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26장 두 번째 본문입니다.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其爲物不貳 則其生物不測. 天地之道 博也厚也高也明也愈也久也. 今夫天 斯昭昭之多 及其無窮也 日月成辰繫焉 萬物覆焉. 今夫地 一撮土之多 及其廣厚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 萬物載焉. 今夫山 一卷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之. 今夫水 一勺之多 及其不測 黿鼉蛟龍魚鼈生焉 財貨殖焉.
천지의 도는 한마디로 다 할 수가 있다. 그것은 그 모습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천지의 도(道)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유원하고 오래 지속된다. 지금 하늘은 곧 밝고 밝은 것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무궁함에 이르러서는 해와 달과 별들이 거기에 매달려 있고 만물이 그것에 덮이어 있다. 지금 땅은 한 줌의 흙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넓고 두터움에 이르러서는 화산(華山)과 악산(嶽山)을 싣고 있어도 무거워함이 없고 강과 바다를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새지 않으며 만물이 거기에 실려 있는 것이다. 지금 산은 한 주먹만 한 돌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광대함에 이르러서는 초목이 거기에서 자라고 금수가 거기에서 살며 보물들이 거기에서 생겨난다. 지금 물은 한 술씩 많이 모인 것이지만 그 헤아릴 수 없음에 이르러서는 큰 자라. 악어. 교룡. 물고기. 자라가 거기에서 살고 재화가 거기에서 불어난다.
2. 이 문단 해석에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부분을 앞 문단 내용에서 그대로 가져오겠습니다.
"온전히 적확하고 치열한 실천(至誠)은 자신의 엄정한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강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그렇게 바꾸어 낸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 흘러갑니다. 애써 자랑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구태여 힘주지 않아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조종하지 않아도 잘 되어갑니다."
이 문단에서 "그 모습이 둘로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한 부분을 문맥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풀어 보겠습니다. 중용 실천을 하는 주체와 그 실천을 통해 일구어지는 새 세상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중용 실천자가 주체면 새 세상이 객체다, 이런 논리로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체면 서로 주체이니 대상화, 즉 물화될 그 무엇은 없다는 말입니다. 서로 주체의 평등한 쌍방향 소통이 무한 연쇄로 일어나는 한, 둘로 나눌 수 없는 게 이치다, 이런 말이지요. 중용 실천의 집단성, 공동체성, 사회성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측(測)은 근본적으로 예측한다는 의미를 썩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물리학적 진실부터 이야기하지요. 만유인력을 계산하는 뉴턴의 공식이 있습니다. 만유인력 상수에다, 물체들의 질량 곱 값을 물체들 사이 거리 제곱으로 나눈 몫을 곱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공식은 두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공식은 두 물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타당합니다. 그리고 세 개 이상의 물체 사이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헌데 우주에서 멈춰서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완벽하게 두 물체만 따로 떨어져 있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뉴턴의 공식은 특수 상황에서만 통하는 하나의 이론 모델일 뿐입니다. 하물며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무수한 소통을 무언가 도구를 써서 측정한다는 것, 나아가 예측한다는 것임에랴.......
더군다나 서로 주체성의 무한 확장으로 넘실거리는 중용 세상이고 보면 측정, 예측이 문제가 아니라 서로를 도구화하여 구별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도덕적 측면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測은 분리를 전제합니다. 測은 누군가를 대상화, 사물화 해야 가능합니다. 천지의 도리에서 그런 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3. 그러므로 사소함의 평등한 상호 소통이 모여 위대함이 됩니다. 그 위대함은 사소함의 위대함입니다. 그 사소함은 위대함의 사소함입니다. 天, 地, 山, 水, 그 어디에도 이런 도리의 예외는 없습니다.
4. 이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종교 갈등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특정 종교가 다른 종교를 마귀집단으로 매도하면서 이른바 "땅 밟기" 등 몰염치한 행위를 서슴없이 하여 지탄의 대상이 된 바 있습니다. 헌데 그 문제점을 지적을 하면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일부다." 즉 다 그렇지는 않다는 이야깁니다. 말인 즉 맞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게 참으로 진정성을 지니려면 그들 중 누군가는 그런 행위를 말렸어야 합니다. 내버려두면서 "안 그런 사람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그런 행위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백 사람이고, 백 사람이 만 사람입니다. 허무맹랑한 測질, 즉 분리는 자기기만일 따름입니다.
정반대의 예를 들어보지요.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으로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오직 김연아 한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온 백성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뿌듯해할까요? 아사다 마오 이야기만 나오면 신경을 곤두세울까요? 앞 이야기의 논리라면 일부, 아니 한 개인의 일일 뿐인데....... 좋은 일이면 함께 묻어가고 나쁜 일이면 따로 떼내버리나요? 참으로 가소로운 논리입니다. 중용은 준엄하게 말합니다. "분리하지(測)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