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과 평안을 벗 삼아 천천히 집을 나선다. 교보에 들러 쭉 둘러보았으나 눈에 띄는 책이 없다. 특히 인문 신간 책 제목들은 그 가소로움이 임계점에 도달한 듯 얼씬도 못 하고 눈 밖을 벗어난다, 과학 신간도 마찬가지다. 미련 없이 나와 육상궁으로 간다.

 

칠궁을 알아서 일부러 찾는 이는 거의 없다. 본디 육상궁이며 나머지 여섯 궁은 셋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더욱 없다. 그럼에도 육상궁만이 <육상묘>라는 현액을 걸고 있다. 모르긴 하되 분명히 어떤 야로가 있다. 볼 때마다 속이 상한다.

 

셋방에는 눈길 주지 않고 바로 육상궁으로 들어가 간절한 마음 한참 오롯이 하다 나온다. 경내 한 바퀴 돌고 꽂아둔 나무 지팡이를 확인한 뒤 절하고 물러난다. 최숙빈을 둘러싼 극적 서사에 역사적 근거가 없다 하지만 그 인류학적 반향에 나는 주의한다.

 

역사라는 무엇도 결국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병도와 신석호가 만든 견해를 맹하게 붙좇아 온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역사적 근거란 얼마나 주제넘은가. 제 삶은 협잡인데 역사에서 진실 따지는 지식인 위선보다 비원 담은 전승 민중 서사가 백번 낫다.

 

그 어느 때보다 천천히 백악을 걷는다. 숲에 22대 총선 결과를 보고했는데 그 제목이 태산명동서이필(泰山鳴動鼠二匹)”이다. 여태 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설치류 둘을 들어 축사하고 숲을 나온다.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한 음식점으로 들어간다.

 

30대 중반 남자들이 총선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시종일관인데 육중한 사항은 한마디도 없다. 얄팍하다. 그들이 나가고 60대 중반 남자들이 들어온다. 총선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고향과 친구를 말하는데 돈독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없다. 얄팍하다.

 

두 무리 모두 등산 뒤풀이 모임이다. 산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무슨 이야기였든 나는 궁금하지 않다. 산에서라고 달랐을까 싶으니 말이다. 산은 저들에게 고난도 트레드밀에 지나지 않는다. 운동기구 위에서 자기 영혼을 맑게 하는 인간이 있겠나.

 

요는 산이 아니라 숲이다; 산이 아니라 숲이 말한다. 숲이 하는 말을 들은 사람이라면 선거에 관해서도 고향과 친구에 관해서도 그리 말하지 않는다. 그 얄팍함은 인간 뇌가 지닌 진부함에서 나온다. 진부함은 참 팡이실이를 창조하지 못한다. 깊은 죄만 짓는다.

 

등산은 제국주의 부산물이다. 정착형 제국주의를 발명한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이 산을 처녀로 은유함으로써 등산은 정복이 되었다. 정복자가 피정복자 음성에 귀 기울일 리 없다. 정복된 산은 더 이상 숲이 아니다. 정조 의무에 결박된 여자에 지나지 않는다.

 

정조에 결박된 여자 대표적 이름이 바로 국립공원이다. 국립공원 안에 이미 살고 있던 모든 원주민은 멸절 대상일 수밖에 없다. 정조에 결박된 여자에게 다른 남자 접근은 부도덕하기 때문이다. 제국 USA만이 아니고 다른 부역 국가 국립공원도 본질이 같다.

 

앵글로아메리카 제국이 천하를 제패한 오늘 모든 국립공원, 아니 모든 산은 숲이 아니다. 그 숲은 모조리 살해당했다. 숲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다. 아메리카 대륙 토착민을 비롯한 모든 식민지 주민도 그러하다. 권력과 재력에 죽임당한 모든 이도 그러하다.

