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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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iscellany

이 시집을 읽으면서 몇 가지 전에 없던 일을 겪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랍게도, 정말 처음 있는 일인데, 첫 시에 바로 가슴이 쩡! 하고 소릴 내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어떤 시집과 마주하더라도 처음엔 낯가림 하면서 읽는 게 습관이었습니다. 한참 지나가야 마음이 슬슬 뜨거워지고, 몸도 풀리지요. 한데 이번엔 첫 시 앞에서 오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급기야 시 전문을 손전화 문자에 실어 누구에겐가 보내기까지....... 

그리고, 시집 끄트머리에 붙은 시인의 말을 시보다 더 주의깊게 읽은 것도 처음입니다. 그 글을 읽는 제 호흡은 이렇게 마디지어집니다. 

 (1) .......꼭 가야하는 길이 있다. 나는 이제야 그 길이 시와 시인의 길임을 확신한다. 

 (2) 시인이 한 편의 시를 남기기 위해서는 한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3)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짧다.......시는 묵언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그 무엇임을 새삼 깨닫는다. 

 (4) .......앞으로 쓸 시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부신 오늘 아침을 맞이한다.    

흠, 60년을 꼬박 살고서야 확신이 서는 운명의 길이라.......그 운명의 길 종착역에서 비로소 시 한 편이 나온다.......그 시는 침묵과 버금한다.......이렇게 사무치는 깨달음 뒤에 쓸 내일의 시란 과연 무엇일까.......  

끝으로, 이건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시를 다 읽은 후 느긋한 마음으로 해설을 읽으면서 시 읽는 마음의 studium과  punctum을 살피는 버릇까지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해설을 통해 뭔가 살펴지지 않았다는 게 달랐습니다. 해설하신 분이 독자들의 수준을 배려해서(!) 그리 쓰셨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려 해도 시인의 그 짧은 시들에 비해 해설이 너무나 '길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2. studium  

정호승을 생각하면 그 맞은 편에 떠오르는 시인이 한 사람 있습니다. 마종기. 

정호승의 시는 수직적이고 마종기의 시는 수평적입니다. 정호승의 시는 운문성이 너무나 또렷하고 마종기의 시는 산문성이 지배적입니다. 삶의 차이일 수도 있을 테고 사람의 차이도 있을 테고....... 물론 내밀한 것까지야 알 수 없지만요.  

마종기는 시국사건에 연루돼 추방 당한 상태로 오랫동안 이국 땅에 살면서 끊임없이 겪는 회한과 그리움을 바탕으로 시를 쓰기에 아무래도 경쾌하게 수직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정도. 그냥 그의 시는  산문 같고,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면 산문적 삶에서 어떻게 운문적 정서가 나오는가를 대놓고 알려주는 시가 있어, 어쩌다 운문(!)인 시 사이를 이어준다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시종일관 배회, 방황 같기도 하고....... 

 정호승은 탄젠트적 상상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느낍니다. 그가 넘나들고 구사하는 은유, 그 절정으로서 역설이 너무 날렵해서 저는 'S라인 선문답'이라고 누구에겐가 말했답니다. 그것이, 때로는 통쾌함으로 다가오다가, 때로는 얄미움으로 다가옵니다. 통쾌함은 저의 아둔함에 금을 냅니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지요. 얄미움은 의심을 품게 만듭니다. 의심은, 가령, 마종기의 삶에서 이런 뒤집음이 나올 수 있을까, 또는, 그의 영성은 너무나 투명한 순물질이 아닐까.......실로, 물색없는 발상인데, 하여, 용서를 양쪽에 다 구해야겠지만, 어째, 가끔, 스님의 주례사가, 문득, 떠오릅니다.^^  

좌든 우든 그럼에도 몸 느낌으로는 분명하게 정호승에 기울어집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 그가 시인이거든요. 물론, 이런 제 생각이 결국 흔하디흔한 통속 감각이어서 도리어 안심입니다. 

3. punctum 

이 시집 전체를, 제 삶의 감각에서, 다음 세 편으로 관통해 봅니다. 

