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쯤 나는 생태학과 여성학이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공부 모임을 만든 적이 있다. 물론 모든 조건이 열악했던 시절이라 출발역 바로 다음이 종착역이 되었다. 그때 나는 후배와 제자들에게 말했다: 학문 이름에 ‘생태’라는 말을 앞뒤로 마구 붙이는 날이 곧 온다.
오늘은 말한다: 모든 학문 이름에 ‘인류’라는 말을 앞 붙이는 날이 꼭 온다.
우리가 익히 들은 바는 무슨 무슨 인류학이라는 허다한 인류학 분지다. 가령 정치인류학, 이런 식이다. 그러나 나는 인류정치학을 말한다. 이는 기존 정치학과 범주 자체를 달리하는 범주 인류학 종개념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내가 말하는 인류학은 서구 제국이 여태까지 만들어 놓는 모든 학문을 묶어 한 범주로 놓을 때 그 대칭에 놓을 범주로서 인류학이다.
범주 인류학은 그 주체가 “인류”고 방법론도 내용도 실천도 모두 “인류”적이다. 이때 “인류”는 제국주의가 모독하고 명명한 바로 그 “인류”다. 이성도 진보하는 역사도 과학도 없는, 미개한, 제국 시민과는 전혀 다른, 죄악 자체로서 제국 시민을 포위하고 있는, 하여 마침내는 멸절 대상일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인류”다. 그 “인류”를 규정한 제국 시민을 나는 “인간”이라 부른다. 그 “인간”이 만든 모든 학문, 예술, 종교, 제도를 총칭해 “인간학”이라 부른다. 이 “인간학”이 “인류학”을 능멸하고 파괴하고 급기야는 살해해(버렸다고 믿고,) 없는 존재로 치웠지만, “인류학”은 그 참혹하고 처절한 상처 속에서도 살아남아 저 “인간학”을 품어왔다. 이제 “인간학”이 인간, 그 세계, 나아가 비인간 세계에 끼친 패악을 치유할 서사와 실천으로 기어이 둥두렷이 “인류학”을 떠오르게 해야 한다.
범주 인류학은 형식논리, 인과율, 분석에 터 한 제국 학문 편협·편파성을 꿰뚫는다. 그 기본적 힘은 이른바 고대 지혜에서 발원한다. 고대라는 말은 단지 아득한 시간만을 가리키지 않고, 인간학 저편이라는 공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고대 지혜는 비단 석기시대 풍속을 그대로 간직한 부족에게만 아니라 인간학 세례를 듬뿍 받은 제국 시민에게도 엄존한다. 평범한 시민은 제국 인간학에 세뇌되어 이성과 과학으로 살아가려 애면글면하지만 결국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고대적 지혜에 기댄다. 체면상 안 그런 척하지만, 지배 집단이 훨씬 더 극단적·중독적이다. 오컬트적 자신을 식민지 주민에게 투사한 음모가 바로 그 인류학이다. 당연하게도 그 인류학에서 제국은 자기 성찰의 근거를 찾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변화를 거쳐 오늘날 인류학은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제국 시민인 한, 죽었다 깨어나도 저들은 범주 인류학 지평으로 들어올 수 없다. “인간”에서 벗어나 “인류” 본성을 되찾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류” 본성이란 인간이 결코 지구 생태계 주인이 아니며, 다른 유(類)와 특별히 다르지도 않으므로 서로 존중하고 지혜 나누어 공존·공생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진실을 그대로 살아내는 생명 바탕이다. 이를 거부하는 도그마, 그러니까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됐다는 허황한 미신에 터 한 앵글로아메리카 제국 “인간학”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진리다. 같은 인간인 거북섬(토착민이 북미 대륙을 부르는 이름) 주민을 인간 아닌 존재로 몰아 멸절시킨 장본인인데 하물며 다른 유 생명체쯤이야. 그러나 저들이 얼마나 어떻게 무지하든 다람쥐며 버드나무며 석이며 송이버섯이며 미역이며 시아노박테리아며 레오바이러스가 존중하고 지혜 나누어 공존·공생하는 존재임은 자명하다. 이들과 이루는 팡이실이, 곧 네트워킹이 범주 인류학의 진경이자 전경이다.
