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허구한 날

마음 아픈 사람

마주하는데

당신은 아프지 않느냐

예, 아픕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사느냐

아픔이 아픔을, 진짜배기로 만나면, 그

뭐랄까, 어이 어이

힘이 나요

그래서 살지요

치료란

그런 겁니다

같이 아파서 나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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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7 2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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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8 09: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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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8 0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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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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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눈물의 양엔 변함이 없지. 어디선가 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면 한쪽에선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오.”(「고도를 기다리며」 1막)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이 잠든 밤에’ 누군가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은 그 개인의 눈물이 아니라 이 세상의 눈물이다. 다만 그들은 ‘당신’과 달리 ‘눈물을 거두는 사람’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자리에 운 나쁘게 서 있을 뿐이다.·······‘눈물을 거두는 사람’의 자리에 설 수 없고 서지 않는다.·······함께 우는 길을 택한다. 이것이·······윤리감각이다.(642쪽)

 

사무엘 베케트의 말이 사실임을 조건으로 한 저 해석, 그러니까 누군가 눈물 흘릴 때 그 눈물은 세상의 눈물이고 그 세상의 눈물은 운 나쁜 사람이 짊어진 짐이라는 표현이 맞는다면 우리는 곤혹스럽게도 두 가지 상반된 이야기 구조 속으로 동시에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개인의 눈물이 사회의 눈물, 아니 좀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공적인 눈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저 여성학적 선언과 공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신자유주의가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갈라 침으로써 돈을 상위 1%에 집중하는 세상에서 이 이야기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이자 인간다움을 지켜내기 위한 최후의 말입니다.

 

다른 하나, 눈물 흘리는 사람은 운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뿐, 그러니까 눈물 흘리고 거두는 차이가 정녕 운의 문제일 따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운을 다른 어떤 말로 바꾸어 놓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눈물 흘리는 자리에 선 것이 그 개인의 책임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세상 자체 또는 세상에 속한 또 다른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책임도 아니라는 뜻까지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허무를 부르는 음울한 노래입니다.

 

뜻밖에 여기서 하나의 윤리감각이 솟아오릅니다. 눈물 거두는 사람의 자리에 설 수 없고 서지 않는다, 함께 우는 길을 택한다, 는 것입니다. 이 윤리감각의 터전은 무엇일까요? 운에서 의미가 나올 수 있을까요? 허무에서 당위가 나올 수 있을까요? 함께 우는 길을 택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삶의 의미를 알아서 당위를 끌어내는지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신학에 기대보아도 철학에 기대보아도 사회이론에 기대보아도 금방 들통이 나고 말 하찮은 논리뿐이기 때문입니다. “왠지, 그냥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642쪽) 그리 한다고 왠지 ‘모를’ 소리 하는 것이 고작 아닐까요. 하기는 윤리감각이든 생명감각이든 ‘감각’이란 것이 본디 그렇게 배어나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못내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도 명쾌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4월 16일 이후, 그대가 그 감각 때문에 자꾸 울음소리 나는 곳으로 몸이 끌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알아차림에 터하여 다시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요?”

 

대답이 가능한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불가능성은 차치하고 우리사회가 그 동안 그런 질문에 대답할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강제하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다가 4월 16일에 처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내가 누군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질문하는 일입니다.

 

“왜 내가 눈물을 흘리는 사람과 함께 우는 길을 선택하려, 선택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인간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되기 위해 질문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앞선 질문들에 대답할 수 없었던 연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질문할 줄 몰랐으므로 공적인 눈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꼭 그만큼 공적인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가 새끼들 목숨이었습니다. 여기서 또 다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질문을 하지 않고 예전처럼 엎드린 채 넘어간다면 바로 그 다음 표적은 우리 목숨입니다.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자기는 거두면서 타인에게 세상의 눈물을 흘리도록 강제하는 자가 누군가? 그는 무엇으로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더 이상 그 강제를 당하지 않으려면 이제 어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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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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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도 웃지도 않는다.(627쪽)

 

적극적 사고방식 또는 긍정의 힘이 석권해버린 자기계발 시장에서 ‘들뜬 원숭이’들을 사로잡은 것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웃음요법입니다. 이 물건을 팔아먹는 사람들은 억지웃음이라도 건강에 좋다며 일부러 미친 사람처럼 웃도록 이끕니다. 최근에 억지웃음은 오히려 심리적 상처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긍정주의에 날린 어퍼컷 같은 내용인데 아마도 웃음 파는 긍정주의자들은 대부분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긍정주의는 유구한 서구적 사유체계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입니다. 모든 분야에 이런 사유체계가 기반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의학이 예외일 리 없습니다. 증상으로 나타나는 병을 그들은 적, 그러니까 부정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적은 무조건 타격해야 할 존재입니다. 적이 열이면 해열제, 통증이면 진통제, 염증이면 소염제, 우울이면 항우울제로. 약, 그러니까 긍정으로 타격하는 일 말고는 방법을 모릅니다. 일극집중으로 몰아가는 이 대결구조는 질병과 치료의 진실을 무자비하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감기가 걸려 열이 나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서구의학을 배운 의사는 무조건 열을 타격해야 할 적으로 생각하고 해열제를 처방합니다. 그러나 이 때 열은 몸 스스로 방어하고 치료하는 과정이자 그 산물입니다. 해열제를 투입하는 것은 몸의 자가 치료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반복되면 몸은 자가 치료 능력을 잃고 맙니다. 이런 어이없는 광경은 서구의학 전반에 걸쳐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어이없는 광경은 서구 세계 전역에 걸쳐 벌어지고 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일에 울었고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일에 웃었다·······.(627쪽)

