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부터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 43일간의 묵언으로 얻은 단순한 삶
편석환 지음 / 가디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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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직 광고업 종사자이자, 현직 대학교수의 직분을 지닌 분이라면, 아마 본연의 직무를 원활히 수행하시기 위해서라도 말을 안 하고 지내시기가 힘들 듯합니다. 그런데 저자인 편석환 선생님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이면서도 말을 안 하고 지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결심에 어떤 배경이 있을지요.

예전 연산군은 "입[口]은 만 가지 화의 근원"이라면서 신하들에게 이를 잊지 않게 글귀를 새긴 패를 차고 다니게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남더러 침묵을 강요하면서 자신은 오히려 발언을 독점하겠다는 전횡의 표방이므로, 우리에게 참고될 바가 전혀 없는 망언입니다. 효과적인 소통의 미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이 평가되고 있는 요즘, 소통의 전문가께서 본인 스스로 "묵언(默言)의 수행(修行)을 공언하심은, 말을 안 하고 살 수 없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묵직한 경종을 울리고 자신을 돌아 보게 함에 충분합니다.

이 책은 제목과 책의 실질이 서로 잘 부합합니다. 제목부터가 "나는...."이란 주어로 시작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저자)"의 결행과 의지를 내세우고 있는데, 책 내용도 그렇습니다. 말을 아끼시겠다면서 책 내용은 (아무리 좋은 취지라고는 하나) 텍스트로 가득 메워져 있다면, 그것도 어딘가 모순이 낀 구성일 텝니다. 그런데 이 책은, 1) 일단 개인의 결심, 실천을 체크할 수 있게 스케줄러 형식을 띠고 2) 일단 저자 자신이 장장 42일에 걸쳐 결국 한 쾌를 마무리지은 묵언 수행의 개인 log이며, 3) (제목에 잘 어울리게도) 텍스트에 비해 여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구성, 레이아웃입니다.

임석규 전 한겨레 논설위원님은 "(저자) 편 교수는 여백이 많은 사람"이라 평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여백이란, 진득한 질감에다 사후(事後) 실행을 담보할 수 있는 말만을 입에 담은 후, 정신의 여력은 신중함과 진지한 고민의 자리에 배정하겠다는 의지를, 과언(寡言)으로 외부에 표방하는 태도를 일컬음 아닐까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 "그 사람 거, 말은 아끼지만 믿음직한 사람."과 동의어죠.

p24에서 잠시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다.
헐, 휴지가 없다.

여기까지만 보면 누구나 일상에서 한 번은 체험해 봤을 경험입니다. 차를 몰고 가다 갑자기 배에 급한 신호가 올 때, 요즘은 가까운 전철역으로 서두르면 큰 걱정은 없습니다. 화장실이 근처 상가 건물에 하나 열려 있기만 해도 사실 안심입니다. 휴지 걱정은 그 다음이죠. 그런데 편 교수님의 그 다음 말씀이...

묵언 중이니 누구를 (소리 내어) 부를 수도 없다.
막막하다.

입니다. 화장실에서 볼 일 보고 휴지가 없음을 뒤늦게 발견함도 (남 일이라면) 우스운데, 지금 본인만의 특수한 다짐, 계획이란 조건 때문에 더 난감한 상황(약속을 지키기 위해 말을 못 함)에 빠진다면, 이야말로 (죄송하지만) 보는 입장에서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편 저자님의 마무리는,

(그러나) 나는 묵언 중이다.

로 이뤄집니다. (괄호 안의 말은 서평자인 저의 해석을 반영하기 위해 임의로 넣었습니다) 여튼, 현실의 난감함이 두 번 세 번 편의를 가로막고 (누가 보기라도 할 때)희극적인 장면이 펼쳐져도, 나는 나의 묵언계를 지키고 말겠다는, 그 진지함과 절박함을, 극히 짧은 몇 마디 안에 표현하는 서술입니다. 정신 내부의 치열한 갈등과 충돌을 묵묵히 치러 내고 그 잔해를 소화할망정, 바깥 세상을 향해서는 차분하고 동요 없는 자세를 유지하겠다는, 묵언 수행자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왜 묵언인가? p140에 나오는 30일째의 기록을 보십시오. "이렇게 오래 할 줄 모몰랐다." "내가 말할 기회만 상대와의 대화에서 노리고 있으면, 그 사람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상대에게도 내 말 중 (그가) 진짜 듣고 싶은 건 많지 않다." 결국 우리 삶에서 이뤄지는 많은 사회적 "소통" 중, 상당수는 공해이자 민폐, 더 지독한 표현을 쓰자면 "쓰레기"란 겁니다. 말이 말을 낳고, 연쇄 순환 고리를 이어가면 갈수록 본의는 곡해되고 충돌은 격화되니, 아예 입을 닫고 상대의 진의, 혹은 나의 참 모습을 캐고 들어가는 게 더 나은 합의 아닌가, 책을 여기까지 읽고 저는 이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물론 이런 거창한 각성에서만, 장장 42일 간의 묵언 실천이 이어졌다면 오히려 범속한 우리 독자들의 기를 죽이기나 할 뿐입니다. 교수님으로서는 그보다는, 병원을 방문하여 받은 검진 결과가 "성대 종양 발견"이라는, 심각하긴 하나 개인 신상, 건강에 더 밀접 연관된 동기가 작용했을 뿐이었습니다. 일단은 말이죠. "어쨌든 말로 먹고 살아야 할 처지에" 걱정이 덜컥 앞섰다는 고백은 솔직해서 독자의 동조를 쉬이 부릅니다.