 

내가 오늘 육상궁과 백악 숲, 그리고 삼청동 음식점에서 깨달은 진실은 결단코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 평범한 일상에 내려앉은 비범한 죄악을 다시 한번 응시하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열 번째 맞는 4·16이다. 우린 여태 대체 뭘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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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한의원 출근해서 먹는 아침 도시락과 막걸리 한 잔으로 열 번째 제상을 차렸다. 이렇게 흘려보낸 시간이 안타깝고,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시간이 아뜩하다. 잊지 않음으로써 절망 한가운데 조그만 진집 하나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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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미국의 재무장관 재닛 옐런이 이달 초에 중국을 다녀갔다. 그녀는 작년 7월 초에도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다시 중국을 찾은 것은 미국이 중국과 풀어야 할 현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련해서 중국의 관영 환구시보 영문판에 옐런의 방중 의미를 놓고 전임 편집장 후시진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고문이 올라왔다. “옐런의 중국 방문, 누가 누구한테 청질하는지 보여준다.” 미국과 중국이 지금 서로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제목이라 하겠다.

후시진은 자신의 글에서 독자의 관심을 중국에서 누가 미국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재무 장관이 중국을 찾아왔다는 사실에 집중시킨다. 미국이 원하고 부탁할 것이 있으니 재무 장관을 보내지 않았겠느냐는 시사인 것이다. 과연 미국은 이번에 중국에 와서 큰 부탁을 했던 것 같다. 후시진은 이렇게 말한다. “방문 기간 그녀[옐런]는 중국이 전기차와 태양전지판의 생산능력을 억제하고 이들 제품의 저가 수출을 방지할 것을 특히 강조했다.” 기고문의 제목을 배경으로 하여 읽으면, 이 말은 미국이 중국에 좋은 물건 너무 많이 그것도 너무 싸게 만들지 맙소사 부탁한 것으로 들린다.

옐런이 방중 기간에 중국 측에 제시한 요구에 대해 나온 논평이 있어서 두 개를 접했다. 하나는 마이클 로버츠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China’s unfair ‘overcapacity’”)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운영하는 Geopolitical Economy Report에 벤 노턴이 올린 팟캐스트(“Is China producing too much? US 'overcapacity' accusations: new tactic in economic war”)였다. 이들 논평에서 공통으로 언급되는, 미국이 중국의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은 ‘과잉 생산’이라는 것이다. 후시진의 기고문에서도 지적되고 있듯이, 미국은 지금 중국에 너희가 너무 좋은 것을 너무 많이 생산하고 있으니 그것을 중단하라고 하고 있다. 옐런이 이번에 중국을 찾은 것도 그 말을 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후시진은 옐런이 중국에 와서 청질을 하고 갔다고 하지만, 로버츠와 노턴은 미국이 중국에 위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 대해 전기차와 태양전지판의 생산능력을 억제할 것을 부탁했다기보다는 요구한 것이라는데, 미국이 그렇게 한 이유는 뻔하다. 자기들은 그런 고급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할 능력이 없는데 중국은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을뿐더러 그것도 아주 싸게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을 방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미국의 그런 요구를 후시진은 청질로 보고, 로버츠와 노턴은 위협으로 보는 것인데, 사실 내용이 서로 다르진 않다. 미국으로서는 어쨌거나 중국이 앞서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미국은 청질을 해도 정말 못되게 하는 것 같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요구할 것이 있으면 자기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상대방에만 선물을 요구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하지만 옐런은 이번에 중국에 요구한 과잉 생산 중단에 대한 아무런 보상품도 갖고 오지 않았다. 청질을 하면서도 그렇게 못되게 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해오면서 보여준 일관된 태도이기는 하다. 미국은 자신이 정한 ‘규칙’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관장해오면서 자신이 하는 것은 모두 사리에 맞고 정당하다고 우기는 데 익숙한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 중국이, 미국이 중단하길 원하는 과잉 생산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중국의 과잉 생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중국이 최근에 들어와서 미국은 만들어 낼 수 없는 5G, 전기자동차, 배터리 등 좋은 물건을 싸게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그 바람에 세계의 생산력 지도가 대판 바뀌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기준 미국은 세계 GDP의 50%, 세계 산업 산출량의 60%, 상업용 선박의 70%를 차지할 만큼 국력이 막강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과거의 영화일 뿐이다. 전기차 생산에서도 미국은 중국에 뒤진다.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 전기차 최저가격이 49,130달러인 데에 비해 중국 BYD 보급형 전기차 가격은 9,695달러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중국차의 성능이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란다. 사실이 그렇다면 세계시장에서 테슬라는 BYD의 경쟁 상대가 될 수가 없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새로운 냉전이 시작된 상황이다. 이 냉전은 제2차 냉전에 해당한다. 제1차 냉전은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펼쳐지다가 1990년대 초에 소련의 해체와 함께 끝났다. 당시의 냉전 해소는 세계인에게 평화공존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후퇴로 ‘역사의 종언’이 고해진 가운데 세계는 미국이 주도한 가치-기반 국제질서에 포획되었고, 냉전 시기보다 훨씬 더 폭력적인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사회주의의 후퇴가 자본주의의 득세로 이어진 이상 그런 결과는 당연했다고 봐야 한다. 자본주의는 극소수의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온갖 착취와 수탈, 침략, 노략질을 일삼는 것이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냉전이 종결되었다고 지정학적 갈등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때부터 미국의 일방적 폭력이 행사된 결과 세계는 유고슬라비아 폭격, 이라크 전쟁, 리비아 전쟁, 소말리아 전쟁, 시리아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냉전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폭력과 전쟁을 겪게 된다. 단, 그와 함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이 강화됨으로써 세계의 경제지도에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 중국이 미국이 장악한 WTO에 가입한 것이 좋은 예다. 미국은 중국이 언제까지 가치 생산 사슬 저 아래에서만 머물며 자국이 필요로 하는 싸구려 상품을 더 싸게 만들어 제공해줄 것으로 믿었겠으나, 오판한 셈이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 중국의 굴기가 분명해지자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벌이기 시작하고, 세계는 이제 제2차 냉전에 들어간 형국이 되었다.

