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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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선우보다 열서너 해 앞, 아마도 그가 태어나 자란 곳 그 너머쯤, 강원도 오대산 줄기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 시절 그런 산골 마을에 의자 달린 책상을 가진 아이는 전혀 없었다. 대부분 방바닥에 엎드려 하거나 밥상을 펴놓고 했다. 조금 나은 형편이면 앉은뱅이책상 있을 정도. 나 또한 그랬고 그렇게 공부하던 기본자세는 그 뒤로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에 한의학 공부하겠다고 수능시험 준비를 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공부하던 곳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작은 암자였다. 그리 들어간 까닭은 수학 때문이었다. 스무 해도 훨씬 지나 다시 시작한 고교 과정 수학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백 점 만점에 팔십 점을 못 넘기자 나는 수학책만 열한 권을 싸들고 법대생 시절 사시 준비할 때도 가지 않았던 절로 향했다.


이 무렵엔 다른 과목 다 만점 맞고도 수학 팔십 점 맞으면 한의대를 갈 수 없었다. 하루 열다섯 시간 이상 수학공부만 하기 시작했다. 수도승과 다름이 없었다. 허나 그 수행(!)도 허사. 수능시험과 같은 조건으로 모의시험을 치면 늘 막히던 문제에 다시 막힌다. 막히면 불같이 화가 난다. 화난 채 풀면 점수는 오르지 않는다. 점수가 꼼짝 않고 똬리 튼 현실을 목도할 때 남는 건 절망뿐. 


바로 이즈음, 우연히, 앉은뱅이책상에서 공부하는 것이 의자 위에 앉아 공부하는 것보다 1.5배가량 체력소모가 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뜩이나 힘든 판에 그토록 체력까지 더 소모해가며 공부하면 안 되겠다 싶어 그 동안 정들었던(!) 앉은뱅이책상을 떠나 전격, 의자 위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공간이동, 자세이동이 어떤 예측 불가능한 자유를 몰고 온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의자의 받침 면과 다리가 만드는 ‘벌어져 있는 공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예측하기는 어렵다.......”(33쪽) 


.......의자에 앉아 있는 순간의 인체를 생각해보라.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앉아 있을 때 우리의 몸은 흔히 질서와 지혜를 향해있다.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우리의 몸은 ‘앉아 있다’는 측면에서 정적이지만, 정적인 고요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전자보다 훨씬 자유분방하게 움직인다.......”(34쪽)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모의시험을 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중후반부 어느 문제에서 막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직으로 화가 솟구친다. 그런데! 바로 다음 찰나, 굵고 나지막한 한 음성이 들린다. “너, 왜 화를 내는 거냐?” 온 몸에 소름이 확 끼친다. 재빨리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있을 리 없다. 아, 내면의 소리로구나! 즉각, 연필을 내려놓는다. 가만히 물어본다.


“왜 화가 날까?” 답이 곧 나온다.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가만히 물어본다. “왜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고 생각할까?” 답이 곧 나온다. “내가 지금, 사십 넘긴 나를, 이십 여 년 전 공부 잘 해 이름 날리던 열아홉 살짜리 그 소년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딩동댕! 과거의 어떤 기억, 그 기억으로 고정된 자아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경직성, 그게 답이었다.


현실을 현실로 해방하자 자유가 들이닥친다. 자유는 분노를 해체한다.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그게 변화의 진면목이 아니다. 화가 나지 않자 막혔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 기적이다. 기적이 아니다. 정확무비하게 이치를 따른 것이다. 이치를 따르지 못하던 상태에서 이치를 따르는 상태로 변화한 것은 “‘벌어져 있는 공간’ 속에서”였다. 벌어져 있는 공간은 경계의 틈이다. 경계의 틈에서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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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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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말리카 왕비 부부 이야기 끝에 붓다의 게송 한 편을 인용하고 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나보다 기꺼운 것은 없도다.

그토록 소중한 것 남 또한 그럴지니

제 자신을 아끼는 이

남 해하지 않으리.”(28쪽)


이 게송은 프리모 레비의 시 <게달레 대장>의 후렴 연과 조우한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유대인인 프리모 레비는 현자(랍비) 전승에 정통했음에 틀림없다. 사실 이 부분은 유대 전승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현자 힐렐의 어록을 변용한 것이다. 힐렐의 세 문장은 이렇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하는가?

