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트위터 읽다가 남태령으로 행로를 정한다. 날씨가 제법 매섭다. 밤을 지새운 사람들은 얼마나 추웠을까. 저체온증으로 쓰러진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미안한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사당역에서 내려 걸어 올라간다. 수많은 공회전 차량으로 대기 상태가 말이 아니다. 남태령역으로 다가가자 쩌렁쩌렁한 마이크 소리가 들려온다. 시민 발언, 구호, 연호, 박수, 노랫소리가 어우러지며 관악산과 우면산 발치를 뒤흔든다.

 

경찰 버스로 왕복 8차선 과천대로를 가로막아 놓았다. 그 너머 붉은빛 트랙터들이 마치 장수처럼 서서 금방이라도 내달릴 듯한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늘 그렇듯 농민도 냅다 걷어찬 윤석열을 체포하겠다고 용산을 향해 온 농민과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앉고 서서 뜨거운 열기를 토해내는 중이다. 사회자가 간간이 지원 물품을 소개하면 열기는 한층 고조된다. 축제도 이런 축제가 없다.

 

각종 단체 깃발이 펄럭인다. 누구나 잘 아는 딱딱한 조직은 물론 말랑말랑한, 심지어 장난기 가득한 알 수 없는 단체 깃발로 하늘은 물결이 된다. 하지만 여기도 홀로 나온 10, 20대가 곳곳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한쪽 구석에 앉아 마른 빵을 먹는 소녀가 있다. 나는 보온병을 꺼내 물 한 컵을 건넨다. 해맑게 웃으며 받아 마시고 돌려준다. 나는 엄지척을 해 보이고 일어선다. 저 나이 때 나는 저 아이처럼 행동할 수 없었으므로.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소식을 알리면서 시간을 살핀다. 점심 식사 하기 위해 따라갈 동선을 생각한다. 지원된 음식을 나같이 부끄러운 늙은이가 축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텅 빈 과천대로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언제 어떻게 이 차로 한가운데를 걸어 남태령을 넘을 수 있겠는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1차선을 따라 걸어 올라간다. 과천 선바위역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 먹기로 하고 고갯마루를 향해 간다. 생각보다 남태령은 나지막하다.

 

남태령 본디 이름은 여우고개였다. 능행 길에 정조가 묻자 차마 그대로 아뢸 수는 없다고 생각한 과천 이방이 남쪽 큰 고개란 그럴싸한 이름을 급조해 올린 뒤부터 이렇게 불렀다고 전한다. 어감이 그리 나쁘지는 않으나 백성 실제 삶과 얽힌 서사를 도려낸 이름은 본디 것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깊은 숲이 고개 양쪽에 있어 실제로 여우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리 이름했다니 말이다. 여우고개가 남태령보다 더 정겹고 사랑스럽지 않나.




 

생각보다 나지막한 여우고개를 예상보다 일찌감치 넘어 시간이 남는다. 나는 행로를 바꾼다. 선바위역 가기 전에 우면산 서쪽 능선으로 올라가 과천대로와 평행한 숲길을 걸어 다시 남태령역으로 간다. 산 넘어 이따금 아스라이 들리는 함성을 향해 간다. 돌아가 보니 사람이 더 늘어나 있다. 사당으로 나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또 남태령역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또 더 늘어나 길을 가득 메운 행렬은 고개 쪽 경사를 따라 부쩍 길어진다.


 

오늘 뭐가 돼도 되겠구나 싶다. 가족과 한 저녁 약속 때문에, 해 떨어지기 전 남태령역을 떠난다. 역 안 한 귀퉁이에 오도카니 홀로 앉아 있는 여고생에게 묻는다. “어떻게 혼자 올 생각을 했어요?” 그가 배시시 웃으며 답한다. “그냥요.” 그냥 민주주의다. 얼마 뒤 길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농민에게도 1030 여성에게도 감사한다. 오늘부터 남태령, 아니 여우고개는 130년 만에 전봉준이 부활한 우금티. 명신이네는 큰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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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육식을 거의 하지 않는다. 불가피한 경우라도 아주 조금만 먹는다. 처음부터 무슨 목적이나 지향을 지니고 그리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태생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99.9% 사람이 태어나서 처음 먹는 음식은 동물성 식품인 모유 아니면 우유지만 나는 미음이었다. 어머니에게서는 젖이 나오지 않았으며, 1950년대 중반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는 우유를 구할 수가 없었다. 미음 머금은 솜을 입술에 대고 짜 먹여 연명시켰다 한다. 이 곤경이 미각을 확정했다.

