인지 적시하되, 사회를 규율하는 지배층이 합의한 모럴이 무엇인지 수시로 환기하며, 영리하게 처신하되 소인배로 떨어지는 평판을 받지 않게 하라는, 균형 감각의 묘도 함께 일깨우고 있습니다.

다만 이 <반경>만의 개성이라면, 경과 사가 절묘히 어우러져, 이른바 도(道)와 처세의 양 대척 영역에서 도그마를, 좀 마성이다 싶을 만큼 묘한 호흡으로 이 저자가 체계 속에 잘 버무리고 있다는 겁니다. 분명 물과 기름처럼 안 어울리는 컨텐츠를, 저자의 입답 하나만으로 "그들이 하나의 이치 속에 유영하고 있었던가?"를 깨치게 하는, 보기 드문 컬러의 내공을 선뵈고 있다고나 할까요. 대개 우리가 살며 절실히 겪는 문제를 텍스트 속에 저며 내고 있으므로, 중국 고전은 주희 류의 지독한 형이상학 논변이 아니라면 읽기에 재미있습니다(참고로 주희는 이 책 저자 조유보다 몇 백 년 뒤에 나온 후대인입니다). 이 책은 특히나, <반경>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형식과 격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써 내려간 터라, 경이니 사니 하는 포맷에 얽매임 없이 현대인들이 마음껏 저자와의 교분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역사적 어카운트나 성현의 가르침 뿐 아니라, 심지어 골상학, 관상학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저자는 예를 들어 십진 분류법 같은 구태의연한 할거주의적 진용 논리와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붕새처럼 훨훨 나는, 주제와 관념의 족쇄를 넉넉히 타파하고, "내가 지혜의 요체라고 파악하는 바를 내 책 한 권에 다 담겠다"는, 지극히 호방한 포부와 스킴으로 책을 써내려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굴이 작고 몸통이 큰 게 첫째 가는 천한 골상이요, 허리가 짧고 다리가 긴 게 천하기로는 다섯 째 간다." 정말 이 대목에서는 뒤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빈, 정우성, 강동원 등은 이분의 시대에 태어났으면 사람 취급도 못 받았지 않겠습니까?

이 책은 원본 자체의 완성도나 흥미도 뻬어나지만, 번역진의 성의가 실로 놀라웠습니다. 어떤 번역자의 내공이나 실력이 과연 당해 원전을 다룰 깜냥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몇 장만 읽어 봐도 눈 밝은 독자의 눈에는 훤히 보입니다. 예 하나만 들겠습니다. 본문 중 강태공이 언급된 대목에 역주가 달려 있는데, 물론 강태공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들도 다 압니다. 그러나 본명이 여상이고 이후 제(齊)나라를 봉지로 받은 그 대 경세가가, 왜 별칭이 강태공인지 내력을 정확히 적은 곳이, 이 방대한 한국어 웹 망 중 어느 한 사이트라도 있는지 확해 보십시오. 다들 한 마디씩은 하고 있는데, 결정적인 대목에서 다 틀려 있습니다.


본명

관계

여상(呂尙)은 이들에게...?

고공단보(조부)

선군의 태공(아버지)

꿈꾸던(望) 인물

계력(부친)

선군

서백 창(희창).

곧 주 문왕(본인)

금상

우연히 만나 재상으로 초빙

太公望


이 책의 해당 역주는, 독자가 디테일에서 미심쩍어 하던 부분을 정확히 짚어, 다른 책에서 해결하지 못하던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긁어 주고 있습니다(위 제가 도식화한 것 참조). 할아버지인 고공단보를 주 문왕 창이 왜 "태공"이라 부를까요? "(문왕 자신의 아버지인) 계력이 태공으로 부른 분"이란 의미입니다. 나중에는 여상 역시 존경의 의미에서 뭇 사람들에게 "태공"으로 불리니, "강태공"이라고 할 때의 "태공"과 "태공망"이라고 할 때의 "태공"은 서로 다른 사람입니다. "강태공"과 "태공망"이 서로 같은 사람인데도 말입니다. 그렇게나 잘 알려진 사람의 통칭 내역 하나도, 정확하게 설명하는 출처가 이처럼 드문데, 이 책은 역주에서 이처럼 정확히, 소상히 밝혀 주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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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러 속의 우주 - 대칭으로 읽는 현대 물리학
데이브 골드버그 지음, 박병철 옮김 / 해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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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에 이를 관통하는 법칙이, 그것도 지극히 단순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소박하고, 유치하며, 무모하거나 만용에 가까운 기대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뉴턴이 중력을 G와 두 개의 질량변수, 두 물체 사이의 거리라는 팩터만을 사용하여 도식화하였을 때, 유럽의 지성은 그에게 절대권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인류는, 다섯 세기가 지나도록 이 기본적인 힘(중력)에 대해 더 이상의 상위 법칙, 원리에로의 포섭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보편적이긴 하나 보이지도 않는 양상으로 작용하거나(전자기력), 아예 육안으로 관찰할 수도 없는(장비를 쓴 후에도 여전히 그 관측이 까다로운) 나머지 세 힘(force)에 대해서는 제법 인식의 진전을 이룬 형편인데도 말입니다.