내가 내 자신만을 위한다면 내가 무엇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


인간의 삶을 요약하면 사실, 딱 이뿐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자기 삶이니 자기가 살아내야만 한다. 이 사실은 내게 그런 만큼 남에게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나의 삶을 사는 사람은 남의 삶도 꼭 그만큼 소중히 한다.


붓다의 게송은 나중에 한자어로 이렇게 압축된다.


자리이타(自利利他)!


그렇다. 바로 대승불교가 그리 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이 인도를 넘어 동아시아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압축언어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힐렐의 세 의문문은 나중에 단 하나의 명령문으로 압축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렇다. 바로 예수가 그리 하였다. 힐렐의 가르침이 유대민족을 넘어 유럽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압축언어 덕분이다.


두 말은 정확히 그 뜻이 같다. 물론 통속 대승불교와 통속 기독교 모두 이 말을 사실상 곡해함으로써 사회적 실천 문제에서 실패했고, 실패하고 있다는 것 또한 같다. 자기 위상과 사명을 과도하게 의식한 나머지 이타(利他), 이웃사랑의 망상에 빠져 자기 사랑, 자기 신뢰를 등한히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기만은 물론 사회 전체를 기만하기에 이르렀다.


생각해보라. 지금 통속 대승불교와 통속 기독교가 우리사회에서 과연 무엇인가? 두 종교의 교인- 각기 주장하는 대로 통계를 낸 숫자-을 합하면 대한민국 국민 숫자를 넘어선다. 이타(利他),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종교인으로 차고 넘치는 이 나라의 현실은 과연 어떤가? 참으로 가소로운 노릇이 아닌가.


그러면 어찌 하여 이런 참담한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자리(自利)”와 “네 몸과 같이”란 말이 품고 있는 치명성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일이 대체 무엇이며, 또 얼마만한 일인가, 하는 문제를 건너뛰고 어설프게 큰 수레의 자비와 십자가의 영성을 선취했기 때문이다. 색(色)을 모른 채 공(空)을, 에로스를 모른 채 아가페를 뇌까렸기 때문이다.


갈 데 없는 과대망상이다. 과대망상은 결국 관념의 장난일 뿐이다. 이 관념의 장난이 은폐한 물적 현실은 어떠한가. 승려가 호텔방에서 포커를 치고, 목사가 알바 고용해 불법선거운동을 한다. 해탈과 돈 사이, 천국과 권력 사이, 과연 무엇이 똬리 틀고 있는 것인가. 바로, 지금, 불자와 기독자는 김선우의 이 담담한, 그러나 준열한 말을 영혼에 새기라.


자신에 대한 사랑은 거의 언제나 자신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며 자신에 대한 질문은 거의 언제나 자신과의 싸움을 포함한다.”(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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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우창헌 그림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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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이 불러 일으키는 향수는 흔히 세상의 어미들에 대한 그리움을 동반하는데, 아마도 '둥긂'과 '먹인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들은 먹이는 일에 열렬하다. 밥 먹는 아이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어머니들의 풍경은 지상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아름답고 또 조금은 슬픈 듯해 보이는 풍경이다.

 

먹는다는 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살아 있기를 희망하는 존재들에게필연적으로 부과되는 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존재의 치명적인 약한 고리이며 그리하여 먹는 일과 먹이는 일은 도덕적, 미학적 가치 부여 이전에 그 행위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진다."(17쪽)

 

읽고 또 읽어도 그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문득 프리모 레비 한 대목이 포개져 온다.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이것이 인간인가> 15쪽) 

 

아우슈비츠 마지막 끼니를 먹이는 유태인 어머니와 한사코 숟가락으로 감자 껍질을 벗기는 김선우의 어머니는 영원히 같은 어머니다. "그 행위 스스로의 위엄으로 순결해지는" 먹임의 어머니.......

 

김선우에게 이런 어머니가 계셨기에 그 사랑과 그리움을 달여내어 저 탱맑은 김선우 문학을 이루었으리라. 이 점에서도 김선우는 신께서 편애한 생명임에 틀림없다. 내게 숟가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아홉 살 어느 날 아침, 계모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면서 숟가락 모를 세워 머리통을 찍었던 일이다. 그 다음부터 '내가 대체 밥을 얼마나 많이 먹나' 숟가락질 수를 세는 습관이 한 동안 계속되었다.

