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경제
토마 피케티 지음, 유영 옮김, 노형규 감수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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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본디 "정치경제학"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출범한 학문입니다. 이는 애덤 스미스 때도 그러했고, 리카도와 맬서스의 시대까지 부인할 수 없는 팩트였던 것이, "순수"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이란 존립 가능성이 의심스러웠다기보다, 그 존재 이유가 위태로웠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는 결국 정치 문제이며, 따라서 정치 이슈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제학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아니면, 계량적 분석 방법이 채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 상황의 한계도 작용했을 터입니다.

 

물리학에서나 쓰이던 고등 수학의 방법론이 경제학에 도입되고 난 후, 이 학문은 이제 가치 판단이나 계급 간의 (추한) 대립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 이론 세계가 구축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해 과도한 비중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적 세계관을 바탕에 둔 비주류는, "어차피 서로 다른 전제에서 출발했음"을 명분으로, 이론적 통합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제 갈 길만 가는 모습도 보였지요. 그나마 최근의 모습은, (주류로부터 "경제학을 파괴하려는 자"라는 비판을 받았던) 로빈슨 부인 같은 경향도 다소 완화되고, 주류 내부에서도 "비등하는 대중의 분노와 모순을 가뜩 노정하는 엄연한 경제 현실"을 이론이 반영해야 한다는반성이 일고 있습니다.

 

피케티는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벼락출세자가 아니라, 18세때 파리 고등 사범에 입학한 수재였으며, 학부 시절부터 "불평등 이슈" 쪽으로 파고들어 美 MIT에서도 이 분야의 경력을 혁혁히 쌓았으며, 그간의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한 <21세기 자본>이 최근에 학계는 물론 미디어의 주목까지 받으면서 대중에 유명해진 것 뿐입니다. 당장 이 책만 해도 일찍이 1997년에 그 초판이 나온 것인데, 이 책에서 그는 이미 "될성부른 나무"의 싹수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상당히 젊은 나이에 집필한 이 책은, 짧은 분량(본디 교과서라는 게, 각론에서는 분량이 많지 않습니다)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무게로 다가옵니다. 흔히 갖는선입견대로 "불평등에 대해 불만이나 털어 놓는" 대중서가 아니라, 학생들 공부하라고 지어 놓은 교과서의 성격이 기본이기 때문이죠. 그는 여기서 기존 학문적 성과를, 굳이 이런 것까지 일일이 출처를 밝혀 가며 인용할 필요가 있을까 싶게, 그것도 주로 자신이 반대하는 주장의 소스까지 성실히 끌어오며 꼼꼼하고 치밀한 논변을 펼치고 있습니다. 자신의 극복해야 할 테제에 대해, 먼저 그 진의를 파악하고 성실한 인용을 베푸는 것이, 피케티와 같은 수재들이 언제나 잊지 않는 기본적인 아카데미즘 스탠스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는 주로 프랑스의 현실에 주목하여,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 사이에서 두드러진 건 임금 소득의 재분배 부분이라고 지적합니다. 하위 계층은 사회 보장 섹터에서 지급, 보조 받는 비율이 높기 때문에, 이들의 차이를 가르는 건 기본적으로 근로 소득이라는 것입니다. 세습 부문(그는 굳이 이 용어를 쓰네요)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으나, 다만 그 분배의 불공평이 극심할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밀턴 프리드먼이 제안했던, 상속-증여와 이전 소득에의 과세 통합을 주 내용으로 하는 부의 소득세(물론 우리 나라 경제학 교과서에도 소개되는 개념입니다. 재정학이라든가 타 분야에서도 익숙하죠. 이 책은 아무래도 프랑스어 원문이라서, 피수식어가 수식어의 앞에 위치하는 이 같은 어휘가 난무합니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원 없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impot negatif. 영어라면 네거티브 인컴 택스라고 하죠)를 다시 환기합니다. 프리드먼이라는 이의 족적을 아는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구태여 이 이름을 들고 나온 피케티의 의도를 눈치 채고 미소가 씩 지어졌을 만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생전에 이미 이 이야기를 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은 이미지만 기억하고 디테일을 생략하는 나쁜 습관 때문에 아마 잊고 있었을 텝니다.

 

그는 여기서 다시 쿠즈네츠의 법칙을 "까기" 시작합니다. 사실 왜, 세이의 법칙 이래 아름다운 경제학 법칙들은 도통 현실에서 실현될 줄을 모르고 책 안에서만 폐쇄적 유희를 즐기고 있는 걸까요? 경제학의 거의 관성적 진리에 의하면, 선진국의 생산성은 하락하고, 개도국의 역동적 성장은 이와 대조되듯 각국의 자본을 끌여들여야 마땅합니다. 이로서 궁극적으로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가 실종되고 공평한 부의 향유로 수렴해야 마땅하나.. 그 현실이야 우리가 보는 바대로입니다.

