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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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모른 채 긴 세월 동안, 삶의 기조로 자리 잡은 만성우울장애에 시달리면서 한 가지 스스로 깨달은 것은 내가 냄새에 매우 민감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후각 기능이 뛰어나다, 뭐 이런 유의 이야기가 아니다. 냄새와 감정의 연결이 기민하다, 이게 핵심이다. 냄새는 기억을 불러낸다. 그 기억은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감정을 즉각 재현시킨다.


대뇌에는 변연계와 피질의 경계에 자리 잡은 편도체가 있다. 이 편도체는 감정의 외상(trauma)을 저장하고 방출하는 일을 하는데 시각, 청각, 미각, 통각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오직 후각에만 반응한다. 이러한 뇌 의학적 사실을 알 리 없건만 김선우는 놀랍게도 이런 통찰을 해내고 있다.


후각은 생의 비밀, 낮은 지대의 뒷골목에 가장 핍진하게 밀접해 있는 감각이며 가장 능동적으로 어딘가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감각이다.”(130쪽)


요컨대 내가 냄새에 민감한 것은 후각에만 반응하는 편도체가 과민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도체가 과민하게 작동한다는 것은 내게 감정의 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상으로 나타난 일련의 증후를, 나에 관한 한, 강박우울장애라고 서구 정신의학은 명명할 수 있다. 내 병식(病識)은 이렇게 거꾸로 구성되어갔다.


내게 어두운 감정을 몰고 오는 냄새는 대개 어둡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축축함이나 물기와 관련이 있다. 팥쥐 엄마처럼 독한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떠난 계모 한 분, 그리고 아동기 청소년기를 보낸 서울의 돈암동 산동네 주거 환경이 그 냄새의 진원지였다.


그 계모는 자신과 자신이 낳은 딸, 그러니까 이복 여동생이 사용하는 요강 청소를 꼭 내게 시켰다. 요강은 일반적으로 소변을 위한 것이지만 그 두 사람의 요강에는 대변도 들어 있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사내아이가 계모와 이복 여동생이 눈 똥, 오줌이 담긴 요강을 들고 마당과 거리를 지나 산동네 한가운데로 흐르는 계곡의 노천 하수에 가서 그 오물을 버린 다음 돌아와 찬 수돗물에 요강을 부시고 수돗가 한 쪽에 놓인 축축한 걸레로 닦는 광경을 그려 보라. 뒤섞인 똥과 오줌, 노천 하수, 걸레가 들이미는 그 형용 못할 냄새에 대한 기억은 거듭해서 원한과 수치심을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오랫동안 하루에 수십 번씩 손을 씻어대는 강박행동에 시달리게 했다.


산동네 전세방을 전전하며 살 때 어린 소년의 코를 괴롭힌 또 다른 한 가지 냄새는 방수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방에서 나는 곰팡이 냄새였다. 그리고 한구석에 놓인, 마치 그 방을 구겨놓은 상징물 같은 걸레의 냄새였다. 두 냄새는 사실 하나다. 사시사철 축축한 쪽방에서 그 냄새를 맡으며 늘 보송보송한 방을 꿈꾸었다. 어른이 되어 내 삶을 살 때부터는 언제나 그 보송보송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다가 문득 변화의 날이 들이닥친다.


나이 마흔 다 될 무렵 무남독녀 외동딸이 태어났다. 건조의 극치인 콘크리트 아파트에서 신생아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습도였다. 인공 가습기가 안 좋대서 기저귀 서껀 온갖 아기 빨래를 집안 곳곳에 만국기처럼 걸었다. 당연히 조그만 아파트 공간 전체는 호답지근한 습기에 휘감기고 꿈의 보송보송함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더군다나 아기의 숙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청소기 대신 하루 몇 번씩 걸레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걸레는 삶아도 이상하게(!) 그 즉시 냄새가 난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본질은 같은. 그 냄새는 아마도 걸레의 raison d'être일 터이다.


