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과 쉼을 날카롭게 구별하지 않는다. 모든 공휴일, 심지어 설날·한가위에도 한의원을 연다. 일요일엔 닫아 진료는 하지 않지만, 다른 일을 하러 숲이나 물이나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출근”한다. 그 다른 곳에서 한의원에서보다 더 열일한다. 이런 진실을 심지어 옆지기도 딸아이도 온새미로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4월 중순쯤 옆지기가 6월 29, 30일로 내 항공권을 예약했다고 알려주었다. ‘당신에게도 이런 쉼이 필요하다.’라면서. “이런”이란 말이 특별하다기보다 각별한 까닭은 거기가 하늘을 날아 오가고 올레길이 있으며 4·3과 마주하는 제주여서다; 즐거움과 아픔을 날카로운 동시성으로 전달해 주는 곳이 제주 말고는 없어서다.
일요일 아침에 도착해 월요일 아침에 떠나기까지 어디를 거점으로 어떻게 걸을지 틈틈이 톺아본다. 결국 공항 근처에 숙소 잡고 그 앞뒤 올레길 공항 구간과 17구간 걷기로 대강을 잡는다. 17구간은 16구간 경계 직전에서 벗어나 마을 길 걸어 돌아오기로 경로를 짠다. 점심·저녁 먹을 식당과 마무리 산책할 곳도 정한다.
이대로 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길든 짧든 여행 본성이 그렇다. 결정 요인은 날씨와 그에 따른 체력 문제다. 초기 예보와 달리 날씨는 청명 고온이다. 아침에 땡볕에 얼마간 노출된 피부가 화상을 입을 정도다. 양산을 쓰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걷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이 상태로는 안 된다. 여정을 대폭 줄여야겠다.

공항에서 출발해 숙소로 가는 올레길을 걸으며 여정은 즉각 바뀐다. 뿐만이 아니다. 검색 땐 365일 영업이라 했던 식당에 자물쇠가 걸려 있다. 되돌아 나와 겨우 백반집 찾아 ‘여기까지 와서 또 백반이구나’ 하며 아침을 먹는다. 섬세하고 친절한 주인 닮은 숙소에 들러 짐을 줄인다. 다음 갈 곳이 유일한 부동 목적지다.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 위령비. 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예비검속”이란 말과 처음 마주쳤다. 6·25 발발 직후 제주 해병대가 불법 계엄으로 4·3 관련 혐의를 뒤집어씌운 사람들을 미리 잡아들여 집단 처형한 사건이었다. 사회 지도층 인사, 청년을 주 대상으로 삼아 기획한 국가 살인 범죄였다. 4·3사건 시즌2인 셈이다.
예비검속은 국권 상실기 독립 투사를 잡아 죽이기 위해 왜놈들이 만든 악제다. 미군정이 폐지했는데 이승만 정권이 되살려 천인공노할 범죄 수단으로 써먹었다. 남부는 모슬포 중심으로 북부는 여기 공항을 중심으로 자행되었다. 올해 6월 14일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보름 뒤 내가 그 자리에 선다.
나는 준비해 간 정수로 예를 갖추고 묵념 올린다.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한다. 예비검속을 벌인 떼거리와 똑같은 무리가 지금도 준동하고 있는 현실을 사뢴다. 김명신 일당을 준엄하게 심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염치없이 삼가 청한다. 일부러 찾지 않는 한, 눈에 띌 리 없는 후미진 이곳이 못내 송구스럽다. 목이 멘다.
무거운 발길을 땡볕에 그을리며 올레길 17구간으로 들어선다. 올레길 17구간은 제주 원도심에서 광령리까지 이어진다. 광령리 동쪽 경계는 광령천으로 형성된다. 광령천은 주민 대부분이 무수천(無愁川)이라 부른다. 일단 무수천까지 가보기로 한다. 내가 좋아하는 서울 도봉산 무수천과 같은 이름이라서 여정에 포함했다.
17구간은 거의 모든 구간이 해안도로를 따라가므로 바다 풍경을 한껏 누릴 수 있다. 일망무제 수평선이 가슴 경계를 지운다. 두 겹 수평선 같은 전라남도 땅, 세 겹 수평선 같은 보라색 구름 띠가 신비감을 자아낸다. 여러 결을 이루는 비췻빛 바닷물이 단연 매혹이다. 바닷가 풀밭에 난대 식물이 피운 들꽃들도 눈부시다.

이런저런 탐색에 빠져 걷다 보니 시간은 후딱후딱 지나가고 공간은 시적시적 다가온다. 점심 먹을 시각에야 겨우 무수천과 바다가 만나는 두물머리에 닿는다. 원계획대로 무수천 따라 중산간으로 들어가는 일은 무리다. 시간도 그렇지만 불볕 아래 탕진되는 체력이 문제다. 두물머리 풍경을 찬찬히 살핀 뒤 다시 결정한다.
무수천은 한라산 정상 가까운 곳에서 발원해 25km를 흘러간다. 제주 하천 가운데 가장 길다. 왜 무수천이라 불러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신산한 삶에서 우러나온 비원을 담은 듯하다. 적당한 지점에 바닷물이 역류하지 못하게 턱을 지워 천연 담수 수영장을 만들었다. 무수천 이름에 걸맞은 여름 풍경이다.

한참을 돌아보면서 새 경로를 짠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문 연 식당을 어렵사리 찾아낸다. 밥 먹고 마을 길을 잠시 걸어, 왔던 길로 되돌아온다. 어지럽게 난개발된 도시 외곽 골목길을 걷느니 봤던 바다를 다시 보면서 걷기로 한다. 오른쪽으로 고개 돌려서 봤던 바다를 왼쪽으로 고개 돌려서 보니, 사뭇 다르다. 잘했다.

사실은 시선 차이보다도 시간에 따른 대기와 광선 차이가 새로운 바다를 빚어냈다고 해야 정확할 테다. 어찌 됐든 뜻밖에 경험을 만끽하면서, 왔던 길 되돌아갈 때 느끼는 아뜩함을 잊는다. 여섯 시간을 꼬박 걸어 숙소에 다시 다다른다. 잠시 땀을 들인 뒤 여행 마무리를 생각한다: 맛있는 저녁 식사와 일몰 풍경 보기.
숙소 주인이 추천한 식당이 여럿 있었으나 마지막에 딱 한 곳으로 간다. 음식도 주인도 기대 이상이다. 먹고 난 뒤 서쪽 하늘 아래 바닷가로 나간다. 장엄하지 않아서 감동이다. 고요한 일상에 배어드는 붉은 빛이 얼마나 다정하던지.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각 직전까지 다감 속에 깃들다가 돌아간다. 별것 없어 별난 여행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깬다. 전혀 피곤하지 않다. 기상정보를 확인하고 건강 앱을 열어보니 숲과 물을 걸었던 최근 4년 중 가장 많이 걸었다고 나온다: 26.3km. 해가 더 뜨거운 각도로 올라오기 전에 출발한다. 다시 올레길 걸어 공항에 도착한 뒤 숙소 주인에게 인사를 남긴다. 그에게서 온 답글이 가히 화룡점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