 

피케티의 결론은, "완전 균형 완전 시장 청산"이 신화에 가깝듯, 불평등의 문제는 자본주의에 있어 항상적 특질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왜 인도의 한계 생산성이 그리 높음에도 불구하고, 해외 자본은 인도를 향해 러시하지 않는가? 그는 예리하게도 "생산 수단의 불공평한 분배가 아닌, 인적 자본의 공평성 척도"에 그 원인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충실한 기존 성과의 인용에 이어, 이처럼 자신만의 독창적 견해를 치밀한 분석과 함께 클리어한 명제로 척척 이어가고 제시하는 솜씨, 과연 프랑스가 낳은 엘리트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탁월한 재주입니다.

 

피케티의 주장 말고도 예컨대 가족 계수(quotient familial) 같은, 프랑스에만 특유한 제도나 개념, 기법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책 말미에는 용어 사전도 나와 있어서, 경제학 개념이 생소한 독자들을 배려하고, 쉽지 않았을 텐데도 일일이 참고 문헌 목록을 싣고 있습니다. 이 책은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내용인데, 한국에서의 피케티 열풍을 감안하여 거의 세계 최초로 외국어 번역본이 나온 셈입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피케티의 "리즈 시절"을 이 책을 통해 머리에 그릴 수 있을 겁니다.

 

오타
p105: 5 시경경제 → 시장경제
p228: 밑에서 10번째 신라카도 → 신리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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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1930 1
김민주 지음 / 단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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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와 타이요우라는 이름이 소설에 등장했을 때,  왜 긴 금발에다 날씬한 몸매를 한 남성이 일본인 이름을 갖고 있을까 하고 의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로맨스 소설에서 흔히 보는, 어려서 인형처럼 예쁘고 커서 남신(男神)처럼 위압적이리만치 이기적인 미모를 유지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건 어찌 보면 공식이겠지만, 배경이 (아주 사실적으로 세팅된) 일제 강점기이다 보니, 그리 예사롭지만은 않게 다가왔습니다.

 

로맨스 소설에서 구현하는 세계란, 현실은 물론 소설에서도 있을 수 없는 극단적인 낭만주의가 지배해야 합니다. 왠지 이치카와 타이요우에 대한 세세한 묘사(유모 사치와의 아찔한 장면에서, 그의 나신에 대한 징글징글할 만큼 육감적인 그림이 그려지죠)가 없더라도, 우리 독자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생겼을지) 머리에 훤히 넣고 있습니다. 게다가 영국인 여성과의 혼혈이라지 않습니까. 자신 代의 아름다움을 후손에 물려 주기 힘든, 1세로 끝나야 하는 절정의 아름다움을 지닌 혼혈은, 아름다움을 제 몸에 다 구현했다는 둘도 없는 행운 못지 않게 숙명적 비애도 간직한 셈이죠.

 

이치카와 타이요우는 이런 아름다움과 (아마도 근원적으로 일본인들의 그것과 조화되기 어려웠을) 영혼의 순결함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가 가진 치명적인 이 두 매력 요소는, 이국적(exotic)한 희소성에 대한 갈망 이방적(foreign)인 낯섦에 대한 병적인 경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일본인의 심성을 정면 자극했습니다. 그가 외부에 대해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할 어린 시절부터 말이죠. 타이요우는 이런 까닭에, 일본에서 가장 고귀한 화족의 혈통이었으면서도 성장 과정 내내 그들 사이로 화학적 융화를 이루지 못한 에일리언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역설적 의미에서 태생적 반일주의자의 길로 내몰린 셈입니다.

 

모석정은 훌륭한 가문의 태생에다, 매혹적인 미모를 지닌 여성으로서, 그리고 재능 있는 젊은이로서, 그 진로에 아무 장애와 역경이 없는 평탄한 행로를 밟아야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아무리 중추원 참의에다 백작의 지위(이 백작은 일본에서도 통하는 백작이죠)까지 지닌 권세가의 딸이었어도, "센진"이라는 태생으로부터의 낙인에서 어딜 가든 자유롭지 못합니다. 조선에서건 내지(...일본)에서건 일단은 존귀한 계층으로서의 대접을 받고, 압도적인 겉모습과 품위 있는 행동거지로 남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한 걸음은 더 들어가면 문제가 달라지죠. 동족으로부터는 "이민족의 개로 식민 지배 체제의 밑바닥을 핥는" 아버지의 원죄까지 다 떠안아야 하며, 지배 종족인 일인들로부터는 결국 "야만적이고 거친 반도인 계집" 이상도 이하의 처지도 아닙니다.

