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대승철학
김형효 지음 / 소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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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2010년 5월, 대한불교진흥원과 원효학술상운영위원회가 제정한 원효학술상 교수 부문 대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원효사상에 워낙 깊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게 되었습니다. 일언이폐지하면 "꽝"입니다. 그러면 왜 "꽝"인 책에 입을 대는가?  

원효는 우리 사상사에 우뚝 솟은 가장 높은 봉우리입니다. 아니 세계 불교사, 사상사에서도 그렇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비극이 생겼습니다. 높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연구하는 이가 드뭅니다. 연구하는 이가 드물기 때문에 이런 책으로도 학술대상을 받습니다. 이런 책이 학술대상을 받기 때문에 원효사상은 자꾸 오독됩니다. 그것이 안타까워 입을 댑니다. 

2. 저자는 원효의 사상을 대승철학이라 하고 동시적 이중성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핵심 사유로 인식합니다. 큰 틀에서 특별히 문제 삼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 타당성의 확보가 있었음에도 저자의 연구는 원효를 심하게 오독했습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원효의 이중부정을 불철저하게 독해함으로써 전체성을 훼손했습니다. 이것은 김상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입니다. 원효의 이중부정은 공시적synchronic 측면과 통시적diachronic 측면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깁니다. 

그 공시적 측면은 모두 다 압니다. 쌍방향 부정이지요. 가령 有와 無가 대칭성을 이룰 때 이를 동시에 쌍방향으로 부정하면 非有非無가 되는 것입니다. 그 有無와 非有非無를 대칭시키면 원효 사상이 不二而不(守)一이 된다는 사실 쯤 누구도 모를 리 없습니다. 그것이 화쟁이며 그 화쟁이란 고갱이를 통해 원효의 대승사상이 펼쳐진다는 사실, 중요하지요. 그러나 이게 원효사상의 진경이 아니란 사실을 대부분 모르고 있습니다.  

有無와 非有非無를 다시 한 번 쌍방향 부정하는 통시적 측면의 이중부정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쌍방향 부정했다는 것은 꼭 한 번만 그리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부정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찰나 찰나 알아차리는 영원한 단속운동斷續運動입니다. 단속운동이기 때문에 이것은 분석된, 해체된, 그래서 그 때마다  특이점을 형성하는 사건입니다. 같은 유類의 단순 반복이 아닙니다. 늘 새로운, 경이로운 창조의 계기를 찰나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단박에 깨쳐 영원히 연속성을 보장 받는 결정론을 깨뜨리는 불연속의 확률론입니다. 깨침을 명사로 고정하지 않고 동사로 풀어놓습니다. 깨침을 개념의 세계에서 해방하여 살아 있는 현실의 세계로 돌려줍니다.  

원효가 이러한 거듭되는 쌍방향 부정으로 철저하게 구현하려는 바는 사이비 中道의 타파입니다. 사이비 중도는 중심에 안주하는 집착입니다. 그 중심을 평정심이라 하든, 해탈이라 하든, 돈오頓悟라 하든 거기에 머물러 있으려 하는 한 그것은 이미 권력입니다. 그 권력은 우리의 삶에서 역동적 시간성, 변화무쌍한 역사성을 거세하려는 어두운 힘입니다. 신화지요. 그 힘을 쥐고 놓지 않으려 권력은 자신의 자리를 경지境地라 일컫습니다. 그 경지에서 내려오지 않고 자리自利의 세계에 머물 뿐이면서도 스스로 부처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란 이타利他를 향해 경지에서 내려온, 절대 해체의 존재입니다. 그 내려옴, 그 해체가 바로 회향입니다. 회향은 평범함에 깃드는 것입니다. 이 평범함에 깃드는 것이 원효가 생각하고, 또 그 생각대로 살아낸 참된 중도입니다.  

참된 중도는, 그러므로, 자신의 경지를 버리고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꺼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선택이며, 가장자리로 나아가는 결단입니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시간과 역사의 요구에 감응response하여 자신을 흔들고 떨어 내던지는 일입니다. 혁명적 관통일 수도 있고 모성적 흡수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게 확률론적 삶입니다. 무애無碍입니다. 원효입니다!  

이런 진실에 도달하지 못함으로써 저자는 원효의 사상을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역사적 위상, 그가 살았던 시대 자체 또한 비틀어버렸습니다. 저자는 원효가 살았던 시대를 '흥융기'라 규정했습니다. '흥융할 때'와 '망할 때'를 대비시킨 것으로 보아 저자는 아마도 흥륭興隆을 생각한 듯합니다. 원효 시대를 그런 의미의 '흥융기'라 했다는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역사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라 중심으로 그 시대를 이해하는 역사철학에 터 잡고 있음을 드러낸 셈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원효를 바라본 결과 원효는 호국불교의 범주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의 대승 정신이 권력자들의 탐욕을 엄히 경계했다는, 무사지공無私至公이 강조되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원효의 위상이 신라의 사회정치적 요구 안에 있었음은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원효가 무열왕 김춘추의 사위였다는 정치적 의미는 그 어떤 원효 텍스트보다 저자 해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원효 텍스트를 맨 얼굴로 대하기 이전에 이미 자리잡은 통속한 선입견이 저자의 원효 이해 전반을 규정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을 저자가 정직하게 검토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랬다면 치밀하게 의도한 것일 테고 아니라면 철학자로서 자격이 없는 것일 테지요.  