반물질 역시, 처음 이 가설이 제창되었을 때는 그저 만인의 비웃음을 살 뿐이었습니다. 사물을 양과 음으로 일일이 나누는 것부터가 원시 신앙의 흔적이고, 설사  그런 시도를 벌인다 한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하나하나에 그에 대응하는 반(反) 실체가 대기하며, 다만 우리의 세계와는 접촉, 관측이 불가한 다른 영역에 머물 뿐이라는 말이, 황당무계하게 받아들여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에 대해, 주류 입장에 속한 물리학자라면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일단 긍정한 후 이론 전개를 시작합니다. 아울러, 공자 이래 동양의 철학자들이 한 번도 그 견지와 탐구를 중단한 적 없는 영원한 도그마인 음양(陰陽)이기설 역시, 서세동점의 험악한 시대상에서 일거에 폐기되었던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 오늘날에 와서 다시 한 번 열렬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도 이론상의 이런 신 조류의 반영 결과 중 하나입니다.

표준모형? 한때는 아인슈타인이 통일장 이론을 구상할 때만 해도 이를 두고 미친 시도라며, 그의 위명이 버젓이 살아 있던 시점에조차 세인(이라기보다 학자, 지성인)들은 조소를 퍼부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입자론 분야에서 점점 발군의 성과를 이루고, "만물의 이론"이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는 데에 다시금 합의가 이뤄지자, 이 표준 모형이라는 얼기설기 사상누각 구조가 조심스레 복수의 학자들에 의해 도식화되었습니다. 처음 제창된 이래 유의미한 진전이 많지 않았음에도, 아직도 학자들은 이 가설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최근 신의 입자 발견(이 책 저자 데이브 골드버그는 이 인기 있는 별칭 사용에 대해 반대합니다)에 의해 이 표준모형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금과옥조로서의 위상을 한층 더 굳힌 모습입니다.

이름이 거창하게도 표준모형이라고 붙은 공식조차 모습이 저처럼 번잡하니, 이를 지지하고 이에 집착하는 해당 분야 학자들의 주관적 의욕과 개인적 신조의 강도가 어떠하든, 우리 인류가 "세상 만사를 꿰뚫을 이치"를 한 큐에 장악하기란 여전히 갈 길이 멀리 남은, 어쩌면 무망한 과업처럼 보입니다. 20세기 중반 아인슈타인이 망집에 빠져 호기를 부린다고 비난하던 당시의 보수적이고(?) 겸허했던(...) 그의 후배 과학자들의 태도가 온당했는지도 모릅니다. 과학은 더 이상 단순화에의 예찬, 근거 없는 숭배를 중단하고, "현상의 정확한 기술"에 만족해야 할지 모릅니다. 실제로 인문과학 중 언어학 같은 경우 이런 트렌드가 최근의 주류입니다.

데이브 골드버그는 이런 점에서, 대단히 야심만만한 성격과 정신의 특질을 갖춘 저자, 갑갑하고 굴곡 많은 구조적 제약에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지각적으로 감당 못 할 만큼 큰 스케일을 지닌 이 물리계를 "말 몇 마디로 후려치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 우리 독자들에게 록스타적 열광을 부르기에 충분한 엔터테이너입니다. 아름다운 비주얼과 조화로운 음율로, 우리의 눈과 귀를 만족시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픽션 내러티브를 구수히 오싹오싹하게 들려 주는 전기수도 요긴한 직분이지만, 그에 대한 무지가 인간 존재에 근원적 불안감을 드리우는 "세상 돌아가는 근본 이치"를 두고서, 시원하고 통쾌하게 해명해 줌으로써, 지적인 갈증을 채워주는 이런 이야기꾼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 소중한 동료인지도 모릅니다.