....... 무릎을 바닥에 모으고 오체투지하는 자세로 걸레질을 한다. 걸레를 앞에 두고 무릎을 꿇는 자세는 기묘한 정신의 각성을 불러오곤 한다. 걸레 냄새를 코앞에서 맡을 때도 있다. 퀴퀴하면서도 어딘지 흙냄새를 닮아 있는, 걸레 냄새는 시들어가는 것과 피는 것의 순환을 담지한 냄새다. 쇠락과 재생은 어떤 형태로든 연관되어 있다. 걸레는 연관되어 있는 세계의 순환을 단적으로 증거한다. 걸레는 저물고 뜨는 것들의 경계에서 지상의 얼룩을 지우고, 공간은 흘러간다. 나는 걸레가 지나간 자리가 꽃피는 것을 엎드려 오래 바라본다.”(136-137쪽)


딸아이의 출생과 더불어 내게 일어난 “기묘한 정신의 각성”은 가령 이런 변화와 맞물린 것이다. 축축함과 따뜻함의 결합, 그리고 학대 받은 아이자아에서 보살피는 어른자아로 바뀜. 그렇다. 내게 위로이자 치유로 다가온 이 변화. 변화는 경계에서 일어난다. 경계 사건은 각성이다. 각성은 생명의 꽃이다. 


어린 딸아이의 생명이 피어서 뜨고, 내 상처와 질병이 시들어 저무는 경계의 시공을 축축한, 음.......^^, 그러니까, 습. 습. 한. 걸레가 지나가며 꽃을 피워냈다. 하여 “엎드려 오래 바라본다.”는, 바로 이 김선우 자세가 숭고하고 관능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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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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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삼칠일을 무사히 넘기고 어린 내가 세상에 적응하기 시작하는 동안 나는 배냇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아기들의 배냇저고리는 소매가 길다. 긴 소매 째로 두거나 소맷부리를 묶어주거나 했던 배냇저고리의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생김새는 아기의 손톱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막 자라나기 시작한 손톱으로 아기가 제 얼굴을 스스로 할퀼까 봐.”(125쪽)


선친께서는 손톱을 뾰족동글하게 깎는 습관을 지니고 계셨다. 어린 시절 내가 그 까닭을 물었다. 젊은 날 주먹으로 사람을 때려 봤는데 당신 손에 살(煞)이 있더란다. 그 뒤 더는 사람을 때리지 않으려고 손톱을 그렇게 깎는다는 거였다. 그런 마음 자세를 본받을 만하다고 판단했던 것인지 나도 자연스레 손톱을 뾰족동글하게 깎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손톱을 동그랗게 깎기 시작한 것은 내가 아버지가 된 날부터다.


딸이 태어난 것을 계기 삼아 사람을 때리기로 결심해서가 아니다. 아기를 돌볼 때, 특히 목욕시킬 때 상처를 입힐 수도 있어서였다.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신경을 쓴 것은 딸아이가 첫돌이 될 때까지 젖먹이는 일 말고 모든 육아를 내가 했기 때문이다. 딸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해 내 손 탈 나이를 넘어서자 나는 본디 습관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다시 손톱을 동그랗게 깎기 시작한 것은 한의대 입학한 얼마 뒤부터다.


한의학도가 된 것을 계기 삼아 사람을 때리기로 결심해서가 아니다. 진단과 치료에 손을 써야 하는데 손톱 끝이 뾰족하면 진단 오류는 물론 치료 시 통증을 유발할 수 있어서였다.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신경을 쓴 것은 내가 복부 진단을 중시하는데다 우울증 환자나 사고 당한 후유증 있는 환자에게 수기(手技)치료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손톱을 동그랗게  자주 깎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아마 습관이 다시 바뀔 일은 없을 듯하다.


그러고 보면 아기와 환자, 특히 마음 아픈 환자는 근본적으로 닮았다. 모든 마음의 병은 상처 입은 시점에서 성장이 멈춰버려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는 이른바 발달불균형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의 병은 결국 양육의 문제다. 아기 엄마에게 주어진 과제와 마음 치료 의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렇게 하나가 된다. 내가 가사와 육아를 통해 모성 또는 여성성으로 스며든 것은 미상불 숙명이었다.


요즈음 스물여섯 난 젊은 여성과 두 달째 치유상담을 하고 있다. 아홉 살 때 입은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질 못 한다. 겉은 스물여섯 살이지만 속은 아홉 살이다. 물론 내게 오기 전엔 그 둘이 뒤엉켜 어떤 성찰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 둘을 떼어놓기 시작하면서 치유는 여울목 하나를 통과했다. 그를, 그 아이를 위해 나는 내 영혼의 손톱을 동그랗게 깎고 또 깎는다. 그의 엄마, 내 말 듣고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아직 손톱 들여다볼 엄두는 못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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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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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정호승의 시 <겨울부채를 부치며>다.