범주 인류학이 빚어내는 팡이실이 서사는 “인간학”적 형식논리, 인과율, 분석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다. 팡이실이 서사에는 무엇보다 창발(emergence)이 약동한다. 창발은 인간 뇌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뇌는 받아들일 뿐 창발 자체는 장 점막 바깥에서 인간과 공생하는 온갖 미소 생명들에게서 온다. 그 미소 생명들은 다시 인간 바깥 미소 생명들, 나아가 비생명 존재들과 이루는 팡이실이 사건에 힘입어서 인간 뇌를 일깨운다. 이렇게 일깨워지는 뇌를 “인간학”하는 인간은 쓰지 않는다. 그래서 제국주의는 파멸 외길을 달린다.
제국주의 파멸은 빠를수록 좋다. 한 찰나라도 그 파멸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제국의 실체를 까밝혀야 한다. 제국의 실체를 까밝히려면 지배 집단이 구사하는 통치 전략에 극단적·중독적 오컬트 인류학이 작동하고 있다는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 그 진실은 “인간학”적 어법으로 드러내지지 않는다. 음모론 비판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음모론 덫에 걸리면 아무리 뛰어난 담론도 가십으로 굴러떨어진다. ‘음모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한사코 주장하는 지성은 제국주의 통치 전략, 그 음산한 사이비 “인류학”적 작태 은폐에 동원되는 특권층 부역자로서 당대 일급 엘리트이기 때문에 거의 난공불락이다. 이들을 무찌르고 제국의 추악한 지성소를 엎어버리려면 범주 인류학 고유 어법이 꼭 똑 필요하다.
영화 <파묘>부터 예로 들어 이야기한다. 나는 본디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 이 영화 또한 보지 않았지만, 워낙 커다란 화제가 됐던 터라 알라딘 서재에 세종대학교 독도종합연구소장인 호사카 유지 교수 글을 전재한 적이 있다. 그 글에서 호사카 유지 교수가 말한 바에 따르면 일제가 음양사를 공식 직책에 올리고 그들이 구사하는 각종 주술을 현실 통치에 동원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임이 분명하다. 풍수설에 의거 쇠말뚝을 박고, 총독부·신궁 자리를 정한 것 또한 모두 사실이다. 1945년 이후는 다를까? 여전히 총리대신과 각료, 국회의원들이 신사를 참배하는데, 무슨. 이는 일제의 높은 “인간학” 수준과 세계적 기술력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다. 일제 지배 집단이 저지른 오컬트적 정치 행위를 문제 삼을 때, 과학·기술 운운하며 음모론 차원에서 일축하는 윤똑똑이 지식인은 “인간학”에 주저앉아 떡고물 받아먹는 한심 종자일 뿐이다.
피부에 와닿고 더 엄중한 예로 발 들여 본다. 세월호참사는 왜 어떻게 일어났는가? 이 문제에 당시 정부가 내린 결론은 정당한가? 과문 탓인지는 몰라도 아직 당대 일급 지식인 누가 나서서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학” 너머 지배 집단이 구사하는 오컬트적 정치 행위를 정조준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물론 당연하다. 그런 지식인이 있었다면 음모론자로 매도 아니 매장당했을 테니까. 익히 알기에 알아서 기었을 테니까.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그런 담론 자체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제국에서 베껴온 지식을 장착한 로봇일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한 생각 크게 돌이켜야 한다.