 

이런 석정과 타이요우가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운명적 이끌림을 경험한 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아무리 이런 로맨스 소설에서 남녀 간의 연을 맺는 데에 외모가 결정적 요소라고는 하나, 결국은 영혼의 궁합이 안 맞으면 좋은 끝을 못 보는 게 또 보통이더라구요(그런 경우, 치명적 매력을 가진 남자 캐릭터의 이해할 수 없는 완패로 끝나는 게 정해진 길이기도 하죠). 다만 여성 캐릭터는 순정(純正)의 조선 혈통과 천부의 무용 재능만으로 승부를 보는 진성의 천재인 반면, 타이요우는 그 출생에서 서양 어머니의 유전적 개입(반칙이죠) 덕을 본 데다 깨놓고 말해 사회인으로서 딱히 잘하는 재주가 없는 한량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석정보다 열위의 존재입니다. 모석정을 위기마다 구해 주는 유력 신분이지만, 그가 언제나 갈구하던 모성의 위안을 통해 받을 영혼의 구제는 결국 모석적이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둘 사이에서 주도권은 여성인 석정이 쥐고 있습니다. 타이요우가 그녀에게 베풀어 주는 백마 탄 왕자의 노릇은 결국 써빙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두 영혼의 만남이, 당최 가망이 없어 보이는, 세계적으로도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던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점이 이 소설의 비극성을 더합니다. 가장 아름답고 여린 것과, 가장 잔인하고 살벌한 것의 만남. 모석정은 열차 안에서 헌병 오장에게 수색을 당하는 와중, 태어나서 처음 겪었을 수준의 모욕을 당하고, 일황 암살 미수 사건 후에는 곧바로 수사 당국에 연행되어, 앞의 오장과는 신분과 자질, 그리고 학대의 세련도(?)에서 차원이 다르다 할 장교 데오루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은 물론(이 장면에서 많이 놀랐습니다. 아무리 국사범 혐의라지만 바로 막장 고문으로 이어지다니), 능욕을 당하기 일보 직전까지 갑니다. 이 결정적 시점에서 바로 타이요우가 등장해 마지막 선을 넘지 않게 하는 건 장르물의 공식이 또 그러하니 넘어가기로 하죠. 하나 아쉬운 건, 로설에서 빠질 수 없는 에로틱 씬의 묘사가 좀 진부하다는 점입니다. 탄탄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과 설정은 본격 소설을 능가할 정도여서 더 아쉬웠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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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그래픽 한국경제 100
황인학 지음 / 프리이코노미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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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신문 기사 하나를 봐도 줄글로만 이뤄지는 경우가 드뭅니다. 종전에는 일반인이 보기에 어려운 내용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선명하고 단순한 일러스트를 삽입하는 일이 잦았는데, 요즘은 인포그래픽 형식을 도입해서, 내용의 접근성과 정보 파악의 정확성을 동시에 기하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어떤 일이건 하나의 미덕이 달성되면 다른 좋았던 점이 희생되곤 하는 trade-off 관계가 있기 마련인데, 의사와 소통의 효율을 기하기 위한 기술적 발전 과정에선 그런 마뜩지 않은 상식도 통하지 않나 봅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 책의 처음에는 "경제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대한민국"이라는 자랑스러운 표제가 달려 있습니다. 아마도 이는 우리만의 자기도취성 구호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해외에서 우리를 보곤 하는 시각, 혹은 stereotype성 이미지가 그대로 반영된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그런데, "산업화"라는 표현은 곧잘 쓰곤 해도, "경제화"란 표현을 이 경우에 쓰는 게 과연 정확한 지는 좀 의문입니다. 보통 "경제화"라고 하면, 뭘 절약하거나 합리적으로 쓴다는 뜻이니 말입니다).