아들을 미워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인 것처럼
아버지를 미워하는 일 또한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일이나니
아들아 겨울부채를 부치며
너의 분노의 불씨가 타오르지 않게 하라
너는 오늘도 아버지를 미워하느라 잠 못 이루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술을 사러 외등이 켜진 새벽 골목길을
그림자도 떼어놓고 혼자 걸어가는구나
오늘밤에는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내가 눈사람이 되어 너의 집 앞에
평생 동안 서 있었으면 좋겠다
너의 손을 잡고 마라도에서 바라본
수평선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면
지금쯤 너와 나 푸른 물고기가 되어
힘찬 고래의 뒤를 신나게 좇아갔을 텐데
아들아 너를 엄마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일은 미안하다
살아갈수록 타오르는 분노의 더위는
고요히 겨울부채를 부치며 잠재워라
부디 아버지를 미워하는 일로 너의 일생이
응급실 복도에 누워 있지 않기를
어두운 법원의 복도를 걸어가지 않기를
나 다음에 너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다면
겨울부채를 부치며
가난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는 아들이 되리니


이 시와 마주하는 순간 나타난 것은 바로 김선우의 공간 감각이었다.


내 몸이 머물고 있는 공간이 갑자기 깨어날 때가 있다. 내가 속한 공간이 어떤 일렁임으로 가득 차있다는 느낌을 돌연 받게 되는 순간, 갑자기 화들짝 깨어나는 공간의 존재감 앞에 무릎 꿇게 될 때가 있다.”(106쪽)


다른 사람들은 다른 눈으로 읽고 다른 감각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아버지를 미워하느라 잠 못 이루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고
술을 사러 외등이 켜진 새벽 골목길을
그림자도 떼어놓고 혼자 걸어가는


삶을 살았다. 그 기억이 나의 punctum을 형성하여 이 시와 마주하는 찰나, 서로의 공간을 증폭해서 일깨우는 파동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의 파동을 이끄는 저 하로동선(夏爐冬扇)의 겨울부채는 때에 맞지 않아 쓸 데 없는 사물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분노가 일으키는 열이 얼마나 심하면 겨울에 부채를 부쳐야만 한단 말인가. 그렇게 이해하면 부채는 여간한 치료자가 아니다. 경이로운 치료자다.


부채를 흔들어 바람을 만드는 일. 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이 공간을 화들짝 깨우면서 공간 자체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107쪽)


나의 분노를 고요히 잠재운 마음 속 겨울부채는 이제 의자(醫者)인 내 일상으로 실제 들어와 또 다른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나는 진단할 때 부채를 쓴다. 많은 한의사들이 복부진단을 하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하고 말지만 나는 복부진단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환자를 눕게 한 뒤 상의를 걷어 올려 배를 드러내게 한다. 그리고 배에 손을 대고 짚고 누르고 두드리면서 듣고 묻는다. 체취를 맡는다. 색택, 피부상태, 크기, 균형, 지형, 각도, 주름, 배꼽의 깊이 등을 순식간에 본다. 이 모든 일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하는 게 바로 가벼운 부채질이다. 옷의 보온효과 때문에 복부 체온을 잘못 인지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다. 환자 상태에 따라 내 손을 부채로 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치료실에서도 부채를 쓴다. 목, 어깨, 등, 허리 부위 근육통을 침으로 치료한 뒤 파스나 크림 제제를 바르는 경우가 많다. 이 때 가볍게 부채질을 해서 청량감을 일으키고 다음 단계치료로 넘어가는 데 편의성을 높인다. 환자들은 특별한 느낌을 받는다. 어떤 중년여성이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 “부채 부쳐주는 한의사시네요.” 

 

 

없어도 그만인 곳에 놓인 두 개의 부채. 안 해도 그만인 일에 쓰이는 두 개의 부채. 이 사소함이 어쩌면 위대함이 자신을 드러내는 한 방식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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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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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뜨거운 관심을 끌었던 드라마 <추적자>에서 한오그룹 서회장이 이런 말을 한다.


“입만 열면 옳은 소리 하는 놈들은 제 가족 굶긴다. 그게 죄다.


백홍석이 했음 직한 이런 말을 떠올려본다.


