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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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전복은, 수구적이고 퇴행적인 것이라고 누구나 알고 있는 그것을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전복이라고 믿고 있는 그 전복의 관념 자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전복을 전복하는 전복·······(288쪽)

 

우리사회의 사악한 권력과 천박한 자본, 그리고 협잡 언론이 수많은 좋은 말·생각·사람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민주주의·촛불집회·김구·······반대로 수많은 나쁜 말·생각·사람을 하늘 높이 올려놓았습니다. 반공주의·4대강사업·이승만·······

 

덕분에 이제는 온갖 것이 뒤섞여, 거의 모든 문제의식과 판단이 맹목 신앙 수준에서 악다구니를 치고 있습니다. 매판과 애국이, 항일무장투쟁과 테러가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민중의 돈 1800조를 해외에 빼돌린 지배층이 산업화세력으로 군림하며 여전히 공적 이익을 사유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 집 전기요금에 재벌의 것이 포함되어 있는 줄도 모르는 대중은, 알 권리를 박탈당한 채, 여전히 이런 협잡에 베이스를 깔아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 그 진실에 터하여 우리사회에서 무엇은 홀랑 뒤집어엎고, 무엇은 단단히 다질 것인가, 하는 생각이 현실의 어지러움과 맞닥뜨리면 대단히 아득한 문제가 되고 맙니다. 너무도 긴 세월 동안 뒤집어엎어야 할 세력에게 도리어 뒤집어엎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착종의 엉킨 매듭을 끊고 나와 옹골차게 전복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어법을 달고 사는 자를 색출해내면 일이 쉬워집니다.

 

1. 두괄식 어법으로 계몽하는 자.

1. 2인칭 어법으로 훈계하는 자.

1. 금지 어법으로 통제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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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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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깊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바로 그것들이 이들의 역설적인 가능성이라고 저는 말하겠습니다. ‘깊이가 있다’는 것은 곧 그곳이 3차원의 세계라는 것을 뜻합니다.·······중심이 있고 주변이 있고 그 사이에 지배(정치적 공간)가 있습니다.·······2차원으로 돌아가면 지배관계가 발생할 수 있는 ‘공간’이 제거될 것입니다. 4차원으로 나아가서 제4의 축인 ‘시간’을 도입하면 지배관계가 관철되는 시간의 질서 자체를 흩뜨려버릴 수 있습니다.(284-285쪽)

 

문학, 예술을 거론하는 자리니까 깊이 이야기가 나온 것이지 사실 정치의 공간에서는 깊이라는 개념이 가당치 않습니다. 깊이 있는 정치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 권력은 돈과 연동되어 한사코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힘없고 돈 없는 ‘아랫것’을 밟아대며 키들거리는 장면에서 ‘근본 있음’의 인증샷이 성립되는 공간이 정치판입니다. 물론 정치가 일단 올라가면 영원히 내려오지 않으려 하는 ‘높이’는 지배와 소유를 위한 구조적 경사를 의미합니다. 기품·격조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지배-복종 관계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수탈의 일방적 미끄러짐을 막기 위해서는 깊이든 높이든 그 가파른 경사를 없애야 합니다.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시共時적synchronic 차원의 고르기입니다. 2차원 평면, 그러니까 평등한 정치지형을 만드는 것입니다. 국민nation, 정확히는 민중people에게 주권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높이, 서정의 차원에서는 깊이, 앉아서 통치하거나 계몽하려는 삿된 시도를 무화無化하는 것입니다. 붓다 버전으로는 무아無我입니다. 공자 버전으로는 중용中庸입니다.

 

다른 하나는 통시通時적diachronic 차원의 고르기입니다. 과거에 기반을 두고 현재와 미래를 선형적으로 통제하려는, 동요를 차단하려는, 권력과 부를 영속화하려는 삿된 시도를 무화하는 것입니다. 변화로만 나타나는 진실을 유연하게 세계 속에 번져가게 하는 것입니다. 붓다 버전으로는 무상無常입니다. 공자 버전으로는 시중時中입니다.

 

 

공시적으로든 통시적으로든 우리사회의 경사는 더욱 가팔라지고 있습니다. 더욱 강고해지고 있습니다. 미상불 정치적으로는 이 추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인문에 길이 있을 것입니다. 증상에서 치유까지 다양한 인문의 줄기들이 변방을 엮어 흔들어서 중심을 깨뜨리지 않는 한 미래는 우리 모두를 이끌고 ‘깊은’ 바다 속으로 침몰할 것입니다, 저 세월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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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의 망집에서 벗어날 때 현시되는 세계(-인용자)·······실상·······, 인간과 사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어떤 비()인칭적인(비인간적인) 에너지(-인용자)·······기운·······을 포착하(-인용자)·······“언제나 삶을, 그것을 가두어놓는 것으로부터 해방시키거나 혹은 그것을 불확실한 투쟁으로 이끌어내는”·······시인은 이미 존재하는 인간’·······보다는 장차 도래할 인간을 향해 말·······합니다.(282)

 

상식과 달리, 사람 뇌에는 만족이라는 개념의 방이 없습니다. 뇌의 개념 방에서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닌 경이감驚異感입니다. 경이감은 삶의 불확실성, 그러니까 비결정성과 맞닥뜨릴 때 일어나는 마음의 파동입니다.

