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으로 삽시다 - 30주년 기념 개정판 이시형 뒤집어 생각하기 1
이시형 지음 / 풀잎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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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에는 인상 깊은 두 구절의 카피가 적혀 있습니다.

"아버지가 읽고, 아들딸에게 권해 주는 책"

"출판사상 최초논픽션 밀리언셀러"


30년이라면 정말 긴 시간이죠. 아마도 30년 전이면, 이 책의 독자는 주로 남성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그 독자가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그 아들 뿐 아니라 딸에게도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해 주는 모습... 우리는 여기서 여성 역시 당당한 사회 경제 활동의 주역으로 부쩍 성장한 현실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쓰여질 무렵이라면, 여성이 계산원, 비서직, 공장 노동 외에 딱히 진출할 곳이 없던 시절이기도 하겠기 때문이죠.


사실 이 책에 적혀 있는 모든 진단과 조언은 현재에 있어서도 유효합니다. 다만, 그 전제가 되었던 사항들은 아직도, 이 책이 쓰여졌던 시절의 사정과 견주어, 불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외국계 회사(처음부터 외국에 소재한 회사 포함)에 근무하는 한국인은 언제나 뚜렷한 공통 패턴을 보인다. 평소에 아무 말 없이 참다가, 갑자기 사표를 내던지는 것이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어 보면, 딱히 하는 말도 없다. 마치,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 주느냐는 식이다. 반면, 정상적인 반응 양식의 직원들은 그헣게 행동하지 않는다. 불만이나 이견이 있으면 그때그때 이의를 제기하고, 만약 직장을 그만둘 일이 있으면 마음을 확실히 정한 후 조용히 주변을 정리하고 퇴사할 뿐이다."


어 느 분이 시기적으로 먼저 이 점을 지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고인이 된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위원도 그의 어느 책에서 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위원의 책은 좀더 구체적인 배경까지 거론하고 있었습니다. 주로 중동 건설 현장에서, 외국 업체에 고용된 한국인들이 이런 모습을 공통으로 보였다는 회고입니다. 그 시점은 따라서 1970년대 정도로 짐작됩니다. 두 저자가 모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 외국인들이 지켜 보고 잘 이해하지 못했던, 그래서 지적 대상으로 삼았던 한국인의 사고 방식이 그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공통적이었던 것 아니었나, 대략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평소에 참고 참다가, 어느 시점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을 때 확 폭발시키는 것. 확실히 조직에나 해당 개인에게나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술자리에서 느닷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중정부장도 그런 유형에 해당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30년 전에는 분명 이런 분들이 많이 계셨을 겁니다. 주변의 눈치를 보고, 실속도 없는 체면을 중시하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생각에 제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못마땅한 게 있어도 억누르고 참고,... 하지만 지금 세대, 한창 경제활동에 자 신의 정력과 에너지를 쏟아 붇고 있는 층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들은 대체로, 직장에서도 선배, 상사에게 제 할 말을 하는 편이고, 기획과 아이디어를 위한 회의에서도 이른바 "튀는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편입니다. 이런 직원을, 직장 내부 분위기의 다양성을 보존한다는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키우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속담에서 말하듯 "벙어리 냉가슴 앓는 유형"도 여전히 주위에서 많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다만 그런 사람들은, 이제 평균적인 주변 사람들로부터 "저분 저런 스타일로 사회 생활 하기 참 힘들겠다." 같은 동정을 얻는 처지라는 게 30년 전과는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달라진 건, 이시형 박사님의 이 책을 30년 전에 읽고, 당대인들이 각성했고, 그들이 낳아 키운 자녀들이 그런 구태의연한 모습을 어려서부터 습득할 기회 없이 일찌감치 마인드에서 지워 버렸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공헌이랄까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시형 박사는 이런 사례로부터, 다음과 같은 취지의 결론을 내립니다.

" 그만둔다는 액션을 거창하게 벌이는 사람은, 알고 보면 정반대로, 그 속마음이 '난 전혀 떠나고 싶지 않다'는 걸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가 제발 나 좀 잡아 줘 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행동은 주변과의 공존을 염두에 두지 않고, 모 아니면 도라는 심리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 주든가, 아니면 모든 관계를 종료하자는 자폭적 선택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가 변했다고는 하나, 이 말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모름지기 훌륭한 의사가 되려면, 인체생리학적 기술 지식에 밝은 것만으로는 부 족하다는 게 이 점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사람의 심리를 알고, 성격적 특징을 알아야, 특히 정신적 병리에 대한 진단을 정확히 내릴 수 있겠습니다. 병이란 따지고 보면 마음에서 유래하지 않는 게 없습니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도 의지의 강인함, 정신의 명철함으로 기사회생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소한 질병으로도 크나큰 상심 끝에 생존의 의지를 놓아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명의는 인간의 속마음을 알고, 그를 꿰뚷어 보아야 합니다. 30년 전에 이미 이 박사는, 한국인이 가장 보편적으로 "앓고 있는" 심리적 병통을 이처럼 속시원하게,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었던 거죠.



이 책에는 이런 재미있는 일화도 전합니다.

" 어떤 사람이 친구네 집에 가고 있었다. 가는 도중 한 나루에서 그 친구의 아들을 만났는데, 분명 그 친구의 아들이 탄 배가, 강 한복판에서 가라앉는 걸 보고 만 것이다. 친구네 집에 당도해서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친구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말았다. 그런데 친구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아닌가?

- 이 친구야, 내가 봤는데 그 배에서 아무도 살아 나오지 못했어!

- 알겠네. 그런데 그런 배라면 아들놈은 아마 타질 않았을 걸세.

그 사람은 흉사(凶事)의 결과를 우길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그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과연 얼마 후, 친구의 아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그 사람이 곡절을 물으니,

-처음에 탔었습니다만, 사공이 자꾸 승객을 태우는 걸 보고 도중에 내렸습니다.

틀림없이 화가 일어나지 싶어서요.

태연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는 이 일화를 처음 읽었습니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나, 아버지만한 아들이 없구나, 같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이시형 박사님은 전혀 뜻밖의(저로서는) 결론을 내리고 있더군요.