“제 가족만 배불리는 놈들은 정의와 선을 팔아먹는다. 그게 죄다.”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말인가. 아니다. 앞 말은 현실(Sein)에 가깝다. 뒤 말은 당위(Sollen)에 가깝다. 앞 말은 나 같은 소인배의 폐부를 찌른다. 뒤 말은 ‘대인배’의 콧등을 간질일 뿐이다. 앞 말을 듣고 소인배는 고뇌에 빠진다. 뒤 말을 듣고 ‘대인배’는 정의와 선 개념 자체를 엎어버린다. 이 비대칭의 경사가 가파를수록 세상은 탐욕과 공포와 무지로 바글거리게 된다.


나는 매주 일요일 아침 일어나 습관적으로 고민을 하나 한다. 면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 면도하지 않으면 가족과 외식하든, 서점을 가든, 산에 가든....... 꺼칠한 맨얼굴 가지고 사적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뜻이다. 면도하면 ‘공적으로’ 외출한다는 뜻이다. 그 공적인 외출이 대개 내 이익과 무관한, 저 ‘대인배’들한테 죄인 취급당하고 현실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것이기에 고민한다고 표현했다.


적어도 이 고민을 하는 순간, 내게는 위 두 말이 정확히 대칭을 이룬다. 서로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남들이 생각하는 만큼 한의사로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이 결코 아니기에 늘 가족에게 미안하다. 앞 말은 비수가 된다. 이 사회의 어둠과 아픔을 내 세대의 어떤 사람보다도 깊게 넓게 겪어 알고 있다. 뒤 말은 벼락이 된다.


이 대칭은 옹골차 보이고 두 “경계는 단호해 보이지만 의외로 쉽게 무너진다. (대칭이란,) 경계란 그런 것이다....... 경계를 넘어가는 것들의 뒷모습은 유쾌하고 도도하다.”(96쪽) 내가 순간마다 고민하면서도 유쾌하고 도도하게 경계를 넘어가는 것은 김선우의 중얼거림을 듣기 때문이다.


소라의 몸이면서 소라의 집이었던 이 소라 껍데기 하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집이었을 것이다....... 내 손바닥 위에서 여러 생명이 지나간다. 소라 껍데기는 사물인가. 우리가 흔히 ‘사물’이라고 딱딱하게 규정하는 사물들의 기원은 따스하다. 그 어느 것이나 이 별의 핏물이 스며있고 고동치는 따스한 맥박이 번져있다. 소라 껍데기를 들여다보다가 중얼거린다. 나는 누구의 집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103쪽)


나는 누구의 집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인가. 이 중얼거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아니 인간이면 해야 하는 준엄한 질문이다. 이 때, 누구 속에 제 가족 밖 다른 사람이 없다면 여느 짐승과 다를 바 없으니 구태여 질문이랄 것도 없다.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머나먼 타인을 품 안의 인연으로 받아들이는 문제 앞에서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것이다.


이 중얼거림에 실려 인간은 영성을 지닌 존재로 되어 간다. 자기 자신과 제 가족만을 위해 악착같이 사는 사람이 수직적 신성 속에 놓이는 것은 영성이 아니다. 자기 자신과 제 가족 너머, 존재의 드넓음(spaciousness)을 향해 무한히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것이 참 영성이다. 이 영성에 실릴 때, 나 같은 소인배도 능히, 유쾌하고 도도하게 경계를 넘어갈 수 있다. 그렇게 경계를 넘어갈 때 비로소 천고의 진실 하나가 나의 오도송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미끄러진다.”(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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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여성들도 바늘 쌈지를 지니고 다니지 않는 세상이다. 도무지 손수 바느질 할 일이 없으니 그럴 밖에. 그런 와중에도 남성인 나는 바늘 쌈지를 지니고 다닌다. 물론 나 또한 쓸 일은 거의 없다. 쓸 일이 거의 없지만 꼭 자리 잡고 있는 양복 윗주머니처럼 내 바늘 쌈지는 시간의 흔적을 몸에 지닌 채 나와 늘 동행한다. 내가 늘 바늘 쌈지를 지니고 다니는, 바느질도 웬만한 여성보다 잘 하는, 데는 그만한 곡절이 있다.