수미쌍관의 형식미를 추구함인지, 에필로그 역시 소박하고 털털한 고백이십니다. "묵언을 계속하고 싶은데" "먹고는 살아야 해서" 개강과 더불어 긴 장정을 일단은 멈추었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말을 건네고 싶었다"는 첨언이 다음 페이지에 이어지고요. 몸에 군살과 독소가 가득할 때, 단식과 디톡스 요법으로, 일단의 몸의 잉여 요소를 털어 내듯, 말을 일절 멈춘다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말이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모해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나라는 정거에서부터 끊어 내겠다는 결심, 그리고 그 작은 결실이 가져 온 뿌듯함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소극적이라고 비판,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이번에는 나댄다고 험담" 과연 세상은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난맥상입니다. 42일 간의 수행 동안(그 동기가 자의였건 타의였건 무관하게), 저자는 많은 상념과 각성, 그리고 영혼의 정화를 체험했습니다. 짧지만 길고, 비어 있으나 속이 꽉찬 그 기록을 통해, 나의 말은 어떤 실속과 보람을 품었는지 반성할 일입니다. 아울러, 여백이 비교적 많은 이 책의 페이지에다, 언젠가 적당한 시간을 끌어서, 나 자신의 묵언 수행 여정을 겹쳐 써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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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힙합 1 - 닥터드레에서 드레이크까지 아메리칸 힙합 1
힙합엘이 지음 / 휴먼카인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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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힙합이라고 하면 대뜸 제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란 기성 사회 구조, 체제의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든지 하는, 거창하고 정치적인 맥락에서의 자유만을 뜻하진 않습니다. 예쁘고 날씬하고 말쑥하게 보여야 한다는, 속물적 미의식이나, 자본이 조직적으로, 주기적으로 창출해 내는 "인위적 유행"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미 대륙의 트렌드에 언제나 민감했던 한반도 남쪽의 거주민들이, 1990년대 중후반부터 (그 저변에 깔린 정신을 제대로 소화도 못 했으면서) 열심히 따라하고 있었을 때, 원타임이나 허니 패밀리 같은 연예인들을 롤 모델로 삼던 젊은 세대를 두고 "똥싼 바지나 입고 다닌다"며 어른들이 얼마나 눈꼴사납게 봤는지 모릅니다. 겉모습만 따라했을지 모르지만 은연중에 힙합 정신을 (컨벤션 일체를 거부하고 나선다는 소극적 범위에서) 구현한 게 당시의 젊은이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 띠지를 보면, 에픽하이의 타블로가 한 줄로 책의 가치를 평한 말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나마 선명해지게 돕는다" 우리는 힙합 음악이나 패션, 그리고 그 이면에 덧붙은, 때론 끔찍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한 각종 스토리에 대해선, 어느 정도 들은 풍월로 익숙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힙합 뮤지션과 프로듀서, 그리고 그들의 정신을 지배한 출신 배경, 공유 가치, 전통 등 인적(人的) 요소에 대해선 과연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을까요? 물론 아이스큐브(이 사람은 혐한 발언으로 일찍부터 한국에도 유명해졌습니다), 닥터 드레 같은 이름은 한 번 정도야 들어본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에미넴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겠지만, "비교적" 최근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험악한 아우라에 딸려 오는 왠지 불쾌하고 반사회적 이미지만 막연히 재생될 뿐, 이들 "사람들"이 보여 준 음악적 개성과 철학, "경제적 성공" 혹은 그들 상호간의 사연과 네트워크, 대립 구도에 대해선 잘 아는 바 없습니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해당 챕터 담당 집필자가 "나만의 아이돌"로 표현한) 나스와, 그의 영원한 라이벌 제이지(Jay Z) 사이의 운명적 대결을 여러 시기에 나눠 분석한 대목입니다. 저자도 그런 말을 하고 있지만, 꼭 누구 보는 눈이 신경쓰여서라기보다, 나스 같은 이를 "우상"으로 고백하면 좀 어울리지도 않고 너무 거창하다는 느낌이 듭니다(필자께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제가 이해하기로). 그러나 "아이돌"이라고 하면, 선호와 애정(때로는 애증?)의 대상으로 삼을지언정 "도덕적 평가"나 "롤 모델"로의 승격까지는 고려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아이돌이되 우상은 아니"라는 서술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네요.