 

불확실성 또는 비결정성은 삶의 본령입니다. 경이감은, 그러므로 삶을 삶답게 살게 하는 momentum입니다. 경이감의 마비를 강제하는 그 무엇이라도, 가령 자아·인간적임·서정·동일성·진리 따위, 죄다 투쟁 대상입니다. 그런 데 갇힌 경우라면 해방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해방과 투쟁은 뒷문이 활짝 열려 있으니 결국 같은 주파수를 지닙니다.

 

알 수 없는 진실의 난장에서 낯선 것들과 뒤엉키면서 기약 없는 길을 떠날 때 비로소 기운氣運은 생동生動하며 실상實相은 여여如如합니다.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입니다. 무상과 무아가 교직을 이루며 통, 그러니까 아픔을 빚어냅니다. 이 아픔의 증상을 참혹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것이 시입니다. 시는 아픔을 통해서 장차 도래할 인간에게 바쳐진 경이감 어린 헌사입니다.

 

 

지금-여기 대한민국 살아 있는 자들 앞에 이백쉰 서로 다른 꽃다운 죽음의 극한 통증이 있습니다. 그 아픔의 증상을 참혹하고 아름답게 그려내느냐, 여부에 따라 이 나라는 흥망의 갈림길에 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시인, 그것도 참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망집으로서 자아와 탐욕으로서 인간종자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장차 도래할 인간을 피눈물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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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혁명의 상태일 때에만 그것은 혁명이다.(245쪽)

 

그러니까, 가령 이런 것입니다.

 

·······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찬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가는 동안

수만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는 한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김선우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마지막 부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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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줄기들이 그 자유를 누리면서도 서로 연대하는 일·······이질성들이 공존(con-sist)하면서 ‘무질서의 질서’라고나 해야 할 어떤 일관성(consistence)에 도달하는 일·······(244쪽)

 

국보 제169호 청자양각죽절문병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보았습니다. 그 때 받은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받은 감동은 아마도 다른 많은 분들과는 다르지 싶습니다. 고려청자의 빼어난 비취색이나 그 병의 아름다운 형태미 등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를 사로잡은 것은 말로만 듣던 국보 청자양각죽절문병이 “대충” 만들어졌다는, 그러니까 장인이 낮술 한 잔 걸친 채 손톱으로 죽죽 대나무 사이를 가르고, 되는 대로 쓱쓱 대나무 마디를 그었다는, 느낌이 주는 무량한 친근감과 온기였습니다.

 

월드스타 김윤진을 영화 아닌 실제에서 가까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보았습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을 사뿐사뿐 걷는 배우가 아니고 아파서 옴쭉 달싹하지 못하며 신음을 토해내는 트레이닝복 차림의 맨얼굴 김윤진을 말입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건대, 분명히 그 맨얼굴 김윤진이 훨씬 더 아름다웠습니다. 아픔이란 창을 통해 드러나는 무량한 친근감과 온기는 그 어떤 화장과 미용술로도 빚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자분자분 병에 대해 이야기하며 때로는 묵묵히 그에게 침을 놓았습니다.

 

자유를 누리면서도 서로 연대하는 무엇, 무질서의 질서에 도달하는 무엇이 아니라면 실로 예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유를 누리면서도 서로 연대하는 무엇, 무질서의 질서에 도달하는 무엇이어야 진실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드러내는 게 예술의 본령이라면 이는 사람의 그것과도 같으니 결국 사람은, 그러니까 삶은 예술이어야, 아니 적어도 예술을 향해 부단히 걸어가야 하는 무엇입니다. 이 과정을 인문人文이라고 합니다. 인문의 위기는 삶을 예술 아닌 사업으로 여기는 ‘사람 아닌 사람’이 판을 치고 있는 사태입니다.

 

 

군대 폭력 문제의 해결책으로 인문학이 운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실소가 절로 터져 나옵니다. 대체 인문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렇게 인식한 인문학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온 나라를 사업 판으로 만들어 반反인문의 세상으로 만들어 놓고서 인문학을 떠드는 이 적반하장의 코미디. 연대의 맞은편에 날뛰는 자유가, 질서의 맞은편에 질펀한 무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떠드는 인문은 가짜입니다. 가짜가 권력으로 세월호의 진실을 뭉개는 오늘 정녕코 아나키의 미학이 필요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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