미국은 최근에 중국을 까놓고 자국의 주적으로 상정해놓고 있다. 이런 모습이 처음 나타난 것은 트럼프 대통령 재직 시기였지마는, 현임 바이든이 집권한 뒤에도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적대적 태도는 그대로 유지되는 중이다. 이번에 옐런이 중국을 찾은 것은 그래도 양국 간에 협조할 것은 협조하며 공존을 모색한다는 취지도 있지마는 중국의 ‘과잉 생산’ 문제를 제기한 것을 보면 중국을 제압하려는 미국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음이 분명해 보인다.

제1차 냉전은 미국이 우위를 차지한 가운데 미국과 소련의 경쟁 형태로 진행된 셈이다. 두 나라는 초강대국으로서 군사적으로는 서로 팽팽하게 맞섰지마는 경제적으로는 소련은 미국의 상대가 아니었다. 제2차 냉전 구도는 이전과는 다르게 형성되었다고 봐야 한다. 아직도 미국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세계 최강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청질하러 왔건 위협하러 왔건 옐런이 중국에 와서 과잉 생산을 중단해달라고 요구한 것은 이제는 미국이 중국보다 경제경쟁력에서 뒤처진 징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구매력지수로 보면 중국의 GDP가 미국의 그것을 앞선 것이 이미 2016년이다. 미국은 돈 많은 나라라지만 돈 즉 화폐는 생산자본에 투자되지 않고 미국에서처럼 주식이나 부동산 등에만 투자되면 가공자본이 되어 경제를 오히려 망친다. 미국은 이미 탈산업화한 지 오래되었고, 반면에 중국의 산업생산력은 세계 최강임이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생산력만 높은 것만이 아니라 고급기술 부문에서도 미국에 뒤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과잉 생산 능력을 놓고 미국의 재무장관이 문제 삼으려 중국을 찾은 것은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증거다. 세상은 바뀌었다.