 

담당 집필자분은 "나스는 일찍 알아도 제이지는 늦게 알았다. 하지만 일찍 알아서 들었다고 음악이 닳는 것도 아닌 만큼, 늦게나마 (특정 앨범을 계기로) 열심히 들었고 그 가치를 이해하니 충분하다고 여긴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 하나 공감가는 서술은 "어렸을 때 나스를 좋아한 팬으로서 그의 라이벌 제이지는 그만큼 미워했는데, 어린 나이에 어울리는 충성심의 표현"운운한 부분입니다. 저도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 배우, 야구팀에 대해 같은 태도를 가졌거든요. 그러다가 해당 영역, 장르 전체를 보는 눈이 떠지면, 그때부턴 성숙하게 두루 애정을 주고(물론 첫사랑과 비길 수는 없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애가 어른이 되는 겁니다. 이 책은 이처럼, 힙합이란 전문 주제를 넘어 인생사 일반에 대한 폭 넓은 소회와 성찰이 간혹 비쳐져서, 힙합 뮤지션들이라는 "사람들" 못지 않게 "육성을 통해 개성이 느껴지는" 저자들의 면면을 엿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 책은 힙합 뿐 아니라, 시대상과 유리되지 않고 동시대인들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 표현, 재생산한 그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에 대해, 그 사회적 맥락까지 소개하고 있어 깊이를 지닙니다. 예컨대 제이지는 2001년, 진정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는 음반 <블루프린트>를 발매, 평단과 팬들로부터 열광적 호응을 얻었는데, 물론 제이지 같은 사람(뿐 아니라 그의 추종자나 심지어 비평가들도) 911테러에 대한 어떤 역사적 인식 등을 (내심의 의사에 반해서) 억지로 음악에 집어넣는다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다만 이 책에서 저자가 보여 준 그 서술, 힙합 뮤지션과 역사적 사건 간의 상관 관계를 진지하게 분석하는 그 설명의 관점이, 독자로서는 깊은 성찰이랄까,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받게 되죠.

 

힙합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닥터 드레, 나스, 제이지 등이 이 책에서 차지하는 서술 비중이 워낙 크고, 다른 주제를 거론한 장에서도 이 이름들이 빠질 수가 없어서, 얼핏 보면 이들 거물들만 다룬 책 같지만, 집필진은 세심하게 다른 뮤지션도 적절한 장소에서 일일이 커버하고 있습니다. 힙합 장르는 인적 연계(협동 뿐 아닌 대립 역시)의 파악이 중요한데, 이 책은 인물 열전식이 아닌(열전 성격도 없지는 않으나), 주제별 구성을 취하고 있어서, 유기적이고 통합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결국 힙합, 아니 그 어떤 음악, 예술 영역도, 정해진 공식이나 자본적 추동력이 아닌, "사람들"이 이뤄내는 작업이요 결과물입니다. 이 책은 분량이 아주 많지는 않고, 다루는 기간도 21세기에 (대체로) 한정하고 있음이 다소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런 "사람들"에 대해 독자, 일반 팬이 더 깊은 이해를 다질 수 있었던 게 큰 보람으로 남습니다. 저자들께서 다음 기회에 "힙합 전사(全史)"를 커버하는 대백과 기획으로 독자의 갈증을 채워주시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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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에서 나를 찾다 - 의식 연구의 권위자 최준식 교수 최고의 강의
최준식 지음 / 시공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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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의식이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정신 영역의 일부입니다. 이성과, 이성에 기반하여 인간의 모든 정신, 행동, 선택, 결단이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합리주의가 서구의 사조를 휩쓸 때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이 사람들이 무의식에 대해 취한 태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애써 무시하거나, 분별력이 부족한 이들만이 집착하는 미성숙한 "태도"의 일종으로 치부되었습니다. 하지만 S 프로이트 이후 무의식이란 엄연히 우리 정신의 거대한 부분을 차지하며, 해당 영혼의 운명을 결정함에 있어 중요한 발언권을 행사하는 주체라는 데에 의견이 거의 모아졌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오히려 기라성 같은 현인들에 의해, 무의식의 중요성이 일찍부터 강조된 바 있습니다. 다만, 저자 최 교수님이 주장하시는 대로, "집단 무의식 외 개인 무의식이 주목되지 못한 탓에" 프로이트 같은 선각자 한 사람의 기여만도 못한 진도에 머물렀을 뿐입니다. 인간이 주위와 잘 융화하고, 내면의 자아와도 불화하지 않으며(이것이 잘못되면 온갖 정신질환과 신경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나아가 언제나 맑고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이 무의식의 균형을 잘 잡는 게 필수적입니다. 다만 그 무의식이, 불건전한 집단 동조 현상과만 밀접한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은 마치 좀비와도 같이, 양심 실종, 죄의식 부재, 타인에의 책임 전가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무의식적 동조(confirmity)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예증하기 위해, 한국 일각에 만연한 사이비 종교 집단과, 히틀러가 주도한 나치의 악행을 들고 있습니다. 사이비종교 집단이라고 해서, 저학력, 저소득, 취약 계층 출신만 모인 건 아닙니다. 직장에서 멀쩡히 제 기능 잘 수행하는 사람도 있고, 다른 일상의 일을 처리할 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이도 있죠. 사이비 신념을 광적으로 신봉하는 자들은 반사회성향이 강할 듯하지만, 오히려 반대인 수가 더 많습니다. 이들 신도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는, 자기들 종교 집단끼리만 모여 있을 때입니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그것도 조직을 갗춘 상태의) 다수인들이 전부 특정 방향의 행동을 취하니, 그게 보편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인지 아닌지 따질 겨를도 없이 무작정 따라하고 봅니다. 오히려 이런 특수 집단도 소(小) 사회라고 보았을 때, 이들은 지극히 "사회적 성향이 강한" 성원들이 되어 "질서"를 충실히 따릅니다.

