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김태진 지음 / 푸른향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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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창피한 고백이지만 저는 모악산이 어디에 위치한 곳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 이 아름답고 유장한 장편의 작가 김태진 선생은, "황산벌을 자식처럼 아우르고 그 터에 사는 모든 생령을 돌보는, 큰 어머니 같은 산"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북 일대의 진산과도 같은 중요한 자연 지물인 셈이죠(아주 속되게 표현하자면요).

유난히 산지가 많지만, 그 자락에 사는 생명체들을 윽박지르거나 기 죽이거나 접근을 거부하는 산은 별로 많지를 않습니다. 다 나지막하고 고만고만하며, 들어가서 꼴이라도 베자면 그 넉넉한 품으로 안아 줄 것만 같은 산들이 대부분입니다. 산지남 수지북의 풍수 지리 공식에 딱 들어 맞는, 농사를 돕고 추위와 더위로부터 사람을 지켜 주는. 때로는 흉악한 오랑캐로부터 그 땅의 주인을 보호해 주는, 우리네 심성과 살림살이를 오롯이 만들고 챙겨 주었던 그런 산. 따라서 이 소설의 "모악산"은 보편적인 한국인의 산 일반 개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액자 소설 <갑오년>을 맨 처음, 그리고 중간에 두르고 있는 구성입니다만, 이씨의 운수가 다하고 새로운 세상의 개벽이 움트던 구한말의 정세와,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을 맞이하나 뜻하지 않은 동족 상잔으로 머나먼 외국(가까운 외국도 있었죠)에서 엄청난 수의 군대와 전쟁 무기가 이 아름다운 국토를 침노한 시대, 이 둘을 왔다갔다 하는 교차식 구성이라고 해도 됩니다. 더 오랜 과거와 가까운 과거가, 서로 그 닮음꼴을 과거(미래)라는 거울에 비춰 보면서, 모악산이라는 자연, 아니 어머니 대지가 바라보는 가운데 숙명처럼 유사한 질곡을 되풀이하는 게 기본 골격입니다.

액자소설 <갑오년>은 짧은 분량이지만, 엄청 박력 있는 전설의 화소를 찰지게 풀어내면서 서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처음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아 이렇게 두꺼운 책이었어?"하며 다소 부담이 느껴졌지만, 인트로격인 액자가 워낙 강하게 독자를 빨아들이는 통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다 읽어 버렸습니다. "누가 남의 땅에 함부로 묘를 쓴단 말입니까 당장..." "아닐세, 명당은 원래 임자가 따로 있다지 않은가?"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소작인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 아비의 시신을 잃게 되는데, 이 시신은 그 미스테리한 "명당'에 마치 자석처럼 빨려 들어가며, 태곳적부터 정해졌을 제  운명과 자손들의 팔자를 결정하게 되는 것일지... 그 신비스러운 전기(傳奇)적 묘사가 너무도 생생해서, 좀처럼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소년 주인공 "금아"는, 작가님의 생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자전적 캐릭터인가 봅니다. 그닥 생활력 강한 가장은 아니지만, 광구 덕대로 주변의 인망을 얻고, 무엇보다 가족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버지, 한센병(나병)에 걸린 동냥아치에게도 넉넉한 대접, 무엇보다 대등한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잃지 않고 자식에게까지 가르치는 어머니, 이 모든 것이 예전 양반님네들의 올바른 가풍과 범절을 근대에까지 유지한, 전라도 교양 있는 지도층의 훈훈한 인심과 도덕이었던 셈이죠. 외세의 침탈과 전란을 겨
으며, 반상의 차별이 사라진 동시에 이런 미풍도 흔적 없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대립, 부와 빈의 격차 심화, 한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이 서로 양보 없는 대립을 또다시 이 좁은 반도에서 노정하고 있는 가운데, 모악산은 그 오랜 사연을 다 지켜 본 눈으로 우릴 어떻게 응시할지, 그 말 없는 입으로 으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고 있을지, 이 길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으며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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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산업 - 상 - 소설 대부업 기업소설 시리즈 1
다카스기 료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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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저력 있는 거장은, 번잡한 묘사 없이 필요한 말만 하면서도 천 가지 재미를 전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1980년대 초반에 발표되었으며, 소설의 배경도 그 무렵이고, 저 역시 10여년 전에 이 소설을 원서로 잠시 읽다가 만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학생 시절이라 몰랐지만,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직장 생활의 갖가지 단면이 너무도 실감나게 묘사되어, 이런 재미를 왜 과거에는 잘 몰랐을까 싶더군요. 일본에서 특히 장르로 발전된 이런 기업 소설은, 역시 직장 생활을 해 봐야 실감 공감하게 마련인가 봅니다.