" 보통 어려운 상황에서 무작정 버티는 사람을 강하다고 하나, 천만의 말씀이다.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눈을 감아 버리는 나약한 사람이라서, 과감하게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강한 사람은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단호하게,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나 버린다."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으로 적합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지극히 타당한 결론입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불리한 상황을 개선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뭉개고"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이런 경우는 거지반 실패로 귀결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시형 박사님의 강의를 들어 본 분은 아시겠지만, 경삳도 억양이 아주 강한 어조죠. 저 도 가끔 경험하는 일이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일부러 큰 소리로 사투리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른바 보상의 기전으로, 스스로 "촌놈 콤플렉스"가 강한 탓에 이런 과잉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TS 엘리엇의 예를 들며, 전성기에 그토록 세련된 귀공자의 분위기를 풍겼던 그이지만 대학 입학 초년 시절에는 촌티가 줄줄 흐르는 신세였다는 겁니다. 이를 감추려고 일부러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메뉴를 주문했는데, 도저히 그 맛을 감당할 수 없어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는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거죠. 이 박사님 자신이 지방 출신이었고, 그런 모종의 "촌놈 컴플렉스"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분이기에, 이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30년 전에는 기세 좋게 발전하는 신흥 개발도상국의 수도 서울에, 청운의 꿈을 안고 갓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이 대부분 시골 출신들이라, 아마 이런 이야기는 한 구절 한 구절의 독자의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30년이 지났습니다. 행동이나 말하는 투가 자연스럽지 못하고, 열등 컴플렉스에 짓눌려 있고, 제 의사를 정직하게 표현 못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이 런 책은 여전히 좋은 가르침을 전달해 줄 것입니다. 몇몇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전 국민이 오랜 농경사회의 관행, 못 살고 못 입었던 데다 외국의 식민지로 추락하는 치욕까지 과거에 겪었던 상황에서, 30년 전의 한국이라면 이 책은 거의 국민 교과서의 노릇을 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지금은 최소한, 배짱이 부족해서 사회 생활에 곤란을 겪는 사람은 많이 드물어졌습니다. 배짱이 부족하기는커녕, 제 분수와 능력도 모르고 무모하게 아무데나 함부로 나서다, 종전보다 훨씬 못한 신세로 떨어지고, 가뜩이나 문제 많던 멘탈에 다른 문제까지 더하는 사람도 보곤 합니다. 이 책에 나와 있는 많은 명제들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대로 실천에 옮길 가치가 충분합니다. 다만, 세상을 보는 눈이 긍정적이라야 하고, 현실 인식에 왜곡이 없어야 하며, 유 아적 망상에서 벗어난 건전한 상식을 가진 마인드, 이것이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구비되어야 할 전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세울 것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골방에서 이 책만 읽다가, "아 배짱으로 살아야겠구나" 하며 세상으로 뛰쳐 나왔을 때의 그 결과란, 자신이나 사회에 더 나쁜 해독만 끼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의 영향 중 하나일지는 모르겠지만, "배짱만으로 사는 사람"이 너무 많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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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시작될 때 - 장기적 사고로의 가이드
매그너스 린드비스트 지음, 황선영 옮김 / 생각과사람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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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매그너스 린드비스트는 그 할아버지代부터 미래학을 연구해 온 학풍을 지닌 집안 출신이라고 합니다. 미래란 말 그대로,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대입니다. 또한, 매그너스 린드비스트 자신과 그 할아버지가 주시하는 "미래"란, 둘이 서로 같은 내용과 범위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도 매우 당연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란 특정 시점에서 즉흥적으로 판단하는 관점보다. 더 오랜 세월을 두고 과거로부터 관찰해 온 눈이 더 넓은 폭과 성숙한 시야로 전망할 수 있다는 점도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할아버지代 부터 차곡차곡 쌓여 온 미래학 연구의 내공을 어떤 식으로건 상속받은 저자라면, 그 당대를 출발점으로 삼은 다른 연구자보다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 놓이며, 우리 독자들도 더 권위 있는 인식을 그로부터 힉득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의 부제는 "장기적 사고로의 가이드"입니다. 바로 이 부제가, 여타의 미래학 서적과 이 책이 질적으로 차별되는 면을 잘 알려 줍니다. 종 래 다른 미래학 서적은, "미래에는 이러이러한 사건과 발명, 풍요로운 생활상이 우리 주변에 잔뜩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같은 장밋빛 전망만을 제시하거나, 반대로 별반 근거도 없이 디스토피아 비전만을 나열하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 린드비스트의 책은, "미래를 어떤 방법으로 체계적으로 예측하고, 아울러 우리가 속한 현재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는 방법이 무엇이지"에 대해 보다 많은 비중을 할애하여 이 책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물고기를 입에 넣어 먹여 주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다른 책들과는 달리, "왜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게 (미래학자들이나 직접 이해관계자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지"에 대해, 보다 체계적이고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이유로 들고 있는 사항들을 잠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순환형 사회에서 진보형 사회로의 이행

이 사항은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좀 가슴 아픈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 동양 전통 사상은 언제나 회고적이고, 과거의 이상시대를 전제로 하여 타락한 현재를 교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단조로운 농경 사회의 반복적 생활 양식이 모두의 사고를 지배하는 분위기에서, 기술적 산업적 진보가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던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저자가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순환형"과 대립되는 "진보형"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실 분명합니다. 과거를 되돌아볼 필요가 감소한다면, 그 빈 자리를 무엇이 메꿀 수 있겠습니까? 미래를 내다보는 일은, 이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필수 과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 운명이 아닌 기회에 의해 인도되는 것

저 는 이 장을 읽으면서도, 마치 저자가 우리 동양 사회를 염두에 특히 두고 서술한 것이 아닐까 하는 약간의 착각을 할 만큼 자극을 받았습니다. 모든 생활상이 고정된 패턴을 염두에 두고 이뤄지는 농경사회의 모습이라면, 개인은 자신이 보유한 재능과 자질이 어떤 것인가 하는 요소보다는, 출신 집안의 성격과 본질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물론 그런 낡은 구조가 아닙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다름 아닌 자신의 계발과 생존을 위해 중요한 task가 되는 것입니다.