 

나치 독일도 마찬가지죠. 공감무능력은커녕, 이들은 자신이 속한 소집단에 대해 지극히 헌신적으로 봉사했습니다. 이들의 비극은 인류 보편의 대의를 망각하고, 자신들이 밀접 관계를 맺고 있는 네트웍에 대해 맹목적 충성을 바쳤다는 데에 연원합니다. 이들도 아마, 기독교적 양심에 입각하여 유대인 학살에 반대하려는 자국 내 소수자(본회퍼 목사님 등)에 대해서는, "공감무능력자"라며 마녀사냥을 일삼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주변의 소위 "대세"라는 것에 대해 이를 진정한 권위로 착각하여, 그 앞에서 아무 도덕성이나 이성을 작동시키지 못하고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인간이 무의식보다 의식에 의해 자신을 매 순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라면, 이런 역사적 우행을 저지르는 함정에서 얼마든지 벗어났을 것입니다.

 

저자는 한국전 당시 미국포로들이 플랭카드까지 들고서 "북침으로 벌어진 6.25"라고 주장하게 세뇌되었던 사례를 들며, 인간 정신 작용에서 의식, 이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낮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세뇌가 되었다 해도, 이를 "디프로그래밍"한 후엔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엄청난 강도로 혹사를 당한 후 이른바 "demonic angel"에 의해 달콤한 어조로 주입된 생각, 사상, 아이디어는, 이후 이 사람의 의식 깊숙한 곳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어렵다고 합니다., 강철 같은 의지로 영악하게 자신의 행동과 신념을 일일이 통제하는 "이성적 인간"의 관념은, 이런 뚜렷한 실증 앞에 허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인간이 건전한 행복을 추구하며 가능한 한 최고 수위의 만족과 행복을 누리려면,  자신의 행동과 기호, 생각을 일일이 통제할 수 있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일본 어느 사무라이와 사환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집단 무의식의 수레에 끌려가며 썩은 의식으로 정체(停滯)하지 않으려면, 언제나 깨어있는 삶이라야 한다는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내 행동이 남의 행동을 무턱대고 모방하는 건지, 아니면 나 자신의 분명한 가치관과 준칙에 의해 이뤄지는 건지, 언제나 반성해 보는 습관을 유지해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아이를 과도하게 지배하여 자신의 (좌절된) 이상을 투사하려 드는 부모의 engulfment 심리/증상도, 결국 부모 자신이 독립된 인간으로 살지 못한 여한을 자녀에게 대물림하려는 비극적인 시도입니다.

 

이런 자기 성찰 습관이 몸에 밴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유연하게 자신의 방침을 수정해 가면서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데, 어리석고 비이성적인 인간일수록 마지막 자존이나 되는 양(혹은 누릴 걸 못 누린 불우한 처지라 이런 데서라도 보상을 받아야겠다는 듯) 자기 스타일을 조금도 고치지 않는 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사람은 오히려 양보를 하고, 전혀 타의 기준 노릇을 못할 사람은 자기 영향권을 더 늘려 가니, 그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가 퇴보를 거듭하는 게 다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무의식의 세계로 첫발을 디디게 된 프로이트, 그리고 그의 직계 제자이면서 프로이트에 대한 강력한 안티테제를 제시했던 융의 입장을 재미있고  간결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그간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개인 무의식"의 세계를 이론적으로 처음 해명하여, 인류가 무지의 장막 뒤에 불안스럽게 감추고 있던 거대한 영역을 우리에게 소개한 공적이 있습니다. 저자는 개인적으로 성욕 일원론적인 프로이트 패러다임에 반대하는 편이며, 오히려 (개인 영역이건 집단성이건) 무의식을 "지혜의 보고(저자의 규정입니다. 책에서 여러 번 반복되더군요)"로 규정한 융의 세계관이 더 너른 효용성을 지닌다고 간주합니다.

