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이력 - 평범한 생활용품의 조금 특별한 이야기
김상규 지음 / 지식너머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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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면, 과연 김상규 선생님께서 이 책에 담으신 주제가 되는 다양한 사물들이, 그저 "소소한 사물들"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니, 의문이라기보다는, 흔히 보고, 눈에 채이고 발에 채이던 것이, 그저 흔한 사물이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 중대한 동반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저자는 이 책 서문에서, "디지털의 문법이 이제는 아날로그의 그것을 배워 가고 있는" 새로운 트렌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저는 조니 아이버의 책을 읽었습니다만, 그 책에서는 "디자인은 종래의 디자인 개념, 세련된 겉모습의 논리에 그치지 않고, 쓸모와 용도 자체가 디자인임"을 새롭게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분명 "사물의 디자인"에 대해 한 말씀 하시고자 하는 의도였음에도, 내용을 보면 오히려 미시사의 한 범주가 아닐까 싶게, 사물에 얽힌 "역사"를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Every Picture tells a story." 모든 그림은 그 그림에 나타난 한 장면만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제법 지속된 과거의 이력, 그리고 장래의 예측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책에 나타난 그 상세하고 자상하게 풀어헤쳐진 "사물의 이력을 보며, "Every Thing(일부러 띄웠습니다) tells a history."라고 말을 바꾸어도 될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Every Design tells a story."라든지요.

 

그 사물이 하고 있는 모양은, 그 사물의 지난 이력을 알려 주며, 동시에 그 사물이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양과 용도는 일체이며, 가장 우수한 디자인은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그 효용을, 쓰는 사람 보는 사람에게 바로 알려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거죠.

 

사물은 우리 일상에서 아주 흔히 만날 수 있어서, 그 소중함과 깊은 가치를 우리 가 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당신이 흔히 보던 사물이 결코 하찮은 게 아니며, 너무 소중해서 오히려 하찮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잘 다듬어지고 잘 발전해 온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위에 흔하게 굴러다니는 물건, 예를 들면 전구, 책상, 의자, 냄비 등은, 어느 날 하늘에서 불쑥 떨어진, 영화 <부시맨>의 콜라병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경이로운 쓰임새를 담고 있어도, 우리에게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없고, 결국 일상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죠(영화에서도 결국 부시맨은 그 병을 들고, 그것이 속해야 할 곳으로 돌려 주러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물이 가장 일상적이라면, 그 일상적임은 우리 느낌처럼 "흔함"이나 "무가치함"이 아니라, 반대로 "가장 일상에 긴요함"을 의미한다는 걸, 이 책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저는 가장 기막한 역설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 책 중에서 "지게"를 꼽고 싶습니다. 지게가 아무리 한국적 일상에서 가장 고맙고 쓸모 있는 사물로 발전해 왔어도, 우리들 현대인은 물론 당대인조차 "지게나 지고 다닐..."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천대의 대상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전 당시, 미군 인사들은 "A-frame"이라 이를 지칭하며, 그 기능에 대해 "디자인 일체적 표현"으로 감탄을 표시했습니다. 이 사례에서처럼, 희소성(교환 가치와 연결되는)과 효용성(사용 가치)가 서로 얼마나 괴리를 보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읽으면서도 진정 놀라웠습니다.

 

디자인에 있어 기능과 미학적 수월성은 과연 상충하는 가치일까요, 아니면 여러 선구자들이 지적하는 바대로 일체를 향해 나아가는 중일까요? 이 책에 소개된 여러 사물들은,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품어 온 기능상의 진화와, 외관상의 화려함이 반드시 한 방향으로 가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한계가 앞으로 우리 일상에 속출할 그 모든 사물들이 걷게 될 길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물은 쓰임새가 다하여 시장과 일상에서 퇴출되는데, 이걸 가리켜 저자는 "퇴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퇴물이란 물론 흔히 쓰는 말이지만, 책 내내 강조되고 있는 "보편 개념"으로서의 "사물"을 접하고 머리에 새기다 보니, 이제는 상당히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퇴물이 신선하다니 참 역설적입니다만).

