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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그리워졌다 - 인생이 허기질 때 나를 지켜주는 음식
김용희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4월
평점 :
밥이 그리워졌다

이 책을 살펴보기 전에..
김용희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평론 「생명을 기다리는 공격성의 언어: 김기택론」으로 등단하였다.
실연당한 지 한참 되었지만 아직도 양푼비빔밥을 좋아한다. 신선한 식재료에 관심이 많고 요리 유튜브를 엄청 즐겨본다. 음식의 맛과 향을 즐기듯 삶의 결이 느껴지는 글을 쓰고픈 크리에이터. 이화여대 국문학과에서 현대시를 공부하고 문학평론, 시, 소설을 써왔다. 인문학으로 풍요롭게 살기, 소박한 음식 속에서 오감을 느끼며 살기에 관심이 많다. 지금은 평택대학교 공연영상콘텐츠학과에서 학생들에게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을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소설 『란제리 소녀시대』, 『나의 마지막 첫경험』, 『해랑』, 『향나무 베개를 베고 자는 잠』, 『화요일의 키스』가 있고, 문화비평서 『천 개의 거울』, 『기호는 힘이 세다』, 『사랑은 무브』, 문학평론집 『페넬로페의 옷감 짜기』, 『천국에 가다』 등이 있다.
첫 장편소설 『란제리 소녀시대』로 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로 추천됐으며 김환태비평문학상,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삼십대 비정규직 여성이 조직사회에서 당당한 커리어우먼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권력과 폭력, 일상과 사랑의 문제를 코믹하면서도 스릴감 있게 그려낸 『화요일의 키스』, ‘쿨’ 세대인 1970년산, 1980년산 세대들의 엽기와 잔혹, 동성애와 그로테스크한 피의 한 풍경을 전달하는 『쿨 & 웜』 등 꾸준한 작품활동도 함께 병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예스24 제공]


인생이 허기질 때 나를 지켜주는 음식
요즘 부엌에서 온종일 사는 기분이다.
겨울방학부터 줄곧 집에 콕 박혀있는 아이 둘과
평일이든 주말이든 외식없이 집에서만
오롯이 집밥으로 식사하는 우리 가족들의
배를 채우는데 내 에너지와 열정을 매일 쏟아낸다.
저녁 시간엔 정말 있는 체력까지 끌어쓰며 주방 불을 켠다.
나도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싶다.
지금은 내가 사는 곳과 너무 멀리있는 친정 집을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
더 엄마 손맛이 그리워진다.
음식 이야기는 왠지 모를 푸근함이 느껴지고
나에게만 차려진 한 상을 온전히 받는 기분이랄까.
마음 가득 그 맛과 향을 느끼고
씹지는 못하지만 꿀떡 꿀떡 음식을 넘기는 것처럼
음식에 대한 추억과 이야기를 내 것으로 삼킨다.
나에게도 음식에 얽힌 일화들이 많기에
음식 이야기로 풀어져 가는 인생사가 참 재미나다.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는 음식 취향도 바뀌면서
인생 최고의 음식도 그 우선순위가 조금씩 수정되고 있다.
이 책에선 어떤 음식과의 추억을 나눌까 궁금하다.
먹고 사는 게 전부인 것처럼
인생의 묘미와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는 그 숭고함까지
긴 여정을 죽을 때까지 음식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묘한 감정이 생긴다.
엄마는 상추의 물기를 탈탈 턴 후에 상추 위에다 고슬고슬한
밥 한 숟가락, 고기 한 점, 마늘 한 쪽, 파채, 쌈장을 넣고 보자기처럼 쌈을 쌌다.
그리고 나보고 아, 하고 입을 벌리란다.
나는 마음껏 입을 벌려본다.
무정형의 사랑, 어떤 것으로도 규격화하지 않고 크든 작든 모든 것을
다 감싸줄 것 같은 것이 엄마란 생각이 든다./p45
친정집 가까이서 살 때
항상 집에 들러 텃밭에서 기른 싱싱한 상추며 깻잎, 고추를 가득 따다 주셨다.
마트에 파는 빳빳한 힘이 있진 않지만
부들부들해서 여러 장 손바닥에 올려놓고
크기도 길이도 다 다른 상추 여러겹으로 따뜻한 밥 한공기 퍼서
집에 있는 아무런 찬거리를 내놓아도
쌈장 하나로 어우러지는 조화는 정말 소박하면서 따뜻하다.