 

이미 미국에선 의학협회, 이후 정신과 의사 단체에서 요법 중 하나로 공식 인정한 "최면"에 대해, 저자는 여러 챕터에 걸쳐 자세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독자에게 환기시키는 점 중 첫번째 것은, TV 예능프로그램에서 최면술사 한 마디에 바로 최면에 빠져들어, 무려 "전생"에 대해 줄줄 이야기하는 연예인들의 "쇼"가 일반인들에게 대단히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에 따라 최면에 절대 안 빠지는 이도 있고, 반대로 유명한 허버트 스피겔이 마주한 어느 군인처럼 단 한 마디로 최면에 죽은 듯 빠져드는 아주 드문 타입도 있다는 거죠. 주문 한 마디에 줄줄이 표준 체질의 성인이 최면에 빠져들 수는 없으며, 하물며 최면에 걸린 채 무의식이 털어놓는 스토리가 "전생 사연"이라니 터무니없다고 지적합니다. 전생을 믿고 안 믿고, 또 그것이 실존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최면 중 발화와 전생(의 기억)은 직접 관련이 없다는 겁니다.
 
여튼 "꿈"은, 분명 인간 의식과 무의식이 대화를 나누는 장(場)입니다. 이런 채널을 적절히만 활용하면, 개인의 무의식과 의식이 균형을 잡게 도우므로 아주 유익하다는 지적인데요. 한 예로 말레이의 세노이 족은, 범죄 발생률이나 정신질환자 유병률이 거의 0에 가까워서, 많은 학자들의 주목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작은 마을에선 아이들이 꿈을 꿀 때, 원로들이 자상하게 상담해 주며 "다음 번 꿈을 꿀 때는 이러이러하게 (꿈 속에서 과감히)행동해 보라"고 조언해 주는 게 오랜 관행이라는군요. 이렇게 어려서부터 "정신 요법"을 생활처럼 받고 자란 아이들이, 커서도 건강하고 균형 잡힌 정서를 유지한다는 게 저자의 소개입니다. 참 귀가 솔깃해지는 토픽이 아닐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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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의 선데이 - 테겔 감옥에서 쓴 자전적 소설 Echo Book 4
디이트리히 본회퍼 지음, 조병준 옮김 / 샘솟는기쁨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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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신학박사이자 목회자였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재능을 드러내어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모은 인재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그의 면모는, 나치가 아직 서슬퍼런 칼날을 세계에 향해 휘두르던 때, 대담하게도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 체포되고, 끝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 행적, "행동하는 양심"이란 유명한 어구의 eponym이 되다시피한 그 결단과 이미지입니다. 그의 거룩한 생애에 대해 알고 나면, 사실 "행동하는 양심"이란 찬사도 그를 설명하는 데에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성이나 영성 어느 면에서도 그는 완벽에 가까운 타의 모범이었고,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 "버젓이 양심을 속이고 일 분 일 초라도 구차한 생을 영위할 수 있겠는가?"와 같은 확신으로, 지상의 악마로 현현한 독재자를 처단하는 게 신의 지상 명령이라 여겼던 그입니다. 우리 같으면 아마 "십계명에도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며, 가급적이면 평화적 수단으로... "운운하며 온갖 구차한 핑계를 대어 가며 결행을 미뤘을 겁니다. 그는 그러나 범속한 위선자, 비겁자들과는 달리, "신이, 악에 부역하고 비루한 현실과 타협하라고 귀한 목숨을 준 게 아니다"라고 하듯, 양심의 명령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에 망설임이란 없었습니다. 그의 빼어난 지성, 순결한 양심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이런 결단에 주저함이 없었을 텐데, 둘 다를 갖춘 분이었으니 그 결과야 불문가지 아니겠습니까.

 

목차와 소설이 시작되기 전, 그가 남긴 유명한 시 <나는 누구인가>가 소개됩니다. 처음은 ".... 수인의 제복을 입고 감방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자신의 城에서 나오는 영주와도 같다고 한다. 간수들과 나란히 선 나를 두고, 사람들은 마치 그들을 지휘하고 교화하는 것 같다고 한다..... "로 시작하는데, 약간 지나친 자부의 표현이 아닌지 해서 고개가 갸웃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반전이 있더군요. 막상 죽음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자 내면에서는 쉼 없이 회의가 몰아닥치는데, 도대체 어떤 내가 참다운 나인지, 저 시의 제목은 그런 자문(自問)에서 붙여진 겁니다. 