 

사실 대한민국이 과연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잘 이루어 내었는지는, 정작 내부 당사자인 우리 시각으로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더 큰 의구심이 일기도 합니다. 산업화에 관해서라면, 이 책 속에서 누누이 지적되는 것처럼 우리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둔한 성장률의 덫에 빠진 "조로화 경향"을 보이고 있고, 민주화 역시 그 훌륭한 성과가 왜곡되거나 반대로 악용되는 모습이 특히 근래에 아주 빈번히 노출되어, 국민적 피로감을 자아내기 때문이죠. 이런 관점에서, 이런 책이 깔끔한 편집으로, 또 매우 선명한 정보를 담고 지금 이 시점에 출판된 건, 시의적절하다기보다는 왠지 지나간 시대의 영화(榮華)를 씁쓸한 마음으로 회고하는 것 같아서 읽는 내내 마음이 좀 그랬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요.

 

이 책은 다양한 출처로부터, 인포그래픽의 기본 바탕이 될 통계 자료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큼직큼직한 통계는 세부 사항에서 다소의 차이를 보일 뿐, 인포그래픽으로 구현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대동소이한 게 보통이죠. "수출의 날"로 정해서 꼬박꼬박 개발 독재 시기에 기념하던 건 어느 새 "무역의 날"로 그 이름이 바뀌어서, 인풋과 아웃풋을 구별하지 않고 총량적 개념으로 계량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교류하는 상대로부터 무조건 뭘 남기고 봐야지."하는 미성숙하고 조급한 입장에서 벗어나, 넉넉하고 대국적인 관점에서 현황을 뵬 줄 아는 여유가 생겼다는 반증입니다. 또한, 상대의 아량과 후견을 기대하는 개발 도상국의 위치에서, 보다 종합적인 변수를 고려에 넣어야 하는 선진국(음...)의 위상으로 바뀌었다는(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시그널이기도 하겠습니다.

 

28페이지에 보면 제목이 <경제성장과 함께 꾸준히 증가하는 일자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론상의 당위로는, 경제성장과 함께 일자리가 꾸준히 증가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층이 거의 습관적으로 아우성치듯(혹은 직장에서 밀려난 장년층이 푸념 이상의 절박함으로 외치듯) 피부에 와 닿는 일자리 사정이란 결코 호조건이 아닙니다(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주위로부터 타박깨나 받을 것입니다). 그래픽에서 보듯, 성장률은 들쭉날쭉한 모습 가운데 추세적 하락을 그리고 있으며, 바탕에 보이(히스토그램)는 일자리 수치는 상대적 인덱스가 아닌 절대치입니다. 인구가 늘어나면 여튼 경제활동인구(곧 고용인구) 역시 늘어나는 건 당연하다는 점에서, 이 그래픽은 사실 해석과 시의적절성 모두를 갖춘 모범은 아닙니다. 출처는 세계은행으로 되어 있는데, 사실 이 정도 자료는 국내의 정부, 민간 어느 기관에서나 다 가지고 있죠(디테일에서 차이를 보일지언정). 굳이 그곳 통계를 가져 온 건, 아마 더 높은 객관성의 확보(라기보다 상징적 시전?)가 그 의도였을 텝니다.

 

그 맞은편 페이지에 보면 "더 고도화되는 산업 구조"라는 제목으로 물경 80퍼센트에 이르는 3차 산업 종사자의 비율을 들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마냥 반길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자유당 시절부터 비정상적으로 3차 산업 종사 인구가 높은 비율을 차지했는데(묘하게도 이 파트는, 시계열적 추이가 빠진 채 현황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한국전 직후 농토가 파괴되고, 젊은 층이 상경이라도 해서 취업을 할 직장(그저 공장이든, 아니면 사무직이든)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죠. 지금 역시 농업의 실태는 원가도 안 빠진다는 아우성이며, 버젓한 기업의 꼴을 갖춘 일자리는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오늘도 여러 경제지에서는, 미용실, 당구장, PC방 등 거의 모든 "만만한" 자영업이, "누가 먼저 망하는지 버티는 게임"이 되어 버린, 극도의 위기에 처한 현실을 르포하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자는 게 아니라, 사실 우리의 지금은 샴페인을 터뜨리며 예쁜 인포그래픽이라는 화장대 거울 앞에서 나르시스적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60페이지를 보면 <세계 경제 성장 평균을 밑도는 한국 경제>라는 題下에, 심각한 기로에 선 우리 소규모 개방 경제의 실태를, 그리 복잡하지 않은 프레젠테이션 포맷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세계 평균과 비교해서뿐 아니라(이 수치는 가장 다이내믹한 성장세를 보이는 개도국 포함이니 당연 불리할 수밖에 없죠), OECD 평균과 비교해서도 그리 좋지 못한 형편입니다. 묘하게도^^ 이 자료의 출처는 굳이 IMF로 삼고 있습니다. 다분히 상징적이라고나 할까요?