3. 다양한 선택 가능성의 대두와 이에 따른 복잡성의 출현

현 대는 인류가 굶어 죽는다든가, 추위와 자연 재해 따위에 속절없이 노출된다든가 하는 원초적 위험을 극복하지 못한 단계가 아닙니다. 즉. 기본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된 상태에서, 서서히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비교적 여유 있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여유가 생기면, 현재의 주어진, 고정된 조건만에 얽매이지 않고, "나 자신이 앞으로 변화할 수 있는 모든 선택안들"에 대해 느긋한 주시를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는 풍요에 그치지 않고, 사회를 잘 작동하게 하는 기본적 메커니즘의 복잡화와 세분화를 유발합니다. 개인은 이런 고도로 발달된 구조가 요구하는 수준에 적응하게 위해, 이전 세대가 알던 지식보다 훨씬 높은 층위의 전문 기능으로 무장해야만 직장에서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어느 정도 분명해졌다고 보고, 이제 "어떤 미래"를 바라보고 유의해야 우리의 이런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다섯 가지 정도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런 미래의 속성을 파악하는 일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미래가 시작될 때"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어디부터가 "미래"이며, 어디까지가 "현재"인지를 구별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1. 느리고 점진적인 미래 - 아 무리 급격히 발전하는 미래상이 설사 확실시된다고 해도, 미래가 한꺼번에 이틀씩, 혹은 일년치가 닥쳐 오는 일은 없습니다. 미래는 언제나 하루 단위로만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말은 재미있기도 하지만, 핵심적인 진리를 깨우쳐 주기도 합니다. 과거는 언제나 엄청난 더께로 우리에게 놓여져 그 벅찬 이해를 강요하지만, 미래는 누구나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할당량으로 공평하게 우리를 찾아 오죠. 이런 까닭에 우리는 그 변화의 점진성을 종종 무시하며, 느린 변화를 "존재하지 않는(않을) 변화"로 착각하기까지 합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증거의 부재"를 "부재의 증거"로 착각한다는 멋진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아직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음이 증명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뜻이겠죠?


2. 빠르고 예상할 수 없는 미래

이건 앞에서 논한 것과 정반대의 속성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둘 다 타당한 사항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1980년대의 히트작 영화 <터미네이터>를 들고 있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감독 짐 캐머론이, 호텔에서 임시 기거하며 먹을 것도 채 챙겨 먹고 있지 못한 시점에 느닷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아이디어나 요긴하고 기발한 발상은 이처럼, 불시에, 전혀 준비 안 된 우리를 방문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현재의 소속물이 아닌 미래의 전유물입니다.


3. 실제의 미래, 상상 속의 미래, 절대로 다가오지 않는 미래

실 제의 미래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현재와 밀접하게 닿아 있는 최근접의 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미래는 미래라기보다, 어느 정도 현재에 가까운 속성입니다. 이런 미래는 현재의 패턴을 어느 정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에, 예측의 기술적 노력이 상대적으로 불필요한 대상이기도 합니다.

반면 우리가 "미래"라고 하면 대뜸 떠올리기 쉬운 게 바로 "상상 속의 미래"입니다. 이런 미래는 "백일몽"이라는 다른 말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이런 미래에서는 상상 속에 불가능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건설적인 착상과 계획을 위해서는, 이런 불확실한 경계보다는 보다 구체화한 어떤 전망이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절대로 다가오지 않는 미래"는 그 자체로 패러독스입니다. 하지만 하루살이에게 한 달은 그의 인식이 미칠 리 없는 억겁의 세월이나 마찬가지이듯, 우리 인간 역시 38억년이라는 지질 시대의 긴 호흡을 가늠할 길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에게 지나치게 긴 시간의 단위는 역시 "결코 우리가 맞이할 수 없는 미래"인 셈입니다. 억 년의 단위로 가면 우리 자손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상에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생물이 존재한 게 불과 얼마 전인지 생각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미 래는 고정된 실체로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거나, 허황한 공상의 요소로 채워진다거나, 반대로 철저히 무시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다룰 수 없습니다. 과거와는 현저히 변화된 방식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현재, 그리고 바로 인접한 미래를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언제나 미래를 염두에 두는 방식"을 체질화해야 합니다. 이 책은 그런 사고와 태도의 본질과 실제 적용례를 잘 풀어 주고 있습니다. 분량은 불과 200여 페이지를 넘지 않지만, 다 읽는 데에 천 페이지 볼륨 이상의 시간이 걸린 건 개인적으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속이 꽉 찬, 몇 번을 두고 거듭 읽어도 모자람이 있는 깊이 가득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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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 천황을 맨발로 걸어간 자
김용상 지음 / 고즈넉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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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정도전일까요? 저자 김용상 선생의 말을 빌리면 이렇습니다.

"그가 역성 혁명의 주인공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민본 정치가 지금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정도전이 40초입을 들어서고, 이성계가 중년의 고비를 훌쩍 넘을 무렵, 함남 함주에 진을 친 그 무장(武將)을, 기력과 지력이 팔팔한 유생이었던 그가 몸소 찾아나서 역사적인 첫 만남을 갖는 일에서 그 시작을 잡습니다. 역 사서에는 이 만남에서 의기투합을 이룬 두 사람 간에, 단지 지나가듯 던지는 "이 군사를 가지고 무엇을 이루지 못하겠습니까?"란 질문에 그저 못 들은 척 깊은 속내를 간접으로 내비치는 광경만이 펼쳐졌음을 암시합니다. 작가 김용상 선생은, 여기에 잔뜩 상상을 불어 넣어, 마치 유현덕과 제갈공명의 운명적 대면만큼이나 멋진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첫 장면의 임팩트가 너무 강렬했던 탓에, 이어지는 이야기들, 적잖은 흥미 요소와 밀도를 지닌 내러티브가 다소 매력이 감했다는 느낌이 들 만큼이었죠. 하긴 동아시아 작가들의 아쉬운 점 하나가, (야마오카 소하치의 <덕천가강>도 그렇지만) 강렬한 인트로의 아우라를 종반 내내 이어가지는 못한다는 점이기도 하죠,. 으레 결말은 인생만사 일장춘몽 아니던가 투의 영탄으로 마무리짓는 관행도 그렇구요. 하긴 실제 역사가, 그 푸른 청운의 이상이 만개하듯 실현되는 해피 엔딩이 아니었던 까닭도 있어서이겠지만 말입니다.