표지만 보면 무시무시한 대부 업체에서 아주 그냥 서민의 고혈을 짜내기 위해 갖은 무자비한 방법을 다 쓰는 고발소설 아닌가 착각하기 쉽습니다. "욕망'이라고 하니 무슨 에로틱한 묘사나 잔뜩 나오지 않을지 엉큼한 기대를 가진 저 같은 독자도 있을 거구요. 그런데 최소한 1권까지는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제법 잘나가는 (설정상 전일본 동종업계 1위인) 어느 대부업체의 경영 실태와 흑막을, 흥미 만점으로 파헤친 스토리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주인공은 50대를 넘긴, 일본 유수의 제도("帝都"라고 쓰더군요. 간사이를 자꾸 의식하는 대목이 나오는 걸로 봐서, 그곳과 대치되는 도쿄를 말하는 의미로 보입니다) 은행에서 전무이사직까지 올랐다가, 부행장직까지 미처 승진하지 못하고 카드부문 자회사로 좌천됩니다. 당시 일본 은행에서 카드사업은, 그리 대접 받는 분야가 아니었던 것이, 도대체 크레딧 카드라는 매체부터가 일본에서는 낯선 결제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카드 남발로 인한 가계 부채 문제, 신용 불량자 양산은 아직 먼 미래일 뿐이구요. 제 생각에 이 소설이 발표될 무렵이라면, 일본에서도 이 크레딧 카드를 두고 "그게 뭐지?"라며 낯설어할 시절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시절 일본의 극도의 호황을 맞이하고 있었으니, 아직 플라자 합의도 없었을, 초 저(低) 엔화가치 호시절의 이익을 마음껏 누릴 시절입니다.

사실상 좌천이지만 이대로 물러설 주인공 오미야씨가 아닙니다. 그는 대단히 공격적인 사업 전략을 전개하여, 별 존재도 없던 카드부문을 업계 1위로 올려 놓습니다. 그런데 오미야 씨가 몰랐던 사정이 있었으니, 이미 그는 제도 은행 내부의 "정치'에서 패배한 처지라, 마치 와신상담이나 하듯 앙앙불락하는 그의 태도를 경영 수뇌부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실적만 부풀리려 치솟는 대손율에는 눈을 감았다는 등 온갖 비판이 난무하자, 그는 아예 더 못한 한직으로 좌천되기 직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객관적 관찰자의 눈에는 뻔히 보이는 운명을, 정작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주인공의 눈만 보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안타깝죠. 이미 그는 동료와 선배 눈 밖에 났습니다. 그저 한직에서 급여만 챙기다가, 모양 좋게 은퇴하면 그게 절대우위 전략입니다, 성과도 실적도 다 필요 없다는 게 이미 결정난 분위기인데, 그만 현실을 인정 않고 역습을 꾀하다가, 모든 걸 잃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갖자기 꼼수, 전략, 판을 다 짜 놓고 원망은 남한테 돌리는 방법, 교묘하게 상대를 매장시키는 책략, 겉만 번지르르한 말솜씨 등 직장 다니며 겪을 수 있는 천태만상을 다 구경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제가 본 대로라면, 그는 실추된 명예와 자존을 찾기 위한 동기로, 제도은행에 대한 멋진 복수를 꿈꾸며, 남들 다 말리는 대부업체에 바지사장으로 입사합니다. 헌데, 여기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상장을 앞두고 있다고는 하나, 1인 오너가 지배하는 기업에 어떤 원칙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 와중에서도 그는, 초기 창투 시절 뒷배를 봐준 인연을 들어 주식 양도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거물의 요구를 교묘하게(진짜 교묘하더군요) 무마한 공으로, 오너에 대해 더욱 큰 발언권을 갖게 됩니다. 이 와중에, 직급에 무관하게 사실상 사내 2인자였던 오너의 측근은, 이 주인공을 다각도로 견제하고 무력화하려는 술수를 부리는데, 딱 궁금한 대목에서 상편이 끝나더군요.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직장에서 벌어지는 소리 없는 전쟁, 그에 대한 사실적이고 치밀한 묘사가 좋았습니다. 하권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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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앤더 웨딩
신디 츄팩 지음, 서윤정 옮김 / 처음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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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는 게 시트콤이다." 같은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보통은 그  발랄하고 긍정적인 모습이, 주위에 웃음을 줄 때 쓰는 말입니다만, 이 말에는 마냥 칭찬하 의미만 담긴 게 아니라, 걱정과 황당함의 뉘앙스도 어느 정도 풍긴다고 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그저 일상을 사는 분이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면, 그 이웃을 좀 부담스럽게 하는 분일 수도 있습니다.