앞서 저자가 흥륭의 의미를 가지고 흥융이란 용어를 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소한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일급 주류철학자이고 더군다나 원효를 연구해 최고상을 받은 지식인으로서 이런 실수를 범한다는 것은 참으로 수긍하기 어려운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 실수를 더 깊이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실수가 절묘한 전복의 메시지를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고자 합니다. 

저자가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통속적 사관에 터 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 '작은' 실수가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흥융은 興戎으로 '전쟁을 일으키다'는 뜻입니다! 원효의 시대는 '흥하여 매우 번성한' 때가 아니라 신라가 삼한의 백성을 도탄으로 몰아넣은 '전쟁을 일으킨' 때인 것입니다. 저자의 표현 그대로라면 탐욕스런 신라 권력자들이 일으킨 전쟁에 반대하여 일심-화쟁-무애의 사자후를 토한 게 바로 원효의 사상인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때려부수는 게 통일이 아니라는 부르짖음이 원효사상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를 때려부수기 위해 당나라를 끌어들이는 게 어찌하여 참된 통일이냐고 꾸짖는 것이 원효사상입니다. 삼한의 백성 모두를 아수라 지옥에 처박으면서 불국정토를 들먹이는 게 말이 되느냐고 질타한 게 원효사상입니다. 신라 권력자들, 그들과 야합한 당나라 유학파 승려, 지식인들이 내세우는 통일-전쟁-불국토의 도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포효가 다름아닌 일심-화쟁-무애입니다. 그래서 원효는, 저자의 이해와는 반대로, 그 시대 주류 승려와 전혀 다른 사상과 삶을 지닌 분입니다. 저자는 참으로 참람한 실수를 한 것입니다.  

저자의 실수, 아니 실패는 자신이 처한 현실 이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우 타당하게도 소유론적 혁명의 불가함을 말합니다. 그 대신 존재론적 혁명을 거론하면서 원효사상을 그 자리에 세웁니다. 여기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저자는 소유론적 지평에 서 있는 두 사상을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로 대비시킵니다. 물론 전자는 자본주의이고 후자는 사회주의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둘 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하지만 실제 저자의 의도는 사회주의 비판으로 현저하게 경도되어 있습니다. 그는 평등에 대한 요구가 실은 존재론적 차이를 거부하는 대등론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대등론은 극심한 '질투와 시샘'이라고 모독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이 '질투와 시샘'을 받는 존재론적 차이를 지닌 부류에 속하는 사람임을 드러내 보입니다. 글쎄요, 아무리 봐도 테리 이글턴이 저자를 질투하고 시샘할 것 같지 않은데요.......^^ 아무튼. 

이렇게 해서 저자는 자신의 위상과 철학을 원효의 그것과 은근히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원효사상이, 그 대승철학이 결국은 자본주의에 우호적인, 아니 그것을 격조 높게 옹호하는, 직관적 거대담론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결국 책의 말미에 대왕암과 석굴암을 일치시킨 통속한 성속일원론으로 원효와 무열왕의 일치를 환기시킴으로써 원효사상의 열쇳말인 이중부정마저 내다버리고 맙니다. 저자의 철학, 그 속살을  최후로 들켜버린 역설이지요, 무사지공無私至公?, 과연!  

3.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저는 저자와 이 책 내용을 비판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궁극적 관심은 원효사상입니다. 원효는 다만 1400년 전에 살았던 신라의 승려에서 그칠 존재가 아닙니다. 그는 전체 우리 역사와 정신의 고갱이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를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우리가 혼란과 위기에 빠져 있을 때,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특히 북한과 관련한 사회정치적 어려움에 놓여 있을 때, 원효의 사상과 실천을 제대로 되살려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회 전 분야에서 이런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 치유 상담에 이론으로나, 실천으로나 원효의 일심-화쟁-무애를 녹여내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원효에 관한 이런저런 접근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승원의 <원효>라는 소설을 가장 먼저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어떤 전문 연구보다 제대로 된 원효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공부가 깊습니다. 그리고 바릅니다.  

4. P.S.- 요즘 한국 불교의 위기론이 차분히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외한입니다만, 거시적 안목과 집중 직관의 탁월성을 자랑하던 전통적 대승불교가 통째로 흔들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목하 빠르게 떠오르는 대안으로 이른바 초기불교가 있습니다. 세존의 본디 가르침에 가장 가깝게 육박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흐름이지요. 이 부분에 관해 외람되나마 관견 한 자락을 펼쳐 볼까 합니다. 

