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을 여행 아닌 거주지로 두고 지내야 한다면 어떨까.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나 이전의 편안함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는 나에겐 굉장히 두려운 도전이 될 것만 같다.
어쩌면 내가 책을 읽는 건
일상에 이같은 일탈을 현실로 재현하기 힘든 부분에 대한
갈증을 책으로 풀어내려는 것이 크다.
번아웃을 겪는 현대인들이 많긴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고서 모든 걸 포기하고서
새로운 것을 다시 시작해보겠다는 대단한 용기가 잘 서지 않는 것도 사실이기에
이 책은 생각의 방향과 폭을 넓혀주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아주 제대로 보여주는 반짝이는 설렘이 있다.
내가 책에 집착한 이유는 희소가치가 높을수록 더 갖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더불어
일종의 '품위' 떄문이었던 듯하다.
독일에서의 삶은 막연히 상상했던 여유 한 웅큼,
우아 한 스푼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독일에 왔는데 외려 자주 초라했다.
무엇보다 이 사회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었고 직장이 없다는 점이 컸다.
내 존재가 하찮게 느껴졌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답답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묘한 인종차별 앞에 하이힐로 걷어차기는커녕 집에서 홀로 이불 속 하이킥을 해대기 일쑤였으니까.
p52
스스로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마지노선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는 것에
조용한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싶다.
카페에서 커피와 여유를 즐기는 유러피언의 모습이
다른 여행지의 멋진 배경 사진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그들 손에 쥐어진 책 때문에 나에겐 더 크게 다가왔다.
그곳에 앉아 있기만 하면 꽤 근사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나도 좀 흠뻑 취에 분위기 속에 스며들고 싶다란 꿈을 꾼다.
현실은 비록 나를 초라하게 만들거리가 많더라도
추운 독일의 겨울을 녹여줄 책 한 권과
아름다운 풍경을 맘껏 누릴 여유만으로
그 순간 순간은 마음이 풍요로워질 것을 믿고 싶다.
시공간을 초월한 책이라는 세계에 빠져
고단한 하루를 잊고 살아가는 데 쉼을 얻는 건
한국이든 독일이든 똑같구나란 생각이 든다.
나는 행복을 좇는 그 길에서 타인의 삶을 자주 훔쳐봤다.
가끔은 낯선 독일인들의 얼굴에서 신기루처럼 느껴졌던 행복이 보였다.
일요일 오전, 공원에 의자와 테이블을 가져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침을 먹는 노부부,
갓난아기와 함께 풀밭 위에서 요가 수업을 받는 엄마들,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나들이를 떠나는 가족, 줄타기와 공놀이만으로 즐거운 젊은이들,
호텔 수영장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신나게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p198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는 삶이란
얼마나 고독할까.
우리의 삶은 어디에 속해 있든 고독함을 늘 품고 있지 않을까.
여기선 낯설지 않은 환경과 사람이 있어서
언제든 연락해서 약속을 잡아 만나면 조금의 외로움을 풀어낼 수 있지만
타지에서 친구가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지내는 외로움은
굉장히 불편하고 자주 괴로운 일이 되지 않을까.
숱한 상념들로 잠을 들지 못하는 밤이 많았다는 것이
왜 이렇게 이해되는 것인지.
그들의 삶은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반면
나의 시간은 절대 고독 안에서 헤매이는 듯 보이는 것이 참 웃프다.
그들의 행복을 기웃거리며 살펴보는 모습이라니.
나라고 별 수 있을까.
아마 몇 달 못 채워 곧장 한국으로 돌아왔을 것 같다.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은
거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감당하기 힘든 과제이기에 이 같은 도전은
애초에 나에겐 무모해 보여서 그냥 포기할테지만 말이다.
꿈같은 일을 현실에서 맛보고 돌아온
독일에서의 삶은 분명 나에게 뿌리 깊은 성장의 시간이자
성찰의 시간이 되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이젠 맘껏 한국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이 나라의 아름다운 이 곳 저 곳을 마음껏 여행하며
맘껏 즐겁게 지내길 바래본다.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곳이 꽤나 매력적이었다는 걸
이방인의 삶을 통해 일상의 소소한 모습들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게 된다.
오늘 읽을 책을 고르며 더 기분이 유쾌해지는 건 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