 

78페이지에 보면 그나마 희망적인 것이, 기업 R&D 투자 비중이 세계 1위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선입견으로 미국이니 프랑스니라면 마냥 연구개발에 목돈을 들어 부을 것만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는 건데요. 다만 총액이 아닌 상대 비율이란 점(R&D는 10원에서 9원 투자보다. 1억에서 천원 투자가 더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중국, 일본에 근소하게 앞설 뿐이라는 점 등이 통계의 맹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파트도 있습니다. 이 책은 의원입법의 범람(책 자체 표현입니다)을 문제점의 하나로 꼽고 있는데, 종래 우리가 "국회의원들 일 안 하고 노는" 대표적인 증거로 정부 발의에 비해 현격하게 낮은 의원입법 발의 비율을 들었기 때문이죠. 각종 옵저버와 모니터링이 단순 발의 수치만을 기준으로 삼자, 이번에는 그저 묻지마 식으로 쪽수만 채우고 보는 무성의하고 즉흥적인 의원 입법 시도가 또 문제 되는 모습인데, 참 의원 자질 향상이 이처럼이나 어렵다는 게 너무도 한심한 현실입니다. 책은 의원입법의 경우 "구제영향 평가"를 거치지 않는다는 게 문제로 들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소위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의 특권 중 하나입니다. 마냥 기업의 영향 하에 "평가"를 받아야 한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로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이건 획일적 시스템 개선으로 될 일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각성을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책에서는 또한 "제도경쟁력"의 열악함을, 기업가 정신의 약화 등 여러 악영향을 낳는 주범으로 꼽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정량적 평가가 용이하지만은 않은 부분입니다만, 우리는 워낙 정성 정량 모든 영역에서 미진하니, 결론 도출이 어렵지가 않습니다. 다만 대체 어느 선진국 사례를 두고 우리의 모범으로 삼아야 할 지 그 컨센서스 도출이 어려울 뿐이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영업이익률 격차는 해가 갈수록 감소한다는 자료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경제력 집중의 완화에서 비롯했다기보다,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워낙 실적이 안 좋다 보니 나온 결과라고 생각되네요. 오히려 지금 같은 국면에서는, (이 책 다른 파트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최소한의 낙수 효과라도 맛보기 위해) 대기업이라도 월등한 이익률을 올려야 하는 게 그나마 안도가 될 텐데(낙수효과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일단 논외로 하고라도)... 과연 지금처럼 열악한 중소기업의 형편에 대기업의 그것이 "수렴"하는 모습이, 아 경제력 집중이 완화되는 징조로군 하며 안심할 수 있을지는 극히 의문입니다. 현기차 1차 협력 업체의 사정 개선 역시 과연 유리한 지표로 마음 놓고 쓰일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뚜렷한 근거 없는 반기업적 국민 정서 역시, 개선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정서"를 탓하기 전에, 기업부터가 준법 경영을 해야 합니다. 윤리(그 개념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막연하죠)까지도 필요 없습니다. 실정법이나 잘 지켜만 주고, 그에 앞서 혁신과 경영 합리화만 이뤄 줘도, 특별한 경향성 있는 이들 아닌 일반 국민의 이미지는 크게 좋아집니다. 우리 국민은 현실에 맞춰 생각을 바꿀 줄 아는 융통성 있는 이들이지, 어떤 이념을 머리에 넣고 사는 완고한 이들이 아닙니다(그런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릴 뿐).

 

책의 그래픽은 깔끔하고 편의성을 크게 도모했지만, 다룬 자료들과 그 구성 방식이 일차원적이라는 단점이 있습니다. 인포그래픽의 효용은 일반인들이 엑셀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현할 수 있고, 웹에 공개된 자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그 이상의 복합적인 것이라야 하는데, 유의미한 가공이 다소 부족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정확하고 콤팩트한 건 좋지만, 통계의 구현에 그래픽적 숙려랄까 심도 있는 메시지 전달이 다소 부족한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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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키드 퓨처 - 당신의 모든 움직임을 예측하는 사물인터넷의 기회와 위협!
패트릭 터커 지음, 이은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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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어의 네이키드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나 분위기는 비교적 일관적이죠. 노먼 메일러의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에서, 작가의 의도는 생과 사의 갈림길 앞에 살의, 적의, 생존 본능, 이타심, 이기심 등 아무 가림막 없이 드러나는 민낯 그대로의 인성과 영혼을 표현하려 하고 있습니다. 가릴 것이 없다, 숨길 것이 없다는 건 마냥 칭찬하거나 좋은 의미만은 아닙니다. 세상의 때가 비교적 덜 묻은 어린이들이라고 해도, 그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을 보고 민망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죠. 가릴 것은 가리고 때로는 고쳐 가면서 다녀야, 타인에게도 덜 민폐를 끼치는 셈입니다.