 (1) 어제 <뒷모습>을 돌아보며  

그동안 나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는 사치를 부려왔다 

내 뒷모습에 가끔 함박눈이 내리고 

세한도의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소나무에 흰 눈꽃이 피기를 기다려왔으나 

내 뒷모습에도 그믐달 같은 슬픈 얼굴이 있었다 

오늘은 내 뒷모습에 달린 얼굴을 향해 개가 짖는다 

아이들이 달려와 돌을 던진다 

뒷모습의 그림자끼리 비틀비틀 걸어가는 어두운 골목 

보행등의 흐린 불빛조차 꺼져버린다 

내일은 내 남루한 뒷모습에 강물이 흘러라 

내 뒷모습의 얼굴은 둥둥 강물에 떠내려가 

배고픈 백로한테 쪼아먹혀라 

 (2) 오늘 <충분한 불행> 앞에 서성대다 

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하다 

불행이라도 충분하므로 

혹한의 겨울이 찾아오는 동안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죽음이란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지만 살아갈수록 함께 살아가는 것 

더러운 물에 깨끗한 물을 붓지 못하고 

깨끗한 물에 더러운 물을 부으며 살아왔지만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 

 (3) 내일 <봄비>에 깃든다 

어느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 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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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장은 어기(語氣)나 내용의 기획성으로 보아 후대의 것으로 보입니다. 고증 여부와 상관없이 그런 판단에 의거, 맨 뒤로 돌렸습니다. 

2. 제2장의 본문입니다. 

仲尼曰 君子 中庸 小人 反中庸. 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  小人之中庸也 小人而無忌憚也.

중니는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하고 소인은 중용을 거꾸로 한다. 군자가 중용을 하는 것은 군자다우면서 때에 알맞게 하고, 소인이 중용을 거꾸로 하는 것은 소인스러우면서 꺼리는 것이 없다." (이하 이기동 역을 따름) 

3. 군자라는 용어는 익숙한 만큼 어려운 말입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게 함정이지요. 그래서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으로 둥둥 떠다니는 겁니다. 무엇보다 미리 전제된 개념이라는 인식이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구체적 문맥에서 군자의 내포를 찾지 않고 막연한 카리스마를 부여함으로써 은연 중에 통치자나 지배집단과 등치시키는 상징조작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 문맥에서 보면 중용을 하는 자가 군자입니다. 구체적 문맥을 보편적 지평으로 재빨리 전환하는 전술이 바로 주어와 술어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지요. 중국인들이 전가의 보도로 쓰는 어법입니다. 검증 과정 없이 역명제를 연역법의 선두에 세우는 일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중용의 도를 실천하고서야 비로소 군자가 될 수 있기에 중니는 뒤에 "도가 아마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제5장)라고 하여 군자가 '형성'될 수 없는 세상을 한탄하셨습니다. 바로 다음, 순 임금의 실천을 근거로 들며 "이로써 순이 되었다."(제6장) 즉 "중용을 실천함으로써 군자가 되었다."라고 갈파하셨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군자는 순 임금의 실천을 따르는 공자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는 마치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제자들이 하느님을 보여달라고 하자 "나를 본 것이 곧 하느님을 본 것이다."라고 일갈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결국 이를 신성모독으로 간주한 모세종교 집단의 손에 예수가 죽었듯이 군자-자의식을 가진 공자는 끝내 제후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공자가 군자면 저들은 필연적으로 소인일 테니 말입니다.  

이런 맥락의 연장선에서 보면 군자란 공자를 대표단수로 하는 당시 사대부 계층 혁신 세력, 그 사상, 그 실천의 지향점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날 표현으로 바꾸면 "깨어 있는 지식 민중" 정도라고 할까요...지나친 비약이 아닌 까닭은 다시 제6장에 나옵니다. 순 임금이 "묻기를 좋아하고 평범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평범한 말이 무엇인 줄 안다면 군자를 이렇게 아래로부터, 그리고 집단적으로 자리매기는 데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입니다.  