문제는 중국이 미국을 능가할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윤석열 정권이 잘 나가던 중국과의 관계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세계체계는 지난 500년 이어져 온 서방의 굴기와 세계제패의 지배적 흐름에서 벗어나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 등 브릭스 국가들의 부상에서 볼 수 있듯이 다극적 세계질서가 형성되는 중이다. 하지만 한국은 우정 이 흐름에 역행하는 모양새다. 눈앞에 19세기 말 조선조의 상황이 어른거린다. 당시 조선은 세계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대응하지 못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한 바 있다. 한국이 그런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막 치른 총선에서 좌파 세력이 폭망한 것을 본지라 우울한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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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황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글을 그대로 싣는다.



조선 후기 가야산 ‘묘암사’에는 석탑이 하나 있었는데, 이 석탑에는 송나라 황제 진상품인 용담승설차(龍潭勝雪茶)와 그 밖의 진귀한 물건이 소장되어 있었다. 당시 바로 이 탑 자리에 묘를 쓰면 후손 중에서 왕이 두 명이나 나온다는 주술이 떠돌았다. 이 주술을 굳게 믿은 대원군은 묘암사를 사들여서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그 석탑의 자리에 이장하였다. 묘실에는 석회벽을 두텁게 발라 도굴을 못 하게 하였다. 훗날 독일 상인 옵페르토가 도굴범 조직을 만들어 행담도에 배를 정박한 후 밤중에 몰래 도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망갔던 역사가 있다.

주술의 효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원군은 고종과 순종 두 명의 후손이 왕이 되는 가문의 영광을 누렸지만, 며느리 민비에 의해 수모를 당하고 나라가 망하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민비는 대원군보다 한술 더 떠 아예 주술에 미쳐 일개 무당을 ‘진령군’이라는 작위를 주고 전국 곳곳에 산신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왕실의 안녕을 빌었다. 그러나 끝내 왜인의 칼에 베이고 시신이 불태워져 암매장되고 말았다. 조선을 망하게 한 일등공신은 주술의 힘을 신앙처럼 믿었던 황실의 가족들이었다.

신비주의 학문으로 일컬어지는 ‘오컬트(Occult)’는 과거 서양 사회에서 주술이나 유령 등의 영적 현상에 관해 탐구하고 그것에 어떤 원리나 규칙이 있다고 믿으며, 이를 정치와 생활에 적용했던 신념을 가리킨다. 라틴어 ‘오쿨로(óccŭlo)’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씨앗을 흙으로 덮다’, ‘숨기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숨겨진’, ‘비밀의’라는 뜻이 파생되었으며, 이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신비학(神祕學)’이다.

이 신비주의 학문의 분파 가운데 ‘수비학(數秘學)’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여 숫자와 사람, 장소, 사물 등의 사이에 숨겨진 의미와 연관성이 있다고 믿으며, 인간의 힘을 뛰어넘는 어떠한 신비가 있다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단순히 숫자만이 아니라 마방진이나 마법진의 도형 또한 수비학에 포함된다. 이를테면 ‘4’ 자를 죽을 ‘死’ 자와 연관 지어 재수 없다고 피하는 것이나, ‘7’ 자를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것 또한 수비학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천공’이라는 무속인의 숫자놀음이 연일 화제이다. 이 무속인을 멘토로 삼고 그들의 말을 하늘의 운명으로 받들고 순종하는 이 나라 통치자를 보면 조선이 망할 때와 상황이 너무나 유사하여 마음이 몹시 착잡하다.

손바닥에 ‘王’자를 새기고 생방송 토론회에 참석했던 일이나, 청와대에 죽음의 기운이 서려 있다며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는 초유의 사태는 모두 ‘천공’의 작품이다. 그의 논리를 빌자면 ‘二’에다 ‘十’을 합치면 ‘王’이 되고 여기에다 ‘百’을 합치면 ‘皇’이 된다. ‘2×10×100’은 ‘2,000’이 된다. 그러므로 숫자 2,000은 제왕의 통치술을 상징하는 숫자가 된다는 해괴한 논리이다.