 

이건 순전히 정중한 관점에서만 이야기한 것입니다. 가릴 것을 가려야 한다는 건,  일차적으로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목적입니다. 나의 정보가 어떤 안전 장치나 필터 없이 공개되고, 상업적 목적이나 기타 불순한 의도로 공중(公衆)에 떠돌아 다닌다면, 아직까지 개인의 독립성와 존엄을 최고로 삼는 현대인들에게, 이만큼 큰 충격이 없을 것입니다.

 

인터넷을 위시한 정보화 혁명이 본격 시작된 건 금세기 초의 일입니다. 당시만 해도 아무 사이트에나 가입하지 말라, 비밀번호는 쉽지 않은 것으로 설정하라, 정도가 개인 정보 관리, 보안상의 상식이었습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제작되어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준 것도 이맘때의 일이죠. 당시만 해도 거리에 산재한 CCTV가 (범죄자 아닌 일반 시민의 )프라이버시 침해의 여지가 있다는 우려가 간이 제기되었을 뿐, 곳곳에 숨겨진 칩이나 센서로 개인 정보가 체계적으로 수집되고, 이를 통해 어떤 맥락이나 스토리(허위이든 진실이든 무관합니다)가 구성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나선 이들도, "저건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이라며, 받은 충격을 달래고 완화할 뿐, 다가올 미래에 대한 준비나 적나라한 위험의 예고편이라고 여긴 이는 거의 없었을 줄 압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명탐정들이 언제나 고민해 오던 건 바로 자료의 부족이었습니다. 아무리 명탐정이라도, 벽돌 없이 집을 지을 수는 없다던 홈스의 탄식은 유명하죠. 그런데 이제는, 명탐정이 아니라도 단말기와 전산 처리 장치에만 접근할 수 있다면, 학부생이라도 지구 반대편의 가장 은밀한 사정을 알 수 있고, 이를 토대로 중대한 정치적 격변을 예측할 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 기관이나 정부에서 예측해 오던 것은 "A이면 B"식의 단순 인과 관계 경로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해, 개별 확률 역시 다 계산되어 밝혀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사태만 제외하고는, 이런 예보된 확률은 맞히는 경우보다는 빗나가는 일이 더 잦았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추론에도 오류가 개입하기 마련이므로, 가능한 한 가장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하는 데에 만족해야 한다는 이른바 "만족 모형"도 이때 등장했죠. 하지만 만족 모형은 그걸 주장하는 사람이나 만족시킬 수 있을 뿐이었고, 만족보다는 자기 위안이나 합리화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빅데이터라는 놀라운 실체의 탄생 덕분에, 예측은 보다 체계화하고, 실용적 결과의 달성과 도출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래의 단순 경로 예측과 이를 토대로 한 확률 계산은, 보다 정확하고 실제적인 값으로 수렴해 갈 수 있습니다. 확률에는 (현실감 없는) 모든 경우의 수를 모집합으로 한 "고지식한 확률"이 있고, "일반적으로야 그렇지만, 바로 너라는 특수한 경우에는 확률이 이렇게 재조정돼."라며 맞춤형 값을 일러 주는 "조건부 확률"이 있습니다. 수학자 베이즈가 처음 이론적으로 정립하여 발표한 이 확률은, 근세 블레이즈 파스칼 이래 가장 유의미한 이론적 발전이었으나, 그 전제가 되는 "조건"이 무엇인지 분명히 특화되지 않으면, "일반적 확률"보다 더 유익한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빅데이터라는 "유효하고 수적으로 넉넉한 조건"의 수집이 가능해진 현재에서는, 이제 개인별로 정확한 미래 예측이 가능해졌습니다. 그저 전자책 기기인 줄로만 알았던 아마존 킨들은, 알고 보니 전자책을 읽는 독자의 개인 취향을 일일이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읽고 마는지, 책의 어느 부분에 주로 밑줄을 치는지, 킨들은 정확한 사항을 유저의 인적 정보와 함께 본사의 서버에 전송합니다. 나의 가장 내밀한 순간이 베조스의 개인 장부에 실시간으로 그 추이와 함께 기록되고 있었다는 거죠. 아마존닷컴의 입장에서, 고객의 성향과 장래 무엇을 구매하고 수요하며 욕망할 것인지의 그 모든 사정이 실시간으로 보내져서, 그냥 주먹구구식 감으로 그려지는 게 아니라, 분명한 근거와 논리적 절차에 의거하여, 회사에 확실한 장래 수익을 안겨다 줄 단단한 모델을 구축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었습니다.