 

붉은빛 음식이 식욕을 더 자극한다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풀빛 음식을 보면 눈이 반짝인다. 냄새도 마찬가지다. 신선할 때는 물론 데칠 때 나는 나물 냄새, 뜸 들 때 나는 밥 냄새, 심지어 내가 먹지도 못하는 소여물 끓이는 냄새까지 좋아한다. 조사에 따르면 인류 공통으로 가장 이끌리는 냄새가 바닐라 냄새라고 한다. 이름이 그래서 상상하기 어려우나 그 냄새가 근원에서 쌀, 그리고 벼 냄새라는 사실을 나는 대뜸 알아차렸다. 북미 대륙 토착민이 향모라고 부르는 볏과 식물 기원 아로마를 바닐라그라스라고 부르는 까닭도 거기 있을 테지만, 모두 바이 모른다.

 

지난 몇 년 동안 식물에 빙의되어 공부하면서 식물-지의류, 균류, 조류 포함-에 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무엇보다 내가 살기 위해 먹는, 그러니까 죽이는 식물을 대하는 자세가 영 달라졌다. 식물 공부 끄트머리에 더 큰 회심이 일어나 제국주의 공부 길로 들어섰는데 이때 식물과 식사에 관한 생각이 한 번 더 바뀌었다. 무엇보다 식물 생태 본성인 평등 분산 팡이실이, 그 네트워킹을 내 생명에 받아들인다는 각성이 눈부신 변화였다. 식물이 지니는 영양소를 분석해 그래서 몸에 좋다는 따위 서구 기계론과 환원주의 관념을 벗어던진 나지막한 혁명이었다.

 

이 혁명 연장선에서 일어난 변화는 식물을 먹는 일이 제국주의에 맞서는 일이라는 정치적 각성이었다. 제국주의 본성이 바로 평등 분산 팡이실이, 저 공생 생태계를 멸절하는 전쟁이고, 그 대표 병기가 바로 육식이다. 육식은 동물 생태 본성인 불평등 집중 기관 구조, 저 기생 생태계를 내 생명에 구현하는 일이다. 육식 중독 인간이 제국 신민 되는 일은 필연이다. 이 저주는 군대를 동원한 거대 전쟁으로 풀 수 없다. 가장 사소한 일상, 그러니까 식탁에서부터 제국 생활 양식을 걷어내면서 식물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이 지닌 팡이실이 본성을 찾아가야 가능하다.

 

인간에게 과연 팡이실이 본성이 있는가? 있다.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진화사에 기댄다: 거대 파충류에게 패배한 포유류는 숲으로 쫓겨났다. , 그러니까 식물에서 포유류는 팡이실이 본성을 배웠다. 포유류 팡이실이 본성은 승자 파충류에 없는 공동체 형성으로 나타났다. 서로에게 닿고 이어짐으로써 위험을 극복하고 안전하게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이 적응을 통해 패자 필생 승자 필멸이란 진리를 세웠다. 포유류에서 영장류로, 영장류에서 다시 인간으로 진화하는 동안 통제가 불가능해 보이는 변이가 일어났지만, 인간에게는 여전히 공동체 본성이 남아 있다.

 

공동체 본성은 장 신경-무수 미주신경(미주신경은 부교감신경을 이루는 주축이다)-교감신경-유수 미주신경으로 이어지는 자율신경 진화 과정에서 획득했다. 유수 미주신경은 타자와 얼굴을 마주해 서로 이어지며 놀며 나아가 더불어 안전한 생명 활동을 영위하게 하도록 진화한, 고대 미주신경과는 다른 곳에서 발원하여 다른 곳에 도달하는 또 다른 미주신경이다. 스티븐 포지스가 말하는 () 미주 이론인데 바로 이 두 번째 미주신경이 공동체 본성 증거다. 아직 수정 보완 확장할 일이 남아 있는 이론이지만 근본 진실성은 분명하게 확보했다고 평가한다.

