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치유전선(0) 못된 정권 재벌 언론 종교, 거기 중독된 하수인이 사회 전반에 우울증이란 독극물을 살포하고 있다. 얼굴 가린 제노사이드! 이제 치유전선을 구축할 때다. 살아남아야 내일을 꿈꿀 수 있으니까. 각자 치유 위치로!


우울증 치유전선(1) 근본으로 삼아 우선해야 할 일이 우울증에 빠진 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공감하고 맞장구쳐주는 거다. 무조건, 그래 맞아, 말해주라. 다독다독 해주라. 자신과 심정적 정서적 연대부터 이루어야 한다. 콧날 시큰하게!


우울증 치유전선(2) 물론 힘차고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내면의 힘을 다 빼앗겨 우울한 거다. 그러니 힘내야 한다고 다그치지 마라. 온정에 기대지도 마라. 내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맑은 이성으로 곡절을 생각하라. 현실에 발 디뎌라. 담담히!


우울증 치유전선(3) 내 삶에 왜 우울증이 들어왔나 묻지 마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렸으면, 이제 넉넉하게 받아들여라. 이 슬픔 고통을 내 삶의 소중한 일부로 감싸 안아라. 고마워하라. 감성과 이성을 선한 의지로 품어 들여라. 듬직하게!


우울증 치유전선(4) 우울증 물살 타는 사람은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마음은 솟구치려하는데 몸이 가라앉는다. 거듭되면 미리 체념하는 습관이 생긴다. 이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 여기가 고비다. 으라차차!


우울증 치유전선(5) 나의 오늘은 어제가 빚은 거다. 어제 나를 슬프게 했던 일과 직면하라. 하나하나 마주세우라. 세밀하게 기억하라. 거기 들러붙은 감정을 생생하게 다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 여기부터 옹골찬 시작이다. 뚜벅뚜벅!


우울증 치유전선(6) 오늘 나는 우울의 늪에 푹 빠져 있다. 허나 그게 다라면 나는 이미 죽었다. 나를 이 순간 살아 있게 하는 정반대 진실이 있다. 내 생명의 굳건한 가치, 존재의 환희 말이다. 그걸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라. 사무치게!


우울증 치유전선(7) 이렇듯 내 생명은 대칭성 안에 있다. 우울과 환희, 불행과 행복, 절망과 희망. 서로 모순된, 마주선 진실을 한꺼번에 보라. 하나만, 부분만 보아서 아픈 거니까. 전체를 끌어안고, 크게, 깊게, 천천히 숨 쉬라. 고래처럼!


우울증 치유전선(8) 그러나 대칭성은 찰나마다 깨진다. 모순끼리 경계에서 만나 관통하고 흡수한다. 우울한 사람은 자학을 주고 자긍을 받는다. 자만에 찬 사람은 자기애를 주고 겸허를 받는다. 미련 없이 주고 흔쾌히 받는다. 화쟁이다. 속이 다 후련한!


우울증 치유전선(9) 서로 자발적으로 깨져서 화쟁하는 대칭은 자유자재를 꽃피운다. 모순을 가로지른다. 역설의 판을 경이롭게 빚어낸다. 걸릴 게 없다. 원효가 무애 춤을 추듯 논다. 우울한들 어떠며 기쁜들 어떠랴. 다 지나간다. 신난다. 울라울라!


우울증 치유전선(10) 삶의 모든 술렁임은 고요의 품에 있다. 모든 고요는 술렁임에 업혀 잠든다. 이 고요술렁(靜中動)의 절묘한 평화. 내가 깃들 집이 여기다. 내가 흐를 강이 여기다. 우울과 환희가 뭐 다르랴. 그저 그렇게 그러하다. 그냥! 


우울증 치유전선(00) 고요술렁이 고르게 번져가는 세상. 거기, 어제 그 해가 여전히 뜬다.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밥 먹고, 일하고, 놀고, 잔다. 권력은 다소곳하고, 시민은 느긋하다. 살포된 우울은 더 이상 없다. 그뿐이다. 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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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글쓰기에서 멀어졌던 시간 동안 트위터 글쓰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쓴 140자 글 모음 일부를 올립니다. 

 

마음병 로드맵(1) 모든 마음병의 진원, 그 둥근 경계에는 공포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공포와 불안은 인간 존재의 숙명적 표지다. 無에서 有로 빚어지는 찰나 엄습하는 최초의 감정이자 에너지다. 공포는 有의 느낌을, 불안은 無의 느낌을 반영한다.


