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다시 사랑하다 - 사랑의 거품이 빠진 사람들을 위한 관계 테라피
린다 캐럴 지음, 정미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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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가장 기초적인 단위를 이루는 게 "가정"이고, 그 가정 중에서도 필수 요소, 기둥뿌리를 이루는 실체가 "부부"입니다. 자녀 없는 부부, 가정은 있을 수 있지만, 부부로 이루어지지 않은 1인 세대는 그걸 가정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무리입니다. 물론 편부, 편모 가정도 얼마든지 화목한 분위기와 모범적인 생활을 꾸려갈 수 있지만(실제 역사에서 사대부 포함 만인의 존경을 받은 서포 김만중의 예가 그 대표라 하겠습니다), 원칙이랄까 원형적 가정상에서는 다소 거리를 둔 양상이죠. 나라님이나 고을 수령도, 무지렁이, 촌부, 심지어 백정이라고 해도, 그들이 이룬 부부 단위- 자녀 확장의 가정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일구는 기초 경제 터전이 나라 살림의 근간을 이루고, 인륜과 도덕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근원이 바로 이들 풀뿌리 백성이 이루는 개개 가정임을 결코 무시해선 안 되었기 때문이죠. 가정이 무너지면 그건 곧 국가를 이루는 인륜, 질서의 뿌리가 뽑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어떨까요? 서구인들의 생활 패턴이 물질문명의 글로벌 확산과 함께 급속도로 지구 곳곳에 퍼짐에 따라, 우리 한국도 누백년 누천년 간 유지해 온 생활 풍습과 제도 를 서서히 포기해 가며, 서구형 핵가족을 가정의 기본 단위로 본격 받아들인 지 어언 삼십 년이 다 되어갑니다. 이제 "핵가족"이란 말도 잘 쓰지 않습니다. 가족이라고 하면 당연히 2대 직계혈족만으로 이뤄진 단위를 떠올리기 마련이라서겠죠. 혹은, 1인 가구라는, "핵"보다 작은 소립자가 주변에서 지나치게 자주 눈에 띄곤 하는 현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사람 사는 알콩달통한 재미, 효과적인 경제 활동,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가며 자연스럽게 도달되는 인격의 완성 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사람은 그 마음이 잘 맞는 이성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합니다. 이는 쾌락이나 사회적 위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사는 방식의 정석과 기본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이게 서양과 동양이 그 근본 이치가 서로 다를 이유도 없습니다.

 

요즘 속된 말로, "(남녀 간의 사이가) 많이 상했네."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음식물이 상했으면 얼른 버리든지, 일부만 선도가 떨어졌으면 빨리 덜어내고 나머지를 살리든지, 어떤 구제책을 찾아야 합니다. 저 표현은 주로 청춘 남녀의 관계를 두고 쓰이지만, 이미 법률관계의 형성(=혼인신고), 혹은 사회적 공인을 받거나 실체를 이룬(사실혼) 기혼자들이라고 해서 결론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젊은 연인이면 차라리 해결책이 간단한데, 기혼자라면 (연령대를 불문하고) 처방이 좀 더 복잡하고 섬세해지며,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설계가 달라질 맞춤형이라야 바람직합니다. 흔히 결혼에 일단 "골인"했다는 이유로, 상대를 그저 편하게만 대하거나, 밖에서도 "부부끼리 어련히 잘 알아서 할까"처럼 가볍게 여기기 쉽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단 위기에 접어들었다면, 연인보다 적확한 솔루션이 필요한 게 바로 부부 사이입니다.

 

서양의 책들이 보통 그렇지만, 이 책 역시 다양한 사례 연구를 통해, 현대의 부부들이공통적으로, 혹은 특수한 사례 유형에 따라, 곤란을 겪고 속을 쓰리며 때로는 정신과 전문의, 심리치료사, 기타 전문가들까지 찾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입체적으로 정리, 분석, 진단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제 주위의 많은 부부들은, 두 사람만의 관계에 모종의 위기가 감지되거나, "냉전이 열전으로 변해서 화끈하게 한 방 터뜨리고 난 후"에는, 차분히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는 책을 읽곤 합니다. 그런 책들은, 대개 추상적인(추상적이라서 나쁘다거나 부족하다는 게 아니고요) 교훈, 혹은 총론적인 도덕을 독자에게 일깨워 주는 내용이 대부분이죠. 그런 책들을 읽고 초심, 혹은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여, 다시 옛 정을 회복하고 잘 사시는 부부들은 대단한 경지에 오른 분들이시죠. 문제는..... 각자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 온 이들이(그리고 성격도 판이하게 달랐던 분들이), 일단 처음으로 맞부닥치고 나서 서로의 추한 면(혹은 일방이 보고 싶지 않았던 타방의 어떤 면)을 충격적으로 접했을 때, 개인주의 트렌드가 그 성장기를 내내 지배한 세대의 커플이라면 그 간극의 봉합이 결코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책은 주로 이런 분들을 위한 책입니다. 지극히 타당한 설교나 훈화로 도무지 해결이 안 되고, 한번 등을 돌리기 시작한 감정이 처음의 설렘으로 회복되지 않을 때, "당신들 두 사람 뿐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다른 커플들이 겪고, 다시 아문 상처의 사연은  이러하다"며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케이스 스터디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잘 정리되고 구체적이라고 해도, 실례 그대로를 (환자이기도 한)독자들에게 툭 던져 주고 나서, 조언이나 다독거림, 가이드 없이 나가버리는 저자는 무책임합니다. 이 책은 추상성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포섭했지만, 동시에 그 대표 사례로부터 과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아파서 절실하기만 했지 문제를 객관화해 볼 여유가 없는 우리 일반 독자들에게, 도식화한 교훈, 처방, 팁, 원칙들을 보기 좋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제목은 "부부"를 겨냥한 것처럼 되어 있고, 사례도 기성 부부들의 이야기가 많지만, 젊은 커플(진지한 사이라면)이 자신들에게 적용해도 충분할 만큼 내용이 알찹니다.