정도전은 실제 역사 기록을 보면, 열혈 개혁가이자 독불장군형 실무가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보통은 학문적 지식의 바탕이 깊지 못한 때가 많은데, 정도전은 그렇지도 않았다는 게 특이합니다. 태조가 말년에 이르러 "유종공종(儒宗功宗)" 이라는 현판을 친필로 써서 내려 줄 만큼, 그는 조선 건국에 있어 그 누구의 뒤에도 서지 않을 만큼의 공헌자요, 아직 조선풍의 성리학 도그마가 중국의 그것을 모방하는 수준에 그칠 때 대담하고 창의적인 응용론을 전개한 파이오니어였습니다. 문제는 우리 동아시아에서, 이처럼 재능과 결기가 함께 충천하는 유형의 인물은, 언제나 그보다 못한 삼류의 인물들에 의해 견제를 받곤 했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개중에는 기술도 변변찮은 돌팔이류의 소인배가 빚은 망상장애적 중상 모략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했던 사실마저 있습니다.


소설의 제목은 "정도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 상당 비중은 이성계의 행적을 다루는 데에 할애되어 있습니다. 이성계는, 물론 황산 대첩. 對홍건적 전투 등에서 왜구를 격퇴한 크나큰 공적을 세운 인물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이후의 생애, 즉 위화도 회군에서부터 기득권 권문세족과의 정치 투쟁, 정몽주 격살(아들 이방원에 의해 주도된), 공양왕과의 마지막 "동맹"을 위한 만남 약속에서 대왕대비의 폐위 교서 발부까지, 숨막히듯 전개된 고려사 폐막의 무대를 박진감과 설득력 있게 묘파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특히 돋보였던 부분은 "위화도 회군"을 다룬 파트였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의구심을 가졌던 부분은, 전군(全軍)을 요동경략에 몰아 주고 왜 역쿠데타에 대한 대비를 우왕과 최영이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는데요, 소설을 읽어 나가다 보니 그 과정이 정말 그런 식으로 흘러갔겠다 하는 납득이 되었습니다. 이성계를 찬탈자, 배신자, 역모자로 보면 이런 식의 서술을 하는 작가의 태도에 반대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이성계라는 인물의 성격이, 교활하고 치말한 이중 플레이를 즐기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순리를 따르고 체면을 중시하되 주어진 책임은 구태여 마다하지 않는 후덕한 무인에 가까웠겠다는 생각에서, 작가의 시선과 통찰에 수긍하게 되더군요. 정도전이 사불가론 문언을 일러주는 대목은 약간 억지스럽기도 했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측근 중 그 아니었으면 과연 누가 임무를 맡았겠습니까?


우왕은 방탕한 행실로 폐위와 국망을 자초한 인물이었지만, 머리를 쓰는 품새는 마냥 뒤떨어진 주제를 면한 정도는 되었나 봅니다. 이런 진단은 극중 인물 이성계와 정도전의 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즉, 언제나 그 술수와 수단을 안심할 수 없는 이인임을 제거한 후, 딴 생각 없는 최영을 느닷 국구(國舅)로 모시고 그 정치적, 군사적 위세에 왕권을 의탁하겠다는 속셈, 나아가 좋은 말로 일단 신생 제국 명의 수뇌부를 안심시킨 후, 북원과의 대치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서 요동을 치겠다는 구상은 나름 노련하고 앞뒤가 맞는 행보였습니다. 문제는, 큰 그림만 그럴싸했지 실천론이 부재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딱히 역모의 의도나 개인적 reluctance의 태도를 지녔었다기보다, 아 하고 싶어도 할 방도가 없는데 어쩔 것인가 하는, 상황론적 논리에 크게 의존했고, 여기에 현장에 동원된 군심(軍心까지 업은 채 대세와 순리를 따르는 선택을 취했다는 게 작가의 의도인 듯하고, 독자로서 저도 그 무난한 서술에 동감을 표하게 되었습니다. 


우 왕은 이후, 대담하게도 두 군부 실권자 조민수와 이성계를 암살하려는 책동을 꾸미는 걸로 소설에 나옵니다. 소설의 전체 구상에 비추어 무리도 아니겠지만, 이 대목에서 정도전이 한몫을 합니다. "자택에 머물지 말고 즉시 가족을 동반하여 군영으로 피신하시되, 조민수에게도 알려 주십시오." 여기서 기막힌 대목은 정도전이 조민수에까지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는 것입니다. 이 한 수로 인해 사후 조민수를 숙청하는 작업이, 배신과 술수가 아닌 정당한 행보라는 다소의 명분이 얻어지는 거겠죠.


많 은 사가들이 이야기하기를, "폐가입진"을 명분으로 내세우려면, 왜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웠는가, 처음에 없던 구실를 끄집어낸 것으로 보아 명백한 역심이 이미 그 시점에서 드러난 바다, 이런 주장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유교적 사상이 지배하던 시기, 성리학의 정착 여부를 떠나 나라님의 성을 신하가 바꾸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일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나 봅니다. 그런데, 이 소설의탁월한 점은, 조민수와 이성계가 이미 회군 당시에 "진짜 왕씨로 하여금 후사를 잇게 하자."는 합의를 군중에서 본 것으로 나옵니다. 이런 합의를 나중에 이색과 결탁한 조민수가 깬 것으로 나오죠. 작가의 생각에 따르면, 이성계는 이미 우왕의 출신 성분의 진정성에 대해 강한 의심을 가졌으며, 더군다나 우왕은 의심의 여지 없는 신돈의 태생으로(사적 근거는 아직 없습니다), 이인임이 전횡을 위한 방패막이로 내세워졌을 뿐인 존재라는 거죠.