천공의 주술을 실제로 국정에 적용했던 사례를 보자면 기막힌 정도가 아니라 경악할 노릇이다. 조선을 망하게 했던 숨은 주역이었던 죽은 진령군이 환생을 했단 말인가?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학교폭력 수사관 2000명 증원’,
‘비수도권 취업 청년지원 2000명’
‘인천대교 통행료 2000원 인하’
‘오염수 방류 어민지원 2000억’
‘대구 로봇테스트필드 2000억’
‘장병급식비 2000원 인상’
‘늘봄 학교 2000곳’
‘국민 만남 2000명’
‘공무원 승급 2000명’

지난주에 용산 윤 씨가 사전 선거를 한 곳이 부산 강서구 명지 1동 행정복지센터였는데, 이곳의 주소가 ‘명지동 2000번지’였다. 그곳은 아무런 기반시설조차 갖춰지지 않은 허허벌판이었다. 이것이 과연 단순히 우연의 일치로만 이루어진 일이었을까?

나는 지금 소름이 오싹 돋는다. 이들은 과학이 종교의 허상을 밝혀낸 금세기에서조차 여전히 미토스의 신화적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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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선수 이영표는 “월드컵은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증명하는 자리”라고 했다. 일개 스포츠 경기의 선수조차도 인기나 명성에 앞서 실력의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요 사람을 선발하는 기준이다. 하물며 일국의 대통령 자리에 있어서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대통령의 직분이야말로 초보 정치인이 ‘국정을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준비하고 훈련된 인재가 ‘경륜을 펼쳐야 하는 자리’여야 함이 마땅하다.

우리는 면허증의 유무도 불확실한 초보 운전자에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운명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를 너무도 쉽게 내주고 말았다. 게다가 그의 ‘난폭’과 ‘음주’의 전력은 이미 백일하에 드러난 바 있다. 초보 운전자가 스포츠카의 성능에 도취 되어 ‘난폭 운전’과 ‘음주 운전’을 상습적으로 일삼는다면 그땐 나라의 불행을 어찌할 것인가?

‘난폭운전자’는 성격을 고쳐서 교정할 수 있고 ‘음주 운전자’는 술을 끊어서 교정할 수 있다지만, 마약보다 위험한 ‘주술에 세뇌당한 난폭음주 운전자’는 이미 교정의 범위를 벗어난 단계이다. 이런 자는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운전하는 행위 자체를 불가능하게 해야만 한다. 반드시 적발과 동시에 구속함이 마땅하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대미문의 주술에 빠진 초보 정치인에게 국가의 명운을 저당 잡힌 채 ‘국가의 안위’와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한 건곤일척의 도박을 벌이고 있다. 현명한 국민이 투표로 심판하는 것만이 누란의 위기를 벗어나는 길이다.

나의 한 표가 주술에 빠진 대한민국을 건져낼 위대한 능력이 될 것이다.

霞田 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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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내희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저항의 축’은 통상 일극적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미국 제국주의의 대 이슬람 및 아랍 지배의 교두보라 할 이스랄의 폭력에 맞서 형성된, 서아시아 일부 국가 및 세력의 연맹을 가리킨다. 이 연맹은 국가로는 이란과 시리아를, 비국가로는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라크의 민병대, 예멘의 안사르 알라, 팔레스타인 가자지역의 하마스 세력을 포함하고 있다. 저항의 축은 최근에 특히 활약을 강화했는데, 작년 10월 7일에 하마스가 ‘알아크사 홍수 작전’을 감행한 것이 그 계기였다.