 

이 소설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그닥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여태 구해 읽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탁월한 신학 이론을 엿보는 것과, 그가 지은 (본질적으로 이야깃거리인) 소설의 감상한다는 건 전혀 다른 시도, 경험이니까요. 그런데 저 앞에 인용된 시에서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듯, 그는 읽는 이의 감흥을 자극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문학적 재능도 빼어난 분이었습니다. 타인의 평가가 아닌, 바로 이 "소설"의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통해서, 독자 본인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역애서 평판 높은 가문인 블레이크 씨네 노부인이, 여느때처럼 지루하고 문제 많은 설교가 낀 주일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합니다. 맞손자 프란츠(프란쯔)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할머니에게 불만을 털어 놓습니다. "너무 뻔한 말만 늘어 놓는 설교 때문에 교회에 가기 싫어졌어요. 다 외울 정도라니까요." "얘야, 중요한 건 새롭고 아니고가 아니라, 올바르냐 그렇지 않냐란다." 하지만 이는 교육상 손자 앞에서 목사의 험담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배려의 발로이며, 실상 노부인도 심각한 문제점을 느낀 나머지 공식 이의를 제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블레이크 가문의 법도는 실로 빈틈없고 엄숙하지만, 그 까다로운 규율은 타인보다 자신들에게 먼저 적용하는, 옛 우리 조선에서도 양반 가문이 누대로 유지해 오던 그런 귀족적 기품이 넘치는 가풍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서양의 교양 있고 품격 높은 신사 계층의 예법을 형성함에 있어, 기독교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문의 존경 받는 어른들의 초상을 그림에 있어 필요 이상으로 위엄을 강조하는 건 "졸부들이나 하는 짓"임을 깨우치는 장면에서, 영국의 청교도 윤리, 독일의 루터파 교리가 이들 사회의 건강성에  어느 정도나 큰 기여를 했는지, 새삼 고개가 숙여지더군요. 부엌은 그냥 부엌일 뿐, 괜한 위세를 보이기 위해 "응접실(parlor)"라고 부르지 말라는 지도에서, 독일 민족 특유의 건강하고 질박한 의식 구조를 엿볼 수 있기도 했구요.

소설에 나오는 기독교적 색채는 생각보다 짙지 않습니다. 이 정도 컬러는 비기독교인 출신이면서, 본회퍼와 동시대에 활약한 어느 유럽작가에게서도 드러나는 정도입니다. 마치 저는,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 가 사람들>에서처럼,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짜는 수직 수평의 에피소드와 인연을 통해, 진지한 내면의 고민과 갈등을 토로, 소통, 해결하는 서사 구조가 대단히 재미있었습니다. 진지하고 선하며 위대한 인품을 갖추기만 한(혹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캐릭터들의 대화가 죽 이어지는 구성 아닐까 했는데, 시냇가에서 (사유지인 줄 모르고) 놀이를 즐기다 숲지기와 큰 마찰을 빚을 뻔한 블레이크네 아이들이, 헤럴드 브레머 소령과 뜻하지 않은 만남으로, 오랜 가문 차원의 정겨운 교류를 극적으로 이어가는 장면은, 드라마가 살아 있어 독자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여기서 "작가로서의" 본회퍼는 거의 예언자적 지력을 드러냅니다. 프란츠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보일 듯 그 표정이 울적한 걸 보고, 소령은 "그딴 촌뜨기, 자신의 비열하고 사악하며 천한 면모가 자신만의 자랑스러운 개성인 줄 아는 구제불능의 영혼이 어떻게 널 모욕할 수 있겠느냐? 쓸데없는 고민은 어여 정리하고 자신을 아껴라." 며 조언하자(이때 소령은 프란츠 소년과 완벽한 공감을 이룹니다), 소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헤럴드 삼촌(그 부친과 형제와 같은 사이라며 소령이 이 호칭을 미리 허락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블레이크 씨네 자녀들이 아니었다면, 그 악한에게 꼼짝없이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까요? 세상이 이처럼 불의한 자들로 가득차 있다니, 생각만으로도 우울해 지는 걸요."

 

이를 듣고 소령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서평에서 제가 본문인용 잘 안 하는데 너무 멋있어서 어쩔 수 없네요)


"그놈도 아마 제가 속한 집단에서는 겸손하고 제 할 일 잘 하는 분자였을지 모른다. 작은 완장이 안겨 준 권력이, 그놈을 미치게 한 것이다. 이런 놈들은 약자를 골라 그 희생양의 에너지를 빨아먹으며, 세상을 그들만의 사악한 기운으로 가득 채우려 한다. 이들에게는 자비를 보여서는 안 되고, 그를 향해 주저 없이 싸워야 한다. 그러려면 너는 강해져야 하고, 너의 건강한 확신으로 무장해야 한다."

 

히틀러가 만약 이 소설을 지옥에서라도 읽을 기회가 있다면, 자신을 향한 듯한 이 준엄한 단죄에 그 자리에서 소변을 지렸을 만합니다.