그러잖아도 복잡하게 꼬인 논의 구조에서 만인이 지쳐가고 있을 때, 다 필요 없으니 이거 하나면 된다면서 들고 나온 게, 연식은 제법 된 뇌터의 이론입니다. 지금까지 그 숱한 단순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끝에, 불난 집에 부채질이나 하듯 더 단순한 걸 펄럭이는 기치로 내세운 당돌함이란.... 그는 정말로, 이거 하나면 다 된다고, 실현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초단순 원리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이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한 건 아니지만, 어떤 이론이 그 끝장을 보겠다며 강력한 추동력까지를 부착하는 건 주장자의 인문적 상상의 저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저자는 현역 물리학 담당 교수이지만, 동시에 풍부한 인문적 통찰 능력까지 지니고 있는 터에, 신명 나는 미학적 리듬과 통섭적 시야로, 물리학에 무지한 일반 독자들의 의욕까지 성공적으로 자극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아마 공간구조적 대칭성은 많은 독자들에게 익숙한 개념일 겁니다. 당장 저만 해도 정규 초등과정에서 점대칭 선대칭 개념을 배우며 경시대회 대비를 위해 온갖 난해도형을 이리 뒤집고 저리 꼬는 연습을 숱하게 수행하고 자란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대칭은 어떨까요? 저자는 "시간의 화살"이라는 문학적 표현을 상기시키며, 시간보다 더 일방통행인 개념은 아마 인간에게 알려져 있지 않을 거라며 어리석은 독자들을 도닥인 후, 본격 황야와도 같이 거친 이 생소한 개념 속으로의 탐사를 독려합니다.

왜 시간의 대칭이 낯설 수밖에 없냐면, 일견 엔트로피 제2법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엔트로피 법칙이나 그 중핵을 이루는 개념은 말만 거창할 뿐, 그 내용이 우리 일반인의 직관에 그처럼 잘 부합하는 것도 없습니다. 사물의 질서란 어질러지기가 쉽지, 그 반대로 알아서 정돈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겁니다(책 중에서 골드버그 교수-왠지 이름으로 데이브라고 막 불러도 될듯한 - 는, "혼란의 극에 일단 달한 후 그보다는 쬐끔 나은 상태로 잠시 회귀할 수는 있다면서, 이 법칙의 예외를 인정하죠. 하지만 이미 유일 상태에 가까운 극점에 도달하는 자체가 확률적으로 극히 어렵습니다). 여기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도 설마 있을까요? 시간이 만약 역방향으로 흐른다면, 엔트로피 진행의 불가역성이 깨진다는 뜻이니까요.

그전부터 학자들은,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시간의 역설(인과가 뒤집히고 기 발생 실체가 무[無]로 돌아감) 때문에 장벽을 만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꼭 단서를 달기를, "이것이 시간여행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건 아니다"라고 합니다. 즉 귀류법의 판정 범주에 이걸 포함시키면 안 된다고 유보 조항을 단 건데, 저는 예전부터 그 이유, 근거가 참 궁금했습니다. 왜 이 영역에서만은, 유클리드가 수천 년 전 확립한 수학적 증명이 통하지 않는 걸까요? 물리학과 수학이 전혀 별개의 왕국에서 놀고 있다 착각하는(대중서만 읽으면 그렇게 되죠) 백치는 이해 못할 수 있으나, 수학 없는 물리는 교각 없는 금문교와도 같습니다. 언젠가는 공법이 발달하여 교각없이 구조를 세우는 게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경제성이 없거나 먼 미래의 가능성에 불과합니다.

저자 역시 개념상의 난점을 몇 들며, "어쩌면 시간이야말로 가상의 추가 차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며 확언은 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 독자들은, 과감한 시간 대칭 방법론으로 사고를 확장하는 중에, 심지어 이중 나선 구조조차 뇌터의 이론으로 모두 일원적 설명이 가능할 수 있는, 전인미답의 신세계로 발을 한 걸음 들여 놓을 수 있을 겁니다. 중력만 여태 통일장 포섭의 달콤한 제의를 회피하고 있고, 시간 차원만이 여러 역설의 덫에서 시원하게 발을 못 뻬고 있다면, 이 둘 사이에 어떤 연계가 있는 것 아닌지, 가장 단순하나 가장 꾀까다로워 보이는 대칭성이란 처방으로 일거에 난제가 풀리는 건 아닌지, 데이브 골드버그 박사의 이 책은 개그콘서트처럼 직설적이고 재치 있는 화법을 통해, 대중들의 "물리 울렁증" 치료를 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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