제 생각에,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는 마치 고전 역학과 양자역학의 관계와 같습니다. 고전역학은 결정론적이고 후자는 확률론적입니다. 전자는 연속적 궤도를 말하고 후자는 불연속적 분포를 말합니다. 전자는 거시 구조를 말하고 후자는 미시 운동을 말합니다.  

폴 디랙이란 특별한 사람이 있습니다. 고전역학의 범주에 속하는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맞물리게 하여 디랙 방정식을 만든 사람이지요. 그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고 생각을 넓혀 나아가는 과정의 연장선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 바로 반anti물질입니다. 반물질의 발견으로 세계는 대칭성을 띤 구조, 그 구조의 자발적 파괴라는 운동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승불교는 연속적 마음을 말합니다. 초기불교는 찰나 찰나 알아차림을 말합니다. 대승불교는 날뛰는 마음의 고삐를 말합니다. 초기불교는 고삐를 뒤흔드는 마음을 말합니다. 대승불교는 직관론입니다. 초기불교는 해체론입니다.  

원효는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의 연결고리를 통해 큰 진실을 발견한 폴 디랙과 같은 존재입니다. 원효는 직관과 해체를 동시에 해냈습니다. 그의 거듭되는 이중부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심一心은 이문二門으로 해체됩니다. 이문은 다시 긍정->부정->거듭 부정으로 무한히 해체됩니다. 거듭 부정은 부정의 부정입니다.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은 부정不定입니다.  

부정不定이 무엇입니까. 비결정 상태입니다. 긍정의 무한 분절입니다. 바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정식화한 불확정성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부정의 부정은 부정 x 부정으로 마치 파동함수 Ψ의 절대값을 제곱하면(|ψ|²) 비결정성의 확률값이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원효에 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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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옹호하다 - 마르크스주의자의 무신론 비판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 모멘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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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이 쓴 책 이름이 <신을 옹호하다>라고? 책을 읽을까, 말까, 하는 고민 말고, 살까, 말까, 하는 고민을 할 때,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게 하는 의문입니다. 원제인 <REASON, FAITH, AND REVOLUTION: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에서 이런 제목을 뽑아낸 게 번역자인지 출판사인지 잘 모릅니다. 왜 그랬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여하튼, 이런 한글 제목은 몇 가지 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테리 이글턴, 이 인간 맛이 갔나, 이딴 글이나 쓰고 자빠졌어? 이런 반응 하나. 거봐, 마르크스주의자도 우리 '하나님'을 감싼다잖아! 이런 반응 하나. 그리고. 띠바, 그렇지 않아도 종교(기독교) 밥맛인데 심지어 사회주의자까지 나서서 거들어? 이런 반응 하나. 제목이 이렇지 않았으면 없었을 삽질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삽질이 책 판매부수를 늘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상업 마인드의 발로 아니었을까.......아무튼. 제목의 단호함이 테리 이글턴의 논쟁적 진심을 비틀어버린 것만은 분명합니다. 번역본 책 제목을 확정하기 전에 이 말 한 마디만 숙고했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이다."(122쪽) 

거부하지 않는다고 해서 곧 바로 옹호가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 삼척동자도 아는 바. 통속한 대립각이지요. (그나저나 여기 해독은 解讀일까요, 解毒일까요? 둘 다 말 되는데, 원어를 병기해 놓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무튼.  

전체 논지를 살펴볼 때 테리 이글턴이 이 책을 근본주의적이고 소아병적인 무신론자에 대항하여 통속 종교(기독교)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방어하기 위한 호교론으로 쓴 게 아님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그런 반대와 무시를 가능하게 한 조건과 토양을 조목조목 밝힘으로써 무엇이 참된 신 논의인가를 드러내려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책의 결론 부분에서 저자가 자신을 비극적인본주의자의 범주에 넣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저자가 종교-그에게는 기독교일 수밖에 없는-에 대하여 도치킨스와도 다르고 통속적 주류 기독교와도 다른 자기준거적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곳이 제1장 인간 쓰레기 부분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어떤 견지에서  보는가 하는 문제는 독자 각각의 몫이지만,  저자의 종교에 대한 생각을 편견 없이 정확히 이해하려면 제1장을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제1장에서 저자는 기독교 신학의 전반에 걸쳐 자신만의 관점을 그 어떤 신학자보다, 성직자보다 명쾌하고 기품있게 밝히고 있습니다.  

 * 신(하느님)은 초월적 제작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만물을 지탱해주는 존재이며, 모든 실체의 가능 조건이다.  

 * 세상이 無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과의 사슬을 뛰어넘은 선물로서 우주의 아찔한 우연성에 유의하란 뜻이다. 

