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6장 세 번째(마지막) 문단입니다. 

詩云維天之命 於穆不已 蓋曰天之所以爲天也 於乎不顯 文王之德之純 蓋曰文王之 所以爲文也 純亦不已.  

 

<시경>에 이르기를, "오직 하늘의 명은, 아아 충실하여 그침이 없도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하늘이 하늘 된 까닭을 말한 것이고, "아아 뚜렷하게 나타나지 아니하는가, 문왕의 덕의 순일함이여!"라고 하였으니 대개 문왕이 문(文)이 된 까닭을 말한 것이다. 순일하고 또한 그치지 아니함이다.    

 

2. 목(穆)의 뜻을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누구는 미(美)다, 누구는 심원(深遠)이다, 누구는 충실(充實)이다,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문맥에 답이 있습니다. 이 문단 전체의 맥으로 보아 穆도 純도 不已로 귀착된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不已는 제26장 전체 문맥에서 不息 또는 無息과 같은 의미군을 형성합니다.   

 

무엇이라 표현하든 온전한 도리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며 과정이기 때문에 수단화되어서도 안 되고, 결과적 상징물로 모셔져도 안 된다는 원칙을 거듭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 문맥에서 그 온전한 도리는 至誠이며 다른 표현은 至誠의 변주(variation)입니다. 결국 至誠不息 愈久無疆의  빛 아래서  부분적 이해를 조절해야 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穆은 至誠의 범주와 동떨어질 수 없는 말입니다. 充實이란 뜻으로 읽는 게 비교적 타당하지만 그렇게 읽으면 그냥 誠이라고 하지 않은 까닭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誠은 誠이되 사물의 이치를 가없이 맑게 드러내는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뒤에 文 임금의 덕을 純이라 한 것과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3. 文 임금 덕은 순수함입니다.  그의 정치적 실천은 하나하나 그 자체로 목적이므로 무슨 이득을 위한 수단이 아니어서 순수합니다. 백성과 온전히 소통하므로 그 기품이 투명하게 드러나서 순수합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 不已입니다.  

 

4. 맑고(穆) 순수한(純) 소통이 끊임없이(不已) 넘실거리는 사회를 만드는 게 정치의 본령이자 목표입니다. 물론 정치 현실에서는 제 이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구사하는 권모술수와 이전투구가 불가피하게 나타나겠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사회의 정치를 보면 전자는 없고 후자만 준동하고 있습니다.   

 

감사원장 후보였던 사람이 사퇴하면서 뱉어낸 말들을 들어보면 그 부류 사람들은 대다수 시민과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기야 그들은 대다수 시민을 천한 쌍것으로 여기니 소통이란 개념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겠지요. 그런데 그런 고귀하신 분들께서 이토록 천한 쌍것들을 국민이라 이름 하면서 존숭의 제스처를 취하니 도대체 민주주의란 얼마나 알량한 쇼인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제26장 두 번째 본문입니다.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其爲物不貳 則其生物不測.  天地之道 博也厚也高也明也愈也久也. 今夫天 斯昭昭之多 及其無窮也 日月成辰繫焉 萬物覆焉. 今夫地 一撮土之多 及其廣厚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 萬物載焉. 今夫山 一卷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之. 今夫水 一勺之多 及其不測 黿鼉蛟龍魚鼈生焉 財貨殖焉.   

 

천지의 도는 한마디로 다 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 모습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천지의 도(道)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유원하고 오래 지속된다. 지금 하늘은 곧 밝고 밝은 것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무궁함에 이르러서는 해와 달과 별들이 거기에 매달려 있고 만물이 그것에 덮이어 있다. 지금 땅은 한 줌의 흙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넓고 두터움에 이르러서는 화산(華山)과 악산(嶽山)을 싣고 있어도 무거워함이 없고 강과 바다를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새지 않으며 만물이 거기에 실려 있는 것이다. 지금 산은 한 주먹만 한 돌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광대함에 이르러서는 초목이 거기에서 자라고 금수가 거기에서 살며 보물들이 거기에서 생겨난다. 지금 물은 한 술씩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헤아릴 수 없음에 이르러서는 큰 자라. 악어. 교룡. 물고기. 자라가 거기에서 살고 재화가 거기에서 불어난다.  

 

2. 이 문단 해석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부분을 앞 문단 내용에서 그대로 가져오겠습니다.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至誠)은 자신의 엄정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그렇게 바꾸어 낸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 흘러갑니다. 애써 자랑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구태여 힘주지 않아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조종하지 않아도 잘 되어갑니다."  