 

사물은 지속되기도 하고, 퇴물이 되어 일상에서 퇴장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하고 귀치 않은 취급을 받을망정 일상 요긴한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물이 되느냐, 아니면 예쁜 모양의 정체성만 고집하다 퇴물이 되느냐 역시, 내력과 비전을 균형감 있게 정신 속에서 길러낼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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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쓴 인생론
박목월 지음 / 강이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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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쓴 인생론>은, 민족의 시인, 국민적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목월의 수상록입니다. 영식 박동규 교수님의 두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알았지만, 목월은 뻬어난 산문가이기도 하며, 그 주옥 같은 산문 속에 인생의 본질을 꿰뚫은 통찰과 지혜를 가뜩 담아낸 스승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참 신선했습니다.

 

이 책은 시인 목월 자신이 직접 쓴, 다양한 출처의 산문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이미 예전에도 출간된 적이 있지만, 이번에 예쁜 장정과 현대적 편집으로 새로 나온 고전이라고 하겠습니다. 고전은 시절을 거쳐도 그 빛이 바래지 않고, 읽을 때마다 읽는 사람에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게 특징이라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저는, 욕심 없고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는 삶을 살면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고 나의 가족 나의 친구에게까지 고루 그 행복을 전파할 수 있는 삶이 무엇이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이 책은 시인 목월의 비교적 젊은 시절까지를 두루 다루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더라도, 한국전 직후나 자유당 집권기처럼 아직 목월이 젊은 혈기와 열정을 간직하던 시기에 쓰여진 글들이 다수 실려 있어서 그렇습니다. 물론 글들은 대부분 목월의 1인칭 시점입니다. 그러나 목월 자신이 워낙 전설적 존재이다 보니, 우리는 1인칭으로 쓰여진 글에서도 화자의 시선으로 대상을 보지 않고, 대상과 화자를 동시에 관찰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독서가 가능해지는 느낌입니다. 이 이유는, 보통의 경우야 화자의 전달, 표현에 신뢰를 보내면서 그 대상에 집중하게 되지만, 다른 이도 아닌 전설적 시인 목월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면, 그 "무엇"보다는 오히려 그를 말하는 화자에 더 시선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독서는, 저에게 이중의 레이어를 가졌습니다. 하나는 물론 목월 자신의 가르침을 경청하고 내 것으로 새기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알던(물론 부정확하고 오류나 선입견도 많지만) 목월과, 이런 주제를 두고 이런 말을 하는 목월의 태도나 분위기로부터 추론 가능한 목월의 모습 사이에서, 미세하게나마 느껴지는 그 차이를 느끼는 은근한 각성의 쾌감입니다. 이 책은 그래서, 목월의 가르침과, 인간 목월을 동시에 공부하는 보람이 있었다고나 하겠습니다.

 

목월 역시 인간이었는지라, 사모님과의 동반 행로가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매우 조심스러운 대목이고, 제 지식(으로부터의 기대)과는 많이 어긋나기도 하고, 책에서도 분명하게만은 다뤄지지 않아서 이 독후감에서 적기가 조심스럽지만, 목월처럼 성자에 가까운 분도 살아 오신 인생 내내 마냥 가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 실린 첫 글은 사모님이, 목월과의 첫 만남과 시모 되시는 어른의 당부, 그리고 힘든 시련의 시기를 회고한 글입니다. 시인의 배우자로 사는 그 고단함과, 남모를 보람, 그리고 그 시인을 빼닮은 자제들을 교육하는 일의 숭고함을, 그 극히 일부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책 역시, 아드님 박동규 교수님의 모습이 살짝이나마 등장합니다. 첫 월급을 받아 양친께 드리는 모습, 아직은 어렸던 다른 아드님의 (요즘 아이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어른스럽고 의젓한) 모습, 그로부터 알 수 있는, 딱히 가부장적이지도 않으면서 전통적 모범으로 간주되었던 우리네 옛 가정의 풍경을 머리 속에 선하게 복원할 수 있었지요.