 * 구원은 정치적 사랑으로서 굶주린 사람의 배를 채워주고, 이민자들을 환대하며, 아픈 이들을 찾아가 돌보고, 부자들의 횡포에서 가난한 사람과 고아와 미망인을 보호하는, 일상적 관계의 질을 높이는 문제다.  

 * 예수는 가혹한 죽음으로서 삶을 완성해내는, 격렬한 사랑, 자기부정의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형상이다. 그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인간쓰레기,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주춧돌로 쓰일 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매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처형당한 정치범이다. 그는 죽음의 격한 공포를 겪으면서도 철저하게 자기를 버림으로써 병든 사람, 장애를 지닌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되찾아주는 혁명적 실천의 전형이다. 

 * 하느님의 나라는 정권의 교체로 이루어지는 무엇이 아니다. 죽음과 공허, 광기, 상실, 그리고 헛수고를 폭풍처럼 거치는 격동적 과정이다. 엉망진창으로 뒤틀려 있는 세상에서 자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변화다. 

사실상 저자는 기독교를 준엄하게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재정의는 단순히 신학적 통찰에 의거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인간과 그의 삶 대한 인문학적 성찰에 터 잡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통찰의 핵심에는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가 자리하고 있지요.  

그가 말합니다.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는 한 입으로 양면을 동시에 말할 수 있다."(97쪽) 

한 입으로 양면을 동시에 말한다, 이것은 가장  고급한 사유 능력의 산물입니다. 천박한 양비론, 뭐 이런 유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저 원효 聖師의 일심이문(一心二門)에 육박하는 격조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통속적 주류 기독교와 도치킨스의 무신론을 동시에 논파하는 힘이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사상에서 나온 게 맞다면 이 책을 읽은 독자는 필경 뜻하지 않은 또 하나의 화두를 뜻하지 않게 들게 된 셈입니다.   

그가 다시 말합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과도 같은 이 말은 성실하고도 따뜻하며 감동적입니다. 

"오늘날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성모 마리아가 영혼과 육신을 모두 지닌 채 승천했다는 별스러운 믿음보다 더 상식에 벗어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왜 어떤 이들은 사람이 이성적이며 확실하다고 여기는 증거들에 맞서 아직도 이런 정치적 신념에 집착하는 걸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유는 사회주의가 워낙 훌륭한 사상이어서 사회주의 스스로의 자기파괴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버리게 만들기가 지극히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라고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사회주의라는 비전에서 물러서는 일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힘과 능력이라 여겨지는 것을 배신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울러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원초적인 확신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그 비전에는 우리 존재의 저 깊은 곳에 호소하여 열정적인 동의를 끌어내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고, 그걸 느끼지 못한다면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를 위한 사회주의의 이상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거기서 물러설 수 없고, 버리고 떠날 수도 없으며, 안 된다는 대답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161-162쪽)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런 톤의 말은 앞서 언급한 예수에 대한 그의 태도와 함께 하나의 유장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예수가 선포한 거룩하고 영광된 변모는 비난받고 더럽던 것이 약자에서 강자가 되고, 죽음이 삶으로, 고뇌가 영광으로 바뀔 때 일어난다. 그 과정을 가리키는 오랜 명칭은 비극이라기보다 희생이다. 이런 식으로 모퉁이돌이 주춧돌이 되는 되면서 옛 질서의 자투리와 찌꺼기로부터 새로운 질서가 구축된다. 못쓰게 돼버린 우리 세상을 포기할 각오가 되었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미래의 참된 삶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런 마음가짐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다. 우리는 그런 삶이 과연 가능한지.......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자기 비우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모든 증거가 불리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끝내 이기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실패에 대한 충실성이라 부를 만한 믿음의 태도를 견지할 때만 인간의 힘은 창조적이고 지속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한 현실주의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십자가에 못박는 극악하고 충격적이며 지긋지긋한 실재, 그 메두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에만 어떤 형태로든 부활이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냉정한 현실주의를 최후의 보루로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것은 감상주의에 사로잡힌 허튼소리거나 이데올로기적 환상, 가짜 유토피아, 거짓된 위안, 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상주의일 뿐임을 알아볼 때, 그제서야 최후의 보루가 결국은 최후의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질 수 있다."(42-43쪽)  

예수가 그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이루고자 한 새 질서, 즉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열정에 현실주의적 믿음이 필요한 것과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원초적인 확신의 실천에 사회주의적 헌신이 필요한 것의 본질적 일치를 읽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같은 이상은 우리가 최악의 것들을 직시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인간에 대한 긍정이 궁극적으로 가치 있으려면, .......인간이 애당초 구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무슨 생각으로 인간을 구역질나는 해충이라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긍정이어야 한다.......사회주의적인 것이든 기독교.......의 관점에 선 것이든 간에, 인간은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인 개조(혁명-필자)를 통해서만 바로 설 수 있다......."(217쪽) 