4. 이렇듯 주희의 뜻과는 상관 없이 군자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을 추구하는 기득권 특수층 세력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혁신적, 저항적 주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군자의 사회적 행동의 강령인 중용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에 맞서는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중용은 거의 모든 해석들이 답습하는 것처럼 명사적 어법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명사적 이해에서는 中이  핵심 가치이고  그 中이 불변하는 법칙임을 천명하는 게 庸이라는 식으로 규정됩니다. 명사로서 中이 무엇이냐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지만 사실은 그럴수록 관념성만 깊어질 뿐입니다. 명사라는 게 그 본령상 추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용 자체를 동사 구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동사구문 전체가 군자의 사회행위를 드러내는 술어가 됩니다. 中은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동사입니다. 庸은 말 그대로 "평범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중용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간결한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약육강식, 승자독식 사회에서 강자, 승자가 되려면 극단적 프로세스를 선택하는 "특별함/특수함"을 무기로 지녀야 합니다. 뭇 제후가 공자에게 바란 것이 바로 이런 "특별한/특수한" 프로세스였고 그들이 그것을 통해 휘몰아가는 세상이 바로 춘추전국의 피바람이었지요.   

권력, 돈, 그리고 지식의 삼각동맹으로 사회이익을 독점하려고 준동하는 제후의 탐욕에 맞서 평범한 다수의 삶의 가치에 굳건히 닻을 내리려 했던 공자의 몸부림이 다름아닌 중용입니다. 그러면 평범한 다수의 가치인 그 "평범함"은 무엇일까요? 

평범하다는 것은 그저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산다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산다는 것은 모순적 대칭구조로 이루어진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대칭의 경계에서 부단히 모순의 "공존통합"을 위해 "거래"하는 삶이 바로 평범함입니다. 

거래는 상호 "관통과 흡수"를 전제합니다. 쌍무적 관계 형성입니다. 소통입니다. 제후적 일방통행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쌍방향 소통을 하려면 자아의 中(가운데)을 버리고 "경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득권으로서 中을 버려야 비로소 중용을 이룬다는 역설이 여기에서 성립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동사로서 中의 실질적 내용은 "끊임없이 경계로 나아간다"는 역동적 경향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경계를 향해 나아가는 주체적 결단에서 늘 벗어나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그 경계에는 자신과 동등한 주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와 만나 일구어내는 "서로 주체성"(철학자 김상봉의 용어)의 세상이 바로 군자의 세상입니다. 군자의 세상은 거창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상호 소통, 거래, 관통과 흡수가 일어나는 일상적 사건 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庸입니다. 그 庸을 바르고 아름다운 흐름으로 만드는 것이 中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종래 중용이해는 거꾸로 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주희와는 맞는지 모르나 공자와는 맞지 않는, 아니 우리와는 맞지 않는 식민주의적  해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庸도 실천이요 中도 실천이니 둘 다 동사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도리어 庸에 있습니다. 

5. 대칭구조로 된 현실세계에서 모순을 "공존통합"시키는 건강한 거래, 공정한 소통은 시의성(時中)이 생명입니다. 찰나 찰나 서로 주체의 상황은 변하므로 그에 알맞게 소통해야 합니다. 영원 불변하는 규범이란 논리적인 차원에서라면 모르되 현실적으로는 무의미한 것이지요. 죽어도 해야 한다, 죽어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강박적 기준은 제후의 가치입니다. 군자는 때에 맞추어 그저 올바르게 할 따름입니다. 

6. 중용의 공간적/공시적 지평은 서로주체성의 평등, 평화 사회이념으로 나타나고 시간적/통시적 매락은 투명한 혁신, 저항의 역사의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이해야말로 평범한 사람, 즉 중용의 사람이 읽는 중용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주희와 그 아류를 따르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7. 군자가 위와 같이 자리매겨진다면 소인은 당연히 "홀로주체성"에 입각해 분열적, 강박적으로 강자의 길, 승자의 길을 추구하는 저 춘추전국 시대의 제후 무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희류의 사람 또한 거기에 소속되겠지요. 더 나아가 오늘 우리를 살펴 본다면 천민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지배집단이 바로 소인입니다.  

우리나라로 범위를 좁혀 보겠습니다.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한다"면서 말끝마다 국민을 향한 훈계를 달고 사는, 아마도 속으로 자신들을 군자라고  생각할, 이른바 사회지도층이 바로 소인 집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들은 스스로 중용한다고 함으로써 오히려 소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으니 소인답습니다. 저들은 부동산 투기, 주가조작, 이중국적 취득, 탈세, 병역 기피, 뇌물 수수, 위장 전입 등을 거리낌없이(無忌憚) 행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니 가히 소인의 중용답습니다. 