 

이 문단에서 "그 모습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한 부분을 문맥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풀어 보겠습니다. 중용 실천을 하는 주체와 그 실천을 통해 일구어지는 새 세상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중용 실천자가 주체면 새 세상이 객체다, 이런 논리로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체면 서로 주체이니 대상화, 즉 물화될 그 무엇은 없다는 말입니다. 서로 주체의 평등한 쌍방향 소통이 무한 연쇄로 일어나는 한, 둘로 나눌 수 없는 게 이치다, 이런 말이지요. 중용 실천의 집단성, 공동체성, 사회성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측(測)은 근본적으로 예측한다는 의미를 썩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리학적 진실부터 이야기하지요. 만유인력을 계산하는 뉴턴의 공식이 있습니다. 만유인력 상수에다, 물체들의 질량 곱 값을 물체들 사이 거리 제곱으로 나눈 몫을 곱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공식은 두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공식은 두 물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타당합니다. 그리고 세 개 이상의 물체 사이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헌데 우주에서 멈춰서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두 물체만 따로 떨어져 있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뉴턴의 공식은 특수 상황에서만 통하는 하나의 이론 모델일 뿐입니다. 하물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무수한 소통을 무언가 도구를 써서 측정한다는 것, 나아가 예측한다는 것임에랴.......   

 

더군다나 서로 주체성의 무한 확장으로 넘실거리는 중용 세상이고 보면 측정, 예측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도구화하여 구별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도덕적 측면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測은 분리를 전제합니다. 測은 누군가를 대상화, 사물화 해야 가능합니다. 천지의 도리에서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3. 그러므로 사소함의 평등한 상호 소통이 모여 위대함이 됩니다. 그 위대함은 사소함의 위대함입니다. 그 사소함은 위대함의 사소함입니다. 天, 地, 山, 水, 그 어디에도 이런 도리의 예외는 없습니다.  

 

4. 이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종교 갈등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를 마귀집단으로 매도하면서 이른바 "땅 밟기" 등 몰염치한 행위를 서슴없이 하여 지탄의 대상이 된 바 있습니다. 헌데 그 문제점을 지적을 하면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일부다." 즉 다 그렇지는 않다는 이야깁니다. 말인 즉 맞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게 참으로 진정성을 지니려면 그들 중 누군가는 그런 행위를 말렸어야 합니다. 내버려두면서 "안 그런 사람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그런 행위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백 사람이고, 백 사람이 만 사람입니다. 허무맹랑한 測질, 즉 분리는 자기기만일 따름입니다.    

 

정반대의 예를 들어보지요.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으로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오직 김연아 한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온 백성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뿌듯해할까요? 아사다 마오 이야기만 나오면 신경을 곤두세울까요? 앞 이야기의 논리라면 일부, 아니 한 개인의 일일 뿐인데....... 좋은 일이면 함께 묻어가고 나쁜 일이면 따로 떼내버리나요? 참으로 가소로운 논리입니다. 중용은 준엄하게 말합니다. "분리하지(測) 말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제26장 첫 번째 문단입니다.  

 

故 至誠無息. 不息則久 久則徵 徵則愈遠 愈遠則博厚 博厚則高明.  博厚所以載物也  高明所以覆物也 愈久所以成物也. 博厚配地 高明配天 愈久無疆. 如此者 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그러므로 지극히 성실함은 쉼이 없다. 쉬지 아니하면 오래 지속되고 오래 지속되면 효험이 나타나고 효험이 나타나면 유원해지고 유원해지면 넓고 두터워지며 넓고 두터워지면 높고 밝아진다. 넓고 두터운 것은 물(物)을 싣는 것이고 높고 밝은 것은 物을 덮는 것이며 유구한 것은 物을 이루는 것이다. 넓고 두터운 것은 땅과 짝이 되고 높고 밝은 것은 하늘과 짝이 되며 유구함은 끝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나타내지 아니해도 빛나고 움직이지 않아도 변하며 작위가 없어도 이루어진다. 