바로 이런 태도를 그는 비극적인본주의라 이름 합니다. 이 비극적인본주의가 신이 사회주의를 품는 둥지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통속적인 종교(기독교)도, 순진한 도치킨스도, 피상적 사회주의도 "스스로의 훌륭한 전통에 비추어 심판받아야"(177쪽) 진실의 전사로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통속적 종교(기독교)는 왜 "교회가 하느님의 무덤이자 묘실"(니체)인지, 어찌 하면 "기독교 세계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구해내는 일"(키이르케고르)을 할 수 있는지 준열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도치킨스는 "신화와 미신의 해로운 유산을 떨쳐내기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자신들의) 주장 자체가  신화"(216쪽)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인간의 내면과 초월.......의 세계를 직접 이어주는 핫라인"(213쪽)의 깊은 존재를 외면하는 무리들은 사회적 실천이 지니는 영성적 본질을 하루빨리 간파해야 합니다. 

세계를 바꾸는 힘, 즉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 개조는 성찰적 이성 없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성이 궁극은 아닙니다. 그 이성을 품어안은 사랑 없이 그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을 이끄는 동력이 믿음(신뢰)입니다. 바로 이 도저한 역동의 장(場)이 저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달입니다.  

요컨대 테리 이글턴이 이 책을 통해 드러낸 자신의 사상과 삶은 다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1) 현실주의(로서의 사회주의) 

(2) 비극적인본주의(로서의 사회주의) 

(3) 성찰적 이성을 바탕으로 한 신앙주의(로서의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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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6
송기원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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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원과의 만남은 문학 작품이 아닌(?) 그의 책 <뒷골목 기행>을 통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그 책 이전에 그의 시나 소설을 만난 것은 전혀 다른 체험이었던 셈이지요. 지금은 잊혀 진 책이지만 그 무렵 저는 그 책을 주위 사람들에게 열심히 권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 이후 송기원에 대한 관심은 깊은 차원으로 나아갔습니다. 

<뒷골목 기행>은 그야말로 뒷골목을 몸으로 겪은 아야기를 그대로 담은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몇 개의 에피소드가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지요. 목포 '히빠리마찌' 늙은 창녀 이야기, 부산 사창가로 흘러든 여대생 이야기 등. 송기원의 삶과 문학은, 인생여정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유치한 일이지만, 아니 에르노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민주화운동의 투사였던 그가 청산거사에게 선도 수련을 배우고 <청산>이란 소설을 내자 많은 사람들이 뭐라 했던 기억이 바로 어제 일 같습니다. 그리고 인도, 티벳 여행, 수련으로 그의 정수리 부분이 융기되어 모자를 쓰고 다녔던 이야기, <인도로 간 예수>란 소설.......문학과 삶이 한 몸으로 엉켜 뒹구는 연인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마지막 시집이라 선언한 <저녁>. 한달음에 읽고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한달음에 읽기를 거듭합니다. 이런 우문이 맴돕니다. 그는 왜 이런 시를 썼을까? 사실, 그가 썼다기보다 그에게 시들이 내려왔다고 해야할 테지만. 그가 책 머리에 '죽음을 힘들어하는 너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고 하니까 선뜻 '아, 그런 책이구나!'하기 쉽지만 제 느낌은 좀 다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라는 위로만도 아니고 죽음 자체마저 넘어서라는 초탈만도 아니고 생사를 가로지르는 무애자재만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숙명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지니는 질펀한, 그래서 애잔한, 더욱 황홀한 美感 또는 味感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그는 언제나 돌아옵니다.  

유일한 산문시인 장다리』가 그 회귀를 노래하는 절창입니다. 

 한달 내내 장다리만 바라본 적이 있다........젊은 주인 아낙네가 장다리 텃밭에서 하는 일은 아침저녁으로 장다리 꽃대 아래 시들어서 누렇게 시래기가 된 이파리만을 따주는 것이었다. 단 한 잎이라도 생생한 잎은 건드리지 않은 채 시든 이파리만 따는 주인아낙네의 행동이 나에게는 무슨 종교적인 의례처럼 경건하여서, 이를테면 장다리의 삶은 건들지 않고 죽음만 치워주는 무슨 장례식 같기도 했다. 그 무렵 나는 좀 더 나에게서 멀리 벗어나기 위해서 앉으나 서나 잠이 들거나 잠이 깨거나 해종일 형이상학적인 생각들에 몰두해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아침저녁으로 장다리의 장례식을 치르는 주인아낙네가 나에게는 히말라야에만 산다는 무슨 영적인 스승으로까지 여여졌다. 내가 숙소를 떠난 것은 장다리 장례식의 비밀을 알고 난 후였다. 해마다 8월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이듬해 5월 말에야 눈이 녹는 혹독한 기후 속에서, 그렇듯 춥고 긴 극빈의 겨우살이에 필요한 시래기를 한 잎이라도 더 거두기 위해서 모든 푸성귀를 키울 수 있는 한껏 장다리로 키운 것이었다.  장다리 장례식의 비밀을 알게 되자 한 달 동안 속절없이 황홀한 호사를 누렸던 내 눈만 바보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바보가 된 내 눈에는 아직도 활짝활짝 화려하게 피어 있는 꽃들이 어쩐지 장다리의 눈물들이 활짝활짝 매달린 것 같았다. 