되는 대로 지껄이고 닥치는 대로 말을 바꿉니다. 개인적 소신과 국가 경영을 혼동합니다. 사적 처지와 공적 지위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  한다면서 지역감정에 편승합니다. 양극화는 가속도가 붙고 서민경제는 파탄의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거시 경제 지표 호전만 말합니다. 과연 기탄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사회를 이끌어가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권력, 돈, 지식을 원없이 향유하는 이른바 셀러브리티(celebrity)입니다. 이들 눈에는 "평범한" 국민들이 한심하고 만만하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허나 그들의 그 "특별함"이야말로 "無忌憚"과 동의어임을 어느 누가 부인할 것입니까? 

8. 군자는 늘 때에 알맞게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바로잡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득권적 중심을 버리고 스스로 경계로 나아가 타인과 소통함으로써 대동(大同)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그의 영혼은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시대정신에 맞서는 투명한 날카로움으로 빛납니다. 군자의 영혼이야말로 원철학적 혁명이요, 기품있는  좌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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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 2011-02-1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자 하나하나 몸에 부딪쳐오네요..눈물 글썽이며 읽고있습니다
-대구에서

bari_che 2011-02-2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 쉽지 않은 글인데 눈물을 글썽이며 읽으신다니 대단한 감수성을 지니신 분이군요. 더 세심하게 감각을 다듬어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까닭은
삶에서 어떻게 시공의 질서와 변화가  이루어지는가,
어찌하면 그 삶의 참된 주체로 설 수 있는가를 탐색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고전이든 숱한 눈길을 거치며 
세월보다 더 많은 의미군을  끌어안고 있겠지만
오늘 나의 눈으로 새롭게 읽지 않는 한 화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읽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읽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겠지요.
하여 무엇부터 읽을까 그리 오래 망설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와 매우 익숙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멀리 있는
유가의 사서삼경 중 <중용>을 한 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유가와 그 경전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한 바 없습니다.
홀로 사서를 서너 번 읽고, 한의대 예과 시간에 맹자를 부분적으로 공부한 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귀밑머리에 서리 내리도록  산 인생의 날들을 믿고 
무모하나마 고전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             *             * 

<중용>이란 텍스트는 본디 <예기>에 속해 있었는데 남송의 주희가 독립시켰다고 합니다. 주희는 <중용> 뿐만 아니라 <대학>도 그리 했고, 나아가 유가 경전 전체를 재구성하여 이른바 사서삼경이란 개념 자체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최종 텍스트로서 유가 경전 체계는 주희 한 사람의 편집작품입니다.  