 

본회퍼는 자신의 주전공인 신학과 직접적로는 무관한 이런 문예작품에서도, 밝고 도덕적인 세계관을 곳곳에 스며들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정신의 고양을 체험하게 합니다. 시골 자연의 묘사도 대단히 생동감 넘치고 구체적이라서, 어떤 대목은 마치 한국의 이효석이나 김유정의 솜씨처럼 선명한 풍경화를 독자에게 보여 주는 듯합니다. 그런 문학적 표현의 예술가의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인간 사회의 모든 악덕은 바로 생명의 원초적 원리에 반하기도 한다는 점을, 섬세한 문장 속에 독자에게 깨우치고 있어 더욱 숙연한 감회를 불러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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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사랑
김홍신 지음 / 해냄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소리 내어서 읽어 보면 참 예쁘게 조음되는 게 "시울"이란 이름이네요. 한국을 대표하는 (작중 캐릭터) 강시울의 본명은 따로 있었습니다만, 그녀의 첫 연인이 속 깊은 사연을 담아 새로 지어준 이름이, 연예인으로 채 데뷔도 하지 않을 때라 예명도 아닌 채로 저것입니다. 시인이 지어 주는 이름이라 당연히 좋은 감각이 스몄다기보다, 그녀를 향한 홍시진의 사랑이 그만큼 절절했기 때문이겠죠.

"단 한 번의 사랑". 운명적으로 만난 남녀. 이승은 물론 저세상에 가서도 구천의 혼백으로 떠돌망정 서로에 대한 지향과 끌림을 잊지 못하는, 우주와 의식계를 통틀어 단 한 번의 연분으로만 존재 가능한 사랑. 누가 "당신은 사랑을 믿습니까?"라고 물을 때, 흔쾌히 "말이라고!"가 대답으로 나올 수 있는 영혼이라야, 이런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고, 또 독자로서 눈물 흘려가며 감상할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는 큰 줄기만 따라가면 스릴러처럼도 보입니다. 우선 조진구라는 악당이 등장하는데, 3대를 이어 한국에서 손꼽히는 재벌, 정치 거물로 군림해 왔으며, 현재도 연예계, 언론계, 검찰, 경찰, 청와대 비서실에 이르기까지 두루 손을 뻗고 있는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나이도 젊고 이처럼 집안의 배경이 막강한데도 당장 의원 배지 하나를 걸머쥐고 양지에서 뚜렷이 행세하지 않는 건, 본인의 자질이 여러 모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조진구가, 홍시진의 운명적 연인 강시울에게 느닷 반해서(일단 처음에는 그렇게 설명합니다), 청혼한 후, 대중의 시선이 한곳에 쏠릴 만한 "세기의 결혼"을 이룹니다.

홍시진의 입장에서는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죠. 한번 만나기라도 해서 진짜 사정이 무엇이었는지 본인에게 들어 보고 싶은데, 이미 남의 여자(...)가 된 이에게 접근도 불가능하고(어디 예사 유력자의 배필이라야죠), 게다가 장차 장모가 될 뻔했던 시울의 어머니도 시진을 꺼리며 못 볼 꼴을 본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예전 채플린의 <라임라이트> 시절부터 익히 봐 오던 테마, 부쩍 커버린 터라 자신의 새 눈높이에 맞는 짝, 인생을 물색하는 여자, 열패감과 불안, 질투에 치를 떠는 남자, 이런 전통적인 비극의 줄기가 대뜸 떠오르지만, 이 작품 중 시진은 출세한 연인에게 느닷 버림 받은 불쌍한 남자라는 점에서 그와는 또 상황이 다릅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시진은 이런 믿음을 놓지 않으나,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대로, 이런 태도는 대부분은 전혀 근거를 갖지 못한, 필사적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진이 대책 없을 만큼 착한 사람이라, 그저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데 불과하(다고 우리는 생각하)죠. 시진은 그래서 먼 사찰에서 은거 수도하는 스님을 찾아갑니다. 물론 다 지난 일이라 시진은 마음을 어느 정도 정리했고, 새 애인(시진이 인물도 잘생기고, 시인이 괜히 시인이 아니라서 말빨도 좋습니다 ㅎㅎ 게다가 시진은 대학교수직까지 어떻게 해서[이게 복선입니다. 독자들은 유념하시길] 얻은 터라..... ) 서다정이라는 또 괜찮은 여성 한 명을 만나 잘 사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스님을 찾아가느냐.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터져 도무지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강시울이 시진과 다정 두 사람을 찾아온 겁니다. 자신은 조진구와 이혼했으며(이미 기자회견까지 해서, 전국민이 다 알다시피합니다), 말기암 환자라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얼마 안 되는 시간 시진과 함께 보내게 해 달라, 특히 시울은 다정에게 간청합니다. 서다정이나 독자나 어이가 없습니다. 악녀가 천벌을 받아 부당하게 누려온 호사를 고스란히 반납당하고, 최악의 신세로 떨어진 후 옛 애인을 찾아와서 의지를 호소한다..... 근데 여기서 독자는 두 갈래로 생각이 나뉩니다.