 

따뜻합니다.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밖에는 정체 모를 들짐승이 울부짖는 황량한 밤이 아니라, 그저 화롯불에서 속 든든히 밤이나 까먹고 할머니가 들려 주시는 옛이야기 외에 어떤 간난도 근접지 않은, 안온한 겨울밤만 연상되는 그런 "밤에", 가장 진실된 도덕과 명철한 논리를 지닌 스승이 들려 주는 "인생론'입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싶습나다. 가을, 겨울, 봄, 그리고 태양이 작렬하는 여름에도 맑은 톤의 피붓빛을 잃고 싶지 않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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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 우리가 몰랐던 신비한 땅이야기
민홍규 지음 / 글로세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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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쯤 전에, 명장(名匠) 민홍규 선생의 억울한 사연이 담긴 책 <누가 국새를 삼켰는가>를 읽었습니다. 그 책은 저널리스트 조정진 씨의 시점에서 저술되었고, 서언과 마무리를 두 분 거물 변호사가 집필한 형식이었죠. 그 책에도 간간히 민홍규 씨의 인간적 면모가 언급되기는 했었지만, 대체로 그 책은 팩트에 치중하여 검찰의 논고에 대항하는 일종의 "답변서, 상소장" 형식에 가까웠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지 않고서는 가치를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저 개인적으로도 신문 기사-민홍규씨 입장과는 정반대 시각에서 기술된-를 검색해 보고 나서야 책의 의도와 효용을 알게 되었죠).


이제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을 다시 살펴 보니, 어찌 보면 참 고지식하게 써 내려가신 책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형사사건의 당부, 유-무죄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피고인(혹은 그 상대방)의 "인간적 측면"에 치우치면, 객관적 시각을 잃을 수 있습니다. 위인이라고 해도 범법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고, 흉악한 이라고 해도 선행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안은 그 개별 사안의 진위, 당부를 놓고 판단해야 하지, 그 사안에 관련된 인물들의 품행에 먼저 시선이 가서는 곤란합니다. 하지만,... 우리들 범속한 이들은, 행위에 앞서서 사람을 먼저 판단하고, 편안한 공식에 따라 판단을 내립니다. "후광 효과"니 (반대로) "인신 공격"이니 하는 건 규칙에 어긋나는 일인데, 그 규칙을 어김이 너무도 일상이 되다 보니, 잘 모르겠다 싶으면 바로 사람을 보고 판단을 해 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 국새 ....>는 참 고지식하게 쓰여진 책이었습니다. 이 책 <터>에서는, 한평생을 예술, 기예의 연마에 바쳐 온, 명인 명장으로서의 민홍규 선생 그 인품과 깊이가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또 한, 전각 분야의 예술적 성취를 넘어서,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를 고이 떠받쳐 온 풍수 지리 사상, 또는 풍류도에 대한 저자의 심오한 깨달음, 그리고 이의 실천이 농도 깊게 드러나 있기도 했구요. 만약 이런 선생의 깊이 있는 인격과 정신 세계가, 일반 대중, (그리고 가상적으로 당시 그의 재판에 배심제라도 도입이 되었다면) 형사 재판을 앞둔 패널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3년 옥살이를 하고 나온 민홍규를 옹호, 신원하려는 책이었다면, 건조한 팩트보다는 이런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게 효과적이었을 텝니다. 다만 그 책은 팩트의 입증과 제시에 치중하느라, 대중서보다는 오히려 (앞에서 적었지만) 상소장이나 소송 답변서 같은 인상을 준 게 사실이었죠.