 

방어적으로 굴면 곤란합니다. 남편은 물론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두 사람이 구성과 배열이 다른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고(근친 관계가 아니기에 결합이 가능하죠) 후천적으로는 매우 상이한 성장기를 거쳤다 해도, 일단 유니언을 이룬 이상 감정상으로도 공동 운명체를 이룬 셈입니다. 방어적으로 나온다는 건 "당신에게 입을 상처가 두렵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설사 일시의 다툼에서 상처를 입는다 해도, 그걸 어루만지고 새 살을 북돋워 줄 사람은 다름 아닌 배우자(혹은 진지한 애인)입니다. 심리적 방벽을 조금이라도 의식하면, 이는 부부 관계 존립의 기본 이유가 의심스러워지는 거죠. 개개 자존이나 사적공간을 존중한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우리말 "부부는 일심동체"에서, 이 "일심"이 가리키는 건 이 서양인 저자가 쓰는 "방어적 애티튜드는 금물"의 조언과 같은 의미입니다. 나중 일(이 있어도 곤란하겠으나)은 나중에 고민하기로 하고, 일단 둘 사이에는 흉금을 말끔히 터 놓아야 합니다.

 

이 책이 다루는 부부 관계의 스펙트럼은 실로 넓습니다. 저자는 소설가 로라 먼슨의 자전 소설 한 대목을 인용하며(이 소설은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으니 찾아 보셔도 되겠네요), 격렬한 다툼으로 최악의 지경까지 간 자신이, 결국 남편의 요구를 거절하고 이혼을 안 해 준 건, 다름 아닌 내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였다는, 다소 충격적인 고백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자식 때문에 못 헤어지는..." 사유가 가장 보편적일 텐데, 먼슨 여사의 의도는 이런 것입니다. "이혼 한 후 두고두고 이혼 당시를 생각하며 상처에 고생할 텐데, 그 장래의 희생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당장 편하려면 그때 바로 이혼 해 주는 게 나았다(이런 표현은 없으나 책을 읽고 제가 추측한 겁니다). 내가 선택한 길은, 남편과 그저 거리를 두면서 불화를 피하는 것이었다. 이런 선택 역시, 누구보다 내 감정이 중요하다는 전제 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런 케이스가 딱 내 얘기다 싶은 분들도 있고, 전혀 아니다 뭔 소리냐 라는 반응이 나오는 분들(여성들)도 있을 겁니다. 남편이 누구냐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내가 그냥 참고 살지"하곤 전혀 동기나 감정의 색채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죠. 이런 경우, 한국의 와이프들처럼 참고 사는 건 오히려 저 먼슨 여사의 남편분일 겁니다. 이분은 아주 전략적으로, 이기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거죠.

 

그럼, 일단 모든 것을 터놓고 살라는 주문과는 서로 어긋나는 것 아닌가? 저자는 부부, 혹은 연인 관계가 지나 오는 stage(혹은 phase)에 따라, 배우자 쌍방 혹은 옆에서 조율해 주는 카운슬러의 역할이 다르다고 봅니다. 일단 개체로서 지켜야 할 아주 내밀한 자아는, 부부 관계 이전에 인간 존재 본연의 이슈죠. 저자는 오히려, 이런 부분들을 잘 관리하는 스킬을 알려 줌으로써, 반대로 성숙한 부부, 모든 걸 다 터 놓을 수 있는 관계의 초석을 다진다는 방법론을 취합니다. "비움으로써 채운다"는 말과도 통하는 바 있습니다. 결국 사랑이란, 둘 사이의 다양한 소통을 시도함으로써 "처음부터 비어 있던 부분을 채우는" 동시에, 나의 내면을 지금까지보다 더 정밀히 헤아림으로써 상대 배우자의 감정과 기대까지를 배려하는 과정이라는 거죠. 이래서, 사랑을 해 봐야, 혹은 결혼을 해 봐야 어른이 된다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하기 어려울 것 같아도, 본래 사는 게, 인생이라는게 그리 쉽지 않은 걸 어쩌겠습니까. 성숙한 사랑은 성숙한 인격을 전제로 한다는 점 다시 깨닫게 해 주는, 진지하고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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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기행 - 깨달음이 있는 여행은 행복하다
정찬주 지음, 유동영.아일선 사진 / 작가정신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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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佛國)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이 책에도 여러 번 인용되는 아소카 왕의 고사, 행적처럼, 겨레가 발 붙이고 땅을 일구며 사는 나라, 누리 모두가, 부처님의 따뜻한 마음이 뿜는 온기로 덮이고, 또 덥혀지는 그런 장면이 연상되지는 않으시는지. 우리 나라에도 이 단어에서 자기 이름을 딴 사찰이 있습니다만, 군주건 백성이건, 주인이건 머슴이건, 지주건 소작부쳐 먹고 사는 농군이건 간에, 모두가 제 분수를 알고 욕심을 줄이며, 이웃의 가정과 행복, 재산, 감정 소중한 줄 알며 배려하고 사는 따스한 공동체야말로, 사람의 영혼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희구하는 궁극의 이상향입니다.