 

기쁜 눈물 번지게 하는 김선우의 숟가락은 그에게 문학적 상상력을 수북수북 담아 떠먹이는 오목한 힘이 되었다. 슬픈 눈물 번지게 하는 내 숟가락은, 아마도 내게 의학적 치유력을 다독다독 부추기 볼록한 힘이 되었을 터이다. 이 볼록한 힘은 매 순간마다 내 슬픔을 일깨운다. 슬픔이 일깨워져야 내게 마음을 맡긴 사람의픔에 공감할 수 있겠에 신은 내게 숟가락의 볼록한 진실을 보이신 모양이다.

 

김선우가 신의 편애를 받았다는 말은 오목한 쪽 진실이니 어찌 보면 볼록한 쪽 진실에선 내가 편애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피장파장인가. 아니, 매우 치명적인 한 부분에서 여전히 김선우는 편애 받은 거다. 김선우의 숟가락은 삶을 '놀이'로 오목히 떠먹였다. 그게 문학의 찬란한 결이 되었다. 내 숟가락은 내 삶에서 '놀이'를 볼록히 앗아갔다. 지나친 진지함 '놀이'를 대신했다. 나는 그렇게 의학에 귀의다.  

 

하여 나는 놀이를 잘 모른다. 놀이에서 느끼는 즐거움과 경이로움의 감각이 발달하지 못 한 거다. 북콘서트와 강연 자리에서 김선우를 비교적 가까이 본 바, 그는 타고난 놀이 감각을 지녔다. 그의 목소리, 웃음, 몸짓, 그리고 마음짓 모두에 놀이 감각이 다글다글 굴러다닌다. 내가 오직 그런 김선우를 묘사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말이 '탱맑음(膨淸)'이다. 아마도 신은 내 것 모두를 거두어 그에게 주셨을 거다.^^

 

이제, 신과 대좌해야겠다. 내 의학과 치유에 놀이 감각을 되심어달라고 담판 지을 요량이다. 여생이 얼마일지 모르지만 지금부터 노는 의학, 노는 치유를 위해 신나게 놀아 봐야 하지 않겠나. 김선우의 응원을 기다린다. ㅍ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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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연인들 - 김선우 장편소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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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것은 시다


김선우는 내가 개인적으로 그의 생각 두어 자락을 잘 알고, 아는 만큼 절대 공감하는, 유일한 시인이다. 하여, 나는 그를 ‘천하시인’이라 부른다. 적어도 내겐 그의 시가, 시심(詩心)이 천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천하를 담고 있는 그가 천 날을 궁굴려 빚어낸 「물의 연인들」은, 그러므로 내게 소설이 아니고 시다. 그의 팽청(膨淸)한 목소리로 낭송하는 언어들에 귀 기울이면 이 시는 남모를 아름다운 환시를 공감각으로 전해준다. 


내가 본 크낙한 환시는 이 시의 비대칭적 대칭구조(unsymmetrical symmetry)다. 즉, 제2부와 제3부 사이를 경계삼아 꺾어 마주 붙이면 쪼개지면서도 포개지는 대칭성이 나타난다. 그 안은 물론 아리잠직한 환시, 즉 교차대구(chiasmus)의 직조 미학이 자리 잡고 있다. 즉, A-B-C-C'-B'-A' 구조다. 김선우가 처음부터 의도하고 이렇게 정교한 구조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그의 직관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해 그리 했다고 보는 게 맞지 싶다. 천하시인이니까.......^^


사실, 이런 건축학적 아름다움이 그야말로 내 개인적인 ‘환’시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프롤로그 첫머리에 인용된 그의 시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일부와 에필로그 첫머리에 인용된 그의 시 <사릿날>의 일부를 마주치게 하는 순간, 그리고 프롤로그의 속 제목 “모든 곳에서 춥고 모든 곳으로부터 먼”과 에필로그의 속 제목 “한 물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를 마주치게 하는 순간, 나는 이 구조를 떠올렸고 그 눈으로 전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전문가적 안목에서 그렇고 아니고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김선우의 독자로서 그의 미학에 좀 더 내밀하게 접근할 수 있다면 뭐, 그게 단순 ‘환’시든, 오류든 괘념할 일은 아니다. 덕분에 이야기 결결을 되작거리며 읽는 맛을 깊이 즐길 수 있어서 행복했으니 이 아니 행운인가. 감성으로 휘청거리며 읽는 일도 좋지만 지성으로 곧추 앉아 읽는 일도 여간 맛있는 게 아니다. 집중해서 읽는 내 모습을 아내가 보다가 갸웃한다. “지금 고시공부 해요?” ㅍㅎㅎ



1. [A: A'] 프롤로그: 에필로그


프롤로그를 이끄는 시는 이러하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에필로그를 이끄는 시는 이러하다.