아버지가 이삼년이 멀다 하고 이혼 재혼을 거듭하는 동안 집안일은 연로하신 할머니 몫일 수밖에 없었다. 아들의 그런 모습 지켜보는 할머니의 신산한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드릴 수 있는 내 나름의 배려는 집안일을 돕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바느질이었다. 지금이야 이불 같은 것도 바느질이 필요 없도록 만들지만 그 시절엔 일일이 호청을 빨아 다림질해서 꿰매야 했다. 해진 옷가지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바느질 이전에 버리거나, 필요한 경우 세탁소 아니면 수선 집에 맡기면 그만이다. 그 시절엔 몇 번씩 꿰매 입었다. 바느질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바늘에 실 꿰는 간단한 일로 시작했다. 나중엔 아예 이불이며 옷이며 양말에 이르기까지 내가 맡아서 바느질했다. 그러는 동안 내 바느질 솜씨는 어느덧 어설픈 단계를 넘어섰다. 급기야 할머니가 보조.^^ 보조로 물러앉으신 할머니는 끝내 원래 자리를 되찾지 못하셨다. 생애 가장 끄트머리에 치매가 시작되셨던 거다. 그러나 당신 내의조차 제대로 깁지 못 하시는 상태에서도 바늘을 놓지 않고 끈질기게 치매와 맞붙어 싸우셨다. 뭔가 알아들을 수 없게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실패한 바느질을 되살리려 애쓰시던 모습은 지금도 그렁그렁 내 영혼에 맺혀 있다. 

 

내가 지니고 다니는 바늘 쌈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마치 할머니 분신이기나 한 듯 바늘 쌈지를 지니고 다녔다. 결혼 전 20년 가까이 홀로 사는 동안은 물론이고 결혼한 뒤에도 여전하다. 바늘 쌈지만 지니고 다니는 게 아니다. 실제 지금도 바느질을 한다. 솔기만 뜯어졌을 뿐 버리기 아까운 옷가지나 작게 구멍 난 양말 정도는 기워서 입고 신는다. 긴 세월 이렇게 사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여성성이 내게 자리 잡은 듯하다. 옛날 제자들한테는 엄마 같은 스승으로, 지금 아내에게는 영화 <여배우들>에서 고현정이 한 말 그대로 ‘아내 같은 남편’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니 말이다.


바늘, 이것은 아마도 내 운명, 아니 내 자신이지 싶다. 바늘 쌈지와 바느질에서 배어 나오는 여성성은 최근 십여 년 동안, 또 다른 인연으로 내 인격과 인생에 깊게 자리 잡았다. 바로, 침(鍼), 그것이다. 바늘보다 더 낭창낭창한 이 쇠붙이는 바늘과 달리 그 귀가 침놓는 사람의 손가락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 본질은 같다. 침은 사람 몸을 뚫고 들어가 통증을 가라앉히고 막힌 기혈을 소통시킨다.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외연) 결국은 받아들이고 보호하는 것이다(내면).


예리한 바늘 끝과 다소 뭉툭한 바늘의 귀, 극도로 심플한 바늘의 몸은 이 두 극점으로 자신의 외연과 내면을 소통시킨다.”(86쪽)


어디서 이런 사유가 나왔을까. 김선우의 생각 힘에 감탄하면서 거기 힘입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내 상상력은 바늘이 양성구유의 완전체를 형상화한 것이라 여긴다. 예리한 끝과 둥근 구멍은 각각의 성기다. 예리한 끝은 관통하며, 둥근 구멍은 흡수한다. 관통과 흡수, 이것이 생명의 요체 아니던가. 바늘은 관통으로 시작하여 흡수로 끝나는 삶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늘은 자기 몸에 실을 꿰고 온 몸으로 옷감-현실을 관통한다. 그리고 숨는다. 바늘은 현실에 깊숙이 관여하면서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늘에게는 아상(我相)이 없다. 찢어지고 떨어지고 조각나고 해진 것들을 이어 붙이고 매달아주고 기워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타자 속에 스미게 한다. 바늘의 자아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이어 붙이고 부활하게 한 옷감으로 증명된다.......”(86쪽)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타자 속에 스미게 하는, 이 붓다 급, 그리스도 급 흡수라니!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직업 가운데 나는 의자(醫者)가 이런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바꿔보자.


“의자의 자아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치유하고 건강하게 한 환자로 증명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요즘 의자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자아를 증명한다. 물론 돈 때문이다. “죽음의 신은 목숨만 가져가지만 의자는 돈까지 가져간다.”는 인도의 고대 속담은 교통사고와 자살로 죽는 사람보다 의료사고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벽하게 의미롭다. 사람 건강과 목숨을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부패한 의자들의 영혼에게 김선우의 바늘은 숨은 자의 글썽이는 꿈으로 웅숭깊이 은유 되어지이다.


자기의 온 몸으로 자기를 넘어가는 바늘의 흔적은 고요하다.”(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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