서방(西方) 정토(淨土)라는 말도 있고, 극락이란 말도 있습니다만, 그런 고장, 지향 등은 왠지 우리가 이생의 터전으로 삼는 곳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에게 평안과 공감을 주는 이유는, 깨달음을 얻은 자라면, 진세(塵世)의 주제로야 백정이든 갖바치이든 그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만민 평등 만인 해탈의 사상을 가르치고 있으며, 또 그런 산[生] 보살들이 사는 땅이 곧 극락이라는 내-현세 일체의 관념(이게 곧 제행무상이지 무엇이겠습니까?)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딴 뜻 없이 하는 말이라도, 내가 사는 세상이 곧 "극락"이라고 터놓으면, 그건 깨달음 없이 진인을 자처하는 양 왠지 무엄하게 들립니다. 우리가 사는 곳을 곧 불국으로 만들겠습니다! 라고 외치면, 이건 군주의 말이건 무지렁이의 다짐이건 그러나 그 울림이 어인 까닭인지 갸륵합니다. 그래서 "불국"은 (원칙적으로야 그렇지 않겠습니다만) 왠지 대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우리 동아시아 3국에서 입으로 되뇌기에 더 어울리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 책은, 신작소설 <천강에 비친 달>로 최근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깊이 울리신 정찬주 선생님이, 부탄, 네팔, 스리랑카, 남인도 여러 지방, 그리고 오대산(五臺山. 우타이 산)을 다녀 오고 그 소회와 깨달음을 정리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앞 네 누리는 소승 불교, 혹은 금강승의 믿음이 승한 곳이고, 오대산은 우리가 잘 알듯 문수보살 신앙이 찬연히 꽃핀, 동아시아 일원이 모두 소중히 여기는 대승 본산 중 한 곳입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 부처님만 보인다고 했듯, 불심 깊으신 작가님이 답사하신 현지의 풍경 미세한 요소 하나하나도, 이런 아름답고 우리의 선한 본성을 일깨워 주는 주옥 같은 기행문이 완성되게끔 일일이 인도와 영감의 손길을 내뻗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책의 맨 앞 장이 부탄에서의 견문과 감상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작가님이 일정상 부탄의 팀푸에서 출발하기도 하셨지만, 왠지 이 책은 정말로 부탄인들의 삶, 애환, 역사, 그리고 불심을 다루는 내용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독자 중 저만 그런 느낌을 갖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1장에서 부탄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읽고 너무도 충격과 각성을 받아서, 이 내용이 책 전체를 대변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과라니 족이 사는 오지를 방문하고 예수회 선교사들의 영혼을 강타한 그 경각처럼, 저곳이야말로 천국과 같은 곳이었구나!" 저도 고려대 강수돌 교수님의 책에서 부탄인들이 GNP 대신 GNH, 국민 총행복이란 지표를 사용한다는 말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심드렁하게 넘겨 버렸습니다만, 현지를 직접 답사하신 작가님의 서술로 다시 이 사항을 만나고 보니, 이 부탄 사람들은 진정 지상에 극락을 짓고 거룩한, 청정한 삶을 영위, 실천하는 복 받은 민족이더군요. 나라 살림은 인접국에 수력 전기를 수출하는 걸로 유지하고, 난개발과 환경 오염을 극력 방지하며, 이웃 네팔이 정쟁과 왕실 분쟁으로 바람 잘 날 없는 것과는 너무도 큰 대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부탄 역시 영국의 식민지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나라 자체가 착취할 자원이 빈약하여 큰 대립, 갈등, 차별, 억압 없이 시간을 보내고 인도와 함께 독립했다고 전합니다. 제 생각에 제국주의자들이란, 자원이 빈약하면 인력이라도 쥐어짜내어 이익을 추구하는 족속들입니다. 부탄이 탈 없이 강점기를 보낸 건, 그들이 도덕적인 삶을 유지하고 그들의 기질이 (오랜 기간 동안 외침을 모두 격퇴한 데서 알 수 있듯) 건실, 강건해서, 제국주의자들이 함부로 굴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 같습니다(이 책에 그런 말은 없지만,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든 생각이었습니다). 하나 우리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건, 이 부탄이 반중 성향이 강하다 보니 지독한 친일 정서가 전국민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네팔은 우리가 다 잘 알듯 부처님이 태어난 곳입니다. 역설적인 건 현지 인구 종교별 분류를 보면 힌두교 신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는 우리가 정규 교육 과정에서도 배운 바입니다. 경우에 따라 발생지에서 몰락하고 그 대신 다른 지역에서 교세를 떨치는 세계 종교로서의 불교가 지닌 묘한 입장을 상징하는 사실로 거론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작가님은 우리의 그런 상식이나 선입견이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센서스에서 종교를 힌두교라고 적어 낸 주민도, 막상 일상에서는 부처님을 믿고 있는 이들이 태반이라는 거죠. 하긴 부처님이 나고 자란 고장에서, 부처님 외 다른 신앙을 애써, 번거롭게 유지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이 장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고, 듣는 이를 전율케 하는 무서운 사실도 적혀 있습니다. 자신의 비천한 출신을 뜻하지 않게 알고선 카필라 족이 사는 일대에서 잔혹한 살육극을 벌인 비두다바 왕자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참고로 테즈카 오사무의 <붓다>에 나오는 차프라의 이야기와도 살짝 비슷한 점이 있는데, 캐릭터 차프라는 조금도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동요 없이 양심의 길을 걸었다는 게 결정적 차이죠.

인도 아니라 남인도(어떻게 기준을 잡건) 일대만 해도, 웬만한 국가 여럿이 합쳐진 광대한 영역인데다, 각각의 지방색도 천차 만별이라 한 고장 한 주(州)만 둘러보기도 대단히 힘듭니다. 작가님은 서부 해안 고친부터 해서 동남부 해안 일대를 다 주파하고, 인도 아대륙 중앙에 위치한 하이데라바드에서 남인도 순회를 마치셨군요. 대단한 강행군이었을 듯합니다. 정복 황제 호법 군주 아소카 왕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이 지역, 사실 아육왕의 치세에도 이 넓디넓은 고장이 한 가지 풍습, 한 가지 질서를 유지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토록 많은 피가 대지에 흐르고 피비린내가 대기를 물들이며, 사람들의 눈 앞에 저민 살점이 날아다니고 나서야 제국의 질서가 전 지역을 아우르게는 되었지만, 숱한 생령의 희생을 목도한 대왕의 마음도 아수라 지옥이 따로 없었을 텝니다. "불국"의 이념이 대륙 전체에 퍼져 나간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지요. 작가님이 설명하시듯, 아육왕 치세 후 수백 년이 다시 지나서야 우리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었고, 전설의 석탈해(신라), 허황옥(가야) 도래는 이보다 다소 앞섭니다.
탈해가 대장장이를 의미하는 타밀어 탈하이에서 왔다는 분석은, 독자의 가슴을 최고 가속으로 박동하게 만들더군요. 작가님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에도, 작가님의 이런 언어학적 소양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거대한 아난존자의 석불이 자리한 스리랑카는 오랜 내전으로 비록 관광지, 성지로서의 개발이 늦어졌지만, 천혜의 기후 조건과 유서 깊은 문명의 내력이 주는 매력, 매혹으로 세계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입니다. 또한 최근 "경전 원문"을 공부하려는 한국 불자들이, 산스크리트, 팔리 어를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부처님의 육성을 포착하려 주야로 애쓰는 나라이기도 하죠. 작가님이 현지에서 만난 난다 스님, 수만갈라 스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불도를 닦는 길에는 세 가지가 있으나, 이르는 지향점은 결국 하나이다." 이로부터 저 위, 힌두교와 불교 역시 결국 하나라는, 넓고도 깊은 의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어도 결국은 나를 믿는 것이다." 최근 소승 경전만이 참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일부에서 대립이 일어날 조짐도 있는데, 소승의 본산에서 대덕으로 칭송 받으시는 수만갈라 스님은 이런 한국 불교를 향해 따끔한 일침을 주시고 있네요. "한국 불교는 산에서  그만 내려와야 한다." 정통/이단의 부질없는 편가름은 결국 그 종교의 속됨을 폭로할 뿐입니다.