마음병 로드맵(2) 공포는 특정 경험을 해석적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불안은 그 기억을 일반화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일부/개체의 공포는 전부/전체의 불안으로 확산된다. 이 공포와 불안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마음병은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마음병 로드맵(3) 공포와 불안을 피하는 병적 반응은 시간의 맥락과 공간의 지평, 두 축으로 전개된다. 시간의 맥락은 항상성(常)의 문제다. 즉, 변할 거냐 말 거냐 하는 문제다. 공간의 지평은 경계성(我)의 문제다. 즉, 나냐 남이냐 하는 문제다. 


마음병 로드맵(4) 공포와 불안을 피하려고 시간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면 [강박]의 길로 간다. 규칙과 반복 뒤에 숨는 것이다. 변화를 극단적으로 긍정하면 [전환]의 길로 간다. 일탈과 즉흥 뒤에 숨는 것이다.


마음병 로드맵(5) 공포와 불안을 피하려고 공간의 지평에 세운 자아경계를 극단적으로 긍정하면 [분열]의 길로 간다. 자아의 성에 고립되는 것이다. 자아경계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면 [우울]의 길로 간다. 자아를 송두리째 해체하는 것이다.


마음병 로드맵(6) 마음병을 이렇게 한눈에 보는 발상은 苦, 無常, 無我를 설파한 세존의 가르침과 포개진다. 물론 원효의 一心, 和諍, 無碍 길이 그 사유를 넘어서고 치유까지 완성했다. 잡다한 미국식 정신의학으로는 당최 접근 불가능하다.


마음병 로드맵(7) 마음병도 결국은 생명 안에서 일어난다. 다만 생명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일부를 부득불 도입하기에 병이라 이름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울증은 가장 깊고 독한 마음병이다. 죽음을 단도직입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마음병 로드맵(8) 깊고 독해서 죽음과 도저한 상면을 하는 바로 그만큼 우울증은 세상 이치를 꿰뚫는 비수가 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관문이 될 수 있다. 無에서 有로, 다시 無로 가는 차원변이의 칼날 위에 선 역설미학이다.


마음병 로드맵(9) 대한민국은 우울공화국이다. 깊고 푸른 절망이 드리워져 있다. 바.로. 그.래.서. 희망이 엄존한다. 매판의 야차들이 죽음을 들이밀 때 그 죽음을 품어 안고 절망을 꿰뚫어 간다. 피눈물로 역설의 자유를 연다.


마음병 로드맵(10) 죽음은 다만 병의 귀착점이 아니다. 죽음은 병의 소실점이기도 하다. 마음병이 번져갈 때 죽음을 피하려 함으로써 죽음을 문제 중심에 놓지 마라. 마음병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치를 깨닫게 하는 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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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 테라피 - 심장의 속도로 걸어온 천일간의 치유 여행
권혁란 지음 / 휴(休)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저자는 제주도 법환 포구에 카페 나비오리를 차려 놓고 함초롬히 살고 있습니다. 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을 4년째 하고 있는 강정마을 응원차 침놓으러 갔다가 잠시 들려 저자한테서 직접 책을 받았습니다. 처음 보았는데 아주 오랜 친구 같은 느낌을 받은 매우 드문 느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이와 현자가 공존하는 매혹이랄까....... 해맑은 웃음과 부끄러움의 표시로 혀를 쏙 내미는 행동은 천상 소녀입니다. 꾸밈없이 붙여오는 말과  그 울림은 필경 현자입니다. 한 시간 남짓 머물다 왔는데 여운이 오래 남아 있습니다.  

삶이 송두리째 암흑으로 곤두박질치는 시공에서 출발한 치유의 여로. 다양한 형태와 내용의 여행을 통해 저자는 상처를 아물리고 삶의 결을 다시 세워 갑니다. 치유를 넘어선 깨침이 있습니다. 하여 저는 이 책을 내려놓으며 여행(旅行)이 곧 수행(修行)이란 표현이 더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여행이야말로 저자의 삶의 고갱이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고행처럼 행한 여행을 정리하며 저자는 한라산 자락 나지막한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책 제7장, 나를 부르는 숲 부분에서 나오는 한국 최초의 여성 에베레스트 대장 남난희의 말로 대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칠십육일 동안 내내 한겨울 백두대간을 혼자 걸었다. 그때가 스물일곱. 세상은 놀랐고 나는 울었다.  여자 나이 스물아홉에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강가푸르나 봉에 올랐다. 세상은 놀랐고 나는 외로웠다. 삼십대 한가운데서 욕망의 산을 내려왔다. 지리산에서 차 향기를 나누고 조양강에서 자연학교를 꾸렸다. 이제 화개골에서 찻잎을 따고 된장을 쑤니 낮은 곳의 편안함이 너무 고맙다. 