 

하 지만 그 당사자가 진짜 인기 시트콤을 집필하는 방송 작가라면 어떨까요?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작품 세계와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하나 보다." 같은, 다소 진지한 각성이 들 수도 있습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작가 샌디 츄팩이 바로 그런 장본인, 그의 작품을 본 시청자가 잠시 독자가 되었을 때, "이게 바로 그 시트콤의 실사 버전이군."하면서 입가에 흐뭇한 웃음을 짓게 하는 그런 빼어난 재능의 소유자입니다.  

 

<섹스 앤 더 시티>를 본 시청자의 반응은 사실 좀 갈리는 편이었습니다. 슬슬 폐경기를 맞이하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끝나간다는 초조함에 애써 더 일상의 즐거움을 찾으려 들고, 때로는 오버액션으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중년 여성들, 그리고 좋았던 시절의 마지막 불꽃처럼 연출하는 그 숱한 "된장질". 이런 걸 보고 대리만조을 하시는 층도 있고, 그 활짝 벌려 웃는 웃음의 부작용으로 깊게도 패이는 (주연 배우들의) 주름살을 보며 불편함에 살짝 고개를 돌리는 저 같은 느낌도 적지는 않았을 겁니다. 근데 대체 그런 감성, 위트, 표현의 묘미가 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신디 츄팩은 이미 여러 권의 책을 통해 그 모든 캐릭터들을 낳은 어머니, 아니 차라리 캐릭터들 자신으로서, 작가 한 명이 실물로 존재함을 알린 적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기에, 신디 츄팩이 어떤 스펙이며 사생활이나 개인적 배경이 어떻다 하는 것도, 이미 연예인 못지 않게 호사가들 사이에 잘 알려진 가십거리가 되어 있는데요. 이 책은 이제 재혼 8년차에 접어드는 그녀의 "오피셜 스토리"의 시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의 배우자 이안 왈락을 만나고, 결혼에 골인하며, 그 후 몇 차례의 고비(라고 그녀는 말하지만, 사실 심각한 건 없습니다)를 어떻게 넘겼으며, 근황은 어떠한지를 자세히, 좀 너무 자세히 털어 놓고 있습니다.

 

책은 그들의 첫 만남, 그리고 대단히 열정적이고 달콤했던 연애 기간(신디 츄팩이 나이가 있다 보니 이 기간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식 결혼 생활, 이 지극히 주관적으로 황홀한 체험담을 맛깔스럽게 이어갑니다. 우선 처음부터, 신디 츄팩은 자신이 유태인이고, 이번 새 배우자도 유태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겪었던 대단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전 남편과 우아하게 헤어졌지만(그리고 좋은 친구로서 여전히 -자주는 아니라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리고 법적 절차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지만, 둘 다 유태인 율법에 따른 절차를 밟지는 않았습니다. 유태 율법에 따르자면, 이혼하는 남자는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고 "내쫓아야(!)" 한다는데, 사실은 츄팩의 집에서 나간 건 남편입니다. 그러나 "내쫓음"의 의미는 얼마든지 융툥성 있게 해석할 수 있으므로, 중요한 건 이혼장입니다. 이 이혼장은 히브리어로 "게트"라고 하는데, גט라고 씁니다. 이걸 영어로 표현하면, get a get 이 됩니다. 신디 츄팩은 상황의 꼬임도 꼬임이거니와, 이 우스운 언어 유희를 본의 아니게 지어낸 그 기막한 아이러니를 독자가 공유해 주기 바라고 있네요.