한국에도 같은 이름(한자까지 같습니다)을 지닌 산이 강원도에 있지만, 중국의 우다이 산은 산서(山西) 성(省)에 위치해 있습니다. 문수보살이 친히 모습을 드러내신 성지로 유명한 이곳은, 우리 한국에서는 신라의 의상대사, 그리고 이후 먼 천축까지 발걸음을 옮기신 혜초 대사의 자취가 서린 곳이기도 합니다. "불구덩이에 들지 않고 어찌 지혜문수를 만나랴!"는 말처럼, 혹은 스승 달마에게 자신의 오른팔을 잘라 던진 혜가의 고사처럼, 궁극의 진리 앞에 현세의 모든 집착과 애욕, 재물과 탐심, 쾌락과 유혹은 일개 티끌만도 못한 허상일 뿐입니다. 묘한 것은, 현지 금각사에 묘장왕 소상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인데, 본디 불교 색채를 중국 현지 토착 신앙이 대거 흡수한 게 도교이며, 작가님의 분석으로는 청대 이후에 도교 요소의 습합이 이루어진 듯하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공안 조주석교가 여기서 다시 인용되는데요. 저 역시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넌다"는 이 마지막 행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습니다(하긴 그 궁금증이 풀리려면 수행의 길로 들어서야 하겠지만). 작가님이 새기시기로는 일종의 대승 이념, 즉 나도 깨달음을 얻고, 중생 일체도 같은 길을 걷게 한다, 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생각하면 할수록 현세의 유한함, 무상함에 대해 몸서리치게 하는 깊은 가르침인데, 이 부질없음에 대해서도 무한한 자비심으로 절대 긍정할 수 있는 게 또한 부처님의 품 속입니다. 우리 어리석은 중생은 언제나 진정한 정토, 불국에 한 발을 들일 수 있을지, 아득한 느낌과 먹먹함으로 책을 덮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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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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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호랑이 같은 맹수는 혼자 힘으로 사냥과 자기 방어, 새끼의 양육이 가능하지만, 사람이 그런 생활 방식을 택했다면 개체의 생존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이렇게 연약한 육신을 보유한 채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지금의 단계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우리는 흔히 주위와 잘 어울리지 않고 혼자만의 생활 양식을 유지하는 분자에게, 딱히 범죄적 징후가 없어도 필요 이상의 경계심을 가지는 수가 있는데, 옳건 그르건 무관하게 그런 집단 심리적 태도는 인간 진화 과정 그 본질적 속성에 기원한 것이므로 딱히 나무랄 건 아닙니다. 사회에서 이탈, 유리된 개인에 대해 본능적으로 부정적 평가를 일단 내리고 보는 것도 인간 본원적 습성 중 하나이니 말입니다.

이와는 별개로,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어느 정도 성격이 유(柔)해지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나 타인들의 행동 양식에 대해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게 당연한 과정입니다. 연륜이 쌓여 이런저런 사회적 경험을 충분히 했음에도 성격이 거꾸로 강퍅(剛愎)해지고 주위와 불화하는 건, 젊음의 혈기가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정신의 기능이 퇴보한다는 불길한 징후입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정상적인 사회 생활에서 소외되고, 온라인의 폐쇄적 커뮤니티(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인)에서만 맹렬한 소통을 시도한다는 게 특징 중 하나인데, 그래 봐야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악화 일로로 치달을 뿐입니다.

혼자만의 삶에만 빠져 있고, 주변의 평범하고 선량한 이웃들과는 끊임 없이 알력을 보이는 주제에, 내일 모레면 육십을 바라보는 노년이기까지 하다면, 이미 그는 인생의 패배자로서 주요 조건들을 두루 갖춘 셈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베라는 인물은, 그처럼 타인으로부터 호감이나 매력으로 불릴 만한 요소는 하나도 구비하지 못한 낙오자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도 각별한 순정을 그 젊은 시절부터 바쳐 온 여인이 있었고, 오베는 어느 타인과도 온전한 교류를 거부한 채 오직 이 여인과는 영혼의 교감을 이루며 척박한 인생을 영위해 나갑니다. 이 한 가지 점만 제외하면, 오베라는 이 노년이 여태 걸어온 길은 누가 따스한 눈길을 잠시 줄 가치조차 없는, 처량한 실패의 누더기라 불러 지나치지 않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여전히 오베라는 이 늙은 인물에게 거리를 두고 적대적 감정을 유지할 것인지, 반대로 "그 황량한 외관 속에 이런 진국 같은 영혼이 숨어 있었다니!"하며 전폭 감동, 공감을 표시할 지는, 독자 개개인의 몫입니다. 저 같으면 일종의 절충으로, 살아온 생애는 비록 실패자의 그것이었지만, 여타의 루저들처럼 남탓에 빠지거나 비루한 세태 영합을 시도하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를 꿋꿋이 지키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어딘가 마음이 짠해지게 만드는 그런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오베라는 인간을 지금처럼 괴퍅하게 만든 건, 그의 아버지가 남긴 영향이 컸습니다. 자 그러면 그의 부친 역시, 극단적 비관주의와 냉소주의, 대책 없는 불타협으로 인생을 일관한 사람이냐, 전혀 그렇지가 않더군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비교적 이른 나이에 잃은 그였지만, 그가 일하는 방식이나 살아온 태도를 가까이에서 지켜 봐 온 사람은 누구나 존경심을 표하게 되는, 요즘 같은 세상에 장인(匠人)의 성실성과 은자(隱者)의 순결한 영혼을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위인이었습니다.