금이 간 뼈를 보름처럼 구부리고

파도를 밀며 끌며 오는 사랑아

죽음보다 질긴 사랑이 있어

우리가 낳은 혼례의 어린 몸들 깊으니

일곱 잠째의 밀물이 이번 생엔 없는 것이어도

다음 생의 첫 잠으로 올 것을 아네


나는 「물의 연인들」을 읽기 전 이 두 시로 「물의 연인들」을 다 읽었다. 사람이 살지 않아 좋았던 시공과 다음 생 첫 잠으로 오는 인연 사이에 줄을 이으면 거기 모든 생명, 모든 죽음, 모든 주체, 모든 조건이 깃발로 걸릴 터이므로.


그러나 천하시인 김선우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다음 발걸음을 내디딘다. 프롤로그의 본문 속 제목은 “모든 곳에서 춥고 모든 곳으로부터 먼” 끊어짐과 멈춤의 사연을 휘몰고 온다. 비록 농염하고 아련함으로 가득 찬 에피소드가 넘실거리지만 그 넘실거림은 견결한 유령, 그 죽음의 금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에필로그의 본문 속 제목은 “한 물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 이어짐과 흐름으로 “여리고 환한 목숨의 빛”(264쪽)을 전해준다. 비록 물의 딸 수린의 다비로써 대단원의 막이 내리지만 프롤로그를 한 바퀴 뒤집어 이어붙임으로써 뫼비우스의 띠, 그 생명의 영원한 순환 길을 연다.



2. [B: B'] 제1부 유령의 시간: 제4부 흐르는 사람들


유경은 생애에 가중 소중한 두 사람, 엄마와 연인을 모두 잃고 “7년째 허깨비처럼 살고 있”(38쪽)다.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유령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38쪽) 유령은 아무리 달려도 갇힌 존재다.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끊어진 존재다. 아무리 흘러가도 멈춘 존재다. 유령의 시간, 그 봉인된 성에서 유경은 자신에 대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데)....... 그만 죽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살아 있”(38쪽)을 뿐이다. 이 때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도와주세요. 살인을 저지를 것 같아요. 수린이 죽어가요. 우리는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이에요. 모두 죽어가요. 제발 와주세요.”(36쪽)


운명의 전조”(36쪽)인 편지 한 통에 이끌려 유경은 와이강으로 간다. 와이강도 유령의 시간이 진행되고 있다. 와이강의 딸 열다섯 살 수린이 죽어간다.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아니 그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수린의 어린 연인 열일곱 살 해울이 죽임과,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유경이 절규한다.


저 애를 좀 도와줘. 제발. 요나스!


우리는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이에요.”(227쪽)


그러나 보라, 이 유령이 저 유령과 다름을. 갇힘을 깨고 유령이 달린다. 끊어짐을 부수고 유령이 손을 내민다. 멈춤을 무너뜨리고 유령이 흘러간다. 이 유령은 流령이고 저 유령은 幽령이다. 죽어가는 “수린에게서 물소리가 난다....... 강물의 본래 모습은 흐르는 것이지. 막혀 있는 것들은 썩는다....... 기억에 갇혀버리면 유령이 되지. 기억도 흘러야 한다. 나는 이제 흘러야 한다.......”(257쪽) 그렇다. 흘러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흘러서 살아야 한다.


고요의 터널을 빠져나오며 물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용조용 지저귀듯이 흘러나와 와이산과 와이강의 곳곳으로 스며들며 번져가는 물소리 속에서 유경이 말한다.


그렇지.......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258쪽)



3. [C: C'] 제2부 가면을 쓴 달: 제3부 붉은 물 자국


살고 싶은데 살아지지 않는다. 사람이고 싶은데 사람이 되지 못한다. 유령의 조건이다. 유령인 유경의 조건은 엄마 한지숙의 자살, 그보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연인의 황망한 죽음이다. 행복과 사랑의 관건이던 두 사람을 잃고 “푸르스름”(67쪽)한 “가면을 쓴 것 같은 달”(85쪽)에 홀려 피에로는 떠돌고만 있다. “달로도 지구로도 돌아가지 못한다.”(84쪽)