 

앞서 억지웃음에 대한 최근 연구 결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 연구에는 정색正色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좋다는 내용이 더 들어 있습니다. 정색하는 것은 ‘울지도 웃지도 않는’ 것입니다. 문득 멈추어서는 것입니다. 문제 상황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응시하는 것입니다. 판단·평가·선택을 유보하고 전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허령虛靈함으로 문제에 들러붙은 어둠의 당김 줄을 풀어줌과 동시에 청랭淸冷함으로 해결을 향한 날선 시선을 거두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하지 않는 상태이므로 스스로의 영토적 경계를 지니지 않습니다. 점의 위상으로 문제를 관통합니다.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답이 아니라 문제입니다. 어차피 정답은 없으므로 문제를 정확히 읽는 것이 관건입니다. 문제를 정확히 읽으려면, 일단, 무조건, 정색해야 합니다. 정색하면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 경직이 풀립니다. 경직이 풀리면 놀 수 있습니다. 놀이 속에 수많은 답들이 뛰어다닙니다. 뛰노는 답들이 비로소 우리에게 자유자재로 ‘울기도 웃기도 하는’ 세상을 열어줄 것입니다.

 

 

개천절인 어제 소설가 김훈이 문인들을 이끌고 ‘기다림의 버스’에 실려 팽목항을 찾았습니다. 아직도 열 명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그 문제의 바다. 김훈은 ‘현상’만 늘어놓고 세월호 사고는 끝났다 떠드는 무리들을 향해 ‘진상眞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진상’을 확인하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정색을 유지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때까지는 울지도 웃지도 않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위처럼 버티고 기다릴 까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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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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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섹스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달리 없다는 데에 있다. 어째서 그런가?·······섹스는 결합인데, 결합은 불가능하고, 불가능을 반복하는 일은 고통이기 때문에·······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외면해야 한다.(597쪽-마지막 두 문장의 순서 바꿈은 인용자)

 

결합을 위한 유일 유력한 길인 줄 알고 들어서서 가보니 도리어 결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심연을 목도하고 마는 섹스의 고통. 고통인 섹스를 직시해야만 알아차려지는 진실. ‘진실은 늘 고통과 더불어 오고,’ 그 고통을 한사코 피하려는 인간에게 섹스는 진실 은폐의 다시없는 수단이 됩니다. 진실을 외면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보상, 그러니까 생명의 창조-그렇지 않은 섹스가 있음은 물론입니다-와 쾌락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결합했다고 스스로 속일 수 있는 천하의 마약인 셈입니다. 마약에 중독되지 않고 진실을 맞이하려면 곡진·결곡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결합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결합이란 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결합이 불가능하다면 당연히 고통스러운 것인가?

 

이미 <아름다운 둘이 되려면-몰락의 에티카49>에서 말씀드렸듯 ‘봉헌의 기적’, 그러니까 (여기서) 섹스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둘이 되기 위해서 하는 거룩한 행동입니다. 좀 더 진실에 육박한 기술記述은 “아름다운 둘이 되는 것이 바로 결합하는 것이다”입니다. 이 말을 두고 형용모순이니 역설이니 떠들기 전에 대뜸 알아차려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결합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여태껏 속아온 결합은 서구적, 변증법적 결합이라는 것. 서구적, 변증법적 결합은 반드시 폭력을 전제한다는 것. 폭력을 전제한 결합은 없어야 한다는 것. 아니. 당최 없다는 것. 그것을 결합이라 한다면 극한의 분열을 결합이라 우기는 짓이라는 것. 우기는 섹스로는 참된 결합, 그러니까 아름다운 둘이 될 수 없다는 것. 아름다운 둘이 될 수 없으므로 괴로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이제 진경眞景으로 썩 들어서 볼까요. 아름다운, 아름다운 둘. 아름답다는 것이 핵심의 핵심입니다. <아름다운 둘이 되려면-몰락의 에티카49>에서 인용한 칼릴 지브란의 일부를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그렇습니다. 저 출렁이는 바다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섭도록 내밀하고 끔찍하도록 격렬”(597쪽)한 “심연”(597쪽)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바다를, 그러니까 “몰락”(5쪽)을 “선택”(5쪽)하였기 때문에 “참혹하게 아름다”(5쪽)운 것입니다. 아파서 아름다운 그 둘의 표정은 “숭고”(5쪽)합니다. 아프(痛)되 괴롭지(苦) 않습니다. 고통이라는 잘못 교배된 키메라 허깨비는 사라집니다. 허깨비를 피하려고 외면하는 일도 사라집니다. 직면하면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우리는 “섹스·······‘하는’ 시”(613쪽)라 합니다.