2. 실천 중용이 구체적으로 역사와 사회 속에서 그 신호와 에너지를 전달해 나아가는 과정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至誠)은 다함이 없는 법입니다(無息), 중단하지 않는 법입니다(不息). 늘 깨어 있으면서 시간과 함께 단련되어 갑니다(久). 물이 흐르기를 멈추면 썩는 것처럼 "이만하면 됐다" 하고 주저앉는 순간 기득권 의식이 독으로 자라납니다. 시간의 물결에 늘 씻기면서 실천은 더욱 더 퍼들퍼들 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상태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견디며 후패하지 않아야 살아 있는 깃발이 됩니다(徵). 다함없는 실천은 그 자체로 증거이자 징조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며 깨닫게 하는 신호입니다. 굳센 에너지가 되려면, 경쾌한 파동이 되려면  시간 속에 살아 펄럭여야만 합니다. 

그 깃발이  펄럭여  아득히 먼 데까지 표지로 작용합니다(愈遠).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지평선 저 멀리 있는 사람에게까지 푯대가 되어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고, 걸어갈 용기를 줍니다. 참 실천은 반드시 또 다른 실천을 낳는 법입니다. 

그 실천의 아득한 파장은 점점  멀리 퍼져 나아가고 겹겹이 쟁여집니다(博厚). 참된 소통은 생명의 시너지를 일으킵니다. 잠자던 생명의 감각이 눈부시게 살아납니다. 감각들의 공현(共絃)은 깊은 울림이 되어 서로를 감싸줍니다. 퍼지되 얄팍해지지 않고 깊어지되 편협해지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과 사회와 자연의 생명력을 드높이고, 그 평등한 연대성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高明). 중용의 자랑은 중용 실천자의 덕이나 경지가 아니고 중용 실천으로 드러나는 대동 세상 그 자체입니다. 생명의 쌍방향 소통, 그 자체의 향기가 긍지입니다. 

3. 이처럼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至誠)은 자신의 엄정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그렇게 바꾸어 낸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 흘러갑니다. 애써 자랑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구태여 힘주지 않아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조종하지 않아도 잘 되어갑니다.   

4.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모 재벌 회장이 “한국 더 정신 차려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전에도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정작 더 정신 차려야 하고 정직해야 할 장본인이 그런 말을 훈계조로 일삼아 하고 다니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게, 아, 정말 형언할 수 없이 모멸스럽습니다. 물론 저 자신, 더 정신 차려야 하고, 정직해야 하지요. 그러나 그 화두가 그에게서 비롯할 것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그 따위로 뻔뻔하게 말하기 전에 이미 뼈에 새기고 있는 각성입니다. 

중용은 자기 엄정성(無息)에서 출발하여 평등한 생명 연대(高明)로 나아가는 유기적 통합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자기에게 관대함으로써 백성을 억압하는 헤게모니 블록이 판치는 이런 사회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평범한 백성이 일으킨 작은 깨달음 하나를 귀하게 받들고 자신의 어줍지 않은 문제의식일랑 가볍게 여길 줄 아는 군자 나기가  이리도 어려운 모양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제25장 본문입니다.  

 

誠者 自誠也 而道 自道也. 誠者 物之終始. 不誠 無物. 是故 君子 誠之爲貴.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故時措之宜也.  

 

성(誠)은 자기 자신을 이루는 것이고 도(道)는 자기를 인도하는 것이다. 誠은 물(物)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誠하지 아니 하면 物이 없다. 이 때문에 군자는 物을 귀하게 여긴다. 誠은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物을 완성하는 수단이 된다. 자기를 완성하는 것은 인(仁)이고 남을 완성하는 것은 지(知)이니 성(性)의 덕이며 안과 밖은 합하는 도이다. 그러므로 때에 맞게 조처하는 마땅함이다.  

 

2.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誠)은 내면의 힘에서 나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용의 도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스스로 소통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즐겁고 행복해서 관통하고 흡수하는 것입니다. 남한테 내세울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에게 겸손하게 청하여 함께 그 기쁨을 나눌 일입니다.  

 

3.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은 사건(物)을 일으키고 마무리합니다. 그 실천이 없다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진정으로 상호 소통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실천은 그 사건들의 생명주기와 함께 합니다. 사건의 주체이자 사건 그 자체의 불가분 일체입니다.  

 

4. 그러므로 적확하고도 치열한 실천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루어 가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태적  소통의 사건을 이루어 가는 일입니다. 사회와 자연과 절연된 개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입니다.  

 

5. 자기 자신을 이루어 가는 일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仁) 가능합니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 규정하는 게 아닙니다. 타인에게 부름 받아 규정됩니다. 그의 사랑을 받아 이루어집니다. 