 

페이스북은 친분 있는 이에게, 그리고 친분은 없으나 나를 볼 수도 있는 불특정 다수에게, "이게 나의 모습입니다."하고 내 보여 주는 매개이자 통로입니다. 이 유용한 사이트에 가입할 때, 저커버그의 분신일 지도 모르는 기계어의 논리가 빈 양식을 채우라고 자꾸만 요구합니다. "출신 학교는? 직장은? 사는 곳은?" 대외적으로 공개는 않을지언정, 당신의 소셜 액티비티를 대신 수행하거나 최소한 도와 주는 나만은 알아야겠다는 듯, 집요하게도 요구합니다. 사람이 아닌 기계인데 뭐가 어떨까 싶지만, 무심히 입력하는 순간 나의 일부인 개인 정보는 옷을 다 벗은 채 주인의 치부를 여기저기 노출하며 부지런히 그 누군가에게 달러와 유로를 벌어다 주고 다닙니다.

 

사물에 달린 센서와 칩이 중앙정보처리 장치에 정보를 보내고, 이를 토대로 나의 편의와 쾌락이 증진되는 건 정말 만족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특히 개인의 의료 문제에 있어, 사전 사후에 소요되는 그 번거롭고도 비용이 많이 드는 절차와 노력을 말끔히 덜어주다시피하며, 그 정확성(다른 것도 아닌 내 몸의 건강에 관한 사항이니, 정확도라는 게 얼마나 중요할까요!) 역시 종래의 원시적인 방법과 비길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기적적인 효용과 편의 못지 않게, 나의 존엄과 가치가 시장 화폐 단위로 환산되어, 이리 팔리고 저리 유통된다는 사실입니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 변수에 싸여 있습니다. 미래의 본질은 "불가측성"이라고 해도 됩니다. 이런 미래가, 데이터의 연쇄라는 거의 확실한 콘베이어 벨트에 실려 투명한 용기에 씹어 먹기 좋은 형태로 가공된다면, 그건 실로 놀라운 기적이라 불러 줘도 됩니다. 마냥 도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이미 우리 곁에 현실화한 모습으로 일부 다가와 있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가, 단지 편하다는 이유로 네이키드한 차림으로 대로를 활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취향, 우리의 은밀한 쾌감, 우리의  열정을 쏟을 대상, 우리의 체온.... 이 모든 것의 단순합이 우리 자신 바로 그대로일 수는 없습니다. 보다 진지한 반성과 성찰, 편익에 대한 비판적 시선, 자본주의가 자체의 숨은 계산에 따라 교묘히 제시하는 유혹에 내 자신을 그대로 맡기지 않는 선택과 각성이,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벌거벗고 다니는 생각 없는 대중 속으로 매몰하지 않는 길입니다. RFID는 진공 청소기나 아이팟에 얼마든지 붙여도 됩니다. 하지만 소중한 우리 영혼에 어떤 식별표를 붙이는 그 순간, 우리는 아무 가치 없는 화폐 적출 대상으로 기업에 이용되고 말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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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지지 않을 용기 - 나에게 힘을 주는 아들러 심리학
알프레드 아들러 지음, 박미정 옮김, 오구라 히로시 해설 / 와이즈베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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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심리학의 3대 거장이라고 하면 보통 프로이트, 융과 함께 이분을 꼽죠. 이분은 스승 프로이트와도, 그리고 융과도 달리, 심리학과 사회학적 측면을 결합한 경향과 공로가 있습니다. 인격의 distortion이, 개인의 열등감과 이를 만회하려는 노력 사이에서 빚어진다고 한 그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의도와 관계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많은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는 이런 아들러의 이론적 성과를 자기계발 분야에 알맞게 적용, 변형하는 노력도 두드러진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 아들러가 (상대적으로) 생소하다고는 하지만, 최근 일이 년 사이에 "자계서 포맷"으로 많이 소개된 편이라서 요즘 독자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여튼 오늘날 우리에게 자기계발의 대가로 알려진 많은 저자들이, 알고 보면 이 아들러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재미있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약간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베스트셀러 자기계발 저자들에 대해서는 훤히 정보를 알다가도, 정작 이분처럼 순수 학문의 거장에 대하서는 까맣게 모르는 풍토가 과연 참된 독서를 위한 분위기가 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하지만, 결국 독서는 나 자신을 위한 노력이고 활동입니다. 아무리 아들러에 대해 원전을 읽고 정확한 이해를 얻었다손 쳐도, 그것이 읽은 이의 삶에 근본적 변화를 주고 역동적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한다면, 해당 분야 연구직에 있는 처지가 아닌 이상에야 별 큰 보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이 알프레드 아들러가 우리 현대인, 바로 회사에 다니고 바쁜 시간 쪼개어서 내 몸값을 높일 궁리에 여념이 없는 우리들에게 미친 영향만 놓고 보자면, 프로이트나 융보다도 더 고마운 사람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 들여라." ,"나와 주변 환경을 절대 긍정의 정신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말들은 요즘의 자계서 작가들이, 그 최초의 출처가 어딘지도 모르고 열심히 퍼 나르는 말(물론 그 작가들은 나름대로 자기 확신과 흥이 있어서 하는 일이겠지만요)은, 알고 보니 이 아들러 박사가 학문적 동기에서 최초 규명하고 명제로 정립한 것들이었으니 말입니다. 파생적 저작이나 카피본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감동과 동기 피부여라면, 오리지널 저자(author)로부터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까요?