- 이건 고려할 가치가 없고, 당장 내쳐야 한다. (작중 서다정의 생각이나 강시울 본인의 말처럼) 죽으려면 혼자 곱게 죽지 이미 자리가 잡힌 남녀 사이에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이나마) 끼어들겠다는 게 대체 무슨 심뽀냐.

-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고, 그래도 죽기 전에 착한 마음이 돌아온 게 어디인가. 누가 연기자 아니랄까봐 전 남친의 현재 애인 앞에서 저토록 진정을 털어놓는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게다가 서다정 본인도 자인하듯) 기가 막힌 미인이 저처럼 처연한 태도를 보이는데, 까짓것 한번 못 봐 줄 이유도 없다는,....

서다정은 그러나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평균적 독자라고 해도 "예, 사정은 딱하신데, 그래도 이렇게 나오시는 건 대단히 무립니다." 에서 크게 안 벗어날 겁니다. 서다정 본인은 입을 꾹 다물고 참는데, 지금 자신의 입장으로나 연인이 과거에 당했던 처사의 부당함으로나, 격한 감정에 입을 열면 무슨 거친 말이 나올지 몰라서입니다. 그런 상대의 태도를 보고, 강시울은 "다정씨는 정말 좋은 분이군요." 라고 한 마디를 더 합니다.

불가의 수도 중에는 "연비(燃臂)"라는 게 있습니다. 신체 중 일부를 기름에 잔뜩 절인 후, 불에 태워(...) 떠 내는(주로 팔뚝 일부 - 저 臂라는 글자가 팔뚝을 의미합니다) 부처님께 공양함을 일컫는데, 이게 극한(全身을 다 태움)으로 가면 "소신 공양"이 되는 거죠. 시진과 시울 모두 잘 알고 지내 온 무상 스님은, 오른손 손가락 중 넷을 "연비"하고, 지극한 경지에 이미 들어선 고승입니다. 이 스님과 시진이 주고받는 대화가 소설 중에서 놓칠 수 없는 백미입니다. 대략 전체 분량 중 1/6 정도더군요. 노장 김홍신 선생이 자주 쓰는 기교이자, 쉬운 말로 어려운 진리를 잘 풀어 주는 그의 장기이기도 합니다.

김홍신 선생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착하고 선한 인물들입니다. 시진 같은 사람과 그렇게 잘 지낸 여인이, 돈과 권세에 팔려 한순간에 사랑을 버릴 가능성이 과연 클까요? 시울이 문제가 아니라, 일이 그렇게 되면 시진부터가 뭔가 주인공답지 못한, 최소한 김홍신의 주인공답지 못한 데가 있는 거죠.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과연 무슨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큰 사정이.... 시울의 결혼에는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짐작도 못할 무서운 음모가 자리했고, 다만 옛 애인을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대뜸 "그게 아니었어요..."를 말하지 못한 건(더군다나 서다정에게 그런 오해를 받고 어디 참을 일이겠습니까), 말 그대로 연인을 향한 진한 애정이 동기로 작용했던 겁니다(이 이상은 스포일러라 적을 수가 없네요).

이후 후반에 들어서,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급격한 퇴장이 이어지며, 소설은 스릴러 분위기로 치닫습니다. 진상을 알고 난 독자는 전율, 분개, 좌절합니다. 정의는 실현될 기미가 안 보이고, 악인은 최종적으로 승리할 전망이며, 시울은 다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의지와 집념으로 이미 꺼져 버린 생명의 불꽃을 이어갑니다. 이들의 사랑은 결국 먼 구천에서나 최종의 결실을 보는 걸까요.

독자는 아무래도 어느 작품이건 그 후반이 기억에 강렬히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 읽고 난 직후에는 "이렇게 해서 스릴러가 마무리되는군."의 느낌이 지배적이었는데(잠시 저는, 강시울이 병마에서 완전 회복되는 결말도 예상했습니다. 물론 그랬으면 작품의 격이 떨어지죠), 서다정을 통해 구현되는 작가의 마지막 한 수가 그런 생각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들을 영원히 같이 있게 해 주세요...."

결국 소설의 주제는, 영계(靈界)건 물리계건 바탕을 이루고 붕괴를 막는 유일한 동력은, 설사 그게 단 한 쌍의 단 한 번 뿐인 사연이라 해도, 답은 사랑이라는 결론입니다. 음모와 부조리, 거짓과 악을 분쇄하는 것도 사랑이요, 결국 그 잔해와 쓰레기를 포용하는(쓰레기나 장미나 결국 한가지라는 작중 지견 스님의 말처럼) 것도 사랑이라는 겁니다. 책을 덮으며 김홍신이란 거장의 감성과 주제는 세월이 지나도 참 한결같다는 감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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