‘알아크사 홍수’ 작전으로 이스라엘의 군인과 민간인 1,139명이 목숨을 잃은 것을 놓고 이스랄 당국과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방의 정부들과 주류매체들은 하마스를 테러 조직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그 작전은 서방 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인 이스랄이 국제법을 위반하며 가자지역을 지상 최대의 야외감옥으로 만들어 수십 년간 팔인을 탄압하고 학살해온 것에 맞서 하마스 세력이 감행한 군사작전으로서, 피점령자가 자신의 정당한 자위권을 행사한 행위였다는 견해도 유력하다. 이미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랄의 가자지역 팔레스타인 공격을 인종학살의 혐의가 짙다고 규정하고 이스랄에 더 이상 폭력행위를 하지 말 것을 명령한 바 있다. 그런데도 이스랄의 안하무인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지난 6개월 미국과 일부 나토국가의 일방적인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이스랄 점령군이 가자지역을 공습하고 탱크로 밀어붙여 빼앗은 목숨이 4월 5일 현재 어린이 1,3000명을 포함해 적어도 33,091명이나 되고, 부상당한 사람의 수가 75,750명이 넘는다. 사망자의 수에는 폭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의 건물 잔해 아래 묻혀 있는 10,000명 정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스랄 측은 팔레스타인인들을 가자지역에서 몰아내려는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천인공노할 인종학살과 인종청소를 저지르는 이스랄과 이스랄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미국 등 제국주의 세력에 의연히 맞서 싸우는 세력이 저항의 축이다. 저항의 축에 속한 6개 국가 또는 세력은 다른 이슬람과 아랍 국가들이 이스랄과 이스랄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패권국 미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가운데 지금 각기 가능한 방법으로 적과 교전하고 있다. 특히 예멘 안사르 알라의 경우 홍해를 장악해 이스랄 선박과 이스랄로 향하는 타국의 선박들의 홍해 통과를 금지하고 요구에 응하지 않는 선박들을 가차없이 공격한다. 미국과 영국 등이 해군력을 동원해 예멘의 공격을 막아내려 하지만 제국주의 세력에 맞선 예멘의 태도는 갈수록 강경한 모양새다. 안사르 알라 외에 레바논-이스랄 국경을 사이에 두고 이스랄 군과 대치하며 대 이스랄 공격을 멈추지 않는 헤즈볼라도 있다. 이란의 경우 며칠 전 이스랄이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자국 영사관을 폭격해 혁명수비대 소속 장성 2명을 포함한 10여 명을 살해한 데 상응하는 보복을 조만간 감행할 것으로 알려진다. (오늘 들은 한 방송에 따르면 이란이 미국에 자국의 보복 행보에 관여하지 말라고 미리 경고해 놓았다는 소문이 있으니 정말 큰 공격이 준비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저항의 축’은 미국과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 그리고 이들의 대리인 이스랄과 맞선다는 점에서 근대적 세계체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우크라이나전쟁을 통해서도 드러난 것처럼 미국 주도의 일극적 세계질서는 과거와는 달리 더 이상 세계를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이 분명해졌다. 미국 주도의 나토국가들이 온 힘을 합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또 러시아에 대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지마는 전세는 러샤의 일방적 우세로 진행되고 있고, 러샤의 경제도 미국이나 EU보다 더 잘 나가는 모습이다. 동유럽에서 서방 제국주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것이 러샤라면, 저항의 축은 서아시아에서 그들과 맞서 싸우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저항의 축이 보여주는 활약은 한편으로 보면 서방의 제국주의가 최근에 구축해 운영하는 일극적 세계체계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면서 다른 한편에서 보면 세계가 이제는 일극적이기만 하지 않고 다극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징후로 보인다. 러-우 전쟁과 팔레스타인 가자전쟁에서 러샤와 저항의 축이 밀리지 않고 싸우는 것을 보면, 세계는 이제 크게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정말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 제국주의의 호령에 따라서만 세상이 움직이던 시기는 지난 것 같다.