이를 산문시 형태로  빚은 것 또한 그의 생명감각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본디 우리네 보통 사람의 삶이란 산문적이 아니던가요. 그가 <저녁>을  마지막 시집이라 한 것, 그 마지막 시집의 정수리에 이 산문시를 가만이 놓아둔 것, 모두가 그의 美感 또는 味感이 작동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모두 6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부의 마지막 시들은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다. 적어도 '죽음을 힘들어하는 너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고 한 뜻에 직접 머리 조아린 시들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죽음의 시들이 뛰노는 마당을 바라보며 씽긋 웃고 삶의 애틋함을 챙기는 엄마 같은 시들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앞에 인용한 제4부의 끝시장다리, 제2부의 끝시 『맨발』, 제6부의 끝 시 『밤바람 소리 세 편은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이 있습니다.  

우리시대의 좋은 스승인 모리 슈워츠의 마지막 메시지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살아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죽는 법을 알게 됩니다. 죽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됩니다.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언제라도 죽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송기원은 자기 인생의 깊은 저녁 무렵, 죽음을 말함으로써  밤으로 가는 삶의 여정을 더욱 살갑게 더욱 진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내려놓을수록 무거워지는, 애착할수록 가벼워지는 삶의 속살을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하게 겪은 그이기에 말입니다. 마지막 시 마지막 부분이 귓전에서 밤바람처럼 웅웅거립니다. 

"아득한 곳에서 홀로된 그대가 듣는 밤바람 소리 속에는 어머니와 누님을 부둥켜안은 내 목소리도 함께 섞여 있을는지요."  

아득한 곳에서 홀로된 그가 듣는 밤바람 소리 속에 네 살 이후 먼 타인이 된 어머니를 부둥켜안은 제 목소리도 함께 섞여 있을까요? 제가 이 <저녁>을 남다르게 읽는 까닭이 바로 이 질문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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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황진이
김탁환 지음, 백범영 그림 / 푸른역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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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우리 역사가 지속되는 한 끊임없는 재해석의 대상으로 남을 국보급 아이콘입니다. 그녀는 우리 사회가 건강함을 잃을수록 우리가 나아갈 바를 가리키는 '오래된 미래'로서 작동할 것입니다. 그녀의 아우라를 오늘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느끼는가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조건, 특히 문제적 조건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우리의 문제적 조건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녀는 재주 많은 기생 정도에서 당대를 준열히 꾸짖는 저항적 지성까지 다양한 전형으로 유동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를 해석하는 폭과 높낮이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녀 자체를 문제적 인간이 아닌 것으로 망가뜨리는 데까지 나갈 수 없음은 우리가 지켜야 할 예의입니다. 그녀가 아직도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는 것은 그녀의 바로 그 문제성 때문이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살았던  당시 조선은 건국 세력이 그 기득권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 결과들이 안정적으로(!) 나타나는 시기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종-인종-명종 삼대에 이르는 시기는 수구(守舊)의 절정이 정치경제적 모순을 극대화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임꺽정의 난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미구에 임진왜란의 대파국이 밀어닥칩니다. 

황진이의 스승 서경덕이 1546년까지 살았는데 임꺽정은 1561년에 죽임을 당했고 임진왜란은 1592년 일어났으니  시대의 어두움은 그야말로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질주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때 망국의 수도였던 송도에서 기생 노릇이나(!) 하던 한 여성 황진이.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일 무엇 하나  없어 보이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스승인 서경덕보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소설 속 허태휘)보다, 주리파 거두 퇴계 이황(1501-1570)보다  그녀가 훨씬 더 문제적입니다.

그녀의 삶은 내리 누르는 발을 치받고, 옭죄는 손을 비틀어 물리치고, 막아서는 벽을 뚫고 가로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항적 소통, 그 도저한 자유혼. 버림 받은 존재로서 버린 자들을 마주하고 품고 넘어서는 옹골찬  결기. 다만 문화적 담론에 가두기에는 그녀가 너무 큽니다. 그녀는 매우 정치경제학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황진이는 계속해서 우리 역사와 더불어 성장해 가야합니다. 

이런 점에서 김탁환의 해석은 성큼 한 걸음 내디딘 것으로 평가해 마땅합니다. 이른바 '서경덕 에콜'의 대모 지성으로 자리 매긴  것. 이는 물론 역사적 근거를 힘써 추적한 결과일 테지요. 제 느낌엔 아직도 '만주 벌판' 너른 땅이 더 남아 있습니다만 이것만으로도 거보임에 틀림 없습니다. 

