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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꾼들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5월
평점 :
불평꾼들

이 책을 살펴보기 전에..
제프리 유제니디스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바꾸는, 마술적인 재능을 지닌 이야기꾼.’ [뉴욕 타임스 북 리뷰]
1960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소아시아 출신의 그리스계 이민 2세인 아버지와 영국-아일랜드계 어머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브라운 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1986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과 문예 창작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2년 후인 1988년 첫 단편집을 출간했다. 1991년 권위 있는 문예 계간지 [더 패리스 리뷰 The Paris Review]에 『처녀들, 자살하다The Virgin Suicides』의 일부를 발표해, 그해 그 잡지에 실렸던 단편소설 중 최고의 작품에 수여하는 아가 칸 상(Aga Khan Prize)을 받았다.
첫 장편소설 『처녀들, 자살하다』는 1993년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 도서관 협회(ALA)에 의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지금까지 25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이 작품으로 유제니디스는 1993년 화이팅 작가 상(Whiting Writers' Award), 1995년 해럴드 D. 버셀 기념상(Harold D. Vursell Memorial Award)을 수상하였으며, 구겐하임 재단과 전미 예술 재단의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1999년에는 이 작품을 원작으로 소피아 코폴라 감독, 커스틴 던스트 주연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2002년 9년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두 번째 장편 『미들섹스Middlesex』로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프랑스 메디치상, 임팩더블린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른다. 2011년에는 세 번째 책 『결혼이라는 소설The Marriage Plot』을 발표해 살롱문학상과 프랑스 피츠제럴드상을 수상한다. 30여 년간 단 세 편의 장편을 출간한 과작의 작가이지만, 빈부격차, 가족 해체, 젠더 갈등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부터 청소년기의 일탈, 결혼과 사업의 실패 등 개개인의 삶에 찾아오는 크고 작은 위기까지 동시대인의 삶과 고민들을 예리하게 포착해내어, 오늘날 미국 문단의 주요 작가로 꼽힌다.
『불평꾼들』은 그의 네 번째 책이자 유일무이한 소설집으로, 유제니디스는 이 책을 ‘특정한 주제로 엮이지 않은,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뒤섞인 가방’으로 정의했다. 그의 말처럼 이 책에는 석사 학위 제출 작품 「변화무쌍한 뜰」(1988)과 제니퍼 애니스턴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스위치]의 원작인 「베이스터」(1995), 동료 작가 애니 프루가 ‘미국 최고의 단편’으로 꼽은 몽환적 소설 「항공우편」(1997), 어머니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쓴 「불평꾼들」(2017)을 비롯해, 작가의 30여 년에 걸친 문학 일기와도 같은 다채로운 이야기 10편이 담겨 있다.
[예스24 제공]


퓰리처상, 피츠레럴드상을 수상한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이 책은 총 열 편의 단편 소설이 실린 책이다.
각 단편들마다 다루고 있는 주제 역시 다양하고
하나 같이 차별과 갈등, 위기와 일탈 등의 문제들로
현대 사회의 불편한 시선을 다루고 있어 흥미로웠다.
현 시대에서 고심해 볼 수 있는 주제들로 다양한 욕망을 그리고 있는
인생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유발되는 책이기도 했다.
웃고 넘기기에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은
깊은 탄식마저 느낄 수 있는 책 속 이야기들에 푹 빠져 읽어보았다.
그 중 첫번째 이야기 <불평꾼들>은
늙어가는 자신의 처지를 방관하기도 비관하기도
불평으로 살아내기도 하는 현실적인 모습 속에서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한 고민과 노년기에 겪을 어려움들을
가장 많이 고민해보았던 시간이었다.
"알츠하이머는 아니지만 그 다음 것."
캐시는 델라가 그 용어를 억누르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치매는 좋은 말이 아니다.
그 말은 마치 뇌의 일부를 퍼내는 악령이 있는 것처럼
폭력적이고 침략적인 언사로 들리는데, 실제로 그렇다.
p24
여든이 넘은 델리와 캐시가 남편과 사별 후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남은 생을 보내게 된다.
현실에 그저 순응하는 듯 흘러가는 것처럼 여겼으나
경로를 이탈한 폭주 기관차처럼 병원을 탈출해 시골 마을로 다다르게 된다.
다시 한번 살아 간다는 것과
살아남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해보게 만든다.
"자, 손도끼를 사용할 때야."
기죽지 말고 한번 해보자는 뜻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이누이트 여자들과 공유한 또 다른 자질이었다.
부족 사람들이 칙다야크와 사를 남겨두고 떠난 것은 그들이 늙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불평꾼들이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두 노파는 늘 자신들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투덜거렸던 것이다.
p42
불평도 중독이 될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 이후에 오는 짜릿함 때문에 맛을 들이게 되는 걸까.
나이들면 더 꼰대처럼 구는 게
자신들과 주변을 분리시키고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는 걸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닐텐데
단순히 늙어서 그렇다기보다 중심이 나에게 너무 나에게 서 있어서 그렇지 않을까도 싶다.
이 책은 <두 늙은 여자>란 책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인디언 할머니 이야기와 연결선상에서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은 두 노파는
굶주린 상태로 돌아와 부족을 돌보며 가르친다.
그때부터 인디언들은 절대로 노인들을 남겨두고 떠나지 않는다.
계속해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뜻대로 좀 더 걸어가고 싶었을까.
노년의 고독한 쓸쓸함과 내팽겨쳐진 현실의 안타까움 속에서
뭔가 모르게 마음이 아파온다.
<나쁜 사람 찾기> 역시 결혼 생활의 기대감을 소멸 시키면서도
그런 상실감 안에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차분히 고민해보았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이었다.
"우린 이런 말다툼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해요.
두 분의 불행의 핵심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야 해요.
이런 것들은 표면에만 있는 거예요."
p234
"난 오랫동안 노렸했어요, 찰리.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려고요.
내가 돈을 더 벌면 당신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죠.
우리에게 더 큰 집이 있으면, 또는 당신이 늘 술을 마실 수 있도록 당신을 가만 내버려두면
당신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어요, 찰리.
그리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았죠."
p259-260
아내 요한나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남편의 외도로 파국을 치닫고 평화로움이 깨졌다.
믿음과 신뢰를 상실한 결혼의 실체를
나쁜 사람 찾기의 검거에 성공한 듯 보이나
전혀 통쾌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씁쓸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건 왜 일까.
배우자와의 사소한 논쟁부터 큰 갈등을 다룬 이야기.
부부간의 논쟁은 서로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서
이긴 것도 지는 것도 큰 의미가 없다.
결혼 생활을 하나의 단일한 존재로
서로가 우리로 보는 결합인걸까.
서로를 잃어버린 상실감과 깨어진 믿음 안에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모든 걸 잃고나서야 가장 소중한 게 무언지 찾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남편의 잘못도 아내의 좌절과 분노도 서로가 감추려하는 모습 안에서
터져버린 염증처럼 오랜 동안의 믿음을 한순간에 상실하게 만드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열 편의 단편들이 가진 갈등과 문제들을 보며
이 시점에서 내가 고민하는 생각들을 정리해보는 시간이었다.
잘 만들어진 소설이 아닌
우리의 실상을 그저 풍자적으로 빗댄 현실과 가까운 거리감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랍고 심연의 아픔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욕망과 고통 안에서 인간이라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다시 일깨우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지금의 현실 감각을 더 새롭게 느낄 수 있는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이야기 속으로 한번쯤 빠져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