전날 과식해서 속이 더부룩할 때면
아침 식사로 상추쌈에 흰밥이 늘 머릿속에 맴돈다.
엄마 텃밭에서 자란 그 보들한 상추쌈 한 입으로
금방 포만감을 느끼고 먹고나서 속이 개운해지는 기분이다.
가끔 오일장에 가면 할머니들이
산에서 따다 파는 빨간 플라스틱 대야에 놓인 상추를 보면
먼 곳에서도 엄마 생각에 문득 발길이 멈춘다.
천원치 사도 푸짐한 양과 할머니의 인심에 벌써부터 배가 부르다.
저녁엔 삼겸살에 상추쌈을 먹으며
마냥 그리운 엄마 생각에 추억팔이를 한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클라라의 집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주기 위해
몰래 모아두었던 하얀 빵을 생각한다.
빵을 나누어 먹으면 모두 가족이라는 것을.
지구라는 행성의 공기와 물을 나누어 마시는 이웃이라는 것을.
내가 외면했던 타인이 어쩌면 나를 구원할 빛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에게 빛을 받아 다시 빛을 비춰주는 존재라는 것을.
그 빛을 받아 내가 어둠 소겡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p63
갓 구워낸 빵은 언제나 옳다.
고소하고 향긋한 빵냄새가 잔뜩 예민해졌던 나를
금방 진정시키는 효과 빠른 약과도 같다.
빵이 주는 행복감은 정말 우주를 유형하는
자유로움과 평온함 그 모든 것들이 무아지경 속에
푹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나에겐 엄청나게 사랑스러운 탄수화물 덩어리이다.
이 맛을 모르고 살았으면 어쩔 뻔 했을까.
남편의 직업상 1,2년에 한번 이사를 다니는 터라
새로운 정착지로 향할 때면
집 주변의 도서관과 빵집을 가장 먼저 서치한다.
책과 빵을 분리시키기란 나에겐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내가 몸을 눕혀 사는 그곳을 중심으로 둘러싼
여러 빵집들을 하나 둘씩 주말이면 나들이며 투어에 나선다.
입구에서부터 빵바구니와 집게를 들고서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서 방방 떠 있는 사춘기 소녀처럼
즐비하게 놓여져있는 빵들을 보며 정신이 혼미해진다.
남편은 내가 빵집에서 빵 담는 모습을 보면
그 어느 때보다 일사분란하다며 조롱을 준다.
봉투에 가득 담긴 빵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기도 잠시
찍힌 계산서 속의 숫자들과의 괴리감에서 벗어나고자
눈은 내 손으로 고른 빵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이미 내 코는 빵의 향에 중독되어 있고,
손은 금새 하나 포장지를 뜯어 입으로 욱여 넣고 있으니
아찔한 행복감에 온 몸이 짜릿하다.
내가 왜 이렇게 빵을 좋아했나 생각해보니
어릴 적에 아빠가 월급날이면 집 근처
고급진 양과점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소보로빵과 단팥빵, 카스테라를 사오셨다.
어린 입맛에 팥의 맛보다 보드랍고 촉촉한 카스테라와
바삭하고 달콤해서 자꾸 뜯어먹게 되는
마성의 소보로빵은 내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오죽하면 발렌타인데이때 남자친구가
초콜릿이나 사탕을 선물해주는 것보다
빵집에서 내가 좋아하는 빵을 사주는 애인이 더 멋지다란 생각을 했을까.
제대로 취향 저격이란 걸
그 코드를 맞춰주는 사람이 많진 않아도
내가 빵덕후란 걸 알아주는 남편과 아이들 덕에
다이어트는 먼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누군가도 좋아한다면
굉장히 흥분되는 일이다.
이 책이 그랬다.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 있지만
음식이라는 매개체가 뭔가 하나로 이어지게 만든다.
음식 이야기에 한껏 들떠서 유쾌해진 내 기분을 읽었는지
오늘 저녁 메뉴를 준비하는 엄마의 뒷모습이
다른 날보다 더 들떠 있음을 가족들이 느낀다.
오늘도 세끼 밥상과 육아에 지쳐 살지만
밥 한상에 온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한끼 식사가
아무리 힘들어도 이 맛에 산다는 남편 말에 조금은 견딜만하다.
그렇게 허기와 영혼을 살찌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