아프리카의 사헬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보인다. 지난달 3월 24일에 개최된 세네갈 대선에서 야당 후보인 바시루 디오마예 파예가 당선했으며, 그가 당선 직후 프랑스가 세네갈의 목을 죄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과 그 발언의 함의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팅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주목을 요구하는 것은 최근까지도 프랑스가 역내 국가를 대부분 신식민지로 관리해온 사헬 지역에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의지를 나타낸 것이 세네갈 한 나라만 아니라는 점이다. 세네갈의 최근 태도는 몇 년 전부터 사헬에서 불고 있는 탈프랑스화, 탈식민화 흐름과 궤를 함께한다고 할 수 있다. 말리, 뉴기니,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등 사헬에서 서방 제국주의의 꼭두각시 정권들을 무너뜨리고 자국민의 이익을 지키겠다는 새로운 정권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 이미 3, 4년 전이다. 세계 지정학 관련 분석과 보도 전문 ‘풍운아’ 페페 에스코바르에 따르면 “아랍과 무슬림 국가들에 걸친 서아시아 저항의 축은 이제 서에서 동으로 이르는, 즉 세네갈과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에서 차드와 수단, 에리트레아에 이르는 아프리카 사헬 지역을 관통하는 저항의 축이라는 영혼의 동지를 찾았다”(Pepe Escobar, “The Sahel’s ‘Axis Of Resistance’,” The Cradle, 2024.4.1.).

작년 7월에 친프랑스 현임 대통령을 축출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니제르의 군부정권은 자국에 주둔하던 1,500명의 프랑스군대를 쫓아낸 바 있다. 군부의 탈프랑스 정책은 큰 대중적 지지를 얻으며 실시되었는데, 그런 점을 잘 보여준 한 사례가 니제르 여성들이 프랑스 대사관을 에워싸고 냄비를 두드리며 소음 시위를 벌인 것이다. 당시 니제르 여성들은 프랑스인은 ‘문명인’이라 거들먹거리니 시끄러운 것을 싫어할 것이라고 우정 소음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니제르 군부는 탈프랑스화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 그들은 자국에 아직 주둔하는 미군의 철수도 요구하고 나섰다고 전해진다. 아프리카 최대의 자국군 드론 기지를 둔 니제르에서 쫓겨나면 미군으로서는 큰 타격을 입는 셈이다. 미국 측은 아직은 니제르 측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있으나,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 자국 주둔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는 것 자체가 니제르의 신군부는 우리가 흔히 아는 군사쿠데타 세력, 즉 정권을 잡은 뒤에는 제국주의의 꼭두각시가 되는 반민족, 반민중 군부 세력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니제르는 부르키나파소, 말리와 함께 작년에 ‘사헬 국가 동맹’을 맺은 상태이기도 하다. 니제르가 작년에 프랑스군대를 축출한 데 이어 미군에 대해서도 철수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그런 동맹의 결성으로 자국 안보가 강화되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행동일 듯싶기도 하다.

사헬 지역에서 형성된 저항의 축은 서아시아에서 형성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커 보인다. 서아시아 저항의 축에 속한 국가는 이란과 시리아뿐이고 다른 세력은 비국가 조직들이다. 반면에 사헬 저항의 축에 속한 것은 모두 국가들이다. 물론 이들은 이란을 중심으로 결성된 서아시아 저항의 축과는 달리 아직은 공동전선을 형성한 것은 아니다. 세 나라로 구성된 ‘사헬 국가 연맹’ 이외에는 하나의 흐름 또는 바람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헬에서 구축되는 저항의 축은 아프리카대륙 전역에 걸쳐 이미 형성돼있는 반제국주의 흐름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세계질서에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클 수 있다. 최근에 브릭스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를 새 회원국으로 받아들여 기존의 회원국 남아공과 함께 아프리카 국가 회원국 수를 늘렸고, 올해에는 알제리아를 회원국으로 추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밖에 가봉, 나이지리아, 콩고민주공화국도 가입 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나라가 브릭스 회원국이 되고, 아울러 사헬 지역 저항의 축 국가들과 서로 협력관계를 구축하면 아프리카에는 전혀 새로운 국제관계 판도가 형성되는 셈이다.

저항의 축이 서아시아에 이어 아프리카에도 형성되는 것은 미국 주도의 서방 제국주의 세력에는 큰 타격일 수 있다. 미국 등은 이미 우크라전쟁에서 패배를 앞두고 있고, 가자전쟁에서도 난국에 봉착한 상태다. 그런 마당에 아프리카에서도 반제국주의 흐름이 강화되면 이미 나타난 일락서산의 형세는 더욱 짙어질 것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미국이 주도해온 일극적 세계질서가 무너지고 있고, 다극적인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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