정도전은 이 소설에서, "최도끼"라는 암살자의 마수로부터 이성계의 목숨을 한 차례 구하는 걸로 나옵니다. 그 디테일도 흥미롭습니다. 일단 간자(스파이)를 상대 진영에 심어 두고, 약한 단서 몇으로부터 암살의 구체적 계획 후보군을 짐작한 다음, 범위를 좁혀 나가며 거사 당일에 현장에서 손을 쓴다.. 마치 현대 국가의 경찰, 정보부에서 테러를 사전 진압하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아니면 명탐정의 행보라고 해도 좋습니다. 작가의 무리한 상상이 아니라, 탁상공론을 떠난 실무에 매우 능했던 정도전의 역량(사료에도 잘 드러난)에 비추어 보아 충분히 개연성을 갖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정도전은 이방원의 손에 의해 죽습니다. 아직 여리고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소년 급제 시절에 처음 방원을 만난 정도전은, 적개심이나 반발감과는 아주 먼 친밀한 감정으로 그와 교유하게 됩니다. 소설에서 젊은 방원은 정도전에게 구체적인 경우마다 연장자, 선배로부터의 가르침을 청하고(이 소설 몇몇 대목에선 정도전을 "스승님"으로 칭하기까지 합니다), 대체로 그를 깍듯이 섬기지만, 우리가 잘 알듯 이후 개국될 신생국가에서의 구체적인 헌정 방향을 두고 생긴 대립의 골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갈라서고 맙니다. 작가로서 다소 내키지 않으셨는지 정도전의 파란 많은 생애 그 마지막 암살 장면은 이 소설에서 다뤄지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는 1342년생 설을 따르고 있지만, 학자에 따라 1338년생을 취하는 입장도 있습니다. 만약 후자라면 정도전은 정몽주와 동갑이 되고, "주군" 이성계와 큰 나이 차도 없습니다. 동 갑인데 왜 정몽주에 비해 언제나 승진이 늦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외조모 가계의 천출 이력이 언제나 그의 발목을 잡았다는 말로 설명이 가능하긴 합니다. 그의 강퍅한 성품도 이런 출신 성분 컴플렉스에서 비롯했다는 시각까지 끼워 넣으면 더 설명은 매끄럽습니다만, 소설의 입장은 그리 분명하지만은 않습니다.


정몽주는 과연 이후의 유교 중심적 사고 체계에서 언제나 고정된 이미지로 그려지듯 과연 순수한 충신이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역시 논란이 많습니다. 이 소설에서 잘 묘사되듯, 그는 처음부터 위화도 회군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심지어 우, 창 두 왕을 폐출하는 소위 폐가입진론에까지 적극 동조하다가, 다만 역성 혁명을 위한 최후의 단계에서 신진 사대부 세력과 틀어졌을 뿐입니다. 이것은 이 소설만의 입장이 아니라, 실제 사료를 냉정히 추적하면 거의 누구가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죠.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대단히 빼어난 유학자였을 뿐 아니라, 명 태조 주원장에게조차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을 만큼 유능한 외교관이기도 했고, 명 사신 노릇을 수차 해내고 그 과정에 죽을 고비도 넘길 만큼 실무가로서의 강한 면모도 충분히 보였다는 점이죠.


소 설에서 하나 아쉬운 점은, 정도전 하면 떠오르는 하나의 테마인 "요동정벌론"이 다뤄질 무대를 마련하지 않은 채 종결을 짓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복선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라서, 명 태조 주원장의 대단히 볼품 없는 풍채를 떠올리며(실제로 그가 사신길에 봤으니만치 가능한 일이죠), 우리 주군이 저 자리에 곅신다면 최소한 그 모양새로는 얼마나 더 잘 어울릴까를 상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이 장면이 어디까지나 고려의 보위, 신 왕국 창건을 염두에 둔 것일 뿐 저 먼 대륙의 천자 자리를 염두애 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 소설의 가장 건강한 점은, 역성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농민, 백성의 요구를 정확히 알고, 토지 소유 제도의 모순을 혁파했으며, 시스템의 전면적 재정비를 시도하여 민중의 니즈를 충족했던 덕분이라는 점을 명확히 그려 주고 있다는 겁니다. 혁명은 불장난도 아니고, 현실을 모르는 돌팔이가 자기 합리화의 방편으로 둘러대는 백일몽도 아닙니다. 정도전의 위대한 점은 언제나 구체적인 현실에 출발점을 둔 채, 위대한 비전을 그려낸 데에 있고, 이 표현력 풍부한 소설(맛깔난 우리말을 잘 구사하고 있죠?)은 그 점을 독자에게 새삼 확인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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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은 차라리 바보인 게 낫다 - 귀를 닫고 사는 리더들을 위한 작심 발언
스즈키 다카시 지음, 민경욱 옮김 / 북클라우드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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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 초기 불량품에 대한 보고를 받고서, 아주 작심하고 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불량품 화형식을 갖겠다. 모든 불량픔, 나아가 동일 라인에서 생산된 미검사 제품도 모두 끄집어내어서 쌓아두고, 임직원 막론하고 전원 현장에 도열하게 하라."

무 더기에 불이 붙으니 그 냄새가 이루말할 수 없었지만, 총수의 서슬에 감히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그때까지만 해도 세계 일류 브랜드하고는 천지차이가 있던 제품만 만드는 게 고작이었던 삼성맨들은, 뭔가 큰 충격이 자기 영혼을 관통하는 걸 느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 순간을 회고하면서, 이 충격적인 이벤트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삼성이 세계 가전을 제패하는 일은 없었으리라고 말합니다.