소설에도 나오듯 어느 파티에서 자동차 한 대를 거뜬히 고쳐 준 일로 크게 감동한 호스트 중역이, 이 오베의 부친을 극진히 대접한 일화가 소개되는데, 사실 이는 소설 전체를 이해함에 있어 사소한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주지하는 바처럼 북유럽은 일종의 신분제 사회라, 자산에는 거의 세금이 물려지지 않는 반면, 근로 소득 등 새로 창출되는 부가가치 기여분에는 엄청난 비율로 과세가 행해지는 체제라, 신분 상승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입니다. 저 중역의 친절한 제안을 "더러운 기름때가 잔뜩 밴 옷차림으로 파티에 누를 끼칠 수 없다."며 거부한 그의 태도는, 이 사람이 그저 자기 직분에만 충실할 뿐 허투루 딴데 한눈팔지 않는 지극히 성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노숙자로 추락하거나 골방에서 아사하는 신세를 면하는, 하방 최소선 보장이라는 복지 시스템은 잘 가꿔져 있으나, 오베 부친 같이 뻬어난 기능을 지니고 현장에서 노동하는 계층은 큰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 중역이 그리 감동한 것도, 일처리를 야무지고 능숙하게 하는 인력 자체를, 주위에서 흔히 (짧은 시간 안에, 싼 보수로) 구할 수 없다는 현실을 본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겠죠. 한 25년 전, 이문구 선생의 어느 단편에도, 이런 기이한 재주를 지닌 트럭 운전수가 나오는 게 있었습니다(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실존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도불습유, 길에 떨어진 물건도 함부로 줍지 않는다(주인이 와서 다시 찾아가게 놔 둔다)는 미풍은, 동양에서도 요순시대에나 볼 수 있었습니다. 오베의 부친이 지닌 도덕적 청렴성은, 일상에서 점유이탈물에 무단히 손을 대지 않는다는 그 철벽 같은 신조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죠. 보통 이런 사람이 직업적으로는 대단히 무능해서 저런 값싼 모럴로 자신의 약점을 (과시적으로) 보상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 사람은 자기 직능 수행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듯 유능하기도 했다는 점, 이미 위에 언급했습니다. 오베의 자아가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주위와 완전히 방벽을 쌓은 건, 그런 부친을 그 정도로밖에 대접 못한 사회, 그리고 섭리를 그따위로밖에 운용 못한 신(神)에 대한, 철저한 불신과 증오의 결의 때문이었죠.

이 무렵 그는 직장 숙소에서 일진 비슷한 폼을 잡으며 군림하는 톰에게, 제 분수를 죽을 때까지 못 잊을 만큼 혼을 내 주게 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통쾌하다기보다 씁쓸한 느낌 비슷한 걸 받았는데요. 톰은 크게 다치고 그 경위를 의료진이 묻자 "그냥 미끄러졌을 뿐"이라고 답합니다. 물론 당사자야 망신스럽기도 하고(죽을 때까지 못 잊을 굴욕이겠죠) 인지부조화의 강도가 누구보다 커서 그러려니 하지만, 그 주위에 있던 노동자들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못한다"는 게 우스웠습니다. 인간이란, 인식의 채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면, 눈 앞에 고릴라가 지나가도 모른다는 말처럼,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면 필사적인 자기기만으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려 듭니다. 오베는 이 사건을 통해, "세상에는 정말로 바보 멍청이들로만 가득 차 있군!" 같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텝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잘못이었습니다. 물론 보기 좋게 혼을 내 준 건 잘한 일이었지만, 세상에는 그런 무지하고 비겁하며 지능이 떨어지는 인간들만 사는 게 아니거든요. 다른 교류와 소통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어 놓고, 보다 큰 세상으로 나아가 자아 실현을 도모했어야 옳았는데, 그는 그만 거기서 머물며 마음의 필터와 망막을 그저 흑백으로만 장착하고 말았던 겁니다(그나마 백보다는 흑이 대부분인 채로). 여기에는 다른 불운 하나도 겹쳤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실 직업 군인을 시키면 일을 척척 잘해내고 조직 내에서도 (기계적인) 융화에 무리를 안 보입니다. 그런데, 그는 선천적으로 희귀성 질환을 심장에 지니고 있었던 거죠. 결국 우리가 본 바처럼, 오베는 나이 육십에 이르기까지 고작 반사회분자의 탈만 뒤집어 쓰고 말았던 겁니다.

그는 그의 훌륭한 부친으로부터 다른 좋은 점을 배우고 익힌 후, 부친이 다소 소홀했던 주위와의 원활한 소통까지 자기 것으로 했다면, 작은 타운에서나마 멋진 리더로 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로부터 (얼마 안 되었던) 부정적인 점은 몇 배로 키워서 상속하고, 아버지의 멋진 미덕은 그 원형을 대단히 옹색하게 축소해서 계승하는 데에 그쳤습니다. 이러니, 남다른 영혼의 고상함과 성실성, 그리고 빼어난 손재주와 걸출한 완력 등의 장점이, 거친 매너 속에 완전히 묻히고 만 채, 외롭고 척박한 삶으로 일관하게 된 거죠.

오베는 다소 절망적인 방식으로, 대단히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내를 잃고 마침내 죽음을 결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의외로 좌절감에 차 있지만은 않았고, 지금까지 신조로 유지해 온 것처럼 "내 인생 처분은 내가 내 자유의사로 수행한다." 다소 담담한 기분으로 결단을 내리려 한 겁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숱한 머저리들이 훼방을 놓았는데, 이제 마지막 순간까지 바보들이 끼어드는구만!" 하지만 이는 그에게 다소 소홀하고 부당한 대접을 해 온 신이, 최후의 순간에 보내는 미안풀이의 메신저였음을, "오베, 인생은 네가 생각한 것처럼 무가치한 게 아니다."는 가르침을 전하려는 언질의 몸짓이었음을, 우리 독자는 조용히 깨닫게 되죠. 이런 진지한 자가 자기 나름으로는 인식과 판단의 소이로 입에서 내뱉은 각종 기상천외 현란무쌍한 독설을 보고(마음에 여유가 없을 테니 재능으로 지어내는 게 아니죠) 구경꾼들은 그 파격에 폭소를 내뿜게 됩니다. 인생이란 이처럼, 일인의 비극이 타인의 희극이요, 누군가의 전심전념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소에 붙일 가십에 지나지 않는, 역설과 난제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저 웃고 넘기는 게 상책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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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 워 Civil War 프로즈 노블 - 그래픽노블 <시빌 워> 소설판 마블 프로즈 노블
스튜어트 무어 지음, 임태현 옮김 / 시공사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코믹스 마니아라면 익숙한 용어겠지만 일반인들은 "노블이면 당연히 프로즈 노블이지 그럼 포에틱 노블도 있단 말인가?" 같은 의문을 떠올릴 만도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이 작품은 은근 포에틱한 구석도 많습니다. p132에 나오는 대로, 영 어벤저스 팀 공식 트위터에 뜬 마지막 멘션 "토니 스타크, 피도 눈물도 없는 상위 1퍼센트"를 두고  마리아 힐 국장(대리)도 그런 평가를 하지만, 이 프로즈 노블은 전혀 prosaic하지 않으며, 코믹스나 그래픽 노블만큼 컬러풀하고, 캐릭터들은 오리지널에서와 완벽한 일관성, 연속성을 유지합니다. 사실, 코믹스와 그래픽 노블이 운문의 영역에서 적절한 함축의 미학과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면, 이 프로즈 노블은 캐넌의 여백을 두고 혹시 일어날 수 있는 의문이나 의견 갈림을 해소해 주는, 마블의 "유권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 경전(믈론 이 프로즈 노블도 경전입니다만)에서 등장인물들의 표정이나 배경 묘사를 보고 "고맥락 소통" 수준에서 만족해야 했던 독자들은, 이 프로즈 노블을 통해 비로소 그 개개 장면에서의 정확한 의도들이 각각 무엇이었는지 알고 개운한 기분을 가질 수 있습니다.