살기 위해서, 유경이 아프고 또 아프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과거를 비추는, 유령의 후광인 푸르스름한 달이 아닌, 현재를 드러내는, 인간의 조건인 붉은 강물이다. 지저귀는 기계들로 파헤쳐져 와이강이 흘리는 피, 그 “붉은 물 자국”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토막 나고 파헤쳐지고 적출되는 와이강이 유경의 머릿속에서 유린, 구타, 강간, 폭행, 모멸, 증오, 살인 같은 단어들을 마구 끄집어내고 있다. 악몽 속에서 유경을 움켜잡은 억센 손아귀가 유경을 끌고 다니며 패대기치듯이, 무서운 말들이 서로 엉킨 채 피 흘리기 시작한다. 엄마를 짓밟으며 그 남자가 퍼붓던 온갖 더럽고 잔인한 말들이, 왜 이 강변에서, 왜 또 이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악령들처럼 달라붙는지. 공포가 밀려든다.”(129쪽)


그리고


죽여 버리고 싶다, 저 새끼. 그런 자기 마음이 무서워 유경은 오줌을 지린다.”(84쪽)


급기야


흰 유령이 또 하나 쓰러지는 것 같은데, 오줌을 지린 것처럼 유경은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84쪽)


그렇다. 이 비인간적 도발에 대한 적의, 즉 살의야말로 인간생명에 대한 결곡한 자세다. 그 결곡함은 날카로운 공포가 된다. 공포는 살아 있는 것의 축축하고 질펀한 몸 반응, 즉 아랫도리 젖음으로 나타난다. 아랫도리 젖음은 “공포를 직감한 존재들의 울음”(167쪽)이다, 눈물이다.


유경의 눈에 눈물이 고여 오기 시작한다.


꿈꾸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필요한 건 꿈이 아니라 행동이에요. 복수할 거예요.


그리고 유경의 몸이 발끝부터 떨려오기 시작한다. 별안간 해울이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유경은 예감할 수 있었다. 맞닥뜨려야 할 순간이 오고 있다는 것을. 그 예감의 순간으로 오래 유랑한 바람이, 한 물방울이, 마침내 당도하고 있다는 것을.”(170쪽)


마침내


그리고....... 유경이 본다.


엽서의 맨 하단에 적힌 그의 이름.......


요나스 노드스트롬.


.......


“연우”


그랬다. 너였다. 이연우. 요나스 노드스트롬. 이리 와 봐. 요나스, 요나스, 요나스!

.......


어느 날 사라졌고 다시 돌아오지 못해 영영 길을 잃은 줄 알았던 이름이다. 가장 사랑하는 이름부터 차례로 지워나가 마침내는 유경 자신의 이름까지 지워지려 한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이름이다. 연우의 엽서 위로 유경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붉은 눈물 한 방울.


그토록 찾고 싶어 한 이름을 손에 쥐고 유경은....... 가만히 쓰러진다.”(171-172쪽)


그렇게 쓰러진 것은 유경의 유령이고, 그 유령의 시간이다. 그렇게 쓰러진 것은 유령의 조건인 가면을 쓴 푸르스름한 달이다. 이제 유경의 그 붉은 눈물 한 방울은 수린이 토해 낸 “붉은 흙탕물”(215쪽)로 이어진다. 해울의 젖은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흙탕물”(215쪽)로 이어진다. 이 붉은 생명 감각은 문득 이런 각성의 순간을 낳고야 만다.


그 때 유경은 처음으로 자신이 와이강의 미래를 걱정했다는 걸 깨닫는다.”(219쪽)


다!



0. 이것은 물이다


아마도 천 날 동안 김선우는 오감, 아니 제육감(第六感)까지 모두 일깨워 물과 마주하였을 것이다. 물의 모습을 보고, 물의 살갗을 만지고, 물의 냄새를 맡고, 물의 목소리를 듣고, 물의 맛을 마시고, 또한 설명할 길 없는 물의 기운을 느끼고....... 동시에 그 물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물인, 무경계의 세계에서 노닐었을 것이다. 하여 자신이 물이고 물이 자신인 경지에 이르고야 펜을 일. 단. 놓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돌아갑니다. 우리는 모두 돌아옵니다. 수많은 다른 모습들로.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한 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로. 그렇게 우리는 오고 갑니다.”(261쪽)


이렇게 김선우는 수린이 되고 해울이 되고 엄마가 되고 요나스가 되고, 끝내 와이강이 된다. 이렇게 김선우는 내가 된다. 물론 또 이렇게 나는 김선우가 되고 와이강이 된다. 김선우는 시인으로서 문학을 통해 생명의 고통, 그에 대한 사랑을 고민한다. 나는 의자(醫者)로서 의학을 통해 생명의 고통, 그에 대한 치유를 고민한다. 특정 부류 인간의 무지, 탐욕, 폭력으로 강이, 물이 살해되는 현실에서 어떻게 의학을 세우고 치유를 펼쳐야 할까. 이미 파헤쳐졌고, 여전히 파헤쳐지고 있으며, 그 상태에 갇혀 붉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강에게, 물에게 나는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147쪽) 무엇을, 어찌 해야 할까.