 

그 전 남편과 헤어지게 된 동기도 참...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힙니다. 남편이 뒤늦게 자기 성 정체성을 깨달아, 다른 남자와 살게 된 것입니다. 신디 츄팩은 이 책에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털어 놓고 있지만, 여성으로서 그녀가 당시에 느낀 감정은 굴욕감 비슷한 게 있지 않았을지 짐작됩니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성적 욕구, 그리고 정신적 교감을 나눌 상대를 찾아야 했고, 몇 남자와 교제하다 바로 이 이안 왈락을 만나게 되었죠.  

 

책에서는 그저 철없는 남녀가 만나 정신없이 사귀고, 서투르고 잘 안 맞는 면도 있지만 잘 맞춰 나가는 과정을, 마치 20대의 그것처럼 재미있게 써 나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츄팩의 입담이 워낙 좋아서, 우리는 그녀의 말솜씨를 감상하느라 잠시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기까지 합니다(그녀의 책은 원래 이런 스타일을 즐기는 맛에 읽습니다. 처음엔 적응 안 되더라도 나중에는 빠져듭니다). 이안 왈락에 대해서 "초혼의 미남 변호사"라고만 나와 있고, 미남이다 뭐다 하는 것도 콩깍지가 씐 사람에게는 다 그리 보이는 거라서 마냥 믿을 건 아니고, 이야기 전개가 경쾌하고 가볍다 보니 그냥저냥 넘기는 분도 있을 겁니다. 늦은 나이에 만났지만, 서로에게 대책없이 반해서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남녀, 그것만으로도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고 그렇게 읽으시는 독자도 많겠죠.  

 

하지만 진실은 좀 무겁습니다. 이안 왈락은 그녀의 눈에만 그리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아주 잘생긴 남성인데다, 중견 로펌에서 창업 멤버 변호사인 초고소득자입니다. 책에는 츄팩의 말로 "당신이 언제 그런거 저런거 하게 돈이나 벌어다 줘 봤어?"라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츄팩 자신도 특급 작가일 뿐 아니라 이안이 상위 3% 안에 드는 특급 법조인(국제법 등 큼직큼직한 이슈만 맡습니다)임을 감안하면, 사실 독자는 위화감이 좀 느껴지죠. 이런 걸 모르고 책 읽는 분은 차라리 속이 편한 거구요. 츄팩 역시, 남자가 유태인 전문직종 아니면 상대를 안 하는 약간 속물적인 여성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애정을 듬뿍 쏟을 가족을 꾸리려는 욕망은 여느 보통 사람 못지 않아서, 당장 아이가 안 생기자 고심 끝에 애완견을 하나 들여 놓습니다. 귀여운 녀석이긴 하지만, 아이를 대신할 수는 없죠. 사실 이들은 신혼 기간 중에 한 번 임신에 성공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검사를 해 보니 정상으로 태어나거나 자랄 수 없는 아이라서 부득이하게 중절이라는 결정을 내립니다. 츄팩이 나이가 많다 보니 난자 활동이 왕성하지 못해 두번째 임신이 어렵습니다. 난자 기증자를 통해 난자를 제공받고 임신에 일단 성공하지만, 전문가들도 전혀 예상 못하게 하혈 끝에 조산, 사산을 합니다. 이때의 끔찍한 경험은 자신의 시점으로 말하지 않고, 남편 이안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발랄한 어투를 이어가는 게 무리라서였겠죠.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이 난자 기증을 둘러싸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도중에 많이 삽입됩니다. 기증자는 젊은 웨이트리스였는데, 소개서를 보니 로스쿨 지원자로서 현재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답니다. 하지만 자필 작성문에 맞춤법이 왜 그리 많이 틀려 있는지,.. 츄팩은 뺑뺑 돌여 말하고 있지만, 사실 결론은 그들 부부가 이를 거짓으로 판단했다는 뜻일 겁니다. 다만, 아이의 지성은 부부가 키워 줄 수 있어도, 외적인 매력은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으니, 외모로 그냥 고른 게 그 웨이트리스의 난자였습니다.