특 히, 실속과 치밀함, 반듯한 회계 정리를 통한 잡손실 극소화를 미덕으로 추구하는 일본에서, 경영자가 만약 이런 행태를 보인다면 아마 조롱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 <사장은 차라리 바보가 되는 편이 낫다>의 저자인 스즈키 다카시 에스테 회장은, 바로 저 위의 이건희 회장의 일화에 나온 바와 매우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기업의 재고 중에는 곧 소매상에서 고객을 맞아 제 임자에 넘어갈 것이 있고, 창고에서 먼지만 쌓인 채 회사의 주름만 더하는 이른바 "악성 재고"가 있죠. 스 즈키 회장이 갓 취임했을 때, 서서히 전망이 상실되고 형편이 기울어가는 이 회사의 창고에는 이런 악성 재고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회사의 명색은 화려해서 도합 860종의 아이템이 유통된다고 카랄로그에는 과시했지만, 정작 유통이 되는 물품은 그 중 1/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회계 원칙을 아시는 분들은 짐작하겠지만, 기업에서 재고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무시할 게 못 됩니다. 더군다나 악성 재고는, 그 재고가 남아 있는 동안은 재고자산으로 카운팅되어 대차대조표의 차변에 엄연한 자산으로 기록됩니다. 그 실질은 기업을 좀먹는 악성 종양이나 마찬가지인데(앞으로 판매의 전망이 없다는 점에서도요), 숫자로는 회사의 재무 상태를 실질보다 나아 보이게 하는 착시 효과까지 유발했으니, 스즈키 사장(당시 갓 취임)의 눈에는 미워도 이보다 미운 게 없었을 텝니다. "당장 다 갖다 버려!"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나도 이 명령은 수행되지 않았습니다. 사장이 고용사장이라 일선에 일일이 영이 먹히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가 되고, 어쨌든 회사의 라인에서 아깝게 생산된 물품인데 버리긴 왜 버리느냐는 반발심도 있었습니다.


"그거 버리는 비용이 더 듭니다."

"고물상에 팔아도 몇 푼은 건지겠습니다."

"유통 라인 중에는 그 아이템이 없으면 아예 거래가 끊기는 곳도 있습니다."


마지막 말에 스즈키 사장이 발끈했습니다. "아 그래? 내가 직접 그 소매점에 전화를 해 보지!"

결과는 역시, 직원이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도 상품은 직원들의 정성과 땀이 밴 것들이라, 누가 쉽게 버리려고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거짓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하는군요. "이미 버렸습니다."

스즈키 사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거짓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아 그래? 나중에 어디서 한 개라도 발견되면 자넨 내 손에 죽어!

그렇게 아까운 물건이면 물건은 살리고 사람을 좀 버리는 쪽으로 나가 봐? " 이렇게 협박성 엄포도 삼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직원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버리는 비용만 5억 엔 가까이 듭니다."

"내가 지금은 사장이야. 버리라면 버려! 이유가 뭐냐고? 내 취향이다, 왜!"


회 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당시는 거품이 꺼지고 일본 경제가 본격 퇴조기로 접어드는 때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기업회계는 보수주의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시가주의"가 아닌 "취득원가주의"로 해야 기업의 정확한 실상이 잡힙니다. 이렇게 하면 예컨대 보유 유가증권의 가격이 급등해도 그 가액은 취득시의 그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에, 기업의 실질 가치를 일시적으로 부풀릴 우려가 적습니다. 또, 손익계산서상 당기 순이익에 "평가이익의 거품"이 지나친 비중을 차지하는 일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런데 이것은 경기가 활황을 띨 때의 이야기입니다. 스즈키 사장이 취임할 무렵에는, 경기의 극적인 퇴조가 전 일본을 지배할 무렵이라(우리도 마찬가지였죠. 마찬가지가 아니라 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 듯 더했습니다. 바로 외환 위기 시절이니까요), 취득원가주의를 고집하면 바로 그게 과거의 거품을 반영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스즈키 사장이 제일 먼저 노린 것은(책에는 이런 말이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만), 과거 잘나가던 시절의 감상에만 젖어 있던 직원들과 회사 분위기의 환상을 깨버리는 작업이었습니다.


" 버리는 비용만 5억 엔입니다." 그러면 버리면 안 되죠. 회사 운영이 장난인가요? 회사가 아니라 가계의 운영 원칙도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지출 행태를 방치하는 건, 제 몸에서 건강한 피가 빠져 나가는 걸 방관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부친은 아주 예전에 어느 이사님이 현장을 돌며 "니네들, 한전하고 짰냐? 쓸데없는 불을 왜 이렇게 켜고 다녀?"라고 하던 말을 즐겨 회상합니다. 전기요금 아니라 그 흔한 수도요금 하나도, 쓸데없는 지출은 줄이고 또 줄이는 게 운영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스즈키 사장은 "뭐가 됐든 상관 없으니 갖다 버려!"라고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이런 "바보짓"을 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이 책의 제목에 "바보짓"이 들어갔다는 점을 다시 상기해 주세요) 일시적으로 잡손실, 사무 비용이 발생하는 건 차라리 감수하고라도, 소속 직원들의 썩은 정신 상태를 바로잡고 그를 통해 다른 방향에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회복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혁신을 가로막는 것은 무능, 무경험의 비중보다, 과거 한때 잘 나갔던 경험과 쾌감에만 집착하여, 이미 크게 변화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그 타성이 더 무섭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스즈키 사장은 이 점을 간파하고, 직원들에게 "이대로는 죽는다!'라는 점을 호되게 깨우쳤던 것입니다. 비록 저자 자신의 입으로는 그 표현을 삼가고 있으나, 실상 하고 싶었던 말은, "악성 재고만큼이나 썩어빠진 니네들 정신부터 갖다 버려!"를 외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맨 위에 적은 이건희 회장의 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엉뚱한 생각입니다만, 스즈키 사장 역시 과단성 있는 성격과 스타일로는, 이 회장에 뒤지는 바 없는 인물이었을 텝니다. 그런데 왜 "화형식" 같은 세레모니를 벌여, 더 확실한 효과를 보려 하지 않았을까요? 에스테가 다루는 작고 소략한 품목이 "화형식"에는 더 적합한 것들이었을 텐데도요. 우선, 스즈키 사장은 오너가 아닙니다. 고용된 사장이고, 더군다나 (책에 나오듯이) 이 회사로 부임한 지(상무부터 시작했습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터줏대감들을 상대로 저 정도면, 그건 대단했다고 봐 줄 만합니다. 다 음으로, 역시 모든 수단에는 비례성 원칙이 통용되어야 합니다. 필요한 만큼만 충격을 주고 끝내야지, 지나친 것은 안 하느니만도 못한 때가 많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저 과격한 일화는 기업 뿐 아니라 해당 업계에 전설로 남아 있는데, 이 시점은 해당 기업(삼성) 이 위기를 맞이했을 무렵이 아니라, 바로 적당히 잘나가고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시점이면 기업의 소유주와 직원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무렵입니다. 직원은 적당히만 해도 현상 유지가 됩니다. 월급만 잘 나오면 그만인데 괜한 모험으로 해직의 리스크를 감내할 필요가 없죠. 반면 오너는 몇 십 년, 백 년을 내다보고 살 길을 도모하는 입장이라, 현재의 무사안일이 미래의 파국으로 돌아옵니다(그 좋은 예가 지금의 SONY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 적당히 잘 나가는 바로 지금"이, 관료주의에 직원들을 매몰시켜 기업의 경직성을 체질로 굳게 할 위기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당시에 극적으로 개선된 체질이, 현재까지도 기업 고유의 생리, 개성으로 남아서 삼성을 글로벌 탑으로 굳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즈키 회장은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장에게 필요한 건, 운과 감과 배짱이다."