4·16 직후 일부에서 제법 소상한 내용까지 담은 인신공양설을 제시했으나 즉시 도태되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그러면 이 문제의식을 오늘날로 가져와 보면 어떨까? 윤석열이 대통령 후보일 때부터 끊임없이 따라다닌 가십성 정보에 무속인 멘토가 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국가적 공식 행위에도 그들 또는 그가 등장했다. 대통령실과 관저 이전에서 의대 정원 2,000명에 이르기까지 영일 없이 오컬트적 정치 행태가 “구설수”에 오르내린다. 정말 이것은 구설수인가? 구설수 따위라서 당대 일급 지식인이 입 대서는 안 되는 문제인가? 역시 아무도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사회정치적 담론으로 꺼내놓지 않는다. 이유는 전과 동. 앞으로도 영영 이런 일은 전과 동. 언제 우리는 진실을 품을 수 있을까, 그럼? “인간학”으로 인류를 묶어 놓고 오컬트 인류학을 구사하는 제국 부역 권력 집단이 존재하는 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원조 제국 지배 집단이 구사하는 오컬트 인류학은 성서에서 발원한다. 성서 자체가 가장 배타적이고 도착적인 음모론이다. 음모론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고려대 한국어 대사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배후에 거대한 권력이나 비밀스러운 조직이 있다고 여기며 유포되는 소문.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소문, 그러니까 절대 음모론에서 성서는 출발하고 그 소문이 풀어낸 갖가지 소문에 근거해 앵글로아메리카 제국, 그 핵심 세력 시온주의와 개신교 근본주의가 제노사이드로 인류를, 에코사이드로 자연을, 옴니사이드로 지구 전체를 먹어 치우고 있다.
음모론으로 구축된 권력이 음모론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투사(projection) 공작정치가 바로 제국주의 전가 보도다. 이는 공정과 극단적 대칭점에 있는 검사 윤석열이 불공정을 조국에게 투사해 개인은 물론 가문 전체를 멸절로 몰아간 난동과 완전히 결이 같은 사건이다. 이런 모순을 부역하는 대중에게 감추는 수법이 둘 있다. 하나는 프레임, 특히 언어 프레임 선점이다. 먼저 치고 달리면(hit & run) 나중에 진실이 밝혀져도 각인 효과로 말미암아 대중은 요지부동이다. 다른 하나는 증거 미형성과 인멸이다. 이 중, 특히 전자가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음모론은 본성상 인과율, 그러니까 이른바 과학적 차원의 증거가 없다. 과학에 닿지 못하거나 그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예외가 없지는 않으나 대개 사적 이득에 경도된 음모론은 그 증거가 과학에 닿지 못함에도 사람을 매혹하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예가 천공이 구사하는 파자(破字) 술이다. 공적 선의를 추구하는 음모론은 그 증거가 과학 너머에 있다. 초인과적·창발적 팡이실이(networking)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시성(synchronicity)이다. 제국주의나 그 부역자들이 구사하는 음모론 증거는 추종자들에게 쉽게 전파되지만, 반대하는 쪽에서 증거로 삼을 수 없으므로 빠져나간다. 자기는 빠져나가고 타자 음모론은 같은 무기로 공격할 수 있다. 뻔한 전략인데 대중은 진부해서 속고, 부역 지식인은 알고도 모른 체 한다.
증거인멸은 이미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보아 온 저들이 협잡질이다. 대표적인 예가 세월호 선체에 있던 물증을 인멸하고, 증인을 매수·살해한 짓 따위다.
음모는 있다. 아니다. 음모는 인간 본성에 속한다. 이를 지배 집단이 전유해 오컬트적 일극 집중 체제로 만들어서 음모론은 오늘날 음모론으로 타락했다. 타락 이전, 또는 그 바깥 음모는 내가 말하는 “인류학”, 즉 범주 인류학 주체인 “인류”가 “인간” 본성과 비대칭 대칭을 이루며 균형 잡아 온 본성이다. 이들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인류”가 구가해 온 음모는 형식논리 너머에, 인과율 너머에, 분석 너머에, 간직하고 발향해 온 슬기다. 팡이실이 별명이다. 버려졌던 이 운동을, 사건을 되살림으로써 “인간”은 “인류” 됨을 되찾을 수 있다. “인류학” 곧 범주 인류학은 이래서 필수며 필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