 

이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그 전에, 직접 임신을 해 보려고 전문가에게 들인 돈만도 셀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들 부부는 아이를 입양하게 되고, 이번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한 번의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은 그녀지만, 이 남자와는 평생을 해로하기로 결심이 굳은 것 같고, 그 증거가 바로 이 입양아겠죠. 

 

책 에는 감동적인 명문장도 여럿 실려 있습니다. 그 중 제가 주목한 건 책 초반에 나오는, 츄팩이 이안과의 결혼식에서 낭독했다는 애정 고백, "나쁜 남자론"입니다. "나쁜 남자는 다음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여자가 딴 생각을 못 하게 만들고, 마침내 여자를 자기것으로 꽁꽁 묶어 둔다." 참 어디서나 잘 통할 남자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모범생 중에 모범생 스타일인 이안이 그런 나쁜 남자에 해당이 되는지는 좀 의문이지만요.  

 

이 책의 원제는, 책 표지에 나와 있는 것처럼 "The Longest Date"입니다. 보통 영어로 "가장 긴"이라고 하면, 지루하거나 고통스러워서 가지 않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의미가 당연히 아니고, 결혼 생활도 마치 연인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진행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을 뜻한다고 봐야겠죠. 저는 이미 결혼 2,3년차에 들어선 후에도, "아직은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야"라고 말하는 츄팩에게 좀 놀랐습니다. 이는 진도가 더디다는 게 아니라.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 주고, 상대에 대해 아직은 모르는 게 많다는 겸손함과 아낌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을 살아도 어제 만난 듯 설렐 줄 아는 그런 부부가 부러운 요즘에, 재미있고도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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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시크릿 - 힉스입자에서 빅뱅 우주론까지
아오노 유리 지음, 김경원 옮김 / 북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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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 처음 특수 상대성 원리를 세상에 발표했을 때, 미국의 어느 백화점에서는 매물로 나온 이 과학자의 원고를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합니다. 오늘날과는 달리, 첨단 물리학 이론의 발전에 일반 대중들조차 관심이 컸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하겠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발전은 이제, 같은 과학자들도 조금만 주의를 소홀히하면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불확정성의 원리 발견과 코펜하겐 해석의 승리 이후로는, 물리학에서 주장하는 이론을 일반인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지경까지 도달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태양계를 둘러싼 우주의 구조와 기원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한 건 모든 인간이 다 마찬가지인데, 이에 대한 여러 가설, 설명이 과학자들 사이에서만의 언어, 소통으로 그친다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카데미즘과 대중의 인식 사이에서 언제나 가교 역할을 해 주는 게 저널리즘입니다. 저널리즘은 또한 순수학문과는 달리 독자적인 영역과 존재 의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도 마냥 우습게 볼 수 없는 중요한 지적 중요성을 보유하고 있습니다(이 책 중에는, 저자의 설명, 혹은 비유에 대해, 어느 일본인 저명 학자가 "엉터리!"라고 했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습니다. 물론 친분에서 비롯한 애정어린 농담으로 봐야겠죠). 거의 평생 동안 과학계 인사의 동정, 첨단 이론의 발전상만 취재해 온 아오노 유리 기자의 이 책은, 그래서 우리 독자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기자는 학문과 그 주변 사정에 밝으며, 동시에 일반인의 감각도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커뮤니케이터의 소임은 그래서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 주제가 과학이라면 더욱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 책의 장점은, 이처럼 독자의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학자와 대중 사이의 인식 차이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혹은 학자의 언어인 수학과 일반인의 언어가 너무도 다른 세계에서 놀고 있기 때문에, 이 이론이 뭘 말하는지 적정한 비유로 풀어 주는 과제는 참 어렵고도 중요합니다. 아오노 유리 씨는 대화체 어투, 쉬운 어휘를 써서, 어려운 내용도 최대한 대중이 알기 쉽게 도와 주고 있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도대체 왜 학자들은 이런 어려운 말을 쓰는 걸까? -그 예는 위크보손, 글루온 같은 것입니다. 저자는 "약력 전달자", "강력 전달자" 같은 말로 바꿔 쓰면 얼마나 좋겠냐고 정직한 심정을 토로하는데, 우리 독자는 이런 솔직한 말에 공감하면서 책에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죠. "아, 이분은 딴 세상에서 노는 분이 아니구나!"