 

사건을 이루어 가는 일은 사건의 흐름과 방향을 알아차려야(知) 가능합니다. 이 알아차림은 실천에서 나오는 증득(證得)의 지혜입니다. 함께 흘러감으로 생겨난 슬기로움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과 알아차리는 일은 본질(性)에서 통합됩니다(合內外).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소통의 서정이며 알아차림은 소통의 지성입니다.   

 

6. 소통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시간입니다. 그 때 그 때 알 맞는 영양과 보살핌이 마땅히 있어야(時措之宜) 생명은 유지되고 확산됩니다. 생명은 다만 은총인 것이 아니고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할 인연인 것입니다.    

 

7. 지금의 헤게모니 블록을 보면 仁도 없고 知도 없음이 확실합니다. 오직 탐욕과 그 것을 채워주는  공작적 정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무리하게 밀어 붙이고 나중엔 오리발 내미는 것으로 일관합니다. 時措之宜와는 정반대의 길로 내달리고 있습니다. 가장 큰 걱정은, 저들이야 결코 오래가지 못하겠지만 나라가 회복 불능 상태로 망가지면 어쩌나 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 않나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제24장 본문입니다.  

 

至誠之道 可以前知. 國家將興 必有禎祥 國家將亡 必有妖孼 見乎芪龜 動乎四體 禍復將至 善  必先知之 不善 必先知之. 故 至誠 如神.  

 

지극히 성실한 사람은 앞일을 먼저 알 수 있다. 국가가 장차 흥하려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 하면 반드시 흉한 징조가 있어서 시초(주역점)와 거북(거북점)에서 나타나고 몸에서 움직여진다. 화와 복이 장차 이를 경우 좋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알며 좋지 않은 것도 반드시 먼저 안다. 그러므로 지극한 성실함은 신과 같다.    

 

2. 온전히 적확한, 흐트러지지 않은 실천의 길을 가노라면 모름지기 예지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 예지력은 무슨 신비주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참된 소통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그 흐름을 공감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백성과 더불어 호흡함으로써 그들의 일상을 꿰뚫고 있다면 오늘의 마음 씀, 몸놀림을 보고 내일을 아는 일 또한 일상적 수준에서 가능할 것입니다.   

 

백성의 선한 말, 바른 행동, 즐거운 노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겠습니까? 백성의 악한 말, 슬픈 노래, 고통스런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징조란 것도 신비한 무엇이 결코 아닙니다. 하얀 구렁이가 나타났네, 돌부처가 눈물을 흘렸네...흥미롭기는 하나 그런 현상을 징조라 한다면 군자의 至誠으로 얻어지는  통찰력과는 실로 무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대인의 복서(卜筮) 행위는 자기 성찰이라는 정갈한 바탕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자기 탐욕을 내려놓고 천지 이치에 귀 기울이는 행위를 다만 앞날을 예견하는 기술쯤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 탐욕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에서는 백성을 위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요, 천지 이치에 귀 기울인다는 의미에서는 사태를 통합적으로 알아차리기 위해 마음을 챙긴다는 것입니다.  마음 비움과 마음 챙김의 역설적 일치에서 군자의 중용은 시대를 밝히는 빛이 됩니다.  

 

3. 이렇게 至誠은 신과 같습니다. 중용 명상을 통해 신통력을 얻게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치열한 실천에서 증득(證得)되는 통찰력, 예지력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권력, 재물, 명예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중용으로 이룬 大同 세상에서는 평등한 쌍방향 소통이 있을 뿐이거늘 무슨 억압과 차별과 소외가 있을 것입니까? 혁명의 기득권과 전리품을 내려놓고 밀림으로 돌아간 체 게바라가 바로 至誠의 화현이요 신입니다.   

 

4. 일전 주역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대산 선생과 인터뷰한 기사를 어느 일간지에서 읽었습니다. 그 어른께서 2012년에 어진 지도자가 난다고 하시더군요. 주역을 풀어 말씀하신 것을 중용적 실천에 따른 통찰력과 그대로 일치시키는 것이 가당한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 예언을 믿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지금 세월이 너무나 신산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실 거꾸로 된 생각이 더 큽니다. 왜 저 어르신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역사의 한가운데서 백성의 각성을 이끄시지 않을까, 주역에 기대어 예언하는 게 주역을 배운 이들의 최상의 실천은 아닐 텐데, 한 걸음 더 나아가 과연 그 어진 지도자가 누굴 말하는지, 아니 어떤 이를 세워야 할지, 말해야 하지 않을까.......이런 생각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