기술적인 지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업의 큰 전략적 방향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닙니다.

운 이란 무엇인가. 결국은 실력의 일종입니다. 남들이 무심히 지나치던 사소한 경험도, 소중한 실무적 지식으로 잘 다듬고 체화하여, 한참 지난 후 결정적일 때 의사 결정의 기준으로 척 꺼내서 쓰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별 상관 관계가 없어 보여 "운"으로만 인식되지만, 내막을 캐고 보면 결국 다 실력의 확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전 경험을 무수히 쌓은 후, 아 이럴 땐 대충 이래야 하더라, 이럴 땐 참아야 하겠더라, 같은 "촉"이 발휘되는 거겠죠. 결국은 성실한 사람(성실하기만 한 사람이 아닌)한테 감도 발달하는 것이겠구요.

사장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미덕은 또한 결국 배짱입니다. 안전 위주로 가서는 아무 일도 안 됩니다. 승부를 걸 때 과감히 걸 수 있는 게 리더의 자질이요 책임감입니다.


이 모든 자질은 결국 실전 경험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 스즈키 회장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겉으로 내세우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는 소학교 시절에 일제 패망을 맞이했는데, 학교에 가 보니 그간 배우던 교과서를 모두 먹물로 물들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합니다(이 이야기는 제가 지금 읽는 다른 책인 이시형 박사의 <배짱으로 삽시다>에도 나옵니다). "지금까지 배우던 건 다 거짓이었다." 그 잘난 지식으로 거들먹거리던 어른들이, 하루 아침에 비겁한 변절자가 되어 강자에 꼬리를 흔드는 아첨배가 되어 있더라는 거죠. 그 이후로 그가 마음에 새긴 것은, "말을 믿지 말고, 실상을 눈으로 직접 체크하라."였습니다, 물론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저자는 "자신은 절대 제국주의의 환상에 향수를 둔 군국소년이 아니었다."고 덧붙입니다(군국소년이 무엇인지는, 영화 <더 울버린 (2013)>에서 老 야시다 회장 케릭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저자는 "실용주의.실리주의"라고 부릅니다. 실전만큼 인간의 영혼을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고 생산적으로 바꿔 주는 것은 없다는 생각으로 책을 덮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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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스 이야기 - 세계 거물들은 올해도 그곳을 찾는다
문정인.이재영 지음 / 와이즈베리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겉 모습이 그 내면의 실질을 배반할 때가 많죠. 스위스라는 나라는 요즘 우리 동시대인들에게야 한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관광의 천국과 낙농업의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스위스인들이 오늘날처럼 부유한 경제 형편과 세계적으로 앞서 가는 사회 제도상을 일구기까지는, 바로 한국인들이 겪은 역경과 시련 못지 않은 엄청난 고난의 이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피와 눈물, 그리고 죽음을 각오한 용기를 통해 쟁취한 자유와 시스템이 오늘날의 직접 민주주의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는 스위스란 나라입니다.

평 화로운 외관이 내면을 배반하는 국면은 하나 더 발견됩니다. 이 지극히 안온하고 잘 정비된 국가 내에서도, 휴양지로 유명한 소도시 다보스, 바로 그곳에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여 들어, 직접적으로는 자국과 소속(혹은 소유) 기업의 이해를 조정하고, 좀 멀게는 세계와 지구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머리를 맞대고 중지(衆智)를 모으는 동아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공식 명칭으로는 세계 경제 포럼(World Economic Forum), 대중들 사이에서 편하게 운위되기로는 "다보스 회의"라는 준상설기구입니다. 공식적으로는 UN 경제사회이사회의 옵저버 자격을 갖고 있을 뿐이지만, 이 기구는 그 참여자의 수적 규모나 질적 비중의 기준에서도 압도적이며, 그 실질적 영향력의 비중을 놓고 보면 오히혀 UN의 여타 기구를 능가하는 수준입니다. 세계 주요 국가의 원수급 인사들이 빠짐 없이 참여하며, 회비를 납부하는 굵직굵직한 기업의 총수들 역시 이 거대한 의사소통의 장에 참여함을 큰 명예로 생각합니다.