첫 째 장은 가장 최근에 이뤄진 놀라운 업적, 집단 지성의 산물인 "힉스 입자의 발견"을 그 토픽으로 삼습니다. 힉스 입자와 LHC 때문에 문외한들도 대거 현대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최첨단의 성과에 대해 관심을 풀어 줘야 대중서가 제 할 일을 다하는 거겠구요.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 언론의 보도 중 가장 큰 문제점은, "힉스 입자는 우주의 탄생 기원을 설명하는 입자"라는 아주 피상적인 설명에서 단 한 치도 못 나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 말도 결국 정확한 이야기가 못 됩니다(왜 그런지는 이 책을 읽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힉스 입자를 설명하기에 앞서, 소립자의 종류와 속성을 하나하나 풀어 주고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은 대체로 물리계를 구성하는 기본 힘을 4개로 들어 이야기합니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그런데, "힘"은 물질 사이에서 작용을 실제로 하기에 그게 힘입니다. 작용을 한다는 건, 그 힘을 중간에서 누가 전달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이 그 힘을 전달하는지 설명을 못 하면, 그 힘의 정체가 뭔지도 모른다는 고백과 틀리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전자기력과 강력, 약력은 그 구조에 대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달자의 정체에 대해 (완전히는 아니라도) 밝혀져 있었습니다.


다만 어려운 건, 중력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중력은 강력, 약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전자기력보다도 더 먼저 뉴턴 시대에 알려진 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는 건, 중력의 크기를 구하는 공식인

에 서 여태 별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중력은 무엇에 위해 전달되는가? 그 속도는 얼마인가? 빛과 같은 속도로 전파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렇게 약한 크기만 가지고 있나? 이에 대해 우리 인류는 뉴턴 이래 별로 나아진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반 면 다른 힘들은, 소립자의 발견과 더불어 어느 정도는 해명이 이뤄졌죠. 유독 중력만 베일에 싸여 있다는 건, 어쩌면 여태 애써서 알아 온(혹은, 그렇다고 착각해 온) 다른 소립자 이론들마저 다 틀린 게 아니냐는 의심을 가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물리학자들은 지금까지의 방법론을 고수할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CERN이 그토록 엄청난 비용을 들여 이번 기획을 시작한 건, 그런 절박한 이유가 잇었던 거죠. 특수한 환경에서 애써 시도해 본 결과(중력 초기 형성은 특수한 환경의 산물이었으므로), 백 퍼센트 확신은 어렵지만

중력 전달자 역할을 한다고 가정하면 잘 들어 맞을 것 같은 입자가 어렵사리 검출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저자는 "그럼 힉스 입자 하나만 남기고 그간 모조리 발견되어 온 소립자에는 어떤 게 있는지, 그것들의 성격은 무엇이고 서로 관계는 어떤지, 이것들을 처음 발견한 과학자들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자세히 풀어 줍니다. 다른 건 다 나왔는데, 하나 빠진 조각인 힉스 입자만 여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마치 직소 퍼즐을 풀듯 자발적인 호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소립자의 발견 과정이 역사 책을 읽듯 시간순으로 설명되어 있어서, 여태 과학책을 암기 과목 공부하듯 외워 온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쉽게 풀어 주는 일은 다른 이도 할 수 있고, 심지어 더 큰 권위를 가진 과학자가 시도한 작업도 있습니다. 이 책만의 장점이 있다면, 저자 자신이 직접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취재한 그 유명한 과학자들의 개성, 매력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한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겔만은, 소립자에 대해 처음으로 "쿼크"라는 이름을 붙인 분이죠. 저자는 실제로 이 겔만을 만나서, 친분도 쌓고 많은 가르침도 들었다고 합니다. 특히 흥미로웠던 건, 저자를 처음 만날 때 "Green field!"라고 저자를 부르는 겔만 박사의 모습입니다. 아오노를 한자로 쓰면 靑(아오)野(노)인데, 이걸 영어로 옮기면 그린 필드 아니겠습니까? 겔만 박사는 일본인인 저자도 몰랐던 하이쿠를 줄줄 읊어서 빼어난 소양을 과시했는데, 사실 그런 천재는 잘난척하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오는 제스처일 뿐이겠죠. 순만 쉬어도 교양과 지식이 나오는 경지!


