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의 손가락이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에, 그러니까 애나의 정신이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을 통해
노래하는 소리에 잠을 깰 때면 그 아름다운 아침 소나타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텅 빈 집에서 혼자 한 달을 살고 나니 그 소리가 너무 그리워 가끔 그녀의 방으로 들어와
침묵하는 기계 뒤에 앉아 뭔가- 뭐라도- 쳐보았다. 그저 다시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첫 여섯 달이 흘러갔다. 바움가트너가 나중에 사라짐 또는 애도하다 미쳐 버린 남자라고
언급하게 되는 시간의 틈, 반년 동안은 그 자신도 대체로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가 소년 시절부터 알고 들어가 살았던 존재와는 다른 존재였다.
그는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비합리적인 충동에 휘둘리는 그 임시 구역에서 괴상하고 어정쩡한 일을
수도 없이 만들어 내 열심히 하면서 바쁘게 그날들을 흔들흔들 통과해 갔다.
p58-59
바움가트러는 그 꿈을 꾸고 애나와 함께 길에 나서 기억의 궁전을 오래 걸어 다녔고,
그러고 난 뒤에는 조심성, 자기 의심, 두려움은 천천히 녹아 사라졌다.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 것 때문에 여전히 혼란스러웠으나, 그것을 삶에 대한
그의 비일관적이고 결함 있는 접근 방식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해석하는 대신,
이제는 그 없다는 것을 긍정적인 힘으로 보고 있다.
p117
책에선 아내 애나를 떠나보낸 노교수 바움가트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남은 이가 살아가야 할 쓸쓸하고도 생생한 고백들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떠오를 때마다
먹먹해지는 울음을 조용히 삼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된 상실의 아픔.
자신의 삶에서 그동안 연대하며 살던 모든 이들의
소중한 관계를 되돌아보게 되는 그는
상실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 과정이 결코 괴롭지만은 않아 보인다.
다시 연결된 마음은 기억이라는 저장고 속에서
다시 하나가 된다.
추억이라는 회상은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생을 더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선물해준다.
그래서인지 아프지만 지겹도록 괴롭기도 하지만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남을 수 있는 건
어쩌면 애도의 시간이 남긴 추억의 자국이
깊이 박혀버려서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이지만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 건
생의 끝에서 발견하게 된 영원한 가치를
폴 오스터는 마지막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나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깊은 여운이 오래도록 가시질 않는다.
영원할 것만 같은 건 인간의 생에서 허락지 않는다.
그러나 온전할 수 있는 건
기억의 파편들이 남아 있다는 것에 희망을 살피게 된다.
그로 인해 삶은 더 찬란하고 아름답게 여겨지고
시작과 끝을 꽃피우는 인생의 축복이 아닐까 싶다.
이같이 아름다운 상실의 기록을 독자들에게 남기고 간
작가 폴 오스터를 오래도록 기억하며 그의 작품을 하나씩 찾아 읽어보고 싶다.
깊이 있는 문학적 사유를 꿈꾸게 만드는
강렬하고 빛나는 작품으로 기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