저는 솔직히 말해, 지형과 산세, 이와 결합한 물과 바람과 기운의 배치 같은 것에 어떤 심오한 독자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큰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깊이 있는 인문서로 분류되어야 마땅할 이 책을 두 번 읽고 나서도, 풍류도, 풍수 지리 사상에 대해 깊은 외경을 느끼게는 될지언정, 그에 대한 귀의(?)에의 욕구는 그리 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 인간이 (그것이 아무리 전통 사상의 구전, 혹은 문헌적 전승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토록 총체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몸에 체화하고, 대규모 사업의 모습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땅에 두 발을 디디고, 또 조상들이 이고 있었던 에의 그 푸른 하늘을 우러르는 처지에서, 헤아릴 수 없는 존경과 삼감의 마음을 다지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 터"를 잘 다루면 자신과 후손의 사업과 진로가 평탄해지고, 운수의 트임이 유리해진다는 믿음, 이는 종래 전근대적 미신으로만 취급되어 온 게 사실이죠. 그러나 몇 주 전 민족 전체가 쇠고 난 명절에 지낸 차례, 그 상 차리는 방법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동육서니 홍동백서니 하는 건 과학적 근거가 있어서 우리가 이를 준수하는 걸까요? 사람이 어떤 일을 성사하려는 데 있어, "진인사 대천명", 혹은 성(誠)과 경(敬)의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하는 게, 이런 절차적 예법에 다 녹아 있는 것입니다. 땅의 형세와 기운(추상적이긴 합니다만)에 맞게 집을 짓고 터를 고르라는 게, 어찌 과학과 반드시 상충된다고만 하겠습니까? 지극한 도(道)는 궁극에 가서 다 서로 통하는 것입니다. 풍수 지리 역시 반드시 기복 신앙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 지극한 성의를 다하고 만전의 주의를 다 기울이는 한 방법으로 봄이 타당하겠습니다.


민 선생은 스스로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으셨으니, 그 통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셨을 텝니다. 허나 그는 "이 역시 일차 책임이 있는 내가 땅을 잘 다루지 못한 탓이다"라고 스스로를 낮춥니다. 성인은 언제나 귀책을 자신에게서 찾는다고 했는데, 이 역시 그의 인격적 완숙도를 잘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위 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존경과 우러름을 받는데, 민 선생 역시 그 질 나쁜 인간들이 모여 있는 수형 시설에서도 한결 같은 예우를 받았으니, 이 점에서도 의인은 빛을 발하는 거겠죠. 풍수 지리 사상, 그 현대적 표현과 발전의 가장 선명한 모습을 보려면 이 책을 일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을 관심 깊게 읽으신 분은, <누가 국새를...>도 같이 읽어 보면서, 우리가 우리의 땅을 어떻게 잘못 다루었기에 정의와 명분의 질서가 이처럼 퇴색할 수 있는지 깊이 반성할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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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평민열전 - 평민의 눈으로 바라본 또다른 조선
허경진 지음 / 알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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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명의는 허경진 교수의 "편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열전" 은 일차 사료이고, 따라서 어느 정도는 사관의 직접 취재가 개입해야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기록자의 시대가 피(被)기술의 시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문헌 고증이라는 간접적 방법론조차 통용의 한계가 있습니다. 허 교수님은 주로 <연려실기술>등 사인의 기록을 통해 이 책을 편집하였으므로, 제목에 쓰인 "열전"은 가장 넉넉한 의미로 새기는 게 나을 것입니다.


사마천의 <열전>도 언제나 개인 중심의 구성을 취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영행열전>, <자객열전>, <골계열전> 등 테마 위주의 편집을 택한 게 제법 되며, (그들 입장에서) 이민족의 내력과 최근의 동향을 다룬 <흉노열전>, <조선열전> 같은 것도 있습니다. 저자 허 교수님도 말씀하시듯, 어떤 가치 판단과 사상의 체계에 맞춰, 개인사는 하나의 도구적 방편으로 차용했을 뿐인 게 동양의 역사 기술 그 기본적 태도입니다.


따 라서 이 책이, "평민 열전"이라는 제목을 취한 건, <연려실기술>등의 문헌(혹은 그 저자)이, 자신이 속한 시대 정신 그 변화를 예리하게도 포착하여, 태생의 신분이 아닌 그 개인의 능력에 의해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려는 대담한 시도들이, (유감스럽게도) 여러 문헌에 산재하여 하나의 뚜렷한 흐름을 채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처럼 책 한 권에 묶어 그 이상형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19세기에 이 이름을 달고 대로를 뢀보하며 낙양의 지가를 올렸어야 마땅했던 그 내러티브들이, 만시지탄의 감이 있으나 이제서야 뜻이 통하고 배가 맞는 동무들끼리 한데 엮인 것으로 봐야겠죠. (저자는 자신의 전작 제목을, <조선위항문학사>로 하여 내었을 때의 아쉬움을 이제서야 해소했다는 취지의 소회를 밝히기도 합니다)