 

나는 이 이론에 두 질문을 붙여 근원 서사를 그려보고 싶다. 첫째, 장에서 인간과 공생하는 미소 생명이 이 시스템에 어떻게 관여하는가? 둘째, 숲은 이 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 이야기는 공동체 개념을 지구생태계 전반으로 확장하는 토대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 전체를 수탈·살해하는 제국주의와 맞설 수 없다. 백반집에서 먹는 6천 원짜리 식사로 반제 전투를 하려고 할 때, 쌀과 곰취와 버섯이 전우가 아니라면 나는 반제 전사가 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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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와 언론의 자유가 선한 의도에서 발원했다고 생각하는 우리 상식은 그리 상식적이지 않은 듯하다. 적어도 오늘날 종교와 언론의 자유가 남용되고 훼손되는 현실만 보면 마치 기득권을 수호하려 만든 보장으로 비친다.

 

20241214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탄핵 의결을 촉구하는 시민 200만이 모여 시위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개방 화장실이 부족해 시민이 큰 불편을 겪자, 누군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 화장실 개방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한다.

 

거절 이유가 놀랍고도 가소롭다: 하나님 뜻인지 몰라서 개방할 수 없다. 말인즉 너희들 하는 짓은 하나님 뜻에 반한다, 그런 얘기다. 종교 시설을 정치 집회에 내줄 수 없다, 정도도 아니다. 이 나라 개신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란 무엇일까.


 

20231217일 김명신 부부는 공식 순방으로 위장해 네덜란드를 사사로이 여행했다. 위장에 속아 네덜란드 국왕 부부가 그들을 맞아 만찬을 베풀었다. 그때 네덜란드 왕비는 김명신과 건배하지 않았다. 이유는 다 아는 그 사실 때문이다.

 

국민일보는 사진을 합성해 두 사람이 건배한 것처럼 보도했다. 눈길이 서로 어긋나 조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텐데, 담당 기자가 혼자 그 짓을 했을까. 지나가던 개가 다 웃을 일이다. 국민일보 데스크, 아니 사주에게 언론의 자유란 무엇일까.

 

국민일보 사주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차남인 조민제다. 종교단체가 언론사를 소유한 실제 목적이 무엇이든 우리 현실에서 볼 때 두 분야가 지닌 어둠은 서로를 부추길 수밖에 없다. 손잡고 함께 무저갱으로 내려가는 중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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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 부조리극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의외출연자가 있다. 종교인이다. 개신교는 말할 나위조차 없고 불교 또한 만만치 않은 배우를 양성해 냈다. 멀리 갈 일도 아니니 윤석열이 시대만 보더라도 대단하다. 윤석열 대통령 만든 공신 가운데 개신교 이만희·전광훈이 뜨르르하고, 불교 자승이 그들에 뒤지지 않는다. 탄핵 심판이 헌재에서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이 종교에 속한 명망가들은 양비론 따위들을 들고 저 더러운 행렬에 올라탄 채 시민에게 훈계질한다.

 

방가(方家) 가족 신문이 16일부터 원로인터뷰를 시작해 오늘까지 세 사람 말을 실었다. 첫 번째가 불교 조계종 성파, 두 번째가 개신교 김형석, 세 번째가 개신교 손봉호다. 나이나 사회적 위치로 따지면 원로라는 용어가 그런대로 어울리지만, 저들이 한 말로 따지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정치적 문맥에서 읽힐 줄 뻔히 알면서도 도무지 정치 청맹과니처럼 말하니 말이다. 그런 말이 결국 윤석열 두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최 알다가도 모르겠다.

 

성파는 종정이다. 종정은 총본산 우두머리로서 당대 으뜸가는 선지식으로 인정받는다. 나는 그가 한 말을 듣고 도대체 뭘 깨달아서 그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을까, 정말 궁금하지, 않았다. 전두환 시대 성철이 뇌까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와 도긴개긴이었니 말이다. 경전 탐구와 참선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반야 놀음인지 다시 한번 확인했을 따름이다. 붓다 원음에서 너무도 멀리 이탈해 버린 통속 불교 반야 놀음 탓에, 절집 대웅전에는 옳아서 그른 빈말만 무성하다.