이 책에서 아쉬운 건, 역자가 "양자(量子, quantum)"과 "양자(陽子, proton)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후자는 우리 물리학 용어에서는 "양성자"로 고쳐쓰고 있고, 이미 교과서에서 확고히 굳은 말인데도, 역자는 일본 용어를 그대로, 한자 병기도 없이 대로 쓰고 있어 혼란을 더합니다. 책 어느 부분에는 심지어 "양자(兩者)"까지 나오는데, 이는 우리 말로 "둘, 두 가지"로 쓰면 그만인 걸 굳이 이렇게 쓸 이유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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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그파이트 - 애플과 구글, 전쟁의 내막과 혁명의 청사진
프레드 보겔스타인 지음, 김고명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애플과 삼성의 소송 대전이 연일 지상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습니다. 급기야는,  두 달여 전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이 쓰려져서, 6월 26일 현재 아직도 의식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 비상사태가 이어질 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프레드 보겔스타인이라는 이 저널리스트는, 우리 대중이 보지 못하는 거대한 전쟁의 이면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합니다(최소한 본인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삼성이건 애플이건 저렇게 법정에서 지지부진한 싸움을 이어나가다간, 둘 다 천문학적 소송 비용의 부담 때문에, 설사 어느 한쪽이 소송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말 그대로 상처 뿐인 영광만 안을 뿐, 기업의 건전한 재무 운용에는 치명타를 입을 것 같습니다. 바로 이때 나타난 보겔스타인은 "거 보라"는 듯, 세상 만사에는 이면의 작동 원리가 있으며, 필요 이상으로 거창하게 번지는 싸움에는 뭔가 이유가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는 마치 소설 한 편(여기서 소설은, 굳이 장르를 말하자면 "팩션"이 되겠죠?) 을 써 내려가듯,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이해력 달리는 독자를 채근해 가며, 마치 눈 뜬 장님처럼 진실에 어두웠던 우리를 준열하게 다그칩니다. "보이는 게 전부 다가 아니었어!"



그 는 이 싸움을, 다소 당혹스럽게도 "도그파이트"라고 명명합니다. 룰이고 원칙이고 자제고 체면이고 없는, 둘 중 하나가 죽어나갈 때까지 처참하게 벌어지는 밑바닥싸움을 가리키는 말이죠. 확실히, 애플과 삼성은 "정말 두 기업 사이에 타협점이란 없는 걸까?" 같은 의문을 대중 사이에서 불러일으킬 만큼, 도를 넘은 싸움을 법정 안팎에서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인데, 보겔스타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충격적인 진실을 말합니다. "그 싸움은 섀도우 복싱이다. 진짜 싸움은 삼성 뒤에 숨은 구글이 그 한 당사자이며, 애플은 거대한 싸움의 서막을, 일종의 phony war를 통해 비로소 연 것이다. 애플은 구글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이 투쟁을 개시했고, 삼성이 쓰러지면 비로소 진짜 상대가 나올 것이다. 구글은 어쨌든 피할 수 없는 싸움, 아니 어쩌면 자신들이 먼저 도발한 싸움이기에, 막후에서 체력을 세이브하고 있다. 싸움은 이제 겨우 시작된 것이며, 어쩌면 본게임은 아직 시작도 않은 셈이다."




우 리는 우리의 눈이 직접 보고, 최초의 인지 수행에 의해 머리에 각인된 걸 끝까지 더 믿고 싶어합니다. 기업의 총수가 쓰러져서 의식불명이 되기까지 했는데, 그럼 그분은 남의 싸움에 말려들어 자신의 건강과 운명을 희생했단 말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글로벌 기업을 이제 하나 가졌나 보다 하며 내심 으쓱했던 중진국의 국민으로서 다소 처량해지는 느낌도 듭니다. 실제로, 사실상 후계체제로 접어든 삼성에서는 애플 측과 화해의 움직임을 물밑에서 벌이고 있다죠. 만약 싸움이 결국 대리전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면, 맹장이 일선 퇴진한 후에는 전쟁 지속의 동인이 사라질 것이니, 이 관측은 이미 한 방증례를 마련하고 있다고도 보겠습니다.