대상이 양반 신분인 경우에도, 사실 친우나 후손에 의해 문집 편찬이나 기록이 이뤄진 경우 그 객관성에는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하물며, 면천(免賤)에 갓 이르렀을 뿐인 한미한 출신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조명이 이뤄졌을 리가 없습니다. 다만, 시문에 능하고 즉흥의 서술에 달통하거나 동서고금의 사항에 대한 박학한 이의 재주를 워낙 쳐 주는 시대였다 보니, 비록 신분이 버젓하지 못할 뿐 자유자재로 문자를 구사하는 은사(隱士)에 대한 찬탄이, 보는 이 누구에서건 정직하게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출신 성분에서나 스스로 성취한 문재의 수준에서나 타에 꿀릴 것 없는 이들로부터라야 정직한 칭찬이 나왔을 것이고(예를 들면 이 책의 전거를 이루는 이긍익 같은 이들), 그렇지 못한 채 타인의 성취를 시기 질투하기에 바쁜 속물들은 그저 남을 까내리기 바빳으리라 예상됩니다.


열전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단명하거나, 무고한 옥사를 치르거나, 괜한 모함을 당한 이가 유독 많습니다. 재주는 빼어난 데 비해 신분이 받쳐 주질 못하니, 그들이 헤치고 나가야 할 풍파의 험난함이 그만큼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드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악한 여건 속에서 제 재주를 갈고 닦은 사연이 있어서인지, 후학을 돕고 곤궁한 동기, 친족을 보살피는 대인의 도량 역시 더 빛나더라는 게 공통되는 점이었습니다. 시대가 많이 앞선(심지어 종계 변무가 아닌 임란 청병의 공을 그에게 돌리는 version이 다 있을 정도니) 역관 홍순언의 사연을 다룬 것도 있고, 경종 때 노론 4대신 중 김창집, 그의 동생 김창흡 등이 보조 역할로 나오는 일화, 그리고 19세기까지 내려와 이건방 등이 등장하는 사연도 실려 있습니다.


각기 시대의 편차는 크지만,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나간 재사들의 분투기는 언제나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바 있습니다. 또, 평소에는 주연급으로 등장했던 명문 거족의 명사들이, 이 책에서는 "평민 주연"을 빛내는 조연으로 출연하는 점도 눈길을 끕니다. 이런 위대한 평민들에게, 근대화나 개방의 물결에서 더 큰 역할이 주 어졌다면 국권의 침탈이 그리 쉬이 이뤄지지는 않았을 텐데, 저 현해탄건너 열도에서, 정치적 소외 세력이었던 사쓰마 -조슈 번의 지사들이 막부의 동요를 틈타 거침 없이 발흥했던 사실과 크게 대조되는 바 있어 읽는 이의 깊은 탄식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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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특허 표류기
이가라시 쿄우헤이 지음, 김해용 옮김 / 여운(주)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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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 대한의사협회에서, 인간의 사망 판정 기준을 "뇌사"로 정하자고 공식적 입장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주요 일간지에서도 이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한 이유에서였는지, 이 발표를 1면 톱으로 비중 있게 다루었고, 그 중 한겨레신문의 만평에선 어떤 허름한 옷차림을 한 이가 "뇌 사려!"를 외치며 돌아다니는 컷을 담기도 했죠. 지금이나 그때나 여전히, 사법부의 공식 입장은 "심장사"로 변함이 없습니다. 이는 "편의"보다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헌법상, 그리고 실정법상의 최고 가치로 인정하는 데에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겠다는 사법부의 단호한 의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우리 국민, 시민들의 마음을 크게 안도하게 만드는 하나의 보루, 방벽으로 여전히 기능합니다.