남난희의 책 제목이 <낮은 산이 낫다>라고 합니다. 이는 저 붓다의 회향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권혁란도 십분 공감했을 테지요. 인제 그 또한 제주의 오름을 흐르며 남난희의 이런 삶으로 가겠지요. 

언제부턴가 나의 삶은 아무것도 가지고 싶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또 어느 곳도 가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게 되었다. 풀기가 다 빠진 풀처럼 가벼운 마음이다. 참 좋다. 

이는 저 붓다의 닙바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권혁란도 십분 공감했을  테지요. 한라산 노지 소주 한 잔을 부딪치며 온 몸으로 웃던 그 웃음이 왈칵 그리워집니다. 섬세한 수다(!) 갈피마다 들꽃처럼 피어있는 깨달음 가운데 제 영혼을 길게 끌어당긴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걸어가는 풍경 속으로 휘익, 휘익, 계절이 지나간다.

그러니 살면서 잠시 마주친 사람에게, 한때 사랑한 사람에게 '당신에게 나는 무엇이냐'고 소리쳐 물을 필요가 없었던 것을. 당신에게 나는 한때 봄이었고, 가을이었고, 겨울이기도 했을 테니. 또한 한때 웃음이었고, 눈물이었고, 사랑이었고, 애인이었을 테니.

그저 '고마워요'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었을 것을. 

그렇네요, 그렇습니다.  여행이 그렇듯 인생도 지나갑니다. 계절이 그렇듯 사람도 지나갑니다. 눈물도 웃음도....... 이 시각 권혁란이 무슨 일로 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시각엔 웃을 것이니 괜찮습니다.  

이 책 한 권 들고 훌쩍 떠나 나비오리 앉아 있는 저자를 만나러 가 보는 것,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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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2011-10-19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원장님
우연히 서평을 읽다가 원장님 블로그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히 잘 읽어보았습니다.
저도 한의학도인데요...^^
상한론에 관심이 많습니다. 상한론 공부를 어떻게 하셨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여쭈고자 합니다. 상한론도 책이 너무 많아서 어떤책들을 읽어야할지 막막합니다.
gollax@hanmail.net로 글을 주시거나, 번거로우시면 여기아래 댓글에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늘 건승하시고 행복하세요~
꾸벅^^
 

 

5개월에 걸쳐 <중용>을 읽었습니다. 본디 이 중용 읽기는 2008년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제 딸아이와 함께 소박하게 시작한 것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림 그리기 수준인 아이 한자 쓰기부터 시작해서 간단한 낱말풀이, 문장의 기본 뜻, 오늘 우리에게 주는 간결한 메시지 정도로 공부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읽어가면서 뚜렷하게 깨닫게 된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오해하건 간에, 이 고대 텍스트는 정치적인 지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촛불정국이 형성되어 온 나라가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하여 원칙적이나마 사회정치적 지평에서 <중용>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매우 강하게, 직설적으로 현실 정치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그 내용을 공개적으로 게시했습니다.  

 

사단이 안 생길 리 없지요. 결국 현실 정치 문제를 언급한 부분 모두를 잘라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연히 내용이 이상해졌지요. 그것을 방치해두었다가 작년 10월부터 다시 들여다보면서 고쳐 쓰고, 현실 정치에 대한 언급을 그나마 부드럽고, 모호하게 해서 복원시켰습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각인된 두려움과 맞서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자기검열의 힘, 대단히 무서운 것이더군요. 하여 뒤로 갈수록 미루어지면서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러버렸습니다. 이제 그 동안 해 온 독서를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특별하게 더 강조할 무엇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용이 그러하듯 우리의 끝맺음도 평범할 것입니다. 중용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평등하게 서로 소통함으로써 다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일상적 실천입니다. 우리의 중용이 특별한 경지에 있기 때문에 시대의 어두움을 걷어내는 함성이 되는 게 아닙니다. 저 어둠이 우리의 소통과 공감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순을 꿈꾸는 게 아닙니다. 저들이 한사코 우리 위에 군림하고자 해서, 그리는 못한다, 바로잡을 따름입니다. 딱, 그뿐입니다.  