 

김형석은 백년을 살아보니로 유명한 통속 철학자로 개신교 장로다. 왜놈 제국 유학파로 저들을 숭모하는 특권층 부역자다. 문재인을 좌파로 몬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렇게 백년 넘게 살아서 딸랑 이런 인터뷰나 하고 있으니, 백년 무상이다. 손봉호는 직접 교회를 세우고 목회까지 한 개신교 장로다. 철학 교수로, 올곧은 종교인으로 사회정치적 현실에 깊숙이 몸담았었다. 30여 년 전 전교조 합법 주장이 담긴 내 글을 그가 내동댕이친 뒤부터 더는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

 

종교가 정치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치가 어려울 때 원로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논제가 진부한 까닭은 답을 이미 알고 있는데 제대로 된 종교도 원로도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둘이 한 인격에 결합해 나타날 때 그 미혹은 사회를 더욱 어지럽게 만든다.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신교는 진즉 버렸고, 나이 아무리 들어도 원로 소리 들을 일 없는 나야 남을 오도할 리 없으니, 늘그막이 홀가분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찾아드는 이 회한은 또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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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백반집에서 저녁 먹으며 안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천덕꾸러기 자식이 결국엔 부모 모신다는 말이 나왔다. 제 얘기부터 가까운 친척 얘기까지 두루 톺아보니 증거가 차고도 넘친다. 무슨 법칙이기야 하겠나만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동감 구조 안에 있음은 틀림없다. 그래서 굽은 나무 선산 지킨다는 옛말이 생겨났으리라.

 

가부장 사회에서 딸과 둘째 아들, 그리고 막내가 그 천덕꾸러기 우선순위에 놓인다. 딸은 여성이라 전원이 대상이고, 둘째 아들은 맏아들에 치여 대부분 소외되고, 막내는 딸만 낳다가 끄트머리에서 얻은 외아들이 아닌 한 대개 방치되었다. 이 일그러진 풍경은 망국과 식민지, 전쟁과 독재 시대를 거치며 신산하게 살아온 서민 사회에서 더욱 서러운 서사를 생산해 냈다. 너무나 익숙해서 정색하고 비판할 수도 없는 분위기가 똬리 틀었다.

 

사사로운 수다 넘어 공공 서사로 번져가도 맥락은 같다. 난 놈 든 놈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 이 살풍경 한가운데서 계속 어른거리는 죽은 사람 그림자”-노벨문학상 심사위원인 소설가 엘렌 맛손이 한강이 그린 세계를 소개하는 중에 쓴 표현이다-가 산 사람과 망해가는 나라를 지켜내는 광경을 나는 보았다, 윤석열이 탄핵 된 14일 밤 여의도에서.

 

10대부터 30대까지 여성은 이명박 촛불 세대에서 박근혜 4·16세대를 거쳐 윤석열 10·29세대로 이어지며 큰 흐름을 만들어낸 주체다. 같은 세대 남성과 극한 대조를 이루는 까닭으로 커뮤니티 문화를 꼽는 전문가 견해와 달리 그날 나는 홀로 온 10대를 유난히 자주 보았다. 홀로 왔다는 사실이 커뮤니티에 속하지 않았다는 직접 증거일 수는 없으나, 홀로 오기로 결단한 그 독립된 주체성에서 나는 죽은 사람 그림자하나하나 읽어냈다.



홀로 온 소녀가 쓰레기를 줍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순간 그는 우리 신이었다.

 

죽은 사람이란 누구를 말함인가. 불의한 공권력이든 사악한 개인 폭력이든 그들에게 죽임당한 사람은 물론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 취급당하는 모두를 가리킨다. 여성, 노동자, 노인, 아동, 장애인, 성소수자, 호남인, ‘빨갱이’, 이주민, 난민···. 이 개념은 살해·수탈·오염되는 동물, 식물, 미생물, 바이러스, , 먼지, 대기까지 궁극으로 넓혀야 한다.

 

4·16 이후 내 화두는 죽은 자와 산 자가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였다. 식물 공부를 하면서 비인간 생명과 인간 생명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로 번져갔다. 제국주의 공부를 하면서 비생명과 생명이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로 끝까지 나아갔다. 각각 지닌 경계가 차례로 사라지면서 산 자 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생명 중심주의가 무너졌다. 선산 지키는 굽은 나무가 근원 시공에서 누군지 철저하게 또 처절하게 깨치게 되었다.

 

굽은 나무끼리 가꾸는 팡이실이가 선산을 지킨다. 패자 연대, 그러니까 못-난 자, -든 자들이 어른거리는 그림자와 함께 추는 춤이 나라를 지킨다. 아니!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못-난 자, -든 자들과 함께 추는 춤이 나라를 지킨다. 왜놈 제국 부역자에게 짓밟힌 나라 지키는 일에서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에 짓밟힌 지구 지키는 일로 펼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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