 

책의 분량은 그리 두껍지 않습니다. 250여쪽이 채 안 되어서 처음엔 조금 실망도 했습니다. 저자 명의는 아들러 본인"으로 되어 있지만, 정말 자계서 필진의 편집이 대거 개입한 느낌을 줄 만큼,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러 특유의 긴 호흡의 함축적인 육성은, 이 세련된 텍스트 속에서 많이 증류, 정류된 느낌도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당장 이 팍팍한 사회 생활 속에서 핀치에 몰리고 메말라진 우리 마인드를 구제하려면" 긴 시간과 정력을 들여 읽어야만 할 텍스트보다는, 이런 포멧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영화 <대부>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옵니다. "하지만 난 억울해하거나 복수하려 들지 않았어! 왜? 이 모든 건 다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거든!" 어쩌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엄청 책을 많이 읽은 분이죠)도, 아들러의 이 언명에 영향을 받아 그런 대사를 구상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들러의 인생관은 그것입니다. "You are what you have chosen." 내 의지가 작용하지 않은, 던져진(被投的) 요소가 아닌, 의식을 가진 후 독자적으로 선택을 해야 했던 그 무수한 순간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내가 이뤄진 것입니다. 결과가 나쁘다 해도, 현재의 처지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해도, 그것이 다 나의 귀책이라면 억울한 마음이 들 이유가 적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다음 번에 같은 실책을 저지르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저는 최화정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쇼를 듣다가, 자신의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하지 않는 게스트 가수에게 "뭐 괜찮아, 성격은 바꿀 수 있으니까."라며 농담을 던지는 걸 들었습니다.  이 말의 속뜻이야 외모지상주의를 강조하는 것이니, 오히려 다른 이들은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여튼 중요한 건 "성격도 결국 본인의 각성 여부에 따라 바꿀 수 있다."는 점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각성'이라는 게 힘든 것입니다만.

 

아무래도 아들러의 말 중 압권인 건 "인간이란 본디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라는 그 명언이겠습니다. 익히 아는 말이지만, 아들러의 저작으로 표시된 책에서 그 말을 직접 접하니 그 감회는 또 다른 면이 있더군요. 열등감이 문제인 건, 그 열등감이 주는 마음아픔이라든가 감정상의 장애도 있겠지만, 열등감을 만회하려고 벌이는 과정에서 저지르는 더 큰 실수와 패착입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감정 포지션의 적극적 설정의 권유는, 학자치고는 드물게 보는 아들러만의 실용성과 명쾌함입니다. 사실 그는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이런 실용적 분야에서 더 큰 성공과 두각을 나타내었을지도 모릅니다. 강연을 상당히 잘했던 편이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분명히 나의 것인데 그 쓰임이 너무도 어려운 게 바로 "감정"입니다. 오히려 아들러 후대에 들어 감정이란 것을 논리적, 도식적으로 분석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아들러는 감정의 실체나 본질을 애써 구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이 점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는 그저, "잘 사용하라"고만 했죠. 유한한 인생을 향유해야 할 우리들에게, 학자나 도인도 하기 어려운 작업에 굳이 시간을 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들러는 이처럼, 명쾌하고 단순한 틀로 모든 것을 볼 줄도 알았으며, 그 중 많은 결과물은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우리에게 실용적 가르침의 쏠쏠한 쓸모로 이처럼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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