 

 

혼과 혼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아름다운 둘이 되려 하는 사람들에게 그 바다를 메우라고 말하는 자, 그러니까 거짓 결합을 설파하는 자는 미상불 사탄의 주구일 것입니다. 사탄의 주구가 떼거리로 몰려들어 아름다운 둘들의 숭고함을 때려 부수는 일이 지금 이 땅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무섭도록 내밀하고 끔찍하도록 격렬한 심연, 그러니까 아프디아픈 진실을 덮어야 제 곳간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이 생명과 안정이라는 미소를 흘리며 치명적 섹스로 홀리고 있습니다. 이 땅의 ‘시인’이여, 오늘이야말로 참으로 섹스 ‘하는’ 시를 쓸 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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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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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남과 죽음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서, 인간은 태어남의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고 죽음의 순간으로 미리 달려갈 수 없다. 오로지 섹스만이 인간의 소관이다.·······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섹스뿐이다. 그러므로 섹스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596-597쪽)

 

남성가부장이 지배해온 역사는 전복顚覆의 역사입니다. 위대함과 사소함을, 거룩함과 속됨을 홀랑 뒤집어버린 과정이 우리가 겪은 인간의 역사입니다.

 

참 위대함·거룩함을 감추기 위해 사소함·속됨을 위대함·거룩함으로 둔갑시킨 것이 바로 창조와 심판의 능력을 부여해 신이라 이름 지은 허깨비입니다.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 인간이 말할 수 없는 생사 문제를 지배하려고 지어낸 허무맹랑한 내러티브가 남성 이미지로 칠갑한 신화와 종교경전입니다.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한 것은 다름 아닌 섹스입니다. 해야 할 말이 참으로 많은 이 위대하고 거룩한 사건에 대해 인간은 장구한 세월 동안 허접한 가십 류 담론을 배설해왔습니다. 해야 할 말이 참으로 적은 저 사소하고 속된 신에 관한, 그러니까 생사 문제에 대해 인간은 장구한 세월 동안 심혈을 기울여 고급 담론을 빚어왔습니다.

 

섹스가 이렇듯 사소하고 속된 것으로 전락한 까닭은 바로 이 섹스에 대한 남성의 열등감 때문입니다. 열등한 주제에 지배하려니 진실을 비튼 ‘구라’를 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섹스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생명의 창조, 그 이니셔티브가 여성에게 있으며 심지어 전 과정에 걸친 섹스 감각마저도 여성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긍정하기는 싫고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으므로 남성은 전천후로 섹스 문제를 왜곡하였습니다.

 

섹스라는 어휘를 쓰는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면 더욱 딱합니다. 섹스라는 영어 어휘에 해당하는 아름답고도 의미심장한 순우리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공식적으로 ‘점잖은’ 글에 쓸 수 없는 뉘앙스를 장구한 세월 동안 만들어 넣었기 때문에 저기 「몰락의 에티카」에도, 여기 제 글에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중 억압, 그러니까 중압重壓입니다.

 

억압을 풀고 전복을 다시 전복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섹스가 왜 위대하고 거룩한가를 근본에서 밝히는 일입니다. 정치와 도덕의 그늘을 벗어나 진실의 태양 아래서 섹스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디테일은 뒤로 미루고 간단명료한 이치 하나만 밝혀보겠습니다.

 

섹스는 비대칭적 대칭으로 이루어진 세계 진실의 요체에 해당합니다. 관통과 흡수를 쌍방향으로 주고받는 모든 거래去來의 시원에 다름 아닌 섹스가 있습니다. 삶과 죽음, 들숨과 날숨, 먹기와 싸기, 잠자기와 일어나기, 일과 쉼, 이 모든 대칭적 거래 사건, 그러니까 거룩한 생명운동 시리즈는 섹스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통찰을 건너뛴 이른바 큰 지혜들이 공허한 까닭은 결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진실에서 벗어나 남성가부장의 ‘야동’적 관점을 고수하는 한 인간의 깨달음과 슬기로움은 미망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국가가 300명 넘는 국민을 고의로 죽이고도 ‘사고’로 처리하는 몰염치 또한 결국은 ‘야동’적 관점으로 정치를 타락시키는 자들의 탐욕에 기인한 것입니다. 근본을 말아먹고 진위를 전복한 사악한 자들의 손아귀에서 생명을 구하려면 적나라한 진실의 정곡을 단도직입으로 찔러 들어가 모든 것을 흔들어 깨우는 결기가 필요합니다. 에두르는 얄팍한 타협이 지속되는 만큼, “눈먼 자들의 국가”(「문학동네」 통권80호 세월호 특집 중 박민규의 글 제목을 인용함)에서, 생명은 지금처럼 속절없이 죽어갈 것입니다. 할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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