제 가 책을 다 읽은 오늘, 퇴근길 스마트폰으로 접한 뉴스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구글, 안드로이드를 축으로 세상을 통일하려는 거대한 야망" 뭔가 보겔스타인의 진단, 시나리오가 척척 맞아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에 따르면, 본디 애플은 (비록 자신이 까마득한 선배이긴 하지만) 신생 소프트웨어 업체 구글과 업무적으로, 그리고 인맥상으로 대단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잡스 생전에 구글과 애플은 충돌은커녕, 공개석상에서나 사석에서나 CEO들끼리 유대에 가까운 협력을 주고받았습니다. 비교우위상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각각 맡아 자기 영역에서 차곡차곡 실리를 다지고 있던 두 기업은,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서로가 양립하기에 "이 지구가 너무 좁았다"는 인식 공유에 완전 합의를 이루고, 단지 그 개전이 시간 문제일 뿐인 총성 없는 전쟁 상태에 돌입합니다.

보겔스타인은 탁상의 이론가나 소설가(?)가 아닙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발로 현자을 뛰며 진실과 가십을 대중에게 전하는 저널리스트였습니다. 그가 끄집어내고 신나게 전개하는 가설은, 자기가 직접 인터뷰한 인물, 목도한 사건, 지근거리에서 감을 잡았던 숨겨진 특종 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기자다 보니 사람을 많이 만나고, 온갖 이야기를 그들로부터 듣다 보니 매스미디어에는 감춰지거나 아예 교묘하게 조작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그의 취재수첩에는 넘쳐납니다. 구글 담당자가 처음 안드로이드 안(案)을 꺼내들고 나왔을 때, 업계 관계자들은 "당신 약하셨소?" 같은, 경멸과 당혹이 섞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애플은 한편 MS가 지상에 공룡처럼 군림할 때에도 갖지 못했던 야심을, 아이팟 아이폰의 잇단 성공을 계기로 현실화할 비전을 준비합니다. 보겔스타인이 날카롭게 짚어낸 진실 중 하나는, 진정한 혁신은 동시대 대중의 라이프 패턴을 바꿔 놓은 아이팟이나 아이폰의 개발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문화 생활의 플랫폼 하나를 새로 마련한, 신개념 개인 디바이스인 아이패드였다는 것이며, 이는 사실 애플 측에서도 어느 정도 일이 진행되고 나서야 깨달았을 뿐 철저히 장기 전략의 산물은 아니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구글의 안드로이드 프로젝트는, 단지 성사 가능성이 불투명했을 뿐 처음부터 "지구 정복 로드맵"의 일환으로 태어난 것이고요. 이 두 거인이, 서로가 손에 쥔 도구가 "절대 반지"임을 비로소 실감했을 때,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개싸움이라고 이름은 붙었지만, 내실은 세계를 눈 앞에 두고 지구 곳곳에서 전선을 펼치는 "세계 대전"입니다. 혹은, 중세 유럽 그들의 대륙 지배권을 두고 게르만의 두 명문가 호엔슈타우펜과 벨프 가문이 맞붙었던 대회전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중요한 건 이 개싸움에, 지구 반대편의 이름 없는 소시민까지 나름의 판돈을 걸고 작은 이해관계나마 연동시키고 있다는 사실이죠. 개싸움이란 사실 물주들이 개미를 끼고 벌이는 도박이고, 에이전트로 나선 개들이야 한없이 불쌍한 신세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건곤일척의 "개싸움"에서 싸우는 두 선수들, 아니 개들은, 겉보기로야 무척 여유로운 모습으로 대전을 벌이는 양상, 정확히는 싸우는지 안 싸우는지조차 누가 가르쳐 줘야 알, 고차원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어쩌면 소비 양상과 선호까지 이들 "빅 도그"들의 싸움 국면에 맞춰 조종당하는 우리 소시민들이야말로, 이 "개싸움"에서 진정 피를 (대신) 튀기는 "불쌍한 잔챙이 투견"이 아닐지 생각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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