 

2000년,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초안"이 비교적 치밀한 모습으로 완성되었음을, 기자 회견을 통해 전 세계에 공포했습니다. 이때와 인접한 시기에, 한국에서도 복제 동물에 관한 성과가 줄을 이어 발표되었고, 줄기 세포 연구를 통한 장기 대체, 난치병 치유의 가능성이 금방이라도 눈 앞에 현실화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죠. 그 무렵으로부터 대략 15년이 지났지만, 이런 연구가 갖은 질병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에게 당장의 희망을 줄 것 같은 성과가 딱히 보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유전자 해독에 퍼 부은 그 숱한 인적, 물적 노력이 다 헛된 것이었나?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몇몇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고, 바로 그 내용이 이 책 중에 나옵니다(에이즈와 천식의 치료). 인간 유전자의 97%, 아니 그 이상이 해독되었다면서, 고작 그 정도 성과가 난 것은 너무 빈약하지 않은가? 그 해답도 이 책 안에 있습니다. 이 책은, 로버트 쿡-디간이 쓴 <인간 게놈 프로젝트>라는 책에 대한, 20년 후의 속편, 혹은 화답을, 눈물 겹도록 인간적이고 대책 없으리만큼 물욕 없는 어느 일본 저널리스트, 방송인이, 우리 같은 일반인을 위해 써 낸 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97%, 아니 그 이상이 해독되었다면서 왜 이렇게 난치병 치유가 더딘 것일까요? 생각 같아선 벌써 4, 5년 전에, 암, 에이즈, 신장병, 심장병, 요즘 떠들썩한 루게릭 병 등 거의 모든 치명적인 질병, 신체 질환에 대한, 완벽하지는 않아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처방이 나왔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게, 일반인, 문외한의 기대입니다. 실제로, 이 책의 1장과 2장은 에이즈와 천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흔히 동성애자들에게 직격탄이다 싶은, 그들 특유의 성생활 방식 때문에 도저히 피해 갈 수 없는 천형(天刑)과도 같은 병이 에이즈라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문란한 관계를 가지면, 이 병은 이성애자 동성애자를 가리지 않고 면역 체계를 파괴하죠. 심지어 수혈을 통해서도, 그리고 임신 중의 태아에게도 수직적 감염이 가능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특히 무서운 위력을 발휘하는 게 이 병입니다.

 

헌데, 주변의 파트너들은 이 무서운 병에 걸려 특수한 관리를 받아야 했음에도 불구, 유독 자신만은 이 무서운 HIV 바이러스로부터 완벽한 무풍지대로 남았던 이가 있습니다. 뉴욕 주민인 화가 스티브 크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책에 명시적으로 나오진 않으나, 결국 이분도 동성애자였다는 말입니다). 이분은, 주위의 동료들이 다 이 병마의 겨냥을 피하지 못해 무서운 고통과 스트레스,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만은 가벼운 증상조차 경험하지 않고 있는 점에 의아해했습니다.

 

그는 연구소에 자원하여 찾아가 실험 대상이 되길 원했습니다. (책에는 "어느 연구소"라고만 나와 있는데, 이 연구소는 역시 뉴욕에 소재한 Aaron Diamond AIDS Research(http://www.adarc.org)입니다. 1996년 시사 주간지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데이비드 호 박사가 바로 이 연구소의 창립자죠) 그가 제공한 유전자는 이후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인격적 존엄과 가치가 달린 이 유전자 정보가, 이후 여러 연구소들에 의해, 상업적 특허를 내는 데에 무차별적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유전자 정보를 이용하여 약품을 개발한 연구소, 제약회사는 특허를 등록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고, 이 책에서 주된 비판 대상 중 하나인 벨기에의 "유로스크린" 연구소 역시, 이 유전자(CCR5)를 이용해 파생적 특허를 독자 출원하였습니다.

 

책에서는, 이 크론 씨가 분노를 표현했다고 적고 있습니다(저자는 NHK 프로듀서이며, <인체 특허>라는 제목의 다큐를 제작하여 당시 전혀 낯설었던 이 분야의 현황에 대해 대중의 경각을 일깨운 바 있습니다. 크론 씨는 당시 다큐에 출현하여,  이 같은 자신의 태도를 밝힌 것입니다). 그분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전자는 인류 모두의 자산이다. 그런데 왜, 특허를 얻어 낸 일부 기관만 독점적으로 그 혜택을 누려야 하는가?"