물론 내용은 저자로 가탁된 사람의 직접 언술도 포함하겠지만  후대의 가필과 수정도 있습니다. 고대의 책 쓰기는 지금과 전혀 달라 단독 저자가 완작을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를테면 사회역사적 집단 창작이지요.  그러므로 깊이 있는 본문 비평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점일획이 다 성현 말씀이다, 이래버리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오늘 우리의 안목으로 사서삼경을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주희에게 있던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다면 사서삼경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겠지요. 체계 전체를 문제삼지 않더라도 부분적인 구성이나 의미 해석에서는 이미 수도 없이 재구성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끊임없이 흔들리며 시대마다 새롭게 태어나야 오히려 참된 권위를 지닌 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주희는 그 본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주희만큼의 치열성이 있다면  누구라도 사서삼경을 우리의 문제의식에 맞게 재구성, 편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희가 활동했던 남송 시대의 사대부에게는 크게 두 가지 화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통치 이념으로서 정통유가의 헤게모니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특히 불교 사상의 도전에 직면한 유가의 위기의식은 주희에게서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 바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하고 남으로 밀려난 한(漢)족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중화 이념의  확립을 통해 중원 패권의 옛 영광을 대체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 두 흐름을 한 데로 묶는 정치경제학적 연결고리가 바로 중산층 사대부의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주희는 한족 주체의 중국 전통 질서와 체계를 중심으로 모든 가치를 통합, 안정화하는 명사적 어법으로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읽어냈습니다. 이런 접근법으로 그가 처한 시대의  난관을 돌파했다는 점에서 주희는 참으로 탁월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희는 주희의 탁월함으로 빛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과연 주희의 어떤 관점이 유효할 수 있을까요? 제 소견에는 우리 사회가 주희와 너무나도 판이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만큼 다른 각도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제 그 읽기를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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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계곡의 나우시카 7 - 완결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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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고등학생인 제 딸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만화에 깊은 조예가 있는 후배의 소개로 미야자키 하야오를 알게 되었습니다. 딸아이에게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사주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항께 읽었습니다. 나중엔 영화도 함께 보았지요. 딸아이도 저도, 물론 각기 다른 감각에서지만, 많은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꽤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엊그제 우연히 딸아이의 서가에 여전히 꽂혀 있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다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저는 제 인생의 오랜 화두였던 이른바 "대칭성/양면성의 사유"를 거의 마무리하고 제 의료적 실천에까지 결합하는 crucial한 경험을 했으므로, 아무래도 책을 읽는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읽을 때와는 달리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앞뒤 문맥을 살피면서, 아, 하긴, 군데군데 재미에 이끌려 쏜살같이 나아가기도 했지만^^, 천천히 깊이 읽게 되더군요. 사실, 사회 상식으로 보아 이 나이에 이른 어른이 어찌 됐든 (아이들이 읽는) 만화책을 붙들고 음미 씩이나 하면서 읽는다는 게 희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은 어디에도 깃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미야자키 하야오라면.......  

2. 인간의 절제할 수 없는 탐욕이 빚어낸 폐허, 그럼에도 거기서 살아남은 자들의 삶은, 또 다시, 아니, 여전히 그 무절제한 탐욕의 스펙트럼으로 발산되어 폐허의 폐허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되고, 그 길에서 나우시카라는 어린 소녀가 불가사의한 힘으로 생명의 본령을 지키는 흐름을 이끌어낸다, 뭐, 이런 이야기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흥미진진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적절한 문맥에서 적절한 깊이로 표현되는 삶에 대한 통찰과 철학적 깨달음이 대가란 다만 재주만 가지고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명해줍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심취하면서 책을 읽는구나, 하면서 문득 딸아이 기색을 살폈더니, 예상대로, 아빠, 그렇게나 재밌수?, 이런 질문이 두 눈에 써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밖에서 저녁 식사하고 걸어 집으로 들어올 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다시 읽으니 참으로 예사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어떤 측면에서? 

-흠, 지난 번 아빠가 너희 학교 가서 학부모 특강할 때 말한 것 기억나지? 세계는 대칭성으로 되어 있다, 생각도 그리 해야 한다, 그게 왜 논리와 심리에 중요하냐, 뭐 그런 얘기 말야. 

-응. 근데?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다시 읽었더니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 진실에 이미 정통해 있더라구. 그래서 과연 고수가 맞다, 무릎을 쳤다니까. 

-흠. 그래? 어떻게? 

제가 딸아이에게 전해준 내용은 이러합니다. 마지막 슈와의 무덤에서 순수 빛으로 세상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또 다른 탐욕을 지닌 "기술자" 신(神)과 대면할 때의 대화. 

-너희는 위험한 어둠이다. 생명은 빛이야! 

-아니, 생명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다!(제7권 201쪽)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지요. 이에 대해, 방금, 나우시카 때문에 대오각성한 토르메키아 왕이 게송을 읊어 화답합니다. 

-마음에 들었어. 너는 파괴와 자비의 혼돈이다!(제7권 212쪽) 

3. 저는 이 대목에서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한 부분을 떠올립니다. 세번째 장, 아연 중에 나오지요. 