바리데기와 황진이를 연결하는 여성사상 지평 열기에 힘을 쏟고 있는 저로서는  <나, 황진이> 문장 하나하나를 탱탱하게 만질 수 있어 좋습니다. 시와 산문의 맛이 절묘하게 어울린 문장은 마치 제가 웅얼거려만 놓고 못챙긴 말을 반듯하게 재현한 듯 소름이 돋습니다. 소설임에도 때때로 신영복 선생의 글과 '돌림'인 느낌도 납니다. 천천히 천천히 읽으니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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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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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 경우, 본디 시를 더 가까이하는 오랜 습관 때문에 소설은 '철 지난' 걸, 다른 경로를 통해 접하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아니 에르노라는 문제 작가 또한 김탁환의 <천년습작>을 통해 알게 되어 한꺼번에 몽땅-그래 봐야 절판된 게 많아 몇 권 안 되지만-사들고 들어와  일거에 다 읽어버린 예에 속합니다.    

참으로 '일거에' 읽었다는 표현이 맞고, 그리고, 깊은 신음을 토해냈습니다. 찰나에 저의 '인간'이, 삶이, 관통되는 데서 오는 웅숭깊은 통증의 울림이었지요. 아, 이런 사람, 이런 삶, 이런 글쓰기가 있구나!  타인의 마음을 만지면서 살아 온, 아니 그리 산답시고 어리바리 지내 온 醫者의 세월이 바람에 날리는 비닐봉지처럼 느껴지더군요. 어허, 이런.......   

2. 아니 에르노의 문학은 예술의 주류적 전통적 정의, 가령, 피카소의, "예술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거짓이다." 운운, 을 단박에 부숴버립니다. 이 때 거짓이라 함은 필경 예술가의 창조력을 신화적 僞惡으로 담은 표현일 것이므로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응수합니다.  

"일기를 감출 권리가 내겐 없다"  

그렇지요. <탐닉>은 <단순한 열정> 속의 삶이 진행되던 기간에 쓰여 진 아니 에르노의 일기이고, 그것을 가감 없이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문학의, 예술의 오랜 인습을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한 칼에 베어버린 것이지요. 예술가의 '감출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정직한 글쓰기의 지평선을 단도직입으로 열어버렸습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일단 아니 에르노의 말대로 감추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감추지 않는다는 것은 은폐나 미화, 또는 과소화나 과대화를 통해 자기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보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 중독과 편집의 한복판에 있는 자기를 방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어는 사랑의 탈을 쓴 학대, 이른바 '애지중지 학대'로서 도리어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방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를 죽도록 놓아두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내밀한, 小乘의 자기를 해체한다는 것입니다. 소승의 자기를 해체한다는 것은 大乘의 자기를 만드는 질적 전환을 기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아니 에르노의 구원을 위한 글쓰기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아니 에르노는 <칼 같은 글쓰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구원하고자 하는,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 그러나 우선 구원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 책들을 쓸 줄 모르기 때문(에).......난 존재들과 사물들을 대변하는 배우이자, 그것들이 존재하는 장소이며 그것들의 증인이기도 했습니다. 한 사회와 시간 속에서 그러한 존재들과 사물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구하는 것, 그래요, 난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동기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느낍니다. 나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방법도 바로 그렇게 얻어진다고 생각하고요. 하지만 내 자신에 대한 구원은.......글을 쓰면서 나라는 존재감을 상실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해체인 동시에 극단적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내면일기만으로는 나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면일기는 내가 살아온 순간들만 보전할 뿐이기 때문이죠." 

결국 정직한 글쓰기란 자기를 해체하고, 죽이는, "칼 같은" 글쓰기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베는 글쓰기는 여러 곳에서 죄책감의 결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는 통속하게 윤리적 차원에서 읽으면 안 됩니다. 아니 에르노가 삶의 과정에서 온 생명으로 받아들인 급진적, 페미니즘적 사유와 실천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여기서 죄책감이란 사회적 각성으로 빚어낸 대승적 자기로 하여금 소승적 자기를 보편적/집단적 가치의 지평으로 이끌어내게 하는 해방의 힘입니다. 결코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내면을 옥죄고 다그치는 억압의 힘이 아닙니다. 아니 에르노에게 죄책감은 "내밀한 것과 사회적인 것을 분리시키지 않"는 융합의 동력인 것이지요. 