파격적인 노출 코스츔으로 남성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타이그라


그렇다고 프로즈 노블이, 원전의 주석집이나 보조 미디어에 그치는 건 아닙니다. 해당 팬덤에서 알면 기겁을 할 일이지만, 파생 예술인 영화에는 열광을 하면서도 코믹스나 그래픽 노블에는 거리감,... 혹은 경멸감 비슷한 태도를 고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코믹스 특유의 글꼴이나 레이아웃 뿐 아니라, 작품들이 지향하거나 전제하는 미의식, 주제관념에까지 같이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마블 코믹스에서 어언 반 세기 넘게 창조하고 키워 오고 그들만의 웅대한 우주를 가꿔 온 그 다양한 캐릭터들이, 소위 본격 문예에 등장하는 가상의 피조물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개성, 매력, 인격적 깊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하고, 그들을 이 즐거운(물론 때로는 심각해지는) 놀이동산에 불러들여 동참자의 기쁨을 공유하게 하려면, 이런 프로즈 노블판이 그 수단으로 제격일 것입니다. 사실, 스튜어트 무어의 이 작품은 구태여 "프로즈 노블"이란 범주에 넣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독립적인 훌륭한 한 편의 판타지 소설입니다.



저는 아직 코믹스판 오리지널 <시빌 워>를 다 감상하지 못했지만, 지인들에게 듣기로는 제가 읽은 이 프로즈 노블 버전과 스토리 전개상 크게 상이한 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그래서도 곤란하겠습니다만). 내용은... 소위 뉴 워리어스라는 팀을 이룬 틴에이저 슈퍼휴먼 4인조가, 리얼리티 쇼 제작팀과 함께 기획한 빌런 소탕전을 벌이다가 나이트로를 어설프게 건드려, 코네티컷 주 스탬포드 일대에 큰 폭발 사고를 빚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뉴 워리어스가 결정적 과실을 범한 건 아니고, 나이트로가 워낙 악질인데다 능력치는 또 탁월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만, 평소 슈퍼휴먼들에게 두려움, 질시, 근거 없는 경계심을 품고 있던 일반인들은 이 대형 참사를 계기로 뭔가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루게 됩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언제나 균질적인 성원으로만 조직이 이뤄질 수 없고, 어떤 조직체, 공동체라도 분파가 생기고 그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게 마련입니다.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는 이들이 있고, 싸움이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조정과 타협을 통해 공동선을 도모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전자에 비해 후자는 언제나 소수이며, 그들의 의도는 종종 정치적 패권 추구라는 오해, 혹은 의도적 모함을 받습니다. "저 괴물들과 더 이상 한 지붕에서는 못 살겠다!" 다만 영화판 <X-men>에서와 달리, 이 통합 어벤저스 유니버스에서는 평범한 인간들도, 조직력, 뻬어난 기술, 수적 우위, 자금력, 치밀한 전략적 사고 능력 등을 통해, (비록 많은 희생이 따를지언정) 이 슈퍼휴먼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는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승산은 어느 한 편에 크게 기운다고 볼 수 없으며, 마치 (실제 역사상의) 아메리칸 시빌 워가 그랬듯 우연의 개입이 어느 쪽에 유리하게 이뤄지느냐에 따라 승패의 양상이 곤두박질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당장 토니 스타크부터가, 운명적으로 슈퍼 휴먼 진영에 서야 하는 인물이 아니고, 얼마든지 평범한 인간들 편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입장입니다. 육체적, 신분적 조건으로나, 그가 견지하는 신조, 혹은 개성으로 봐서나요. "당국의 간섭, 규제가 기왕 피할 수 없는 추세라면, 아무것도 모르는 책상물림들에게 맡기느니 사정 훤히 아는 내가, 우리가 주도해서 이 위기를 수습하자." 사실 "등록제"란 건, 개인, 시민의 자유, 존엄, 긍지를 심하게 훼손하는 조치이며, 공존을 거부하는 차별, 배제, 제노사이드의 전단계일 수 있습니다(나치의 유대인 등록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런 까닭에 캡틴 아메리카 같은 이는 "영웅적으로 경기를 일으키는" 거구요(그는 힐 전 사령관과 설전을 벌이는 장면에서도 실로 서사시적인 위엄, 레토릭을 과시하며 자기 사전에 타협이란 없다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만의 면모를 또 과시하며 극적인 단독 탈주에 성공합니다 - 이후 새 팀을 짜죠).