".......부드럽고 예민하며 산(酸)에 고분고분해서 한 입에 먹히는 아연도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에는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충돌하는 두 가지 철학적 결론을 일끌어낼 수 있다. 악에서 지켜주는 보호막 같은 순수함에 대한 찬미와, 변화를 일으켜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불순함에 대한 찬미가 그 둘이다. 나는 메스꺼울 정도로 도덕주의적인 첫째 것을 버리고, 내 맘에 드는 둘째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꾸물거리고 있었다.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이, 불순물 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잘 알고 있듯이, 땅도 무엇을 키워내려면 그래야 한다.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겨자가 있어야 한다. 파시즘은 이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하기까지 한다....... 얼룩 하나 없는 미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게 존재한다면 정말 혐오스러울 것이다......."(51-52쪽)       

만화가가 그려낸 세계의 실상이나, 화학자이자 문학가가 깨달은 세계의 실상이나, 醫者가 알아차린 세계의 실상이나, 결국, 참으로 그러하다면, 일치하는 게 이치겠지요. 대칭을 이루는 모순이 다양한 역설을 빚어내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의 장관이며 파노라마, 특히 생명입니다. 타인을, 어둠을 악이라 몰아세우고, 자신만의, 빛만의 제국을 건설하겠다고 나서는 무리들이 유난히 준동하고 있는 우리사회 현실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 때, 저들에게 이 만화를 권하면 사탄이라  저주하겠지요?^^ 하지만 분명히 말해 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소녀 나우시카는 저들을 "그림자"(제7권 196쪽)라 했습니다. 과연 그렇지 않나요?   

4. 딸아이가 제 말을 어디까지 이해했을까, 그리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그 아이 삶의 몫 만큼 깨달아 나아가겠지요. 이 아비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다시 읽듯 그 아이도 다시 읽으며 자신과 사회의 그림자가 아닌, 참 주체로 살아가기를 빌면서, 나우시카의 얼굴에는 제 딸아이 얼굴을, 프리모 레비 얼굴에는 제 얼굴을 겹쳐서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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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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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수아비 춤>의 조정래 작가와 <강남몽>의 황석영 작가는 모두 1943년생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정래 작가가 훨씬 윗 연배라는 느낌을 줍니다. 사회적 행동 양식이나 문학 스타일의 차이와 관련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저 혼자 생각입니다만.  

아주 사소한 이야기지만 <허수아비 춤>과 <강남몽>의 책 느낌도 그런 차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얼핏 보면 전자가 더 길어 보이지요. 두툼하거든요. 그러나 책과 활자의  크기, 활자 간격, 행 간격 등을 따져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차이는 출판사가 만들어낸 것이므로 우연일 테지요. 그러나 전자가 날카로울 때라도 날렵하지는 않은 것처럼 후자는 유장할 때라도 중후하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우연이라고 넘겨버릴 일만은 아닙니다. 

게다가 조정래, 하면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대하소설을 대뜸 떠올리게 되니 사유 양식 자체가 어째 diachronic할 것 같고, 황석영, 하면 <장길산>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어째 사유 양식 자체가 synchronic할 것 같지요. 허나 여기선 <허수아비 춤>이 오히려 synchronic하고 <강남몽>이 diachronic합니다. 어쨌거나 두 책을 연거푸, 또는 묶어 읽으면 대한민국 역사적 맥락과 사회구조적 지평의 집장태(集藏態)를 단박에 그려 볼 수 있습니다.  

2. <강남몽>은 박선녀, 그리고 길든 짧든, 깊든 얕든,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각각 어떤 경로를 밟아 강남으로 흘러들어 왔는지 날렵하면서도 유장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앞잡이로 시작해 군정과 독재정권을 거치며 토실한 재력가로 자리를 잡아가는 대성백화점 김진의 이야기가 그 중 압권인데요. 그의 개인사가 우리나라 근현대정치사, 특히 지배층형성사를 압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읽는 동안, <허수아비 춤>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우울감이 엄습하는 통에 몇 번 책을 내려놓기도 했습니다. 뭐, 그리 투철한 민족주의자나  애국자는 아니지만, 민주투사는 더욱 못되지만, 식민지 논리가 갈수록 공고하게 사회 전반을 제압해 가는 과정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일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던 탓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준동하는 김진류의 사람들, 그들이 곧 <허수아비 춤>의 주인공들이므로, 감정의 범람을 억제하기 힘든 독서가 되어버린 셈입니다.  