이 독특한 죄책감은 결국 아니 에르노의 텍스트를, 아니, 아니 에르노 자신을 독자에게 넘겨줍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저자의 죽음(La mort de l'auteur)'을 대가로 확보하는 '상호텍스트성'입니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바, 

".......글쓰기의 총체적 존재.......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런 다양성이 결집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곳은.......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되지 않고 기록되는 공간이다.......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저자를 해체하면 독자가 창조됩니다. 이렇게 창조된 독자는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그 텍스트를 재창조합니다. 읽기와 쓰기의 분리선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글로 된 결과물을 남기느냐 아니냐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 지평융해를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글쓰기가 주는 기쁨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 뭔지 아세요? 누군가 내게 '당신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또는 '이 책은 바로 나예요.'라고 말할 때랍니다."

 물론 아니 에르노의 삶의 자리 또는 context가 독자 각각의 것과 같을 수 없습니다. 전혀! 그럼에도 이런 일치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 에르노가 스스로 저자의 죽음을 택함으로써 text를 자기 밖으로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대로 "text는 그 총체성 속에서 하나의 자율적 생명체"가 된 것이지요. 그렇게 해방된 text는 개인의 내밀한 경험을 보편적/집단적인 것으로 공유할 수 있게 하는 열린 '사건'이 됩니다.  text는 더 이상 고정된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무한한 변화를 일으키는, 하여 context들과 상호순환하는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니 에르노의 문학과 삶의 무한연쇄가 일어납니다. 바로 이게 그의 정직함이 담아내는 강렬한 힘입니다.  

 

3. <단순한 열정>으로 담아내지 못한 진실, “정제되지 않고 암울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어떤 제물 같은 무엇”을 전하기 위해 아니 에르노는 이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보면 <단순한 열정>과 <탐닉>은 그가 자기 신과 삶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데 기여한 완벽한 짝패라고 알 수 있겠군요. 어쩌면 딸과 어머니? 뭐, 아무튼.    

 

<단순한 열정>에 비해 <탐닉>은 확실히 정제되지 않아서 생명의 냄새를 날것으로 맡을 수 있습니다. 비린, 그리고 곰곰한 냄새들.......훨씬 더 아니 에르노의 감정선들이 질펀하게 드러나면서 독자들을 同調의 감흥으로 빨아들입니다.  

 

<단순한 열정>에서는 열정이, 여기서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절망/죽음의 감각이 탐닉의 이름으로 준동합니다. 그는 서문에서 애인인 S를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일으키는 절대적인 인물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다 각주를 붙이길, “젖먹이 어린이가 엄마와 떨어질 때 느끼는 공포감”이라 했습니다. 처음 읽을 때 마음을 찌르지 못한 각주였습니다. 아뿔싸! 과연 그렇구나, 이야기 전반을 꿰뚫고 흐르며 온통 마음을 흔들고 가는 공포와 불안이 거기에 젖줄을 대고 있다니! 수시로 흘리던 아니 에르노의 눈물을 이제야 전율로서 받아들일 수 있겠네요.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기다리고, 섹스하고, 글을 썼던 거였습니다.

 1988년 9월 27일 화요일,

"S......이 모든 아름다움."

이 비문(非文)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첫 문장, 이 비문. 그런데, 불과 7일 뒤,

"S와의 행복은 벌써 끝난 것인가?"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1990년 4월 9일에야 끝날 이야긴데 이미 예기불안은 벽두부터 섬뜩하게, 잔혹하게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지요. 두렵고 불안할수록 탐닉하고, 탐닉할수록 두렵고 불안하고.......이 지독한 악순환은 죽음의 무저갱으로 빨려들어 가고, 그 허무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글을 쓴다! 아니 에르노가 인류 최초로-흠, 이 정도 호들갑은 괜찮겠죠?^^-글쓰기와 섹스를, 목숨 건 노동이자 황홀한 유희라는 역설적 일치로 통합해냈군요. 으악(喝)!

 결국 아니 에르노에게 글쓰기는 단지 자신과 삶을 드러내기 위한 작업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글쓰기는 그 자신과 삶을 “걸작품으로 만들어 가는” 창조행위입니다. 필사적으로 글 쓴 만큼 열정을 다해 살아내고, 열정을 다해 살아낸 만큼 필사적으로 글 쓰는 상호 동력으로 한 생을 창조해 간 것이지요. 아, 어쩌면 이렇게도 單刀直入의 인간이, 인생이 가능할까요? 아, 어쩌면 이렇게도 단소정한(短小精悍)의 인간이, 인생이 가능할까요?  


4. 아니 에르노의 거울에 제 삶을 비추어 봅니다. 

 

나는, 내 인생은 單刀直入인가? 단소정한(短小精悍)인가? 물론 아니 에르노의 인간에, 인생에 나의 인간이, 인생이 一音으로 들어 있다. 그렇지만, 아니 그리하여, 나만의 context에서 나만의 글쓰기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아니 에르노와 겹치지만 온전히 포개지지 않는 나만의 “칼 같은” <탐닉>을 써내려가야 한다. 그게 아니 에르노를 읽은 사람이 할 일이다. 아니 에르노의 마지막 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제 그만 망설여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 무슨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 문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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