 

저자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허라고 하면 대뜸 발명 비슷한 것을 떠올린다. 그런데 어째서 법 제도가, 인간의 유전자까지 특허 대상으로 하여, 일반의 접근을 가로막게 돕고 있는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이 문제는, 특허 제도, 나아가 지적재산권 제도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성질이기도 합니다. 어떤 혁신적인 지식, 발명  따위가 공개되면, 누구나 그의 혜택을 보게 하는 것이 문화와 경제의 발달에 이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애써 처음 세상에 내 놓은 것이, "무임승차자"들에 의해 제한 없이 이용된다면, 그건 결국 "노력한 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죠.

 

그래서 각국의 특허 제도는, 1) 일단 최초 고안자에게 독점적 혜택을 주되, 2) 그 시한을 일정 기간까지만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애써 노력한 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없다면, 이제 아무도 혁신과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사회는 뚜렷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는 전망도 타당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의 이기심에 기대어 여기까지 놀라운 발전을 이루고, 물질적 풍요를 이뤄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본 법원은, 자국의 오노약품이라는 제약회사와, 특정 유전자 관련 이미 특허를 취득하여 일본에서까지 인정 받은 (위의) 유로스크린 간의 소송을 취급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판결은, 오노 연구소의 손을 일부 들어 주었습니다. 판결 이유는, 특허를 위한 세 요건, 즉 산업성, 신규성, 진보성 중, 신규성 요건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유로스크린의 특허는 무효라는 것이었습니다. 신규성 요건이 결여된 건, 일본 내에서 이미 이 사항에 대한 더 앞선 시기의 공표(모 연구소의)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판결 역시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이라고 합니다. 이유인즉, "인간 존엄을 해치는, 유전자에 대한 특허 출원 자체를 부인해야 마땅함에도, 고작 신규성 요건 하나의 결여를 이유로 유로스크린의 청구를 기각"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도 어느 일본 연구소가 일찌감치 이 발표를 하지 않았더라면, 유로스크린의 특허는 인용되었을 테고, 그것은 인간 존엄을 뿌리에서부터 흔드는 이 해로운 제도의 존속을 인정함이나 마찬가지라는 게 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저자는 실용적 관점에서도, 유전자에 대한 특허를 부인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느 대학이나 민간 연구소가, 순전히 공익적인 목적으로 이 유전자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려 해도, 특정 기관이나 제약회사가 소유한 특허라는 이유로 이것이 불허된다면, 수많은 난치병 환자가 고통을 받는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른 딜레마에 봉착합니다. 난치병 치유를 위한 신약은, 이를 개발한 회사에게 무제한의 이익을 주는 식으로 다루어져도 될까요? 이익이 없으면 연구 개발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처방이, 고가의 치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환자들에게만 제공된다면, 이는 너무도 비인도적인 처사입니다.

유전자 특허 역시 같은 영역이죠. 특정 질병 치유를 위해 많은 투자를 한 회사가, 유전자에 대해 특허를 얻고 이제 사운을 건 채 신약 개발에 나섭니다. 만약 신약 개발로 인한 막대한 이익이 기대되지 않는다면, 최소한 대규모 자본 투입을 통해 이런 프로젝트를 발주하는 회사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기능을 순전히 정부의 공공재 생산 영역에 맡기거나, 뜻있는 민간 연구소의 재량에만 의존한다면, 난치병의 치유는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더 요원해질 수도 있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인격적 존엄을 담고 있는 유전자를 기꺼이 연구소나 제약 회사에 공여한 개인에 대해, "유전자는 인류 공용의 재산"이라는 이유로, 합당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 역시 인권의 침해로 다루져야 한다는 거죠. "모두의 재산은 누구의 재산도 아니다"라는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되는 셈인데, 적절한 이기심의 자극과, 인간 존엄의 수호 요지라는 상충하는 두 가치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찾느냐는 게 결국 관건이겠습니다.

 

일본이나 우리 법제와, 미국의 법제가 보호 범위 면에서 서로 큰 차이를 보이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이번 애플과 삼성 간의 소송에서도 드러났지만, 미국은 그 보호 범위가 비교적 넓습니다. 이 책에서도 나와 있듯, 의료상의 특정 치료 기술마저도 미국은 보호대상으로 잡는 반면, 우리와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전자가 어떻게 특허의 대상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사실 가치 판단상 간단히 다뤄질 성격이 아닙니다.

 

스티브 크론 씨는 작년 이맘때,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나이 66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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