김진을 둘러싼 김창수, 이희철, 그리고 그들의 동선과 맞물리는 사건에 따라 명멸하는 다양한 어둠의 종족들, 심지어 박정희, 김종필, 뭐 이런 대한민국 현대사를 복마전으로 만든 邪派 고수들까지 실명으로 거론하면서 격정의 불을 지피는 저 '황구라'의 입담은, 그러나, 두 점 사이에 직선을 긋듯 날렵하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을 듯한 대목에서 속절없는 한 문장으로 긑이 나기도 하지요. 때로는 여백미학으로 느껴지고, 때로는 뒷심이 달리나, 이런 의문이 남습니다.  

강남을 말할 때, 사실, 부동산 투기와 '룸쌀롱' 낀 조폭 빼면 임현식 빠진 <허준>이고  이희도 빠진 <동이>지요. 뭔, 조폭 얘기가 이리도 길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신동아 쪽에서 표절 시비를 걸어와 좀 시끄러워진 모양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지하(地下)적' 본질을 가진 시공간으로서 강남을 일으키고 기르는 데 정치가 기여하는 바는 가히 전지전능에 가깝습니다.  이 점에서 윤무혁의 <강남몽>은 윤성훈의 <허수아비 춤>과 다릅니다. 진실이 달라서가 아니라 어디를 돋을새김 하느냐, 하는 문제겠지요. 

3.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붙잡는 두 여인, 박선녀, 임정아. 비슷하고도 다릅니다. 각자의 꿈을 지니고 변두리에서 흘러들어와  강남의 '바벨탑' 대성백화점, 그것도 그 붕괴현장, 생사를 넘나드는 경계에서 맞닥뜨리게 되었지만, 전자는 이미 강남 사모님이고 후자는 아직 풋나기 점원입니다. 전자는 끝내 죽었고 후자는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작가가 가장 명징한 마음결로 펜끝을 움직였을 대목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이 또한, 저 혼자 생각입니다만.  

"....... 

 -앞으로 꼭 하구 싶은 게 뭐야?  

 -돈 벌어서 내 동생 전동휠체어 사줄 거예요. 

 -그게 비싼가? 

 -엄청 비싸죠. 집두 이사가야 해요. 평지에다 공원 근처에 이사가면 순아를 데리고 나갈 수도 있고....... 

 -그래. 그거 내가 다 해줄 수 있어. 

 박선녀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임정아는 머릿속으로 그리던 그림들을 지워버리고 말을 끊었다. 

 -나 재력이 있는 사람야. 근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박선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임정아가 천천히 말했다.  

 -내 동생 휠체어를 왜 사모님이 사주죠? 그러구 집두요. 저는 임시직인데요. 우리 부모님은 시골서 올라와서 여태껏 일만 죽도록 하구두 산동네를 못벗어났지요. 

 -그러니까 앞으론 잘살아야지. 

 -그렇지만....... 

 정아는 이어서 단호하게 말했다. 

 -사모님이 다 해줄 수 있단 말씀 다신 하지 마세요."(337-338쪽) 

이 대목에 이르러 허리를 곧추 세우고 생각을 맑게 하면, 강남으로 흘러들어온 모든 사람들은 딱 두 부류로 나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임정아, 그리고 그 외. 오직 임정아만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내 동생 휠체어를 왜 사모님이 사주죠?"

우리의 뼈에 대고 긋는 비수 소리 같은 질문입니다. 그 질문을 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지닌 사람만이 살아 남는다, 아니 살아 남아야한다. 그런 질문을 할 수 없는 삶의 자세를 지닌 사람 (모두를 상징하는) 박선녀는 살아 남지 못한다, 아니 살아 남지 못해야 한다. 그게 작가의 음성 아닐까요.  

4. 오년 가까이 환우들과 고락을 함께한 제 일터가, 하필 옛 삼풍백화점 자리 발치에 있습니다. 수없이 그 앞을 오가면서 묻지 않았던 질문인데 <강남몽>을 내려놓으며 문득 던져 봅니다. 

"나는 과연 임정아처럼 이 서초동에 들어선 것일까?" 

저는 곧 이 서초동을 떠납니다. 다시 스스로 묻습니다. 

"너는 죽어서 떠나는가, 살아서 떠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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