다 보스 포럼은 지도자들 "그들만의 파티"는 아닙니다. 반서방적 성향을 지닌 국가의 지도자들, 문화적, 종교적으로 소수파에 속한 이들을 대변하는 명망가들, 문학, 예술, 스포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전 인류에 긍정적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재능 있는 개인,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직능 그룹이나 공동체를 이끌 수 있는 촉망 받는 차세대 지도자들까지 포함해서, 실로 지구촌의 얼굴과 영혼을 모자이크로 형성할 있는 멋진 사람들이 모이는 흥겨운 장터의 성격도 지닙니다. 모임의 성격 역시, 엘리트들만의 폐쇄적인 일방통행, 하향식 의사 전달 구조가 아닙니다. 다보스 포럼의 꽃은 "토론의 백가쟁명"입니다. 제아무리 돈이 많고 신분이 뛰어나며 배운 학식이 풍부하다고 해도, 온화하고 적확한, 아름답고 공감 유발적인 진솔한 언어로 상대를 설복하지 못한다면, 다보스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다보스의 축제는 토론, 토론, 그리고 또 토론입니다. 토론만이 인간의 공존적 가치를 확보하며, 그 영혼의 공유적 숭고함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다보스 포럼이 지향하는 가치를 여럿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다중이해관계자 이론(Multistakeholder Theory)
구 미에서는 개인주의와 합리적 사무 처리를 지향하는 실용주의가 발달한 문화적 특성을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Mind your own business란 말로 상징되는, 개별 실무에 있어 철저히 이해관계자(stakeholder)들의 절실한 입장을 대변하여 해당 과업을 마무리짓는 전통은 과거 오랜 시간 동안 자본주의의 발달을 지탱하는 정신적 동력으로 작용해 왔죠. 그런데, 폐쇄적 소수의 이해관계자만으로 이뤄진 문제 해결 과정은, 더 넓은 범위의 공동체에 장기적, 간접적으로 해를 끼친다든가, 나아가 소수의 원 이해관계자의 안위마저 보장할 수 없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각성에서 태동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바로 "다중관계자"입니다. 이해관계는 사슬에 사슬이 물리고 물려, 오늘날과 같은 밀집연쇄적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사회 구조에서는 웬만한 이를 구속하지 않음이 없는 보편적 현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보스 포럼은 그 본질이, 다중 이해관계자가 한 장(場)에 모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취지입니다.


2. 다음으로, 포럼은 그 영역이 "경제"에 속해 있는 만큼, 작금의 현황에서 지상 과제로 대두한 "혁신"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혁신은 다음과 같은 하위 4대 과제로 나뉘어집니다.


①조직 혁신(Organizational Innovation)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앞서 말한 "다중이해관계자"의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종래의 하향식, 폐쇄적, 배타적, 경쟁지향적 조직상으로는 현대의 복합적인 문제와 상황에 적응할 수가 없습니다. 조직이 효율을 지향하려면, 오픈되고 교감해야 한다는 게 절대적 요청입니다. 혁신의 기본은 바로 조직의 전면 쇄신에서 출발한다는 절박한 인식이 모두의 공감을 얻는데, 다보스 포럼은 혁신 논의의 장이지만 바로 그 자신이 혁신 조직의 멋진 실례이기도 합니다.


②토론의 혁신(Interactive Innovation)
앞 서 이야기했듯 혁신 조직의 이상형은 물론이고, 이 다보스 포럼의 근본적인 소통 방식 역시 토론입니다. 종래의 토론은, 발언권의 경직적 배분으로 인해 참여자의 총의(總意)가 진정성 있게 결집되기 힘들었습니다. 토론의 혁신상은 참여자의 진입이 가급적이면 제한을 두지 않고, 가능한 한 모든 참여자의 적실한 의사를 반영해야 하며, 그 토론의 산물이 건설적이고 생산적이어야 하며, 토론의 과정이 합의적 윤리와 규칙에 기반하여야 합니다. 다보스 포럼에서 벌어지는 모든 회의는, 인터넷으로 세계에 실시간으로 공개됩니다. 토론이 과연 혁신을 지향하며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는지는, 인류의 지혜에 의해 즉각적인 검증 피드백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③지식 혁신(Knowledge Innovation)
통 섭을 이야기하는 세상입니다. 학문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고립되고 규격화한 지식은 그 쓸모와 위신이 크게 위축되는 트렌드입니다. 지식은 횡적으로 인근의 경계를 넘어서 정수를 흡수하고, 원격지의 대응점을 찾아 수많은 하이퍼링크 구축을 통해 작용 밀도를 높여야 합니다. 지식은 또한 종적으로 지난 시대의 족적을 반성적으로 겸허하게 스캔하는 과정을 통해 연륜의 깊이를 쌓아야 하고, 먼 미래를 두려움 없이 내다봄으로써 인류에게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양한 배경을 지닌 참여자들의 소통을 통해 그 다양한 실현 가능성이 구체화합니다.


④영향력 도출하기(Impact Driven Innovation)
아 무리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알고리즘이 발견되었다고 해도, 물적 정신적 생산의 과정에서 적시적소에 투입되어 보다 많은 소비자들에게 배포되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영향력이란, 과거의 뉘앙스처럼 귄위, 권력적 관계를 암시함이 아니라, 소통적 친화성의 다른 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다보스 포럼은 앞서 말한 것처럼 특권적 소수만의 잔치가 아닌, 전 인류를 향한 온정적이고 오픈된 의사 소통의 장입니다. 이곳 다보스 포럼에서 시도하는 소통과 영향력은, 그 자체로 혁신적 방법과 본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영향은 언제나 쌍방향적이며, 그 효과는 선(善), 정의(正義), 풍요의 향상과 확산을 기도합니다.


이 책은, 성큼 다가온 국제화, 글로벌화의 흐름을 수도 서울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고루 느낄 수 있는 지금, 또 세대간, 좌우 이념간의 대립을 성장통으로 격하게도 겪고 있는 우리 나라에서, 한창 자기계발에 힘쓰는 경제활동인구, 자신의 장래를 보다 건설적이고 입체적인 방면으로 설계해야 할 학생층에게 권해 줄 만한 내용입니다. 주요 2인의 저자에 의해 서술이 주도되고 있는데, 한 사람은 지긋한 나이의 진보적 지식인이며, 다른 한 사람은 비교적 젊은 나이라고 할 보수주의의 입장에 선 현직 국회의원입니다. 다보스 이야기가 만약 단일 저자의 시각에서 풀어지고 있다면, 아무리 유효하고 정확한 정보를 담아도 독자의 정서적 공감이나 각성을 "임팩트"있게 이끌어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 책은, 명실이 상부했다고할 만큼, 얼핏 교차점이 없어 보이는 대립적인 개성의 두 저자가 번갈아 가며 이 거대하고 매혹적이며 미래선도적인 단체, "마당"의 성격을 저술하고 있고, 경우에 따라 교호적 토론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 다보스인가"를 이해하는 데에 최적의 교재, 도우미였습니다. 두고두고 인상이 남을 멋진 독서 체험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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