 

부디 이 작은 독서가 벗들에게 대승적 자아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일어난 자각이 우리사회의 질곡을 걷어내는 데 보탬이 된다면 <중용>은 우리의 <중용>일 것입니다. 물론 바로 그게 중용의 도일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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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장 본문입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 君子愼其獨也.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道에서는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道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그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아니하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숨은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미세한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상태를 ('속'이라는 의미로서) 중(中)이라 하고 나타나서 모두 절도에 맞게 된 상태를 화(和)라 한다. 中이란 천하의 큰 뿌리이고 和란 천하에 통하는 도리이다. 中과 和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  

 

2. 제1장은 주희가 썼다고 합니다. 처음엔 어기와 내용의 기획성을 보고 그냥 후대의 편집 의도 때문에 선두에 놓인 것이라 추정했는데 나중에 대가들의 주석을 보니 주희 작품이라는군요. 그리고 주석들은 대부분 문장의 웅혼함과 압축미에 찬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제압 효과를 염두에 두고 주희는 깊은 고뇌 끝에 이 부분을 <중용> 텍스트의 도론(導論)이자 당당한 본문 제1장으로 배치했을 것입니다.  

 

주희의 의도대로 제1장부터 읽으면 <중용>은 주희의 독법으로 읽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그 의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맨 뒤로 돌리면 전혀 다른 독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부족하나마 우리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관성을 유지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면 당최 주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3. 제1장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마치 <중용> 전체의 대미(大尾)인 제33장을 요약, 선취(先取)한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性과 道와 敎를 정교한 논리 관계로 제시하여 중용에 단도직입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性과 道와 敎를 수직적 구조로 선명하게 구획함으로써 중용을 중세적 신분 질서 속에서 파악하도록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천(上天)의 작용은 소리가 없고 냄새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라고 한 제33장의 대승(大乘)적 결론을 비틀고 깎아서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愼其獨也)"는 소승(小乘)적 결론으로 축소해버렸습니다. 홀로 있을 때 조심하는 것은 중용의 개별적 성찰이자 전 사회적 실천의 발단입니다. 물론 불가결한 고갱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결론으로 삼을 수는 없지요. 이 일은 작정하고 그리 한 것이 아니라면 삼척동자도 하지 않을 짓입니다.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후대 아류들은 신독(愼獨)을 선비의 최고 덕목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愼獨은 백성과 쌍방향 소통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거늘!  

 

뒷부분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중용을 말하는 텍스트의 도론(導論)에 아예 대놓고 중화(中和)로 못을 쳐버립니다.  후대 사람들이 아무리 中和와 중용을 일치시키려 애를 써도 주희가 구태여 中和란 용어를 쓴 연유를 알지 못하는 한 허깨비 놀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희의 중용은 그의 중화입니다. 중화는 中을 중세적 관료주의 틀 안에서 실천하는 것(和)입니다. 아니 和는 中을 관철시키기 위한 중세적 관료주의 시스템(節) 자체를 가리킵니다.  中은 천자(天子)이자 중화(中華)적 질서입니다.  

 

그 끈질긴 명사적 어법! 게다가 그 '자랑스런' 이기(理氣)와 체용(體用)의 이분법!  

 

최후로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中과 和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그야말로 초안정 시스템입니다. 하늘과 땅은 그저  제자리를 지킵니다(位)! 만물도 中의 뜻대로 사육됩니다(育)! 우리는 맨 마지막 문장에도 주희의 주도면밀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이 빚어짐, 즉 화(化)를 빼버리고 育만을 남긴 것은 변화를 불온하게 여기는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4. 우리는 제1장을 제33장 뒤에 읽음으로써  이런 자유, 이런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사회정치적 헤게모니 블록이 제공한 인지(認知) 도식(scheme)에 갇혀 사고하면 결국 그들이 기획하는 그들만의 안정체제 안에서 꼼짝 없이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중용>은 주희로 말미암아 공자의 손을 떠났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중용>을 주희의 손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제를 안고 <중용>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한국 사회를 사는 우리가 말하는 중용은 무엇일까요? 직접적인 답을  뒤로 미루고 최근 마주한 에피소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답이 자명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헤게모니블록의 핵심에서 방사능 위험성을 퍼뜨리는 '좌빨'이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 흘러나왔지요. 그들은 대체 뭐가 무서운 걸까요? 그들에게 주희의 中和를 들이밀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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