소심한 소시민인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사. 실. 상. 없다. 파괴는 너무 크고 눈물은 너무 붉다. 지금 여기서 나는 문득 김선우의 또 다른 유경, 저 「캔들 플라워」의 지오를 떠올려본다.


"아무튼 지오가 본 청계천은 번듯하게 치장된 인공의 슬픔이 가득할 뿐 자연의 생기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본 이후 무의식적으로 계속 청계천을 바라보는 걸 외면해 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물의 높이로 누워 있어보니까 청계천의 마음이 느껴졌다. 물이 살려고 하는 기척, 깊이깊이 호흡하며 살아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기척이 아프게 느껴지면서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길 없이 답답하게 가둬놓았지만 길 없는 그 길에서  뭔가 살 길을 모색하며 수로변의 풀들을 살리고  아주 작은 생명들을 살리기 시작하고 있는 청계천 물의 절박한 마음이 느껴져서 한없이 미안했다. 생명의 의지를 가진 물에게 함부로 "뭐야, 죽은 물이잖아?"라고 말해버린 게 너무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캔들 플라워」270-271쪽)   

 

슬픔에, 길 없는 가둠에 일방적으로 제압당해서 놓친, 생명의 기척에 대한 감각을 가차 없이 되찾는, 저 부끄러운 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죽으라고 자신을 가둔 지옥에서 다른 생명을 살림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되 깨워 천국을 빚어가는 역설, 비대칭의 대칭이 부끄러운 마음을 되찾은 지오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나, 오늘, 지오의 부끄러움으로 가만히 누워, 죽음 한가운데서 생명의 기척을 열어가는 저 강, 저 물의 마음으로 흘러가보리라. 와이강 편지에서 유경이 들은 연우의 목소리, 그 두 마디 말의 순서를 바꾸어 오늘과 내일의 강이, 물이 만나는 곳에 놓아두리라.


나는 고통스럽다.


나는 기쁘다.”(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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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에 시달리던 딸아이가 조금 여유를 찾은 듯 어제, 일요일 이른 밤 영화 한 편 예매를 해놓았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함께 영화를 보았습니다. <26년>.


개인적으로 저는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바른 인식 덕분에 70년대 중반학번으로서는 늦깎이로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입니다. 하여 영화 시작 이전부터 뻐근하고 뜨거운 흉통이 제게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영화 중후반부부터는 신열이 온 몸을 휘감으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찰나, 특정 인간을 죽여야만 한다는 간절한 염원 때문에 두 손을 으스러지도록 맞잡은 생애 최초의 경험으로 빨려들고 말았습니다. 누군들, 가슴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이다 이내 단 하나의 비원(悲願)으로 비수 끝처럼 예리해진 생명 감각이 온 영혼을 정적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총성과 함께 칠흑이 된 화면이 뜬 바로 그 순간, 저는 냉정하게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영화 아닌 현실, 그것이 아닙니다. 염원 아닌 현실, 그것도 아닙니다. 오직, 있어야 하는데 있지 않은, 바로 그 현실입니다. 그 현실로 돌아오자 제 눈에는 전혀 다른 의미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영화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영화도 사회행위의 일부입니다. 그 사회행위는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미와 재미가 어우러져 또 하나의 사회행위를 이끌어내기 마련입니다. <실미도>를 보십시오. <도가니>를 보십시오. 이제 <26년>의 차례가 아닐까요. 마지막 장면 그 젊은, 아니 어린 의경의 눈초리를 불씨로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해피엔딩 아닌 것이 퍽 다행스럽습니다. 해피엔딩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민중에게 허위의식을 심어줍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음에 대하여 눈감게 만듭니다. 그렇게라도 위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위안은 중독일 따름입니다. 중독인 위안이 현실을 더욱 어둡게 합니다. 아프디 아프게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당하지 않습니다.


돌아와서 트위터에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5.18은 12.19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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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9 1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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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1 14: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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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5 15: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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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6 16: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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