차별이건 특별 관리이건 그것이 외부로부터 이뤄지면 억압이고 차별이지만,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움직임이면 그건 "자치"입니다. 토니 스타크는 정부와 유리한 교섭을 벌여, 슈퍼휴먼의 성향에 따라 세 그룹으로 나눈 후, 문제 개선의 여지가 없거나 위협 요인이 될 그룹은 통제 하에 두고(한국어 번역에선 "수용소"라고 하는데, 이건 좀... 너무 비참한 느낌입니다. 원어는 아마 concentration camp였겠죠), 반대로 정상적인 그룹은 정부의 지원을 받되, 정부가 통제하는 조직에 소속된 채 (그들이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 범죄 저지, 재난 구호에 나서게 하자는 겁니다. 이 등록 과정에서 또 하나 곤란한 게, 신원을 가려 주던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벗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능력 있는 토니 스타크 회장이라면 이 점 역시 융통성 있는 규율이 가능했을 것 같았는데,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므로(?) 이 강제조항이 완화, 예외 없이 입법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어벤저스의 영원한 대장님 캡틴 아메리카가 격하게 반발하고 "레지스탕스"를 결성하여 지하로 잠입합니다(성격상 그러고도 남으리라는 것 우리 모두 예상 가능하죠). 마블 유니버스의 팬들로서는 큰 상처를 입게 되는, 슈퍼 휴먼들 간의 자체 반목, 항쟁이 여기서 시작되며, 이것이 원작, 영화 버전, 그리고 이 프로즈 노블 <시빌 워>에 공통적으로 깔리는 모티브입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자신을 따르는 초인들을 두고 그런 말을 합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자유의지대로 영위하는 삶을 위해서는, 싸우는 길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자유는 피를 흘려 쟁취해 내야 하고, 그 싸움을 위한 수단 일체도 우리 힘으로 조달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했듯, 이제 우리도 우리의 전쟁을 시작하자!" 언제나 그의 대사가 그렇듯(일상적인 말도 그의 입에서는 다 "대사"가 되죠? 전쟁영웅들이 흔히 그렇듯요), 분위기는 장중하고 내용은 비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두 명의 슈퍼휴먼들이, 인간들에게 구타당하여 중상을 입거나 큰 위기에 빠지는데, 한 사람은 휴먼 토치, 즉 조니 스톰이며(맥주병으로 맞은 후 발로 차이기까지 해서 뇌로부터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아요), 다른 한 사람은 순간이동이 가능한 어린 위칸입니다. 다치느 사람 뿐 아니라, 죽은 이들도 속출합니다. 프롤로그에서 벌써 뉴 워리어스가 모두 죽었고, 특히 우울 모드에 빠진(지병이죠)  스피드볼이 마지막에 하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짠하게 합니다. 이처럼, "내전"은 승패, 혹은 어느 한쪽의 우위를 장담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토니 스타크는 꽤 주도면밀한 사람입니다. 어차피 정부도 분노한 대중의 여론만 등에 입었을 뿐, 정작 전쟁이 터지면 이를 수행할 전략과 수단(특히 테크놀로지)은 토니 스타크 측에 의존해야만 합니다. 아마 그는 캡틴 아메리카, 혹은 누가 중심이 된 반발 세력의 항쟁을 예상했을 테고, "복제 토르"의 등장에서 알 수 있듯 대비책도 벌써 완벽하게 세운 듯 보입니다. "신을 복제해 놓았다니 대체...." 이에 비하면 국장 대리 힐의 역할은 찌질하거나, 하는 일도 없이 강경책만 고수하는 무책임한 관료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러나 돌아서는 토니 스타크를 향해 그녀가 던지는 한 마디는 의미심장합니다. "당신은 우리 편에 섰어요." 우리가 당신을 고른 것만도 아니라는 뜻으로도 들리는 이 말은, 결국 이 "시빌 워"의 본질에 대해 깊은 함의를 풍기고도 있습니다.

한편 그런 복잡한 "정치, 군사 이슈"를 떠나, 우리가 사랑해 온 캐릭터들의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도 이 프로즈 노블에는 진득하고 곰살궂게 묘사됩니다(오리지널에 없는 대목이 여기서 많이 나옵니다). 스파이더맨 피터는 본디 compliant한 기질이니만치, 토니 스타크의 구상에 가장 먼저 호응하고, 또 우리 아이언맨 회장님이 앞으로의 자기 구상에서 가장 크게 기댈 인재이기도 합니다. 피터가 "메이 숙모님의 안전을 지켜 줄 수 있나요?"라고 묻자, 회장님은 "우리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 약속은 지켜진다. 먼저 죽는 쪽은 아마 나겠지만 말야."라고 대답하는데, 이게 가슴을 참 찡게 만들더군요. 우리 아이언맨님의 평소 시니컬하고 재수없는 성격을 감안하면 더 그렇죠.

판타스틱 포의 두 기둥인 리드 리처즈와 인비저블 우먼 수 리처즈(이제는 결혼을 했으니)가 엮어 나가는 다정한 가정상에 대한 묘사도 독자를 흐뭇하게 합니다. 프랭클린과 발 두 아이들도 이제는 제법 컸습니다. 워낙에 가정적이고, 그렇게 두뇌가 뛰어난 사람치고는, 마치 연봉 삼천짜리 대리가 보일 법한 소탈함과 겸손함으로 자기 인격을 채우는 리드, 우리가 익히 잘 알듯 아이와 아내 사랑이란 세상 누가 따라할 수가 없을 만큼이죠(토니 스타크와 큰 대조를 이루는 면). 그런데 동생이 큰 변을 당하고, 골리앗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등 사태가 악화 일로로 치닫자, 수전은 큰 동요를 일으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갈등이며, 이제 이런 수를 리드가 어떻게 달랠지, 나아가 양 진영의 근본적인 대립은 어떻게 해소될지, 이게 우리 팬들이 주목할 포인트입니다.

좀 우스운 대목도 있었습니다. 피터가 극적으로 커밍아웃(...)한 건 또 그렇다 쳐도, 모교 강연장에 바로 닥터 옥토퍼스가 찾아와 난장판을 친다는 게.... 인물들의 촌철살인 위트도 여전하고, 무엇보다 이 프로즈 노블은 주제의식 면에서 한 층의 레이어를 덧입습니다. 제가 맨 위에 적은 "상위 1퍼센트... " 운운에서 알 수 있듯, 이 서사 구조는 현재 갈수혹 태산이라 할 미국 사회 빈부의 양극화와 극심한 정치 분열상을 풍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슈퍼 휴먼은 곧 슈퍼리치이며, 토니 스타크가 개인별 카드에 초능력을 "선천적/후천적"으로 구별하는 건, 곧 "상속형/자수성가형"의 범주와 대략 어울린다고 할 수도 있죠. 원작도 그렇지만, 이 프로즈 노블 역시 각 캐릭터들이 고루고루 등장하면서도, 인기도 혹은 역사적 무게에 비례하여 그 출연 비중이 교묘하게 잘 조율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스튜어트 무어나 마블 프레스가 어련히 알아서 정교한 기획을 이뤘겠습니까만 말이죠. 이런 책은 역시 시공사에서 나와야 제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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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생각에 속을까 - 자신도 속는 판단, 결정, 행동의 비밀
크리스 페일리 지음, 엄성수 옮김 / 인사이트앤뷰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우리가 하는 일 중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이, 우리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일까요. 대부분은 1) 우리 스스로(즉 우리의 "의식")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2) 그렇게 결정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저자 크리스 페일리는, 1). 2) 모두 틀렸다고 단정합니다. 그는

1-1) 우리가 하는 일이나 내리는 결정은 대부분 무의식의 몫이다.
1-2) 전혀 엉뚱한 동기, 과정을 통해 결과가 나온 건데도, 우리는 사후적으로 "이러이러한 이유, 순서를 통해 저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며 끼워맞추기를 시도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저 "당신이 알고 있던 건 틀렸다"고 말해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은데, "당신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던 건 대부분이 착각이거나 자기 기만"이란 지적을 받는다면, 기분이 나빠질 뿐 아니라 그런 지적을 수용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책은 서론과 본론 5부, 그리고 간단한 맺음말로 이뤄져 있습니다. 본론을 구성하는 다섯 개의 챕터는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데, 모두 우리의 상식(과, 더 나아가 신조에 가까운 것)에 크게 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동작 중 상당수가 "뇌의 의식적인 명령"에 의하지 않고, 그저 몸이 익숙해 온 대로 이뤄진다는 건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해 온 "무의식"의 가치, 비중은 그 선에 그칩니다. 그러나 저자는, "무의식이 하는 기능은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며, 당신의 의식은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들을 자신이 한 거라며 끊임 없이 당신을 속이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성)과 함께 있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이 더 뜨거워지는 느낌이 왔다면, 나는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걸까요? 까마득히 높은 데에 매달려 있는 다리를 건너야 하는 사람은, 다리를 건너는 도중 내내 심한 긴장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체험을 한 직후 어떤 이성을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위험 수위가 높은 체험을 통해  부수적으로 딸려 온 "두근거림"을, 이성에 대한 설렘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른바 "무드"가 있는 곳에서 데이트를 하거나 고백을 받은 사람은, 분위기의 도움을 얻어 감정이 고조되었을 뿐인데도, 자신이 그 이성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진 걸로 오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저자는 이런 설명 끝에, "10대 커플이 둘이서 자주 공포 영화를 같이 보러 가는 건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호러 영화가 안긴 감흥을 이성으로부터 받았다고 착각하는 거죠. 저자가 직접 이 책에서 거론하고 있지 않지만, 저는 저자의 다른 주장이 이 사례로부터 추가 확증을 얻는다고도 생각해 봤습니다. 이런 커플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지시에 의해 같이 영화관에 가는 거죠(서로에게 느끼는 "호감"이 평소보다 더 커짐). 물론 그들은 의식의 기만에 의해  자신들이 스스로 공포 영화가 보고 싶어 그런 선택을 했다고 합리화하지만, 사실은 감각의 오해를 유발하며 애정의 밀도를 높이려는 게 진짜 동기인 겁니다. 만약 "의식이 우리 행동의 진짜 주인이라면" 이 커플에게 물어 보았을 때 이런 진짜 이유를 댈 겁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나오는 일관된 대답은 "그저 공포 영화가 보고 싶어서 갔을 뿐이에요."이겠죠. 이때 그들은 딱히 거짓말을 한다는 의식이 없고, 정말로 자신들이 그렇게 여기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무의식"에 의해 기만당하고, "그들 자신의 의식이 시키는 가짜 이유"까지 끌어대고 있는 거죠.

사랑에 빠진 어리고 어리석은 커플만 이런 대답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제법 진지하고 도덕적이며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나이 지긋한 이들 역시, 자신이 얼마나 무의식에 의해 지배되며, 의식에 의해 주가로 기만당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책 말고도 여러 다른 저술에서 인용되는 "뚱뚱한 남자와 기찻길"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분명하고 정당한 도덕적 동기를 갖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들 역시, 결국 최종 결정은 감정에 의해 내리고 만다고 합니다. 이 대목은 아주 설득력이 있어서, 이 절을 읽고 나면 제아무리 "일관되고 논리적인 동기, 판단"을 유지한다고 믿는 이들도 그 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자는 개인적 성향이 좀 짖궂은 분 아닌가 싶은 느낌을, 책을 읽어가며 저는 여러 번 받았는데요. "결국 공리적으로 우월한 결정을 언제나 척척 내리는 사람은, 감정이 거세당한 사이코패스 유형 뿐이다"는 암시를 하는 대목도 있었습니다. 사실이라면 "비윤리적인 인간이 가장 윤리적인 결정을 꺼리낌 없이 내리는 법"이라는,. 참으로 역설적인 결론이 나오는 셈입니다.

무의식 이야기가 나오면 그 유명한 서브리미널 광고 사태, 즉 몇백분의 일 초 동안(의식이 감지할 수 없는 짧은 시간)에 주입된 메시지에 지배당하는 무력한 대중의 사례 관련 제임스 비카리의 케이스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죠. 현재 여기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대론도 유력한 편이니, 책을 읽으실 때는 그 점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저자는 저 비카리를 "협잡꾼"으로 규정하면서도(일단 이 한국어번역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서브리미널의 실체와 의의, 기능에 대해서는 분명히 긍정하고 있습니다(이 책의 전제와 논지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습니다만). 제임스 비카리 이후 심리학자들이 수행한 수많은 실험과 연구 결과 중 몇몇을 추가로 들며, 저자는 무의식을 공략당할 때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약해지고 조종당하기 쉬운지, 그러면서도 당사자들은 필사적으로 "나 자신의 의지에 의한 행동, 선택"이라고 우기고 드는지를 실감나고 신랄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뇌가 얼마나 기만적으로 동작하느냐면, 심지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는 인식조차 근거가 빈약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보지도 않은 걸 보았다고 착각하며", 그 체험을 하기 전 이미 의식이 정해 놓은 대로 짜맞추기 결론을, 마치 고장난 로봇처럼 내리고 있는 게 대부분이라는 거죠, 더 치명적인 건, "과연 내가 이런 판단을 하는 게 정확한 걸까?"라는 메타적 생각에 아주 소홀한 게 우리들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속이면서도(혹은 의식에 의해 속으면서도)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반성을 극력 회피하는, 이중으로 나쁜 습성의 노예라는 거죠.

이 책에는 신기한 사례가 많이 나와서, 저자의 결론에 동의하건 안 하건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습니다. 그렇게 재미만 취한 후, 저자의 논리에는 설득당하지 않고 저자가 애써 제시한 결론은 슬쩍 잊어버리는 걸로 마음 편한 "습관, 무의식"에 또다시 자신을 맡기는 독자들에게, "그럴 줄 알았다"며 마지막에 독설 한 마디를 날리는(정말 생각이 없는 독자라면 이게 독설인지도 모르겠지만요) 저자는, "셀프 레퍼런스"의 기막힌 역설을 심리학 아닌 인문 차원에서 이해하는 멋을 지닌 사람입니다. "좌뇌-우뇌" 구분 가설이 이미 효용을 잃었다고 보는 최신 이론에는 배치되는 주장을 하는 등 논란의 여지를 제법 많이 유발하는 책이지만, 독자가 자신만의 결론을 어떻게 내든 간에 읽어가는 도중에는 상당한 몰입감과 흥미를 주는 책인 것 만큼은 분명합니다. "의식은 결국,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게 아니라,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발달시켜 온 것"이라는, 진회심리학 박사 출신인 저자 다운 결론도 독자들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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